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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최윤국
벽에 걸린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윤국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실력 있는 모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했을 그림 속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자니 동공이 뒤집힐 것만 같다. 그래서 눈을 한 번 깜빡거리는데 희한하게 그때부터 소용돌이가 점차 덩치가 커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네가 그림에도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등 뒤로 기연이 지나가면서 내뱉듯 한마디 했다. 윤국은 그제야 돌아서서 그림을 등지고 섰다. 민기연 여사의 대표이사실은 세월이 흘러도 변한 게 없었다. 바뀐 거라곤 책상에 깔린 통유리판과 텔레비전 받침대 정도. 매사 느긋하면서도 여유 있는 기연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 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이 굵은 안경에, 목 중간 쯤 오는 단발 길이의 펌에, 살집이 있는 몸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들 중 하나였다.
윤국은 소파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저런 미치광이가 그린 그림을 왜 걸어놓기까지 하셨을까, 궁금해서 보고 있었어요.”
“그 말을 미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외쳐보지 그래?”
“누구에게나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 취향, 우리 아드님 것만 고고하시지.”
“왜 또 시비실까. 6년 만에 얼굴 본 아들한테 등 두드려주고 수표 두둑이 든 봉투 내밀어도 부족할 판에.”
기연과 소파에 마주앉으며, 윤국은 입술 끝을 삐뚜름하게 끌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미안함이 담긴 미소라는 것을, 기연은 잘 알 터였다. 기연이 짐짓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그 시건방짐은 여전하단 소리야. 사람이 좀 안길 수 있는 겸손하고 소심한 맛도 있어야지. 네 싸가지는 어째 오랜만에 봐도 기세가 등등하니?”
“그런 DNA로는 살아본 적이 없어서.”
기연이 윤국을 향해 살짝 눈을 흘기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는 어머니의 모종의 표정이 윤국을 얼마쯤 긴장하게 했다. 그 표정은 일면 무심해보이기도 하고 얼마쯤 건조해보이기도 했다.
6년 만에 만난 아들 앞에서 모친이 너무 무미건조하다 싶겠지만, 그건 기연의 성격이었고 또한 훈육스타일이었다. 아들이 무슨 일을 하든 최소한의 필요한 부분만 지원할 뿐 대체로 무던해지는 것.
“자, 이제 읊어봐. 6년 동안 어디서 뭘 한 건지. 아버지랑 내가 여기저기 몇 다리만 걸치면 다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들의 삶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손 놓고 있었어. 그게 6년이나 갈지 몰랐지만.”
“내가 뭘 했을 것 같아요?”
“당연히. 이 호텔을 물려받기 위해 공부를 했겠지. 너 학비는 꼬박꼬박 받았잖아. 비자 때문에 중간 중간에 한국에 수차례 들어왔다는 것도 알았지만 일부러 신경을 껐지. 세상천지에 이런 엄마가 어딨니.”
“흐음. 난감하네. 아버진 내가 백화점을 물려받을 거라고 믿고 계시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아버지가 요즘 노망이 시작되셨어. 그 상태로 어떻게 백화점을 꾸려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하는 감언이설에 속지 마. 그거 다 뻥이야. 이 호텔이야말로 너의 삶의 질을 한층 끌어올려 줄 거다. 때마침 상무 자리가 비어 있어. 게다가 너한테 양도할 주식만 해도……흐음. 내 말 알지?”
마치 영업사원이 고객을 유치하는 모양새다. 윤국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부모님한테 죄송한 마음은 여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를 했고, 제대를 한 후 도망치듯 이 나라를 떠났고, 그런 그에게 부모님은 이유를 묻지도 않은 채 묵묵히 기다리기만 하셨으니, 지난 8년이라는 세월 동안 얼마나 속이 타올랐을지는 짐작이 가는 바였다.
