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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inum wolf x Baby bird 2화
1부 (2)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한 오이는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주변을 둘러보자 아까 남자가 날아왔던 방향에서 또 다른 사람이 튀어 나와 오이의 발아래 처박혔다.
“커억!”
이번에도 별다를 바 없는 복장의 아저씨였다. 황당한 눈빛으로 남자를 보던 오이는 건너편에 있는 벽에 딱 달라붙었다. 그리고 가방을 더 꽉 껴안은 채 덜덜 떨며 주위를 살폈다.
대체 왜, 이 시간에, 이 장소에, 이런 사람들이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골목 너머에서 날아오는지, 도저히 오이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아아악!”
세 번째 사람까지 그대로 날아와서 뻗어 버리자 오이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조폭들의 패싸움.
“히, 히이…….”
커다란 가방을 마치 인형처럼 껴안고 주저앉은 오이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잘못하다간 자신도 걸려서 죽도록 맞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오이가 가엾게 떨고 있을 때, 남자들이 날아왔던 곳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녁인 데다가 날이 어두워서 오이의 눈에는 그 사람의 검은 구두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가방에 얼굴을 파묻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은 오이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린 채 떨고만 있자, 갑자기 둔탁하게 뚜벅거리는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조그맣게 실눈을 뜨고 앞을 살폈다. 어느새 자신의 근처까지 와 있는 검은 구두에 오이는 헛숨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이대로 저 커다란 구둣발에 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껏 12년간 이곳에서 탈 없이 살아왔는데 이런 살벌한 곳에서 딱 걸리다니.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러나 오이의 곁에 선 남자는 그런 반응에 놀랐는지 가만히 자리에 몸을 숙이고 앉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오이가 어깨를 움츠리자 드디어 남자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아기새?”
중후한 향수 냄새와 미세한 담배 냄새가 섞인 남자의 향에, 마음이 어느 정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오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범벅이 돼서 앞이 흐려졌으나 조용히 눈 밑을 닦아 주는 커다랗고 따뜻한 손 덕분에 조금씩 시야가 깨끗해졌다.
“어……?”
왠지 이 상황, 어디에서 많이 겪은 것 같았다. 기시감을 느낀 오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자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다.
“왜 울고 있지?”
“…….”
검은 선글라스, 검은 머리카락, 검은 코트에 검은 넥타이.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익숙한 향수 냄새.
“넌 늘 만날 때마다 울고 있군.”
그리고 눈 밑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는 크고 따뜻한 손.
“아저씨?”
정확히 약속으로부터 10년 후, 오이는 다시 자신을 ‘아기새’라고 부르는 아저씨와 재회하게 되었다.
***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은 오이의 허리를 안아서 일으켜 주었다. 품에 안고 있던 가방을 가져가 자신의 어깨에 메고, 엉덩이에 묻은 먼지도 털어 주었다. 10년이 지났으니 그때보다 꽤 컸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이는 여전히 또래보다 더 작았다.
대체 집에서 뭘 먹으며 자라기에 이리도 안 크는지. 그는 속으로 도시락도 이젠 직접 싸서 보내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때, 그 아저씨 맞죠? 그렇죠?”
대답 대신 그는 손으로 반쯤 풀려 있던 아기새의 목도리를 다시 매어 주었다. 시간이 10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히 잊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걸 보니 조금 기뻤다.
대충 옷매무새를 고치자 한시름 덜었는지 그의 무뚝뚝한 입에 미소가 걸린다.
“집까지 데려다주지.”
어깨에 가방을 맨 채로 몸을 숙인 그는 조심스럽게 아기새를 품에 안아 들었다. 오이는 깜짝 놀라서 그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예전과 같은 포근한 냄새가 났다.
“어, 어?!”
“밥은?”
“버, 버스에서 먹었어요.”
“그래.”
그가 작은 아기새의 등을 토닥이자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몇 무리의 남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늘 누구에게나 차갑게 구는 보스의 색다른 모습에 모두 놀란 모습이었다.
그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을 이제야 봤는지 오이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하나같이 어깨가 넓은 떡대에 싸움깨나 하게 생긴 얼굴, 거기에 같은 매장에서 단체로 샀는지 죄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문득 예전 기억을 떠올린 남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도 저걸 무서워했었지. 여기서 기다려라. 데려다주고 곧 돌아올 테니.”
그리고 그는 아기새의 보금자리로 걸어갔다. 품에 안겨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작은 아기새가 삐약거리는 것 같아서 귀엽기만 했다.
오이는 점차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기억을 되짚으며 그가 누군지 추리했다. 당장은 당혹스러워서 기억을 떠올리기 쉽지 않았으나, 이내 머릿속에 끼어 있던 안개가 걷히는 느낌과 함께 그에 대한 것을 천천히 떠올랐다. 황급히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그때 그 검은 아저씨 맞죠? 그렇죠?”
“크리스.”
“크리스?”
