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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inum wolf x Baby bird 4화
1부 (4)


***


“아하, 10년 전이라면 내가 파파를 한국에 불렀을 때구나.”
“파파……?”
“크리스의 아빠, 나는 파파라고 불러.”
카운터에 있던 여자가 가져온 홍차를 우아하게 들고 마시며 그녀는 오이에게 미소를 보냈다. 아까 잠시 추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역시 크리스의 어머니답게 그녀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50대 후반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오이가 깜짝 놀랐지만.
“그 양반이 나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아니? 무려 열다섯 살 차이야, 열다섯 살. 완전 도둑놈이지? 그러니까 아가도 다음에 만나면 파파라고 불러도 괜찮아.”
“아…… 아하하하.”
“그보다 우리 크리스랑 10년 전에 만났다면…… 아가는 몇 살?”
“아, 올해로 고2예요.”
“어머, 너도 크리스랑 열다섯 살 차이네? 이런 우연도 다 있구나.”
홍차가 들어 있는 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소녀처럼 웃으며 오이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크리스는 그런 둘의 앞에 앉아서 조용히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흐음, 혹시 이름이 선우오이, 맞니?”
“어!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나!”
이름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그대로 오이를 품에 안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유를 모른 채 그녀의 품에 연거푸 안긴 오이는 진땀을 흘리며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아기새의 안쓰러운 SOS 사인을 읽은 크리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머니의 품에 완전 파묻힌 오이를 달랑 들어서 품에 안았다.
“치사하게 어릴 때 찜했다고 지금 엄마를 무시하는 거니? 이리 못 내놔?!”
“싫어하지 않습니까. 좀 자중하시죠.”
크리스의 뒤로 숨겨진 오이는 널찍한 그의 등에 손을 대고 한숨을 푹 쉬었다. 묘하게 아저씨의 가족사에 끼인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이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처음이라 피곤하기도 했다. 난처한 오이의 입장을 눈치 챈 크리스는 아기새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목도리를 매어 주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 보시죠.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흐, 흥! 내가 왜 그 양반한테 가야 돼? 싫어. 그것보다 그 아가 당장 돌려줘. 데리고 다니면서 예쁜 거나 사 입히게.”
“그건 제가 할 테니 빨리 화해나 하십시오. 아들을 마지막 도피처로 삼으시면 곤란합니다.”
마지막으로 아기새의 코트까지 단단히 입힌 크리스는 옆에 걸려 있던 자신의 검은 양복 윗도리와 롱코트를 깔끔한 동작으로 차려입었다. 그 모습이 꽤 근사해서 아기새는 잠시 남자는 저래야 멋지다는 생각을 하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꼭 TV에서 나오는 유명 연예인 같았다. 선글라스만 안 쓴다면 정말 멋있어서 굉장히 시선을 끌 텐데.
크리스의 어머니도 같은 생각인지 아들의 윗도리에 곱게 접혀 있는 선글라스를 빠르게 낚아채서 자신의 핸드백에 집어넣어 버렸다.
“이런 거 그만 쓰고 다니라고 했지? 안 그래도 파파 닮아서 줄창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 주제에 보기 안 좋게 선글라스는 왜 또 쓰는 거니? 아가야, 너도 이 아저씨가 이거 안 썼으면 좋겠지?”
동의를 구하는 그녀의 질문에 오이는 책상 위에 앉은 채로 고개를 크게 두 번 끄덕였다.
확실히 검은 선글라스를 쓴 크리스는 100% 오리지널 리얼 조폭으로 보였다. 키 크지, 늘 검은 양복 차림이지, 거기에 대놓고 검은 선글라스까지 쓴다면 누가 봐도 그건 보편적인 조폭의 모습이었다.
어머니라면 모를까 자신의 앞에 있는 아기새까지 동의하니 별수 없었다. 결국 크리스는 자신의 선글라스를 깨끗이 포기했다.
