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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inum wolf x Baby bird 1화
1부 (1)
한국의 1월은 꽤 춥다. 저절로 입에서 하얀 입김이 술술 뿜어져 나올 정도로.
어느 오후, 달동네의 굽이진 골목에 선 남자는 눈앞에서 엉엉 우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작고 더러운 옷을 입은 아이는 이제 막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사내아이였다.
남자는 목에 매고 있던 체크무늬 버버리 목도리를 풀어서 아이의 목에 매 주었다. 따스함이 느껴지자 아이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두 눈은 퉁퉁 부었고, 추위 때문에 코까지 흘러내렸다. 남자는 제 옆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넘겨준 손수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잘 닦아 주었다.
입에 물었던 담배를 바닥으로 던져 신발로 비벼 끈 남자는 아이의 뺨을 양손으로 만져 보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뺨은 가엽게도 퉁퉁 얼어 있었다.
“뚝.”
“흑…… 흐흑, 윽…….”
“왜 울고 있지?”
“애들이, 울 엄마…… 울 엄마가 나쁘다고…… 돌 던지고, 끅…….”
“흠.”
짙은 브라운 골드의 눈동자가 아이의 몸에 있는 생채기로 시선을 던진다. 아이의 뒤에는 꽤 큼직한 돌들이 떨어져 있었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당장의 말만 들어도 이 아이가 어떤 상황에 처해서 이렇게 울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약간의 살기를 띄며 인상을 찌푸린 남자는 아이의 부스스한 검은 머리를 토닥였다.
“밥은?”
“아…… 아빠가 안 오셔서.”
“아빠는 어디 갔지?”
“자주 안 오셔요.”
아이가 작게 떨며 훌쩍거렸다. 무표정이지만 금빛을 띈 남자의 눈동자에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팔을 뻗어 아이를 살짝 품에 안고는 커다란 손으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기 새, 착하지? 그만 뚝.”
“저…… 전 아기 새 아니에요. 오이예요.”
“오이?”
“선우오이. 제 이름이에요. 할아부지가 지어 주셨어요.”
“흠, 삐약거리는 게 노란 아기 새 같은데.”
“네에?”
아이의 머리 위로 작은 물음표가 둥둥 뜨자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팔 안에 안긴 아이는 가여울 만큼 체구가 작고 말랐다.
“배고프지? 아기새, 뭐가 먹고 싶지?”
“저, 어…… 엄마, 엄마가 맛있는 거 사 주는 사람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맛없는 거 사 주세요.”
아이의 말을 들은 남자의 매끈한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품에 안은 아기새의 작은 심장박동이 코트 너머로 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럼 따뜻한 죽은 어때.”
그러자 아이의 고개가 두어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작은 수긍에 남자가 아이의 목에 얼굴을 기대고 웃었다. 껴안은 아이에게서는 낡은 가구 냄새 같기도 하고, 작은 동물의 포근한 냄새 같기도 한 것이 느껴졌다.
“테네일 님. 곧 사진영 님과의 약속 시간입니다.”
“전화로 두 시간 정도 늦는다고…… 아니다, 내가 하지.”
남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구불구불한 달동네 길을 내려갔다. 뒤따라오는 검은 양복의 덩치들이 일곱 명이나 있어서 꽤 눈에 띄었다. 아이는 남자와 검은 양복 무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남자의 손을 양손으로 꼭 움켜잡았다.
“음? 왜 그러지, 아기새?”
“무…… 무서워서…….”
살짝 찡그린 아이의 얼굴을 보던 남자는 손짓으로 약간 떨어져서 오라고 양복 무리에게 명령했다. 그들은 약간 곤혹스러워 보였지만 이내 보스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뒤로 물러나 천천히 걸었다.
“이젠 괜찮겠지?”
“응!”
아기새가 활짝 웃자 주변이 환하게 피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보기 드물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아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시내 입구에 위치한 죽집으로 가서 따뜻한 전복죽을 사 먹이고 커다란 사탕까지 쥐여 준 뒤에야 다시 아이를 데리고 달동네 입구로 걸어갔다.
“꼭 먹고 양치질해야 된다.”
“네!”
고소한 전복죽을 배불리 먹고, 커다란 사탕도 얻고, 푹신한 버버리 목도리까지 목에 두른 아이의 얼굴은 활짝 개어 있었다. 뺨에 상처를 입고 엉엉 울던 아까와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남자는 슬슬 원래 목적지로 향해야 했다. 그는 아쉬운 얼굴로 아이를 세워 놓고 몸을 숙였다.
“난 조금 있다가 다시 가 봐야 된다. 집까지 데려다줄까?”
“어…… 멀리 가요?”
“그래, 멀리.”
“아…….”
그러자 아이의 눈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으…….”
“이런.”
울기 직전인 아이 앞에서 남자의 안색이 굳어졌다. 고작 두 시간 정도 같이 있었을 뿐인데 그새 정이 든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런 식으로 함께 있어 준 사람이 거의 없었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아이를 놓고 가기에는 마음에 걸린다.
“뚝. 울면 여기에 버리고 간다?”
“아, 안 울게요!”
조금이라도 남자와 함께 있고 싶었는지 아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둥글둥글한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남자는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아이의 눈가를 닦아 주고 다시 일어나 손을 잡아 주었다.
