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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내게 말했다
2화
“이서윤 씨 일을 이렇게 하면 어떡합니까? 분명히 저번에도 주의 주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답니까?”
사무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다들 작정을 한 듯 기척을 내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 흔한 달칵거리는 마우스 소리조차 잠시 멎은 듯했다.
“한 사람의 실수가 팀 전체를 병신으로 만든다는 거, 저번 한 번의 실수만으로는 못 깨달았단 말입니까?”
“…….”
생긴 건 멀쩡했다. 말투도 늘 깍듯하게 존대를 했다. 그러나 그게 더 기분 나쁘고 더러웠다. 조목조목 따지는 것도 그 더러움에 한몫했다.
“그게…… 자료 하나가 누락되는 바람에…….”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윤의 자리 바로 옆에서 키보드의 탁탁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서류를 만들고 있는 최 대리의 머리가 더욱 칸막이 아래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래요. 누구나 실수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이 사람 하나, 저 사람 하나…… 하나하나씩 실수를 하면 제대로 된 서류는 영영 손에 못 넣겠군요. 회사는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곳이 아니라 완벽한 일을 하는 곳입니다. 이서윤 씨는 자료 하나 누락이지만 그거 하나 때문에 회계팀 전체 합계가 틀려진 건 안 보입니까? 돈이 얼마가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죄송합니다.”
서윤은 대머리인 데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도 한 시간씩 이를 쑤시면서 ‘미쓰 리 커피 한 잔!’을 외치던 박 팀장이 그리워졌다. 절대 그 인간을 그리워할 일은 없을 거라고, 박 팀장이 지방으로 좌천된 걸 나름 뿌린 대로 거둔 거라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가 그런 마음을 가진 게 죄가 되어 이렇게 어마어마한 역풍으로 다가왔나 싶었다.
그 지긋지긋한 박 팀장이 물러가면 새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이 눈앞의 새 팀장은 박 팀장의 백배 천배가 넘는 암흑 그 자체였다.
“전부 다시 하십시오.”
“장 팀장님…….”
“네? 뭐 할 말 있습니까? 이 엉망인 서류를 문장 한 줄, 문서 한 장 새로 바꿔서 쓴다고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늘 구김 하나 없이 말끔하고 단정한 정장에 매끈하게 정리된 머리카락, 단정한 금테 안경, 잘 관리를 하는지 나이보다 훨씬 매끈한 피부. 틈틈이 사이클과 캠핑을 즐긴다는 자기소개대로 탄탄하게 관리된 몸을 가진, 젊은 나이에 꽤 빠른 승진을 한 장 팀장은 괜히 회사에서 연봉을 많이 주는 게 아니다 싶을 만큼 만난 지 얼마 안 된 팀원들을 달달 볶고 있었다.
그중에 첫 타였으면서 그 뒤로 연타를 맞고 있는 건 서윤이였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운이 좋아서 규모가 꽤 되는 건설 회사의 회계팀에 입사한 그녀는 누구나 그녀를 본 순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될 만큼 괜찮은 외모였다. 그러나 면접관이 저 얼굴에 반해 점수를 줬을 거란 소문이 돌 정도의 생김새를 빼고는 치열한 열정도 그렇다 할 일솜씨도 그리 돋보이지 않는 그냥 평범한 사원이었다.
회식을 가도 화끈하게 놀지 못했고 예쁜 얼굴이지만 어딘지 침울한 기운이 늘 함께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다시 보게 만드는 건, 그 아름다운 외모에 따라다니는 남자들의 찬사와 대시를 거의 상대가 무안하다 못해 당혹스러워할 만큼 거절한다는 점이었다.
그럴 듯한 외모를 지닌 여자들이 철벽을 치는 거야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녀는 그 정도가 좀 남달랐다.
예를 들자면 약간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그녀를 혼자 보내기 위험하다며 아주 건전한 걱정 98% 정도에 약 2% 정도의 사심을 가지고 그녀의 택시를 쫓아갔던 같은 동기 직원은 그녀가 부른 경찰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가서 곤혹을 치러야 했었다. 커피 한잔하자는 사람에게는 대놓고 무안을 주고 정색을 하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보니 새로 입사를 하거나 새 부서로 옮긴 사람들이 금방 그녀에 대해서 관심을 갖다가도 곧 일주일도 안 돼서 이상한 여자라고 수군거리게 되었고, 나름 그녀에게 경계심을 갖고 있던 여자 동료들도 그녀의 별난 태도가 주는 남자들의 거부 반응으로 인해 안심하는 처지가 되었다. 외모로는 경쟁이 되지 않으나 결국엔 어떤 남자 직원도 돌아보지 않게 스스로 만들어 버리니.
