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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없이 고품격
2화
“어, 그래. 헤로인! 스릴러라며?”
“네. 레즈비언 이야기예요. 집착과 소유욕 때문에 살인을 하는데, 나중엔 시신을 해부해서 고기로 먹기도 해요.”
“으…… 징그럽다야.”
아무렇지 않게 차기작 얘기를 하는 혜정과 달리 김경훈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치를 떨었다. 혜정은 ‘그런가요?’ 하며 너스레웃음을 짓고 말았다. 차기작 역시 박권호 감독 덕에 준비 중인 작품이었기에 기대가 컸다. 무엇보다 혜정이 직접 쓰고 배우로 출연할 작품이라 더 그런 건지도 모른다.
김경훈 감독은 기대하고 있겠다는 말을 끝으로 다시 동료들 곁으로 가 버렸다. 혼자 남은 혜정은 엷게 미소 지은 채로 손에 쥔 잔을 비워냈다.
그때였다. 혜정의 눈앞에 긴 소시지가 떡하니 나타났다. 놀라 옆을 보자, 언제 왔는지 희대가 손을 뻗어 혜정에게 소시지를 내밀고 있었다.
“깜짝이야…….”
혜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가 내민 소시지를 받아 쥐었다. 잡기 좋게 나무젓가락으로 꽂아 주는 친절함까지 보이니 별거 아닌데도 감동이 느껴졌다. 혜정은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고 희대에게 살며시 내밀었다.
“안 먹어.”
정말 먹고 싶지 않았는지 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에게 내민 손이 무안해졌다. 혜정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희대가 갑자기 혜정의 손에 있는 소시지를 뺏어 입에 다 넣어 버렸다.
안 먹겠다던 그가 혜정의 표정 변화로 인해 행동을 달리하니 놀라우면서도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안 드신다면서요.”
“아니 그냥.”
“치……. 흐읏! 하, 이제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그럼 조감독님, 내일 뵐게요.”
혜정은 씩 웃다가 뻐근한 몸에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그와 더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대로 있다간 내일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술을 먹어서 그런지 피로가 적지 않게 쌓인 탓이다.
혜정은 희대에게 짧은 인사를 끝으로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짐이 있는 2층 방으로 들어온 혜정은 반쯤 풀린 눈을 비비며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거울 앞에 멍하니 서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더니 무언가 떠올랐는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 바보. 세면도구를 안 가지고 들어왔네.”
그렇게 말하며 몸을 틀어 욕실을 나올 때였다.
“깜짝이야! 왜, 왜 여기 계세요?”
혜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에 희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등장이 혜정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따라왔지.”
희대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혜정은 최대한 그와 가까운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따라왔다고요? 왜요?”
“얘기 좀 하고 싶어서.”
“무슨……?”
그와 단둘이 있게 된 고요한 방 안. 귀 기울여 밖의 동태를 살피니 다들 술에 취했거나 아직 식지 않은 쫑파티로 정신없어 보였다. 물론 함께 방을 쓰는 수진까지. 희대의 앞이라 최대한 조신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쿵쿵거리는 가슴은 진정될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냥 이것저것. 왜? 싫어?”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갑작스러워서요.”
혜정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희대가 말을 잇는다.
“이번 촬영하는 동안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했다고 했나?”
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물음대로 혜정은 원래 부산 사람이었다. 서울로 이사할 계획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하필이면 촬영 스텝으로 일할 때 이사를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네. 엄마 혼자 이사를 하셨어요.”
“그럼 앞으로 서울에 사는 거야?”
“네.”
“어디 살아?”
“가산동이요.”
대답과 동시에 희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멀다. 그 동네는 양아치들밖에 없어서 소개 못 해 주는데.”
‘뭐지? 왜 저런 말을 하지?’
어쩌면 김칫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생각이 연달아 들기 시작했다. 촬영 준비 하는 동안 혹시나 한 적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과 지금 그의 행동은 유난히도 오해하기에 딱 좋았다.
“뭘 소개해 줘요?”
“그냥. 너랑 어울릴 만한…….”
‘동생 같은 애가 타지에 왔다고 하니 챙겨 주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한번 그의 마음을 떠보고 싶은 심산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혜정은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감독님을 소개해 주세요.”
혜정의 대답 이후로 고요한 침묵이 맴돌았다. 희대가 침묵을 만든 것이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혜정은 자신이 희대에게 무슨 말실수를 했나 싶어 불안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침묵을 오래 끌지 않았다.
