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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야! 조희서다!”
“어디? 어디?”
남자 화장실 변기를 향해 일렬로 서 있던 세 명의 녀석들이 다급히 바지를 올리곤 창가로 모여들었다. 전망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밀어내고 욕설을 내뱉으며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흐아……오늘도 여전히 개쩌시는 여신님.”
“너 지금 쌌지? 다 알아, 인마.”
“지는.”
세 녀석들은 창밖 운동장을 쳐다보며 속된 말을 주고받았다. 윤국은 바지를 올리고 물을 내린 후 그런 녀석들을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세면대로 가 손을 씻고 나가려는데 셋 중 한 녀석이 윤국을 불러 세웠다.
“야! 최윤국!”
윤국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그를 불렀던 녀석이 얼굴에 장난기 가득 올리며 빈정대었다.
“네 라이벌께서 지나가시는데 한마디 하셔야 하지 않냐?”
라이벌이라. 저 녀석들에겐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번 기말고사마저 조희서라는 계집애한테 졌으니, 1학년과 2학년을 거치면서 쌓아 온 윤국의 ‘수재’이미지에 금이 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런 근본도 모르는 계집애와 엮어 전교의 모든 학생들과 선생들이 라이벌 관계라고 칭하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적어도 서울에 유명백화점과 유명호텔을 경영하고 계시는 부모님이 있기 때문이다.
“니들은 스페인 리그랑 독일 리그가 라이벌이 된다고 생각하냐?”
한마디 까칠하게 쏘아준 후 화장실을 나서는 윤국의 등으로 녀석들의 비아냥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래.”
“아, 재수 없는 새끼.”
복도로 나온 윤국은 잠시 멈칫한 채로 걸음을 천천히 하며 창밖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여름의 섬마을, 뙤약볕이 내리쬐는 밝은 운동장에는 긴 머리가 등을 덮고 있는, 짧은 교복치마 아래로 늘씬한 다리가 드리워진, 늘 먼 곳을 응시하는 시선을 가진, 이번 기말고사에서도 윤국을 앞서버린, 희서가 있었다.
느리게 걸음을 끌던 윤국은 희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여름, 바다에서 불어온 텁텁한 바람이 희서의 긴 머리칼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윤국이 홍진도라는 섬에 내려온 건 중학교를 졸업한 봄방학 때였다. 외할아버지가 이 섬마을에 3층짜리 저택을 지어 혼자 살고 계신 터라, 방학만 되면 자주 놀러왔던 것이다. 봄방학 때, 윤국은 섬마을의 바다에 놀러 나갔다가 방파제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크게 다쳤다.
외할아버지는 치료도 하고 요양도 할 겸, 봄방학 내내 홍진도에 머물라고 하셨고 그의 부모도 흔쾌히 수락했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윤국은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여유와 평화가 더없이 좋았다. 전쟁 같은 서울의 고등학교. 1등과 꼴찌만 존재하는 그곳에서 윤국은 자신마저 성적의 노예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호텔을 경영하시는 어머니와 백화점을 경영하시는 아버지의 사이에서, 두 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과 부담감은 홍진도의 자유와 여유를 더욱 갈망하게 만들었다. 결국 윤국은 고등학교 3년을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부모님 앞에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원래부터 윤국이 하는 일에 크게 터치를 하지 않았던 부모는 이번에도 시원하게 허락을 했다. 결국 윤국은 이곳으로 주소지를 옮겨 전학을 왔고, 학년 당 반이 두 개 뿐인 흥진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1학년과 2학년 땐 압도적인 성적으로 1등 퍼레이드를 이어나갔다. 동성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이고 이성친구들의 선물과 애정공세에 번번이 시달리기 일쑤였으며,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 지역의 유지의 반열에 오른 외할아버지 덕분인지, 아니면 그의 부모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탓인지 윤국을 향한 선생들의 유난은 극에 달해 있었다. 흥진 고등학교가 설립된 이래 첫 명문대 진학생을 배출하게 될 거라는 그런 기대 말이다.
하지만 3학년이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학기 초에 전학 온 조희서라는 계집아이가 중간고사 단 한 번 만에 윤국을 2등의 자리로 내려 보낸 것이다. 성적은 불과 0.2점 차이. 학생들은 술렁거렸고 교사들도 다들 놀랐다. 희서가 학생들 사이에서 더욱 화제가 된 건 고등학생 치고 꽤 성숙해 보이는 외모와 몸매 때문이었다.