차분히 아이의 손에 온기를 이어 준 뒤 짧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아기새, 15년…… 아니, 10년만. 기다려 주겠어?”
“10년이면 몇 밤 자야 돼요?”
“3650번 정도.”
“3…… 3…… 그러니까…….”
워낙 숫자가 크다 보니 아기새의 작은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어 봐도 쉽지 않았다. 아이가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본 남자는 큰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다시금 쓰다듬어 주었다. 혼자서‘삐약삐약’ 하는 모습이 상당히 볼만했다.
아이가 숫자를 세어 보려고 진땀을 흘리는 동안, 어느새 둘은 처음 만났던 장소에 도착했다. 아직까지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주먹만 한 돌들을 바라본 남자는 약간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없는 10년간, 이 아이가 또 다시 다치는 건 그로써 영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남의 가정사에 타인이 함부로 관여할 수 없는 한국의 특성상,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신이 아이의 일에 깊게 개입할 수도 없을 터였다.
“아저씨?”
“음? 왜 그러지?”
“3…… 3000……. 그만큼 자고 일어나면 또 볼 수 있어요?”
“아기새가 그동안 착하게 지내 준다면.”
아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흡족한 얼굴로 살짝 무릎을 굽혀서 시선을 맞추었다.
“약속하지. 아기새가 착한 아이로 3650일을 있어 준다면, 반드시 만나러 오겠다고.”
“응!”
활짝 웃는 아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고 연약한 아기새를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뚜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달동네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나타나 남자의 뒤에 바싹 붙었다.
“테네일 님. 약속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
크리스티안 S. 테네일은 어머니인 사진영을 만나러 한국으로 온 그날, 처음으로 작은 아기새를 만났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그는 아기새가 열여덟 살이 되는 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기새와 했던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
“너희들 빨리 줄 서! 선생님 오신단 말이야!”
평범한 제주도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이 제각기 학교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온다. 처음에는 또 제주도라며 불평을 잔뜩 했었지만 막상 다녀와 보니 그리 나쁘지는 않았는지 다들 표정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그중, 2학년 4반에 유난히 목소리가 큰 한 아이가 작은 몸으로 등에는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자신의 반 아이들을 모으고 있었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운동장의 끝에서 시시덕거리며 땅바닥에 낙서를 하던 아이들에게도 모두 들릴 정도였다.
“야, 오이야. 릴렉스라는 말도 모르냐? 귀청 떨어지겠다!”
“그럼 한 번에 좀 모여 주든가. 그보다 반장, 왜 부반장인 내가 애들을 모아야 되는 건데?”
“훗. 나는 반장이시다. 부반장은 그저 내 말에 잘 따라 주면 되는 거야. 알겠어?”
오이의 등을 큰 손으로 내려치며 당당하게 말하는 반장의 태도에, 뒤에서 다가오던 2학년 4반 젊은 여선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학기 초에 아이들이 뽑아 놓은 반장이 저 모양 저 꼴이라 좌절했는데, 전교에서 착하고 성실하기로 소문난 선우오이가 자진해서 부반장을 맡아 주니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야! 거기 너희들! 빨리 이리 와서 줄 서!”
입에서 입김이 훅훅 날 정도로 추웠으나 오이의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반장의 빈정거리는 태도에 힘을 얻었는지 운동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치며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데 힘썼다.
한창 때의 열여덟 살의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오이가 소리를 치며 모은 2학년 4반이 가장 빠르게 모여서 대열을 이루니 선생의 얼굴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 오이, 고마워. 선생님이 그래도 네 덕분에 편하네.”
“어! 선생님, 왜 저한테는 안 고마우신 건데요?”
“반장 이시우. 너는 놀지만 말고 애들 줄 서는 거나 빨리 바로 잡아.”
복슬거리는 오이의 검은 머리를 쓱쓱 쓰다듬던 선생님은 빈둥거리던 시우에게 반장다운 일을 떠넘기고 운동장을 쭉 둘러보았다. 척 봐도 자신이 맡은 4반이 1등으로 자리를 잡으니 왠지 콧대가 높아졌다.
“선생님 오늘 좋은 일 있으세요?”
“응? 아아, 우리 오이가 일을 잘해서 그래.”
이런 착실한 아이가 반에 하나만 더 있었으면 정말 편했을 텐데.
선생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어디 보자……. 애들 서른다섯 명 다 왔지? 조금 있다가 교장 선생님 말씀 듣고 가야 되니까 자리 이탈하지 말고. 거기 여학생들! 핸드폰 집어넣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운동장 중앙으로 교장 선생이 올라섰다. 이 추운 겨울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집에 바로 가면 될 아이들을 붙잡아 놓으려는 건지. 다들 얼른 집으로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아, 우리 제한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수학여행은 잘 다녀왔습니까?”
이제 긴 연설의 시작이다.
오이는 시린 손에 입김을 불며 인상을 살짝 구겼다. 적어도 20분을 꼭 넘겨야 직성이 풀리는 저 교장은 이미 전교생의 불만거리였다. 매번 마이크만 잡았다 하면 기본이 20분, 30분이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만도 했다.
