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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없이 고품격
3화
‘큰일 났다. 나 여기 있는 거 뭐라고 설명하지?’
짧은 초시에 희대는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이지 않은가. 아버지가 아끼는 배우이자 작가인 그녀의 방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반갑게 여기시진 않을 게 분명했다. 반면 혜정은 거의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두 사람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박권호 감독은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야, 내려와. 대표님이랑 회사 식구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니까.”
박권호 감독은 희대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피곤하긴 한가 보다. 둘 사이에 별다른 의심은 없는 눈치였다.
“안녕히 가세요…….”
혜정은 어색한 몸짓으로 희대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러자 박권호 감독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혜정을 쳐다봤다.
“뭘 잘 가? 너도 와.”
“저, 저요? 왜요?”
회사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 혜정 자신이 왜 참석해야 하나 싶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은 그저 이번 영화 시나리오를 쓴 작가이자 배우일 뿐, 박권호 감독이 소속된 제작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너도 와야지. 대표님이 너 얼마나 신경 써 주시는데.”
박권호 감독이 말한 것이 엄연히 사실이므로 별다른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아…… 네.”
혜정은 몸이 무거운 듯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박권호 감독과 함께 방을 나가고, 그 뒤를 희대가 따라가며 곱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아…… 또 술 먹어야 해? 왜 이리 방해꾼이 많냐. 연애 좀 하자!’
싫어도 어쩌랴, 이것이 사회생활인 것을. 희대는 제 머리를 거칠게 뒤로 쓸어 넘기며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희대가 바비큐장에 도착해 보니 혜정은 이미 제작사 대표와 양 PD 사이에 앉아 있었고, 박권호 감독은 혜정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비워 내고 있었다. 어디 앉을까 눈치를 살피던 희대는 박권호 감독과 제작사 대표 사이에 조용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대화 내용은 거의 혜정 위주로 흘러갔다. 희대는 제작사 대표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힐끔힐끔 혜정의 안색을 살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다 피곤하겠지만 혜정이 특히 더 심해 보였다.
그래, 첫 스텝 일이 쉽지 않았겠지. 제 딴에는 열심히 했을 것이나 처음인 만큼 부족함이 많고, 그에 스스로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희대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길 한가운데에서 매니저인 정준의 옷깃을 부여잡고 소리 내 울었던 모습을…….
촬영 4일째 되던 날. 도로 한복판에서 혜정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 옆을 지키고 있는 정준은 굳은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나 어떡해. 가슴이 너무 아파. 너무 힘들어.”
“혜정아, 오빠 화낸다. 그만 뚝 해. 배우가 이렇게 감정 조절을 못해서 어떡해?”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 미치겠어, 오빠!”
그때였다. 저 멀리서 희대가 홀연히 등장했다. 정준은 희대를 보고 혜정의 어깨를 토닥였다.
“혜정아, 그만 뚝 해. 조감독님 나오셨다.”
“흡.”
좋아하는 남자에게 눈물에 젖어 추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까닭일까. 정준의 말에 혜정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 안간힘을 썼다.
희대는 무표정한 얼굴로 혜정과 점점 가까워졌다. 혜정은 희대가 다가오자 혹여 눈물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 몸을 틀어 등을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희대는 혜정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냉정하게 지나쳤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꾹꾹 누르고 있던 혜정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행이다. 보셨는지, 못 보셨는지 그냥 지나쳐 가셔서. 위로받고 싶은 이 마음이…… 잘못됐다는 걸 알아서 참 다행이다.’
혜정이 그런 생각을 하며 저 스스로 감정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 그녀를 지나쳐 간 희대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희대는 혜정의 눈물을 보고 느꼈던 그때 당시 감정을 회상하며 미소 짓고 있는 그녀를 보고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재주 많고 성숙해 보이는데도 마냥 어린애 같다. 그땐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뭐가 그렇게 아파서 보는 눈 많은 길 한복판에서 아이처럼 울었을까. 그때 난 안아 주지도 못했는데. 네가 뭐길래 이러냐는 물음을 들을까 봐. 그 물음에 답할 말이 없어 다가가지 못했는데……. 이젠 괜찮겠지. 이젠 울면 안아 줘도 되겠지. 다른 사람이 우는 걸 싫어하는 내가, 너만은 안아 주고 싶다.’
