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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inum wolf x Baby bird 3화
1부 (3)


“어서 오세……. 어머?”
“안녕하세요. 저, 이 문제집 있나요?”
문구점 안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범상치 않은 차림새를 한 크리스와 교복을 입고 인사를 하는 오이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그것도 학생을 데리고 온 조폭 같은 남자라니. 누가 봐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구성이었다.
“문제집이라면 있지만…….”
의문도 의문이지만 우선 장사가 먼저였는지, 아주머니는 말없이 둘을 살피다 말고 대답하며 옆에 있던 책장에서 문제집을 꺼내 주었다. 그러자 크리스가 옆에 함께 있던 노트들을 살펴보더니 적당히 스무 권 정도 되는 한 뭉치를 꺼내 들고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노트는 이 정도면 당분간 되겠지. 그리고…….”
카운터에 가득 진열되어 있는 샤프와 샤프심, 그리고 필통과 지우개를 노려보는 크리스의 모습에 오이는 손에 문제집을 꼭 쥐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 사러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데 나머지 모자란 물건을 사서 안겨 주려는 모습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오이가 안절부절못하는건 보지 못한 채, 크리스는 적당히 필기용구를 노트 위에 집어 놓고 바닥에 쭉 늘어선 슬리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리 와. 발 사이즈는?”
“네, 네? 2, 250이요.”
“흐음.”
그는 꽤 작군, 입 모양으로 중얼거리며 중간에 있는 검은 삼선 슬리퍼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또 한 번 문구점 안을 둘러보았다. 뭔가 또 필요한 게 있으면 사 주고 싶었지만, 난처해하는 오이의 표정을 보고 결국 그만두었다. 조용히 카운터로 다가가 말했다.
“계산.”
“문제집까지 전부 31,500원입니다.”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크리스를 보던 아주머니가 빠르게 눈으로 계산을 마치고 총 금액을 말했다. 그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검은 지갑을 꺼내었다. 그리고 지갑을 열고 이리저리 뒤지더니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침묵이 가게에 전염된 것처럼 일순간 주변이 고요로 물들었다. 조금 당황한 오이가 큰 눈을 껌벅이며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 아저씨?”
“수표가 100만 원짜리뿐인데.”
100만 원. 그것도 수표뿐이란다.
일순간 다시 한번 주변에 침묵이 지나갔으나, 이내 정신을 차린 아주머니가 황급히 가게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안쪽에 있던 카운터에서 현금을 꺼내 와 부지런히 지폐를 세었다. 손길에서 신경질을 참고 있는 게 여실히 보였다.
다행히 학생을 상대로 하는 가게라 거스름돈으로 줄 만한 현금이 있었다. 다음부터는 꼭 만 원짜리로 가져오라는 아주머니의 뼈 있는 농담에, 크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돈 뭉치와 계산을 마친 물건을 들고 문방구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돈 뭉치를 다시 지갑에 넣지 않고 자연스럽게 오이의 앞에 슥 내밀었다. 3만 원이 조금 넘는 물건들을 받은 것만으로도 곤란해하던 오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
“푼돈이지만 급하게 필요한 건 살 수 있을 거다.”
크리스는 무뚝뚝하게 말하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문제집도 못 사고, 신발이나 학용품도 못 살 정도의 상황을 자세히 알았다면 이렇게 두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조금씩 챙겨 줘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크리스의 입장에서는 적은 돈이었지만, 아기새에게는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손이 떨리는 금액에 오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는 결국 오이의 작은 손에 지폐를 직접 쥐여 주었다.
“아, 아니……. 저는 이렇게 큰 돈 필요 없는데요.”
“원한다면 지갑에 있는 수표로 주고 싶지만 부담스러울까 봐.”
반 강제로 받은 지폐들을 보며 오이는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크리스는 조용히 검은 봉지에 든 물건들과 도시락을 챙겨 들고 오이의 손을 이끌어 다시 학교로 향했다.
손을 잡아 주는 느낌에 오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돈뭉치와 크리스를 번갈아 가며 살피다가 결심한 듯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저씨. 저 이거 못 받아요. 이것까지 사 주셨는데 이런 큰돈까지 또 받으면…….”
