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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봄, 너라서
3화

민혜는 제게 눈길도 주지 않고 제 할 일만 하는 도연을 제대로 흘겼다. 오늘 주문이 중요한 게 아니라, 대화를 하고 싶은 건데. 이 로봇 같은 계집애는 현수와 섹스를 하고 있었어도 ‘아, 하던 거 계속해.’라고 했을 것이다.
“지금 나 씹고 있지.”
“어, 어?”
“유민혜가 조용한 순간은, 그때뿐이라.”
“오해다.”
“당황한 거 다 들켰어.”
“그럴 리가.”
“빨리 캘리 써. 오전에 찾으러 올 거야.”
“넵.”
도연의 반듯한 이마가 조금 들리자 투덜대던 민혜의 입술은 쑥 들어갔다.
이내 정원 안에 마른 꽃과 종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나직이 깔렸다. 도연은 믹스 부케를 네 개 만들었다. 오늘 꽃 색의 비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에게 가져다주고 싶었다.
생화를 미친 듯이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그도 도연만큼 그렇게 좋아했다. 새벽 꽃 시장, 그 파르스름한 공기 사이에서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남자. 꼭 마음에 드는 색의 수국을 먼저 집어 들던 커다란 손. 어설픈 꽃 포장지의 질감이 제게도 느껴지는 것 같던 그 손.
도연은 그때의 그 포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제 손에 들린 예쁜 포장지를 저도 모르게 슬며시 구겼다. 그 구겨짐마저 의도한 포장의 일부처럼 고와서 조금 펴 들고 그를 위한 꽃 아래 두고 포장을 했다. 이로써 하늘재에 다시 갈 이유가 생겼다. 그 이유를 만들고 싶었는지, 만들어야 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냥 그 이유가 생겨서 좋았다. 그는 제게 그런 사람이었다.
“왜 네 개야?”
“하나는 이승우 거. 하나는…….”
민혜의 눈이 반짝거렸다. 왜 네 개냐고 묻는 순간에 이미 알고 있을 답을 굳이 해 주기 싫지만, 그 반짝임이 예뻐서 말하기로 한다.
“유민혜 거. 뭐, 윤현수 집으로 가게 되겠지만.”
“악.”
“그 듣기 싫은 소리는 어떤 의미니?”
“알아보는 이에게 작품을 주는 이 현명함. 내 어찌 너를 이뻐하지 않겠어?”
달려드는 민혜를 피해 슥, 엉덩이를 의자 끝으로 밀어 보지만 역부족이다. 밀려오는 친구의 바디로션 향기가 믹스 부케 위로 한들한들 내렸다. 어딘지 따스해지는 향이다. 추운 겨울을 위로하려는 것처럼.
연의 정원에도 겨울이 그렇게 내렸다.

* * *

무심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다가 말았다. 겨우 3층인데. 습관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해경은 같은 건물에 있는 동생의 사무실에 가는 길이었다. 걸어 올라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동생을 생각하면 늘 생각의 꼬리가 길어져서 금방 올라와 버리고 마는 엘리베이터의 시간으로는 부족했을 것이기에.
대개의 사무실들이 그렇지만, 유독 이 사무실 앞에 서면 건조한 느낌이 든다. 해경이 심플한 문 앞에 잠시 섰다. 긴 복도를 걸어오면서 해경은 주위를 부지런히 살폈다. 그녀 기준에 너무 황량한 이 복도에서 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해인 세무사무소]