희대와 혜정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주변 눈치를 살펴서인지 혜정은 금세 희대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지만, 희대는 그녀를 보며 남몰래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장장 두 시간 동안 제작사 대표의 연설을 들은 뒤, 혜정은 곧 쓰러질 듯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수진은 이미 침대에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저 언니는 언제 왔대?’
이미 잠든 수진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혜정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하, 나도 빨리 씻고 자야지.”
혜정이 캐리어에서 세면도구를 꺼낸 뒤 욕실로 향할 때 갑자기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젠 들어올 사람이 없을 텐데?’
누군가 싶어 쳐다보자, 술기운이 오른 희대가 들어왔다. 희대 역시 제작사 대표의 긴 연설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나 보다. 그의 등장이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혜정은 욕실로 가려던 걸음도 잊은 채 희대 앞에 섰다.
“왜 또 왔어요?”
혜정의 물음에 희대는 기다렸다는 듯 혜정을 품에 안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왜요? 술 많이 드셨어요?”
“응. 한 세 병 먹었나? 피곤해.”
희대는 그렇게 말하며 혜정을 밀어 서서히 뒷걸음질하게 했다. 덕분에 혜정은 침대 옆 의자에 앉게 되었다. 희대는 그녀 앞에 자세를 낮춰 앉고 이어 혜정의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혜정은 지친 희대를 보자 가여운 마음이 들어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좋다.”
“수고했어요.”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혜정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안겨 주었다. 살며시 눈을 감던 희대는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그런데 나, 할 말 있는데.”
“뭔데요?”
“그날, 네가 운 날 있잖아.”
“네.”
“나 그때 너 위로하고 싶었어. 그냥 지나치기 싫었어.”
“알아요. 그래서 밤늦게 전화도 주셨잖아요. 누구보다 고단했을 텐데.”
혜정은 여전히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희대도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참지 못해 흘렸던 눈물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희대에게 혜정은 새삼 감동했다. 그녀의 눈물이 오죽 신경 쓰였으면 새벽 한 시가 넘어서 민폐인 것을 알면서도 전화를 줬을까.
“응. 그때 네가 내 전화를 받아서, 오늘 내가 너한테 용기 낼 수 있었어. 확신이 들었거든.”
“어떤 확신이요?”
“너면 되겠다.”
그 말을 끝으로 희대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혜정을 쳐다봤다. 혜정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뺨을 어루만지자, 희대가 그녀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췄다. 혜정은 아까보다 좀 더 자연스럽게 두 눈을 감고 그의 촉감을 느꼈다. 그리고 바랐다. 이번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길. 서로에게 충전이 될 온기를 마음껏 전할 수 있기를…….
어느새 날이 밝았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혜정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다 곧 자신이 바닥에 깐 이불에 누워 있는 걸 알곤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어떻게 잠들었지? 이불은 누가 깔아 준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왜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먹은 술로 인해 필름이 끊긴 듯하다.
‘아…… 뭐 실수한 건 없겠지?’
그때 갑자기 침대 위에서 희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머리야.”
‘뭐야? 저 인간은 왜 저기 있어?’
혹시 모를 무안한 상황에 대비해 혜정은 떴던 눈을 도로 감으며 자는 척했다.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던 희대는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흐리멍덩하던 표정이 점점 당혹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변해 갔다. 그럴 수밖에. 혜정은 바닥에서 자고 있고, 자신 옆에는 혜정이 아닌 수진이 잠들어 있으니까.
“……이게 아닌데? 뭔가 바뀐 거 같은데……. 내가 왜 침대에서 자고 있지?”
희대는 잠이 덜 깼나 싶어 얼굴을 비비다가도 이건 아니다 싶어 머리채를 뜯었다.
그도 역시 어젯밤에 쌓인 피로와 과한 음주로 인해 필름이 끊겼었나 보다. 잠든 척하던 혜정은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어이없고 웃겨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제 3화 첫 짝사랑이었다.
