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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윤아
3화

그의 말은 이것이었다. 책주의 자식에게 황위를 넘기는 대신, 그다음 황제는 반드시 황정 자신의 혈통, 즉 황제의 손자들이 잇게 한다.
한마디로 황제의 자식 중 도저히 택할 자가 없을 때, 1대 정도 책주 가문에게 황좌를 맡기자는 얘기였다. 그리고 훗날 황실의 직계 혈통에게 다시 황위를 돌려주고. 허면 건국된 지 50년이 안 된 나라가 망할 일도, 황실의 위엄과 정통성이 떨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어차피 황정의 자식 중 누구에게 주어도 못 미더울 자리였다. 피땀 흘려 건국한 나라를 말아먹을 성정들이었다. 그도 아니면 형제간 살육을 일삼을 것이다. 그런 놈들에게 나라를 맡기느니 성품이 곧고 기량이 뛰어난 한에게 넘기는 것이 나았다.
‘아우야, 너 오늘 좀 쓸 만하다. 근데 그러다 책주 가문에서 아예 황위를 찬탈하려 든다면 어째? 네가 책임질래?’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사옵니다. 우선 황권을 강화하십시오. 또한 지금의 책주에게 약속을 받아 놓으시고요. 아무리 못난 자식이 태어난다 한들 선대의 약속을 뒤집어엎을 수 있겠사옵니까? 명분을 중요시하는 조정에서 그를 좌시할 일도 없을 것이옵니다. 신료들은 책주의 권한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나이다. 제 밥그릇 줄어드는 게 자명한 일이니. 그런 자들이 책주 가문의 탐욕을 두고 볼 리 없사옵니다.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옵니다.’
황제 정은 즉위 직후 황권을 강화하고 권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외척을 숙청했다.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더불어 태자를 제외한 황자와 황녀들의 권한을 뿌리 뽑아 불살랐다. 태자에 책봉된 황자 외엔 아무도 황위를 넘보지 못하도록. 누구도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도록. 오직 선대 황제의 직계 혈통만이 황위를 이을 수 있게 만든 것도 정통성과 권위를 위해서였다.
먼 친척이 황위를 잇는 일은 불가했다. 친한 아우들에게 이놈 저놈, 제 딴엔 애정 표현인 말을 하니 친근하게 보일 법도 하나 그는 포악하고 냉정했다. 검을 잡은 손끝은 망설임을 몰랐다.
훗날, 2대 황제에 서한이 즉위했다. 이후엔 다시 황실의 자손에게 황좌가 돌아갔다. 지난 삼백 년간 책사 가문에선 총 세 명의 황제가 나왔다. 선대에서 다져 놓은 기틀대로 황실과 책주는 함께 협력하며 나아갔다.
지금 조정과 황실에서 책주전을 지켜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황실의 대가 끊겼다. 황자 윤의 생사는 짙은 안개 속이다. 황제에게서 더 이상의 후사를 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허면 하나 남은 선택지는 책주전의 반아였다.
다들 여인이 어찌 황위에 오를 수 있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으나 선희를 보면 또 쉽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선희는 여인이라는 제약을 뚫고 책주가 되었다. 따르는 자가 많았고 백성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반아 또한 모친을 닮아 총명했으며 지금보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두각을 보였다. 거기다 금슬 좋은 책주 내외가 아들이라도 낳는 날엔, 황위는 그들의 차지였다.
황제 원은 불안했다. 선희보다 부족한 자신의 능력이 한탄스러웠고, 따르는 이 많은 선희의 포용력이 부러웠고, 한계 따위 가뿐히 뚫고 권세가 드높아져 가는 선희의 욕망이 불안했다. 제 자식이 황위를 잇지 못할까 걱정됐다.
그는 책주 가문에 황위를 넘겨줄 만큼 큰 그릇이 되지 못했다. 대를 잇고 싶은 욕심이 있는 여느 사람과 같았다. 열등감에 불안까지 더해지니 하루하루 책주전을 향한 의심만 커져 갔다.
“반아는 잘 있고?”
“예, 마마.”
황후 단향도 마찬가지였다. 황궁에서 함께 자라 온 원과 선희는 오라버니, 누이 하는 사이였다. 단향 또한 태자비 시절부터 선희와 친분이 두터웠다. 원의 태자 시절, 둘이서 그를 따돌린 전적이 숱했다.
허나 단향도 황궁 사람이었다. 걸음마저 조심하며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황궁 사람. 단향은 원을 연모함과 동시에 황후라는 자신의 자리 역시 연모했다. 거기에 동무인 선희를 잃기 싫다는 욕심까지 더해지니 마음이 복잡했다.
“윤이와 친해 보이던데, 상실감이 컸겠네.”
“걱정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둘만 있을 때도 예의를 차리면 동무 사이에 내가 불편하잖아.”
“황궁이니까요. 언행을 조심해야지요.”
선희가 악의 없는 미소를 보였다. 단향도 웃으며 차를 마셨다. 창을 넘어 햇볕이 비추는데,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살 에는 추위가 불어닥친 것처럼 팽팽했다.