주변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 늘 실수를 하는 건 그녀였고 이서윤이 언제 눈물로 회사를 나갈지가 다들 무관심 속의 관심거리였다. 이번에 새로 온 젊은 팀장은 좋은 먹잇감을 문 것 같았고 그걸 보는 팀원들은 측은함도 있었지만 열정적으로 일을 해도 버틸까 말까 한 이 험난한 직장이라는 전쟁터 속에서 하나라도 경쟁자가 줄어들길 내심 바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 치열한 삶을 대충 사는 것 같아 보이는 그녀의 삶이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자료 똑바로 뽑아서 다시 하십시오. 알겠습니까?”
“……네.”
그녀는 힘없이 대답했다.
서윤이 자리에 돌아와 앉자 사무실은 다시 소리 없는 수런거림과 여기저기 딸깍거리는 마우스나 키보드 소리, 때에 맞춰 프린터에서 종이를 토해 내는 소리들로 요란해졌다. 그 틈을 타 옆자리에 앉은 최 대리가 안경을 고쳐 쓰고는 칸막이 사이로 얼굴을 디밀었다.
“이서윤 씨 오늘 우리 회식이잖아…….”
“저는 그냥 빠질게요. 자료 찾아서 집에서 다시 해야겠어요.”
“그……치? 하긴 뭐, 이런 상태로 저 얼굴 보고 밥이 넘어가겠어? 그나저나 어째……. 자료실 가서 다시 뒤져야겠네.”
“어쩔 수 없죠, 뭐.”
서윤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같은 여자인 최 대리가 보기에도 서윤의 단아한 옆모습은 질투와 함께 탄사를 자아낼 만했다.
이미 모든 여직원들의 이마와 콧등, 눈가의 잔주름 위에 보기 싫은 파우더 덩어리가 뭉칠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나 마치 매끈한 도자기처럼 말간 얼굴을 한 서윤에게는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같이 점심을 먹어도 그저 이나 열심히 닦고 그사이 지워진 립스틱이나 다시 바르는 것 외에는 요란하게 화장을 고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저 얼굴 하나는 백만금을 주고라도 바꾸고 싶을 만큼 부러웠다.
* * *
“그런 중요한 서류가 그런 데 보관돼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거야?”
대화 내용에 비해 태진의 말투는 무심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마치 제 목덜미 끝에 시퍼런 식칼이 들이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게…… 이번에 사옥 옮기면서 좀 뒤죽박죽된 모양입니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다.
“아닙니다.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정장을 깍듯이 차려입은 여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 시킨 일이나 똑바로 해. 내가 가서 찾을 테니까. 찾아서 바로 나갈 테니까 그렇게 연락해.”
타인에게 맡기다니, 택도 없었다. 그 중요한 걸……. 아니 그 중요한 게 그 자리에 있다는 게 가장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반드시 제가 확인을 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죄송합니다. 아, 저 그런데…… 지금 내려가시면 퇴근 시간이라. 자료실 문은 열어 놓으라고 보안팀에게 연락하겠습니다.”
그 말에 그는 흘끗 시계를 쳐다보았다. 대체 6시 정각에 퇴근하는 대한민국의 직장인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지만 어쨌든 서류상의 시간은 그 시간이었다. 시계는 5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5분이면 충분해. 어디 있는지는 잘 아니까.”
그 누구에게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안 그래도 쳐다보는 눈이 많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잘됐을지도.
“아, 네…….”
윤정은 이 남자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얌전히 그의 말을 듣는 게 가장 제가 데미지를 적게 입는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명백하게 밝히자면 윤정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이런 사태는 없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태진은 벌떡 일어나 옷걸이에 잘 걸려 있는 슈트를 거칠게 꺼내 팔을 꾀었다.
“차질 없게 해. 위에서 알면 난리 날 테니까. 급한 일 있으면 연락하고!”
마치 바람이 불듯 긴 다리로 커다란 사무실을 가로질러 가 버리자 윤정은 대답할 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 마지막 말과 문 닫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젠장.”
그녀가 낮게 소리쳤다.
“알았어. 개새야! 곧 간다고…….”