어머니 이름이 박힌 팻말 앞에서 해경은 한참을 서 있었다. 나무토막 하나가 가졌다기에는 너무 힘이 센 그리움이었다.
나이가 든다고 해도 익숙해지거나 무뎌지지 않는 것들이 종종 있다. 지금 제 등에 와 박히는 외롭게 들리는 목소리도 그중 하나였다.
“뭐 해. 얼른 안 들어가고.”
“나갔다 오니?”
“출장.”
“이 아침에?”
“음, 그럼. 출근.”
“이 커피는 뭐고?”
“대강 넘어가.”
“신발 꼴이 왜 그래. 오늘도 하늘재 다녀온 거야?”
입구부터 시작된 해경의 말들은 동생의 어지러운 책상 앞에 설 때까지 이어졌다. 동생이 사 온 커피를 마뜩잖은 눈으로 보던 해경이 제가 가져온 커피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만 가라고 오늘도 말하면 백만 번째야.”
“백만 번은 안 됐어.”
“기어이 채우려고?”
“구해경 씨. 괜한 걱정은 갱년기에 해롭습니다.”
해경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도경이 조용히 웃었다.
“나 갱년기 빨리 오면, 다 너 때문이야.”
잠시 안고, 안겨서 있는 걸로 두 사람은 뒤늦은 인사를 했다. 뒷머리를 한 번 쓸어 내는 손길이 해경이 지나온 복도처럼 건조했지만, 군더더기 없는 애정 표현이었다.
“구 소장.”
“왜.”
“선보자.”
“싫어.”
“그럼 소개팅하자.”
“그게 그거지.”
“만남의 지속성, 무게가 조금 다르다고 본다. 나는.”
“그게 그거야.”
“그럼 연애 좀 하자.”
그 말에 웃음기를 싹 거둔 도경이 제 누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사무장이 웃옷을 고쳐 입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도경의 시선이 기특한 그에게로 옮아간 사이, 해경이 생긋 웃으며 동생의 어깨를 빠르게 한 번 두드리고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도경이 좋아하는 원두를 기어이 내려 주고 나서야 일과가 시작되는 것 같은 기분이 찾아왔다. 마음 같아선 커피가 아니라 밥을 매일 챙기고 싶은데, 고집불통 구도경은 그리 만만한 놈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직구를 던진 건데. 내 타들어 가는 마음도 모르고, 이 녀석이.
선을 보일 상대도, 소개팅을 시킬 상대도 정해 놓지 않았다. 그런데 던지듯 했던 말들 끝에, 어렴풋이 달라붙는 얼굴 하나가 있다.
해경은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도경은 누나가 쯧쯧, 혀를 차며 지적한 신발을 벗어 책상 아래 두고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푹푹 발이 빠졌던 그 눈밭이 꿈만 같다.
누나가 했던 말은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단, 수화기 너머로. 이렇게 직접 대놓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 다른 데서 사 온 커피가 충격이었나.
하늘재의 커피를 그대로 들고 왔다. 이상하게도 거기선 마시고 싶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 기껏 따뜻한 커피로 다시 주문을 해 놓고서는. 그 커피, 이제는 식었다. 원래 마시려던 아이스의 냉기도, 모락 김이 오르던 타인의 커피 잔 때문에 충동적으로 바꾸었던 온기도 아닌 애매한 온도.
그 애매한 온도처럼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느낌 하나가 가슴을 비벼 댄다. 그 이물감의 원인은 선도 아니고, 소개팅도 아닌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름 아닌 연애였다.
해경의 입에서 연애라는 말이 나온 순간, 하얀 눈밭과 그 하얀 눈밭에 서 있던 여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왜였을까.
하늘재에는 거의 매주 간다. 거기에서는 근무하는 사람들 말고는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당연하다. 들고 나는 사람들 중, 추모관에서 오늘 만난 사람을 다음 주에 또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마주치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추모하는 유효 기간은 대부분 그리 길지 않았다. 보통은 기일에 찾거나, 특별한 날 찾아오는 정도일 것이기에.
제가 기억하기로 그녀와는 다섯 번 정도 마주쳤다. 횟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은 아니지만, 이제 몇 번 더 보면 그렇게 될, 딱 그만큼의 횟수. 인사 한번 나누어 보지도 못한. 아니, 가까이 스쳐 지나가 보지도 못한 여자에게 오늘 했던 말들은 지나고 보니 정말 가당치도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괜히 변명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저 스쳐 지났을지도 모를, 그런 사이. 다섯 번이라는 횟수를 저도 모르게 세었기 때문일까.
메마른 의문만이 담겼던 여자의 커다란 눈동자가 뒤늦게 둥실 떠오른다. 이상한 일이었다.