황궁에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나날이 지나고 5년 뒤, 새로 책주에 이름을 올린 자는 반아였다. 서반아. 황자 윤이 훤으로 떠난 지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 할 수 있는 5년, 이제 막 그즈음이 지난 때였다.
책주 책봉식이 거행되는 황궁 안에서 가장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반아였다. 이제 열넷 된 그이의 눈동자는 살아온 날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둡고 슬펐다.
조정 신료들이 반아에게 감축드린다 고개를 숙였다.
‘역모를 모의한 책주 서선희를 사형에 처하라.’
반아는 계단 위에 서, 저 아래 신료들을 보며 감정을 삼켰다. 본인들보다 한참은 어린 자신에게 고개 숙이는 그들의 뒤통수를 보다 끝내 눈을 감았다.
‘역모는 구족을 멸해야 할 죄니라. 가문에 너 하나 남았다. 그런 너에게 짐이 기회를 주겠다. 모친을 대신해 책주가 된다면 살릴 것이며, 그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죽일 것이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여린 입술이 떨렸다.
‘거절한다면 이 나라에 더 이상 책주란 존재치 않는다. 그런 위태로운 선조를 원하느냐?’
노을이 질 때면 주홍빛 비단이 꽃 피던 황궁은 이제 없다. 제게서 어머니와 아버지, 친족들을 앗아 간 칼바람만이 남았을 뿐이다.
‘네게 약조하마. 황위를 물려주겠다. 너에게 이 황좌를 내어 줄 것이다. 허면 우선 목숨을 부지해야지. 아니 그러하냐? 어서 답하거라.’
선택지는 없었다. 반아는 검을 든 채 자신을 찾아온 황제에게 차마 죽여 달라 하지 못했다. 두려웠다. 황제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책주가 되겠다는 답을 하라, 재촉하는 황제가 무서웠다.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결과가 오늘이었다. 원치도 않는 책주가 되어 더더욱 원치 않는 황좌까지 약속받은 이 순간, 오늘.
지워지지 않는 어머니의 눈물을 잊으려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남들 앞에서 우는 건 약한 거라던 어머니는 마지막 가시는 길, 처음으로 그들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분노와 고통에 찬 피눈물을.
그때를 잊어 보려 신료들의 머릿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과거가 그리웠다. 웃었던 나날, 행복했던 시간과 추억이 담긴 사람들. 헌데 그들의 마지막은 모두 끔찍했다.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려도, 아버지와의 기억을 떠올려도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검 끝에 흐른 비명이었다.
해서 반아는 주먹을 세게 쥔 채 윤을 떠올렸다. 하나 남은 좋은 추억. 아직 끝이 끔찍하게 정해지지 않은 단 한 사람.
“책주가 된 걸 축하한다.”
황제 원이 인자하게 웃었다. 단향은 어두운 얼굴로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상반된 표정처럼 서로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너에게 미안하다.’
단향은 반아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얼마 전 잃은 동무를 떠올리며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안타까움 가득한 눈짓은 바로 앞 탁상에 머물렀다.
‘이제 시작이니라.’
하지만 선희가 사라진 조정을 장악하려는 원의 속내는 어두웠다.
원은 이번 미봉책이 오래가길 바랐다. 황위를 약조했으나 사실 반아의 결정을 재촉하려 일단 내뱉고 본 말에 불과했다. 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그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렵겠지만, 해도 후사를 보는데 더욱 힘써 보자 황후와 다짐했다.
아들이 태어나면 그에게 보위를 잇게 할 것이다. 윤이 살아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리 위태로운 상황에 책주의 자리마저 비게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역모를 모의한 선희를 살려 둘 수도 없었다. 해서 죄인을 죽이고 그의 하나뿐인 자식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반아도 여인인 자신이 황제가 되는 건 불가하다,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겼다. 어둡고 찬 눈빛이 우려스럽긴 했으나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반아가 황제와 황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눈앞에 보이는 돌바닥이 마치 자신의 처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조정 신료 수백의 까만 머리 위를 울리며 회색빛 하늘로 퍼져 나갔다.