빼곡히 줄 서 있는 아이들이 추위에 투덜거리자 교장의 입에서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설교가 더 길어질 거란 무언의 압박에 아이들은 투덜거리다 말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크흠, 그래서 제주도에 다녀온…….”
이미 반장인 시우는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조회대가 아닌 다른 곳을 보며 작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이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입김으로 손을 녹이며 목에 걸려 있는 포근한 목도리에 뺨을 가져갔다.
어릴 적,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주고 간 목도리. 세월이 10년이나 지난 지금, 요즘 나오는 다른 목도리들에 비하면 약간 촌스럽기도 하고, 때가 타기도 했지만 따뜻하기로는 이것만 한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미미하게 떠오르는 그 사람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었다.
‘약속하지. 착한 아이로 3650일을 있어 준다면, 반드시 만나러 오겠다고.’
그 이외의 말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이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여덟 살 때 들었던 말을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다니. 오이는 가만히 눈을 아래로 깔고 흐릿한 그 사람을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우선 커다란 키에 검은 코트. 그리고 반쯤 넘긴 검은 머리카락. 검은 선글라스.
“……? 어째 전부 검은색뿐이네.”
차갑게 언 뺨을 한 손으로 감싸서 녹이며 오이는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검은색, 남자, 큰 키, 그리고 목도리. 이것이 오이가 생각하는 그의 키워드였다.
“—이상으로 교장 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장장 30여 분 끝에 드디어 지긋지긋한 연설이 끝나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제각기 친구들과 몰려 집으로 향했다. 선생님에게 인사를 건넨 오이는 짐을 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학생에게 다가갔다.
“오이야, 이제 끝났어?”
“응, 얼른 가자. 벌써 7시네.”
“아, 대체 무슨 말이 저렇게 많은지……. 추워 죽는 줄 알았어.”
머리를 짧고 단정하게 정리한 키 작은 남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짜증을 표시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반장 시우도 조금 전의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파카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 나라면 추워서 그냥 보내 주겠다. 안 그래, 오이야?”
“이름 좀 그만 부르라니까.”
“오이니까 오이라고 하지. 그럼 가지라고 부르리?”
한적한 도로변을 따라 걸으며 시우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오이를 놀려 대었다.
“그러고 보니 오이, 네 키다리 아저씨는 대체 누구야? 빨리 말 안 하면 뒷조사 들어간다?”
“나도 몰라. 여자 분이시라는데 얼굴은 한 번도 못 봤어.”
“그래도 다행이네. 그런 사람이 있어서.”
그때 키가 작은 남학생이 뻔질거리는 시우의 뒤통수를 강하게 치며 둘의 중간에 끼어들었다. 시우의 외마디 비명에, 화를 내기 직전이었던 오이의 표정이 조금은 나아졌다.
“응, 정말 다행이지.”
“이씨! 야! 민병! 왜 머리를 치고 지랄이야! 감히 반장님의 소중한 두뇌를 손상시키다니!”
“거 좀 닥쳐라. 지금 주우웅요한 이야기 중이잖아. 안 그래, 오이야?”
민병이라고 불린 남학생은 연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시우의 목덜미에 가볍게 팔을 걸어서 흔들었다. 헤드락에 걸린 시우는 팔을 휘두르며 빠져나오려고 별짓을 다 했고, 오이는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아, 젠장. 어릴 땐 내가 최고였는데. 이 자식 많이 컸어.”
“아니꼬우면 너도 걸어 보든가.”
“쳇, 잘난 척은……. 어? 저기 건물 드디어 완성됐나 보네.”
시끌벅적하게 길을 걸어가던 셋은 시내 부근에 세워진 커다란 10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부들이 왔다 갔다 움직이고, 천막으로 가려 놨던 건물이었는데, 어느새 완공이 되어서 유리창에는 하얀 테이프로 엑스 자가 크게 붙어 있었다.
“정말이네? 이거 대체 뭐 하려고 지은 걸까? 시내 부근이긴 한데 여기는 장사 잘 안 될 텐데.”
“아냐, 보통 이런 건물은 장사가 아니라 사무실로 쓴다고. 애초에 상가 목적 건물은 대체로 낮게 짓는 거 몰랐냐?”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이는 가만히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어둑어둑해져 가는 하늘 빛깔과 비슷한 색상인 건물은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반짝이는 유리나, 그 너머로 보이는 대리석 같은 타일들이 TV에서나 보던 호텔처럼 으리으리했다.
“사무실치곤 좀 고급스럽지 않나? 혹시 호텔이나 뭐 그런 거 아닐까?”
“호텔은 아닌 거 같아. 모양새가 조금…… 딱딱한걸.”
나직한 오이의 반론에 시우는 그것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건물은 나중에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들어오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그보다 우리 집에 가기 전에 떡볶이 먹을까? 아니면 오뎅도 좋은데.”
“아, 미안. 나 오늘은 좀 일찍 가 봐야 돼.”
“오이, 집에 무슨 일 있어?”
달동네 언덕 위쪽에 사는 오이가 일찍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뭔가 일이—아버지가 오랜만에 돌아와 술 먹고 오이를 때린다거나 하는— 터지곤 했다. 그걸 아는 둘의 표정이 굳어 가자 오이는 얼른 손을 흔들며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오늘은 할머니 오시는 날이야. 아빠는 다음 주에나 오신대.”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럼 우리가 입구까지 데려다줄게. 괜찮지?”
