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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없이 고품격
1화
Prologue
“이사님, 박 감독님께서 시나리오 4화 수정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드라마 스케줄 표를 들고 있는 조감독이 혜정에게 말했다. 혜정은 피곤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그냥 다 마음에 안 든다죠? 수정, 사양한다고 전해요.”
서른한 살, 박혜정. 드라마·영화 제작사에서 작가이자 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같은 제작사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배우이기도 하다.
혜정의 말에 조감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꼭 수정해 주십사 하시던데요. 박 감독님 신경이 또…….”
“예민해졌어요? 막 똥고집 부리면서 짜증 내?”
“예…….”
조감독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 감독이라는 사람에게 얼마나 볶였으면 저럴까. 혜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핸드백을 챙긴 뒤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조감독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이사님! 어디 가세요?”
“저녁 약속 있어서요. 왜요?”
“아, 안 돼요. 수정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세요! 많은 수정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 부분만요. 아님 저 진짜 감독님한테 죽어요.”
“그걸 왜 조감독님한테 전달하래요? 보고 또 봐도 이상한 분이시네.”
이젠 거의 울기 직전이다. 이 사람은 참 작은 일에도 눈물이 많더라. 혜정은 긴 한숨을 내쉬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 그 박 감독이라는 님이랑 저녁 약속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럼 저 퇴근합니다!”
그녀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주차장으로 내려가 고급스러운 검은 승용차를 타고 회사 건물을 빠져나갔다.
차를 출발시키고 얼마 후, 혜정은 약속 장소로 향하다 말고 차창을 내렸다. 봄바람이 살며시 불어와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어느새 다시 봄이네. 사랑하기 딱 좋은 날.”
언젠가, 첫 연애의 시작은 스물셋에서 스물다섯 살이 가장 적합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에는 동의하는 댓글보단 비난 댓글이 많았다. 요즘 누가 스무 살 넘어서 처음 연애를 하냐는 비난 댓글이었다.
하지만 혜정의 생각은 달랐다. 글쓴이가 말한 첫 연애의 시작이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나이를 뜻한 것 같았다. 혜정 본인이 스물세 살 때 그런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글쓴이의 글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때 했던 사랑은 그야말로 깊고,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생각만으로도 아련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스물세 살의 나. 그땐 뭐가 그리 무서웠을까…….”
벌써 8년이나 지난 스물세 살 그녀의 사랑 이야기. 그때의 자신은 지금에 와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린 풋내기였으며, 두려움이 많고 생각도 많았다. 그리고 그때 그를 만났다.
제 1화 나랑 사귈래?
선선하던 날씨가 조금씩 싸늘해지기 시작하는 11월. 몇 주 동안 분주하게 달린 영화 촬영을 끝내고 쫑파티가 열렸다. 모든 스텝을 비롯해 배우들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고기를 안주 삼아 술을 먹고 있었다. 혜정 역시 그 자리에 참석했다.
혜정이 눈 밑에 그늘이 자리 잡아 퀭한 얼굴로 앉아 있으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박권호 감독이 그녀를 보며 픽 웃었다. 왜 웃나 싶어 멍한 눈으로 박권호 감독에게 시선을 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다 죽어 가네?”
“네. 다시는 스텝 안 할 거예요…….”
혜정은 울상을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박권호 감독은 씩 웃더니 소주병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혜정 역시 반사적으로 술잔을 내밀자, 박권호 감독이 혜정의 술잔에 술을 부어 주며 말했다.
“수고했다. 배우이자 작가가 스텝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지. 그래도 혜정이 네가 많이 배웠을 거라 생각해.”
“네. 뒤에서 정말 고생하시더라고요. 전 몰랐거든요. 앞으로 연기든 글이든 잘하고 잘 쓸 거예요!”
그랬다. 혜정은 스텝이 아니라 스물세 살의 신인 배우였고, 로맨스 소설 작가였다. 혜정을 특별히 아끼는 박권호 감독은 그녀가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시나리오를 집필해 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의를 했다. 그 덕에 혜정은 처음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어릴 적 꿈을 박권호 감독의 도움으로 이루게 된 것이다.
박권호 감독이 혜정을 생각해 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어린 그녀가 좀 더 깊고 큰 성장을 하길 바랐다. 그래서 직접 쓴 작품이 어떻게 영상으로 만들어지는지 가까이서 배우라고 했고, 그 덕에 영화 출연도 안 하는 혜정이 지금 이 자리에 스텝으로 있는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스텝 일을 하게 된 혜정은 식겁할 뻔했다. 영화를 위해 잠 못 자는 건 기본이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니 홀로 굼뜰 수도 없었다.
