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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한 팀장님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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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외곽의 비탈진 산동네.
‘아하읏, 아앙, 자기 나 몰라. 하으읏.’
‘그래, 그래 우리 예쁜이. 허억, 허억, 허억.’
어디가 잔뜩 불편한 것도 같고 좋아 미치겠다는 것도 같고. 육향이 진동할 것 같은 신음성이 얇은 벽을 투과해 쪽방 촌으로 여과 없이 퍼져 나갔다. 엉킨 남녀가 격하게 몸을 문질러 대며 열띤 신음을 뽑아 대니 다닥다닥 붙어사는 세입자들은 이제 대리만족을 넘어 고역이었다.
부실한 합판 벽을 사이에 둔 옆방 세입자 민희는 그 소음의 최대 피해자였다.
“어지간히 해요, 어지간히! 아직 해도 안 떨어진 시간에 시집 안 간 이웃 생각도 좀 해 줘야지!”
민희가 참다못해 탁탁, 벽면을 두드리며 쓴소리를 했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하던가! 이건 살려 달라는 건지, 좋아 죽겠다는 건지.”
이러한 이웃의 항의가 들릴 겨를이나 있을까 싶다.
숨넘어가는 여자의 교성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동안 손가락으로 교성의 지속 시간을 헤아리던 민희는 다섯 개째가 접혀졌을 때서야 집 안은 평화를 되찾았다.
잠잠해진 걸로 봐 일단 자기와 예쁜이는 볼일을 다 본 듯했다.
“마른 장작 화력이 좋다더니 진짠가 봐. 연장통 들고 출근하는 김 씨보면 못이나 제대로 칠까 싶은데 동거녀를 매번 천국으로 데려다줄 능력은 되는 모양이네.”
깨끗이 빨아 말린 흰 셔츠 위로 뜨거운 김이 핥고 지나자 다림질 특유의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정성껏 옷을 다리던 석영은 민희의 투덜거림에 입술 끝으로만 웃어 보일 뿐 이렇다 저렇다 대꾸가 없었다. 본시 좋고 싫음이 드러나지 않는 친구에게 익숙해진 까닭에 민희 역시 답을 닦달하지는 않았다.
“에효, 옆 방 동거녀도 조석으로 천국을 드나드는데 2차 수십 번 뛰어도 왜 난 이 모양이냐. 석영아, 정미 있잖아. 그 년 가슴하고 엉덩이 큰 거 말고 볼 거 뭐 있어. 최덕진 사장한테 버림받고 죽네 사네 눈물 바람이던 년이. 어디 그뿐이야. 전기세도 제일 늦게 내는 게 어떻게 운은 하늘에 뻗쳐 그런 스폰을 꿰차느냔 말이야.”
“매일 데리러 오던 가발 아저씨랑 잘 돼 가는 모양이네?”
“잘 돼가다 뿐이냐. 정미 년 입이 귀에 걸렸더라. 제 쓰던 화장대며 전부 나 가지라고 선심 쓰더라.”
“여기서 곧 나갈 수도 있겠네?”
립스틱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은은하게 붉은 석영의 입술이 묻느라 달싹였다.
“두말하면 입 아프지.”
재건축 초읽기에 들어갔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되고서 많은 사람들이 이 동네를 떠났다. 허물어지고 민망한 그림과 낙서로 도배된 담벼락, 부서진 화분이 뒹구는 골목이지만 언덕 맨 꼭대기 이층집은 주머니 가볍고 의지할 곳 없는 이들로 복작거렸다.
두어 평되는 방 여섯 개가 나란히 마주 보는 아래채는 공동 화장실과 공동욕실로 만족해야 하는 세입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과는 이질적인 존재가 바로 지금 민희의 방에서 옷을 다리고 있는 석영이었다.
한 주를 소화할 출근 복을 다리는 데 집중한 석영이 이번엔 하늘색 블라우스를 집어 드는 모습은 명문대 퀸카처럼 고아했고 실제로도 알아주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물론 쪽방인 아래채와 달리 석영은 본채에서 집주인 황혜자와 살고 있기도 했다.