친구들의 배려에 오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집은 여기서 꽤 멀다. 완전 반대방향에 있는 아파트와 주택에 사는 둘이 오이를 데려다줬다간 귀가 시간이 많이 늦어질 터였다.
“괜찮아. 오늘 너희들 짐도 많은데 얼른 가 봐. 날도 추워서 좀 그래.”
“감히 반장님의 호의를 무시하다니. 쳇, 알았어. 그럼 가기 전에 붕어빵 하나 먹고 가.”
재빨리 저 멀리 서 있는 포장마차를 가리키며 시우가 말하자, 그에 동의하듯 민병, 아니 병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나만 먹고 가자. 쏘는 건 반장님인 시우가 쏜다니까 걱정 말고.”
“뭐……. 뭐, 좋아. 특별히 오늘은 내가 쏜다. 대신 다음에는 민병, 네가 쏴라. 알겠지?”
낚였다는 표정으로 병하를 째려본 시우는 조용히 포장마차로 다가가서 오이의 손에 붕어빵을 하나 쥐여 주었다.
“얼마 전에 용돈 받았으니까 사 주는 거야. 아니면 국물도 없어. 후딱 처먹어.”
“아, 붕어빵 하나로 생색은 더럽게 내네.”
툭툭 쏘는 지적에 시우는 옆에 있던 어묵을 하나 집어 들고 그대로 병하의 입에 집어넣었다.
“셧업. 그냥 조용히 먹어라.”
***
붕어빵을 얻어먹고 둘과 헤어진 오이는 천천히 가파른 달동네의 오르막을 올라갔다. 등에 진 가방이 무겁기는 했지만 이걸 위해 돈을 보내 줬던 그분을 생각하니 무게감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확실한 날짜는 이미 기억나지 않았다.
열 살이 되던 무렵, 다른 아이들이 소풍을 갈 생각에 들떠 있을 때 조용히 선생님께 가서 못 가게 되었단 말을 꺼내야만 했다.
집안 사정도 사정이었지만 오이에게는 도시락을 싸 줄 사람도 없었고, 그날은 아버지가 오는 날이었다. 소풍 이야기만 나오면 바로 역정을 낼 것이 뻔했다. 그러자 오이의 말을 차분히 듣던 선생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고 내일 나오렴. 우리 학교를 지원해 주시는 분이 착한 오이한테 도움을 주기로 하셨어.”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소풍 날 나가 보니 정말로 오이에게 귀여운 가방과 새 옷, 그리고 맛있어 보이는 2단 도시락까지 주고 사라진 사람이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소풍에 가게 된 오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누가 이렇게 베풀어 줬는지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 그건 선생님도 잘 모르겠어.”
그 뒤, 오이 나름 그 사람을 찾으려고 했으나 겨우 얻은 정보는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듣기로는 교장 선생님과도 만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본인인지 대리로 온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8년간, 그 사람의 도움으로 간간이 소풍도 가고, 학교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더불어 공부를 잘하는 오이에게 힘내라며 장학금을 따로 주기까지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집세마저도 그 ‘키다리아저씨’가 수십 번을 내줬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오이의 할머니는 어떤 귀한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복 받을 거라며 눈물을 흘렸다.
“대체 어떤 분일까.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라 아줌마인가?”
오이의 친구인 병하와 시우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에 의심부터 했다. 하지만 몇 년 내내 아무 소식 없이 조용히 도와주기만 하는 모습에, 그들도 결국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며 좋은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으으, 춥다아.”
가방을 붙잡고 있던 손을 풀고 입김을 부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싸늘한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서로 어깨를 붙이고 앉은 조막만 한 판잣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야 간신히 1/3정도 올라왔다는 점에서 오이는 잠시 어깨가 뻐근해짐을 느꼈다.
이 부근은 넓은 공터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어서 오이에게는 조금 무서운 곳이었다. 가끔 어른끼리 패싸움이 날 때도 있었고, 고등학생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다가 시비를 거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항상 이쯤 되면 반 정도 되는 위치까지 한달음에 뛰어가곤 했다. 오이는 오늘도 작게 심호흡을 하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 짐을 들고 뛰기는 좀 싫은데…….”
조금 따뜻해진 손으로 뺨을 비비며 오이는 발에 힘을 주었다. 키가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이었지만 그만큼 몸이 가벼워서 뛰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찬바람을 마주하고 뛰기 시작하자 가방에 들어 있던 물건들이 달그닥 소리를 냈다.
주변에서 시끄럽다고 소리칠까 봐 겁이 난 오이는 가방을 앞으로 부둥켜안고 조심조심 빠르게 걸었다. 물론 큰 여행용 가방이라 쉽지 않았다. 흡사 작은 병아리가 커다란 달걀을 든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속으로 되뇌며 앞만 보고 걷던 오이는 마지막 돌아야 할 골목길 앞이 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다왔—”
하지만 안도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오이의 눈앞으로 커다란 검은 물체가 휙 튀어 나왔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흙투성이 후드티를 입은 남자가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큭…….”