희대는 엉거주춤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혜정의 옆자리에 누워 그녀를 끌어안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혜정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잠시 후, 혜정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희대 홀로 잠들어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박권호 감독이 들어왔다. 박권호 감독은 바닥에서 자는 제 아들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밤새 안 보여서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잤냐?”
“으음…… 응?”
이불 속에서 꿈틀대던 희대는 옆에 혜정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미간을 좁히며 눈을 떴다. 그의 표정이 꽤 당황스러워 보였다.
‘얘가 어디 갔지? 설마 벌써 갔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제 아버지를 봤다.
‘아, 아버지는 왜 여기 계시지?’
그때였다. 욕실 문이 열리며 얼굴에 물기 묻힌 채 혜정이 나왔다. 희대는 아직 이곳에 혜정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자칫 인사도 하지 않고 가 버린 그녀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 뻔했다.
아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권호 감독은 혜정을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잘 잤어?”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근데 이 자식 여기서 잤냐?”
박권호 감독은 희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혜정은 희대와 눈을 맞추다 다시 박권호 감독을 쳐다보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한편, 고요하던 잠자리가 소란스러워진 탓일까? 침대 위에서 잠들었던 수진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러다 박권호 감독과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혜정이도 안녕?”
수진이 혜정에게도 친절한 인사를 건넸다. 혜정은 수진과 희대를 보자 새벽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장난 가득 담아 비소를 지었다.
“네, 언니. 조감독님이랑 잘 주무셨어요?”
“응?”
“뭐?”
“엥?”
수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희대를 쳐다보고, 희대는 혜정이 예상한 대로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반면 박권호 감독은 흥미로운 듯한 눈으로 혜정과 희대, 수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야. 희대 너 수진이랑 같이 잤냐? 이 자식!”
“아, 아닌데? 아니에요!”
희대는 두 손을 휘저으며 격렬히 반박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왜 이리 귀여운지, 혜정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니긴요. 두 분 침대에서 나란히 주무시는 거 새벽에 봤는데요.”
혜정의 말에 수진 역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전혀 모르는 일이야. 어제 술에 취해서 뭣 모르고 일찍 잤단 말이야.”
3화
‘큰일 났다. 나 여기 있는 거 뭐라고 설명하지?’
짧은 초시에 희대는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이지 않은가. 아버지가 아끼는 배우이자 작가인 그녀의 방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반갑게 여기시진 않을 게 분명했다. 반면 혜정은 거의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두 사람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박권호 감독은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야, 내려와. 대표님이랑 회사 식구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니까.”
박권호 감독은 희대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피곤하긴 한가 보다. 둘 사이에 별다른 의심은 없는 눈치였다.
“안녕히 가세요…….”
혜정은 어색한 몸짓으로 희대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러자 박권호 감독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혜정을 쳐다봤다.
“뭘 잘 가? 너도 와.”
“저, 저요? 왜요?”
회사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 혜정 자신이 왜 참석해야 하나 싶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은 그저 이번 영화 시나리오를 쓴 작가이자 배우일 뿐, 박권호 감독이 소속된 제작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너도 와야지. 대표님이 너 얼마나 신경 써 주시는데.”
박권호 감독이 말한 것이 엄연히 사실이므로 별다른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아…… 네.”
혜정은 몸이 무거운 듯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박권호 감독과 함께 방을 나가고, 그 뒤를 희대가 따라가며 곱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아…… 또 술 먹어야 해? 왜 이리 방해꾼이 많냐. 연애 좀 하자!’
싫어도 어쩌랴, 이것이 사회생활인 것을. 희대는 제 머리를 거칠게 뒤로 쓸어 넘기며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희대가 바비큐장에 도착해 보니 혜정은 이미 제작사 대표와 양 PD 사이에 앉아 있었고, 박권호 감독은 혜정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비워 내고 있었다. 어디 앉을까 눈치를 살피던 희대는 박권호 감독과 제작사 대표 사이에 조용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대화 내용은 거의 혜정 위주로 흘러갔다. 희대는 제작사 대표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힐끔힐끔 혜정의 안색을 살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다 피곤하겠지만 혜정이 특히 더 심해 보였다.
