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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내게 말했다
3화

2


“아프십니까?”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태진은 참았다.
“아니 괜찮습니다.”
“다 됐습니다. 다행히 신경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끝 부분 상처가 깊긴 했지만 근육 손상도 없어서 소독이랑 드레싱 잘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필 오른손이라…….”
“괜찮습니다.”
굳이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만큼 대가를 지불할 테니까.
제 손바닥에 난 상처를 꿰매는 데 열중한 사람에게 굳이 제가 왼손잡이여서 사는 데는 지장 없다는 친절한 설명까진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상대는 긴장한 분위기였다. 그의 손에 흉한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고 애쓴 모양이었다. 태진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퇴근 직전에 호출까지 당한 모양이니.
“저쪽에 경찰이…….”
“알고 있습니다.”
한밤의 대형 병원 응급실은 한마디로 시장통이나 다름없었다. 제 오른손을 드레싱하고 있는 의사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엔 짜증이 가득했다. 이미 펑크가 나 버린 제 미팅과 손실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생각하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그는 제 주머니에서 ‘남’의 휴대폰을 꺼냈다. 이 휴대폰 하나 때문에 지금 이렇게 손을 꿰매고 칭칭 붕대까지 감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인상을 찡그려야만 했다. 디지털 치매 시대라더니 기억나는 번호가 하나도 없었다.
태진은 썰렁한 휴대폰에서 인터넷 버튼을 눌러 익숙한 이름을 검색하고는 대표 번호로 전화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휴대폰 속은 불친절했다. 제 기분은 아랑곳없이 밝고 명랑한 노래와 기계음, 그리고 당혹스러운 ARS 안내만…….
“젠장.”
이것이 제 휴대폰이었으면 집어 던지고도 남았을 터였다. 다 이 휴대폰 때문 아닌가. 그는 벌떡 일어나서 간호사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갔다.
“저기 죄송하지만, 휴대폰 좀 충전할 수 있을까요. 경찰이 와서 제가 변호사를 좀 불러야 하는데 마침 전원이 나가서 말이죠.”
이미 전쟁터나 다름없는 대형 병원의 응급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아무도 지나지 않는 편의점에서 졸고 있던 점원에게 이야기하듯 휴대폰을 내밀면서 말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누군가가 친절하게 그의 휴대폰을 받으면서 덧붙였다.
“바빠서 잠깐밖에는 안 될 텐데요.”
주변에 있는 수간호사가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차마 뭐라고 쏘아붙이지 못한 건 나이 든 그녀의 눈에도 휴대폰을 내미는 남자가 현실에서는 보기 드물 만큼 너무…… 과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사고가 났습니다. 이 정도는 그쪽에서도 이해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화 통화에 열중한 태진이 낯익은 얼굴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손에는 소독약 자국이 배어 나온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제게 말을 걸려는 이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알곤 다시 손을 흔들었다.
“아…… 그게.”
태진의 변호사가 입을 열자 그는 험악한 얼굴로 휴대폰을 막더니 말했다.
“큰일로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대충 무마해. 그냥 이건 베인 거고 그걸로 문제 만들 만큼 여유도 없어. 대충 해결하고 돌려보내.”
“네.”
태진은 다시 전화 통화에 열중했고 그의 말을 들은 날렵하게 생긴 금테 안경을 쓴 남자는 돌아섰다.
“하여튼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내 사정도 지금 편치 않으니까.”
그는 전화를 끊었다. 잠깐 충전한 전화는 여전히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저 여자분은…….”
경찰이 다가오자 태진의 변호사가 막아서면서 말했다.
“저와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 그래도 이쪽이 당사자인데…….”
머뭇거리는 경찰들을 향해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저분은 어둠 속에서 당황해서 실수를 했을 뿐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자분이 놀라서 칼을 휘둘렀다면, 에…… 그게 뭐 그냥 그랬겠습니까?”
말을 하면서도 머뭇거리는 경찰을 향해 옆에 선 남자가 따지듯 물었다.
“뭡니까? 지금 우리 강 상무님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 그게.”
하도 정색을 하는 바람에 물어본 경찰이 더 머쓱해진 듯했다.
“아니 그래도 이게 칼도 그렇고…… 게다가 다치셨으니까…….”
“난 가 봐야 하니까 김 변이 알아서 해.”
그 말을 듣고 돌아선 김 변호사가 경찰들을 향하는 사이 태진은 재빨리 그의 뒤로 걸어 나갔다.
“신분이야 확실하고 이 정도는 형사 처리 할 사건도 아니니까 저와 이야기하시죠. 화인법무법인 소속의 김석빈 변호사라고 합니다.”