1부 (1)
한국의 1월은 꽤 춥다. 저절로 입에서 하얀 입김이 술술 뿜어져 나올 정도로.
어느 오후, 달동네의 굽이진 골목에 선 남자는 눈앞에서 엉엉 우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작고 더러운 옷을 입은 아이는 이제 막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사내아이였다.
남자는 목에 매고 있던 체크무늬 버버리 목도리를 풀어서 아이의 목에 매 주었다. 따스함이 느껴지자 아이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두 눈은 퉁퉁 부었고, 추위 때문에 코까지 흘러내렸다. 남자는 제 옆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넘겨준 손수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잘 닦아 주었다.
입에 물었던 담배를 바닥으로 던져 신발로 비벼 끈 남자는 아이의 뺨을 양손으로 만져 보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뺨은 가엽게도 퉁퉁 얼어 있었다.
“뚝.”
“흑…… 흐흑, 윽…….”
“왜 울고 있지?”
“애들이, 울 엄마…… 울 엄마가 나쁘다고…… 돌 던지고, 끅…….”
“흠.”
짙은 브라운 골드의 눈동자가 아이의 몸에 있는 생채기로 시선을 던진다. 아이의 뒤에는 꽤 큼직한 돌들이 떨어져 있었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당장의 말만 들어도 이 아이가 어떤 상황에 처해서 이렇게 울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약간의 살기를 띄며 인상을 찌푸린 남자는 아이의 부스스한 검은 머리를 토닥였다.
“밥은?”
“아…… 아빠가 안 오셔서.”
“아빠는 어디 갔지?”
“자주 안 오셔요.”
아이가 작게 떨며 훌쩍거렸다. 무표정이지만 금빛을 띈 남자의 눈동자에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팔을 뻗어 아이를 살짝 품에 안고는 커다란 손으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기 새, 착하지? 그만 뚝.”
“저…… 전 아기 새 아니에요. 오이예요.”
“오이?”
“선우오이. 제 이름이에요. 할아부지가 지어 주셨어요.”
“흠, 삐약거리는 게 노란 아기 새 같은데.”
“네에?”
아이의 머리 위로 작은 물음표가 둥둥 뜨자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팔 안에 안긴 아이는 가여울 만큼 체구가 작고 말랐다.
“배고프지? 아기새, 뭐가 먹고 싶지?”
“저, 어…… 엄마, 엄마가 맛있는 거 사 주는 사람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맛없는 거 사 주세요.”
아이의 말을 들은 남자의 매끈한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품에 안은 아기새의 작은 심장박동이 코트 너머로 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럼 따뜻한 죽은 어때.”
그러자 아이의 고개가 두어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작은 수긍에 남자가 아이의 목에 얼굴을 기대고 웃었다. 껴안은 아이에게서는 낡은 가구 냄새 같기도 하고, 작은 동물의 포근한 냄새 같기도 한 것이 느껴졌다.
“테네일 님. 곧 사진영 님과의 약속 시간입니다.”
“전화로 두 시간 정도 늦는다고…… 아니다, 내가 하지.”
남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구불구불한 달동네 길을 내려갔다. 뒤따라오는 검은 양복의 덩치들이 일곱 명이나 있어서 꽤 눈에 띄었다. 아이는 남자와 검은 양복 무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남자의 손을 양손으로 꼭 움켜잡았다.
“음? 왜 그러지, 아기새?”
“무…… 무서워서…….”
살짝 찡그린 아이의 얼굴을 보던 남자는 손짓으로 약간 떨어져서 오라고 양복 무리에게 명령했다. 그들은 약간 곤혹스러워 보였지만 이내 보스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뒤로 물러나 천천히 걸었다.
“이젠 괜찮겠지?”
“응!”
아기새가 활짝 웃자 주변이 환하게 피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보기 드물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아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시내 입구에 위치한 죽집으로 가서 따뜻한 전복죽을 사 먹이고 커다란 사탕까지 쥐여 준 뒤에야 다시 아이를 데리고 달동네 입구로 걸어갔다.
“꼭 먹고 양치질해야 된다.”
“네!”
고소한 전복죽을 배불리 먹고, 커다란 사탕도 얻고, 푹신한 버버리 목도리까지 목에 두른 아이의 얼굴은 활짝 개어 있었다. 뺨에 상처를 입고 엉엉 울던 아까와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남자는 슬슬 원래 목적지로 향해야 했다. 그는 아쉬운 얼굴로 아이를 세워 놓고 몸을 숙였다.
“난 조금 있다가 다시 가 봐야 된다. 집까지 데려다줄까?”
“어…… 멀리 가요?”
“그래, 멀리.”
“아…….”
그러자 아이의 눈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으…….”
“이런.”
울기 직전인 아이 앞에서 남자의 안색이 굳어졌다. 고작 두 시간 정도 같이 있었을 뿐인데 그새 정이 든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런 식으로 함께 있어 준 사람이 거의 없었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아이를 놓고 가기에는 마음에 걸린다.
“뚝. 울면 여기에 버리고 간다?”
“아, 안 울게요!”
조금이라도 남자와 함께 있고 싶었는지 아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둥글둥글한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남자는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아이의 눈가를 닦아 주고 다시 일어나 손을 잡아 주었다.
