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지팡이를 한쪽 벽 모서리에 세워 두고 거실을 가로질러 냉장고까지 걸어가는 발걸음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세상과 유리된 혼자만의 시공간에선 비로소 그의 왼쪽 다리는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생수병을 꺼내어 모조리 들이켠 지오는 냉장고 옆에 있는 러닝머신을 쳐다봤다. 룸을 예약할 때 서비스로 주문했던 것이다. 지오는 곧장 걸치고 있던 슈트를 모두 벗고 짐 가방에서 간단한 트레이닝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그러곤 시커먼 레일 위에 올라가 버튼을 누른다.
러닝머신은 위잉 소리를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씩 걷다가 이내 속도를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헉헉헉헉, 거친 숨을 적당히 제어시키면서 지오는 몸이 흠씬 젖도록 땀을 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지오야. 윤지오.’
‘지팡이를 가지고 연습하는 게 좋겠지? 응, 그렇지. 그렇게 걸으면 돼. 세상에, 우리 지오 정말로 잘하는구나.’
‘너도 이제 컸으니 더 큰 지팡이를 사다 주마. 그게 나을 거야.’
‘잊지 마. 네 이름은 김세진이 아니라 윤지오야. 알았지?’
할머니는 그를 입양한 그 순간부터 훈련을 시켰다. 왼쪽 다리를 절며 걷는 훈련, 지팡이를 짚고 걷는 훈련, 윤지오라는 이름을 반복하여 외우는 훈련, 그리고 각종 공부부터 시작하여 마음가짐과 행동 양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하루 종일 교육을 받았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농장의 집에서 자신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김새를 지닌 양부모한테서 맞고 살 땐 기대하지도 않았던 가족이 생겨 기뻤지만, 그 속에서 김세진이라는 존재는 깡그리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그분들을 원망하진 않는다. 가족애가 무엇인지 함께 어울려 융화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분들로부터 배우고 느꼈으니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사람을 어떻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지, 그분들이 퍼 주는 애정에서 알게 됐으니까.
성주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더욱 화기애애한 가족이 됐을 테지만, 그가 열 살 때 성주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주 가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에 들이치는 차가운 바람을 어쩌지 못했다. 멀쩡한 다리를 두고,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저는 척해야 하는 순간들이 괴롭고 힘에 부칠 때가 있다. 그 자신이 김세진인지 윤지오인지, 스스로가 헷갈릴 지경인 순간이, 내가 아닌 타인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이 애매한 기분을 떨치고 싶은 날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였다.
그 여자, 김세진을 곁에 두고 싶어 한 것은.
“김세진…….”
티끌 하나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을 보는 것 같은 여자였다. 그 서툴던 손길과 어색한 미소, 그리고 해맑게 떠드는 목소리마저 따라 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여자였다. 숨겨 둘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소유하고 있는 그 여자가, 그때나 지금이나 외면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옆에 두고 뭘 어쩌자는 건가.
지오는 한숨을 흘렸다.
러닝머신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 * *
“세진 씨는 직업이 비서라 그런가 이미지가 딱 단정, 단아, 우아, 그 자체예요. 제가 그동안 숱한 여자들과 깨진 이유가 오늘날 세진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하하. 전 별로 단정하지 못하구요. 단아하지도 않고, 우아? 전혀 아니에요.”
세진은 입을 막고 호호호 웃었다. 남자는 ‘에이. 겸손하신 것 좀 봐.’라고 중얼거리며 세진보다 더 크게 웃어 댔다.
불타는 금요일 저녁, 세진은 왜 자신이 저 대머리와 마주 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은 채 이 지루한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모두 이모인 도경 때문이었다. 유니온 백화점 내 명품 구두 매장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도경이 매장에 들르는 부잣집 여사님들과 친분을 쌓은 후 세진에게 맞선을 주선한 것이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첫 번째 남자는 훤칠한 키와 적당히 남자다운 얼굴을 소유했고 대학교 교직원이라는 직업도 가졌지만, 결정적으로 명품을 밝히는 데다가 시건방지고 거만해서 패스. 두 번째는 고등학교 교사라는데 혼자 외롭게 자란 탓에 아이는 최소한 네 명을 낳고 싶다고 해서 패스. 세 번째가 문제의 맞은편 대머리다.