하지만 윤국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자신을, 무너지고 쓰러지고 파괴되었던 자신을,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다. 겨우 마음을 추슬렀을 땐 뉴욕의 강변 근처였다.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뭐 마실 거라도 안 줘요? 손님에 대한 예우가 왜 이래?”
똑똑똑.
윤국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노크소리가 들렸다. 기연이 소리 내어 대답한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원목 트레이를 양손에 든 여자가 들어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테이블에 찻잔 두 개를 놓았다. 갈색의 차에는 레몬 반 조각이 둥둥 떠 있다. 윤국은 레몬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손등.
어쩌면 그때부터 기억 속 익숙한 장면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화마가 집어 삼킨 화상 자국이, 그의 가슴에 여전히 아로새겨져 있는 흔적처럼 선명하고 뚜렷했다. 윤국의 시선이 뜨거운 직감을 안고 위로 들려 올라갔다.
여자의 얼굴을 봤을 때, 그리고 무심코 돌린 여자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윤국은 자신의 인생이 그날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의 인생이 둘로 갈린 날, 그날 이전과 이후.
“고마워요, 조 비서.”
기연의 건조한 음성과 동시에 얼음처럼 파리하게 굳어졌던 여자는 고개를 까딱인 후 돌아섰다. 고흐의 그림 속 구름처럼, 윤국의 머릿속에 거친 소용돌이가 일었다.
-조희서
차가운 물줄기 아래 두 손을 넣었다. 붉은색 쪽으로 레버를 돌릴 생각도 들지 않아 얼얼할 정도로 손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가슴은 연신 들썩거렸다.
그, 였을까. 정말로.
어떤 추억은 행복으로, 또 어떤 추억은 슬픔으로 남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혹은 슬펐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차츰 반대가 되어간다. 희서는 윤국과의 추억이 지금은 행복하다. 그녀를 지금까지 버티게 한 유일한 존재였으니.
‘왜 사는지는 몰라. 그냥 버티는 거야.’
언젠가 그가 무심하게 했던 말은 그녀의 삶에 일종의 지침이 되었다. 버티는 것은 그녀가 유일하게 잘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를 좋아했다. 여름 날 느티나무 아래에 서 있던 그를, 교복을 입은 채 축구를 하던 그를, 등대로 땀을 흘리며 뛰어가던 그를, 그리고 그녀의 어린 젖가슴을 유혹적으로 응시하던 그를.
“하아…….”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겨버린 걸까.
그가 잘 사는 집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녀가 비서로 모시는 여사장의 아들이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희서는 고개를 들고 세면대 거울을 쳐다봤다. 세면 티슈를 뽑아 젖은 손을 닦고는 재킷의 깃을 똑바로 세우고 스커트의 주름을 쫙 폈다.
허리를 곧추세운 후 전열을 가다듬었다.
“8년이나 지났어. 다 잊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걱정은 그만.”
섣부른 감정으로 흔들릴 필요는 없다. 정말이지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녀에겐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겐 무척 길어 과거 따윈 쉽게 지울 수 있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희서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후 세면실을 나섰다.
복도에 들어서는데, 마침 이사실의 문이 열리며 기연과 윤국이 차례대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희서는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외로 틀어 옆으로 선 채 상체를 숙였다. 아래로 내리깐 시야로 기연의 구둣발이 지나갔다.
“조 비서. 나 오늘 점심은 밖에서 할게.”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을 하고 있는 그녀의 시야에, 이번엔 윤국의 검은색 구두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스쳐지나갈 수 있도록 가만히 있는데, 구둣발이 제 앞에서 멈추는 것이 보였다. 희서의 눈이 떨렸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희서의 손등으로, 그의 기다란 손가락 끝이 피아노 건반을 훑듯 천천히 쓸어간 것이다. 찰나에 닿은 뜨거운 체온이 희서의 몸을 관통했다. 그의 구둣발은 이미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가 준 떨림은 손등을 넘어 몸의 경계까지 다다라 그녀의 기억을 헤집었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여전히 건재한 그 기억들을.