열심히 설명하는 오이의 말을 전부 무시한 크리스는 학교 입구에서 들고 있던 짐들을 내려놓고 아기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폭신한 머리 아래로 열심히 조잘거리는 아기새의 하얀 입김이 올라온다.
“제 말 듣고 계세요?”
“그 돈, 받지 않으면…….”
조금 화가 난 아기새의 하얀 뺨을 손바닥으로 감싼 그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드리웠다. 삐진 것도 그저 귀엽기만 하다. 허리를 반쯤 숙여야 겨우 시선이 맞을 정도로 작아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혼난다.”
“네?”
살짝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 누른 크리스는 아기새가 머리를 만지는 사이 몸을 돌려서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여유롭게 스탠드의 돌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그의 모습에 오이는 허무한 심정으로 바닥에 놓인 도시락과 검은 봉지를 바라보았다.
“으으…….”
결국 그에게서 받은 돈을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바닥에 놓여 있던 봉지를 들고 교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아저씨를 보내고 난 뒤, 두 시간이 지나 점심시간이 되었다. 급식소에 급식 대신 도시락을 가져온 오이는 수저만 받아서 병하와 시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미안, 먼저 먹고 있었어?”
“배고파 돌아가시겠다. 그보다 그 도시락 뭔데?”
“그러고 보니까 너한테 손님 왔었다면서? 여자애들이 막 시커먼 옷 입은 커다란 사람이 왔다고 난리 났던데.”
입에 젓가락을 문 채 질문하는 병하의 시선이 도시락으로 향했다. 척 보니 1인분은 아닌 듯하고, 세 명이서 먹어야 겨우겨우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응, 아는 아저씨.”
오이는 허탈하게 웃으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저 도시락이니 무게가 무거워도 크게 별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실체를 보니 입이 쩍 벌어졌다.
1층에는 새우튀김과 유부초밥, 그리고 예쁘게 볶은 버섯볶음과 샐러드. 2층에는 하얀 쌀밥과 두껍게 썰린 돈가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끼 모양으로 깎인 사과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우와!! 야! 오이! 이게 대체 뭐냐?!”
“대단한데……. 이거 누가 준거야? 그 손님?”
“으, 응. 그런데 이거 양이 좀…….”
좀이 아니라 엄청 많다. 거짓말 좀 보태면 고등학생 남자애들 다섯 명까지도 충분히 먹을 양이었다. 젓가락을 손에 든 채로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는 오이의 모습에 시우는 재빨리 유부초밥을 집어서 입에 털어 넣었다.
“우움……. 오호……. 야, 이거 진짜 맛있어!”
“정말? 나도 먹어도 돼?”
시우의 격찬에 병하의 입에서도 침이 고인다. 오이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눈여겨봤던 새우튀김으로 빠르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분명 이런 케이스 안에 있었느니 어느 정도는 눅눅해져야 정상인 새우튀김은 갓 만든 것처럼 바삭거리고 맛있었다. 톡톡 튀면서도 부드럽고 육즙이 살아 있는 이 새우 살을 보아 최상급 새우를 쓴 게 틀림없었다.
“마, 맛있어! 우리 엄마도 이렇게는 못 만드시는데!”
“캬! 이 돈가스도 엄청 맛있다!”
자신보다 둘이서 더 열심히 도시락을 먹어 대자 오이도 황급히 유부초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둘의 말대로 엄청나게 맛있었다. 셋은 행복한 표정으로 불러 오는 배를 잡으며 도시락을 비웠고, 거의 점심시간이 반쯤 지나고 나서야 도시락 바닥이 보였다.
“아, 진짜 이렇게 배부르게, 양질의 도시락을 먹은 건 되게 오랜만이다.”
“그러게. 또 먹고 싶다.”
학교 복도 위, 창문에 걸터앉은 시우는 부른 배를 손으로 문질렀다. 늘 맛도 없던 급식으로 배만 채우는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포식을 하니 너무 기뻤다. 그것은 오이도, 병하도 마찬가지인지 둘 다 얼굴에 만족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저씨한테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그 손님이라는 분, 아는 사이라고?”
