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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국아.”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희서의 손을 잡는데, 갑자기 녀석이 윤국의 귓전에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귓바퀴를 타고 전율이 흘러내렸다. 그 전율은 목을 통과하고 가슴을 관통하여 아랫배까지 달구었다. 금세 하체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윤국은 무의식중에 다리를 오므렸다.
“앞으로 이렇게 부를게. 다른 사람한텐 이렇게 부르는 거 허락하면 안 돼. 알았지?”
속삭임이 아찔하다.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추락했다가 한꺼번에 튀어 오른다. 그에게만 보내는 희서의 특별한 눈빛, 그에게만 전하는 희서의 특별한 한마디를, 윤국은 모두 알아들었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 사이로, 오가는 시선이 후텁지근했다. 등골로 땀이 솟았다.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희서는 자신의 손을 허공에 가만히 들어보았다. 빙긋이 웃는 낯빛에는 음흉함마저 서려 있었다.
“드디어 악수했어, 최윤국이랑.”
윤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의 동선을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가 점심시간마다 옥상에 자주 올라간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거기서 기다리기를 십분 째. 자신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훔쳐 온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윤국이 그렇게 놀란 얼굴은 처음 봤으니까. 덕분에 좀 더 친근해질 수 있었다.
“이 손은 절대 안 닦아야지.”
희서는 맹세하듯 손을 등 뒤로 돌렸다. 먼지 한 점도 묻히지 않을 것처럼, 걸음마저 조심스럽다. 얼굴에 오른 미소는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윤국은 모를 것이다. 그녀의 비밀을. 굵게 내리고 있는 빗물 새로 마주보았던 그 순간의 아찔함을. 시간이 정지되고 윤국을 제외한 주변의 것들이 모두 무채색으로 변해가던, 그 신기한 경험을.
그때부터 희서의 세계에 윤국이 들어오게 되었다.
“최윤국. 넌 이제 내 거야.”
의기양양하게 읊조린 희서는 집 앞에 다다라 걸음을 멈추었다. 멈칫한 표정에선 좀 전까지 드리워져 있던 행복감은 금세 사라지고 불안감이 팽배해졌다. 낮은 담장 너머로 집 안을 살폈다. 녹이 슨 파란 철제 지붕은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고, 마당의 빨랫줄에는 그물이 널려 있다.
몇 번을 힘을 주어야 열리는 현관 새시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직 엄마는 바다 일을 하러 나가 돌아오지 않았을 시간이니, 집 안은 텅 빈 것이 틀림없었다. 희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양부는 오늘도 집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이대로 영원히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언제 다시 갑자기 쳐들어와 술주정에 행패를 부리며 엄마가 저금해둔 돈을 훔쳐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희서에겐 양부의 술주정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부쩍 자신을 쳐다보는 양부의 눈빛이 음흉하다 싶었던 것이다. 엄마에게 말할까 하다 걱정하실까 관두었다. 대신 오늘처럼 이렇게 집 안을 먼저 살핀 후 귀가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혹여 양부가 집에 있다면 밖에서 좀 더 오래 머물다 엄마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나 양부를 피해 전국을 떠돌며 이사를 다녔는데, 양부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늘 그들의 곁에 돌아오곤 했다. 끊고 싶은 악연. 그것이 희서모녀와 양부의 관계였다. 지독하게 괴롭고 힘든.
담장의 벽에 기대 선 희서는 고개를 들어 올려 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응시했다. 늘 우울하게만 여겨졌던 하늘이, 오늘따라 청명하다. 윤국과 악수를 해서 그런가. 희서의 얼굴에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홍조가 번졌다. 기분 좋은 날이었다.

*

교실 청소가 끝나자마자 윤국은 가방을 서둘러 메고 학교를 나섰다. 수시전형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라 고3들의 야간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은 일찌감치 생략되었다. 그래도 방과가 끝나고 청소까지 끝내니 어느새 저녁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데 숨이 헐떡거렸다. 땀이 여기저기에 차올라 습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학교를 나와 바닷길을 따라 나 있는 도로를 한 차례 더 뛰어갔다. 방파제 근처에 있는 솔밭횟집을 지나 소나무가 빽빽하게 심긴 작은 언덕에 올랐다. 그 언덕의 중간 즈음에는 섬마을 사람들을 위한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희서가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도착하니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숨을 가쁘게 내뱉은 윤국은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그네를 타고 있는 희서를 발견했다. 숨을 고르듯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짧은 교복치마가 그네에 탄 바람에 당겨 더욱 짧아져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것을 본 윤국은, 숨결이 더욱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며 일부러 시선을 내렸다.
