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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태성과 성주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 눈물을 흘렸다. 입양이야 하려면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진행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세진이라는 아이와의 인연을 각별하게 여겼다.
두 부부가 세진이라는 아이만 생각하는 동안 희숙은 백화점을 생각했다. 태성이 마음을 고쳐먹은 것 같으니, 쓰러져 가는 백화점을 다시 일으키려면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고, 응원이든 연민이든 칭찬이든 그 어떤 감정이든 끌어모을 수 있는 무언가가.
“그러려면…….”
말끝을 흐린 희숙은 테이블 위에 둔, 그녀가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한 신문 사설에 다시 시선을 내렸다.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이 사설의 내용을 재차 훑어 내린다.
사설은 LA의 한 의상실을 다루고 있었다. 주인이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는데, 디자인이나 가봉 실력이 엄청나 톱모델과 인기 여배우 등을 포함한 수많은 고객을 끌어모은다는 거였다. 콤플렉스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된 예시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방 안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세진이라는 아이를 응시했다. 사업가 특유의 기질이, 희숙의 눈에 차올랐다.

* * *

“네 이름은 이제부터 윤지오란다.”
소년은 다가온 할머니가 한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윤지오?”
“그래.”
할머니는 얼음 같다. 만지면 차가워서 뒤로 물러나게 되는 얼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포근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웃음이 보인 탓이었다.
“이걸 쥐어 보겠니?”
소년은 할머니가 건네는 작은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할머니는 더욱 환하게 웃으며 소년에게 주문했다.
“다리를 한번 절룩거려 봐. 으음, 왼쪽 다리가 좋겠구나.”
“절룩이요?”
“응. 이렇게.”
소년은 할머니가 걷는 양을 따라 했다. 절룩절룩. 멀쩡한 소년의 다리는 할머니를 따라서 계속 절었다. 소년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두 부부의 아들이 다리를 전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사람들의 동정심을 살 거라는 희숙의 판단이 있었다고 한다. 백화점을 화제의 중심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희숙의 판단은 옳았다. 굳이 일부러 소문을 만들지 않아도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히 말들이 흐르고 흘렀던 것이다. 다리를 저는 아들을 홍보 모델로 내세운 태성의 유니온 백화점을 사람들은 따뜻한 시선으로 보라보기 시작했으며, 특이하고 독특하게 여겼다.
냉랭하고 차갑기만 하던 희숙의 얼굴에 미소가 흐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1