“그게 내 이름이다.”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 그는 품에 있는 아기새를 다시 한 번 고쳐 안고 오르막을 올라갔다. 등에 있는 가방도, 아기새의 몸무게도 다른 사람이라면 무겁다는 말이 나올 법도 했지만 크리스에게는 너무나 가벼웠다.
한편, 정말로 10년 후에 자신을 도와줬던 아저씨를 만난 오이의 얼굴은 환하게 피어 있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를 한 모습인 데다가 방금 봤던 모습 때문에 약간 무섭기는 했지만, 상냥하게 자신을 토닥이는 손이라거나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보니 예전의 흐릿한 과거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죽을 먹을 때 휴지로 입을 닦아 주던 모습이나, 손을 잡고 천천히 여덟 살 오이의 보폭에 맞춰서 걸어 줬던 모습. 그리고 가야 한다는 말에 자신이 울음을 터뜨리려 하자 안쓰러움이 가득 담은 채 응시해 오던 골드 브라운 눈동자.
시간은 지났지만 분명 자신이 알던 그 아저씨가 확실했다.
“자.”
자신의 걸음으로는 10분도 더 걸리는 거리를 5분 만에 도착했다. 땅에 다리가 닿자 오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크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머리카락, 검은 코트에 하얀 목도리.
누가 봐도 완벽히 조폭을 떠올리게 하는 차림새였다. 아마 어릴 적에 만났던 기억이 없었더라면 오이는 아저씨를 수상한 사람이라고—안 그래도 흉흉한 세상에다가 언제 재개발 지역으로 밀릴지 모르는 달동네라서— 오해했을 것이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손히 고개를 꾸벅 숙이는 오이를 보며 크리스는 다시 한번 삐약거리는 작고 노란 아기새를 연상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저절로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잠시 주머니를 뒤진 크리스는 품에서 하얀 쪽지를 꺼내서 아기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게 뭐예요?”
“주소.”
오이의 폭신한 머리를 손으로 쓱쓱 쓰다듬자 눈을 꼭 감는 게 참 귀엽다. 거기에 두 손에 쪽지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라니.
“그럼.”
집 안에 있는 가족들이 나올까 봐 크리스는 대충 아기새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만 보고 달동네의 삭막한 골목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렇게 10년 전처럼 검은 코트를 나풀거리며 아저씨가 사라지자 오이는 고개를 들고 조심조심 종이를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전화번호와 세세하게 손으로 그린 어느 빌딩의 약도, 그리고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아? 우리 학교에서 많이 안 떨어져 있네.”
정확히 말하자면 오이의 집과 학교 딱 중간이다. 이 정도라면 따로 찾아가지 않고, 집에 가다가 들르는 느낌으로 가면 좋을 것 같다. 쪽지를 주머니에 잘 챙겨 넣으며 이틀 뒤 토요일에 찾아가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오이는 불이 들어와 있는 단칸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이. 저 왔어요!”
“어이구! 우리 강아지! 이제 왔어?”
방바닥을 걸레로 닦으며 작은 TV로 연속극을 보던 할머니가 반갑게 손자를 끌어안았다.
할머니에게 안겨 있던 오이는 가방을 풀어서 샀던 효자손을 선물로 드린 뒤, 입었던 옷들을 빨기 위해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 제주도는 재미있었어? 우리 강아지.”
“응! 엄청 재미있었어요. 나중에 제가 돈 벌면 할머니도 꼭 보내 줄게요.”
“그려……. 이 할미는 우리 강아지가 보내 주길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
아들은 망나니로 컸지만 손자만큼은 착하게 자라 주었다. 할머니는 유난히 오이를 예뻐했다. 심지어 학교에선 모범생, 행실이 바르고 성격도 유순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다.
“할미가 우리 손주 먹을 반찬 싸서 냉장고에 넣어 놨으니까 아침은 꼭 먹고 나가야 한다. 알았지?”
“응! 그럴게요. 정말 고마워요, 할머니.”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잊지 않은 오이는 방문을 열고 나가 옷들을 대야에 담아 놓았다. 잠깐 나가 있었다고 그새 시린 손을 비비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와중에 아저씨가 준 쪽지도 단단하게 챙겨 두었다.
주섬주섬 짐이며 가방을 똑 부러지게 정리하고 있으려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할머니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휴, 우리 오이가 고생이구나. 그놈의 못난 아비 때문에…….”
“에이, 할머니. 이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그 좋은 분도 계시고 할머니도, 친구들도 있는데요 뭘.”
늘 오기만 하면 술을 내놓으라며 소리를 치고, 이미 집을 나간 오이의 엄마를 욕하고, 할머니가 안 오시기라도 하면 오이를 때리기도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오이는 단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았다. 단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가엾고 무서웠을 뿐.
“에휴. 할미는 오이가 있어서 좀 더 살아야겠다. 우리 오이가 참한 아가 데리고 오기 전까진 눈 뜨고 있어야 해. 암, 그렇고말고.”
