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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봄, 너라서
1화

프롤로그


슬픈 꿈은 그림자가 길다.
야속하게도,
그 그림자에 차가운 물기가 달라붙는다.
하릴없이 온몸이 얼어붙었다.

생의 겨울은 그렇게 너무 일찍 찾아왔다.
새 계절은 내게도 돌아올까.
나는 그 계절을 찾을 수 있을까.

겨울 다음의 봄.
내게도 다시,
봄이 올까.



1화. 머무는 계절


오늘은 그의 생일. 꽃누르미들을 예쁘게 두른 미니 꽃케이크를 만들었다. 그의 곁에 놓아두고 나오는 길, 도연은 품을 파고드는 바람 때문에 옷깃을 여몄다.
하늘재에는 늘 바람이 분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바람 때문에 항상 거리의 계절보다 옷을 더 챙겨 입어야 한다. 겨울인 지금은 더욱이 그렇다.
하지만 도연은 이 바람이 싫지 않았다. 때로는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어도, 간절히 그의 품이 그리워져도. 이 바람 끝에 생각나는 커피 한 잔이 딱 그였으므로.
1층 로비 옆, 자그마한 카페에서 늘 마시던 커피를 주문하고 테라스에 앉았다. 막상 겨울 햇살 아래 맞닥뜨린 바람은 생각보다 차지 않았다. 도연은 그렇게 앉아서 어디론가 눈길을 주었다.
하늘재 문이 열리는 시간이 지나자마자 올라왔으니 새벽이 막 물러간 아침이었다. 그의 사진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에 늘 부족한 마음이 드는 시간이지만, 제 식대로 채우기로 한다.
곧 주인이 내려놓은 머그잔에서 그 사람의 온기 같은 연기가 아른거렸다.
그 연기를 먼저 마시고, 살짝 잔을 들어 향기를 마신다. 오랜 책 냄새 같은 향기가 코끝을 적시고, 이어 쌉쌀한 맛이 혀끝을 적신다. 그렇게 쌉싸래해진 향기가 어딘지 텅 빈 냄새가 나는 하늘재의 공기를 데웠다.
목에 두른 스카프를 괜히 느슨하게 만들었다. 온기가 오르는 머그잔에 두 손을 대니, 체온을 저절로 데우는 오롯한 그리움의 시간이 찾아왔다.
“저기.”
“네?”
“스카프요.”
대강 둘러 놓은 스카프가 너무 부드러웠던 탓일까. 언제 흘러내렸는지도 모르게 바닥으로 떨어졌던 것 같다. 도연은 낯선 남자의 손 위에 걸려 하늘거리는 하얀색 스카프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도연의 말에 눈인사를 건네던 남자의 눈이 온기가 모락모락 오르는 도연의 머그잔에 잠시 와 닿았다 떨어졌다. 그 눈빛처럼 빠른 걸음으로 남자가 카페 카운터로 다시 돌아갔다.
“아이스 취소됩니까?”
따뜻한 음료로 재차 주문하는 나직한 목소리를 무심히 들으며 도연은 손에 쥔 스카프를 목에 다시 둘렀다. 겨울의 한중간, 응당 와야 할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아늑함이 느껴졌다. 도연이 머그잔을 다시 들었다. 오늘은 커피 향이 참 짙었다.
“도연 씨. 커피, 다시 드릴까요?”
카페 주인이 테라스 입구까지 두어 번 왔다 다시 돌아가는 것 같더니 세 번째에 말을 붙였다.
“네?”
“식은 것 같아서요.”
향기로 8할을 마시던 커피가 식을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도연은 무심코 머그잔 안의 커피를 내려다보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추운데 매번 테라스에 계셔서.”
도연이 별말 없이 제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재 그 어디에도 여기만큼 마음이 편안한 장소는 없다. 그가 잠들어 있는 추모관과 그 추모관을 감싸는 듯한 형국의 산이 훤히 보이는 곳. 딱 이 자리, 도연이 늘 하늘재에 들를 때마다 와서 앉는 테라스의 한쪽 자리.
사실, 좋다기보다는 더 나빠지지 않게 만드는 자리였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덜어 주는 자리 같다고 할까.
“오실 때마다 여기 앉으시기에 제가 이거 가져다 뒀는데.”
주인의 말에 제 옆자리를 보니 예쁘게 접힌 무릎담요가 보였다. 늘 실내를 권하던 주인의 배려를 뒤늦게 발견한 도연이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더 말을 붙이려던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카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슬프고 지친 눈동자들이 종일 오가는 추모공원 한편의 카페. 만지면 버석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눈동자들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마음이 쓰였다.
여자는 3년 전 어느 날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재에 자주 오는 사람들의 방문 유효 기간은 길어야 한 달 남짓이었다. 그런데 여기 이 여자는 두 달이 지나도, 석 달이 지나도 보였다. 낯이 눈에 익고도 남을 만큼의 그런 시간. 그 시간 동안 달라진 것을 굳이 찾으라면, 여자가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하던 횟수를 주에 두어 번으로 줄인 것뿐이었다.
차 한잔할 여유조차 없어 보이던 그 핏기 없는 얼굴이 처음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반갑기까지 했다.
이 겨울, 한데 앉아 있는 뒷모습이 유독 시려서일까. 이제 막 날리기 시작한 눈발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하얀 스카프가 차가운 색으로 보여서일까.
한참 도연에게 머물던 주인의 시선이 창 너머 내리는 눈 사이로 건너갔다. 겨울의 한가운데, 무척 춥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 * *

