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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내게 말했다
1화
prologue
4월은…… 조금, 아니 많이 특별한 달이다.
우선 휴대폰 번호를 흘린 곳에서, 전혀 상관없는 인공 지능들이 폭탄을 투하하듯 축하 문자를 보내는 생일이 있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엄마의 생일도 4월이었다. 그리고 흩어져 있어 딸이 번거로울까 걱정되셨는지 엄마의 기일도 4월이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지금은 어디 계신지 알 수가 없는 아빠의 생일도 4월이었다.
한 가족 세 식구의 생일이 모두 따뜻하고 만개한 봄꽃으로 가득한 4월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단 한 번도 그 생일들을 웃으면서 보낸 적이 없었다.
앙증맞은 생일 케이크, 아이들이 좋아하는 미역국, 불고기 같은 특별한 반찬들. 자기 생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여길 만큼 나는 어렸다. 그래서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생일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유치원이 끝나면 아이들이 잔뜩 몰려오기로 했었다. 평소에도 음식 솜씨가 좋던 엄마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게 괜히 으쓱했던 나는 눈을 뜨자마자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가 오나 하고 밖을 내다볼 때마다 그 기분은 더해졌었다.
그런데 그건 어린 나에게만 그랬던 모양이다.
“그만!”
아빠가 낮게 탄식했다.
“이제 도저히 못 참겠어!”
혼자 신나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막 겨우겨우 일곱 개의 촛불에 켜진 불을 끈 순간이었다.
“여보!”
어린 제 눈에 보기에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던 엄마가 외쳤다.
“숨이 막혀서 도저히 못 살겠어! 미안해.”
그 말만 남기고 벌떡 일어난 아빠는 점퍼를 구겨 든 채 집을 나갔고 엄마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베이지색의 얇은 봄 점퍼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난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 못하고 아마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날 내가 초대한 친구들은 우리 집에 오지 못했다. 그리고 아빠도 영영 다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다정하고 사람 좋아 보이던 아빠가 왜 집을 나갔는지, 왜 엄마와 이혼을 했는지 알게 된 건 아주 나중 일이었다.
* * *
2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그 사랑스럽던 집은 낡고 어두워졌고, 우리가 아닌 내 집이 되어 있었다. 우리란 단어를 만들어 준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째, 남향이었던 우리 집은 앞에 커다란 상가 건물들이 생기고 복잡해져 침침한 그늘 때문에 이제는 대낮에도 불을 켜야만 하는 곳으로 변했다.
지어진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 서울 한복판의 오래된 양옥집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대로 번쩍거리는 바닥과 벽, 색색의 다이아몬드 꼴로 장식된 움푹 팬 천장이 모두 나무로 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선풍기와 환풍기 겸용의 팬과 옥색 꽃무늬 유리 등이 네 개 달려 있었고, 싱크대는 베이지색이었지만 이미 낡아서 칙칙해져 있었다. 달랑 방 두 개와 화장실, 작은 거실과 이어진 부엌, 그리고 2층 다락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있는 전형적인 옛날 집이었다.
네모난 거실 가운데에는 그즈음의 집들에 다들 있었던 회색 패브릭으로 된 소파가 있었다. 엄마의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을 들어 먼지가 나는 그 소파를 치워 버리고 싶어 했었지만 버릴 엄두가 나지 않아 그 소파는 이 집이 생긴 이래로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거기에 앉아 있던 기억은 없었다.
나무 바닥인 거실에는 좀처럼 난방을 하지 않아, 그나마 보일러를 돌리는 내 방까지 가는 바닥은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러나 출근할 필요가 없는 휴일이나 명절이면 차갑고 적막한 냉기를 참고 몇 시간씩 그 거실에 앉아 있는 이유는 이 적막한 집 안에 유일한 소음을 만들어 내는 생명체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 우리도 이사 가. 옆집에 또 도둑 들었대. 아파트 같은 데로 가자. 여긴 난방비도 많이 들고 춥고 낡았고…….”
지하철역에서 너무 멀어 마을버스도 다니지 않는 지긋지긋하고 괴괴한 낡은 이 집이 싫어 매번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엄마는 내 투정을 들어 주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학교를 갔다 온 어느 날, 뭔가 낯선 게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부엌이 곧바로 보이는 구조였는데 그걸 막아선 낯선…… 네모난 것.
“손 안 가고 가습에도 좋다더라. 먹이는 너무 자주 주지 말래.”