“난 부족한 게 많고,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네가 힘들지도 몰라.”
“…….”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싶어 혜정은 입술을 다문 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 혜정을 보며 희대는 조심스럽게 이어 말했다.
“그래도 난 너 만나 보고 싶은데.”
“네?”
“나랑 사귈래? 잘해 줄게.”
혜정은 충격으로 인해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낯선 짝사랑이란 마음을 꼭꼭 숨긴 채 ‘이젠 잊어야지.’, ‘그만해야지.’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었다. 그런데 그가 고백하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어서 걱정이 들었다.
‘내가 연애를 한다고? 난 지금 안정된 게 없는데, 과연 속 편히 연애할 수 있을까? 더구나 난 나를 숨기고 방어하는 성격인데……. 이 사람이 힘들지 않을까?’
짧은 초시에 여러 고민과 걱정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런 혜정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희대는 혜정이 대꾸가 없자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왜? 싫어?”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분명 후회하지 않을까? 이 남자 덕에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분명 안식처가 되어 주겠지. 내가 많이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진심을 바라본 결과, 혜정은 활짝 웃으며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좋아요. 저 조감독님 좋아해요.”
혜정의 대답을 듣고서야 희대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행이다. 이리 와. 한번 안아 보자.”
희대는 두 팔 벌리며 말했다. 잠시 주춤거리던 혜정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따뜻하고, 아늑했다. 하지만 그가 워낙 꼭 안아 준 덕에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전해질까 초조함도 들었다. 그때 희대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잘해 줄게.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는데, 이게 맞는 것 같아.”
“……고맙습니다, 정말.”
혜정은 희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혹여 누가 볼까 화들짝 놀란 혜정은 그의 품에서 나와 문 앞으로 다가갔다. 희대는 혜정이 왜 그러는지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혜정은 방문 밖을 살피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희대는 몸을 일으켜 조금은 조심스럽게 혜정 옆에 붙어 앉았다. 그러곤 그녀의 뺨에 손을 얹고 이마를 맞댔다.
“나 지금 추하지? 면도 안 해서 수염도 나고…….”
“아니요. 멋있어요.”
혜정의 대답에 그는 또 씩 웃었다. 술에 취했고, 피곤한 상태인데도 그를 향한 마음은 여전히 설레고 있었다. 아마 희대에게 반한 이유는 지금 짓고 있는 이 미소 때문일 것이다. 틀림없다. 그만큼 그는 웃는 게 멋스러우니까.
“키스해도 돼?”
이어진 달콤한 속삭임에 혜정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입술과 함께 혜정의 두 눈이 자연스럽게 감겼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 촉감에 온몸이 전이되듯 찌릿했다.
한참의 키스 끝에 천천히 눈을 떴을 땐, 두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당황한 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 뭐 해?”
제 2화 침대 위, 바뀐 여자
둘만의 오붓한 시간 속에 갇혀 있던 혜정과 희대는 수진의 방해로 금세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랑의 현장을 발견한 수진은 마치 로봇처럼 뻣뻣해진 몸을 틀었다. 혜정은 기겁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수진의 팔을 붙잡았다.
“언니, 잠깐만요! 오해는 풀고 가야죠!”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몰려들어 혜정은 거의 울기 직전인 표정으로 수진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놀란 토끼 눈이던 수진은 어서 빨리 낯 뜨거운 이 현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힘으로 혜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긴 벅찼다.
“아니야, 아니야! 나 아무것도 못 봤어! 이건 놔주고 하던 거 계속해.”
“아니요, 안 돼요! 오해 풀고 가요! 방금 잘못 본 거예요!”
“그러니? 내 눈으로 뭔가 보긴 봤는데…….”
이 정도쯤 되면 차라리 뻔뻔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끊이지 않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뭘 봤어요? 못 봤다며!”
“어? 아…… 그래. 못 본 거로 할게.”
이토록 난감할 때 희대는 뭘 하고 있나 싶어 혜정이 뒤돌아봤다. 동시에 표정이 싸해졌다. 함께 와서 조금 전 상황을 설명해도 모자랄 판국에 희대는 꼼짝 않고 누운 채 체념한 듯 팔로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렇게 태평하지? 안 민망한가?’