도경은 민정의 웃는 얼굴 옆에 가져온 백합 다발을 놓았다. 풍성하게 다른 꽃을 섞지 않은 백합만 싸인 다발. 베이지색 포장지가 참 마음에 든다. 오늘 같은 날, 마침맞는 꽃과 포장인 것 같다. 무어가 그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음에 꼭 들었다.
그녀를 만나러 오던 다른 날들은 하나씩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무엇이 꼭 있었다. 아무리 고쳐 매도 비뚤어진 타이라든가, 걷어 올린 소매의 높이가 다르다든가. 그것이 민정의 앞에서 웃지 못하는 제 옹졸함 때문이었다는 것을 도경은 모르지 않았다. 오고 싶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올 수밖에 없어서 오는 그런 것. 굳이 단어로 찾자면, 의무감 같은.
갑자기 그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의무감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녀를 향한 마음이 희미해져 가는 것에 대한 자책이라고 해도 좋았다. 자꾸만 다른 것에서 의미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저도 모르게.
요새 들어 누나가 저를 자주 찾는다. 간혹 통화를 하기는 했어도, 최근처럼 시시콜콜히 말을 늘어놓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통화 말미에 꼭 제 해진 가슴을 건드렸다.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라고.
소개, 소개라.
서른둘, 적은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다지 많은 나이도 아니다. 누나는 정확히 결혼이라는 말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은연중에 바닥에 깔았다. 기숙학교에 들어간 조카 이야기를 하면서 슬쩍. 친구 종길의 아이 돌 선물 이야기를 하면서 슬쩍.
그 슬쩍 때문에 휴대폰에 누나의 이름이 뜨면 망설여지는 건 아는 건지. 단 한 번도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마음 무겁게 받은 적은 많았다.
곁에 두고 챙기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도경은 도저히 제 모습을 보이고 살 수가 없었다. 저 혼자 한겨울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히터를 최고치까지 틀 수는 없으니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괜찮다고 웃을 누나의 얼굴을 볼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 어제는 조금 다른 말을 했다. 소개라는 말도 나오지 않고,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도 나오지 않아 안심하고 있는데 반전이 돌아왔다.
‘이제는 잊을 때가 되었다.’가 아니라 ‘너는 벌써 잊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또 왜 그 말이 맞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단 한 번의 의문도 없이.
그 순간, 도경은 민정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간 시원스레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던 제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누나의 말은 무척,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오늘 환하게 웃는 민정의 앞에서 허락을 받고 싶었다. 이제는 좀 그래도 되냐고. 나아갈 수 없게 짓눌러 온 의무감을 이제는 좀 벗어도 되냐고. 나도 내 인생을 살아도 되냐고.
그게 그 어떤 것에 대한 허락이든 상관없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의무감이라는 것은 그 말 자체로 모순이다. 형체가 없는 것에다 대고 무슨. 그렇지만 가져 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 세월 너무도 잘 배워 왔던 자신이었다.
민정의 존재를 온몸에 걸어 두고 살았던 세월이 후회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의무감이었다. 기대고 싶었던 건 도리어 제 쪽이었으니까.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준 그녀의 잔상에게 원망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무엇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그 무언가가 그리웠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게 다가올 그 무언가가.
무척, 그리웠다.