낡은 나무 색조의 집에 어울리지 않게 푸르스름한 조명을 비추는 투명하고 네모난 데다 커다랗기까지 한 수조가 떡하니 부엌을 향한 시선을 막고 들어섰고 거기에는 형형색색의 날개를 단 것 같은 낯선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수조 바닥에는 하얀 자갈이 깔려 있고, 플라스틱인지 아니면 헝겊인지 부자연스러우리만큼 강렬한 초록빛을 띠는 흐늘거리는 수초들도 제법 멋지게 포진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커다란 소파가 자리를 차지해 좁은 거실을 더욱더 비좁게 만드는 기형적인 모습이었다. 나무로 된 구식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스테인리스로 된 푸른빛을 띤 수조는 혼자 생뚱맞게 미래에서 온 것 같은 형상이었다.
“돈도 썩었다.”
평소에도 엄마가 십 원 한 장 허투루 쓰지 않는 게 늘 불만이었던 내가 그 생뚱맞은 수조를 보고 내뱉은 말은 그게 다였다.
그 뒤로 두 모녀가 유일하게 합심해서 하는 일이란 게 그 커다란 수조의 물을 가는 일이 전부였고, 그 안에서 물고기가 알을 낳고 새끼가 태어나는 신기한 경험을 몇 번 한 뒤로는 수명을 다해서 배를 뒤집고 둥둥 떠 있는 물고기를 건져 내 마당에 묻어 주곤 하루 종일 우울한 채로 있는 게 유일한 접점이 되어 버렸다.
다가와 엉겨 붙지도 않고 재롱을 떨 줄도 모르고 이름을 불러도 알은척하지 않지만 생명이란 이유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에 점점 견고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던 그 수조 속의 열대어들은 엄마의 마지막 유언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잘 키워. 물 잘 갈아 주고…….”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선, 움직일 기운도 없었던 엄마가 하루 종일 그랬듯 소파 옆의 리클라이너 의자에서 하염없이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일로 소일을 하게 된 나는, 몇 번이고 이 수조를 치워 버리려 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열심히 헤엄치고, 먹고, 사랑하고, 새끼를 만들어 내고 또다시 세상을 떠나는 이 작은 생명체들에게 미안해서 먹이를 더 줄 뿐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왜 이 관리하기도 힘들고, 춥고, 어둡고 괴괴한 집을 떠나지 못했는지를. 그 어린 날 봄 점퍼를 들고 나간 누군가를 엄마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짐승이라곤 질색하던 엄마가 고민 끝에 한 달 월급의 반을 써 가면서 저렇게 커다란 수조를 들여놨다는 걸. 괴괴한 이 집에 살면서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 ‘저 딸애’만을 보고 살기엔 삶이 너무 버겁지 않았을까.
나는 방문을 닫고 부지런히 옷매무새를 챙기고 열 때마다 끼그덕 소리를 내는, 이제는 문짝이 틀어져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 신발장에서 검은색 펌프스를 꺼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게 보였지만 그걸 무시하고 발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냉기가 발끝을 시리게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시했다.
여전히 적막한 집 안의 커다란 수조에서는 히터와 기포 발생기에서 들리는 백색 소음만이 흩어져 있었다. 힐끗 그림같이 푸르스름한 수조에서 떠다니는 나비 같은 물고기들을 쳐다보고는 알루미늄으로 된 현관문을 나섰다. 어제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바깥 공기를 무시하려 애썼다.
집을 나서려는데 무언가 낯선 게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분홍빛의 무엇…….
삭막한 제집에는 아무것도 그런 빛깔이 나는 물건이 없었다. 갑자기 눈이 아파진 나는 눈을 비볐다. 그러나 곧 손에 묻어나는 섀도의 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화장을 망친 건, 옆집에서 넘어온 나뭇가지에 핀 매우 이른 벚꽃이었다.
꽃이 피다니…….
봄이었다.
나는 문득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신발장 옆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이젠 다들 휴대폰이 있어 벽에 달력 같은 걸 걸지는 않았지만, 작년에 친구에게 선물 받은 달력이었다. 일찍 결혼한 친구가 자기 아이 사진을 넣어서 만든 달력이라고 선물을 주었기에 무심코 걸어 놓았던 달력.
‘4’라는 커다란 숫자 앞에 초록색 옷을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쓴 친구의 첫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4월이었다. 아침에 휴대폰을 울렸던 메시지들이 이제야 생각났다. 4월의 첫날, 남들은 유쾌한 거짓말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것이 뉴스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는 날.
그래서 제 생일이라고 말하면 다들 거짓말이라고 웃어넘기던 그 4월의 첫날. 차라리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훨씬 나았을 것 같은 그런 날.
나는 침침한 집을 나서기 위해서 발걸음을 빨리했다. 환청이 들리는 거 같아서.
첫날을 맞은 4월이 내게 말했다.
……넌 왜 아직도 안 죽는 거냐고.