온몸에 긴장을 하고 있었던 터라 영화 촬영이 끝난 지금에 와서 보니 몸살 한번 거하게 앓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박권호 감독은 흡족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접시에 있는 고기 한 점을 집어 혜정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혜정은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뒤 박권호 감독이 준 고기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제작 이사인 양 PD와 함께 밖에서 고기를 굽고 있던 희대가 혜정이 있는 바비큐장 안으로 들어왔다. 희대는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에 벌써부터 조감독의 직명을 갖고 일을 하고 있었고, 박권호 감독의 장남이기도 했다.
바비큐장 안으로 들어온 희대의 손에는 고기를 잔뜩 올린 접시가 들려져 있었다. 접시에 담긴 고기를 여기저기 나눠 주자, 사람들은 그에게 수고한다며 술을 한 잔씩 권했다. 희대는 성격상 어른들이 내미는 술을 거절할 수 없었는지 주는 족족 받아 마신 뒤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혜정은 그런 희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과 겨우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왜 이리 성숙하고 멋있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술 때문인지, 피곤함 때문인지 그를 바라보는 혜정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가슴까지 콩닥콩닥 뛰고 있으니 틀림없는 짝사랑 중이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배우 송수진이 혜정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놀리는 어투로 소곤거렸다.
“혜정아, 꿀 떨어진다.”
“네, 네?”
혜정은 당황한 표정으로 수진을 쳐다봤다. 아니, 솔직히 희대가 들었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좋아?”
“아,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 거…….”
혜정은 중얼거리며 민망함에 고개를 숙이고 술잔을 비워 냈다. 수진은 혜정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킥킥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대는 혜정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멀어졌다.
혜정은 가 버린 그를 보며 아쉬움 가득한 시선으로 살며시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늦은 새벽까지 이어진 촬영으로 겨우 씻고 잠들었을 때였다. 약 한 시간쯤 흐르자 날이 밝았고, 누군가 잠든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느낌이 들었다.
혜정은 투박하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람은 누구일까 싶었다. 잠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힘겹게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희대였다.
‘꿈꾸나? 하……. 이러다 곧 상사병 걸릴 것 같아. 그래도 좋다. 꿈이면 안 깼으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희대의 모습이 촬영이 다 끝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4년 동안 사랑 한 번 하지 않았던 혜정이 오래간만에 깊은 짝사랑 중이니, 비록 꿈이라 할지라도 그 설렘을 어찌 잊으랴.
“오늘이 지나면 이제 못 보는데…….”
혜정은 아쉬운 마음이 들어 희대를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촬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희대가 친근하게 접근해 준 덕분에 대화 몇 마디는 나눴지만, 혹시나 속내가 들킬까 하는 부끄러운 마음에 그를 피한 적도 많았다. 그러니 이대로 오늘을 놓치긴 아쉬웠다.
혜정은 비장한 표정으로, 그러나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고기 굽고 있는 희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수진도 따라서 일어나는 게 아닌가.
혜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수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요?”
“답답해서. 왜?”
“아니에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건 혜정이었지만 앞장선 건 수진이었다. 혜정은 수진을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동시에 차가운 공기가 혜정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이렇게 추운데 희대는 밖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으니, 얼마나 추웠을까. 그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혜정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진 못하고 주위만 어물쩍거렸다. 그런 와중에 함께 나온 수진이 아무렇지 않게, 마치 보란 듯이 희대 곁에 서서 말을 걸었다.
‘저 언니 또 저러네? 촬영 내내 붙어서 같이 담배 피우고 말장난하더니. 조감독님도 수진 언니 말 받아 주는 거 보면 진짜 마음이 있는 거 아냐……?’
꼭 고백했다가 차인 느낌이 들어 마음이 아릿해져왔다. 동시에 ‘오늘이 지나면 끝이니 이 마음 역시 끝내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혜정은 남몰래 긴 한숨을 푹 내쉬고 양 PD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릴 옆 테이블에 긴 소시지가 있는 게 아닌가. 소시지! 짜지만 않다면 혜정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혜정은 어린아이처럼 미소 지으며 양 PD에게 조르듯 말했다.
“우와! 소시지다! PD님, 저 소시지 먹고 싶어요! 소시지 구워주세요!”
“있어 봐. 이제 구울 거야.”
양 PD의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어느새 옆에 서 있던 희대가 소시지 비닐을 뜯었다. 누가 봐도 혜정이 먹고 싶단 말 다음으로 이어진 행동 같긴 한데, 이 역시도 혜정은 착각이라 여겼다.