조용한 복도에서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경비원 복장을 한 젊은 남자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이 끼워진 채였다.
“……내 거 50씩 바르셀로나에 걸어. 이번엔 꼭 거기가 이긴다니까. 새꺄, 돈 준다고…….”
― 돈 50이 적냐? 널 뭘 믿고 빌려줘? 니가 와서 하라니까.
덩치가 좋은 남자는 친구의 말에 더욱더 발걸음을 빨리했다.
“야, 씹쌔야 좀 줘라. 이 형 못 믿냐? 이번엔 진짜야. 너 개평 줄게.”
― 필요 없어 개새야. 니가 와서 직접 해. 시간 얼마 없어. 마감이야.
“알았어. 개새야, 문단속만 하고 X 빠지게 달려간다. 하여튼 너, 새끼 걸리기만 해 봐. 그딴 식으로 형한테 하면 뒤진다!”
― 새끼 어디서 주둥아리질이야. 빨리 안 오면 다 끝난다. 잽싸게 튀어!
“알았어. 끊어, 새끼야.”
육두문자와 접미사가 새끼로 끝나는 대화를 마친 그는 지하 4층 보안 직원이었다. 교대 시간은 6시 반이었지만 저와 교대하는 신입 사원이 이미 아까 와 있는 걸 확인했다.
사설 불법 도박 사이트에서 요즘 소소하게 재미를 보고 있는 그는 조금 있으면 배팅 마감이라는 걸 알고 초조해졌다. 절친이라고 서로 술만 먹으면 죽고 못 사네 하는 사이지만 돈 문제만큼은 칼인 친구 녀석이 대신 돈을 걸어 달라는 걸 마다하고 있었다. 확신이 있는 만큼 큰 금액을 걸 작정인 그는 시계를 보았다.
5시 55분…….
어차피 사람도 없는 자료실이었다. 얼른 문단속을 하고 재빨리 가야 하는 그는 두꺼운 철문을 열었다. 건설 회사의 각종 자료가 있는 자료실은 평소에도 사람이 별로 드나드는 법이 없었다. 사원증이 있는 사람만 문 앞에 달린 단말기에 등록을 하고 문을 개폐할 수 있었고 그것은 중앙 제어실에서 체크가 되고 있었다. 아까 제어실에서 봤을 땐 아무도 이용하는 이가 없었다. 마지막 이용자가 5시 반에 나갔고 그 후에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문단속을 하러 온 그는 힐끗 문을 쳐다보고는 얼른 제 보안 카드로 문을 잠갔다.
평소에도 문이 잠겨 있긴 하지만 그것은 사원증으로 단말기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보안 직원인 그가 전산을 정리하고 문을 닫으면 보안 장치가 발동해서 다음 날 출근해서 다시 풀기 전까지 자료실은 밀폐되는 구조였다. 그는 카드로 개폐 장치를 잠그고는 보안 문자를 입력해 일을 끝냈다. 그러고는 재빨리 교대 직원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육중한 경비원의 다급한 발소리가 지하의 긴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몇 장의 출력된 종이를 살피던 그는 옆에 놓인 마이크로필름과 번호를 맞춰 보고는 주머니에 넣은 뒤에 종이를 집어 들었다. 마이크로필름이 확실하다면 이 종이는 다 불태워서 없애는 게 안전할 듯했다. 이런 것이 버젓이 자료실에 있다니, 언제 한번 자료실을 다시 점검해 봐야 할 것만 같았다.
쾅. 삐리리릭.
막 필요한 서류를 찾아 들고 혀를 차면서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불이 꺼지더니 소리가 났다.
“뭐야?”
저도 모르게 소리친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데 곧 초록색의 비상구 안내등이 여기저기 켜지며 어둠 속에서 빛났다. 문이 닫힌 건가? 그는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가 나가기 직전인 휴대폰에 뜬 시간은 아직 5시 55분이었다. 정확히 6시에 닫힐 문이었다. 그가 뭔가 잘못됐다 생각하고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삐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경고문이 뜨더니 통신사의 로고와 함께 경쾌한 음악 소리가 잠깐 나곤 휴대폰이 꺼져 버렸다.
“젠장!”
그가 낭패감에 소리를 치다가 갑자기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꺄아아악!”
갑자기 어디선가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누구 있습니까?”
그는 잠시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입구로 가야 할지를 망설였다. 방금 문이 닫혔으니까 문밖에 누군가 있을 것이고 사람이 있음을 알려야 했다.