외출을 위해 아기새와 어머니를 데리고 빌딩 밖으로 나온 그는 곧바로 옆에 있는 전용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럼 전 시내로 가 볼 테니 어머니는 지금 호텔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가 보시죠.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늦지 않습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에휴. 아들이나 파파나 내 편은 왜 없는지.”
못내 크리스의 옆에 서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아기새가 부러웠는지 그녀는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자신도 이런 무뚝뚝한 아들보다는 저런 귀여운 아들을 가지고 싶었는데. 결국 마지막으로 아기새를 한번 꼭 안아 준 그녀는 겨우겨우 미련을 버리고 주차되어 있던 벤츠를 타고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크리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저씨네 어머니는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그냥 말괄량이 같은 분이지. 우리도 이만 가 보도록 할까.”
크리스는 아기새의 손을 잡고 검은 BMW로 데려갔다. 한국에 급히 오느라 차를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이 차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된 것 중 하나로, 잠깐 빌려 쓰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조수석에 올라탄 오이는 차가 곧장 부드럽게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가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시내로 간다는 말은 들었지만 목적지는 확실히 듣지 못했다.
“아저씨, 어디로 가세요?”
“시내. 가서 옷을 좀 사야겠군.”
“아저씨 옷이요?”
“아니, 내가 아니라 너.”
옆에서 삐약거리는 아기새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는 조용히 시내의 중앙으로 차를 몰았다. 원래라면 옷을 사기보단 함께 영화라도 볼까 했었다.
하지만 아까 목도리를 매어 주면서 소매가 닳은 아기새의 옷을 보는 순간, 급한 건 영화가 아니라 당장 입을 수 있는 겨울옷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장 행선지를 시내 중앙의 백화점으로 바꾸었다.
“저 옷 많으니까 괜찮아요. 게다가 좀 있으면 봄이니까 굳이 사 주실 필요는…….”
“그럼 봄옷을 사러 가도록 하지.”
“봄옷은 지금 세일을 안 해서 안 돼요. 사려고 하면 무진장 비싸요.”
아기새의 단호한 태도에 크리스는 또다시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시내 중앙에 위치한 유료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며 제안을 하나 했다.
“우선 뭐라도 하나 먹는 게 좋겠군. 괜찮겠지?”
“저 돈 안 들고 왔는데……요.”
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오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별 걱정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그는 아기새의 어깨를 토닥이며 먼저 앞장섰다.
평일이라 시내가 한산했다. 피자를 좋아하냐는 오이의 질문에—물론 오이는 피자를 좋아했다— 크리스는 말했다.
“네가 좋아한다면.”

***


피자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오이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눈빛들을 돌아보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어찌어찌 아저씨와 안으로 들어와서 자리가 넓은 창가 쪽에 앉은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주춤거리며 다가온 종업원에서부터 길 가던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주변에 앉은 손님들의 눈초리까지. 전부 크리스를 힐끗거리며 바라보고 있는지라 오이는 피자를 먹는 내내 동물원의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크리스가 잘생겼다는 사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이목을 끌 줄은 예상하지 못한—이제껏 내내 선글라스로 얼굴을 죄다 가리고 있었으니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둔한 아기새는 빨대로 콜라를 들이키면서 은근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나마 본인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자여서 다행이었지, 비슷한 연령대의 성인 여자였더라면 질투에 찬 시선에 그대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맛이 없는 건가?”
“아뇨, 맛있어요. 조금 뜨거워서 그래요.”
괜찮다며 손을 내저으니 아기새의 행동에 크리스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노란 옷까지 입고 있으니 말을 하면 삐약거리는 것 같고, 팔을 휘저으면 날갯짓하는 것 같아 더욱 귀여웠다.
“식혀 줄까?”
“괜찮아요.”
식혀 달라고 했다간 바로 입으로 불어서 직접 먹여 줄 태세였다. 고개를 저으며 오이가 거절하자 크리스는 쓸쓸한 마음에 습관적으로 품에 있던 담배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다 금연이라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다시 내렸다.