아직 서른밖에 되지 않은 세진에게 도경은 어째서 사십 대의 남자, 그것도 머리가 시원하신 분을 소개시킬 생각을 했을까. 세진은 당장이라도 도경에게 욕설 문자 폭탄을 던지고 싶었다.
“전요. 이미 강남에 40평 대 아파트도 마련해 놨어요. 제 직업이 변호사잖아요? 실적이 좋거든요. 안에 살림 도구들도 다 채워 놨습니다. 혼수? 필요 없어요. 그리고 결혼하면 제 전 재산을 아내 명의로 해 줄 겁니다. 경기도 쪽 부동산 300평이랑 현금 자산, 신탁 예금, 주식도 전부 다요. 세진 씨는 그냥 집에서 노시다가 아기만 좀 낳아 주면…… 헤헤헤.”
남자가 숨까지 헐떡이며 말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이 음흉스럽기 그지없어 세진은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인내는 정말이지 쓰다. 열매를 맛보고 싶지 않을 만큼.
“네에. 그러세요?”
“우리 부모님 모실 필요도 없어요. 노후 준비도 다 돼 있어서 걱정할 게 없어요.”
난 네가 걱정이거든요?
세진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그 행동을 남자 쪽에서 긍정의 신호로 읽었는지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의자를 가까이 끌어당겨 왔다.
남자가 가까이에 오자 하필이면 테이블에 있는 작은 무드 등이 남자의 대머리를 비춰 더욱 반짝거리게 했다. 게다가 반짝거리는 민머리엔 검버섯인지 아니면 점인지 알 수 없는 시커먼 딱지가 앉아 있었다. 세진은 식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일 토요일인데 저녁에 만날까요? 제가 근사한 곳으로 모실게요.”
이제 이쯤에서 이별의 굿바이를 고해야 한다. 몇 차례 맞선으로 터득하게 된 패턴이었다. 남자가 애프터를 신청하기 전 거절의 뜻을 정중하게 전달해야 훗날이 피곤하지 않는 법이었다. 애매하게 대답을 흘려 남자에게 여지를 남긴다면, 그때부터 재앙의 시작이었다. 첫 번째 남자가 그랬다.
단호함과 결연함. 그것만이 이 혹독한 시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세진은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남자의 눈길이 따라왔다.
“죄송합니다. 그쪽과 만남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아요. 전 첫눈에 반해 불꽃 튀는 만남을 원하거든요. 그런데 그쪽은 제 타입이 아니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아니 저, 저, 세진 씨. 그래도 몇 번 만나 보면…….”
“제가 그 정도로 한가하지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전 가 볼게요.”
세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행여 남자가 따라올까 커피숍을 나서자마자 현란하고 유려한 몸짓을 써 가며 택시를 잡았다.
뒷좌석에 몸을 묻은 그녀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까. 도경이 환장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보는 앞에서 혼자만 날름 먹어 버릴까, 아니면 이달 생활비를 아주아주 늦게 줘서 한 달 예산 편성에 애를 먹게 만들까.
세진이 도경을 괴롭힐 생각을 여러 방면으로 고심하는 사이에 택시는 어느덧 그녀와 도경이 함께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차비를 계산한 후 택시를 보낸 세진은 그때부터 전투태세가 되어 씩씩대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금장치를 열고 들어간 아파트는 조용했다. 주방을 가 보니 식탁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고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봐서, 방금 퇴근한 도경이 식사를 준비해 놓고 씻고 있는 중일 터였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의 짐작이 딱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감은 채 욕실을 나선 도경과 딱 마주친 것이다. 도경의 눈이 못 볼 것을 본 양 휘둥그레졌다.
“어머나? 세진아! 너 왜 벌써 들어온 거야? 둘이 식사하러 간 거 아니었어?”
“식사? 시익사아?”
세진은 도경을 흘겨보며 식탁 위 연근조림 하나를 덥석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어 댔다.
“대체 이모는 희귀한 남자 콜렉터야? 어디서 그런 남자들만 주워 온대? 아니면 강남 사모님들 눈이 그렇게 낮은 거야?”
“왜에. 또 어땠는데 이렇게 길길이 날뛰는 거야?”