“아아악!”
또다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그는 제가 입구 쪽에 가까이 있으니 우선 문으로 달려갔다. 들어올 땐 부드럽게 열리던 육중한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재빨리 문을 밀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봐! 누구 없어?”
그가 철문을 요란하게 두드렸지만 쿵쿵거리는 소리만 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육중한 철문은 아까 열고 들어올 때도 보안을 위한 잠금장치가 꽤 튼튼해 보였다. 그러니 이렇게 안에서 쿵쿵거린다고 문이 어떻게 될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다만 누군가 밖에 있어 이 소리를 듣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떤 머저리 같은 놈이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도 안 하고 문을 닫아 버린 거야?”
태진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때였다. 안쪽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났다. 분명히 아까 소리를 지른 여자인 듯했다. 안에 있는 건 저 여자 하나뿐인가?
자료실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구식으로 된 서류 일체와 옛날에 쓰던 설계 도면들이 그대로 빽빽하게 보관된 곳이었다. 물론 장기 보관을 위해서 대부분 마이크로필름으로 떠 놓았지만 자료실은 원본 보관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많은 서류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높은 선반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든지 간에 이 공간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건 다행이었다. 그래서 큰 목소리를 냈다.
“거기 누구 있어? 밖에서 잘못해서 문을 닫아 버린 거 같은데…….”
그제야 저쪽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보아 여자 같았다. 물론 아까의 비명 소리로 유추해 보건대 여자가 확실할 터였다.
밖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마침 제 전화의 배터리가 나가 버려 낭패였는데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게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요즘은 화장실에 갈 때도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니까 저 사람도 휴대폰이 있을 것이었다. 확인도 없이 문을 잠근 게 어떤 새끼인지, 나가면 바로 모가지를 쳐 버릴 생각으로 그가 말했다.
“밖에서 문을 닫은 모양이야. 휴대폰 있어?”
어둠 속에서 가만히 있는 상대를 보고 그가 다시 말했다. 뭐 저쪽에서 알아서 센스 있게 전화라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은데 너무 조용해서 먼저 말을 해야 했다. 젠장, 시간은 가고 있었고 퇴근 시간의 극심한 교통 체증이 생각났다. 지금 나가도 늦을 판인데…….
그는 밀폐되고 어두운 이 공간에 대한 생각을 저버리려고 의도적으로 애썼다. 그래서 더욱더 지금 인기척을 내고 있는 누군가에게 집중하려 했다.
“…….”
상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어둠이 눈에 익은 그는 신경질적으로 저쪽 구석의 컴컴한 곳에 서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다시 말했다.
“휴대폰 있냐구!”
“으악! 다가오지 마!”
날카로운 목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졌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어이가 없어진 그가 뒤로 물러서며 소리를 지르는 여자에게 말했다.
“이봐, 우리 여기 갇혔다고. 내가 지금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서 그러는데 휴대폰 있으면 밖에다 전화 좀 해 줘. 여기에 서 있을 테니까. 전화 좀 해!”
“…….”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상대는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점점 더 답답해졌다. 어둠이 점점 저를 짓누르는 기분이 드는 건 제 과민한 착각이라 여기고 싶었다. 결국 화가 치밀어 올라 그가 소리쳤다.
“이봐, 전화 좀 하라니까! 휴대폰 없어?”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어 참지 못한 그가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상대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오…… 오지 마…….”
겁에 질린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더욱더 화가 났다.
“전화를 해! 그럼 안 갈 테니까. 바보야?”
그러나 상대는 전화를 꺼낼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희미한 초록색의 비상등 불빛 밑으로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머리가 길고, 외투를 입은 여자는 커다란 숄더백을 매고 있었다. 그는 그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적막한 공간에 그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울렸다.
“다가오…… 오지 말라고…….”
갈라진 여자의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든 게 오히려 실없어진 그가 다시 말했다.
“전화하기 싫으면 나한테 빌려줘. 내가 할 테니까. 난 지금 급해. 그러니까…….”
그러나 그의 말은 갑자기 끊어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봐!”
그 순간 남자의 목소리도 여자와 똑같이 갈라졌다.
어둠 속, 희미한 불빛 아래였지만 그는 여자의 두 손에 들린 게 휴대폰이 아니라 꽤 큰, 그러니까 여자가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기엔 부담스러울 것 같은…… 그런 크기의 번쩍거리는 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2화
“이서윤 씨 일을 이렇게 하면 어떡합니까? 분명히 저번에도 주의 주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답니까?”