심한 정도는 아니긴 해도 그는 담배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흡연이 가능한 장소에 가더라도 눈앞에 있는 아기새가 콜록거릴 것을 생각하면 선뜻 피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연기 때문에 눈을 감고 삐약거리는 모습도 아주 조금 보고 싶기야 했지만.
“생각보다 손님이 많군.”
크리스는 어느새 붐비는 주위를 보며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크리스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슬그머니 머무는 것이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열심히 피자를 먹는 아기새를 지켜볼 뿐이었다.
가난한 가정 환경 탓에 또래에 비해 현저히 키가 작은 오이는 얼핏 보면 살짝 마르고 작은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 그렇기에 주변에서는 둘의 관계를 거의 형과 동생 내지는 삼촌과 조카 정도로 예상하며 소곤거렸다.
오이는 그 목소리들을 듣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구나 싶었다. 맛있게 피자를 먹고 있으려니 갑자기 크리스가 식사를 하다 말고 말을 꺼냈다.
“잠깐.”
“네?”
칼로 슥 잘라서 피자를 입에 넣던 오이가 그대로 멈추었다. 크리스는 옆에 있던 냅킨으로 아기새의 입에 묻은 소스를 닦아 주었다. 그제야 입가에 뭔가 묻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오이는 휴지가 떨어지자 반사적으로 입 주변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엇, 많이 묻었어요?”
“아니.”
말투는 무뚝뚝하지만 행동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여자들의 절반은 넘어갔고, 거리를 지나가면서 힐끗힐끗 안을 보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자연스럽게 가게 안을 향하고 있다.
오이는 그 시선 때문에 찝찝한 기분으로 옆에 있던 샐러드를 입에 밀어 넣었다. 그러다 문득 크리스가 음식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저씨, 이 사과 젤리 맛있는데, 드셔 보실래요?”
샐러드 바에서 가져온 초록색의 사과 젤리를 포크에 꽂아 내밀자 그것을 잠깐 보던 크리스는 순순히 몸을 내밀어서 받아먹었다. 내밀면서도 진짜로 그가 먹을 거라곤 생각을 못 했던 오이는 포크를 내민 채로 몇 초간 몸이 굳어 버렸다.
“저기…… 콜라 리필해 드릴까요?”
그때 용기를 낸 한 종업원이 영업 스마일을 얼굴에 달고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크리스의 얼굴이 그녀를 향했다. 멀리서 볼 때도 꽤 근사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콜라 더 마실 건가?”
“네? 아, 네. 리필해 주세요.”
오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있던 콜라 잔을 종업원에게 넘겨주고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연한 갈색 눈동자가 햇빛을 받으니 은은하게 퍼지는 금색처럼 보였다. 꼭 바다에서 우아하게 반사되는 예쁜 노을빛 같다.
자주 볼 수 있는 색이 아니다 보니 이질감이 없진 않지만, 신기하다는 생각에 시선이 이끌렸다.
비록 볼수록 매력적이라 그랬다지만, 상대방의 얼굴을 계속 뚫어져라 보는 건 실례였기에 오이는 잠시 눈을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피자로 고정시키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거 먹고 어디 갈까요? 서울 시내 구경이라면 제가 시켜 드릴게요.”
“아니, 괜찮아.”
버릇처럼 넓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손으로 턱을 만지는 크리스의 눈빛은 오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주변의 과도한 시선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크리스에게 중요한 것은 아기새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타인이 아니었으니까.
콜라가 리필되어서 나오자 오이는 얼른 피자로 막혀 있던 목을 적셨다. 달달하고 개운한 탄산이 몸 안으로 흡수되자 한결 속이 개운해졌다.
“후아, 잘 먹었습니다.”
오이가 생각보다 많은 양의 피자를 먹은 것을 확인한 크리스는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기새의 옆에 있던 목도리와 코트를 집어 들고 옆에 걸터앉아서 입혀 주기 시작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아저씨.”
크리스의 사무실 안이라면 모를까 사람들이 많은 밖에서는 이 나이 먹고 꽤 창피하다. 하지만 크리스는 아주 가볍게 무시하고 손수 목도리를 매어 주었다. 부끄러움에 오이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자 손으로 뺨을 두어 번 톡톡 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꾸 삐약거리면 둘러업고 가 버린다.”