‘기절하자. 기절한 척해야 해. 아, 민망해 이씨……. 어떡하지? 혜정이 혼자 저렇게 고군분투하는데 난 이러고 있어도 되나? 그냥 나도 옆에서 아니라고 해? 그런데 여긴 여자 방이잖아. 내가 나서는 것도 웃긴데……. 으아! 돌겠다.’
침대에 누워 있던 희대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혜정이 그런 희대의 속내를 알 리가 있나. 혜정이 그를 흘겨보는 사이 수진은 이때다 싶어 달아나며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봐요! 얘네 봐요! 얼레리 꼴레리!”
그냥 조용히 갔으면 좋으련만, 온 펜션이 울리도록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혜정과 희대는 속으로 짧지만 굵은 욕설을 동시에 읊조렸다.
‘이런 씨!’
‘저런 씨!’
혜정은 절망에 차 제자리에 주저앉았고, 누워 있던 희대는 수진이 간 뒤에야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갔어?”
“네…….”
혜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가 희대 옆자리에 앉았다. 희대는 수고했다는 말 대신인지 혜정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혜정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이제 어떡해요?”
“뭘 어떡해?”
“들켰잖아요.”
“들키면 들키는 거지. 불안해?”
“네. 감독님이 아시고 어떻게 생각하실지…….”
혜정은 불안한 심리를 표현하듯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런 혜정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희대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할까 봐 그러는 거지? 알려지는 게 싫은 거지?”
“네. 지금은 좀…….”
“그래. 별일 없을 거야. 괜찮아.”
“……네.”
혜정은 고개를 들어 희대를 바라봤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맞춤했다. 좀 더 달고, 짙은 서로의 입술이 번갈아 겹겹이 포개질 때, 두 사람은 다시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몽롱한 기분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때였다. 묵직한 발걸음이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에 혜정과 희대는 경기 일으키듯 입술을 떼고 문을 바라봤다.
‘뭐지? 수진 언니 다시 오나?’
‘또 누구지? 아…… 심장 떨려서 미치겠네.’
쿵쿵! 묵직한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곧 문 앞에서 멈췄다. 혜정과 희대는 긴장한 탓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문이 열리며 피곤한 기색의 박권호 감독이 등장했다.
2화
“어, 그래. 헤로인! 스릴러라며?”
“네. 레즈비언 이야기예요. 집착과 소유욕 때문에 살인을 하는데, 나중엔 시신을 해부해서 고기로 먹기도 해요.”
“으…… 징그럽다야.”
아무렇지 않게 차기작 얘기를 하는 혜정과 달리 김경훈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치를 떨었다. 혜정은 ‘그런가요?’ 하며 너스레웃음을 짓고 말았다. 차기작 역시 박권호 감독 덕에 준비 중인 작품이었기에 기대가 컸다. 무엇보다 혜정이 직접 쓰고 배우로 출연할 작품이라 더 그런 건지도 모른다.
김경훈 감독은 기대하고 있겠다는 말을 끝으로 다시 동료들 곁으로 가 버렸다. 혼자 남은 혜정은 엷게 미소 지은 채로 손에 쥔 잔을 비워냈다.
그때였다. 혜정의 눈앞에 긴 소시지가 떡하니 나타났다. 놀라 옆을 보자, 언제 왔는지 희대가 손을 뻗어 혜정에게 소시지를 내밀고 있었다.
“깜짝이야…….”
혜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가 내민 소시지를 받아 쥐었다. 잡기 좋게 나무젓가락으로 꽂아 주는 친절함까지 보이니 별거 아닌데도 감동이 느껴졌다. 혜정은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고 희대에게 살며시 내밀었다.
“안 먹어.”
정말 먹고 싶지 않았는지 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에게 내민 손이 무안해졌다. 혜정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희대가 갑자기 혜정의 손에 있는 소시지를 뺏어 입에 다 넣어 버렸다.
안 먹겠다던 그가 혜정의 표정 변화로 인해 행동을 달리하니 놀라우면서도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안 드신다면서요.”
“아니 그냥.”
“치……. 흐읏! 하, 이제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그럼 조감독님, 내일 뵐게요.”
혜정은 씩 웃다가 뻐근한 몸에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그와 더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대로 있다간 내일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술을 먹어서 그런지 피로가 적지 않게 쌓인 탓이다.