사무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다들 작정을 한 듯 기척을 내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 흔한 달칵거리는 마우스 소리조차 잠시 멎은 듯했다.
“한 사람의 실수가 팀 전체를 병신으로 만든다는 거, 저번 한 번의 실수만으로는 못 깨달았단 말입니까?”
“…….”
생긴 건 멀쩡했다. 말투도 늘 깍듯하게 존대를 했다. 그러나 그게 더 기분 나쁘고 더러웠다. 조목조목 따지는 것도 그 더러움에 한몫했다.
“그게…… 자료 하나가 누락되는 바람에…….”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윤의 자리 바로 옆에서 키보드의 탁탁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서류를 만들고 있는 최 대리의 머리가 더욱 칸막이 아래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래요. 누구나 실수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이 사람 하나, 저 사람 하나…… 하나하나씩 실수를 하면 제대로 된 서류는 영영 손에 못 넣겠군요. 회사는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곳이 아니라 완벽한 일을 하는 곳입니다. 이서윤 씨는 자료 하나 누락이지만 그거 하나 때문에 회계팀 전체 합계가 틀려진 건 안 보입니까? 돈이 얼마가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죄송합니다.”
서윤은 대머리인 데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도 한 시간씩 이를 쑤시면서 ‘미쓰 리 커피 한 잔!’을 외치던 박 팀장이 그리워졌다. 절대 그 인간을 그리워할 일은 없을 거라고, 박 팀장이 지방으로 좌천된 걸 나름 뿌린 대로 거둔 거라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가 그런 마음을 가진 게 죄가 되어 이렇게 어마어마한 역풍으로 다가왔나 싶었다.
그 지긋지긋한 박 팀장이 물러가면 새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이 눈앞의 새 팀장은 박 팀장의 백배 천배가 넘는 암흑 그 자체였다.
“전부 다시 하십시오.”
“장 팀장님…….”
“네? 뭐 할 말 있습니까? 이 엉망인 서류를 문장 한 줄, 문서 한 장 새로 바꿔서 쓴다고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늘 구김 하나 없이 말끔하고 단정한 정장에 매끈하게 정리된 머리카락, 단정한 금테 안경, 잘 관리를 하는지 나이보다 훨씬 매끈한 피부. 틈틈이 사이클과 캠핑을 즐긴다는 자기소개대로 탄탄하게 관리된 몸을 가진, 젊은 나이에 꽤 빠른 승진을 한 장 팀장은 괜히 회사에서 연봉을 많이 주는 게 아니다 싶을 만큼 만난 지 얼마 안 된 팀원들을 달달 볶고 있었다.
그중에 첫 타였으면서 그 뒤로 연타를 맞고 있는 건 서윤이였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운이 좋아서 규모가 꽤 되는 건설 회사의 회계팀에 입사한 그녀는 누구나 그녀를 본 순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될 만큼 괜찮은 외모였다. 그러나 면접관이 저 얼굴에 반해 점수를 줬을 거란 소문이 돌 정도의 생김새를 빼고는 치열한 열정도 그렇다 할 일솜씨도 그리 돋보이지 않는 그냥 평범한 사원이었다.
회식을 가도 화끈하게 놀지 못했고 예쁜 얼굴이지만 어딘지 침울한 기운이 늘 함께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다시 보게 만드는 건, 그 아름다운 외모에 따라다니는 남자들의 찬사와 대시를 거의 상대가 무안하다 못해 당혹스러워할 만큼 거절한다는 점이었다.
그럴 듯한 외모를 지닌 여자들이 철벽을 치는 거야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녀는 그 정도가 좀 남달랐다.
예를 들자면 약간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그녀를 혼자 보내기 위험하다며 아주 건전한 걱정 98% 정도에 약 2% 정도의 사심을 가지고 그녀의 택시를 쫓아갔던 같은 동기 직원은 그녀가 부른 경찰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가서 곤혹을 치러야 했었다. 커피 한잔하자는 사람에게는 대놓고 무안을 주고 정색을 하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보니 새로 입사를 하거나 새 부서로 옮긴 사람들이 금방 그녀에 대해서 관심을 갖다가도 곧 일주일도 안 돼서 이상한 여자라고 수군거리게 되었고, 나름 그녀에게 경계심을 갖고 있던 여자 동료들도 그녀의 별난 태도가 주는 남자들의 거부 반응으로 인해 안심하는 처지가 되었다. 외모로는 경쟁이 되지 않으나 결국엔 어떤 남자 직원도 돌아보지 않게 스스로 만들어 버리니.