“아니 그래도 본인이…….”
저를 만류하는 게 들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북새통이나 다름없는 응급실을 빠른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구급차의 불빛이 번쩍거리는 주차장 앞에 떡하니 불한당처럼 비상등을 켜고 버티고 있는 익숙한 생김새의 차가 보였다. 태진은 급하게 차로 향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운전석에서 남자가 뛰어 나와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태진은 인사도 없이 차에 올라탔다.
“괜찮으십니까?”
“…….”
대답할 기운도 기분도 아니었다. 그는 얼른 차의 충전 단자를 휴대폰에 연결했다.
“회사로 가.”
“네.”
차가 응급실 앞을 빠져나가자 번쩍거리는 초록색 불빛들로 밝았던 차 안이 다시 어두워졌다.

‘다가오지 마…….’
‘당신 미쳤어? 대체 그런 칼은 어디서 나서…….’
‘다가오지 마!’
어이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멀쩡하게 생긴 여자가 가방에서 꺼낸 큼직한 칼을 들고 있는 상황이라니. 푸르스름한 비상등의 빛에 금속의 칼날만 반짝이고 있었다.
‘대체 그런 건 왜 가방에 넣어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쪽한테 다른 생각 따윈 없어. 좋아. 그냥 여기 가만히 있을 테니까 제발 전화 좀 해. 119든 어디든 간에 사람이 갇혔다고. 자료실 담당자가 확인도 안 하고 나가 버렸어.’
‘…….’
그러나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칼은 전혀 미동이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주변은 암흑으로 둘러싸여 여자의 거친 숨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제발 좀!’
짜증이 극에 달한 그가 소리쳤다.
‘오지 마!’
‘다가갈 생각도 없고 당신 털끝 하나 건드릴 생각 없어! 정신 차려!’
제발 제 말처럼 이 미친 여자가 정신을 차리길 바랐지만 그건 제 생각일 뿐이었다.
‘오지 마!’
찢어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바보야? 제발 상황 파악 좀 해. 우리 두 사람 여기 갇혔다고. 그러니까 밖에 전화를 하라고!’
어둠 속에서…… 저도 잠깐 어찌 됐던 모양이었다.
어둠이 싫어서……. 아주 오래전 일인데도 불구하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제 머릿속 깊숙이 갈무리돼 있었던 것 같았다. 제가 문고리를 열고 나갈 수 없는 그런 공간에 갇혀 있던 기억이. 그곳이 아무리 넓은 공간이었어도, 그 안에 무엇이든 다 있었어도, 굳이 밖으로 나간다고 딱히 할 일도, 갈 곳조차 없었더라도……. 제가 문을 열고 나갈 수 없는 공간은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냥 여자를 좀 더 잘 달랠 수도 있었는데.
‘젠장! 전화를 하라니까!’
‘꺄아아악!’
그 공간이 번쩍거리는 칼날보다 더 싫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휘두른 태진의 손이 딱딱하고 날카로운 것에 베였고 그 순간 여자가 미친 듯 비명을 지르다 쓰려졌던 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쓰러진 여자 따위 팽개치고 그는 다급하게 여자의 가방을 뒤져서 휴대폰을 찾아냈다. 비밀번호나 패턴 따위가 걸려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여기 TJ 신관 건물 지하 자료실인데…….’

그 여자가 왜 기절 따위를 했는지, 왜 칼을 들고 있었는지 같은 건 상관없었다. 당장 그 자료실 담당자의 목을 쳐 버리고 엉망이 된 미팅을 수습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때가 어느 때인데……. 제 처신 하나하나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단 하나도 책잡혀서는 안 되는데 이건 너무 데미지가 컸다.
차가 환한 건물의 지하로 들어가자 주차장의 조명에 어둡던 차 안이 밝아졌다. 차가 서고 기사가 문을 열었다. 충전이 된 휴대폰을 집어 들면서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그냥 주세요.’
묘하게 울리던 목소리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비슷했다. 얼마 전 낯선 약국에서 본 그 여자…… 그 여자였다.
“상무님?”
“아.”
태진은 한참이나 문을 열고 저를 기다리고 있는 이를 무심히 쳐다보곤 차에서 내렸다.
그래서…… 그게 뭐가 중요한데?

* * *

“전…… 강간당했나요?”
“네?”
갑작스러운 서윤의 말에 당황한 간호사가 되물어야 했다.
“저기…….”
“이서윤 님 맥박, 심박 수 이상 없습니다. 일어나셨으면 나가셔도 됩니다.”
