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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뒤 미풍
1화
#프롤로그
소년은 빗속을 뛰었다. 깊은 밤엔 빗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크고 우악스럽던 그 손아귀에 다시 잡힐세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소년의 전부를 적셨고 시야조차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소년의 뜀박질은 한밤중의 주택가 골목과 골목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숨이 찼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본능적인 생각이 다섯 살짜리 꼬마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Arrow st.8
푯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모퉁이를 돈 소년은 앞에서 다가오고 있던 승용차를 발견하며 그대로 멈춰 섰다. 그곳이 워싱턴 외곽의 차도라는 것을 먼 이국땅에서 입양되어 온 소년은 알지 못했다. 제 몸 가득 드리워지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피해 팔로 이마를 막았다.
끼이이이익―
급정거를 한 차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스키드 마크를 내며 소년의 앞에서 정확하게 멈추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굵은 빗줄기가 사선으로 가르고 있었다. 그대로 넘어진 소년은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가렸던 팔을 차츰 내렸다.
운전석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온 남자를, 소년은 매우 인상 깊게 쳐다봤다.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자신과 같은 나라, 혹은 그 비슷한 나라에서 온 사람 같았다. 미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수도 없이 본 금발 혹은 갈색 머리를 하고 코가 높고 눈이 움푹 들어간 사람들과는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소년은 눈앞의 남자가 싫지 않았는데, 조급했던 나머지 남자는 모국어를 먼저 던졌다.
“괜찮…… Are you OK?”
얼굴로, 어깨로, 온몸으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빗물을 맞으면서 소년은 이 아저씨도 자신과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울고만 싶어진다. 소년은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근심 어린 얼굴로 살피는 남자에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소년의 한국어에 남자가 놀란 입술을 벙싯거렸다.
“한국 사람이니? 너 한국에서 온 거야?”
“……네.”
“그렇구나.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니?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면 아저씨한테 가르쳐 주면 좋을 텐데. 아니다. 아저씨가 집까지 태워다 줄게.”
남자가 소년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안아 올리려 하자, 소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는 다른 생김새의 양아빠와 양엄마. 틈만 나면 소년을 때리고 밥을 굶기면서 농장 일만 시켰던 그 사람들. 다섯 살의 소년에겐 농장의 소똥 냄새가 식사이자 간식이었다.
“집…… 없어요.”
“응?”
“……엄마 아빠도 없어요.”
남자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비는 끊임없이 두 사람을 적셔 내렸다.
* * *
“열이 좀 내린 것 같아요.”
성주가 하얀색의 젖은 수건을 소년의 이마에서 떼어 내고 돌아섰다. 테라스의 테이블에 희숙과 함께 앉아 있던 태성은,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년을 흘깃 보며 난감한 표정만 연신 지어 보였다. 비가 모두 그친 이른 아침, 아내인 성주와 모친인 희숙은 간밤에 태성이 업고 들어온 어린 소년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있었다.
테라스로 나온 성주가 제 몫의 커피 잔을 들고 방 안의 소년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는 누워 있는 소년을 향한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저 아이, 너무 예뻐요. 처음엔 여자아인 줄 알았어요. 저렇게 예쁜데…….”
“남자아이더라고. 한국에서 이리로 입양된 것 같아.”
“세상에. 저 어린 나이에.”
“경찰에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니니? 쟤 부모가 알면 우리 가족을 납치범으로 몰 수도 있어.”
그때 희숙이 레몬차를 한 모금 마시며 불쑥 끼어들었다. 등을 꼿꼿하게 세운 그녀는 기숙학교 사감 선생님 같은 스타일을 하고 다소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희숙의 성격이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에도 높낮이가 없다. 무뚝뚝하고 필요한 말만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핵심 역할을 해낸다.
그 정희숙 여사가 바로 한국의 유니온 백화점을 업계 1위로 올려놓은 장본인이었다. 태성은 모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어머님, 하루만 더 있다 보내면 안 돼요? 옷 갈아입히면서 봤는데 팔이랑 등, 다리에 상처나 멍 자국이 아주 많아요. 게다가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야위었더라구요. 도대체 제대로 먹기나 하는 건지.”
