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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봄, 너라서
2화
남자의 말 속 위험하다, 때문인 것 같았다.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비명과도 같은 소리였다. 도연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남자가 장갑을 벗어 내밀었다.
“귀 시리면, 장갑 끼고 감싸세요.”
그 말에서 도연은 서걱거리는 불편함을 느꼈다. 내리막길을 무리하게 내려가려는 차를 막아선 것까지는 친절한 사람의 다정함일 수 있지만, 장갑은 아니었다. 선을 긋듯이 구분할 수 있는 그런 일은 아니지만, 도연의 느낌이 그랬다. 친절은, 상대가 편안해야 친절인 법이다.
“괜찮아요.”
“체인 있는 차 타고 내려가야 해요. 다행히 아직 많이 쌓이기 전이니까, 제 차로는 내려갈 수 있을 겁니다.”
괜찮다는 말 다음 붙은 그의 말에는 제 ‘괜찮아요.’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도연은 조용히 내리는 눈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때, 카페 주인이 운전하는 하늘재 트럭이 와서 그들 곁에 섰다. 도연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건, 털털거리는 트럭의 커다란 바퀴에 걸쳐진 체인이었다.
“도연 씨?”
“내려가는 길이세요?”
“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퇴근요.”
“그럼, 차 좀 같이 타고 내려가도 될까요? 큰길까지만요.”
“아, 그러세요.”
카페 주인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조수석 문 잠금장치를 열었다. 도연의 곁에 선 남자의 어깨가 크게 한 번 들썩였다.
도연은 남자에게 작게 묵례를 했다. 차분한 걸음으로 제 차에 가서 한쪽 공터에 주차를 한 뒤 가방을 가지고 왔을 때에는, 그의 차가 내리막길 중간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눈이 너무 많이 오죠.”
“네.”
“여기가 산이나 마찬가지라.”
“네.”
“도연 씨.”
“네?”
“이거, 실례일 수 있는데.”
도연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에게로 와 닿았다. 무심해 보였지만 실례일 수 있는 말은 하지 말라는 그런 눈빛으로 보였다. 정말 그래서일까, 도연이 여자보다 먼저 입을 떼었다.
“내리막 조심하세요. 미끄러워 보여요.”
“아. 그래도 앞차가 내려가면서 길은 만들어 놓고 갔네요.”
그 말에 도연이 앞 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체인을 채운 커다란 차바퀴 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다. 마치, 이 바퀴 자국만 따라오라는 듯이.
* * *
도로를 한가운데에 둔 가로수들이 한들거렸다. 하늘재에 하얗게 내리던 눈은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도심에는 눈발이 조금 흩날리다 만 것 같았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 미약하게 흔적이 남았을 뿐이다.
드문드문 지나는 차들이 바람을 일으켰다. 그 개운하지 않은 바람에도 겨울을 느끼며 도연은 잠시 한쪽에 섰다.
정오가 머지않은 늦은 아침, 햇살이 제법 강하다. 무작정 걷고 싶던 기분은 이 쨍한 햇살 때문이었는데, 막상 그 아래에 있으니 별로다. 뭐고 적당한 것이 좋은데.
잠시 올려다본 가로수, 언제 이렇게 허전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늘을 파고드는 햇살에 살짝 찡그린 눈매가 가야 할 길 쪽으로 얼른 돌아섰다.
큰길만 지나면 정원이 있다. 몇 걸음 남겨 두고 멈췄던 것이 머쓱해 도연은 첫걸음을 크게 떼었다. 그때였다.
“선생님.”
도연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웃었다.
“아, 사장님.”
“아이 참. 사장님 소리 듣기 좀 어색하다니까.”
“전혀 어색하신 목소리가 아닌걸요.”
해경이 더 환하게 웃었다. 딱딱 끊어지는 것 같은 말투가 묘하게 편안하게 들렸다. 그 말투 그대로 그녀가 또렷하게 말했다.
“그냥 해경 씨라고 해요.”