혜정의 머릿속이 복잡해진 사이 다 구워진 고기는 옆으로 비켜나고, 혜정이 먹고 싶다던 소시지들이 그릴 판 위에 자리 잡고 누웠다. 혜정은 입맛을 다시며 빨리 소시지가 구워지길 기다렸다.
그런 혜정을 보고 있던 희대가 픽 웃었다. 혜정은 왜 웃나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시선을 뒀다.
“왜요?”
“그냥.”
“아. 그나저나 얼굴이 빨개요. 술 많이 드셨어요?”
“조금. 아니, 그냥 피곤해서 그래.”
“아…….”
하긴, 촬영 내내 제대로 된 숙면 한 번 취하지 못했고, 촬영이 끝났음에도 쉬지 못하고 이렇게 서 있으니 피곤할 법했다. 더구나 어른들이 주는 술까지 마다치 않고 받아먹었지 않은가.
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쓰러운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도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 안 추워? 옷 좀 입어라.”
혜정은 시선을 내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이 싸늘한 날씨에 브이넥 셔츠와 레깅스만 입고 있으니 추워 보이긴 할 것이다. 혜정은 다시 희대를 보며 생긋 웃었다.
“괜찮아요.”
“괜찮기는. 하여간 더럽게 말 안 들어.”
“헤헤.”
그때 양 PD가 접시에 고기를 담은 뒤 희대에게 내밀며 말했다.
“희대야, 이거 안에 나눠 주고 와라.”
“네.”
희대는 접시를 받아 든 뒤 다시 바비큐장 안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대화가 끊기자 혜정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멀어진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아, 좀! 그만 잊자니까.”
그때 근처에서 동료와 담소를 나누던 조명팀 김경훈 감독이 혜정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아?”
혜정은 자연스럽게 숙인 고개를 들고 김경훈 감독이 내민 빈 잔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혜정의 잔에 술을 채워 준다.
“수고했다, 혜정아.”
“감독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아니야. 그런데 차기작 영화는 어떤 작품이니?”
“아, 헤로인이요?”
작품 얘기가 나오니 작가로서 혜정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차기작 역시 김경훈 감독이 참여하나 보다. 개인적으로 김경훈 감독을 존경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혜정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1화
Prologue
“이사님, 박 감독님께서 시나리오 4화 수정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드라마 스케줄 표를 들고 있는 조감독이 혜정에게 말했다. 혜정은 피곤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그냥 다 마음에 안 든다죠? 수정, 사양한다고 전해요.”
서른한 살, 박혜정. 드라마·영화 제작사에서 작가이자 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같은 제작사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배우이기도 하다.
혜정의 말에 조감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꼭 수정해 주십사 하시던데요. 박 감독님 신경이 또…….”
“예민해졌어요? 막 똥고집 부리면서 짜증 내?”
“예…….”
조감독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 감독이라는 사람에게 얼마나 볶였으면 저럴까. 혜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핸드백을 챙긴 뒤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조감독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이사님! 어디 가세요?”
“저녁 약속 있어서요. 왜요?”
“아, 안 돼요. 수정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세요! 많은 수정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 부분만요. 아님 저 진짜 감독님한테 죽어요.”
“그걸 왜 조감독님한테 전달하래요? 보고 또 봐도 이상한 분이시네.”
이젠 거의 울기 직전이다. 이 사람은 참 작은 일에도 눈물이 많더라. 혜정은 긴 한숨을 내쉬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 그 박 감독이라는 님이랑 저녁 약속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럼 저 퇴근합니다!”
그녀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주차장으로 내려가 고급스러운 검은 승용차를 타고 회사 건물을 빠져나갔다.
차를 출발시키고 얼마 후, 혜정은 약속 장소로 향하다 말고 차창을 내렸다. 봄바람이 살며시 불어와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어느새 다시 봄이네. 사랑하기 딱 좋은 날.”
언젠가, 첫 연애의 시작은 스물셋에서 스물다섯 살이 가장 적합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에는 동의하는 댓글보단 비난 댓글이 많았다. 요즘 누가 스무 살 넘어서 처음 연애를 하냐는 비난 댓글이었다.
하지만 혜정의 생각은 달랐다. 글쓴이가 말한 첫 연애의 시작이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나이를 뜻한 것 같았다. 혜정 본인이 스물세 살 때 그런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글쓴이의 글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때 했던 사랑은 그야말로 깊고,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생각만으로도 아련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스물세 살의 나. 그땐 뭐가 그리 무서웠을까…….”