차분히 아이의 손에 온기를 이어 준 뒤 짧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아기새, 15년…… 아니, 10년만. 기다려 주겠어?”
“10년이면 몇 밤 자야 돼요?”
“3650번 정도.”
“3…… 3…… 그러니까…….”
워낙 숫자가 크다 보니 아기새의 작은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어 봐도 쉽지 않았다. 아이가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본 남자는 큰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다시금 쓰다듬어 주었다. 혼자서‘삐약삐약’ 하는 모습이 상당히 볼만했다.
아이가 숫자를 세어 보려고 진땀을 흘리는 동안, 어느새 둘은 처음 만났던 장소에 도착했다. 아직까지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주먹만 한 돌들을 바라본 남자는 약간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없는 10년간, 이 아이가 또 다시 다치는 건 그로써 영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남의 가정사에 타인이 함부로 관여할 수 없는 한국의 특성상,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신이 아이의 일에 깊게 개입할 수도 없을 터였다.
“아저씨?”
“음? 왜 그러지?”
“3…… 3000……. 그만큼 자고 일어나면 또 볼 수 있어요?”
“아기새가 그동안 착하게 지내 준다면.”
아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흡족한 얼굴로 살짝 무릎을 굽혀서 시선을 맞추었다.
“약속하지. 아기새가 착한 아이로 3650일을 있어 준다면, 반드시 만나러 오겠다고.”
“응!”
활짝 웃는 아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고 연약한 아기새를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뚜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달동네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나타나 남자의 뒤에 바싹 붙었다.
“테네일 님. 약속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
크리스티안 S. 테네일은 어머니인 사진영을 만나러 한국으로 온 그날, 처음으로 작은 아기새를 만났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그는 아기새가 열여덟 살이 되는 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기새와 했던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너희들 빨리 줄 서! 선생님 오신단 말이야!”
평범한 제주도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이 제각기 학교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온다. 처음에는 또 제주도라며 불평을 잔뜩 했었지만 막상 다녀와 보니 그리 나쁘지는 않았는지 다들 표정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그중, 2학년 4반에 유난히 목소리가 큰 한 아이가 작은 몸으로 등에는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자신의 반 아이들을 모으고 있었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운동장의 끝에서 시시덕거리며 땅바닥에 낙서를 하던 아이들에게도 모두 들릴 정도였다.
“야, 오이야. 릴렉스라는 말도 모르냐? 귀청 떨어지겠다!”
“그럼 한 번에 좀 모여 주든가. 그보다 반장, 왜 부반장인 내가 애들을 모아야 되는 건데?”
“훗. 나는 반장이시다. 부반장은 그저 내 말에 잘 따라 주면 되는 거야. 알겠어?”
오이의 등을 큰 손으로 내려치며 당당하게 말하는 반장의 태도에, 뒤에서 다가오던 2학년 4반 젊은 여선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학기 초에 아이들이 뽑아 놓은 반장이 저 모양 저 꼴이라 좌절했는데, 전교에서 착하고 성실하기로 소문난 선우오이가 자진해서 부반장을 맡아 주니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야! 거기 너희들! 빨리 이리 와서 줄 서!”
입에서 입김이 훅훅 날 정도로 추웠으나 오이의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반장의 빈정거리는 태도에 힘을 얻었는지 운동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치며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데 힘썼다.
한창 때의 열여덟 살의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오이가 소리를 치며 모은 2학년 4반이 가장 빠르게 모여서 대열을 이루니 선생의 얼굴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 오이, 고마워. 선생님이 그래도 네 덕분에 편하네.”
“어! 선생님, 왜 저한테는 안 고마우신 건데요?”
“반장 이시우. 너는 놀지만 말고 애들 줄 서는 거나 빨리 바로 잡아.”
복슬거리는 오이의 검은 머리를 쓱쓱 쓰다듬던 선생님은 빈둥거리던 시우에게 반장다운 일을 떠넘기고 운동장을 쭉 둘러보았다. 척 봐도 자신이 맡은 4반이 1등으로 자리를 잡으니 왠지 콧대가 높아졌다.
“선생님 오늘 좋은 일 있으세요?”
“응? 아아, 우리 오이가 일을 잘해서 그래.”
이런 착실한 아이가 반에 하나만 더 있었으면 정말 편했을 텐데.
선생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어디 보자……. 애들 서른다섯 명 다 왔지? 조금 있다가 교장 선생님 말씀 듣고 가야 되니까 자리 이탈하지 말고. 거기 여학생들! 핸드폰 집어넣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운동장 중앙으로 교장 선생이 올라섰다. 이 추운 겨울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집에 바로 가면 될 아이들을 붙잡아 놓으려는 건지. 다들 얼른 집으로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아, 우리 제한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수학여행은 잘 다녀왔습니까?”
이제 긴 연설의 시작이다.
오이는 시린 손에 입김을 불며 인상을 살짝 구겼다. 적어도 20분을 꼭 넘겨야 직성이 풀리는 저 교장은 이미 전교생의 불만거리였다. 매번 마이크만 잡았다 하면 기본이 20분, 30분이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만도 했다.