이래저래 심란한 민희는 다림질 중인 친구에게 한탄 비슷한 넋두리를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돈 많은 바지 씨 하나 꿰차면 나라도 제일 먼저 이 지긋지긋한 동네서 튀고 싶지 않겠어? 강남까지는 아니어도 변두리 오피스텔 얻어 주기로 했대. 성공했다는 징표지. 아아, 이렇게 몸매 가꾸고 치장하면 뭐하냐고. 내 진가를 알아주는 놈 하나 없는데.”
“왜 없어. 건넌방에 기봉 총각 있잖아.”
“됐거든. 내가 왜 한가득 마트 발길 끊고 빙 돌아 대박 마트까지 가는데? 생리대 계산하려고 줄 섰는데 왜 지가 얼굴을 붉혀. 하여튼 순진해 빠져가지고 그 나이 되도록 분명 숫총각이라는 데에 구두, 백, 아끼는 메이크업 박스까지 다 건다.”
“방 내놔야겠네. 황 선생님께 말씀드려야겠어.”
“윤석영, 지금 그게 급해? 누가 황 여사 따까리 아니랄까 봐. 아, 미안. 말이 좀 심했나? 하여튼 이 와중에 그 생각밖에 안 들어? 친구는 하루가 다르게 퇴물이 되어 가는데 걱정도 안 되니, 넌?”
“너처럼 아찔한 퇴물은 듣도 보도 못했네요.”
석영의 칭찬에 마음이 조금 풀린 민희가 더욱 세차게 허공으로 발을 굴렀다
“석영이 어디 있니?”
문 밖에서 들려오는 혜자의 부름에 민희가 눈동자를 굴렸다.
“양반은 못된다니까.”
“네, 가요!”
석영은 벌떡 일어나 다리미의 전원을 끄고 옷가지를 챙겨 나오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다리미 잘 썼어.”
“에휴, 하나 사서 써! 대기업 대리씩이나 되는 애가 이거 하나를 안 사고 빌려 쓰냐!”
매운 구박에도 빙그레 웃기만 하는 석영이 본채로 걸음을 서둘렀다.
“찾으셨어요?”
“아래채 세입자들하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라. 방세랑 공과금 걷을 때 말곤 말 섞어 봐야 하나 배울 것 없는 종자들이야.”
“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혜자의 올림머리가 칠흑처럼 검었다. 이번 염색은 좀 진하게 나온 편이었다. 문신한 눈썹은 인상을 더욱 차갑게 보이게 만들었고, 야매로 세운 코는 집게로 살짝 고정시켜 놓은 양 끝이 들려 있었다. 눈빛은 짙었으며 탄력과 풍만함을 잃지 않은 몸은 혜자의 자부심이었다.
“한 부사장 아들하곤 진척 없고?”
“최종 입찰가를 윗선에서 조율 중이라고 건너 듣긴 했습니다.”
혜자의 물음에 답하는 석영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지지부진하네. 정보에 진척이 있으려면 네가 한 부사장 아들하고 긴밀한 친분을 쌓아야 한다는 거, 알지?”
“굳이 그럴 필요 없을 만큼 생각과 입이 가벼운 사람이에요.”
“네가 내키지 않아 몸 사리는 건 아니고? 그까짓 몸뚱이 내주는 거 아무 의미 둘 필요 없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하니. 같지 않은 도덕성 어쩌고 하면서 쉽게 갈 길을 어렵게 돌아가는 거 미련스러워. 딱 질색이야.”
“네.”
“아, 그건 그렇고 자당 시장에 나물 할멈 알지? 수금 좀 해 와야겠다.”
“일수 안 찍었어요?”
“찍었으면 너 번거롭게 안 하지. 그거 처리하고 쉬도록 해. 난 찜질방에 좀 다녀오련다.”
일어서는 혜자를 빠르게 따라잡은 석영이 얼른 댓돌에 신고 나갈 신발을 반듯하게 정돈해 놓았다. 혜자가 대문을 나서 골목길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도 석영은 숙인 허리를 펴지 않았다.