이 4월을 견뎌 내야 하는 한 달의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 * *
화려한 야경이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넥타이를 매는 그의 손길이 빨라졌다. 그러나 1년에 350일은 매는 넥타이인데도 늘 마음에 드는 모양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신경질적인 손길로 묶였던 매듭을 다시 풀어 헤쳤다. 하루에 두 번이나 매는데도 늘 이 모양이었다.
꼭 두 번을 매야 제 맘에 드는 건 참 짜증 나는 습관이자 버릇, 혹은 징크스였다.
옷걸이에 잘 걸려 있는 매끈한 슈트 상의를 집는 순간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이미 시간이 한참이나 늦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옷차림은 그저 제 취향이나 선호도 따위를 배제하고 늘 입어 왔던 교복처럼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겉모습일 뿐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과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고, 지불한 비용만큼 그 돈을 받는 사람들이 열심히 제 역할을 하고 있기에 자신의 특출한 외모에 대한 찬사가 늘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헌칠한 키에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강 회장님의 뚝심 어린 다부짐과 왕년에 뭇 남자들의 심금을 울려 어린 나이에 과하게 허영과 찬사에 들떠 있던 미모의 여배우의 장점만 잘 버무려진 그럴 듯한 외모를 지녔다. 거기에 더해서 이유 없는 자신감과 거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만만하고 과하게 잘난 남자는 구김 하나 없이 매끈한 자태를 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슈트 상의를 보고 망연하게 있을 뿐이었다. 제 자신에게 지금 1분 1초가 아깝다는 사실도 잊은 채.
왜, 쓸데없이 이런 걸 깨닫고 있었을까.
그는 제 자신의 이런 어이없는 망상에 피식 실소를 날리면서 비웃어 줘야 했다. 그러나 그러질 못했다.
남들이 보면 비웃다 지쳐 쓰러질 만큼 어이없고, 유치한 이유였다.
그 미지의 누군가가 과한 페이를 받고 제 클라이언트가 가장 멋지고 가장 대단해 보이길 원하면서 가져다 놓은 최신식의 매끈하고 유려한 디자인이 된 슈트 상의는 아무 죄가 없었다. 그러니 그는 멈칫했던 손을 내밀어 옷을 집어 들었다. 가뿐했다. 물론 최고의 캐시미어를 사용한 겨울의 슈트도 무거울 리가 없었다. 계절을 위한 재질만 그럴 뿐이지 그걸 입고 한겨울 기온을 체감할 곳에 나설 필요는 전혀 없는 옷의 주인을 위해서 방한 기능 따위는 별로 따지지 않았을 테니까.
제 손에 닿은 맵시 있는 상의는 얇고 매끈했다. 바야흐로 한눈에 봐도 춘추복이었다. 아마 몇 달 전에 뉴욕 패션 위크 따위에서 발표된 최신 S/S 시즌의 이름난 디자이너의 기성복 상표일 것이다. 이 얇고 값비싼 상의가 말하고 있는 건 이제 그 지긋지긋한 겨울이 가고 더 끔찍한 계절이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젠장……. 그는 머릿속을 떨치려는 듯 그 얇고 매끈한 상의를 휘둘러 제 몸에 걸쳤다. 가볍고 딱 떨어지는 핏이 맘에 들었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달력 따위는…… 이 광활하고 완벽한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공간에 없었다. 다만 그는 시간을 보려 휴대폰을 켰을 뿐이었다. 바탕화면에 나와 있는 숫자가 그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4]
4월이 시작되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제일 진하고 큰 숫자는 3이었다.
4월이라니……. 젠장, 4월이라니.
어쩐지 그는 갑자기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가끔 ‘어머니’는 제게 비웃는 것 같은 미소를―실제로 비웃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분의 미소는 늘 그런 모습이니까.― 지으며 말했다.
‘네 진짜 생일은 4월이라 해야 하지 않겠니? 네 인생은 그 4월부터 시작이니까. 난 솔직히 거짓말인 줄 알았다니까. 하필 만우절이라니. 그 전엔…… 넌 뭐,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 뒤로 길게 흐르는 꼬리가 이쪽저쪽에 분탕질하는 것 같은 그런 웃음소리……. 그는 이를 악물고 희미하게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응대했었다.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왜 제가 어금니에 힘을 주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끔찍하리만큼 4월이 싫었다.
죽을 死 자와 똑같아서가 아니었다. 아니, 누군가 죽이고 싶어졌다. 그냥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제가 원한 건 별로 없었다. 따뜻한 밥 한 끼. 맘껏 뭔가를 그릴 수 있는 종이 따위…… 그런 것밖에는.
아니, 그 뒤로 그는 절대 그림 따위를 그려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학교 미술 시간에 내준 도화지를 째려보고만 있어도 그 어떤 선생도 제게 뭐라 하지 않았다. 그게 세상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아니었나? 그런 제가 하고 싶지 않을 걸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힘 따위.
쳇.