“그럼 저도 그냥 도연 씨라고 하세요.”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우리 선생님한테.”
웃을 때 눈매가 곱게 휘는 여자는 도연이 운영하는 압화 클래스 수강생이었다. 그리고 제 정원과 같은 층, 카페 ‘달’의 주인이자 건물주이기도 했다.
강습을 듣겠다고 처음 정원에 왔을 때의 그 산뜻한 얼굴 그대로 해경이 무언가를 내밀며 말했다.
“딸기가 좋아서 사 왔는데, 이거.”
“괜찮아요.”
“나 부탁할 게 있어 주는 뇌물인데, 좀 받아 주면 안 될까요?”
“뇌물이요?”
원래의 제 모양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지 않을 만큼 어그러진 도연의 에코백을 보며 해경이 입매를 늘어뜨렸다.
“얘들 너무 자기주장이 강한데요.”
딸기 팩을 넣어 주려 뻗은 팔이 부드럽게 에코백을 벌렸다. 에코백 안에 든 화병 같은 것들이 작게 달각거렸다.
“감사해요. 오늘 클래스 때 다 같이 나눠 먹어요.”
“선생님 혼자 드시지. 꼭.”
“지난번 쿠키도 너무 잘 먹어서요.”
해경이 웃으며 먼저 한 걸음 걸었다. 곁을 내어 주는 것 같은 걸음에 잠시 멈추었던 도연의 발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해경의 팔이 다정하게 도연의 옆자리를 채웠다. 잠시 허전했던 하도연의 그림자를 풍성하게 채우고도 남을 만큼.
“나 왜 선생님한테 자꾸 뇌물을 주는지 안 물어봐요? 뇌물이 약소해서 그런가?”
“네?”
도연의 표정을 살피던 해경이 이어 말했다.
“묻지 않을 거 같으니까, 내가 먼저 말하지 뭐. 나 선생님한테 흑심이 있어요.”
“네?”
“아, 내 성적 취향은 무척 노멀하니까 걱정은 말아요.”
“사장님도.”
도연이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어? 선생님 웃는 거, 무척 보기 힘든데.”
“네?”
“아니,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웃는 거.”
“아, 제가 그랬나요?”
사람의 표정은 무언가로 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글이든, 말이든. 웃는 표정도 수도 없고, 무표정도 때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니까.
그런데 도연에게는 표정이 몇 가지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알던 시간보다 짧은 지금의 대화에서 더 많은 표정을 발견한 것이 그 증거였다.
진즉 이렇게 말을 걸어 볼 것을, 싶지만 도연에게는 늘 그러기 힘든 표정이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을 어딘가 처연하게 만드는 그 표정. 특유의 그 표정.
그래도 해경은 오히려 꾸미지 않은 그 표정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호기심이 일었다.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묘한 분위기가 도연에게 있었다.
지금 발견한 이 작은 미소에, 더없이 기쁜 마음이 드는 것처럼.
“예쁘네요.”
도연이 어색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 얼굴을 보던 해경이 짓궂은 말투로 말했다.
“어머. 여자인 나도 반할 것 같은 얼굴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도연 씨. 참 예뻐.”
“그러지 마세요. 뇌물은 제가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뇌물 받았으니까, 청탁 들어줄 거예요?”
“들어 보고 결정해도 돼요?”
“거봐. 쉽지 않을 것 같았다니까.”
“말씀해 보세요.”
“아니. 나중에 좀 쌓이면 말할게요.”
“뭐가 쌓이면요?”
“그런 게 있어요.”
도연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를 만나고 오늘 제일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딸기 받지 말 걸 그랬어요.”
“이미 받은 걸 무를 수는 없을 테고.”
다정한 말 몇 마디가 더 오가는 동안 두 사람은 도연의 가게 앞에 도착했다. 유리문이 정갈한, 대강 넘겨다보아도 향기가 그득한 도연의 꽃집이었다.