* * *

윤현수가 쉬는 날 점심은, 늘 그의 집에서 먹는다. 물론 밥만 먹는 건 아니었다.
“나도 물.”
“여기.”
내민 물병을 민혜가 얼른 받아 들었다. 전해져 오는 뭉근한 눈빛에 물이 미지근한 것 같다. 아니, 미지근한 건 물이 아니다. 그녀 위에 올라타 지그시 누르는 그의 몸이 미적지근했다.
“마음에 안 들어.”
“뭐가?”
“미지근한 네 몸.”
“샤워해서.”
“그러니까.”
현수가 웃으며 민혜의 불만스러운 볼을 쓸었다.
“왜. 같이 해야 하는데?”
“아니.”
“그럼?”
야무지게 토라진 입술 곁, 제 입술을 착 가져다 두고 말을 했다. 유민혜는 이럴 때가 제일 예쁘다.
민혜는 제 몸에서 떨어지자마자 욕실로 들어가는 현수가 마음에 안 들었다. 언제부턴가 말하고 싶었는데. 물론 정말 바로 샤워를 하는 것은 아니다. 안아 주고, 닦아 주고, 키스하고. 할 건 다 한다. 제가 말하는 ‘바로’와 윤현수의 ‘바로’는 아주 다른 개념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저는 아직 뜨거운데, 빠르게 식으려 하는 그에게 서운했다. 언제나 섹시한 그의 뒷모습이 유일하게 꼴 보기 싫어지는 이때를, 그가 알았으면 싶다.
제 얼굴 솜털을 간지럽히는 것 같은 그의 웃음소리가 얄미워 민혜는 그의 팔을 꼬집었다. 그러자 간지럽히다 못해 아주 제대로 긁어 댄다. 그게 더 얄미워 손톱을 더 세웠다.
“유민혜.”
“왜.”
“샤워 먼저 해서 화난 거야?”
“아니.”
“그럼?”
“같이 좀 있어도 되잖아.”
자고 나서 담배 먼저 무는 것과 다른 게 뭐야.
“언제는 끈적거려 싫다더니.”
“그땐 그랬고.”
민혜의 입술이 더 나왔다. 현수가 그런 그녀의 입술을 장난스레 잡아당겼다. 응해 주지 않는 입술에 대고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럼 다시 해.”
“뭘?”
“이번에는 하고 나서 샤워 안 할게.”
“뭐?”
몸 위가 잠시 가벼워지나 싶더니, 다시 적당히 묵직해졌다. 자리를 잡은 현수의 엉덩이를 민혜가 찰싹 때렸다.
“안 내려와?”
“싫은데.”
가벼운 실랑이 끝에 유민혜가 승기를 잡았다. 그 이기고 싶은 마음이 남자의 마음과 같다는 것이 함정이긴 했지만.
“샤워하러 쏙 들어가기만 해 봐.”
“이번에는 네가 샤워하고 싶게 만들어 줄게.”
벌써 반응하는 몸이 현수의 그 말에 팽팽한 긴장으로 빠듯하게 올라붙었다. 미지근한 그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피부 아래로 느끼며 민혜가 웃었다.
“소용없는 일을.”
그 말에 현수가 웃었다. 소용없는 일이라니. 샤워하러 안 갔으면 벌써 잠들었을 거면서.
데워진 공기가 출렁거리며 두 사람의 몸으로 계속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샤워를 함께 해야 할 것 같았다.

“가슴이 막 이유 없이 뛰어.”
“날 보면서 가슴 뛰는 게 하루 이틀 일이야?”
“그래, 하루 이틀이 아니지.”
농담으로 말을 더 이으려던 현수는 폭, 한숨을 내쉬는 민혜를 보며 말꼬리를 짧게 잘랐다.
“또 왜.”
현수의 집에서 화장대로 쓰는 협탁 위, 립스틱을 탁 소리가 나게 놓으며 민혜가 중얼거렸다. 도무지 남자에게, 아니 그 무엇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제 친구가 이해가 안 된다.
벌써 3년이었다, 3년. 3년이면 이 좋은 섹스를 하고, 애를 낳고, 돌잔치를 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런 점에서 하도연의 3년은 무척 비생산적이었다.
늘 가슴이 아리는 도연의 3년이지만, 이맘때쯤은 가슴이 당기는 강도가 평소보다 조금 더 셌다. 조금 있으면 도연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이 승우의 기일이었다.
혀를 차며 민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스트를 들었다. 칙, 뿌리는 손길이 거칠게 얼굴 위를 오갔다.
“하, 섹시해. 그 손길.”
“나 옷 다 입었어.”
블라우스 안으로 쑥 들어오는 손을 민혜가 밀어 냈다. 하지만 밀쳐지지 않은 손이 의뭉스레 조금씩 올라왔다. 가까워진 입술은 여전히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