혜정은 희대에게 짧은 인사를 끝으로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짐이 있는 2층 방으로 들어온 혜정은 반쯤 풀린 눈을 비비며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거울 앞에 멍하니 서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더니 무언가 떠올랐는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 바보. 세면도구를 안 가지고 들어왔네.”
그렇게 말하며 몸을 틀어 욕실을 나올 때였다.
“깜짝이야! 왜, 왜 여기 계세요?”
혜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에 희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등장이 혜정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따라왔지.”
희대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혜정은 최대한 그와 가까운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따라왔다고요? 왜요?”
“얘기 좀 하고 싶어서.”
“무슨……?”
그와 단둘이 있게 된 고요한 방 안. 귀 기울여 밖의 동태를 살피니 다들 술에 취했거나 아직 식지 않은 쫑파티로 정신없어 보였다. 물론 함께 방을 쓰는 수진까지. 희대의 앞이라 최대한 조신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쿵쿵거리는 가슴은 진정될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냥 이것저것. 왜? 싫어?”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갑작스러워서요.”
혜정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희대가 말을 잇는다.
“이번 촬영하는 동안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했다고 했나?”
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물음대로 혜정은 원래 부산 사람이었다. 서울로 이사할 계획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하필이면 촬영 스텝으로 일할 때 이사를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네. 엄마 혼자 이사를 하셨어요.”
“그럼 앞으로 서울에 사는 거야?”
“네.”
“어디 살아?”
“가산동이요.”
대답과 동시에 희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멀다. 그 동네는 양아치들밖에 없어서 소개 못 해 주는데.”
‘뭐지? 왜 저런 말을 하지?’
어쩌면 김칫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생각이 연달아 들기 시작했다. 촬영 준비 하는 동안 혹시나 한 적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과 지금 그의 행동은 유난히도 오해하기에 딱 좋았다.
“뭘 소개해 줘요?”
“그냥. 너랑 어울릴 만한…….”
‘동생 같은 애가 타지에 왔다고 하니 챙겨 주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한번 그의 마음을 떠보고 싶은 심산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혜정은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감독님을 소개해 주세요.”
혜정의 대답 이후로 고요한 침묵이 맴돌았다. 희대가 침묵을 만든 것이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혜정은 자신이 희대에게 무슨 말실수를 했나 싶어 불안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침묵을 오래 끌지 않았다.
“난 부족한 게 많고,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네가 힘들지도 몰라.”
“…….”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싶어 혜정은 입술을 다문 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 혜정을 보며 희대는 조심스럽게 이어 말했다.
“그래도 난 너 만나 보고 싶은데.”
“네?”
“나랑 사귈래? 잘해 줄게.”
혜정은 충격으로 인해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낯선 짝사랑이란 마음을 꼭꼭 숨긴 채 ‘이젠 잊어야지.’, ‘그만해야지.’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었다. 그런데 그가 고백하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어서 걱정이 들었다.
‘내가 연애를 한다고? 난 지금 안정된 게 없는데, 과연 속 편히 연애할 수 있을까? 더구나 난 나를 숨기고 방어하는 성격인데……. 이 사람이 힘들지 않을까?’
짧은 초시에 여러 고민과 걱정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런 혜정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희대는 혜정이 대꾸가 없자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왜? 싫어?”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분명 후회하지 않을까? 이 남자 덕에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분명 안식처가 되어 주겠지. 내가 많이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진심을 바라본 결과, 혜정은 활짝 웃으며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좋아요. 저 조감독님 좋아해요.”
혜정의 대답을 듣고서야 희대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행이다. 이리 와. 한번 안아 보자.”
희대는 두 팔 벌리며 말했다. 잠시 주춤거리던 혜정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따뜻하고, 아늑했다. 하지만 그가 워낙 꼭 안아 준 덕에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전해질까 초조함도 들었다. 그때 희대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잘해 줄게.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는데, 이게 맞는 것 같아.”
“……고맙습니다, 정말.”
혜정은 희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혹여 누가 볼까 화들짝 놀란 혜정은 그의 품에서 나와 문 앞으로 다가갔다. 희대는 혜정이 왜 그러는지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혜정은 방문 밖을 살피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희대는 몸을 일으켜 조금은 조심스럽게 혜정 옆에 붙어 앉았다. 그러곤 그녀의 뺨에 손을 얹고 이마를 맞댔다.
“나 지금 추하지? 면도 안 해서 수염도 나고…….”