빼곡히 줄 서 있는 아이들이 추위에 투덜거리자 교장의 입에서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설교가 더 길어질 거란 무언의 압박에 아이들은 투덜거리다 말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크흠, 그래서 제주도에 다녀온…….”
이미 반장인 시우는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조회대가 아닌 다른 곳을 보며 작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이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입김으로 손을 녹이며 목에 걸려 있는 포근한 목도리에 뺨을 가져갔다.
어릴 적,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주고 간 목도리. 세월이 10년이나 지난 지금, 요즘 나오는 다른 목도리들에 비하면 약간 촌스럽기도 하고, 때가 타기도 했지만 따뜻하기로는 이것만 한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미미하게 떠오르는 그 사람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었다.
‘약속하지. 착한 아이로 3650일을 있어 준다면, 반드시 만나러 오겠다고.’
그 이외의 말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이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여덟 살 때 들었던 말을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다니. 오이는 가만히 눈을 아래로 깔고 흐릿한 그 사람을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우선 커다란 키에 검은 코트. 그리고 반쯤 넘긴 검은 머리카락. 검은 선글라스.
“……? 어째 전부 검은색뿐이네.”
차갑게 언 뺨을 한 손으로 감싸서 녹이며 오이는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검은색, 남자, 큰 키, 그리고 목도리. 이것이 오이가 생각하는 그의 키워드였다.
“—이상으로 교장 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장장 30여 분 끝에 드디어 지긋지긋한 연설이 끝나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제각기 친구들과 몰려 집으로 향했다. 선생님에게 인사를 건넨 오이는 짐을 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학생에게 다가갔다.
“오이야, 이제 끝났어?”
“응, 얼른 가자. 벌써 7시네.”
“아, 대체 무슨 말이 저렇게 많은지……. 추워 죽는 줄 알았어.”
머리를 짧고 단정하게 정리한 키 작은 남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짜증을 표시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반장 시우도 조금 전의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파카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 나라면 추워서 그냥 보내 주겠다. 안 그래, 오이야?”
“이름 좀 그만 부르라니까.”
“오이니까 오이라고 하지. 그럼 가지라고 부르리?”
한적한 도로변을 따라 걸으며 시우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오이를 놀려 대었다.
“그러고 보니 오이, 네 키다리 아저씨는 대체 누구야? 빨리 말 안 하면 뒷조사 들어간다?”
“나도 몰라. 여자 분이시라는데 얼굴은 한 번도 못 봤어.”
“그래도 다행이네. 그런 사람이 있어서.”
그때 키가 작은 남학생이 뻔질거리는 시우의 뒤통수를 강하게 치며 둘의 중간에 끼어들었다. 시우의 외마디 비명에, 화를 내기 직전이었던 오이의 표정이 조금은 나아졌다.
“응, 정말 다행이지.”
“이씨! 야! 민병! 왜 머리를 치고 지랄이야! 감히 반장님의 소중한 두뇌를 손상시키다니!”
“거 좀 닥쳐라. 지금 주우웅요한 이야기 중이잖아. 안 그래, 오이야?”
민병이라고 불린 남학생은 연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시우의 목덜미에 가볍게 팔을 걸어서 흔들었다. 헤드락에 걸린 시우는 팔을 휘두르며 빠져나오려고 별짓을 다 했고, 오이는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아, 젠장. 어릴 땐 내가 최고였는데. 이 자식 많이 컸어.”
“아니꼬우면 너도 걸어 보든가.”
“쳇, 잘난 척은……. 어? 저기 건물 드디어 완성됐나 보네.”
시끌벅적하게 길을 걸어가던 셋은 시내 부근에 세워진 커다란 10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부들이 왔다 갔다 움직이고, 천막으로 가려 놨던 건물이었는데, 어느새 완공이 되어서 유리창에는 하얀 테이프로 엑스 자가 크게 붙어 있었다.
“정말이네? 이거 대체 뭐 하려고 지은 걸까? 시내 부근이긴 한데 여기는 장사 잘 안 될 텐데.”
“아냐, 보통 이런 건물은 장사가 아니라 사무실로 쓴다고. 애초에 상가 목적 건물은 대체로 낮게 짓는 거 몰랐냐?”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이는 가만히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어둑어둑해져 가는 하늘 빛깔과 비슷한 색상인 건물은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반짝이는 유리나, 그 너머로 보이는 대리석 같은 타일들이 TV에서나 보던 호텔처럼 으리으리했다.
“사무실치곤 좀 고급스럽지 않나? 혹시 호텔이나 뭐 그런 거 아닐까?”
“호텔은 아닌 거 같아. 모양새가 조금…… 딱딱한걸.”
나직한 오이의 반론에 시우는 그것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건물은 나중에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들어오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그보다 우리 집에 가기 전에 떡볶이 먹을까? 아니면 오뎅도 좋은데.”
“아, 미안. 나 오늘은 좀 일찍 가 봐야 돼.”
“오이, 집에 무슨 일 있어?”
달동네 언덕 위쪽에 사는 오이가 일찍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뭔가 일이—아버지가 오랜만에 돌아와 술 먹고 오이를 때린다거나 하는— 터지곤 했다. 그걸 아는 둘의 표정이 굳어 가자 오이는 얼른 손을 흔들며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오늘은 할머니 오시는 날이야. 아빠는 다음 주에나 오신대.”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럼 우리가 입구까지 데려다줄게. 괜찮지?”