벌써 8년이나 지난 스물세 살 그녀의 사랑 이야기. 그때의 자신은 지금에 와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린 풋내기였으며, 두려움이 많고 생각도 많았다. 그리고 그때 그를 만났다.
제 1화 나랑 사귈래?
선선하던 날씨가 조금씩 싸늘해지기 시작하는 11월. 몇 주 동안 분주하게 달린 영화 촬영을 끝내고 쫑파티가 열렸다. 모든 스텝을 비롯해 배우들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고기를 안주 삼아 술을 먹고 있었다. 혜정 역시 그 자리에 참석했다.
혜정이 눈 밑에 그늘이 자리 잡아 퀭한 얼굴로 앉아 있으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박권호 감독이 그녀를 보며 픽 웃었다. 왜 웃나 싶어 멍한 눈으로 박권호 감독에게 시선을 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다 죽어 가네?”
“네. 다시는 스텝 안 할 거예요…….”
혜정은 울상을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박권호 감독은 씩 웃더니 소주병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혜정 역시 반사적으로 술잔을 내밀자, 박권호 감독이 혜정의 술잔에 술을 부어 주며 말했다.
“수고했다. 배우이자 작가가 스텝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지. 그래도 혜정이 네가 많이 배웠을 거라 생각해.”
“네. 뒤에서 정말 고생하시더라고요. 전 몰랐거든요. 앞으로 연기든 글이든 잘하고 잘 쓸 거예요!”
그랬다. 혜정은 스텝이 아니라 스물세 살의 신인 배우였고, 로맨스 소설 작가였다. 혜정을 특별히 아끼는 박권호 감독은 그녀가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시나리오를 집필해 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의를 했다. 그 덕에 혜정은 처음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어릴 적 꿈을 박권호 감독의 도움으로 이루게 된 것이다.
박권호 감독이 혜정을 생각해 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어린 그녀가 좀 더 깊고 큰 성장을 하길 바랐다. 그래서 직접 쓴 작품이 어떻게 영상으로 만들어지는지 가까이서 배우라고 했고, 그 덕에 영화 출연도 안 하는 혜정이 지금 이 자리에 스텝으로 있는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스텝 일을 하게 된 혜정은 식겁할 뻔했다. 영화를 위해 잠 못 자는 건 기본이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니 홀로 굼뜰 수도 없었다.
온몸에 긴장을 하고 있었던 터라 영화 촬영이 끝난 지금에 와서 보니 몸살 한번 거하게 앓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박권호 감독은 흡족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접시에 있는 고기 한 점을 집어 혜정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혜정은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뒤 박권호 감독이 준 고기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제작 이사인 양 PD와 함께 밖에서 고기를 굽고 있던 희대가 혜정이 있는 바비큐장 안으로 들어왔다. 희대는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에 벌써부터 조감독의 직명을 갖고 일을 하고 있었고, 박권호 감독의 장남이기도 했다.
바비큐장 안으로 들어온 희대의 손에는 고기를 잔뜩 올린 접시가 들려져 있었다. 접시에 담긴 고기를 여기저기 나눠 주자, 사람들은 그에게 수고한다며 술을 한 잔씩 권했다. 희대는 성격상 어른들이 내미는 술을 거절할 수 없었는지 주는 족족 받아 마신 뒤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혜정은 그런 희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과 겨우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왜 이리 성숙하고 멋있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술 때문인지, 피곤함 때문인지 그를 바라보는 혜정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가슴까지 콩닥콩닥 뛰고 있으니 틀림없는 짝사랑 중이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배우 송수진이 혜정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놀리는 어투로 소곤거렸다.
“혜정아, 꿀 떨어진다.”
“네, 네?”
혜정은 당황한 표정으로 수진을 쳐다봤다. 아니, 솔직히 희대가 들었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좋아?”
“아,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 거…….”
혜정은 중얼거리며 민망함에 고개를 숙이고 술잔을 비워 냈다. 수진은 혜정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킥킥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대는 혜정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멀어졌다.
혜정은 가 버린 그를 보며 아쉬움 가득한 시선으로 살며시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늦은 새벽까지 이어진 촬영으로 겨우 씻고 잠들었을 때였다. 약 한 시간쯤 흐르자 날이 밝았고, 누군가 잠든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느낌이 들었다.
혜정은 투박하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람은 누구일까 싶었다. 잠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힘겹게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희대였다.