그래, 첫 스텝 일이 쉽지 않았겠지. 제 딴에는 열심히 했을 것이나 처음인 만큼 부족함이 많고, 그에 스스로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희대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길 한가운데에서 매니저인 정준의 옷깃을 부여잡고 소리 내 울었던 모습을…….
촬영 4일째 되던 날. 도로 한복판에서 혜정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 옆을 지키고 있는 정준은 굳은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나 어떡해. 가슴이 너무 아파. 너무 힘들어.”
“혜정아, 오빠 화낸다. 그만 뚝 해. 배우가 이렇게 감정 조절을 못해서 어떡해?”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 미치겠어, 오빠!”
그때였다. 저 멀리서 희대가 홀연히 등장했다. 정준은 희대를 보고 혜정의 어깨를 토닥였다.
“혜정아, 그만 뚝 해. 조감독님 나오셨다.”
“흡.”
좋아하는 남자에게 눈물에 젖어 추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까닭일까. 정준의 말에 혜정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 안간힘을 썼다.
희대는 무표정한 얼굴로 혜정과 점점 가까워졌다. 혜정은 희대가 다가오자 혹여 눈물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 몸을 틀어 등을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희대는 혜정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냉정하게 지나쳤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꾹꾹 누르고 있던 혜정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행이다. 보셨는지, 못 보셨는지 그냥 지나쳐 가셔서. 위로받고 싶은 이 마음이…… 잘못됐다는 걸 알아서 참 다행이다.’
혜정이 그런 생각을 하며 저 스스로 감정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 그녀를 지나쳐 간 희대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희대는 혜정의 눈물을 보고 느꼈던 그때 당시 감정을 회상하며 미소 짓고 있는 그녀를 보고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재주 많고 성숙해 보이는데도 마냥 어린애 같다. 그땐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뭐가 그렇게 아파서 보는 눈 많은 길 한복판에서 아이처럼 울었을까. 그때 난 안아 주지도 못했는데. 네가 뭐길래 이러냐는 물음을 들을까 봐. 그 물음에 답할 말이 없어 다가가지 못했는데……. 이젠 괜찮겠지. 이젠 울면 안아 줘도 되겠지. 다른 사람이 우는 걸 싫어하는 내가, 너만은 안아 주고 싶다.’
희대와 혜정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주변 눈치를 살펴서인지 혜정은 금세 희대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지만, 희대는 그녀를 보며 남몰래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장장 두 시간 동안 제작사 대표의 연설을 들은 뒤, 혜정은 곧 쓰러질 듯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수진은 이미 침대에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저 언니는 언제 왔대?’
이미 잠든 수진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혜정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하, 나도 빨리 씻고 자야지.”
혜정이 캐리어에서 세면도구를 꺼낸 뒤 욕실로 향할 때 갑자기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젠 들어올 사람이 없을 텐데?’
누군가 싶어 쳐다보자, 술기운이 오른 희대가 들어왔다. 희대 역시 제작사 대표의 긴 연설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나 보다. 그의 등장이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혜정은 욕실로 가려던 걸음도 잊은 채 희대 앞에 섰다.
“왜 또 왔어요?”
혜정의 물음에 희대는 기다렸다는 듯 혜정을 품에 안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왜요? 술 많이 드셨어요?”
“응. 한 세 병 먹었나? 피곤해.”
희대는 그렇게 말하며 혜정을 밀어 서서히 뒷걸음질하게 했다. 덕분에 혜정은 침대 옆 의자에 앉게 되었다. 희대는 그녀 앞에 자세를 낮춰 앉고 이어 혜정의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혜정은 지친 희대를 보자 가여운 마음이 들어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좋다.”
“수고했어요.”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혜정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안겨 주었다. 살며시 눈을 감던 희대는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그런데 나, 할 말 있는데.”
“뭔데요?”
“그날, 네가 운 날 있잖아.”
“네.”
“나 그때 너 위로하고 싶었어. 그냥 지나치기 싫었어.”
“알아요. 그래서 밤늦게 전화도 주셨잖아요. 누구보다 고단했을 텐데.”