가뜩이나 환자가 몰려 응급실의 침상이 모자랐다. 기록지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담당 간호사는 얼른 이 환자가 침상이나 비워 줬으면 싶었다. 담당 레지던트가 의식을 회복하면 내보내라는 오더를 내렸기에 간호사는 링거 바늘을 빼고 재빨리 밴딩을 한 후에 말했다.
“귀가하셔도 됩니다.”
“저기요!”
환자가 제 옷자락을 잡아끌자 당황한 간호사는 돌아보아야 했다.
“네?”
“저 강간당한 거 아니냐고요.”
초저녁쯤에 들어온 환자였다. 맥박, 호흡 다 정상이었지만 기절한 상태였고 같이 구급차를 타고 온 남자는 손에 가벼운 열상이 있었다. 수많은 환자들이 들고 나는데 그녀가 굳이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완벽한 슈트 핏을 자랑하는 남자가 너무 잘났기 때문이었다. 환자의 외모 따위는 이미 구별 못 하게 된 응급실 근무 8개월 차였지만 또렷이 기억에 남을 만큼 대단했었다. 게다가 경찰이 몰려왔었고, 그 남자가 대단한 사람인지 변호사까지 와서 한창 복잡한 응급실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었다.
한참 동안 의식이 없던 이 환자는 ‘전혀’ 아무런 이상도 없이 단순히 기절만 한 상태였다. 경찰의 요청 때문에 칸막이 커튼을 치고 수간호사와 함께 이 환자의 ‘다른’ 부분까지도 살폈지만 손댄 흔적 따위는 없었다. 그 사실을 경찰들한테 전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자정이 다 된 시간, 응급실은 더욱더 복잡해졌고 아무 외상도 없이 기절한 환자를 침상에 눕혀 놓는 건 낭비였다.
“그런 일 전혀 없었습니다. 나가시면 됩니다.”
간호사는 짜증스럽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저기요!”
또다시 간호사의 옷자락을 잡자 그녀도 이제는 화가 났다.
“그런 일 없으시다구요. 귀가하세요!”
가방 속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제 신분증도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목숨 같던 칼도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바쁜 응급실 안에서 그 어느 누구를 붙잡고 어떻게 된 일이냐 물어볼 수도 없었다.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세요. 아까 여기 있던 경찰들 다 나갔으니까.”
마치 쫓겨나듯 응급실을 나오는데 요란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함께 보기에도 끔찍한 피 칠이 된 환자를 구급대원들이 옮기는 것을 보고 놀란 서윤은 한쪽 구석으로 도망쳐야 했다. 아직은 싸늘한 밤공기가 싸하게 내려앉는 그런 날씨였다. 낮에나 어울릴 법한 그녀의 바바리코트로는 자락을 여며 보아도 그 찬 공기를 피하긴 힘들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무시무시한 구급차들을 피해서 돌아가려 했지만 왠지 다리는 허공을 딛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겹도록 드나들던 병원이었다. 서윤은 멍하니 서 있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널따란 계단 중간에 쪼그려 앉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드나들고 저쪽 한구석에는 담배를 피면서 전화 통화 중인 사람도 있었다. 모두 다 바쁘고 제각각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윤은 혼자였다. 병원에 있다고 해서 누군가 와 줄 사람도 관심을 가져 줄 사람도 없었다. 소동 탓에 기운이 빠진 것도 있었지만 그런 사실이 그녀를 이 쌀쌀한 공기 속에 서 있을 기운조차도 빼앗아 가는 것 같았다.
정말…… 제가 평생 걱정하던 일이 일어나진 않았던 걸까?
무엇보다 가방 속에 칼이 없었다. 그게 저를 걷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책가방에 칼을 넣고 다니게 된 건……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부터였다.
항상 호신용 호루라기를 목에 걸어 주었던 엄마가 칼집에 든 과도를 내준 건 그녀가 막 초경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엄마…….’
‘책가방 제일 앞 주머니에 넣어.’
‘엄마, 나 이거 무서워.’
‘다른 사람도 무서워할 거야. 자, 빼 봐. 여기 칼집을 잡고 이렇게 빼면 돼. 알았어?’
‘엄마, 나 이거 싫어…….’
‘싫긴 뭐가 싫어! 이것만이 널 구해 줄 거야.’
엄마는 어린 그녀에게 차갑고 무섭게 말했다.
또래보다 키도 크고 눈에 띄게 예쁜 외모를 지닌 어린 서윤을 쳐다보는 엄마의 눈빛이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그녀는 아주 나중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몇 번 그녀는 가장 꺼내기 쉬운 가방의 앞부분에 든 칼을 꺼내 들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칼은 더욱더 날카롭고 크기가 커졌다.