‘꿈꾸나? 하……. 이러다 곧 상사병 걸릴 것 같아. 그래도 좋다. 꿈이면 안 깼으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희대의 모습이 촬영이 다 끝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4년 동안 사랑 한 번 하지 않았던 혜정이 오래간만에 깊은 짝사랑 중이니, 비록 꿈이라 할지라도 그 설렘을 어찌 잊으랴.
“오늘이 지나면 이제 못 보는데…….”
혜정은 아쉬운 마음이 들어 희대를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촬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희대가 친근하게 접근해 준 덕분에 대화 몇 마디는 나눴지만, 혹시나 속내가 들킬까 하는 부끄러운 마음에 그를 피한 적도 많았다. 그러니 이대로 오늘을 놓치긴 아쉬웠다.
혜정은 비장한 표정으로, 그러나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고기 굽고 있는 희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수진도 따라서 일어나는 게 아닌가.
혜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수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요?”
“답답해서. 왜?”
“아니에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건 혜정이었지만 앞장선 건 수진이었다. 혜정은 수진을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동시에 차가운 공기가 혜정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이렇게 추운데 희대는 밖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으니, 얼마나 추웠을까. 그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혜정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진 못하고 주위만 어물쩍거렸다. 그런 와중에 함께 나온 수진이 아무렇지 않게, 마치 보란 듯이 희대 곁에 서서 말을 걸었다.
‘저 언니 또 저러네? 촬영 내내 붙어서 같이 담배 피우고 말장난하더니. 조감독님도 수진 언니 말 받아 주는 거 보면 진짜 마음이 있는 거 아냐……?’
꼭 고백했다가 차인 느낌이 들어 마음이 아릿해져왔다. 동시에 ‘오늘이 지나면 끝이니 이 마음 역시 끝내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혜정은 남몰래 긴 한숨을 푹 내쉬고 양 PD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릴 옆 테이블에 긴 소시지가 있는 게 아닌가. 소시지! 짜지만 않다면 혜정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혜정은 어린아이처럼 미소 지으며 양 PD에게 조르듯 말했다.
“우와! 소시지다! PD님, 저 소시지 먹고 싶어요! 소시지 구워주세요!”
“있어 봐. 이제 구울 거야.”
양 PD의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어느새 옆에 서 있던 희대가 소시지 비닐을 뜯었다. 누가 봐도 혜정이 먹고 싶단 말 다음으로 이어진 행동 같긴 한데, 이 역시도 혜정은 착각이라 여겼다.
혜정의 머릿속이 복잡해진 사이 다 구워진 고기는 옆으로 비켜나고, 혜정이 먹고 싶다던 소시지들이 그릴 판 위에 자리 잡고 누웠다. 혜정은 입맛을 다시며 빨리 소시지가 구워지길 기다렸다.
그런 혜정을 보고 있던 희대가 픽 웃었다. 혜정은 왜 웃나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시선을 뒀다.
“왜요?”
“그냥.”
“아. 그나저나 얼굴이 빨개요. 술 많이 드셨어요?”
“조금. 아니, 그냥 피곤해서 그래.”
“아…….”
하긴, 촬영 내내 제대로 된 숙면 한 번 취하지 못했고, 촬영이 끝났음에도 쉬지 못하고 이렇게 서 있으니 피곤할 법했다. 더구나 어른들이 주는 술까지 마다치 않고 받아먹었지 않은가.
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쓰러운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도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 안 추워? 옷 좀 입어라.”
혜정은 시선을 내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이 싸늘한 날씨에 브이넥 셔츠와 레깅스만 입고 있으니 추워 보이긴 할 것이다. 혜정은 다시 희대를 보며 생긋 웃었다.
“괜찮아요.”
“괜찮기는. 하여간 더럽게 말 안 들어.”
“헤헤.”
그때 양 PD가 접시에 고기를 담은 뒤 희대에게 내밀며 말했다.
“희대야, 이거 안에 나눠 주고 와라.”
“네.”
희대는 접시를 받아 든 뒤 다시 바비큐장 안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대화가 끊기자 혜정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멀어진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아, 좀! 그만 잊자니까.”
그때 근처에서 동료와 담소를 나누던 조명팀 김경훈 감독이 혜정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아?”
혜정은 자연스럽게 숙인 고개를 들고 김경훈 감독이 내민 빈 잔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혜정의 잔에 술을 채워 준다.
“수고했다, 혜정아.”
“감독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아니야. 그런데 차기작 영화는 어떤 작품이니?”
“아, 헤로인이요?”
작품 얘기가 나오니 작가로서 혜정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차기작 역시 김경훈 감독이 참여하나 보다. 개인적으로 김경훈 감독을 존경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혜정은 반갑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