[연의 정원]
햇살이 잔뜩 밴 것 같은 나무 팻말이 걸린 작은 꽃집. 그 앞에 놓이듯 선 여자의 뒷모습과 썩 잘 어울리는 곳이다. 그런데 여자는 제 가게에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리듯 발끝을 까닥였다.
“왜요?”
“들어가세요. 이따 클래스에서 뵐게요.”
갑작스러운 말에 해경이 도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도연을 지나쳐 걸었다. 도연의 그림자 자리를 벗어나기 전 웃으면서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담은 좀 가져도 좋아요. 청탁.”
부드러운 얼굴로 배웅 아닌 배웅을 한 도연이 작게 한숨을 쉬며 정원 안을 바라보았다. 도연의 시선 너머에는 가지와 잎처럼 싱그럽게 붙어 있는 남녀가 있었다.
“똑똑똑. 나 노크했다.”
제 귀에만 들릴 정도의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하도연의 입 노크는 그들에게 무서운 촉으로 먼저 가닿았음이 분명했다. 기척 없이 들어선 도연의 발이 정원 안에 닿기도 전에 현수의 목에 두르고 있던 민혜의 팔이 떨어졌다.
“아, 모닝 키스 중인데.”
현수가 나른하게 말했다.
“아쉽니.”
“조금.”
“그럼 더 하든가.”
“오, 그럴까.”
“윤현수 아주 못 오게 한다.”
민혜가 어깨 위로 올라온 현수의 손끝을 만지작댔다. 잡힌 손이 더 나른하게 말했다.
“오면 그만이야.”
현수의 말에 도연이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대충 했으면 내 정원에서 이제 좀 나가 줄래?”
기어코 커피를 한 잔 마시고서야 현수가 사라졌다. 청소를 하겠노라며 와서 입으로 청소를 하고 나선 이가 사라지자 정원이 차분해졌다.
“도연아.”
“왜.”
“오늘도 하늘재 다녀온 거야?”
뭐라 더 말을 붙이려는 민혜에게 대답 대신 그녀의 남은 커피 잔을 밀어 준 도연이 빈 머그잔들을 손가락에 걸며 정리했다.
하도연에게 유민혜는 특별하다. 유민혜에게 하도연도 물론 그렇고.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부터 둘은 그랬다. 그걸 잘 아는 하도연은 유민혜의 괜한 걱정을 다르게 해석하며 살았다.
그런데 오늘은 남은 말을 마저 듣기가 싫다. 하늘재에 소복이 쌓이던 함박눈이 시내로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쳤던 것처럼, 오늘은 그저 그쳤으면 싶다.
그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었다. 이름 한 자라도 나오면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날이었다.
민혜는 컵을 씻으면서 도연을 흘깃대며 살폈다. 승우와의 사고 이후로 뭐든 의미를 두지 않고 사는 친구에게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도연이 정원으로 들어오기 전, 현수의 어깨 너머로 도연의 얼굴을 보았다. 윤현수가 알면 큰일이 날 노릇이지만, 어쨌든 키스 중에 보았다. 지그시 감은 그의 눈을 감상하고 싶어 떴으니 뭐 그다지 윤현수에게 손해는 아니다. 그리고 제게도 손해가 아니었다. 도연이 다정하게 누군가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눈을 뜬 것을 현수에게 들키지 않고 있었던 그 시간까지는. 그리고 아마도 도연은 정원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을 터다.
묘하게 질투심 같은 것이 고개를 든다. 저한테는 다정한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도연의 클래스에 빠지지 않고 오는 카페 달의 여사장님은 도연을 표가 나게 좋아했다. 도연의 무심한 말들 때문에 제가 무안할 만큼.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아니 감정을 보이지 않는 도연이 웬일로 제법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가며 서 있던 그 자리. 그 자리엔 제일 먼저 제가 섰어야 하는데.
……뭐 하니, 너.
가볍게 도리질을 한 민혜가 도연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오늘 주문 뭐 있어?”
“믹스 부케 두 개, 캘리 엽서 스무 장.”
“이 언니의 일필휘지가 또 빛나겠군.”