그는 가볍게 혀를 차고 저를 망상에 시달리게 했던 슈트 단추를 채우고 화려한 거실을 나섰다. 단지 시간이 얼마나 늦었나를 보기 위해서 다시금 휴대폰을 눌렀을 뿐이었다.
4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디밀어졌다.
그러고는 그 숫자가 제게 말했다.
넌…… 또 용케도 살고 있구나. 지겹지도 않니?
그럴 리가. 산다는 건 재밌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죽어 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살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죽어 나자빠지는 걸 보면서 사는 건 나름 즐거운 일이었다. 그 미지의 누군가가 제가 알고 있는 누군가가 되기 위해선 좀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다. 그는 힘찬 걸음으로 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1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기어이 방향 지시등을 켜고는 길 한쪽 옆으로 차를 대고 말았다. 자주 운전을 하는 건 아니었다. 늘 운전석이나 옆에 누군가 타고 있는 것도 가끔은 피곤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 고독을 즐기자고 작정한 것 따위는 아니었다. 기사는 퇴근했고 근무는 이미 다 끝난 늦은 시간이었다.
라식 수술의 부작용 탓인지 낮에는 쨍쨍한 햇볕이 그를 선글라스 없인 견디기 힘들게 했고 이런 야간 운전을 할 때는 반대편 차선에서 쏟아지는 빛이 얇아진 망막에 고통을 주고 있었다. 한참 눈을 찡그리고 비비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환한 불빛을 보고는 차에서 내려 불이 켜진 건물 가까이로 다가갔다.
땡그랑.
문에 무언가 달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흔하디흔한 자동문도 아니고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조그마한 약국이었다. 실은 그는 여기가 어디 근처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내비게이션의 붉은색 화살표 옆을 의미 없이 채우고 있는 텅 빈 공간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는 그런 곳이었다. 아마 주행로에 서 버린 주인 덕분에 내비게이션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용건을 말하려고 했지만 다른 손님이 먼저 있었다. 희끗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올리고 정갈해 보이는 하얀 가운을 입은 나이 든 여자 약사가 프런트 안에서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그냥 주세요.”
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시끄러운 대로변의 소음이 차단되어 조용하고 환한 불빛이 가득한 하얀색의 약국에서 인조 대리석 프런트 앞에 선 여자의 목소리는 뚜렷하게 울렸다. 처음 들어 보는, 낮고 또박또박해서 마치 무슨 성우 같은 특이한 목소리였다. 그는 시린 눈가를 찌푸리면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여자는 어깨 밑까지 오는 짙은 갈색의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 계절엔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는 베이지색 바바리코트 밑으로 살짝 검은색의 치마 밑단이 보였고 커피색 스타킹 밑에는 굽이 두꺼운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날씬해서 호리호리하게 보이는, 전형적인 젊은 직장인 아가씨의 차림새였다.
“손님…… 내가 자주 봐서 하는 말인데, 병원에서 처방받은 건 아니죠?”
“…….”
상대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여자는 침묵을 지켰다. 달리 뭔가 할 게 없는 그는 시선을 돌려 아이들을 홀리기 위한 용도가 분명한 장난감들이 잔뜩 달린 비타민제며 칫솔들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휴약기 안 지키는 거 같은데……. 꼭 휴약기 있어야 해요. 자궁 내막증이나 혹은 생리 주기 때문에 먹는 것도 휴약기가 필요해요. 물론 요즘 피임약이 호르몬 양이 적어져서 다행이긴 한데 이렇게 너무 장기 복용 하는 건…….”
“주세요.”
여자는 익숙하다는 듯 지갑에서 오천 원짜리 하나와 천 원짜리를 꺼내 들고 세더니 내밀었다. 그러자 나이 든 약사는 약을 비닐봉지에 담아 주고는 돈을 받아 들더니 체념하지 못한 듯 말을 덧붙였다.
“이번 달만 드시고 휴약기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자는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어깨에 멘 커다란 가방에 약을 집어넣고는 돌아섰다.
제 앞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스치고 지나간 여자는…… 예뻤다.
남자들이 여자의 외모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척 단순했다. 예쁘다 아니면 못생겼다.
그런데 언뜻 스친 여자의 외모는 예쁘다는 단순한 단어 외에 뭔가가 더 있었다. 조각 같은 조막만 한 얼굴이 옆으로 넘긴 긴 앞머리 사이에 있었다. 진하게 화장을 한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여자에게는 묘하게 남자의 속을 아릿하게 만드는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당혹스럽게도 저 묘한 분위기와 그의 귀에 들린 어색한 단어가 귓가에 맴돌았다.
“무엇을 드릴까요, 손님?”
차분한 약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잠시 동안 제 앞을 스쳐 간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 따위는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네, 눈이 아파서 그러는데 인공눈물 있습니까?”