서윤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이돌 못지않은 외모였지만 엄마의 단호한 고집 때문에 단을 내려 전교에서 가장 긴 교복 치마를 입고 학교에 다녔다. 다른 친구들처럼 풀 메이크업은커녕 비비크림 하나도 바르지 못하게 하고 한여름에도 긴 바지를 강요하는 엄마와 서윤은 늘 사사건건 부딪쳐야 했다.
어렸을 적 집을 나간 아빠 때문에 엄마가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로 서윤은 그 흔한 학원 한 번 다녀 본 적이 없었다. 늘 집에 와서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고, 학교에서 귀가한 뒤로는 외출도 허락되지 않았다. 외출이라곤 주말뿐이었고 그것도 해가 지기 전에 들어와야만 했다. 한창 예민했을 서윤의 사춘기에 두 모녀는 늘 냉전 중이거나 격렬한 말다툼을 하곤 서로의 방문을 쾅 닫아 버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엄마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다정한 말을 해 준 적도 없었다.
‘엄마는 나 주워 온 거 아니야? 입양을 했어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한번은 참다못한 서윤이 소리쳤다. 그때였다. 처음으로 엄마가 그녀의 뺨을 때린 건.
‘차라리…….’
파르르 떨던 엄마는 다시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뒤로 모녀 사이에는 더더욱 말이 없어졌다.
모든 걸 이해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아니, 이해라는 말은 어리석다. 서윤은 지금도 완전히 엄마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저는 절대로 엄마처럼 하지 못했을 테니까.
두 모녀는 명절 때도 가족 모임 같은 곳에 가진 않았다. 다들 명절이라고 떠들썩하게 지내도 두 모녀는 더욱더 적막한 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평생 그래 왔으므로 그게 더욱더 당연했다.
물론 그녀에게 친척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엄마는 형제들이 많았고 버젓이 외가도 있었다. 그러나 명절 때는 절대 가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는 왜 안 가냐고 물었던 적도 있었지만 대답도 없고 그렇다고 갈 것도 아니어서 어느새부터인가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유는 다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장례식장에는 처음 보는 수많은 친척들이 있었다. 엄마는 상주였지만 검은색 한복을 입고 장례식장의 잘 안 보이는 구석에 서서 울기만 했다. 뭣도 모르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게 된 서윤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사촌들이 손님 접대를 하는 곳에서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손님이 엄청나게 몰려온지라 상을 차려 가기도 하고 상을 치우기도 하고 음료수를 나르기도 했었다.
막 심부름을 하려고 돌아서는데 나이 든 아주머니 몇이 모여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다. 아니,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쟤가 걘가? 엄마 닮아서 예쁘긴 하네.’
‘어휴, 영진이도 독하지. 나라면 안 낳았지.’
‘알고도 결혼한 이 서방이 바보 아니야? 찜찜했으면 애를 뗐어야지. 아니지, 저 사실을 알고도 결혼했으면 애도 감당을 했었어야지.’
‘아니 그게 가능해? 딴 놈한테 강간당해서 낳은 애를 어떻게 지 애처럼 키우냐고. 애초에 결혼한 영진이가 미친 거야. 지가 알아서 파혼했었어야지. 애가 대여섯 살 될 때까지 살았다며? 이 서방이 살다 살다 견디지 못해서 집 나갔다던데…….’
‘처음엔 두 사람 애인 줄 알았다잖아. 그런데 뭐 나중에 애 혈액형 보고 알았든가 그랬다더만.’
‘아니, 척 보면 지 애 아닌 거 모르나?’
‘태어나자마자 어떻게 알아. 게다가 애가 지 엄마를 쏙 빼다 박았는데……. 둘이 원래 죽고 못 사는 사이였어. 남자 집안에서 엄청 반대했었대. 그 집이 하도 짱짱해서. 그러다가 그 집에서 겨우 맘 돌리고 날 잡았는데 말이야, 하필 결혼 날 받아 놓고 며칠 전에 그런 몹쓸 일을 당할 게 뭐야……. 나 같음 어디 물에 빠져 죽었지. 그런 몸을 가지고 무슨 결혼을 해?’
‘저 나이까지 키우는 영진이가 대단해. 저 얼굴만 봐도 끔찍할 텐데……. 아우, 나라면 진작 어디 갖다 버렸을 거야.’
‘그러게……. 어맛.’
서윤이 손에 들고 있던 뭔가를 떨어뜨려서 두 사람이 돌아보았다. 누군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냥…… 뭔가 아귀가 안 맞던 퍼즐이 딱 맞춰진 느낌이었다. 비록 그 느낌이 매우 더럽고 비참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