평소 말이 없기로 소문이 난 희서가 학생식당에 들어서기라도 하면, 남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여학생들조차 감히 질투도 못 할 만큼 신비로운 매력을 지녔다. 윤국의 자존심이 추락했지만 그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현관 앞에 서 있던 그녀를 본 순간, 윤국의 비밀이 시작됐다. 빗줄기 사이로 그녀와 시선이 부딪쳤을 때 가슴 한가운데로 뜨거운 불길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어디에도 티를 낼 수 없는 혼자만의 비밀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점심시간을 30분 남겨두고 윤국은 학교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햇볕에 타 버릴 것 같은 옥상 바닥을 띄엄띄엄 짚으며 검은 차양이 쳐져 있는 한 곳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그곳은 창고 옆인 데다 차양이 드리워져 있어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시끌벅적한 교실을 떠나 그가 종종 찾는 곳이었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벽에 기댄 그는 들고 온 문제집을 폈다. 그는 수시전형이라 더는 공부할 필요가 없지만 오랫동안 들여진 습관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확하게는 모퉁이 건너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고개를 갸웃거린 윤국은 문제집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무릎으로 살금살금 걸어 모퉁이 건너 쪽으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헉!”
“꺄앗!”
윤국은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바로 앞에 있는 희서를 쳐다봤다. 희서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더욱 커져 얼음처럼 굳어져 있었다. 윤국이 더욱 놀란 이유는 희서의 손에 들린 담배 때문이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온전한 담배 한 개비를 희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끼운 채였던 것이다.
“너, 뭐냐.”
윤국의 시선이 희서의 손가락에 낀 담배로 향했다. 모범생으로 알려진 여자아이의 순간적인 일탈인지, 아니면 가식을 벗어던진 본래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희서의 눈이 무척 건조하다는 사실만 느낄 뿐이었다.
“불은 안 붙였어. 그러니까 선생님들한테 고자질은 하지 마.”
“하!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윤국은 경계의 빛을 띤 희서를 잠시 쳐다보곤 그녀의 손가락에서 담배를 스윽 빼냈다. 그러곤 그것을 꽉 쥐어 부러뜨린 후 휙 던져버렸다. 희서의 시선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담배로 향했다가 다시 그를 마주했다.
한동안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윤국은 희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들썩거리는 것을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그의 비밀이, 가슴을 찢고 나오지 않도록.
“최윤국, 너…….”
희서의 발그레한 입술 끝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웃는 건가. 왜?
“이번에도 2등이라며?”
놀리듯 말하는데 미소만큼은 눈이 부시다. 윤국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래도 눈부심은 여전했다. 제게로 얼굴을 들이민 채 놀려대고 있는 이 녀석의 얼굴을 붙잡고 입 맞추고 싶어 혼났다.
그의 비밀.
희서를 향한 남학생들의 흠모의 물결 속에 속하지 않으려 자존심을 세우고 발버둥 쳤지만, 윤국 또한 희서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유난히 처연해보였던 희서의 얼굴을 본 순간, 당장에라도 빗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희서의 위태로움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소수점 차이로 이겨놓고 그렇게 으스대고 싶어?”
윤국이 감정을 감추고 조롱하자 희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며 그의 약을 올렸다.
“소수점이든 아니든 진 건 진 거지.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 난 관심 없으니까.”
“거짓말.”
희서의 단언에 윤국의 시선이 절로 홱 들려졌다.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같이 있고 싶은 건, 그의 또 하나의 비밀이었다. 윤국은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물었다.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관심 없다는 거. 너 나만 보면 꼴리잖아. 그렇지?”
“말이 험하다?”
“놀리려고 그런 건데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아, 귀여워.”
희서는 까르르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에 윤국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웃음을 그친 희서가 갑자기 손을 불쑥 내밀었다.
“우리 악수하자. 나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얗고 가녀리고 작은 손이 그의 앞으로 내밀어졌을 때, 그의 머릿속에서 춤을 추는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손을 잡고 끌어당겨 안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녀석의 말대로 정말로 꼴렸다. 아랫도리가 금세 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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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조희서다!”