“그런 거야 쟤 사정이고 쟤 집안 사정이지 우리가 신경 쓸 건 아니야.”
희숙의 한마디에 성주와 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성은 근원적으로 모친의 말이라면 주눅이 들 정도로 무조건적으로 따랐고, 성주는 결혼하고 지금까지 아이를 낳지 못한 불임 여성이라는 이유로 희숙에게 늘 미안해하며 살아왔다.
“……저 안 가면 안 돼요? 가기 싫어요. ……가기 싫어요.”
그렇게 세 사람이 소년을 다시 돌려보내기로 의견을 모으고 있는데, 갑자기 방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주가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소년이 상체를 일으킨 채로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모성애가 발동한 성주는 황급히 소년에게 다가가 등을 끌어안았다.
“오오, 그래. 알았어. 안 가도 돼. 걱정 마. 아줌마가 지켜 줄게. 아무 걱정 하지 마.”
태성과 희숙의 애잔한 눈빛이 성주와 소년에게로 가닿았다.
“이름이 뭐야?”
성주가 물으니 소년이 곧장 대답하기 위해 입안에 든 음식을 재빨리 씹었다. 식탁은 무척 화려했고 고기스튜와 매시드 포테이토, 그리고 야채샐러드는 태어나 처음 먹어 보는 것들이었다. 한국의 보육원에서도 먹어 보지 못한 것들이다. 열이 내린 소년을 위해 성주가 정성스레 요리한 점심 식사였다.
“김세진이요. 미국 이름은 Jin.”
“김세진. 이름도 멋지구나. 너 아줌마 아들 할래?”
소년은 물끄러미 성주를 쳐다봤다. 그럴 수도 있을까. 이 아줌마의 아들이 될 수도 있을까.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소년은 말없이 샐러드를 먹었다. 이 아줌마의 아들이면, 그 아저씨의 아들이면, 그 할머니의 손자이면 참 좋겠다, 생각하면서.
* * *
“못 보내겠어요. 다시 돌려보냈다간 또 얻어맞고 살 거예요.”
다음 날 저녁이었다. 성주와 태성, 그리고 희숙은 다시 테라스에 모여 허브티를 마시고 있었다. 희숙은 신문을 들여다보며 잠자코 아들 부부의 말만 듣고 있었다.
태성이 오늘 경찰서에 갔다가 알아낸 내용이었다. 세진이라는 아이는 작년에 워싱턴 외곽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미국인 부부에게 입양됐으며, 그 부모는 과거 아동 학대 범죄 경력이 있으며, 이번에도 이웃에게서 몇 차례 신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엊그제 빗길에 태성과 마주친 세진이라는 아이는 도망치는 중이었던 것이다.
양부모는 현재 주(州) 연방 경찰서의 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다. 세진이라는 아이를 학대한 혐의다. 성주가 가장 먼저 의견을 내세웠다. 희숙은 며느리를 야단치고 싶었지만, 유달리 모성애가 넘치는 이유를 알기에 조용히 삼켜 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임신이 되지 않자, 시술을 위해 미국으로 온 지 5년째. 작년에 끝내 불임 판정을 받은 성주는 늘 우울을 달고 살았다. 그런 여자를 너무 사랑하여 차마 버리지 못했던 태성은 성주의 심신이 안정되기를 기다리면서 함께 미국에서의 생활을 자처했다.
두 부부는 외부와의 연락과 접촉을 차단한 채 거의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현재 부사장 체제로 운영 중인 한국의 유니온 백화점은 전성기에 비해 완전하게 내리막길을 탔고, 희숙은 늘 그것이 불만이었고 안타까웠다.
그즈음, 한국에선 그들 가족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주가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둥, 쌍둥이라는 둥, 그게 아니고 불임이고 아이가 아직 없다는 둥. 무성한 소문에 그들은 일절 대처를 하지 않았다.