할머니의 푸념에 오이는 그저 웃었다. 아직 자신이 결혼하려면 10년은 더 남았는데 벌써 신부 이야기라니.
게다가 할머니에게는 죄송하지만 오이는 결혼이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술주정꾼이다. 아무리 좋은 직장, 좋은 성격을 가져도 집안이 이 모양이면 다 소용이 없다.
할머니와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잘 시간이 되었다. 오이는 그제야 내일 있을 수업에 쓸 문제집을 사야 하는 걸 떠올렸다. 잠깐 제주도에 다녀오느라 잊고 있었는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되니 잠시 미루어 두었던 현실이 고개를 들이밀며 오이에게 걱정을 안겨 주었다.
“아…… 문제집, 어쩌지.”
이미 할머니는 잠들었고 이번 달 보조금으로 나온 돈은 아버지가 들고 도망쳐 버렸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문제집은 옆 반인 병하에게 빌리기로 했다. 오이는 조용히 책가방을 챙겼다.
이럴 때는 돈이라는 게 약간 원망스럽다.
***
“자, 여기.”
“고마워. 오늘 내로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게.”
“괜찮아. 천천히 쓰고 내일 2교시 전에 줘.”
2반의 병하는 우울한 오이의 얼굴을 보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어쩌다 그런 부모를 만나서 고생인지, 보는 쪽이 더 안쓰럽다.
병하에게서 빌린 문제집을 품에 안고 가던 오이는 갑자기 들려오는 교내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시우는 보통 쉬는 시간이면 자기 반에 없으니 교무실에서 반장을 찾는 호출이라도 떨어지면 오이가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이의 예상과는 달리, 방송에서 찾는 것은 시우가 아니었다.
『2학년 4반 선우오이 학생. 지금 바로 교무실로 오세요. 다시 한번 방송합니다. 2학년 4반의 선우오이 학생은 지금 바로 교무실로 오세요. 외부 손님이 있습니다.』
“어? 나?”
기껏해야 전체 방송이나 반장들을 모으는 방송인 줄로만 알았던 오이는 처음 겪은 상황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을 찾는 외부 손님이라니.
설마 아버지가 학교까지 온 건가 하는 생각에 오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제발 행패만은 부리지 말아야 할 텐데. 신경을 쓰는 동안 배가 조금씩 아파 왔다.
이제껏 아버지가 학교까지는 찾아온 적이 없었지만, 간혹 여기를 들먹이며 협박을 한 적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오이의 얼굴이 절로 창백하게 질렸다.
한달음에 뛰어가 다 닳은 검은 삼선 슬리퍼를 신고 교무실 앞을 두리번거리니 안에서 선생님들이 몇 분 모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조용히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유난히 큰 키를 가진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이 선생님들의 중앙에 우뚝 서서 오이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저, 영어 선생님. 아까 방송 듣고 왔는데요. 손님은 어디 계세요?”
“아, 오이 학생.”
오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코트를 입은 남자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코트, 검은 양복. 어제와 디자인만 바뀌었을 뿐인 검은색 옷들을 몸에 걸친 그는 빠른 걸음으로 오이에게 다가왔다.
그제야 오이는 그 손님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하얗게 떴던 얼굴에 기쁜 표정을 띄우며 황급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크리스 아저씨! 안녕하세요.”
자신의 작은 아기새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돌려준 크리스는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사각 주머니를 넘겨주었다. 꽤나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가 손 위에 올라오자 오이는 한 손에는 친구의 이름이 적힌 문제집을, 한 손에는 주머니를 들고 크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이건 뭐예요?”
“도시락. 점심 전이겠지?”
“도시락이요?”
평소 급식을 먹기 때문에, 도시락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오이의 표정에 크리스는 슬쩍 위 아래로 눈을 움직였다. 어제도 그랬지만 여전히 또래에 비해 키가 작고 말랐다. 대답 대신 머리를 쓰다듬자 오이는 어제처럼 또 눈을 꼭 감고 가만히 서 있다.
“저, 이 학생의 보호자 되십니까?”
둘의 모습에 궁금해하던 선생님들 중, 그나마 가장 행동력 있던 국어 선생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봐도 조폭 보스 내지는 악명 높은 사채업자로—진한 검은색 선글라스를 썼으니 얼굴이 잘 보이질 않고 인상도 더러워 보였다— 보이는데 갑자기 학교로 찾아와서 넘겨주는 게 도시락이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그게 맞다는 듯 오이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고, 선생들은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하기 그지없었지만, 본인과 학생이 그렇다는데 조폭이 애한테 무슨 짓을 했냐고 계속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선생님들도 더 아무 말을 하지 못하자 크리스는 오이를 데리고 교무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문을 닫고 슬며시 옆을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 아기새의 감사가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을게요.”
복도로 나와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면서 오이는 묵직한 도시락에 싱글벙글 웃었다. 늘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학교에서 주는 급식을 먹는 게 보통이었기에, 이렇게 학교에서 도시락을 먹는 건 꽤 오래간만이었다.