친구들의 배려에 오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집은 여기서 꽤 멀다. 완전 반대방향에 있는 아파트와 주택에 사는 둘이 오이를 데려다줬다간 귀가 시간이 많이 늦어질 터였다.
“괜찮아. 오늘 너희들 짐도 많은데 얼른 가 봐. 날도 추워서 좀 그래.”
“감히 반장님의 호의를 무시하다니. 쳇, 알았어. 그럼 가기 전에 붕어빵 하나 먹고 가.”
재빨리 저 멀리 서 있는 포장마차를 가리키며 시우가 말하자, 그에 동의하듯 민병, 아니 병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나만 먹고 가자. 쏘는 건 반장님인 시우가 쏜다니까 걱정 말고.”
“뭐……. 뭐, 좋아. 특별히 오늘은 내가 쏜다. 대신 다음에는 민병, 네가 쏴라. 알겠지?”
낚였다는 표정으로 병하를 째려본 시우는 조용히 포장마차로 다가가서 오이의 손에 붕어빵을 하나 쥐여 주었다.
“얼마 전에 용돈 받았으니까 사 주는 거야. 아니면 국물도 없어. 후딱 처먹어.”
“아, 붕어빵 하나로 생색은 더럽게 내네.”
툭툭 쏘는 지적에 시우는 옆에 있던 어묵을 하나 집어 들고 그대로 병하의 입에 집어넣었다.
“셧업. 그냥 조용히 먹어라.”
붕어빵을 얻어먹고 둘과 헤어진 오이는 천천히 가파른 달동네의 오르막을 올라갔다. 등에 진 가방이 무겁기는 했지만 이걸 위해 돈을 보내 줬던 그분을 생각하니 무게감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확실한 날짜는 이미 기억나지 않았다.
열 살이 되던 무렵, 다른 아이들이 소풍을 갈 생각에 들떠 있을 때 조용히 선생님께 가서 못 가게 되었단 말을 꺼내야만 했다.
집안 사정도 사정이었지만 오이에게는 도시락을 싸 줄 사람도 없었고, 그날은 아버지가 오는 날이었다. 소풍 이야기만 나오면 바로 역정을 낼 것이 뻔했다. 그러자 오이의 말을 차분히 듣던 선생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고 내일 나오렴. 우리 학교를 지원해 주시는 분이 착한 오이한테 도움을 주기로 하셨어.”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소풍 날 나가 보니 정말로 오이에게 귀여운 가방과 새 옷, 그리고 맛있어 보이는 2단 도시락까지 주고 사라진 사람이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소풍에 가게 된 오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누가 이렇게 베풀어 줬는지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 그건 선생님도 잘 모르겠어.”
그 뒤, 오이 나름 그 사람을 찾으려고 했으나 겨우 얻은 정보는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듣기로는 교장 선생님과도 만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본인인지 대리로 온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8년간, 그 사람의 도움으로 간간이 소풍도 가고, 학교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더불어 공부를 잘하는 오이에게 힘내라며 장학금을 따로 주기까지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집세마저도 그 ‘키다리아저씨’가 수십 번을 내줬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오이의 할머니는 어떤 귀한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복 받을 거라며 눈물을 흘렸다.
“대체 어떤 분일까.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라 아줌마인가?”
오이의 친구인 병하와 시우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에 의심부터 했다. 하지만 몇 년 내내 아무 소식 없이 조용히 도와주기만 하는 모습에, 그들도 결국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며 좋은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으으, 춥다아.”
가방을 붙잡고 있던 손을 풀고 입김을 부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싸늘한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서로 어깨를 붙이고 앉은 조막만 한 판잣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야 간신히 1/3정도 올라왔다는 점에서 오이는 잠시 어깨가 뻐근해짐을 느꼈다.
이 부근은 넓은 공터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어서 오이에게는 조금 무서운 곳이었다. 가끔 어른끼리 패싸움이 날 때도 있었고, 고등학생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다가 시비를 거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항상 이쯤 되면 반 정도 되는 위치까지 한달음에 뛰어가곤 했다. 오이는 오늘도 작게 심호흡을 하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 짐을 들고 뛰기는 좀 싫은데…….”
조금 따뜻해진 손으로 뺨을 비비며 오이는 발에 힘을 주었다. 키가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이었지만 그만큼 몸이 가벼워서 뛰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찬바람을 마주하고 뛰기 시작하자 가방에 들어 있던 물건들이 달그닥 소리를 냈다.
주변에서 시끄럽다고 소리칠까 봐 겁이 난 오이는 가방을 앞으로 부둥켜안고 조심조심 빠르게 걸었다. 물론 큰 여행용 가방이라 쉽지 않았다. 흡사 작은 병아리가 커다란 달걀을 든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속으로 되뇌며 앞만 보고 걷던 오이는 마지막 돌아야 할 골목길 앞이 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다왔—”
하지만 안도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오이의 눈앞으로 커다란 검은 물체가 휙 튀어 나왔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흙투성이 후드티를 입은 남자가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