“윤석영, 작작해라. 황 여사는 너 그러는 거 알지도 못해. 무슨 우상 숭배도 아니고 왜 그렇게 설설 기니?”
민희가 몸매를 강조하는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줄넘기를 들고 나오다 석영의 굽힌 허리를 비웃었다.
“내가 좋아서 그러는데, 뭐. 민희야, 나 시장에 좀 내려갔다 올게.”
“또 이자 달라고 행패 부리러 가니? 그러다 너 소문나서 혼삿길 막혀, 이것아. 아, 그건 그거고. 올 때 쥐포랑 소주 한 병만 사다 줘. 빨간 마크로, 알지? 클럽 영업 정지 먹는 바람에 요 며칠 집에만 있었더니 혈관에 알코올이 죄다 증발했는지 소독을 좀 해 줘야 해.”
심부름 시킬 때도 사연이 긴 민희에게 한 팔을 흔들어 보인 석영이 가파른 골목길을 내려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장은 장보는 인파로 복작거렸다. 기름내가 고소한 빈대떡 집, 정육점 므흣한 조명발 아래 거꾸로 매달린 살덩이, 떡집 폐백 샘플은 그림처럼 화려했다.
인간이 가지는 기본적인 욕구, 하다못해 식욕조차 잃은 지 오래인 석영이었다. 볼 것 많은 것들에 한눈팔 일 없이 석영은 오직 한곳을 향해 진격했다.
고무 대야 속 나물을 물에 불려 놓은 할머니가 얼마 남지 않은 쪽파를 다듬으며 허리를 펴다 다가오는 석영을 발견하곤 사색이 되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으니 뒤편 속옷 가게로 피하려던 작전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와, 왔어? 어째 볼수록 더 예뻐지네, 아가씨는.”
“됐고요. 왜 왔는지 아시죠? 주세요, 얼른.”
인정머리라곤 모기 얼굴만큼도 없는 년이었다. 독사라고 소문난 황혜자가 끼고 가르친 년인데다 고운 얼굴은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무표정해 더 섬뜩했다. 가만 들어 보면 나긋한 게 듣기 좋은 음색도 지금은 기계처럼 높낮이라곤 없었다. 지난번 건어물 집 주인은 딸이 보는 데서 온갖 면박을 당했다 하니 그나마 자신은 나은 편이었다.
“빨리요.”
“그럼 줘, 줘야지. 황 사장은 잘 있고?”
“수금이 돼야 잘 지내시죠.”
“저기, 우리 손자 녀석이 사고를 쳐서 거기 돈 들이붓느라 오늘은 일단 이것만 갖고 가. 내일 또 장사하고 돈 나오면 주……. 어어, 왜 이래. 그러지 마, 알았어. 줄게, 준다잖아!”
석영이 발로 지그시 밟아 눌러 고무 대야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잘름거리는 물과 함께 담가 놓은 나물이 아슬아슬한 위치에 놓이게 되자 다급하게 속바지 춤에서 돈을 보태 내놓는 상황이었다.
“다음엔 날짜 어기지 마세요.”
돈을 헤아려 주머니에 넣은 석영이 시장을 벗어나자 상인들이 소리 없는 삿대질을 해댔다. 독사 황혜자보다 더 한 년이라고 혀를 찼고 밤길 조심해야 될 거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석영은 시장 맨 끝 마트에서 쥐포와 소주가 든 봉지를 들고 다시 골목을 올랐다. 등허리론 갖은 원망과 악담이 들러붙어 끈적거렸다.
골목 중턱에 다다라 선정적인 낙서로 덧칠된 폐가 옥상으로 올라섰다. 그사이 기운 해를 대신해 가로등이 동네를 비추고 있었다. 저녁 바람이 석영의 고운 입술을 매만졌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을 거두는 야위고 하얀 손목 안쪽으로 갈색으로 착색되었지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흉터 자국이 이질적이었다. 고운 얼굴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색무취함으로 거리감을 주기도 했고 호기심과 신비로움으로 비춰지게도 했다.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으려니 먀오, 어디선가 잿빛 길 고양이가 석영을 마주하고 있었다.