기대감에 부푼 오이가 기쁘게 웃는 사이, 복도에서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외부인의 수상한 모습에 다들 어쩔 줄 몰라 했다. 키도 동양인 같지 않게 큰 데다가 온통 검은색 일색이다 보니 저절로 시선을 모으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보내는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걸어가던 크리스는 우연히 고개를 숙이다가 아기새의 허름한 슬리퍼를 보았다. 그 즉시 옆에서 걷는 오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네?”
“신발부터 다시 사야겠군.”
“아? 슬리퍼요? 괜찮아요. 압정 꽂아 놓고 실로 꿰매면 꽤 오래가요.”
“바로 도시락 안에 넣어 놓고 나와.”
“그, 그렇지만 수업이…….”
쉬는 시간은 달랑 10분. 3교시 수업까지 1분밖에 남지 않았다. 난처한 아기새의 표정에 크리스의 시선이 이번엔 손에 들고 있는 문제집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오이의 이름대신 친구인 병하의 이름이 크게 써져 있었다.
“문제집도 빌린 건가.”
“네? 아…… 그, 아직 사지를 못했어요.”
이쯤 되니 오이는 아저씨 앞에 있는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10년 만에 만났으니 이런 모습은 되도록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어쩔 수가 없다. 일단 넘기자는 생각에 오이는 품에 안긴 문제집을 슬쩍 뒤로 숨기고 어색하게 웃었다.
“곧 살 거예요. 오늘은 제가 깜박 잊어먹고 나와서 그래요.”
아기새의 어색한 태도에서 거짓임을 눈치챈 크리스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문제집을 살 돈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집세만 보조해 줬건만. 그 아버지라는 작자는 나라에서 나오는 보조금까지 다 가져가는 모양이다.
보고를 들을 때마다 쓰레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기새의 아버지가 아닌 완전한 타인이었으면 어떻게 해서든 손을 썼을 텐데.
오이는 얼굴을 굳히고 있는 크리스와 그 뒤에서 자신을 의아한 시선으로 보는 선생님 사이에서 난처해했다. 수업 때문에 교실로 들어가긴 해야 하는데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수업을 위해 교실로 가고 있던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이와 크리스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오이? 여기서 뭐 하고 있니?”
“아, 선생님.”
오이가 우물쭈물하며 손끝을 만지작거리자, 크리스는 조용히 몸을 돌려서 선생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선우오이 학생의 보호자입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실은 집안일로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러니 10분 정도만 양해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봐도 수상한 남자의 모습에 말을 듣고 있던 선생님이 조금 의심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가, 괜찮냐는 듯 오이를 보았다. 정말 보호자냐고 묻는 게 분명한 시선이었다. 오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로 긍정의 고갯짓을 했다.
거기까지 확인이 끝나니 더 캐물을 수도 없는지라, 선생은 조금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크리스에게 짧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10분 뒤에는 꼭 돌려보내 주세요.”
“서, 선생님…….”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말고. 오늘 수업은 꽤 중요하니까.”
시원스레 사라진 선생님 덕에 그대로 복도에 남은 크리스와 오이는 서로 마주보다가, 조용히 문구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색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간 운동장은 무척 조용했다. 오늘따라 체육 수업도 없는 모양인지, 운동장에 서 있는 건 오이와 크리스뿐이었다. 그 광경 자체가 오이에게 있어서는 꽤 드문 일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시간에 여기 있으니까 왠지 이상해요.”
“그런가.”
“항상 수업 듣고 있는 시간이니까……. 아?”
“무거울 테니 맡아 두도록 하지.”
오이의 손에서 무거운 도시락을 가져간 크리스는 붉게 변한 아기새의 손을 잡았다. 피부가 하얗다 보니 무거운 짐을 잠깐 들었을 뿐인데도, 손가락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편 오이는 자신의 손을 잡은 크리스의 손 크기에 놀랐다. 당장 보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제대로 붙잡아 보니 그의 손가락 길이나 크기는 오이보다 훨씬 큰 편이었다.
“우와, 손이 엄청 크시네요.”
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다정하게 손도 잡아 주고, 도시락도 챙겨 주고, 준비물도 같이 사러 가고. 오이는 나란히 옆에서 걸어가는 아저씨에게 조용히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는 사이 크리스는 뭔가 생각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는 듯 오이의 손을 잡은 채 하나씩 내뱉기 시작했다.
“필요한 건 문제집, 슬리퍼. 또 뭐가 있지?”
“네? 아, 아니에요.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필기도구나 공책은?”
“그…….”
그러고 보니 공책도 다 떨어져서 전에 학교 앞에서 공짜로 받은 홍보용 노트를 쓰고 있었다. 하나같이 부족한 것들뿐인지라 진땀이 났다. 어색하게 삐약거리는 아기새를, 크리스는 조용히 문구점 앞으로 끌고 갔다.