유니온 백화점은 희숙의 시할아버지, 즉 태성의 증조부 대에 조그만 슈퍼마켓으로 시작하여 눈부신 발전을 이뤄 낸 사업체였다. 이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몇 년 전까지 희숙이 직접 경영했으며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런 희숙의 입장에서 아들 부부의 불임에서 비롯된 미국 생활은 늘 못마땅했다. 한심하고 대책이 없는 부부였다.
지금이 미국에서 한가하게 한량 생활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어머니. 저 아이를 우리가 입양하면 안 될까요.”
희숙은 태성이 문득 던진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번엔 성주도 동참한다.
“네. 어머님.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저희가 낳은 걸로 하면 되잖아요. 저 아이랑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불임인 거 아는 사람들 의사 말곤 아직 없으니까 우리끼리 말만 잘 맞추면……. 하아, 죄송해요, 어머님.”
성주는 끝내 눈물을 적셨다. 아무래도 아들 부부가 결심을 한 듯했다. 단 한 번도 며느리의 불임에 대해 한탄하거나 불만을 터뜨린 적 없었고, 행여 며느리가 눈치를 볼까 아이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낸 적 없었다.
그러나 아들 부부는 무척 조급했던 모양이다. 며느리는 기어이 눈물을 보였고, 태성은 그런 며느리의 어깨를 안으며 위로했다. 희숙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어쩌면 아들 부부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정체되어 있는 삶, 기울어 가는 백화점. 그것들에서 벗어나려면 커다란 결단을 해야 할지도. 변곡점이 필요한 시기이긴 했다.
“입양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백화점에 들어갈 거냐.”
희숙이 넌지시 말하자 태성이 눈을 빛냈다.
“네.”
“그래, 백화점을 위해선 어쩔 수 없지. 아비가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무슨 수인들 못 쓰겠어. 하지만 아직 섣불리 좋아하진 마. 저 아이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아봐야 할 게 많을 것 같으니까.”
“어머니. 그럼…….”
“지금 우리 백화점은 위기야. 너도 충분히 책임을 통감하리라 생각해.”
“알고 있습니다.”
“저 아이를 입양한다면 며느리 넌 육아에, 태성이 넌 백화점에만 신경 쓰거라. 우리 백화점을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만들어야 해.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다.”
1화
#프롤로그
소년은 빗속을 뛰었다. 깊은 밤엔 빗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크고 우악스럽던 그 손아귀에 다시 잡힐세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소년의 전부를 적셨고 시야조차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소년의 뜀박질은 한밤중의 주택가 골목과 골목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숨이 찼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본능적인 생각이 다섯 살짜리 꼬마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Arrow st.8
푯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모퉁이를 돈 소년은 앞에서 다가오고 있던 승용차를 발견하며 그대로 멈춰 섰다. 그곳이 워싱턴 외곽의 차도라는 것을 먼 이국땅에서 입양되어 온 소년은 알지 못했다. 제 몸 가득 드리워지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피해 팔로 이마를 막았다.
끼이이이익―
급정거를 한 차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스키드 마크를 내며 소년의 앞에서 정확하게 멈추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굵은 빗줄기가 사선으로 가르고 있었다. 그대로 넘어진 소년은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가렸던 팔을 차츰 내렸다.
운전석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온 남자를, 소년은 매우 인상 깊게 쳐다봤다.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자신과 같은 나라, 혹은 그 비슷한 나라에서 온 사람 같았다. 미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수도 없이 본 금발 혹은 갈색 머리를 하고 코가 높고 눈이 움푹 들어간 사람들과는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소년은 눈앞의 남자가 싫지 않았는데, 조급했던 나머지 남자는 모국어를 먼저 던졌다.
“괜찮…… Are you OK?”
얼굴로, 어깨로, 온몸으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빗물을 맞으면서 소년은 이 아저씨도 자신과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울고만 싶어진다. 소년은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근심 어린 얼굴로 살피는 남자에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소년의 한국어에 남자가 놀란 입술을 벙싯거렸다.
“한국 사람이니? 너 한국에서 온 거야?”
“……네.”
“그렇구나.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니?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면 아저씨한테 가르쳐 주면 좋을 텐데. 아니다. 아저씨가 집까지 태워다 줄게.”