꽤 오랜 시간 도경은 추모관에 머물렀다. 나올 때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볼 마음이 생기지 않게 수없이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두고 오는 길이었다. 그녀 몫의 그리움들을. 다 주어 버려서 더는 남지 않게.
매정이 아니라 애정이었다. 이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몰차게 돌아서는 이 마음이 곧. 이제 그녀는 그리움 대신 다른 감정들로 제게 남았다. 그걸로 됐다. 살아 있는 자의 권리로 도경은 그렇게 어렵사리 문 하나를 닫았다.
마음이 어떻다, 라는 느낌보다 그저 제가 보낸 그리움의 몫만큼 허전했다. 저절로 무언가 생각이 났다. 그의 몸으로 들어와 채워 줄 따스한 것. 채워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데 따스하기까지 한 그것. 커피가 간절했다.

* * *

“어?”
핸들을 꼭 쥔 손이 살짝 들렸다. 커브를 도는데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아 당황했다.
그 짧은 시간에 눈이 쌓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언덕 하나를 넘어오는 것과 같은 하늘재로 들어오는 길에도 당연히 그렇게 눈이 쌓였다.
당황한 도연이 차를 한쪽에 세웠다. 경사가 꽤 급한 내리막길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이었다. 체인도 없고, 4륜도 아닌 차를 가지고 그 내리막길을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걱정 마. 눈 오는 날은 바퀴에 닿은 눈이 녹을 정도로 천천히 다니면 돼.’

그의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눈발처럼 흩날렸다. 이제 눈이 오는 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주는 따스한 목소리는 없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그저 아무 온기 없는 환영일 뿐이었다. 광택이 없는 유백색의 목소리, 그런 목소리.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도연은 자꾸 그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잠시 그대로 서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반짝반짝 빛나지 않는 그의 말처럼 눈도 유백색으로 내렸다. 주변의 색을 모조리 빨아들인 듯한 눈은 지금의 상황을 잠시 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화려한 색을 내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소중할 수 있다고.
하늘을 향한 도연의 얼굴 위로 눈송이들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진짜, 겨울이었다.
도연이 내리막길을 한 번 더 내려다보고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목소리 하나가 눈 사이를 뚫고 다가왔다.
“저길, 내려가려고 합니까? 그 차로?”
조용히 뒤돌아 목소리를 확인했다. 멀찍이 선 남자의 짙은 회색빛 코트가 제일 먼저 보였다. 흡사 코트가 하얀 눈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표정은 눈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늘재 직원은 아닌 것 같고, 추모객 같았다. 도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 제게 한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 말입니다. 하얀 차.”
그 말들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도연의 하얀 차는 더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같이 내려가시고, 눈 녹으면 가지러 오세요. 위험합니다.”
남자의 말이 한 마디, 한 마디 늘어날 때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의 진회색 코트에 달린 단추가 보일 만큼의 거리가 되자, 다시 그 유백색 목소리가 들렸다.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