1부 (2)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한 오이는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주변을 둘러보자 아까 남자가 날아왔던 방향에서 또 다른 사람이 튀어 나와 오이의 발아래 처박혔다.
“커억!”
이번에도 별다를 바 없는 복장의 아저씨였다. 황당한 눈빛으로 남자를 보던 오이는 건너편에 있는 벽에 딱 달라붙었다. 그리고 가방을 더 꽉 껴안은 채 덜덜 떨며 주위를 살폈다.
대체 왜, 이 시간에, 이 장소에, 이런 사람들이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골목 너머에서 날아오는지, 도저히 오이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아아악!”
세 번째 사람까지 그대로 날아와서 뻗어 버리자 오이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조폭들의 패싸움.
“히, 히이…….”
커다란 가방을 마치 인형처럼 껴안고 주저앉은 오이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잘못하다간 자신도 걸려서 죽도록 맞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오이가 가엾게 떨고 있을 때, 남자들이 날아왔던 곳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녁인 데다가 날이 어두워서 오이의 눈에는 그 사람의 검은 구두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가방에 얼굴을 파묻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은 오이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린 채 떨고만 있자, 갑자기 둔탁하게 뚜벅거리는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조그맣게 실눈을 뜨고 앞을 살폈다. 어느새 자신의 근처까지 와 있는 검은 구두에 오이는 헛숨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이대로 저 커다란 구둣발에 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껏 12년간 이곳에서 탈 없이 살아왔는데 이런 살벌한 곳에서 딱 걸리다니.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러나 오이의 곁에 선 남자는 그런 반응에 놀랐는지 가만히 자리에 몸을 숙이고 앉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오이가 어깨를 움츠리자 드디어 남자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아기새?”
중후한 향수 냄새와 미세한 담배 냄새가 섞인 남자의 향에, 마음이 어느 정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오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범벅이 돼서 앞이 흐려졌으나 조용히 눈 밑을 닦아 주는 커다랗고 따뜻한 손 덕분에 조금씩 시야가 깨끗해졌다.
“어……?”
왠지 이 상황, 어디에서 많이 겪은 것 같았다. 기시감을 느낀 오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자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다.
“왜 울고 있지?”
“…….”
검은 선글라스, 검은 머리카락, 검은 코트에 검은 넥타이.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익숙한 향수 냄새.
“넌 늘 만날 때마다 울고 있군.”
그리고 눈 밑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는 크고 따뜻한 손.
“아저씨?”
정확히 약속으로부터 10년 후, 오이는 다시 자신을 ‘아기새’라고 부르는 아저씨와 재회하게 되었다.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은 오이의 허리를 안아서 일으켜 주었다. 품에 안고 있던 가방을 가져가 자신의 어깨에 메고, 엉덩이에 묻은 먼지도 털어 주었다. 10년이 지났으니 그때보다 꽤 컸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이는 여전히 또래보다 더 작았다.
대체 집에서 뭘 먹으며 자라기에 이리도 안 크는지. 그는 속으로 도시락도 이젠 직접 싸서 보내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때, 그 아저씨 맞죠? 그렇죠?”
대답 대신 그는 손으로 반쯤 풀려 있던 아기새의 목도리를 다시 매어 주었다. 시간이 10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히 잊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걸 보니 조금 기뻤다.
대충 옷매무새를 고치자 한시름 덜었는지 그의 무뚝뚝한 입에 미소가 걸린다.
“집까지 데려다주지.”
어깨에 가방을 맨 채로 몸을 숙인 그는 조심스럽게 아기새를 품에 안아 들었다. 오이는 깜짝 놀라서 그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예전과 같은 포근한 냄새가 났다.
“어, 어?!”
“밥은?”
“버, 버스에서 먹었어요.”
“그래.”
그가 작은 아기새의 등을 토닥이자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몇 무리의 남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늘 누구에게나 차갑게 구는 보스의 색다른 모습에 모두 놀란 모습이었다.
그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을 이제야 봤는지 오이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하나같이 어깨가 넓은 떡대에 싸움깨나 하게 생긴 얼굴, 거기에 같은 매장에서 단체로 샀는지 죄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문득 예전 기억을 떠올린 남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도 저걸 무서워했었지. 여기서 기다려라. 데려다주고 곧 돌아올 테니.”
그리고 그는 아기새의 보금자리로 걸어갔다. 품에 안겨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작은 아기새가 삐약거리는 것 같아서 귀엽기만 했다.
오이는 점차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기억을 되짚으며 그가 누군지 추리했다. 당장은 당혹스러워서 기억을 떠올리기 쉽지 않았으나, 이내 머릿속에 끼어 있던 안개가 걷히는 느낌과 함께 그에 대한 것을 천천히 떠올랐다. 황급히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그때 그 검은 아저씨 맞죠? 그렇죠?”
“크리스.”
“크리스?”