“내 가방에 문구 있어.”
2화
남자의 말 속 위험하다, 때문인 것 같았다.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비명과도 같은 소리였다. 도연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남자가 장갑을 벗어 내밀었다.
“귀 시리면, 장갑 끼고 감싸세요.”
그 말에서 도연은 서걱거리는 불편함을 느꼈다. 내리막길을 무리하게 내려가려는 차를 막아선 것까지는 친절한 사람의 다정함일 수 있지만, 장갑은 아니었다. 선을 긋듯이 구분할 수 있는 그런 일은 아니지만, 도연의 느낌이 그랬다. 친절은, 상대가 편안해야 친절인 법이다.
“괜찮아요.”
“체인 있는 차 타고 내려가야 해요. 다행히 아직 많이 쌓이기 전이니까, 제 차로는 내려갈 수 있을 겁니다.”
괜찮다는 말 다음 붙은 그의 말에는 제 ‘괜찮아요.’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도연은 조용히 내리는 눈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때, 카페 주인이 운전하는 하늘재 트럭이 와서 그들 곁에 섰다. 도연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건, 털털거리는 트럭의 커다란 바퀴에 걸쳐진 체인이었다.
“도연 씨?”
“내려가는 길이세요?”
“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퇴근요.”
“그럼, 차 좀 같이 타고 내려가도 될까요? 큰길까지만요.”
“아, 그러세요.”
카페 주인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조수석 문 잠금장치를 열었다. 도연의 곁에 선 남자의 어깨가 크게 한 번 들썩였다.
도연은 남자에게 작게 묵례를 했다. 차분한 걸음으로 제 차에 가서 한쪽 공터에 주차를 한 뒤 가방을 가지고 왔을 때에는, 그의 차가 내리막길 중간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눈이 너무 많이 오죠.”
“네.”
“여기가 산이나 마찬가지라.”
“네.”
“도연 씨.”
“네?”
“이거, 실례일 수 있는데.”
도연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에게로 와 닿았다. 무심해 보였지만 실례일 수 있는 말은 하지 말라는 그런 눈빛으로 보였다. 정말 그래서일까, 도연이 여자보다 먼저 입을 떼었다.
“내리막 조심하세요. 미끄러워 보여요.”
“아. 그래도 앞차가 내려가면서 길은 만들어 놓고 갔네요.”
그 말에 도연이 앞 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체인을 채운 커다란 차바퀴 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다. 마치, 이 바퀴 자국만 따라오라는 듯이.
* * *
도로를 한가운데에 둔 가로수들이 한들거렸다. 하늘재에 하얗게 내리던 눈은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도심에는 눈발이 조금 흩날리다 만 것 같았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 미약하게 흔적이 남았을 뿐이다.
드문드문 지나는 차들이 바람을 일으켰다. 그 개운하지 않은 바람에도 겨울을 느끼며 도연은 잠시 한쪽에 섰다.
정오가 머지않은 늦은 아침, 햇살이 제법 강하다. 무작정 걷고 싶던 기분은 이 쨍한 햇살 때문이었는데, 막상 그 아래에 있으니 별로다. 뭐고 적당한 것이 좋은데.
잠시 올려다본 가로수, 언제 이렇게 허전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늘을 파고드는 햇살에 살짝 찡그린 눈매가 가야 할 길 쪽으로 얼른 돌아섰다.
큰길만 지나면 정원이 있다. 몇 걸음 남겨 두고 멈췄던 것이 머쓱해 도연은 첫걸음을 크게 떼었다. 그때였다.
“선생님.”
도연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웃었다.
“아, 사장님.”
“아이 참. 사장님 소리 듣기 좀 어색하다니까.”
“전혀 어색하신 목소리가 아닌걸요.”
해경이 더 환하게 웃었다. 딱딱 끊어지는 것 같은 말투가 묘하게 편안하게 들렸다. 그 말투 그대로 그녀가 또렷하게 말했다.
“그냥 해경 씨라고 해요.”