남자가 소년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안아 올리려 하자, 소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는 다른 생김새의 양아빠와 양엄마. 틈만 나면 소년을 때리고 밥을 굶기면서 농장 일만 시켰던 그 사람들. 다섯 살의 소년에겐 농장의 소똥 냄새가 식사이자 간식이었다.
“집…… 없어요.”
“응?”
“……엄마 아빠도 없어요.”
남자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비는 끊임없이 두 사람을 적셔 내렸다.
* * *
“열이 좀 내린 것 같아요.”
성주가 하얀색의 젖은 수건을 소년의 이마에서 떼어 내고 돌아섰다. 테라스의 테이블에 희숙과 함께 앉아 있던 태성은,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년을 흘깃 보며 난감한 표정만 연신 지어 보였다. 비가 모두 그친 이른 아침, 아내인 성주와 모친인 희숙은 간밤에 태성이 업고 들어온 어린 소년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있었다.
테라스로 나온 성주가 제 몫의 커피 잔을 들고 방 안의 소년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는 누워 있는 소년을 향한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저 아이, 너무 예뻐요. 처음엔 여자아인 줄 알았어요. 저렇게 예쁜데…….”
“남자아이더라고. 한국에서 이리로 입양된 것 같아.”
“세상에. 저 어린 나이에.”
“경찰에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니니? 쟤 부모가 알면 우리 가족을 납치범으로 몰 수도 있어.”
그때 희숙이 레몬차를 한 모금 마시며 불쑥 끼어들었다. 등을 꼿꼿하게 세운 그녀는 기숙학교 사감 선생님 같은 스타일을 하고 다소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희숙의 성격이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에도 높낮이가 없다. 무뚝뚝하고 필요한 말만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핵심 역할을 해낸다.
그 정희숙 여사가 바로 한국의 유니온 백화점을 업계 1위로 올려놓은 장본인이었다. 태성은 모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어머님, 하루만 더 있다 보내면 안 돼요? 옷 갈아입히면서 봤는데 팔이랑 등, 다리에 상처나 멍 자국이 아주 많아요. 게다가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야위었더라구요. 도대체 제대로 먹기나 하는 건지.”
“그런 거야 쟤 사정이고 쟤 집안 사정이지 우리가 신경 쓸 건 아니야.”
희숙의 한마디에 성주와 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성은 근원적으로 모친의 말이라면 주눅이 들 정도로 무조건적으로 따랐고, 성주는 결혼하고 지금까지 아이를 낳지 못한 불임 여성이라는 이유로 희숙에게 늘 미안해하며 살아왔다.
“……저 안 가면 안 돼요? 가기 싫어요. ……가기 싫어요.”
그렇게 세 사람이 소년을 다시 돌려보내기로 의견을 모으고 있는데, 갑자기 방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주가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소년이 상체를 일으킨 채로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모성애가 발동한 성주는 황급히 소년에게 다가가 등을 끌어안았다.
“오오, 그래. 알았어. 안 가도 돼. 걱정 마. 아줌마가 지켜 줄게. 아무 걱정 하지 마.”
태성과 희숙의 애잔한 눈빛이 성주와 소년에게로 가닿았다.
“이름이 뭐야?”
성주가 물으니 소년이 곧장 대답하기 위해 입안에 든 음식을 재빨리 씹었다. 식탁은 무척 화려했고 고기스튜와 매시드 포테이토, 그리고 야채샐러드는 태어나 처음 먹어 보는 것들이었다. 한국의 보육원에서도 먹어 보지 못한 것들이다. 열이 내린 소년을 위해 성주가 정성스레 요리한 점심 식사였다.
“김세진이요. 미국 이름은 Jin.”
“김세진. 이름도 멋지구나. 너 아줌마 아들 할래?”
소년은 물끄러미 성주를 쳐다봤다. 그럴 수도 있을까. 이 아줌마의 아들이 될 수도 있을까.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소년은 말없이 샐러드를 먹었다. 이 아줌마의 아들이면, 그 아저씨의 아들이면, 그 할머니의 손자이면 참 좋겠다, 생각하면서.
* * *
“못 보내겠어요. 다시 돌려보냈다간 또 얻어맞고 살 거예요.”