도경이 지레 겁을 먹곤 수건을 머리에 만 채로 세진의 수저를 가져다준 후 식탁에 앉았다. 세진이 저토록 질색하는 건 분명히 대머리 때문일 텐데. 사진상으론 썩 나빠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포토샵이 과하긴 한 모양이다. 도경은 세진의 눈치를 보며 맞은편 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렇게 열 내지 말고 저녁이나 먹자. 보나 마나 또 굶었겠네. 응? 조카님. 어서 먹자구요.”
세진은 도경을 한 번 더 휘릭 째려보곤 못 이기는 척 자리했다. 그러곤 수저를 들고 식탁을 휘 둘러보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반찬 라인업 좀 봐. 내가 한 달에 내는 생활비가 얼만데 매번 채소밭이야? 시시때때로 고기를 먹여 줘도 모자랄 판에 야채가게를 차려라, 차려.”
“비타민에 무기질에 섬유질까지 완벽하게 갖춘 8첩 반상을 보고 뭐래냐, 얘가. 그리고 고기 많이 먹지 마. 살쪄.”
“운동하면 돼.”
“건강한 돼지가 될 뿐이야.”
“이모!”
세진이 꽥 소리를 지르자 도경은 손가락으로 귀를 잠시 막곤 다시 열었다. 그러곤 부아가 치민 세진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쉰다섯 살까지 생리를 했다던 외할머니와 그때까지도 숟가락 들 힘이 남아 있으셨던 외할아버지의 거룩한 잉태로 태어난, 외갓집의 늦둥이 딸인 도경은 올해 서른여섯이었다.
세진의 엄마가 예순이니, 늦둥이도 여간한 늦둥이가 아닌 셈이다. 나이가 들면서 도시 생활에 회의를 느낀 세진의 엄마가 조금은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간 뒤, 엄마가 남겨 준 이 집에서 도경과 함께 살게 된 지 벌써 3년째였다.
자매처럼, 때론 친구처럼 지내며 서로를 챙기기에 바쁜 두 사람이지만, 오늘처럼 이런 광풍이 불어닥치는 날엔 서로에게 뾰족한 가시를 들이밀곤 한다. 그래 봐야 모두 애정이 바탕이 된, 그래서 단 한 점의 뒤끝도 없는 말다툼일 뿐이지만.
지팡이를 한쪽 벽 모서리에 세워 두고 거실을 가로질러 냉장고까지 걸어가는 발걸음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세상과 유리된 혼자만의 시공간에선 비로소 그의 왼쪽 다리는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생수병을 꺼내어 모조리 들이켠 지오는 냉장고 옆에 있는 러닝머신을 쳐다봤다. 룸을 예약할 때 서비스로 주문했던 것이다. 지오는 곧장 걸치고 있던 슈트를 모두 벗고 짐 가방에서 간단한 트레이닝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그러곤 시커먼 레일 위에 올라가 버튼을 누른다.
러닝머신은 위잉 소리를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씩 걷다가 이내 속도를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헉헉헉헉, 거친 숨을 적당히 제어시키면서 지오는 몸이 흠씬 젖도록 땀을 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지오야. 윤지오.’
‘지팡이를 가지고 연습하는 게 좋겠지? 응, 그렇지. 그렇게 걸으면 돼. 세상에, 우리 지오 정말로 잘하는구나.’
‘너도 이제 컸으니 더 큰 지팡이를 사다 주마. 그게 나을 거야.’
‘잊지 마. 네 이름은 김세진이 아니라 윤지오야. 알았지?’
할머니는 그를 입양한 그 순간부터 훈련을 시켰다. 왼쪽 다리를 절며 걷는 훈련, 지팡이를 짚고 걷는 훈련, 윤지오라는 이름을 반복하여 외우는 훈련, 그리고 각종 공부부터 시작하여 마음가짐과 행동 양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하루 종일 교육을 받았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농장의 집에서 자신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김새를 지닌 양부모한테서 맞고 살 땐 기대하지도 않았던 가족이 생겨 기뻤지만, 그 속에서 김세진이라는 존재는 깡그리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그분들을 원망하진 않는다. 가족애가 무엇인지 함께 어울려 융화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분들로부터 배우고 느꼈으니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사람을 어떻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지, 그분들이 퍼 주는 애정에서 알게 됐으니까.