프롤로그
-최윤국
벽에 걸린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윤국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실력 있는 모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했을 그림 속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자니 동공이 뒤집힐 것만 같다. 그래서 눈을 한 번 깜빡거리는데 희한하게 그때부터 소용돌이가 점차 덩치가 커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네가 그림에도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등 뒤로 기연이 지나가면서 내뱉듯 한마디 했다. 윤국은 그제야 돌아서서 그림을 등지고 섰다. 민기연 여사의 대표이사실은 세월이 흘러도 변한 게 없었다. 바뀐 거라곤 책상에 깔린 통유리판과 텔레비전 받침대 정도. 매사 느긋하면서도 여유 있는 기연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 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이 굵은 안경에, 목 중간 쯤 오는 단발 길이의 펌에, 살집이 있는 몸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들 중 하나였다.
윤국은 소파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저런 미치광이가 그린 그림을 왜 걸어놓기까지 하셨을까, 궁금해서 보고 있었어요.”
“그 말을 미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외쳐보지 그래?”
“누구에게나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 취향, 우리 아드님 것만 고고하시지.”
“왜 또 시비실까. 6년 만에 얼굴 본 아들한테 등 두드려주고 수표 두둑이 든 봉투 내밀어도 부족할 판에.”
기연과 소파에 마주앉으며, 윤국은 입술 끝을 삐뚜름하게 끌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미안함이 담긴 미소라는 것을, 기연은 잘 알 터였다. 기연이 짐짓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그 시건방짐은 여전하단 소리야. 사람이 좀 안길 수 있는 겸손하고 소심한 맛도 있어야지. 네 싸가지는 어째 오랜만에 봐도 기세가 등등하니?”
“그런 DNA로는 살아본 적이 없어서.”
기연이 윤국을 향해 살짝 눈을 흘기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는 어머니의 모종의 표정이 윤국을 얼마쯤 긴장하게 했다. 그 표정은 일면 무심해보이기도 하고 얼마쯤 건조해보이기도 했다.
6년 만에 만난 아들 앞에서 모친이 너무 무미건조하다 싶겠지만, 그건 기연의 성격이었고 또한 훈육스타일이었다. 아들이 무슨 일을 하든 최소한의 필요한 부분만 지원할 뿐 대체로 무던해지는 것.
“자, 이제 읊어봐. 6년 동안 어디서 뭘 한 건지. 아버지랑 내가 여기저기 몇 다리만 걸치면 다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들의 삶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손 놓고 있었어. 그게 6년이나 갈지 몰랐지만.”
“내가 뭘 했을 것 같아요?”
“당연히. 이 호텔을 물려받기 위해 공부를 했겠지. 너 학비는 꼬박꼬박 받았잖아. 비자 때문에 중간 중간에 한국에 수차례 들어왔다는 것도 알았지만 일부러 신경을 껐지. 세상천지에 이런 엄마가 어딨니.”
“흐음. 난감하네. 아버진 내가 백화점을 물려받을 거라고 믿고 계시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아버지가 요즘 노망이 시작되셨어. 그 상태로 어떻게 백화점을 꾸려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하는 감언이설에 속지 마. 그거 다 뻥이야. 이 호텔이야말로 너의 삶의 질을 한층 끌어올려 줄 거다. 때마침 상무 자리가 비어 있어. 게다가 너한테 양도할 주식만 해도……흐음. 내 말 알지?”
마치 영업사원이 고객을 유치하는 모양새다. 윤국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부모님한테 죄송한 마음은 여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를 했고, 제대를 한 후 도망치듯 이 나라를 떠났고, 그런 그에게 부모님은 이유를 묻지도 않은 채 묵묵히 기다리기만 하셨으니, 지난 8년이라는 세월 동안 얼마나 속이 타올랐을지는 짐작이 가는 바였다.