“예전에 만났어.”
“어떤 사람인데?”
아저씨에 대해 설명하려던 오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굳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해 줄 것이 적었다.
검고, 크고, 돈이 많아 보이고, 부하도 많으며 친절한 아저씨.
10년 전부터 알기는 했지만, 워낙 옛날인 데다 딱 한 번이니 할 수 있는 말이 그리 많지가 않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오이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갔다.
“야, 선우오이?”
“눈 뜨고 기절한 건 아니겠지?”
병하의 손이 오이의 눈앞을 세 번 정도 스치고야 오이는 정신을 차렸다. 화들짝 놀라서 땀을 흘리는 모습에 시우는 한숨을 쉬며 오이의 머리를 톡톡 때렸다.
“아서라. 머리에서 열나는 게 여기까지 보인다. 소문에는 되게 키 크고,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조폭이라는 말이 있던데.”
“우리 2반에서도 그러던데? 암흑가의 보스 정도는 되는 사람 같다고 하더라.”
“아, 아냐!”
그래도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며 반론하려던 오이는 잠시 아저씨를 떠올려 보았다. 부드럽게 웃는 입, 검은 옷 스페셜—옷, 바지, 조끼, 머리카락, 선글라스—, 그리고 이상하게 따라다니던 수상한 아저씨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인다.
“아니야?”
“맞, 맞을지도.”
두 손을 꼭 움켜쥐고 등 뒤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모양새가 참으로 가여웠다. 조용히 오이의 등 뒤를 토닥이던 병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참, 내일 생물 쪽지 시험 있어. 너희 반에서도 본대?”
“우리 반은 그런 거 없지롱.”
“시우야. 내일 사회 과제 있잖아.”
“……아.”
시우는 오이의 태클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분명 수학여행 가기 나흘 전에 나온 숙제였는데 까맣게 잊은 게 분명했다. 반장이면서 그것도 몰랐냐며 병하가 핀잔을 주자 시우의 변명이 이어졌다.
“어, 어험! 내가 잊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제군들. 난 그저 잊은 척했을 뿐이네.”
“그럼 내일 과제 주제는 뭔데?”
“와, 치사해! 두뇌로 사람을 판단하려 들다니. 크흑! 그래도 마음이 넓은 내가 너를 용서할게.”
어디 드라마에서 본 모양인지 시우는 경건한 자세로 성호를 긋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병하의 손바닥이 그대로 시우의 넓은 등짝을 후려쳤다. 짝, 하는 커다란 소리가 급식실에 울렸다.
“악! 새끼야, 심장마비로 죽을 뻔했잖아!”
“쇼를 해라, 쇼를.”
“과제 그거 하루 안으로는 다 못 할걸? 나도 이틀이나 걸렸어. 도서관에 꽁꽁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해도 모자라더라.”
“도와주십쇼, 형님들.”
시우가순식간에 비굴한 자세로 둘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병하는 가차없이 징그럽다며 손을 때어 내었다.
“도와줄 테니까 이 손 치워. 그 부담스러워 미칠 것 같은 표정도 좀 어떻게 하고.”
“그래. 세 명이서 하면 금방 될 거야. 나도 했던 과제니까 도와주면 오늘 저녁까지는 어떻게 되겠지.”
둘의 도움을 준다는 약속을 기어코 받아 낸 시우는 만세를 하며 쾌재를 불렀다.
“오예, 오예! 이래서 친구는 잘 둬야 한다니까! 범생이 둘을 친구로 두는 거, 이게 내 선견지명이라고! 하하하!”
“……그냥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병하를 보며 오이는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공중전화 앞에서 꼬물거리던 오이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하얀 쪽지를 펼쳐 보았다. 분명히 이 건물 같은데 들어가기가 약간 겁이 난다. 그래서 전화라도 할까 싶어서 공중전화 박스 앞에 서긴 했는데, 조금 부끄럽다.
“어쩌지…….”