훤에 반란이 일어났다. 피비린내가 온 땅을 잠식했다. 반아가 책주에 책봉된 지 육 년이 흐른 때였다. 선조는 부강해졌고 훤 황제는 역모에 의해 암살됐다. 폭군 정치를 이기지 못한 형제가 그를 치고 황제에 즉위했다.
훤과 선조의 국력은 대등해졌다. 전처럼 형제국이자 동맹국으로서 힘의 균형을 맞췄다. 이런 정세를 만든 데엔 반아의 공이 상당했다.
열넷이란 나이로 조정에 섰을 때, 오랜 시간 정치판을 견뎌 온 신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반아를 무시했고 우려했다. 모친 선희의 세력은 제대로 흡수되지 못했으며 아직 어린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이는 부족했다.
허나 반아는 온갖 술수를 부리는 정쟁의 세월을 견뎠다. 저들이 감히 반기를 들 수 없는 묘책을 내놓았고, 직접 짠 전술로 국경 지역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날로 무예가 늘고 정치에 익숙해졌다. 학문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선희의 기록을 보고 배우며 그를 넘어서려 노력했다.
처음, 그토록 걱정하던 민심은 이제 반아의 편이 되었다. 조정에서의 입지가 상당해졌다.
선희의 정적, 참판 조세현은 그사이 영상이 되었다. 과거 정적의 여식인 반아에게 칼을 가는 일은 여전했다. 해서 조정은 정확히 두 편으로 갈라졌다. 책주를 따르는 자와 영상을 따르는 자.
책깨나 읽었다며 높은 관직을 차지한 이들의 대부분은 여인인 책주를 은근히 무시하며 영상을 따랐고 그 외 관리들은 책주를 따랐다. 그럼에도 둘의 힘이 비등한 건 민심과 궁인의 신망이 반아에게 있었고 그의 정치적 수가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그런 반아에게서 선희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그것이 묘한 불안감을 선사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반아가 선조 조정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윤은 한겨울 매서운 바람 부는 훤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힌 채 어떤 사소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제는 선황이 된 과거 훤 황제의 눈에 띄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해 왔다.
처음, 세상 물정 따윈 모르는 여섯의 나이로 적국에 당도했을 때, 윤은 숨이 멎는 줄로만 알았다. 하나같이 키가 팔 척은 되어 보이는 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살기등등한 눈길을 보냈다. 저놈을 언제 죽여야 할까, 어디서 죽여야 할까 고민하는 시선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그들은 감정을 갈무리하지 않았다.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처소에 앉아서도 무서움은 여전했다. 헌데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 소매가 다 젖도록 눈물을 흘렸으나 끙끙 앓는 신음만 튀어나온 게 전부였다. 무서워서, 정말 너무도 무서워서.
흔한 환관 하나 윤의 곁을 지키지 않았다. 차디찬 처소에 자신뿐이었다. 선조에선 사람들이 그를 외면했다면 훤에선 오히려 뚫어져라 감시했다. 문 하나만 넘으면 살벌한 시선이 일제히 와 박혔다.
철저한 고립이었다. 부질없는 상념 말곤 할 게 없는, 책조차 아껴 읽어야 하는 처지.

「훤에는 눈이 옵니다. 누이가 있는 곳은 아직 따뜻하다던데, 이 서신이 당도할 즈음이면 그곳도 눈이 내리겠네요. 허면 담긴 겨울 얘기를 누이도 느낄 수 있을 테니 다행입니다.」

그 외, 그나마 할 수 있는 거라곤 서신을 쓰는 것뿐이었다. 사약이 내려질 게 뻔한 죄인에게 마지막 온정이라도 베푸는 양, 선조에 서찰을 보내는 일은 허락됐다. 그렇게 선조에 수차례 서신이 당도했다.
황제와 황후에게 보낸 서신 틈, 가장 고운 봉투로 쌓인 두꺼운 서찰의 주인은 반아였다. 반아의 뜸한 답신에도 불구하고 윤은 서신 적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밤낮 어린 날의 추억을 그렸다.
추운 타지가 힘들고 외로울 때면 지난날, 웃어 주며 괜찮다 말해 주던, 저를 안아 주던 이가 더욱 간절했다. 누구든 상황에 따라 쉽게 등 돌릴 수 있다 깨달았던 그때, 한결같았던 반아가 그리웠다.
자객의 침입이라도 있을까 불안한 나날을 지내며 그려만 보아도 의지가 되는, 낯선 곳을 버틸 수 있게 하는 존재에 대한 애정은 해가 지날수록 깊어졌다.

「근래 들어 바빠지셨다는데 몸은 괜찮으신지 걱정입니다. 훤은 요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합니다. 황궁 수비병 수가 늘었고 제 전각을 지키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쯤 겨울이 끝나 봄이 올까요.」

윤은 매일 반아에게 보낼 서찰을 적었다. 서툰 어린 날과 달리 이제는 필체가 수려했다. 반아와 처음 만났을 때 말이 짧던 윤은 없다.
훤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책을 읽는 일뿐이었기에, 예를 알기 시작한 때부턴 보내는 서찰에 존대를 적었다. 허면 누이도 더는 저를 어린 아이로만 보지 않겠지, 하는 마음이 조금 있었다.

「보고 싶습니다.」

끄트머리에 마지막 말을 적으며 윤은 말갛게 웃었다. 곧게 뻗은 큰 손이 입가를 가렸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훤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눈물을 떨구었던 큰 눈은 깊고 짙은 눈매로 변했다. 해도 여전히 선하고 순한 눈동자에 수줍음이 담겼다.
훤나라 황궁 사람 여느 누구와 견주어도 큰 키는 11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았다. 다만 처소 밖으로 나오는 일 자체가 적어 그의 자세한 생김새를 모르는 이가 태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