“국아. 왔어?”
희서가 그를 불렀고 윤국은 일부러 음성을 낮게 깐 채 대답하며 다가갔다.
“응.”
“이 언덕은 여름인데도 시원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 언덕에 자주 올라오시는 게 이유가 있었어.”
“그러게.”
윤국은 간단하게 대답하며 희서의 앞을 지나갔다. 하얀 허벅지에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닿는 바람에 달아오른 얼굴을 무마시키느라 땀을 뺐다. 희서의 옆 그네에 엉덩이를 걸친 윤국이 얼마쯤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냐?”
다른 놈들의 시선도, 윤국 자신처럼 머물렀을 거라 생각하니 괜스레 부아가 치솟았다. 그런 것을 즐기는 건지, 아니면 윤국의 착각인 건지 희서의 치마는 날이 갈수록 짧아지는 듯했다.
“왜에. 이 정도는 보통인데.”
그땐 몰랐다. 교복을 구입할 돈이 없어 우연히 주운 교복치마를 적당히 뜯어 희서의 몸에 맞춘 거라는 것을. 그러니 자연히 천이 모자라 길이가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희서는 괜히 시비 건다는 표정으로 윤국을 밉지 않게 쏘아본 뒤 입을 열었다.
“국아.”
국은 대답 대신 그녀를 주시했다. 희서가 자신을 저렇게 부를 때마다 미치겠다. 너무 좋아서.
“넌 어느 대학에 갈 거야?”
“당연히 서울이지.”
“그래. 그렇구나.”
“왜 물어? 넌 아냐? 너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윤국의 순진한 질문이 희서의 얼굴에 미소를 드리우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아름다운 아이. 희서의 눈동자에 우울한 색채가 언뜻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나 사실은 너한테 털어놓을 게 있어.”
뜬금없는 희서의 말에 윤국은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나 너 좋아했다? 처음부터?”
“……뭐?”
“정말이야. 그래서 널 언제나 지켜봤지. 네가 옥상에 자주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아내서, 그날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조희서…….”
“담배는 네 관심을 끌기 위한 하나의 소품이었고.”
윤국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믿을 수 없는 말이 희서의 입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자면 그가 남몰래 희서를 짝사랑한 것처럼, 희서도 그를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일방통행이 아니었다는 거다.
“……정말이야? 조희서, 정말이야?”
윤국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열어 희서에게 확인했다. 그러자 단호한 그녀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니까.”
감히 뭐라 말조차 할 수 없는 감정이 불쑥 치솟았다. 가슴이 터질 듯했다. 마음 같아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유치한 자존심에 그저 실실 웃는 걸로 감정을 다스려야만 했다. 그런 윤국을 보면서 희서는 피식 웃었다.
윤국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뒤통수였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희서는 푸하하 웃으면서 그의 놀란 얼굴을 가리키며 놀려댔다. 놀리면 그대로 당해주는 윤국이 좋았다. 여름치고 서늘한 바람에 실려 오는 윤국이 바른 스킨 냄새도, 다 자란 남자 같은 듬직한 키와 어깨도, 무엇보다 늘 긴장하게 만드는 저 잘생긴 얼굴도.
하지만 갑작스레 이곳에 이사 왔던 것처럼, 언제 또다시 갑작스레 이사를 떠날지 알 수 없는 희서에게, 오늘의 고백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윤국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윤국에게 만큼은 제 마음을 다 보여주고 싶었다.
희서는 잠시 윤국을 쳐다보다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등대가 켜지기 시작하고 둥실 떠오른 달빛이 바다를 비추기 시작했다.
“여기 가을이 되면 경치가 정말 끝내준대.”
“그래? 그럼 그때 같이 모래사장이나 걸어볼까?”
“그러자.”
“이거 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