“안녕?”
혀를 날름거리는 시선은 석영 곁의 비닐 봉투에 머물러 있었다.
“너 개코다. 아니, 고양이 콘가? 쥐포가 먹고 싶니?”
길게 찢어 던져 주자 텁텁, 작은 골이 울리도록 옹골차게 씹어 넘겼다.
“어차피 민희한테 혼날 거니까.”
안주는 길 고양이에게 넘기고 소주의 마개를 비틀어 병째 나발을 부는 석영이었다. 한 병 다 들이킬 작정은 아니어서 허물어진 벽 틈에 남은 술을 키핑해 놓았다. 주량이 세지 않은 데다 석영은 주 5일을 근무하는 직장인이었다.
연말 정기 인사 시즌부터 선진 건설 외주 구매 팀으로 젊은 팀장이 내정됐다는 소문이 모락거리더니 지난주 드디어 인사 변동이 공지되었다. 한 사람씩 면담 내지는 평가할 확률이 높다는 말이 떠돌았고 줄곧 해외 지사에서 근무하다 첫 국내 입성이라 무척이나 까다로울 거라는 예상이었다.
내일은 근태며 옷차림, 입사 후 업무 경력까지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다
“일어나자! 첫날부터 지각해 눈 밖에 나면 곤란하니까.”
투덕투덕 계단을 내려설 때까지 줄곧 뒤따르던 길 고양이가 돌아보는 석영과 눈이 마주쳤다.
“따라오지 마. 이젠 줄 게 없어. 정말 나한텐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어.”

* * *

회사 로비의 시계가 일곱 시를 갓 넘기고 있었다.
너무 이른가? 그때부턴 느긋하게 검색대를 통과했고 혼잡하지 않을 엘리베이터 생각에 여유롭게 걸었다. 그럼에도 막 문이 닫혀 가는 엘리베이터를 놓치긴 아까워 걸음을 서둘렀다. 석영은 기다려 준 상대를 제대로 확인도 않고 고맙다는 인사부터 건넸다.
“뭘. 내 오피스 와이프한테 이 정도도 못 해 주나?”
느물거리는 속삭임. 허리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손길이 불쾌했지만 석영이 상대를 보았을 땐 눈부신 미소가 준비돼 있었다.
“지석 씨, 일찍 나왔네?”
석영이 환한 미소를 곁들여 아는 체하자 탄력 받은 지석의 손이 이제는 허리춤을 떠나 엉덩이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수줍음으로 포장된 거부는 지석을 더욱 달뜨게 만들 뿐이었다.
“그럼 우리 석영이 걱정 안 하게 닫힘 버튼 꾸욱, 누르고…….”
일부러 석영을 품에 가둔 채 과도하게 몸을 기울여 버튼을 누르는 지석이었다.
“됐지? 자, 이제 키스 들어간다. 주말동안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끌어 안겨진 채 석영의 등허리가 닫혀 가는 문 쪽으로 밀쳐졌다.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미끌거리는 입술이 그녀의 얼굴로 쏟아지듯 내려왔다.
한지석. 같은 외주 구매 팀 대리였지만 전형적인 금수저에 낙하산이었다. 본인의 자랑 질 덕분에 부친이 선진 건설 부사장임을 모르는 이는 드물었고 수준 이하의 행동을 참아 내는 석영의 인내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아, 윤석영. 널 보기만 해도 내 물건이 단단하게 서 버린다고.”
석영의 손을 붙잡아 제 바지 앞섶에 갖다 대며 슬쩍 위아래로 비벼 대던 그때, 5층을 알리는 고아한 안내 멘트가 울려 퍼졌다.