혜정은 여전히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희대도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참지 못해 흘렸던 눈물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희대에게 혜정은 새삼 감동했다. 그녀의 눈물이 오죽 신경 쓰였으면 새벽 한 시가 넘어서 민폐인 것을 알면서도 전화를 줬을까.
“응. 그때 네가 내 전화를 받아서, 오늘 내가 너한테 용기 낼 수 있었어. 확신이 들었거든.”
“어떤 확신이요?”
“너면 되겠다.”
그 말을 끝으로 희대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혜정을 쳐다봤다. 혜정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뺨을 어루만지자, 희대가 그녀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췄다. 혜정은 아까보다 좀 더 자연스럽게 두 눈을 감고 그의 촉감을 느꼈다. 그리고 바랐다. 이번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길. 서로에게 충전이 될 온기를 마음껏 전할 수 있기를…….
어느새 날이 밝았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혜정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다 곧 자신이 바닥에 깐 이불에 누워 있는 걸 알곤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어떻게 잠들었지? 이불은 누가 깔아 준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왜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먹은 술로 인해 필름이 끊긴 듯하다.
‘아…… 뭐 실수한 건 없겠지?’
그때 갑자기 침대 위에서 희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머리야.”
‘뭐야? 저 인간은 왜 저기 있어?’
혹시 모를 무안한 상황에 대비해 혜정은 떴던 눈을 도로 감으며 자는 척했다.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던 희대는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흐리멍덩하던 표정이 점점 당혹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변해 갔다. 그럴 수밖에. 혜정은 바닥에서 자고 있고, 자신 옆에는 혜정이 아닌 수진이 잠들어 있으니까.
“……이게 아닌데? 뭔가 바뀐 거 같은데……. 내가 왜 침대에서 자고 있지?”
희대는 잠이 덜 깼나 싶어 얼굴을 비비다가도 이건 아니다 싶어 머리채를 뜯었다.
그도 역시 어젯밤에 쌓인 피로와 과한 음주로 인해 필름이 끊겼었나 보다. 잠든 척하던 혜정은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어이없고 웃겨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제 3화 첫 짝사랑이었다.
희대는 엉거주춤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혜정의 옆자리에 누워 그녀를 끌어안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혜정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잠시 후, 혜정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희대 홀로 잠들어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박권호 감독이 들어왔다. 박권호 감독은 바닥에서 자는 제 아들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밤새 안 보여서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잤냐?”
“으음…… 응?”
이불 속에서 꿈틀대던 희대는 옆에 혜정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미간을 좁히며 눈을 떴다. 그의 표정이 꽤 당황스러워 보였다.
‘얘가 어디 갔지? 설마 벌써 갔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제 아버지를 봤다.
‘아, 아버지는 왜 여기 계시지?’
그때였다. 욕실 문이 열리며 얼굴에 물기 묻힌 채 혜정이 나왔다. 희대는 아직 이곳에 혜정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자칫 인사도 하지 않고 가 버린 그녀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 뻔했다.
아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권호 감독은 혜정을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잘 잤어?”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근데 이 자식 여기서 잤냐?”
박권호 감독은 희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혜정은 희대와 눈을 맞추다 다시 박권호 감독을 쳐다보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한편, 고요하던 잠자리가 소란스러워진 탓일까? 침대 위에서 잠들었던 수진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러다 박권호 감독과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혜정이도 안녕?”
수진이 혜정에게도 친절한 인사를 건넸다. 혜정은 수진과 희대를 보자 새벽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장난 가득 담아 비소를 지었다.
“네, 언니. 조감독님이랑 잘 주무셨어요?”
“응?”
“뭐?”
“엥?”
수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희대를 쳐다보고, 희대는 혜정이 예상한 대로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반면 박권호 감독은 흥미로운 듯한 눈으로 혜정과 희대, 수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야. 희대 너 수진이랑 같이 잤냐? 이 자식!”
“아, 아닌데? 아니에요!”
희대는 두 손을 휘저으며 격렬히 반박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왜 이리 귀여운지, 혜정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니긴요. 두 분 침대에서 나란히 주무시는 거 새벽에 봤는데요.”
혜정의 말에 수진 역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전혀 모르는 일이야. 어제 술에 취해서 뭣 모르고 일찍 잤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