“어디? 어디?”
남자 화장실 변기를 향해 일렬로 서 있던 세 명의 녀석들이 다급히 바지를 올리곤 창가로 모여들었다. 전망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밀어내고 욕설을 내뱉으며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흐아……오늘도 여전히 개쩌시는 여신님.”
“너 지금 쌌지? 다 알아, 인마.”
“지는.”
세 녀석들은 창밖 운동장을 쳐다보며 속된 말을 주고받았다. 윤국은 바지를 올리고 물을 내린 후 그런 녀석들을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세면대로 가 손을 씻고 나가려는데 셋 중 한 녀석이 윤국을 불러 세웠다.
“야! 최윤국!”
윤국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그를 불렀던 녀석이 얼굴에 장난기 가득 올리며 빈정대었다.
“네 라이벌께서 지나가시는데 한마디 하셔야 하지 않냐?”
라이벌이라. 저 녀석들에겐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번 기말고사마저 조희서라는 계집애한테 졌으니, 1학년과 2학년을 거치면서 쌓아 온 윤국의 ‘수재’이미지에 금이 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런 근본도 모르는 계집애와 엮어 전교의 모든 학생들과 선생들이 라이벌 관계라고 칭하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적어도 서울에 유명백화점과 유명호텔을 경영하고 계시는 부모님이 있기 때문이다.
“니들은 스페인 리그랑 독일 리그가 라이벌이 된다고 생각하냐?”
한마디 까칠하게 쏘아준 후 화장실을 나서는 윤국의 등으로 녀석들의 비아냥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래.”
“아, 재수 없는 새끼.”
복도로 나온 윤국은 잠시 멈칫한 채로 걸음을 천천히 하며 창밖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여름의 섬마을, 뙤약볕이 내리쬐는 밝은 운동장에는 긴 머리가 등을 덮고 있는, 짧은 교복치마 아래로 늘씬한 다리가 드리워진, 늘 먼 곳을 응시하는 시선을 가진, 이번 기말고사에서도 윤국을 앞서버린, 희서가 있었다.
느리게 걸음을 끌던 윤국은 희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여름, 바다에서 불어온 텁텁한 바람이 희서의 긴 머리칼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윤국이 홍진도라는 섬에 내려온 건 중학교를 졸업한 봄방학 때였다. 외할아버지가 이 섬마을에 3층짜리 저택을 지어 혼자 살고 계신 터라, 방학만 되면 자주 놀러왔던 것이다. 봄방학 때, 윤국은 섬마을의 바다에 놀러 나갔다가 방파제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크게 다쳤다.
외할아버지는 치료도 하고 요양도 할 겸, 봄방학 내내 홍진도에 머물라고 하셨고 그의 부모도 흔쾌히 수락했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윤국은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여유와 평화가 더없이 좋았다. 전쟁 같은 서울의 고등학교. 1등과 꼴찌만 존재하는 그곳에서 윤국은 자신마저 성적의 노예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호텔을 경영하시는 어머니와 백화점을 경영하시는 아버지의 사이에서, 두 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과 부담감은 홍진도의 자유와 여유를 더욱 갈망하게 만들었다. 결국 윤국은 고등학교 3년을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부모님 앞에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원래부터 윤국이 하는 일에 크게 터치를 하지 않았던 부모는 이번에도 시원하게 허락을 했다. 결국 윤국은 이곳으로 주소지를 옮겨 전학을 왔고, 학년 당 반이 두 개 뿐인 흥진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1학년과 2학년 땐 압도적인 성적으로 1등 퍼레이드를 이어나갔다. 동성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이고 이성친구들의 선물과 애정공세에 번번이 시달리기 일쑤였으며,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 지역의 유지의 반열에 오른 외할아버지 덕분인지, 아니면 그의 부모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탓인지 윤국을 향한 선생들의 유난은 극에 달해 있었다. 흥진 고등학교가 설립된 이래 첫 명문대 진학생을 배출하게 될 거라는 그런 기대 말이다.
하지만 3학년이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학기 초에 전학 온 조희서라는 계집아이가 중간고사 단 한 번 만에 윤국을 2등의 자리로 내려 보낸 것이다. 성적은 불과 0.2점 차이. 학생들은 술렁거렸고 교사들도 다들 놀랐다. 희서가 학생들 사이에서 더욱 화제가 된 건 고등학생 치고 꽤 성숙해 보이는 외모와 몸매 때문이었다.