1화
prologue
4월은…… 조금, 아니 많이 특별한 달이다.
우선 휴대폰 번호를 흘린 곳에서, 전혀 상관없는 인공 지능들이 폭탄을 투하하듯 축하 문자를 보내는 생일이 있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엄마의 생일도 4월이었다. 그리고 흩어져 있어 딸이 번거로울까 걱정되셨는지 엄마의 기일도 4월이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지금은 어디 계신지 알 수가 없는 아빠의 생일도 4월이었다.
한 가족 세 식구의 생일이 모두 따뜻하고 만개한 봄꽃으로 가득한 4월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단 한 번도 그 생일들을 웃으면서 보낸 적이 없었다.
앙증맞은 생일 케이크, 아이들이 좋아하는 미역국, 불고기 같은 특별한 반찬들. 자기 생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여길 만큼 나는 어렸다. 그래서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생일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유치원이 끝나면 아이들이 잔뜩 몰려오기로 했었다. 평소에도 음식 솜씨가 좋던 엄마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게 괜히 으쓱했던 나는 눈을 뜨자마자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가 오나 하고 밖을 내다볼 때마다 그 기분은 더해졌었다.
그런데 그건 어린 나에게만 그랬던 모양이다.
“그만!”
아빠가 낮게 탄식했다.
“이제 도저히 못 참겠어!”
혼자 신나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막 겨우겨우 일곱 개의 촛불에 켜진 불을 끈 순간이었다.
“여보!”
어린 제 눈에 보기에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던 엄마가 외쳤다.
“숨이 막혀서 도저히 못 살겠어! 미안해.”
그 말만 남기고 벌떡 일어난 아빠는 점퍼를 구겨 든 채 집을 나갔고 엄마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베이지색의 얇은 봄 점퍼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난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 못하고 아마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날 내가 초대한 친구들은 우리 집에 오지 못했다. 그리고 아빠도 영영 다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다정하고 사람 좋아 보이던 아빠가 왜 집을 나갔는지, 왜 엄마와 이혼을 했는지 알게 된 건 아주 나중 일이었다.
* * *
2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그 사랑스럽던 집은 낡고 어두워졌고, 우리가 아닌 내 집이 되어 있었다. 우리란 단어를 만들어 준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째, 남향이었던 우리 집은 앞에 커다란 상가 건물들이 생기고 복잡해져 침침한 그늘 때문에 이제는 대낮에도 불을 켜야만 하는 곳으로 변했다.
지어진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 서울 한복판의 오래된 양옥집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대로 번쩍거리는 바닥과 벽, 색색의 다이아몬드 꼴로 장식된 움푹 팬 천장이 모두 나무로 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선풍기와 환풍기 겸용의 팬과 옥색 꽃무늬 유리 등이 네 개 달려 있었고, 싱크대는 베이지색이었지만 이미 낡아서 칙칙해져 있었다. 달랑 방 두 개와 화장실, 작은 거실과 이어진 부엌, 그리고 2층 다락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있는 전형적인 옛날 집이었다.
네모난 거실 가운데에는 그즈음의 집들에 다들 있었던 회색 패브릭으로 된 소파가 있었다. 엄마의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을 들어 먼지가 나는 그 소파를 치워 버리고 싶어 했었지만 버릴 엄두가 나지 않아 그 소파는 이 집이 생긴 이래로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거기에 앉아 있던 기억은 없었다.
나무 바닥인 거실에는 좀처럼 난방을 하지 않아, 그나마 보일러를 돌리는 내 방까지 가는 바닥은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러나 출근할 필요가 없는 휴일이나 명절이면 차갑고 적막한 냉기를 참고 몇 시간씩 그 거실에 앉아 있는 이유는 이 적막한 집 안에 유일한 소음을 만들어 내는 생명체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 우리도 이사 가. 옆집에 또 도둑 들었대. 아파트 같은 데로 가자. 여긴 난방비도 많이 들고 춥고 낡았고…….”
지하철역에서 너무 멀어 마을버스도 다니지 않는 지긋지긋하고 괴괴한 낡은 이 집이 싫어 매번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엄마는 내 투정을 들어 주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학교를 갔다 온 어느 날, 뭔가 낯선 게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부엌이 곧바로 보이는 구조였는데 그걸 막아선 낯선…… 네모난 것.
“손 안 가고 가습에도 좋다더라. 먹이는 너무 자주 주지 말래.”