하지만 윤국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자신을, 무너지고 쓰러지고 파괴되었던 자신을,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다. 겨우 마음을 추슬렀을 땐 뉴욕의 강변 근처였다.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뭐 마실 거라도 안 줘요? 손님에 대한 예우가 왜 이래?”
똑똑똑.
윤국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노크소리가 들렸다. 기연이 소리 내어 대답한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원목 트레이를 양손에 든 여자가 들어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테이블에 찻잔 두 개를 놓았다. 갈색의 차에는 레몬 반 조각이 둥둥 떠 있다. 윤국은 레몬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손등.
어쩌면 그때부터 기억 속 익숙한 장면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화마가 집어 삼킨 화상 자국이, 그의 가슴에 여전히 아로새겨져 있는 흔적처럼 선명하고 뚜렷했다. 윤국의 시선이 뜨거운 직감을 안고 위로 들려 올라갔다.
여자의 얼굴을 봤을 때, 그리고 무심코 돌린 여자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윤국은 자신의 인생이 그날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의 인생이 둘로 갈린 날, 그날 이전과 이후.
“고마워요, 조 비서.”
기연의 건조한 음성과 동시에 얼음처럼 파리하게 굳어졌던 여자는 고개를 까딱인 후 돌아섰다. 고흐의 그림 속 구름처럼, 윤국의 머릿속에 거친 소용돌이가 일었다.
-조희서
차가운 물줄기 아래 두 손을 넣었다. 붉은색 쪽으로 레버를 돌릴 생각도 들지 않아 얼얼할 정도로 손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가슴은 연신 들썩거렸다.
그, 였을까. 정말로.
어떤 추억은 행복으로, 또 어떤 추억은 슬픔으로 남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혹은 슬펐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차츰 반대가 되어간다. 희서는 윤국과의 추억이 지금은 행복하다. 그녀를 지금까지 버티게 한 유일한 존재였으니.
‘왜 사는지는 몰라. 그냥 버티는 거야.’
언젠가 그가 무심하게 했던 말은 그녀의 삶에 일종의 지침이 되었다. 버티는 것은 그녀가 유일하게 잘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를 좋아했다. 여름 날 느티나무 아래에 서 있던 그를, 교복을 입은 채 축구를 하던 그를, 등대로 땀을 흘리며 뛰어가던 그를, 그리고 그녀의 어린 젖가슴을 유혹적으로 응시하던 그를.
“하아…….”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겨버린 걸까.
그가 잘 사는 집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녀가 비서로 모시는 여사장의 아들이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희서는 고개를 들고 세면대 거울을 쳐다봤다. 세면 티슈를 뽑아 젖은 손을 닦고는 재킷의 깃을 똑바로 세우고 스커트의 주름을 쫙 폈다.
허리를 곧추세운 후 전열을 가다듬었다.
“8년이나 지났어. 다 잊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걱정은 그만.”
섣부른 감정으로 흔들릴 필요는 없다. 정말이지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녀에겐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겐 무척 길어 과거 따윈 쉽게 지울 수 있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희서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후 세면실을 나섰다.
복도에 들어서는데, 마침 이사실의 문이 열리며 기연과 윤국이 차례대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희서는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외로 틀어 옆으로 선 채 상체를 숙였다. 아래로 내리깐 시야로 기연의 구둣발이 지나갔다.
“조 비서. 나 오늘 점심은 밖에서 할게.”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을 하고 있는 그녀의 시야에, 이번엔 윤국의 검은색 구두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스쳐지나갈 수 있도록 가만히 있는데, 구둣발이 제 앞에서 멈추는 것이 보였다. 희서의 눈이 떨렸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희서의 손등으로, 그의 기다란 손가락 끝이 피아노 건반을 훑듯 천천히 쓸어간 것이다. 찰나에 닿은 뜨거운 체온이 희서의 몸을 관통했다. 그의 구둣발은 이미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가 준 떨림은 손등을 넘어 몸의 경계까지 다다라 그녀의 기억을 헤집었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여전히 건재한 그 기억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