주변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 늘 실수를 하는 건 그녀였고 이서윤이 언제 눈물로 회사를 나갈지가 다들 무관심 속의 관심거리였다. 이번에 새로 온 젊은 팀장은 좋은 먹잇감을 문 것 같았고 그걸 보는 팀원들은 측은함도 있었지만 열정적으로 일을 해도 버틸까 말까 한 이 험난한 직장이라는 전쟁터 속에서 하나라도 경쟁자가 줄어들길 내심 바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 치열한 삶을 대충 사는 것 같아 보이는 그녀의 삶이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자료 똑바로 뽑아서 다시 하십시오. 알겠습니까?”
“……네.”
그녀는 힘없이 대답했다.
서윤이 자리에 돌아와 앉자 사무실은 다시 소리 없는 수런거림과 여기저기 딸깍거리는 마우스나 키보드 소리, 때에 맞춰 프린터에서 종이를 토해 내는 소리들로 요란해졌다. 그 틈을 타 옆자리에 앉은 최 대리가 안경을 고쳐 쓰고는 칸막이 사이로 얼굴을 디밀었다.
“이서윤 씨 오늘 우리 회식이잖아…….”
“저는 그냥 빠질게요. 자료 찾아서 집에서 다시 해야겠어요.”
“그……치? 하긴 뭐, 이런 상태로 저 얼굴 보고 밥이 넘어가겠어? 그나저나 어째……. 자료실 가서 다시 뒤져야겠네.”
“어쩔 수 없죠, 뭐.”
서윤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같은 여자인 최 대리가 보기에도 서윤의 단아한 옆모습은 질투와 함께 탄사를 자아낼 만했다.
이미 모든 여직원들의 이마와 콧등, 눈가의 잔주름 위에 보기 싫은 파우더 덩어리가 뭉칠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나 마치 매끈한 도자기처럼 말간 얼굴을 한 서윤에게는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같이 점심을 먹어도 그저 이나 열심히 닦고 그사이 지워진 립스틱이나 다시 바르는 것 외에는 요란하게 화장을 고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저 얼굴 하나는 백만금을 주고라도 바꾸고 싶을 만큼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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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중요한 서류가 그런 데 보관돼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거야?”
대화 내용에 비해 태진의 말투는 무심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마치 제 목덜미 끝에 시퍼런 식칼이 들이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게…… 이번에 사옥 옮기면서 좀 뒤죽박죽된 모양입니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다.
“아닙니다.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정장을 깍듯이 차려입은 여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 시킨 일이나 똑바로 해. 내가 가서 찾을 테니까. 찾아서 바로 나갈 테니까 그렇게 연락해.”
타인에게 맡기다니, 택도 없었다. 그 중요한 걸……. 아니 그 중요한 게 그 자리에 있다는 게 가장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반드시 제가 확인을 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죄송합니다. 아, 저 그런데…… 지금 내려가시면 퇴근 시간이라. 자료실 문은 열어 놓으라고 보안팀에게 연락하겠습니다.”
그 말에 그는 흘끗 시계를 쳐다보았다. 대체 6시 정각에 퇴근하는 대한민국의 직장인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지만 어쨌든 서류상의 시간은 그 시간이었다. 시계는 5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5분이면 충분해. 어디 있는지는 잘 아니까.”
그 누구에게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안 그래도 쳐다보는 눈이 많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잘됐을지도.
“아, 네…….”
윤정은 이 남자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얌전히 그의 말을 듣는 게 가장 제가 데미지를 적게 입는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명백하게 밝히자면 윤정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이런 사태는 없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태진은 벌떡 일어나 옷걸이에 잘 걸려 있는 슈트를 거칠게 꺼내 팔을 꾀었다.
“차질 없게 해. 위에서 알면 난리 날 테니까. 급한 일 있으면 연락하고!”
마치 바람이 불듯 긴 다리로 커다란 사무실을 가로질러 가 버리자 윤정은 대답할 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 마지막 말과 문 닫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젠장.”
그녀가 낮게 소리쳤다.
“알았어. 개새야! 곧 간다고…….”