낡은 나무 색조의 집에 어울리지 않게 푸르스름한 조명을 비추는 투명하고 네모난 데다 커다랗기까지 한 수조가 떡하니 부엌을 향한 시선을 막고 들어섰고 거기에는 형형색색의 날개를 단 것 같은 낯선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수조 바닥에는 하얀 자갈이 깔려 있고, 플라스틱인지 아니면 헝겊인지 부자연스러우리만큼 강렬한 초록빛을 띠는 흐늘거리는 수초들도 제법 멋지게 포진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커다란 소파가 자리를 차지해 좁은 거실을 더욱더 비좁게 만드는 기형적인 모습이었다. 나무로 된 구식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스테인리스로 된 푸른빛을 띤 수조는 혼자 생뚱맞게 미래에서 온 것 같은 형상이었다.
“돈도 썩었다.”
평소에도 엄마가 십 원 한 장 허투루 쓰지 않는 게 늘 불만이었던 내가 그 생뚱맞은 수조를 보고 내뱉은 말은 그게 다였다.
그 뒤로 두 모녀가 유일하게 합심해서 하는 일이란 게 그 커다란 수조의 물을 가는 일이 전부였고, 그 안에서 물고기가 알을 낳고 새끼가 태어나는 신기한 경험을 몇 번 한 뒤로는 수명을 다해서 배를 뒤집고 둥둥 떠 있는 물고기를 건져 내 마당에 묻어 주곤 하루 종일 우울한 채로 있는 게 유일한 접점이 되어 버렸다.
다가와 엉겨 붙지도 않고 재롱을 떨 줄도 모르고 이름을 불러도 알은척하지 않지만 생명이란 이유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에 점점 견고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던 그 수조 속의 열대어들은 엄마의 마지막 유언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잘 키워. 물 잘 갈아 주고…….”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선, 움직일 기운도 없었던 엄마가 하루 종일 그랬듯 소파 옆의 리클라이너 의자에서 하염없이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일로 소일을 하게 된 나는, 몇 번이고 이 수조를 치워 버리려 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열심히 헤엄치고, 먹고, 사랑하고, 새끼를 만들어 내고 또다시 세상을 떠나는 이 작은 생명체들에게 미안해서 먹이를 더 줄 뿐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왜 이 관리하기도 힘들고, 춥고, 어둡고 괴괴한 집을 떠나지 못했는지를. 그 어린 날 봄 점퍼를 들고 나간 누군가를 엄마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짐승이라곤 질색하던 엄마가 고민 끝에 한 달 월급의 반을 써 가면서 저렇게 커다란 수조를 들여놨다는 걸. 괴괴한 이 집에 살면서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 ‘저 딸애’만을 보고 살기엔 삶이 너무 버겁지 않았을까.
나는 방문을 닫고 부지런히 옷매무새를 챙기고 열 때마다 끼그덕 소리를 내는, 이제는 문짝이 틀어져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 신발장에서 검은색 펌프스를 꺼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게 보였지만 그걸 무시하고 발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냉기가 발끝을 시리게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시했다.
여전히 적막한 집 안의 커다란 수조에서는 히터와 기포 발생기에서 들리는 백색 소음만이 흩어져 있었다. 힐끗 그림같이 푸르스름한 수조에서 떠다니는 나비 같은 물고기들을 쳐다보고는 알루미늄으로 된 현관문을 나섰다. 어제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바깥 공기를 무시하려 애썼다.
집을 나서려는데 무언가 낯선 게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분홍빛의 무엇…….
삭막한 제집에는 아무것도 그런 빛깔이 나는 물건이 없었다. 갑자기 눈이 아파진 나는 눈을 비볐다. 그러나 곧 손에 묻어나는 섀도의 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화장을 망친 건, 옆집에서 넘어온 나뭇가지에 핀 매우 이른 벚꽃이었다.
꽃이 피다니…….
봄이었다.
나는 문득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신발장 옆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이젠 다들 휴대폰이 있어 벽에 달력 같은 걸 걸지는 않았지만, 작년에 친구에게 선물 받은 달력이었다. 일찍 결혼한 친구가 자기 아이 사진을 넣어서 만든 달력이라고 선물을 주었기에 무심코 걸어 놓았던 달력.
‘4’라는 커다란 숫자 앞에 초록색 옷을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쓴 친구의 첫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4월이었다. 아침에 휴대폰을 울렸던 메시지들이 이제야 생각났다. 4월의 첫날, 남들은 유쾌한 거짓말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것이 뉴스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는 날.
그래서 제 생일이라고 말하면 다들 거짓말이라고 웃어넘기던 그 4월의 첫날. 차라리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훨씬 나았을 것 같은 그런 날.
나는 침침한 집을 나서기 위해서 발걸음을 빨리했다. 환청이 들리는 거 같아서.
첫날을 맞은 4월이 내게 말했다.
……넌 왜 아직도 안 죽는 거냐고.