모의고사라 일찍 하교를 했다. 집까지 힘겹게 낑낑거리며 올라가서 노란 후드 티에 겨울 코트와 목도리를 매고 나온 오이는 손에 든 쪽지를 다시 바지 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다. 노란 후드가 코트 밖으로 삐져나와서 언뜻 보면 목도리를 두 개 맨 것처럼 보였다.
최근에 완공되었다던 빌딩은 어느새 속이 꽉 찬 사무실이 되어 있었다. 아직 간판은 없긴 하지만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분양이 거의 끝난 모양이었다.
침을 꼴깍 삼키며 빌딩의 회전문을 바라본 오이는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역시 긴장되는 마음에,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섯 바퀴나 더 돌다 마침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아우…….”
살짝 어지러운 눈을 비비며 오이는 비틀비틀 안내판으로 걸어갔다. 총 10층인 이 빌딩은 1, 2, 3, 4층까지는 다른 사무실이 들어차 있었고, 5층부터 10층까지는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 어디로 가야 하지?”
크리스라는 이름과 검은 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밖에 모르니 당혹스러웠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봐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다. 우선은 5층부터 10층까지 하나하나 살피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린 오이는 바로 옆에 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으리으리한 내부는 어쩐지 발을 대기도 망설여졌다. 조심스럽게 5층 버튼을 꾹 눌렀다.
문이 닫히고 바로 붕, 뜨듯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휑한 풍경이 보였다. 5층에는 입주한 사무실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 아닌가.”
다시 문을 닫은 오이는 6, 7, 8, 9층을 모두 살폈으나 전부 5층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10이라고 적혀 있는 버튼을 꾹 눌렀다. 제발 이 층에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없는 휑한 건물은 은근히 무서웠다.
“제발…….”
인상을 찡그리며 엘리베이터가 도착함과 동시에 고개를 들자, 그제야 반짝거리는 카운터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후다닥 내린 오이는 조용히 앉아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 저기요.”
“네, 무슨 일이십…… 어머.”
“저기, 크리스라는 분을 찾아왔는데요.”
“크리스……. 세상에, 너 지금 테네일 부회장님 말하는 거니?”
여자의 경악스러운 표정에 오이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테네일 부회장이라니?
“저……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으음, 어디서 듣고 온 건진 모르겠지만…… 학생이 잘못 알고 온 것 같은데, 이만 나가 줄래? 곧 있으면 사모님이 오실 거라서.”
“분명히 여기라고 했는걸요.”
“장난 그만하고 얼른 나가.”
정말 장난이라고 단정 지은 모양인지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이가 쪽지를 보여 줬음에도 별 증거가 되지 못했는지 시종일관 야박하게 오이에게 쏘아붙였다.
“안 나가면 사람을 부를 거야! 얼른 안 나갈래?”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오이는 덜컥 겁을 먹었다. 분명 아저씨가 준 주소가 맞는데, 이렇게 나오니 여기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서러운 마음으로 포기하고 돌아서 엘리베이터를 다시 타려는데, 갑자기 저 안쪽에 있던 방에서 문이 열렸고, 한 커다란 남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아기새?”
“아저씨!”
구세주를 만난 표정으로 오이가 달려가자 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손을 살짝 벌렸다. 아이의 몸이 그의 품에 그대로 포옥 안겼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리스에게선 중후하고 부드러운 향수 냄새가 났다.
“연락이라도 했으면 마중 나왔을 텐데. 그리고 거기, 너.”
“네, 네!”
“내가 아기새가 오면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내 방으로 보내라고 했을 텐데.”
아기새를 품에 안은 채로 여자에게 다그치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냥 아기새라고만 했었기에 구체적으로 작은 아이인지 동물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여자는 연신 꾸벅거리며 크리스에게 사과했고, 결국 오이가 그러지 말라고 말리기 전까지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한바탕 사건이 있은 후, 아기새를 자신의 개인 사무실로 들어간 크리스는 널찍한 검은 소파위에 오이를 내려놓았다.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가 닿자 오이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중앙에 놓인 책상과 의자, 서류가 가득 꽂혀 있는 책장이 위압감 있어 보였다. 작은 탁자 위에는 팩스로 추정되는 기계가 놓여 있었다.