조용한 복도에서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경비원 복장을 한 젊은 남자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이 끼워진 채였다.
“……내 거 50씩 바르셀로나에 걸어. 이번엔 꼭 거기가 이긴다니까. 새꺄, 돈 준다고…….”
― 돈 50이 적냐? 널 뭘 믿고 빌려줘? 니가 와서 하라니까.
덩치가 좋은 남자는 친구의 말에 더욱더 발걸음을 빨리했다.
“야, 씹쌔야 좀 줘라. 이 형 못 믿냐? 이번엔 진짜야. 너 개평 줄게.”
― 필요 없어 개새야. 니가 와서 직접 해. 시간 얼마 없어. 마감이야.
“알았어. 개새야, 문단속만 하고 X 빠지게 달려간다. 하여튼 너, 새끼 걸리기만 해 봐. 그딴 식으로 형한테 하면 뒤진다!”
― 새끼 어디서 주둥아리질이야. 빨리 안 오면 다 끝난다. 잽싸게 튀어!
“알았어. 끊어, 새끼야.”
육두문자와 접미사가 새끼로 끝나는 대화를 마친 그는 지하 4층 보안 직원이었다. 교대 시간은 6시 반이었지만 저와 교대하는 신입 사원이 이미 아까 와 있는 걸 확인했다.
사설 불법 도박 사이트에서 요즘 소소하게 재미를 보고 있는 그는 조금 있으면 배팅 마감이라는 걸 알고 초조해졌다. 절친이라고 서로 술만 먹으면 죽고 못 사네 하는 사이지만 돈 문제만큼은 칼인 친구 녀석이 대신 돈을 걸어 달라는 걸 마다하고 있었다. 확신이 있는 만큼 큰 금액을 걸 작정인 그는 시계를 보았다.
5시 55분…….
어차피 사람도 없는 자료실이었다. 얼른 문단속을 하고 재빨리 가야 하는 그는 두꺼운 철문을 열었다. 건설 회사의 각종 자료가 있는 자료실은 평소에도 사람이 별로 드나드는 법이 없었다. 사원증이 있는 사람만 문 앞에 달린 단말기에 등록을 하고 문을 개폐할 수 있었고 그것은 중앙 제어실에서 체크가 되고 있었다. 아까 제어실에서 봤을 땐 아무도 이용하는 이가 없었다. 마지막 이용자가 5시 반에 나갔고 그 후에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문단속을 하러 온 그는 힐끗 문을 쳐다보고는 얼른 제 보안 카드로 문을 잠갔다.
평소에도 문이 잠겨 있긴 하지만 그것은 사원증으로 단말기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보안 직원인 그가 전산을 정리하고 문을 닫으면 보안 장치가 발동해서 다음 날 출근해서 다시 풀기 전까지 자료실은 밀폐되는 구조였다. 그는 카드로 개폐 장치를 잠그고는 보안 문자를 입력해 일을 끝냈다. 그러고는 재빨리 교대 직원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육중한 경비원의 다급한 발소리가 지하의 긴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몇 장의 출력된 종이를 살피던 그는 옆에 놓인 마이크로필름과 번호를 맞춰 보고는 주머니에 넣은 뒤에 종이를 집어 들었다. 마이크로필름이 확실하다면 이 종이는 다 불태워서 없애는 게 안전할 듯했다. 이런 것이 버젓이 자료실에 있다니, 언제 한번 자료실을 다시 점검해 봐야 할 것만 같았다.
쾅. 삐리리릭.
막 필요한 서류를 찾아 들고 혀를 차면서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불이 꺼지더니 소리가 났다.
“뭐야?”
저도 모르게 소리친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데 곧 초록색의 비상구 안내등이 여기저기 켜지며 어둠 속에서 빛났다. 문이 닫힌 건가? 그는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가 나가기 직전인 휴대폰에 뜬 시간은 아직 5시 55분이었다. 정확히 6시에 닫힐 문이었다. 그가 뭔가 잘못됐다 생각하고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삐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경고문이 뜨더니 통신사의 로고와 함께 경쾌한 음악 소리가 잠깐 나곤 휴대폰이 꺼져 버렸다.
“젠장!”
그가 낭패감에 소리를 치다가 갑자기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꺄아아악!”
갑자기 어디선가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누구 있습니까?”
그는 잠시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입구로 가야 할지를 망설였다. 방금 문이 닫혔으니까 문밖에 누군가 있을 것이고 사람이 있음을 알려야 했다.