서울의 밤은 낯설었다. 아버지 때문에, 혹은 업무 차 한 달에 한 번씩은 들르는데도, 오늘의 이곳은 처음 와 본 세계처럼 모든 것들이 익숙하지가 않다. 지오는 그 이유가 이제 제주도를 완전하게 떠나 서울에 정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 여겼다.
차창을 긁듯이 스치는 화려한 네온 불빛부터 길가에 듬성듬성 서 있는 포장마차의 흐린 불빛까지, 그의 시선이 꼼꼼하게 닿았다. 봄의 한복판에 도착한 계절은 훈풍을 몰고 와 인도를, 그리고 도로를 온통 벚꽃 잎으로 뒤덮이게 만들었다.
차의 앞 유리에도 후두두 들러붙은 꽃잎들이 마치 눈송이 같다. 지오는 유리창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들고 있던 신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차는 그로부터 30분을 더 달려 유니온 백화점 서울 본점 건물 앞에 정확하게 도착했다. 공항에서부터 차를 운전한 태성의 경호원이 재빨리 내려 차체를 돌아 뒷좌석까지 달려온다. 그러곤 문을 열고 모서리에 세워 둔 지팡이를 꺼내 지오에게 건넸다.
지오는 경호원이 건넨 지팡이를 바닥에 짚은 채 차에서 내렸다.
90도 각도로 상체를 숙이고 있는 경호원을 스쳐 지나가며, 지오는 백화점 로비로 들어섰다. 남들이 보기엔 멀쩡한 걸음걸이와 다름없는, 자세히 보아야지만 약간 절룩이는 것 같은 왼쪽 다리를 지팡이에 의존한 채 가로질러 가니, 이미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이었던 황 실장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왔다. 황 실장은 태성의 비서실장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사님께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발의 노신사는 언제나처럼 지오에게 온화한 미소를 보냈다. 아버지의 옆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마치 숙명인 듯하다. 지오는 그런 황 실장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갈수록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황 실장님.”
“좋은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서 올라가시죠.”
황 실장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황금색의 화려한 빛을 품고 있던 출입문이 스윽 둘로 갈라졌다. 황 실장은 지오가 먼저 타도록 배려해 주었다.
투명한 출입문 때문에 바깥 풍광이 훤히 비쳐 들었다. 8층까지 천천히 이동하는 와중에 백화점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각 층을 통과할 때마다 지오의 시선이 이제부터 그가 적(的)을 두게 될 내부를 훑는다. 그리고 그 시선은 엘리베이터가 8층에 도착하자 거두어졌다. 황 실장이 대표이사실의 문을 열었고, 지오의 지팡이가 가장 먼저 그곳에 들여보내졌다.
“지오야.”
지오의 등장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태성이 환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다가와 그를 안았다. 지오는 이제는 자신보다 작아진 아버지의 등을 웃으며 토닥였다. 태성만 보면 유유히 흘러드는 서글픈 생각을 잠시 밀어낸 채였다.
“앉자. 조심하고.”
“네. 아버지.”
태성은 지오를 극진히 배려했다. 지팡이를 짚은 손과 왼쪽 다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소파에 앉는 것까지 찬찬하게 돕는다. 지오가 소파에 편히 앉자 태성은 그제야 자신도 건너편에 자리했다.
지오는 태성의 시선이 잠시 지팡이에 머무는 것을 놓치지 않고 쳐다봤다. 아주 짧은 순간 태성의 눈빛에 스쳐 지나간 어두운 그늘도 놓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며 잠시 헛기침을 해 대던 태성이 시선을 들고 지오를 바라본다.
“그래. 제주도 생활을 완전히 정리한 소감이 어떠냐.”
“심난합니다.”
“왜? 뭐가? 우리 아들이 심난하다니 아비가 더 심난해지는데?”
“제주도보다 족히 두 배는 넘을 이곳을 아버지는 무슨 결심으로 꾸려 오신 건지. 제가 아버지의 반만이라도 쫓아갈 수 있을까, 염려도 되고요.”
지오가 코끝을 찡그리며 엄살을 부렸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곧장 유니온 백화점 제주지점에 내려간 지 3년. 그곳에서 매출 40퍼센트 증가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내고 서울본점의 마케팅본부장직으로 발령받아 올라온 것이다.
‘지팡이를 짚는 젊고 훌륭한 기업가’라는 수식어가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29년 전 그가 유니온 백화점을 이끌 후계자로 화려하게 한국에 입성한 것을 입에 올렸다. 한쪽 다리를 저는 조그만 꼬마 아이는 당시 큰 화제가 된 것이다.
“너답지 않게 엄살은. 아비가 도와줄 거 아니냐. 걱정 마. 3년 동안 제주지점을 그만큼 키운 실력이면 여기선 날고 길 거야. 아비는 벌써부터 기대가 되고 있어. 우리 아들이 얼마나 훨훨 날게 될지.”
태성이 흐뭇하게 웃었다. 지오도 마주 웃었지만, 텅 비고 공허한 심경을 어느 정도 감춘 채였다. 태성의 입에서 ‘우리 아들’이라는 말이 떨어질 때마다 그가 겪어야 하는 씁쓸함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집에서 잘 거지?”
“아뇨. 호텔을 예약해 뒀습니다. 빌라는 아직 내부 수리 중이라.”
“이 녀석이. 집 놔두고 왜 서울 올 때마다 매번 호텔이야. 아비 섭섭하게. 빌라도 그래. 아비하고 상의라도 하지 그랬어.”
“제가 나가 사는 편이 제게나 아버지한테나 좋을 겁니다. 서른넷이나 먹은 아들이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게 얼마나 큰 흠인지 모르십니까? 사람들이 다 웃을 겁니다.”
“하긴. 독립할 나이가 지나긴 했지.”
태성은 손가락 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툭툭 규칙적으로 건드리다 다시 물었다.
“주말 쉬고 당장 월요일부터 출근이지만, 처음부터 너무 서두르진 마. 아비도 네가 천천히 갔으면 해서 아직 네 측근도 꾸리지 않았거든.”
“측근은 따로 필요 없습니다. 비서 한 명이면 됩니다.”
“비서는 당연히 뽑아야지. 마케팅본부장직인데. 아마 총무부에서 진행하고 있을 게야.”
“아버지 비서들 중 한 명을 저한테 붙여 주십시오.”
지오의 말에 태성이 눈을 크게 뜨며 아들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지오의 시선이 잠시 태성의 얼굴 옆 창문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세 번째 수행비서 말입니다. 막내 비서라고 하는.”
“아…… 김 대리?”
“네.”
대표이사실의 비서실에는 모두 세 명의 직원이 있었다. 비서실장인 황 실장과 두 번째 수행비서인 정 대리, 그리고 세 번째 수행비서인 김 대리였다. 지오는 그중 김 대리를 콕 찍은 것이다.
“으음. 뭐 상관은 없어. 비서로 일한 지 겨우 6개월 차여서 아직 풋내기지만. 어차피 네가 내 일의 일부분을 가져가야 할 테니까 비서도 같이 내려보내는 건 일도 아니지. 좋다. 접수하마. 업무가 정리되는 대로 본부장실로 발령 내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지오가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후로도 태성과의 대화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주로 백화점 업무에 관한 얘기였으며, 간간이 당뇨와 신부전을 동시에 앓고 있는 할머니 희숙의 건강 문제도 대화의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지오는 태성의 아들이었으며 태성 역시 지오의 아버지였다. 늘, 변함없이 그들이 지켜 왔고 여겨 왔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태성과 헤어지고 예약해 둔 호텔로 돌아왔을 때, 지오는 비로소 갑갑한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내릴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오롯이 혼자만의 공간에 들어서서야 느낄 수 있는 자유.
그것은 그의 두 다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