신기한 눈으로 사무실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오이는 갑자기 뒤에서 다가온 커다란 손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오이의 목에 리본처럼 매여 있던 목도리를 풀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의 손목에는 고급스러운 은색 시계가 반짝이고 있었다.
“고개 들어.”
거의 명령조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억양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에 오이는 순순히 고개를 살짝 들었다. 엉망으로 삐져나온 노란 후드 티의 모자를 정돈해 주는 크리스의 모습에 오이는 아차, 하는 얼굴로 뒤를 바라보았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모자가 구겨진 것도 몰랐어요. 많이 이상해요?”
크리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샛노란 후드티를 입고 체크 목도리를 리본처럼 두르고 달동네 언덕에서 여기까지 종종걸음으로 뛰어왔을 걸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흐뭇해졌다. 분명 굉장히 귀여웠을 것이다.
대충 옷매무새가 정리되자 크리스는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서랍에 넣고 아기새의 옆에 앉았다. 오늘 그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버린 검은색 대신 하얀 드레스셔츠에 가벼운 회색 양복 조끼를 입고 있었다. 핀이 달린 탁한 남색의 넥타이가 썩 잘 어울렸다.
넥타이 핀에는 파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진짜 보석일까 궁금해하며 보던 오이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만져 봐도 돼요?”
“좋을 대로.”
허락이 떨어지자 오이는 손끝으로 은색의 핀을 만지작거렸다. 가끔 TV에서 유명 인사들이 하고 다니는 건 봤지만 실제로 이렇게 만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오이가 타이 핀을 만지는 동안, 크리스는 조용히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무슨 일 있으세요?”
“잠시.”
갸웃거리는 아기새를 뒤로 하고 크리스는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밖에서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왔고, 크리스는 빠르게 문고리를 돌려서 잡아당겼다.
“꺄!”
문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가느다란 여자의 비명소리와 허우적거리는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연한 갈색 핸드백이었다. 무뚝뚝한 얼굴로 그 손을 잡아 안으로 당긴 크리스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늦으셨습니다. 어머니.”
“겨우 3분 늦었다고 타박하는 거니, 지금?”
연한 베이지색 여성용 정장과 보드라운 하얀 머플러를 어깨에 걸친 중년의 여성이 크리스의 부축을 받으며 제자리에 섰다.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귀찮았는지 알고는 있니? 왜 하필이면 이런 외곽에 건물을 지어서 이 엄마를 귀찮게 하는 거니, 아들아?”
가느다란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꽤 높이가 있어 보이는 구두가 매끈하고 단단한 바닥과 부딪치면서 또각또각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사무실에 있는 소파에 날카로운 시선을 고정시켰다. 거기에는 노란 후드티에 파묻힌 아기새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보고 서 있었다.
“저 아가는 누구니? 설마하니 유괴?”
“질문을 좀 바꿔 주시죠.”
“그럼 납치?”
“네?!”
납치라는 말에 오이가 소리를 지르자 크리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닙니다.”
“그럼 뭐니, 저 귀엽고 깜찍한 아가는? 설마 사고 치고 숨겨 둔 아이?! 세상에! 이 엄마의 눈을 피해서 저런 아이를 데리고 살았다니, 크리스! 난 너 그렇게 키운 적 없다. 게다가!”
인상을 쓴 그녀는 재빨리 앞에서 꽁꽁 표정이 얼어 있는 오이의 팔을 잡고 그대로 품에 꼭 안아 버렸다.
“이렇게 예쁜 게 있었으면 얼른 이 엄마에게 보여 줬어야지! 아가, 엄마 이름이 뭐니? 응? 이 할머니가 널 너무 늦게 찾았—”
“더 이상 말 하시면 화낼 겁니다.”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딱딱하게 굳은 아들의 얼굴을 본 그녀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품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오이를 살짝 떼어 놓았다.
“아쉽네. 이렇게 뽀송한 우유 냄새 나는 남자아이는 잘 없는데.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줌마랑 같이—”
“어머니.”
“……치사하긴.”
나이답지 않게 퉁퉁 부운 뺨으로 삐졌다는 걸 보여 주는 그녀의 모습에 오이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