성주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더욱 화기애애한 가족이 됐을 테지만, 그가 열 살 때 성주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주 가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에 들이치는 차가운 바람을 어쩌지 못했다. 멀쩡한 다리를 두고,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저는 척해야 하는 순간들이 괴롭고 힘에 부칠 때가 있다. 그 자신이 김세진인지 윤지오인지, 스스로가 헷갈릴 지경인 순간이, 내가 아닌 타인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이 애매한 기분을 떨치고 싶은 날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였다.
그 여자, 김세진을 곁에 두고 싶어 한 것은.
“김세진…….”
티끌 하나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을 보는 것 같은 여자였다. 그 서툴던 손길과 어색한 미소, 그리고 해맑게 떠드는 목소리마저 따라 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여자였다. 숨겨 둘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소유하고 있는 그 여자가, 그때나 지금이나 외면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옆에 두고 뭘 어쩌자는 건가.
지오는 한숨을 흘렸다.
러닝머신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 * *
“세진 씨는 직업이 비서라 그런가 이미지가 딱 단정, 단아, 우아, 그 자체예요. 제가 그동안 숱한 여자들과 깨진 이유가 오늘날 세진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하하. 전 별로 단정하지 못하구요. 단아하지도 않고, 우아? 전혀 아니에요.”
세진은 입을 막고 호호호 웃었다. 남자는 ‘에이. 겸손하신 것 좀 봐.’라고 중얼거리며 세진보다 더 크게 웃어 댔다.
불타는 금요일 저녁, 세진은 왜 자신이 저 대머리와 마주 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은 채 이 지루한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모두 이모인 도경 때문이었다. 유니온 백화점 내 명품 구두 매장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도경이 매장에 들르는 부잣집 여사님들과 친분을 쌓은 후 세진에게 맞선을 주선한 것이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첫 번째 남자는 훤칠한 키와 적당히 남자다운 얼굴을 소유했고 대학교 교직원이라는 직업도 가졌지만, 결정적으로 명품을 밝히는 데다가 시건방지고 거만해서 패스. 두 번째는 고등학교 교사라는데 혼자 외롭게 자란 탓에 아이는 최소한 네 명을 낳고 싶다고 해서 패스. 세 번째가 문제의 맞은편 대머리다.
아직 서른밖에 되지 않은 세진에게 도경은 어째서 사십 대의 남자, 그것도 머리가 시원하신 분을 소개시킬 생각을 했을까. 세진은 당장이라도 도경에게 욕설 문자 폭탄을 던지고 싶었다.
“전요. 이미 강남에 40평 대 아파트도 마련해 놨어요. 제 직업이 변호사잖아요? 실적이 좋거든요. 안에 살림 도구들도 다 채워 놨습니다. 혼수? 필요 없어요. 그리고 결혼하면 제 전 재산을 아내 명의로 해 줄 겁니다. 경기도 쪽 부동산 300평이랑 현금 자산, 신탁 예금, 주식도 전부 다요. 세진 씨는 그냥 집에서 노시다가 아기만 좀 낳아 주면…… 헤헤헤.”
남자가 숨까지 헐떡이며 말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이 음흉스럽기 그지없어 세진은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인내는 정말이지 쓰다. 열매를 맛보고 싶지 않을 만큼.
“네에. 그러세요?”
“우리 부모님 모실 필요도 없어요. 노후 준비도 다 돼 있어서 걱정할 게 없어요.”
난 네가 걱정이거든요?
세진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그 행동을 남자 쪽에서 긍정의 신호로 읽었는지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의자를 가까이 끌어당겨 왔다.
남자가 가까이에 오자 하필이면 테이블에 있는 작은 무드 등이 남자의 대머리를 비춰 더욱 반짝거리게 했다. 게다가 반짝거리는 민머리엔 검버섯인지 아니면 점인지 알 수 없는 시커먼 딱지가 앉아 있었다. 세진은 식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일 토요일인데 저녁에 만날까요? 제가 근사한 곳으로 모실게요.”
이제 이쯤에서 이별의 굿바이를 고해야 한다. 몇 차례 맞선으로 터득하게 된 패턴이었다. 남자가 애프터를 신청하기 전 거절의 뜻을 정중하게 전달해야 훗날이 피곤하지 않는 법이었다. 애매하게 대답을 흘려 남자에게 여지를 남긴다면, 그때부터 재앙의 시작이었다. 첫 번째 남자가 그랬다.