평소 말이 없기로 소문이 난 희서가 학생식당에 들어서기라도 하면, 남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여학생들조차 감히 질투도 못 할 만큼 신비로운 매력을 지녔다. 윤국의 자존심이 추락했지만 그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현관 앞에 서 있던 그녀를 본 순간, 윤국의 비밀이 시작됐다. 빗줄기 사이로 그녀와 시선이 부딪쳤을 때 가슴 한가운데로 뜨거운 불길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어디에도 티를 낼 수 없는 혼자만의 비밀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점심시간을 30분 남겨두고 윤국은 학교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햇볕에 타 버릴 것 같은 옥상 바닥을 띄엄띄엄 짚으며 검은 차양이 쳐져 있는 한 곳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그곳은 창고 옆인 데다 차양이 드리워져 있어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시끌벅적한 교실을 떠나 그가 종종 찾는 곳이었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벽에 기댄 그는 들고 온 문제집을 폈다. 그는 수시전형이라 더는 공부할 필요가 없지만 오랫동안 들여진 습관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확하게는 모퉁이 건너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고개를 갸웃거린 윤국은 문제집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무릎으로 살금살금 걸어 모퉁이 건너 쪽으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헉!”
“꺄앗!”
윤국은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바로 앞에 있는 희서를 쳐다봤다. 희서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더욱 커져 얼음처럼 굳어져 있었다. 윤국이 더욱 놀란 이유는 희서의 손에 들린 담배 때문이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온전한 담배 한 개비를 희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끼운 채였던 것이다.
“너, 뭐냐.”
윤국의 시선이 희서의 손가락에 낀 담배로 향했다. 모범생으로 알려진 여자아이의 순간적인 일탈인지, 아니면 가식을 벗어던진 본래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희서의 눈이 무척 건조하다는 사실만 느낄 뿐이었다.
“불은 안 붙였어. 그러니까 선생님들한테 고자질은 하지 마.”
“하!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윤국은 경계의 빛을 띤 희서를 잠시 쳐다보곤 그녀의 손가락에서 담배를 스윽 빼냈다. 그러곤 그것을 꽉 쥐어 부러뜨린 후 휙 던져버렸다. 희서의 시선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담배로 향했다가 다시 그를 마주했다.
한동안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윤국은 희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들썩거리는 것을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그의 비밀이, 가슴을 찢고 나오지 않도록.
“최윤국, 너…….”
희서의 발그레한 입술 끝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웃는 건가. 왜?
“이번에도 2등이라며?”
놀리듯 말하는데 미소만큼은 눈이 부시다. 윤국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래도 눈부심은 여전했다. 제게로 얼굴을 들이민 채 놀려대고 있는 이 녀석의 얼굴을 붙잡고 입 맞추고 싶어 혼났다.
그의 비밀.
희서를 향한 남학생들의 흠모의 물결 속에 속하지 않으려 자존심을 세우고 발버둥 쳤지만, 윤국 또한 희서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유난히 처연해보였던 희서의 얼굴을 본 순간, 당장에라도 빗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희서의 위태로움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소수점 차이로 이겨놓고 그렇게 으스대고 싶어?”
윤국이 감정을 감추고 조롱하자 희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며 그의 약을 올렸다.
“소수점이든 아니든 진 건 진 거지.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 난 관심 없으니까.”
“거짓말.”
희서의 단언에 윤국의 시선이 절로 홱 들려졌다.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같이 있고 싶은 건, 그의 또 하나의 비밀이었다. 윤국은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물었다.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관심 없다는 거. 너 나만 보면 꼴리잖아. 그렇지?”
“말이 험하다?”
“놀리려고 그런 건데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아, 귀여워.”
희서는 까르르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에 윤국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웃음을 그친 희서가 갑자기 손을 불쑥 내밀었다.
“우리 악수하자. 나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얗고 가녀리고 작은 손이 그의 앞으로 내밀어졌을 때, 그의 머릿속에서 춤을 추는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손을 잡고 끌어당겨 안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녀석의 말대로 정말로 꼴렸다. 아랫도리가 금세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