“아니요. 멋있어요.”
혜정의 대답에 그는 또 씩 웃었다. 술에 취했고, 피곤한 상태인데도 그를 향한 마음은 여전히 설레고 있었다. 아마 희대에게 반한 이유는 지금 짓고 있는 이 미소 때문일 것이다. 틀림없다. 그만큼 그는 웃는 게 멋스러우니까.
“키스해도 돼?”
이어진 달콤한 속삭임에 혜정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입술과 함께 혜정의 두 눈이 자연스럽게 감겼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 촉감에 온몸이 전이되듯 찌릿했다.
한참의 키스 끝에 천천히 눈을 떴을 땐, 두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당황한 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 뭐 해?”
제 2화 침대 위, 바뀐 여자
둘만의 오붓한 시간 속에 갇혀 있던 혜정과 희대는 수진의 방해로 금세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랑의 현장을 발견한 수진은 마치 로봇처럼 뻣뻣해진 몸을 틀었다. 혜정은 기겁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수진의 팔을 붙잡았다.
“언니, 잠깐만요! 오해는 풀고 가야죠!”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몰려들어 혜정은 거의 울기 직전인 표정으로 수진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놀란 토끼 눈이던 수진은 어서 빨리 낯 뜨거운 이 현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힘으로 혜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긴 벅찼다.
“아니야, 아니야! 나 아무것도 못 봤어! 이건 놔주고 하던 거 계속해.”
“아니요, 안 돼요! 오해 풀고 가요! 방금 잘못 본 거예요!”
“그러니? 내 눈으로 뭔가 보긴 봤는데…….”
이 정도쯤 되면 차라리 뻔뻔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끊이지 않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뭘 봤어요? 못 봤다며!”
“어? 아…… 그래. 못 본 거로 할게.”
이토록 난감할 때 희대는 뭘 하고 있나 싶어 혜정이 뒤돌아봤다. 동시에 표정이 싸해졌다. 함께 와서 조금 전 상황을 설명해도 모자랄 판국에 희대는 꼼짝 않고 누운 채 체념한 듯 팔로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렇게 태평하지? 안 민망한가?’
‘기절하자. 기절한 척해야 해. 아, 민망해 이씨……. 어떡하지? 혜정이 혼자 저렇게 고군분투하는데 난 이러고 있어도 되나? 그냥 나도 옆에서 아니라고 해? 그런데 여긴 여자 방이잖아. 내가 나서는 것도 웃긴데……. 으아! 돌겠다.’
침대에 누워 있던 희대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혜정이 그런 희대의 속내를 알 리가 있나. 혜정이 그를 흘겨보는 사이 수진은 이때다 싶어 달아나며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봐요! 얘네 봐요! 얼레리 꼴레리!”
그냥 조용히 갔으면 좋으련만, 온 펜션이 울리도록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혜정과 희대는 속으로 짧지만 굵은 욕설을 동시에 읊조렸다.
‘이런 씨!’
‘저런 씨!’
혜정은 절망에 차 제자리에 주저앉았고, 누워 있던 희대는 수진이 간 뒤에야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갔어?”
“네…….”
혜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가 희대 옆자리에 앉았다. 희대는 수고했다는 말 대신인지 혜정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혜정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이제 어떡해요?”
“뭘 어떡해?”
“들켰잖아요.”
“들키면 들키는 거지. 불안해?”
“네. 감독님이 아시고 어떻게 생각하실지…….”
혜정은 불안한 심리를 표현하듯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런 혜정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희대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할까 봐 그러는 거지? 알려지는 게 싫은 거지?”
“네. 지금은 좀…….”
“그래. 별일 없을 거야. 괜찮아.”
“……네.”
혜정은 고개를 들어 희대를 바라봤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맞춤했다. 좀 더 달고, 짙은 서로의 입술이 번갈아 겹겹이 포개질 때, 두 사람은 다시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몽롱한 기분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때였다. 묵직한 발걸음이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에 혜정과 희대는 경기 일으키듯 입술을 떼고 문을 바라봤다.
‘뭐지? 수진 언니 다시 오나?’
‘또 누구지? 아…… 심장 떨려서 미치겠네.’
쿵쿵! 묵직한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곧 문 앞에서 멈췄다. 혜정과 희대는 긴장한 탓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문이 열리며 피곤한 기색의 박권호 감독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