“그게 내 이름이다.”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 그는 품에 있는 아기새를 다시 한 번 고쳐 안고 오르막을 올라갔다. 등에 있는 가방도, 아기새의 몸무게도 다른 사람이라면 무겁다는 말이 나올 법도 했지만 크리스에게는 너무나 가벼웠다.
한편, 정말로 10년 후에 자신을 도와줬던 아저씨를 만난 오이의 얼굴은 환하게 피어 있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를 한 모습인 데다가 방금 봤던 모습 때문에 약간 무섭기는 했지만, 상냥하게 자신을 토닥이는 손이라거나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보니 예전의 흐릿한 과거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죽을 먹을 때 휴지로 입을 닦아 주던 모습이나, 손을 잡고 천천히 여덟 살 오이의 보폭에 맞춰서 걸어 줬던 모습. 그리고 가야 한다는 말에 자신이 울음을 터뜨리려 하자 안쓰러움이 가득 담은 채 응시해 오던 골드 브라운 눈동자.
시간은 지났지만 분명 자신이 알던 그 아저씨가 확실했다.
“자.”
자신의 걸음으로는 10분도 더 걸리는 거리를 5분 만에 도착했다. 땅에 다리가 닿자 오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크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머리카락, 검은 코트에 하얀 목도리.
누가 봐도 완벽히 조폭을 떠올리게 하는 차림새였다. 아마 어릴 적에 만났던 기억이 없었더라면 오이는 아저씨를 수상한 사람이라고—안 그래도 흉흉한 세상에다가 언제 재개발 지역으로 밀릴지 모르는 달동네라서— 오해했을 것이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손히 고개를 꾸벅 숙이는 오이를 보며 크리스는 다시 한번 삐약거리는 작고 노란 아기새를 연상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저절로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잠시 주머니를 뒤진 크리스는 품에서 하얀 쪽지를 꺼내서 아기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게 뭐예요?”
“주소.”
오이의 폭신한 머리를 손으로 쓱쓱 쓰다듬자 눈을 꼭 감는 게 참 귀엽다. 거기에 두 손에 쪽지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라니.
“그럼.”
집 안에 있는 가족들이 나올까 봐 크리스는 대충 아기새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만 보고 달동네의 삭막한 골목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렇게 10년 전처럼 검은 코트를 나풀거리며 아저씨가 사라지자 오이는 고개를 들고 조심조심 종이를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전화번호와 세세하게 손으로 그린 어느 빌딩의 약도, 그리고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아? 우리 학교에서 많이 안 떨어져 있네.”
정확히 말하자면 오이의 집과 학교 딱 중간이다. 이 정도라면 따로 찾아가지 않고, 집에 가다가 들르는 느낌으로 가면 좋을 것 같다. 쪽지를 주머니에 잘 챙겨 넣으며 이틀 뒤 토요일에 찾아가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오이는 불이 들어와 있는 단칸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이. 저 왔어요!”
“어이구! 우리 강아지! 이제 왔어?”
방바닥을 걸레로 닦으며 작은 TV로 연속극을 보던 할머니가 반갑게 손자를 끌어안았다.
할머니에게 안겨 있던 오이는 가방을 풀어서 샀던 효자손을 선물로 드린 뒤, 입었던 옷들을 빨기 위해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 제주도는 재미있었어? 우리 강아지.”
“응! 엄청 재미있었어요. 나중에 제가 돈 벌면 할머니도 꼭 보내 줄게요.”
“그려……. 이 할미는 우리 강아지가 보내 주길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
아들은 망나니로 컸지만 손자만큼은 착하게 자라 주었다. 할머니는 유난히 오이를 예뻐했다. 심지어 학교에선 모범생, 행실이 바르고 성격도 유순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다.
“할미가 우리 손주 먹을 반찬 싸서 냉장고에 넣어 놨으니까 아침은 꼭 먹고 나가야 한다. 알았지?”
“응! 그럴게요. 정말 고마워요, 할머니.”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잊지 않은 오이는 방문을 열고 나가 옷들을 대야에 담아 놓았다. 잠깐 나가 있었다고 그새 시린 손을 비비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와중에 아저씨가 준 쪽지도 단단하게 챙겨 두었다.
주섬주섬 짐이며 가방을 똑 부러지게 정리하고 있으려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할머니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휴, 우리 오이가 고생이구나. 그놈의 못난 아비 때문에…….”
“에이, 할머니. 이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그 좋은 분도 계시고 할머니도, 친구들도 있는데요 뭘.”
늘 오기만 하면 술을 내놓으라며 소리를 치고, 이미 집을 나간 오이의 엄마를 욕하고, 할머니가 안 오시기라도 하면 오이를 때리기도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오이는 단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았다. 단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가엾고 무서웠을 뿐.
“에휴. 할미는 오이가 있어서 좀 더 살아야겠다. 우리 오이가 참한 아가 데리고 오기 전까진 눈 뜨고 있어야 해. 암, 그렇고말고.”