다음 날 저녁이었다. 성주와 태성, 그리고 희숙은 다시 테라스에 모여 허브티를 마시고 있었다. 희숙은 신문을 들여다보며 잠자코 아들 부부의 말만 듣고 있었다.
태성이 오늘 경찰서에 갔다가 알아낸 내용이었다. 세진이라는 아이는 작년에 워싱턴 외곽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미국인 부부에게 입양됐으며, 그 부모는 과거 아동 학대 범죄 경력이 있으며, 이번에도 이웃에게서 몇 차례 신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엊그제 빗길에 태성과 마주친 세진이라는 아이는 도망치는 중이었던 것이다.
양부모는 현재 주(州) 연방 경찰서의 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다. 세진이라는 아이를 학대한 혐의다. 성주가 가장 먼저 의견을 내세웠다. 희숙은 며느리를 야단치고 싶었지만, 유달리 모성애가 넘치는 이유를 알기에 조용히 삼켜 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임신이 되지 않자, 시술을 위해 미국으로 온 지 5년째. 작년에 끝내 불임 판정을 받은 성주는 늘 우울을 달고 살았다. 그런 여자를 너무 사랑하여 차마 버리지 못했던 태성은 성주의 심신이 안정되기를 기다리면서 함께 미국에서의 생활을 자처했다.
두 부부는 외부와의 연락과 접촉을 차단한 채 거의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현재 부사장 체제로 운영 중인 한국의 유니온 백화점은 전성기에 비해 완전하게 내리막길을 탔고, 희숙은 늘 그것이 불만이었고 안타까웠다.
그즈음, 한국에선 그들 가족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주가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둥, 쌍둥이라는 둥, 그게 아니고 불임이고 아이가 아직 없다는 둥. 무성한 소문에 그들은 일절 대처를 하지 않았다.
유니온 백화점은 희숙의 시할아버지, 즉 태성의 증조부 대에 조그만 슈퍼마켓으로 시작하여 눈부신 발전을 이뤄 낸 사업체였다. 이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몇 년 전까지 희숙이 직접 경영했으며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런 희숙의 입장에서 아들 부부의 불임에서 비롯된 미국 생활은 늘 못마땅했다. 한심하고 대책이 없는 부부였다.
지금이 미국에서 한가하게 한량 생활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어머니. 저 아이를 우리가 입양하면 안 될까요.”
희숙은 태성이 문득 던진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번엔 성주도 동참한다.
“네. 어머님.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저희가 낳은 걸로 하면 되잖아요. 저 아이랑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불임인 거 아는 사람들 의사 말곤 아직 없으니까 우리끼리 말만 잘 맞추면……. 하아, 죄송해요, 어머님.”
성주는 끝내 눈물을 적셨다. 아무래도 아들 부부가 결심을 한 듯했다. 단 한 번도 며느리의 불임에 대해 한탄하거나 불만을 터뜨린 적 없었고, 행여 며느리가 눈치를 볼까 아이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낸 적 없었다.
그러나 아들 부부는 무척 조급했던 모양이다. 며느리는 기어이 눈물을 보였고, 태성은 그런 며느리의 어깨를 안으며 위로했다. 희숙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어쩌면 아들 부부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정체되어 있는 삶, 기울어 가는 백화점. 그것들에서 벗어나려면 커다란 결단을 해야 할지도. 변곡점이 필요한 시기이긴 했다.
“입양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백화점에 들어갈 거냐.”
희숙이 넌지시 말하자 태성이 눈을 빛냈다.
“네.”
“그래, 백화점을 위해선 어쩔 수 없지. 아비가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무슨 수인들 못 쓰겠어. 하지만 아직 섣불리 좋아하진 마. 저 아이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아봐야 할 게 많을 것 같으니까.”
“어머니. 그럼…….”
“지금 우리 백화점은 위기야. 너도 충분히 책임을 통감하리라 생각해.”
“알고 있습니다.”
“저 아이를 입양한다면 며느리 넌 육아에, 태성이 넌 백화점에만 신경 쓰거라. 우리 백화점을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만들어야 해.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