이 4월을 견뎌 내야 하는 한 달의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 * *
화려한 야경이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넥타이를 매는 그의 손길이 빨라졌다. 그러나 1년에 350일은 매는 넥타이인데도 늘 마음에 드는 모양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신경질적인 손길로 묶였던 매듭을 다시 풀어 헤쳤다. 하루에 두 번이나 매는데도 늘 이 모양이었다.
꼭 두 번을 매야 제 맘에 드는 건 참 짜증 나는 습관이자 버릇, 혹은 징크스였다.
옷걸이에 잘 걸려 있는 매끈한 슈트 상의를 집는 순간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이미 시간이 한참이나 늦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옷차림은 그저 제 취향이나 선호도 따위를 배제하고 늘 입어 왔던 교복처럼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겉모습일 뿐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과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고, 지불한 비용만큼 그 돈을 받는 사람들이 열심히 제 역할을 하고 있기에 자신의 특출한 외모에 대한 찬사가 늘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헌칠한 키에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강 회장님의 뚝심 어린 다부짐과 왕년에 뭇 남자들의 심금을 울려 어린 나이에 과하게 허영과 찬사에 들떠 있던 미모의 여배우의 장점만 잘 버무려진 그럴 듯한 외모를 지녔다. 거기에 더해서 이유 없는 자신감과 거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만만하고 과하게 잘난 남자는 구김 하나 없이 매끈한 자태를 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슈트 상의를 보고 망연하게 있을 뿐이었다. 제 자신에게 지금 1분 1초가 아깝다는 사실도 잊은 채.
왜, 쓸데없이 이런 걸 깨닫고 있었을까.
그는 제 자신의 이런 어이없는 망상에 피식 실소를 날리면서 비웃어 줘야 했다. 그러나 그러질 못했다.
남들이 보면 비웃다 지쳐 쓰러질 만큼 어이없고, 유치한 이유였다.
그 미지의 누군가가 과한 페이를 받고 제 클라이언트가 가장 멋지고 가장 대단해 보이길 원하면서 가져다 놓은 최신식의 매끈하고 유려한 디자인이 된 슈트 상의는 아무 죄가 없었다. 그러니 그는 멈칫했던 손을 내밀어 옷을 집어 들었다. 가뿐했다. 물론 최고의 캐시미어를 사용한 겨울의 슈트도 무거울 리가 없었다. 계절을 위한 재질만 그럴 뿐이지 그걸 입고 한겨울 기온을 체감할 곳에 나설 필요는 전혀 없는 옷의 주인을 위해서 방한 기능 따위는 별로 따지지 않았을 테니까.
제 손에 닿은 맵시 있는 상의는 얇고 매끈했다. 바야흐로 한눈에 봐도 춘추복이었다. 아마 몇 달 전에 뉴욕 패션 위크 따위에서 발표된 최신 S/S 시즌의 이름난 디자이너의 기성복 상표일 것이다. 이 얇고 값비싼 상의가 말하고 있는 건 이제 그 지긋지긋한 겨울이 가고 더 끔찍한 계절이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젠장……. 그는 머릿속을 떨치려는 듯 그 얇고 매끈한 상의를 휘둘러 제 몸에 걸쳤다. 가볍고 딱 떨어지는 핏이 맘에 들었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달력 따위는…… 이 광활하고 완벽한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공간에 없었다. 다만 그는 시간을 보려 휴대폰을 켰을 뿐이었다. 바탕화면에 나와 있는 숫자가 그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4]
4월이 시작되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제일 진하고 큰 숫자는 3이었다.
4월이라니……. 젠장, 4월이라니.
어쩐지 그는 갑자기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가끔 ‘어머니’는 제게 비웃는 것 같은 미소를―실제로 비웃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분의 미소는 늘 그런 모습이니까.― 지으며 말했다.
‘네 진짜 생일은 4월이라 해야 하지 않겠니? 네 인생은 그 4월부터 시작이니까. 난 솔직히 거짓말인 줄 알았다니까. 하필 만우절이라니. 그 전엔…… 넌 뭐,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 뒤로 길게 흐르는 꼬리가 이쪽저쪽에 분탕질하는 것 같은 그런 웃음소리……. 그는 이를 악물고 희미하게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응대했었다.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왜 제가 어금니에 힘을 주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끔찍하리만큼 4월이 싫었다.
죽을 死 자와 똑같아서가 아니었다. 아니, 누군가 죽이고 싶어졌다. 그냥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제가 원한 건 별로 없었다. 따뜻한 밥 한 끼. 맘껏 뭔가를 그릴 수 있는 종이 따위…… 그런 것밖에는.
아니, 그 뒤로 그는 절대 그림 따위를 그려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학교 미술 시간에 내준 도화지를 째려보고만 있어도 그 어떤 선생도 제게 뭐라 하지 않았다. 그게 세상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 아니었나? 그런 제가 하고 싶지 않을 걸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힘 따위.
쳇.