할머니의 푸념에 오이는 그저 웃었다. 아직 자신이 결혼하려면 10년은 더 남았는데 벌써 신부 이야기라니.
게다가 할머니에게는 죄송하지만 오이는 결혼이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술주정꾼이다. 아무리 좋은 직장, 좋은 성격을 가져도 집안이 이 모양이면 다 소용이 없다.
할머니와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잘 시간이 되었다. 오이는 그제야 내일 있을 수업에 쓸 문제집을 사야 하는 걸 떠올렸다. 잠깐 제주도에 다녀오느라 잊고 있었는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되니 잠시 미루어 두었던 현실이 고개를 들이밀며 오이에게 걱정을 안겨 주었다.
“아…… 문제집, 어쩌지.”
이미 할머니는 잠들었고 이번 달 보조금으로 나온 돈은 아버지가 들고 도망쳐 버렸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문제집은 옆 반인 병하에게 빌리기로 했다. 오이는 조용히 책가방을 챙겼다.
이럴 때는 돈이라는 게 약간 원망스럽다.
“자, 여기.”
“고마워. 오늘 내로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게.”
“괜찮아. 천천히 쓰고 내일 2교시 전에 줘.”
2반의 병하는 우울한 오이의 얼굴을 보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어쩌다 그런 부모를 만나서 고생인지, 보는 쪽이 더 안쓰럽다.
병하에게서 빌린 문제집을 품에 안고 가던 오이는 갑자기 들려오는 교내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시우는 보통 쉬는 시간이면 자기 반에 없으니 교무실에서 반장을 찾는 호출이라도 떨어지면 오이가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이의 예상과는 달리, 방송에서 찾는 것은 시우가 아니었다.
『2학년 4반 선우오이 학생. 지금 바로 교무실로 오세요. 다시 한번 방송합니다. 2학년 4반의 선우오이 학생은 지금 바로 교무실로 오세요. 외부 손님이 있습니다.』
“어? 나?”
기껏해야 전체 방송이나 반장들을 모으는 방송인 줄로만 알았던 오이는 처음 겪은 상황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을 찾는 외부 손님이라니.
설마 아버지가 학교까지 온 건가 하는 생각에 오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제발 행패만은 부리지 말아야 할 텐데. 신경을 쓰는 동안 배가 조금씩 아파 왔다.
이제껏 아버지가 학교까지는 찾아온 적이 없었지만, 간혹 여기를 들먹이며 협박을 한 적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오이의 얼굴이 절로 창백하게 질렸다.
한달음에 뛰어가 다 닳은 검은 삼선 슬리퍼를 신고 교무실 앞을 두리번거리니 안에서 선생님들이 몇 분 모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조용히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유난히 큰 키를 가진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이 선생님들의 중앙에 우뚝 서서 오이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저, 영어 선생님. 아까 방송 듣고 왔는데요. 손님은 어디 계세요?”
“아, 오이 학생.”
오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코트를 입은 남자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코트, 검은 양복. 어제와 디자인만 바뀌었을 뿐인 검은색 옷들을 몸에 걸친 그는 빠른 걸음으로 오이에게 다가왔다.
그제야 오이는 그 손님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하얗게 떴던 얼굴에 기쁜 표정을 띄우며 황급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크리스 아저씨! 안녕하세요.”
자신의 작은 아기새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돌려준 크리스는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사각 주머니를 넘겨주었다. 꽤나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가 손 위에 올라오자 오이는 한 손에는 친구의 이름이 적힌 문제집을, 한 손에는 주머니를 들고 크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이건 뭐예요?”
“도시락. 점심 전이겠지?”
“도시락이요?”
평소 급식을 먹기 때문에, 도시락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오이의 표정에 크리스는 슬쩍 위 아래로 눈을 움직였다. 어제도 그랬지만 여전히 또래에 비해 키가 작고 말랐다. 대답 대신 머리를 쓰다듬자 오이는 어제처럼 또 눈을 꼭 감고 가만히 서 있다.
“저, 이 학생의 보호자 되십니까?”
둘의 모습에 궁금해하던 선생님들 중, 그나마 가장 행동력 있던 국어 선생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봐도 조폭 보스 내지는 악명 높은 사채업자로—진한 검은색 선글라스를 썼으니 얼굴이 잘 보이질 않고 인상도 더러워 보였다— 보이는데 갑자기 학교로 찾아와서 넘겨주는 게 도시락이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그게 맞다는 듯 오이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고, 선생들은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하기 그지없었지만, 본인과 학생이 그렇다는데 조폭이 애한테 무슨 짓을 했냐고 계속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선생님들도 더 아무 말을 하지 못하자 크리스는 오이를 데리고 교무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문을 닫고 슬며시 옆을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 아기새의 감사가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을게요.”
복도로 나와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면서 오이는 묵직한 도시락에 싱글벙글 웃었다. 늘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학교에서 주는 급식을 먹는 게 보통이었기에, 이렇게 학교에서 도시락을 먹는 건 꽤 오래간만이었다.