“그럼 저도 그냥 도연 씨라고 하세요.”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우리 선생님한테.”
웃을 때 눈매가 곱게 휘는 여자는 도연이 운영하는 압화 클래스 수강생이었다. 그리고 제 정원과 같은 층, 카페 ‘달’의 주인이자 건물주이기도 했다.
강습을 듣겠다고 처음 정원에 왔을 때의 그 산뜻한 얼굴 그대로 해경이 무언가를 내밀며 말했다.
“딸기가 좋아서 사 왔는데, 이거.”
“괜찮아요.”
“나 부탁할 게 있어 주는 뇌물인데, 좀 받아 주면 안 될까요?”
“뇌물이요?”
원래의 제 모양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지 않을 만큼 어그러진 도연의 에코백을 보며 해경이 입매를 늘어뜨렸다.
“얘들 너무 자기주장이 강한데요.”
딸기 팩을 넣어 주려 뻗은 팔이 부드럽게 에코백을 벌렸다. 에코백 안에 든 화병 같은 것들이 작게 달각거렸다.
“감사해요. 오늘 클래스 때 다 같이 나눠 먹어요.”
“선생님 혼자 드시지. 꼭.”
“지난번 쿠키도 너무 잘 먹어서요.”
해경이 웃으며 먼저 한 걸음 걸었다. 곁을 내어 주는 것 같은 걸음에 잠시 멈추었던 도연의 발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해경의 팔이 다정하게 도연의 옆자리를 채웠다. 잠시 허전했던 하도연의 그림자를 풍성하게 채우고도 남을 만큼.
“나 왜 선생님한테 자꾸 뇌물을 주는지 안 물어봐요? 뇌물이 약소해서 그런가?”
“네?”
도연의 표정을 살피던 해경이 이어 말했다.
“묻지 않을 거 같으니까, 내가 먼저 말하지 뭐. 나 선생님한테 흑심이 있어요.”
“네?”
“아, 내 성적 취향은 무척 노멀하니까 걱정은 말아요.”
“사장님도.”
도연이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어? 선생님 웃는 거, 무척 보기 힘든데.”
“네?”
“아니,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웃는 거.”
“아, 제가 그랬나요?”
사람의 표정은 무언가로 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글이든, 말이든. 웃는 표정도 수도 없고, 무표정도 때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니까.
그런데 도연에게는 표정이 몇 가지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알던 시간보다 짧은 지금의 대화에서 더 많은 표정을 발견한 것이 그 증거였다.
진즉 이렇게 말을 걸어 볼 것을, 싶지만 도연에게는 늘 그러기 힘든 표정이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을 어딘가 처연하게 만드는 그 표정. 특유의 그 표정.
그래도 해경은 오히려 꾸미지 않은 그 표정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호기심이 일었다.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묘한 분위기가 도연에게 있었다.
지금 발견한 이 작은 미소에, 더없이 기쁜 마음이 드는 것처럼.
“예쁘네요.”
도연이 어색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 얼굴을 보던 해경이 짓궂은 말투로 말했다.
“어머. 여자인 나도 반할 것 같은 얼굴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도연 씨. 참 예뻐.”
“그러지 마세요. 뇌물은 제가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뇌물 받았으니까, 청탁 들어줄 거예요?”
“들어 보고 결정해도 돼요?”
“거봐. 쉽지 않을 것 같았다니까.”
“말씀해 보세요.”
“아니. 나중에 좀 쌓이면 말할게요.”
“뭐가 쌓이면요?”
“그런 게 있어요.”
도연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를 만나고 오늘 제일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딸기 받지 말 걸 그랬어요.”
“이미 받은 걸 무를 수는 없을 테고.”
다정한 말 몇 마디가 더 오가는 동안 두 사람은 도연의 가게 앞에 도착했다. 유리문이 정갈한, 대강 넘겨다보아도 향기가 그득한 도연의 꽃집이었다.