부리나케 떨어진 두 사람의 흐트러진 호흡을 알아채지 못한 듯 합류한 남자는 가벼운 목례 후, 즉시 등을 보이고 섰다. 정작 천막이 형성된 아랫도리 탓에 어정쩡한 자세로 들썩이던 지석이 닫혀 가던 문을 비집고 후다닥 빠져나가 버렸고 갇힌 공간 속 특유의 어색한 기류는 오롯이 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내려야 할 20층까지는 멀었고 임원 집무실, 일명 로열층인 22층 버튼을 누른 승객은 그녀보다 더 늦게 내릴 상황이었다. 다행히 남자보다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데다 약속이나 한 듯 층수를 가리키는 액정을 보고 있으니 얼굴 마주할 일은 없어 보였다.
상승하는 기계음이 청각으로, 매력적인 세이브 향이 석영의 후각으로 스며들었다. 촉이 둔한 게 유일한 단점이라 생각하며 석영은 근사한 남자의 뒤태를 여유롭게 감상했다.
캐시미어 코트 아래로 드러난 곧은 다리, 반듯한 어깨와 하다못해 고급스런 재질의 브리프 케이스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향하는 층이나 풍기는 위압감으로 보아 임원 같지만 이렇게 눈에 띄는 풍모라면 자신이 모를 일이 없을 텐데, 속으로 중얼거렸다.
“최소한 미안해해야 할까요?”
자신에게 던진 물음인 줄 몰랐던 석영이 멈칫하는 사이 이젠 몸을 돌려 작정하고 바라보는 남자였다. 잠깐 마주친 눈빛이 지나치게 강렬해 휙, 외면하기 바빴다.
“본의 아니게 훼방꾼이 된 건 아닌가 해서.”
“아닙니다.”
눈 맞출 용기는 없지만 대답만큼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튀어나왔다. 사실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인내를 쏟아부어 20층까지 한지석을 견뎌 내야 했었다.
“사내 커플이 금기는 아니지만 사실 이 정도 수위까지는 생각 못 했거든요. 선진 건설의 첫인상은 뭐랄까, 꽤 강렬하다 할까요? 하하.”
뭐라는 거야? 셔츠 깃 위로는 절대 시선을 주지 않고 버텨 낸 석영이 드디어 20층에 다다랐다. 의례적인 목례 후 그 안을 벗어날 때의 심정이란…… 그래, 출소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재수감된 기분이 든 건 정갑재 본부장과 동행한 그 남자를 본 직후였다. 두바이를 포함, 중동 지역 플랜트 사업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인재라고 했다.
본부장의 장황한 소개말을 축약하자면 ‘같이 근무하게 된 것 만으로도 영광인줄 알아, 이것들아’ 였다. 게다가 5층에서 허둥지둥 달아났던 지석은 신임 팀장이 엘리베이터에서 합류한 인물임을 모르는 눈치여서 이번에도 절망은 석영의 몫이었다. 직급별 내림차순으로 대오를 정렬한 외주 구매 팀 전 직원이 신임 팀장과 경건하게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다.
석영의 차례가 도래했고 관례적인 통성명과 아이 컨택이 이어졌다,
“차우진입니다. 반가워요.”
“윤석영 대리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요. 초면도 아닌데 긴장 풀고.”
차라리 엘리베이터의 불편했던 합승이 그가 말하는 전부이길 염원했다. 손과 손이 겹쳐지며 잠시 흔들린 건 5초도 안 되는 시간인데 맨살이 마주 닿는 순간, 그리고 다시 멀어지는 순간이 타임 슬립의 한 단면처럼 어질했다.
단지 부적절한 행동을 목격한 존재가 신임 팀장이라는 곤욕스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사람, 어디서 봤더라?
구면임을 강조하는 팀장의 묘한 뉘앙스에 기억의 침전물들이 거세게 요동치며 반응해 왔다.
“몸 안 좋아?”
두 살 터울 남매를 둔 슈퍼우먼 유진주 과장이 석영의 파리한 낯을 염려했다.
“카리스마 갑이긴 하다. 윤 대리도 저 야생의 기에 눌려 휘청한 거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석영은 어쩐지 안심이 되어 상관에게 동의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