단호함과 결연함. 그것만이 이 혹독한 시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세진은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남자의 눈길이 따라왔다.
“죄송합니다. 그쪽과 만남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아요. 전 첫눈에 반해 불꽃 튀는 만남을 원하거든요. 그런데 그쪽은 제 타입이 아니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아니 저, 저, 세진 씨. 그래도 몇 번 만나 보면…….”
“제가 그 정도로 한가하지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전 가 볼게요.”
세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행여 남자가 따라올까 커피숍을 나서자마자 현란하고 유려한 몸짓을 써 가며 택시를 잡았다.
뒷좌석에 몸을 묻은 그녀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까. 도경이 환장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보는 앞에서 혼자만 날름 먹어 버릴까, 아니면 이달 생활비를 아주아주 늦게 줘서 한 달 예산 편성에 애를 먹게 만들까.
세진이 도경을 괴롭힐 생각을 여러 방면으로 고심하는 사이에 택시는 어느덧 그녀와 도경이 함께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차비를 계산한 후 택시를 보낸 세진은 그때부터 전투태세가 되어 씩씩대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금장치를 열고 들어간 아파트는 조용했다. 주방을 가 보니 식탁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고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봐서, 방금 퇴근한 도경이 식사를 준비해 놓고 씻고 있는 중일 터였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의 짐작이 딱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감은 채 욕실을 나선 도경과 딱 마주친 것이다. 도경의 눈이 못 볼 것을 본 양 휘둥그레졌다.
“어머나? 세진아! 너 왜 벌써 들어온 거야? 둘이 식사하러 간 거 아니었어?”
“식사? 시익사아?”
세진은 도경을 흘겨보며 식탁 위 연근조림 하나를 덥석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어 댔다.
“대체 이모는 희귀한 남자 콜렉터야? 어디서 그런 남자들만 주워 온대? 아니면 강남 사모님들 눈이 그렇게 낮은 거야?”
“왜에. 또 어땠는데 이렇게 길길이 날뛰는 거야?”
도경이 지레 겁을 먹곤 수건을 머리에 만 채로 세진의 수저를 가져다준 후 식탁에 앉았다. 세진이 저토록 질색하는 건 분명히 대머리 때문일 텐데. 사진상으론 썩 나빠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포토샵이 과하긴 한 모양이다. 도경은 세진의 눈치를 보며 맞은편 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렇게 열 내지 말고 저녁이나 먹자. 보나 마나 또 굶었겠네. 응? 조카님. 어서 먹자구요.”
세진은 도경을 한 번 더 휘릭 째려보곤 못 이기는 척 자리했다. 그러곤 수저를 들고 식탁을 휘 둘러보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반찬 라인업 좀 봐. 내가 한 달에 내는 생활비가 얼만데 매번 채소밭이야? 시시때때로 고기를 먹여 줘도 모자랄 판에 야채가게를 차려라, 차려.”
“비타민에 무기질에 섬유질까지 완벽하게 갖춘 8첩 반상을 보고 뭐래냐, 얘가. 그리고 고기 많이 먹지 마. 살쪄.”
“운동하면 돼.”
“건강한 돼지가 될 뿐이야.”
“이모!”
세진이 꽥 소리를 지르자 도경은 손가락으로 귀를 잠시 막곤 다시 열었다. 그러곤 부아가 치민 세진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쉰다섯 살까지 생리를 했다던 외할머니와 그때까지도 숟가락 들 힘이 남아 있으셨던 외할아버지의 거룩한 잉태로 태어난, 외갓집의 늦둥이 딸인 도경은 올해 서른여섯이었다.
세진의 엄마가 예순이니, 늦둥이도 여간한 늦둥이가 아닌 셈이다. 나이가 들면서 도시 생활에 회의를 느낀 세진의 엄마가 조금은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간 뒤, 엄마가 남겨 준 이 집에서 도경과 함께 살게 된 지 벌써 3년째였다.
자매처럼, 때론 친구처럼 지내며 서로를 챙기기에 바쁜 두 사람이지만, 오늘처럼 이런 광풍이 불어닥치는 날엔 서로에게 뾰족한 가시를 들이밀곤 한다. 그래 봐야 모두 애정이 바탕이 된, 그래서 단 한 점의 뒤끝도 없는 말다툼일 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