[연의 정원]
햇살이 잔뜩 밴 것 같은 나무 팻말이 걸린 작은 꽃집. 그 앞에 놓이듯 선 여자의 뒷모습과 썩 잘 어울리는 곳이다. 그런데 여자는 제 가게에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리듯 발끝을 까닥였다.
“왜요?”
“들어가세요. 이따 클래스에서 뵐게요.”
갑작스러운 말에 해경이 도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도연을 지나쳐 걸었다. 도연의 그림자 자리를 벗어나기 전 웃으면서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담은 좀 가져도 좋아요. 청탁.”
부드러운 얼굴로 배웅 아닌 배웅을 한 도연이 작게 한숨을 쉬며 정원 안을 바라보았다. 도연의 시선 너머에는 가지와 잎처럼 싱그럽게 붙어 있는 남녀가 있었다.
“똑똑똑. 나 노크했다.”
제 귀에만 들릴 정도의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하도연의 입 노크는 그들에게 무서운 촉으로 먼저 가닿았음이 분명했다. 기척 없이 들어선 도연의 발이 정원 안에 닿기도 전에 현수의 목에 두르고 있던 민혜의 팔이 떨어졌다.
“아, 모닝 키스 중인데.”
현수가 나른하게 말했다.
“아쉽니.”
“조금.”
“그럼 더 하든가.”
“오, 그럴까.”
“윤현수 아주 못 오게 한다.”
민혜가 어깨 위로 올라온 현수의 손끝을 만지작댔다. 잡힌 손이 더 나른하게 말했다.
“오면 그만이야.”
현수의 말에 도연이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대충 했으면 내 정원에서 이제 좀 나가 줄래?”
기어코 커피를 한 잔 마시고서야 현수가 사라졌다. 청소를 하겠노라며 와서 입으로 청소를 하고 나선 이가 사라지자 정원이 차분해졌다.
“도연아.”
“왜.”
“오늘도 하늘재 다녀온 거야?”
뭐라 더 말을 붙이려는 민혜에게 대답 대신 그녀의 남은 커피 잔을 밀어 준 도연이 빈 머그잔들을 손가락에 걸며 정리했다.
하도연에게 유민혜는 특별하다. 유민혜에게 하도연도 물론 그렇고.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부터 둘은 그랬다. 그걸 잘 아는 하도연은 유민혜의 괜한 걱정을 다르게 해석하며 살았다.
그런데 오늘은 남은 말을 마저 듣기가 싫다. 하늘재에 소복이 쌓이던 함박눈이 시내로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쳤던 것처럼, 오늘은 그저 그쳤으면 싶다.
그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었다. 이름 한 자라도 나오면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날이었다.
민혜는 컵을 씻으면서 도연을 흘깃대며 살폈다. 승우와의 사고 이후로 뭐든 의미를 두지 않고 사는 친구에게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도연이 정원으로 들어오기 전, 현수의 어깨 너머로 도연의 얼굴을 보았다. 윤현수가 알면 큰일이 날 노릇이지만, 어쨌든 키스 중에 보았다. 지그시 감은 그의 눈을 감상하고 싶어 떴으니 뭐 그다지 윤현수에게 손해는 아니다. 그리고 제게도 손해가 아니었다. 도연이 다정하게 누군가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눈을 뜬 것을 현수에게 들키지 않고 있었던 그 시간까지는. 그리고 아마도 도연은 정원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을 터다.
묘하게 질투심 같은 것이 고개를 든다. 저한테는 다정한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도연의 클래스에 빠지지 않고 오는 카페 달의 여사장님은 도연을 표가 나게 좋아했다. 도연의 무심한 말들 때문에 제가 무안할 만큼.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아니 감정을 보이지 않는 도연이 웬일로 제법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가며 서 있던 그 자리. 그 자리엔 제일 먼저 제가 섰어야 하는데.
……뭐 하니, 너.
가볍게 도리질을 한 민혜가 도연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오늘 주문 뭐 있어?”
“믹스 부케 두 개, 캘리 엽서 스무 장.”
“이 언니의 일필휘지가 또 빛나겠군.”
“내 가방에 문구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