그는 가볍게 혀를 차고 저를 망상에 시달리게 했던 슈트 단추를 채우고 화려한 거실을 나섰다. 단지 시간이 얼마나 늦었나를 보기 위해서 다시금 휴대폰을 눌렀을 뿐이었다.
4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디밀어졌다.
그러고는 그 숫자가 제게 말했다.
넌…… 또 용케도 살고 있구나. 지겹지도 않니?
그럴 리가. 산다는 건 재밌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죽어 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살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죽어 나자빠지는 걸 보면서 사는 건 나름 즐거운 일이었다. 그 미지의 누군가가 제가 알고 있는 누군가가 되기 위해선 좀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다. 그는 힘찬 걸음으로 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1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기어이 방향 지시등을 켜고는 길 한쪽 옆으로 차를 대고 말았다. 자주 운전을 하는 건 아니었다. 늘 운전석이나 옆에 누군가 타고 있는 것도 가끔은 피곤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 고독을 즐기자고 작정한 것 따위는 아니었다. 기사는 퇴근했고 근무는 이미 다 끝난 늦은 시간이었다.
라식 수술의 부작용 탓인지 낮에는 쨍쨍한 햇볕이 그를 선글라스 없인 견디기 힘들게 했고 이런 야간 운전을 할 때는 반대편 차선에서 쏟아지는 빛이 얇아진 망막에 고통을 주고 있었다. 한참 눈을 찡그리고 비비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환한 불빛을 보고는 차에서 내려 불이 켜진 건물 가까이로 다가갔다.
땡그랑.
문에 무언가 달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흔하디흔한 자동문도 아니고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조그마한 약국이었다. 실은 그는 여기가 어디 근처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내비게이션의 붉은색 화살표 옆을 의미 없이 채우고 있는 텅 빈 공간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는 그런 곳이었다. 아마 주행로에 서 버린 주인 덕분에 내비게이션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용건을 말하려고 했지만 다른 손님이 먼저 있었다. 희끗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올리고 정갈해 보이는 하얀 가운을 입은 나이 든 여자 약사가 프런트 안에서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그냥 주세요.”
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시끄러운 대로변의 소음이 차단되어 조용하고 환한 불빛이 가득한 하얀색의 약국에서 인조 대리석 프런트 앞에 선 여자의 목소리는 뚜렷하게 울렸다. 처음 들어 보는, 낮고 또박또박해서 마치 무슨 성우 같은 특이한 목소리였다. 그는 시린 눈가를 찌푸리면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여자는 어깨 밑까지 오는 짙은 갈색의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 계절엔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는 베이지색 바바리코트 밑으로 살짝 검은색의 치마 밑단이 보였고 커피색 스타킹 밑에는 굽이 두꺼운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날씬해서 호리호리하게 보이는, 전형적인 젊은 직장인 아가씨의 차림새였다.
“손님…… 내가 자주 봐서 하는 말인데, 병원에서 처방받은 건 아니죠?”
“…….”
상대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여자는 침묵을 지켰다. 달리 뭔가 할 게 없는 그는 시선을 돌려 아이들을 홀리기 위한 용도가 분명한 장난감들이 잔뜩 달린 비타민제며 칫솔들을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휴약기 안 지키는 거 같은데……. 꼭 휴약기 있어야 해요. 자궁 내막증이나 혹은 생리 주기 때문에 먹는 것도 휴약기가 필요해요. 물론 요즘 피임약이 호르몬 양이 적어져서 다행이긴 한데 이렇게 너무 장기 복용 하는 건…….”
“주세요.”
여자는 익숙하다는 듯 지갑에서 오천 원짜리 하나와 천 원짜리를 꺼내 들고 세더니 내밀었다. 그러자 나이 든 약사는 약을 비닐봉지에 담아 주고는 돈을 받아 들더니 체념하지 못한 듯 말을 덧붙였다.
“이번 달만 드시고 휴약기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자는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어깨에 멘 커다란 가방에 약을 집어넣고는 돌아섰다.
제 앞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스치고 지나간 여자는…… 예뻤다.
남자들이 여자의 외모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척 단순했다. 예쁘다 아니면 못생겼다.
그런데 언뜻 스친 여자의 외모는 예쁘다는 단순한 단어 외에 뭔가가 더 있었다. 조각 같은 조막만 한 얼굴이 옆으로 넘긴 긴 앞머리 사이에 있었다. 진하게 화장을 한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여자에게는 묘하게 남자의 속을 아릿하게 만드는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당혹스럽게도 저 묘한 분위기와 그의 귀에 들린 어색한 단어가 귓가에 맴돌았다.
“무엇을 드릴까요, 손님?”
차분한 약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잠시 동안 제 앞을 스쳐 간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 따위는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네, 눈이 아파서 그러는데 인공눈물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