기대감에 부푼 오이가 기쁘게 웃는 사이, 복도에서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외부인의 수상한 모습에 다들 어쩔 줄 몰라 했다. 키도 동양인 같지 않게 큰 데다가 온통 검은색 일색이다 보니 저절로 시선을 모으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보내는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걸어가던 크리스는 우연히 고개를 숙이다가 아기새의 허름한 슬리퍼를 보았다. 그 즉시 옆에서 걷는 오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네?”
“신발부터 다시 사야겠군.”
“아? 슬리퍼요? 괜찮아요. 압정 꽂아 놓고 실로 꿰매면 꽤 오래가요.”
“바로 도시락 안에 넣어 놓고 나와.”
“그, 그렇지만 수업이…….”
쉬는 시간은 달랑 10분. 3교시 수업까지 1분밖에 남지 않았다. 난처한 아기새의 표정에 크리스의 시선이 이번엔 손에 들고 있는 문제집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오이의 이름대신 친구인 병하의 이름이 크게 써져 있었다.
“문제집도 빌린 건가.”
“네? 아…… 그, 아직 사지를 못했어요.”
이쯤 되니 오이는 아저씨 앞에 있는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10년 만에 만났으니 이런 모습은 되도록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어쩔 수가 없다. 일단 넘기자는 생각에 오이는 품에 안긴 문제집을 슬쩍 뒤로 숨기고 어색하게 웃었다.
“곧 살 거예요. 오늘은 제가 깜박 잊어먹고 나와서 그래요.”
아기새의 어색한 태도에서 거짓임을 눈치챈 크리스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문제집을 살 돈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집세만 보조해 줬건만. 그 아버지라는 작자는 나라에서 나오는 보조금까지 다 가져가는 모양이다.
보고를 들을 때마다 쓰레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기새의 아버지가 아닌 완전한 타인이었으면 어떻게 해서든 손을 썼을 텐데.
오이는 얼굴을 굳히고 있는 크리스와 그 뒤에서 자신을 의아한 시선으로 보는 선생님 사이에서 난처해했다. 수업 때문에 교실로 들어가긴 해야 하는데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수업을 위해 교실로 가고 있던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이와 크리스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오이? 여기서 뭐 하고 있니?”
“아, 선생님.”
오이가 우물쭈물하며 손끝을 만지작거리자, 크리스는 조용히 몸을 돌려서 선생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선우오이 학생의 보호자입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실은 집안일로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러니 10분 정도만 양해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봐도 수상한 남자의 모습에 말을 듣고 있던 선생님이 조금 의심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가, 괜찮냐는 듯 오이를 보았다. 정말 보호자냐고 묻는 게 분명한 시선이었다. 오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로 긍정의 고갯짓을 했다.
거기까지 확인이 끝나니 더 캐물을 수도 없는지라, 선생은 조금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크리스에게 짧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10분 뒤에는 꼭 돌려보내 주세요.”
“서, 선생님…….”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말고. 오늘 수업은 꽤 중요하니까.”
시원스레 사라진 선생님 덕에 그대로 복도에 남은 크리스와 오이는 서로 마주보다가, 조용히 문구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색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간 운동장은 무척 조용했다. 오늘따라 체육 수업도 없는 모양인지, 운동장에 서 있는 건 오이와 크리스뿐이었다. 그 광경 자체가 오이에게 있어서는 꽤 드문 일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시간에 여기 있으니까 왠지 이상해요.”
“그런가.”
“항상 수업 듣고 있는 시간이니까……. 아?”
“무거울 테니 맡아 두도록 하지.”
오이의 손에서 무거운 도시락을 가져간 크리스는 붉게 변한 아기새의 손을 잡았다. 피부가 하얗다 보니 무거운 짐을 잠깐 들었을 뿐인데도, 손가락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편 오이는 자신의 손을 잡은 크리스의 손 크기에 놀랐다. 당장 보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제대로 붙잡아 보니 그의 손가락 길이나 크기는 오이보다 훨씬 큰 편이었다.
“우와, 손이 엄청 크시네요.”
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다정하게 손도 잡아 주고, 도시락도 챙겨 주고, 준비물도 같이 사러 가고. 오이는 나란히 옆에서 걸어가는 아저씨에게 조용히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는 사이 크리스는 뭔가 생각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는 듯 오이의 손을 잡은 채 하나씩 내뱉기 시작했다.
“필요한 건 문제집, 슬리퍼. 또 뭐가 있지?”
“네? 아, 아니에요.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필기도구나 공책은?”
“그…….”
그러고 보니 공책도 다 떨어져서 전에 학교 앞에서 공짜로 받은 홍보용 노트를 쓰고 있었다. 하나같이 부족한 것들뿐인지라 진땀이 났다. 어색하게 삐약거리는 아기새를, 크리스는 조용히 문구점 앞으로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