“아아악!”
또다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그는 제가 입구 쪽에 가까이 있으니 우선 문으로 달려갔다. 들어올 땐 부드럽게 열리던 육중한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재빨리 문을 밀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봐! 누구 없어?”
그가 철문을 요란하게 두드렸지만 쿵쿵거리는 소리만 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육중한 철문은 아까 열고 들어올 때도 보안을 위한 잠금장치가 꽤 튼튼해 보였다. 그러니 이렇게 안에서 쿵쿵거린다고 문이 어떻게 될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다만 누군가 밖에 있어 이 소리를 듣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떤 머저리 같은 놈이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도 안 하고 문을 닫아 버린 거야?”
태진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때였다. 안쪽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났다. 분명히 아까 소리를 지른 여자인 듯했다. 안에 있는 건 저 여자 하나뿐인가?
자료실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구식으로 된 서류 일체와 옛날에 쓰던 설계 도면들이 그대로 빽빽하게 보관된 곳이었다. 물론 장기 보관을 위해서 대부분 마이크로필름으로 떠 놓았지만 자료실은 원본 보관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많은 서류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높은 선반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든지 간에 이 공간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건 다행이었다. 그래서 큰 목소리를 냈다.
“거기 누구 있어? 밖에서 잘못해서 문을 닫아 버린 거 같은데…….”
그제야 저쪽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보아 여자 같았다. 물론 아까의 비명 소리로 유추해 보건대 여자가 확실할 터였다.
밖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마침 제 전화의 배터리가 나가 버려 낭패였는데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게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요즘은 화장실에 갈 때도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니까 저 사람도 휴대폰이 있을 것이었다. 확인도 없이 문을 잠근 게 어떤 새끼인지, 나가면 바로 모가지를 쳐 버릴 생각으로 그가 말했다.
“밖에서 문을 닫은 모양이야. 휴대폰 있어?”
어둠 속에서 가만히 있는 상대를 보고 그가 다시 말했다. 뭐 저쪽에서 알아서 센스 있게 전화라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은데 너무 조용해서 먼저 말을 해야 했다. 젠장, 시간은 가고 있었고 퇴근 시간의 극심한 교통 체증이 생각났다. 지금 나가도 늦을 판인데…….
그는 밀폐되고 어두운 이 공간에 대한 생각을 저버리려고 의도적으로 애썼다. 그래서 더욱더 지금 인기척을 내고 있는 누군가에게 집중하려 했다.
“…….”
상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어둠이 눈에 익은 그는 신경질적으로 저쪽 구석의 컴컴한 곳에 서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다시 말했다.
“휴대폰 있냐구!”
“으악! 다가오지 마!”
날카로운 목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졌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어이가 없어진 그가 뒤로 물러서며 소리를 지르는 여자에게 말했다.
“이봐, 우리 여기 갇혔다고. 내가 지금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서 그러는데 휴대폰 있으면 밖에다 전화 좀 해 줘. 여기에 서 있을 테니까. 전화 좀 해!”
“…….”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상대는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점점 더 답답해졌다. 어둠이 점점 저를 짓누르는 기분이 드는 건 제 과민한 착각이라 여기고 싶었다. 결국 화가 치밀어 올라 그가 소리쳤다.
“이봐, 전화 좀 하라니까! 휴대폰 없어?”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어 참지 못한 그가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상대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오…… 오지 마…….”
겁에 질린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더욱더 화가 났다.
“전화를 해! 그럼 안 갈 테니까. 바보야?”
그러나 상대는 전화를 꺼낼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희미한 초록색의 비상등 불빛 밑으로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머리가 길고, 외투를 입은 여자는 커다란 숄더백을 매고 있었다. 그는 그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적막한 공간에 그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울렸다.
“다가오…… 오지 말라고…….”
갈라진 여자의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든 게 오히려 실없어진 그가 다시 말했다.
“전화하기 싫으면 나한테 빌려줘. 내가 할 테니까. 난 지금 급해. 그러니까…….”
그러나 그의 말은 갑자기 끊어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봐!”
그 순간 남자의 목소리도 여자와 똑같이 갈라졌다.
어둠 속, 희미한 불빛 아래였지만 그는 여자의 두 손에 들린 게 휴대폰이 아니라 꽤 큰, 그러니까 여자가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기엔 부담스러울 것 같은…… 그런 크기의 번쩍거리는 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