아기새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크리스는 자기 할 말을 다 하고 계산대로 가 버렸다. 자리에 혼자 남은 오이는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카드로 계산을 끝내고 돌아선 크리스는 여전히 양 뺨이 붉은 아기새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커다란 손이 끌어당기니 오이는 맥없이 그쪽으로 끌려갔다.
환한 대로변에서 다 큰 남자 어른 한 명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건 상당히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우와, 와, 와! 좀 천천히, 천천히 가세요!”
다리 길이가 다르니 보폭 차이가 심했다. 따라가려다가 넘어지기 직전인 오이가 다급하게 소리치자 그제야 크리스는 약간 속도를 늦추며 걸음을 맞춰 주었다.
쥐고 있던 아기새의 손에서 약간 힘을 뺀 크리스는 느긋한 걸음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급한 대로 아무 가게에 들어가서 옷을 사 줄까 했는데 주변에는 온통 먹을거리를 파는 곳뿐이었다.
“옷.”
“하아…… 후우…… 옷……이요?”
“옷 파는 곳이 어디에 있지? 백화점이라도 좋은데.”
“아저씨 옷 사시게요?”
“아까도 말했지만 아기새, 네 옷을 살 생각이다.”
“제 옷은 안 사 주셔도 괜찮아요. 아, 아니. 그보다 왜 자꾸 아기새라고 부르세요? 전 아기새 아니에요! 이래 봬도 키 160cm는 된다고요!”
처음으로 오이가 크리스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아까부터 자신을 아이 취급을 하는 게 자꾸만 오이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주변에서 작다, 작다 하는 통에 우울했는데 크리스마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불러 대니 속이 안 상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손을 잡을 채로 아기새를 마주 보던 크리스는 이내 왜 화가 났는지 알았다는 듯 손으로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알았다.”
어른 앞에서 아이는 화를 내도 그저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크리스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그제야 오이는 찡그린 인상을 풀고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이 사람 마이페이스구나 싶었다.
“아기새라는 말은 노력해 보겠지만, 옷은…… 소매가 닳았으니 사 주고 싶은데, 싫은 건가?”
잡고 있던 오이의 손을 들어서 코트 아래의 소매를 끄집어내자 하도 오래 입어서 해져 있는 끝부분이 드러났다.
가난의 상징처럼 보이는 소매 끝을 보며 오이는 조금 우울해졌으나 한편으로는 이런 세심한 부분에 크리스가 신경 써 준다는 사실에 내심 감동했다. 굳어 있던 아기새의 표정이 점점 펴지자 크리스는 자신의 말이 먹혔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몇 벌이라도 좋으니 겨울에 입을 옷을 사는 게 좋을 것 같군.”

***


백화점으로 가려는 작전은 실패했지만 아기새를 데리고 브랜드 옷 가게로 들어가는 데는 성공했다. 아기새는 주춤주춤 크리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환한 조명 아래에 수많은 옷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조금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여직원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손님이 또 왔다며 한숨을 쉬려다 금세 입을 다물고 말았다. 더불어서 가게 안에 있던 열 명 남짓의 손님까지 전부.
“후드 티가 좋은 건가? 이건?”
“왜 노란색만 보여 주시는 거예요?”
“아기새니까.”
크리스가 보여 준 후드 티는 약간 도톰하면서도 길이가 길어서 겨울에 코트 안에 입기에 적당해 보였다.
“저, 그럼 이거 하나만…….”
“어머, 손님! 겨울 후드 티 보러 오셨어요?”
둘을 바라보던 여직원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오이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가까이에서 크리스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묘하게 혼혈처럼 보이는 미남의 조각 같은 얼굴에, 그녀는 주머니에 들어 있는 휴대폰으로 당장 찍어 버리고 싶은 욕망을 꾹꾹 내리누르며 오이가 들고 있던 후드 티 말고도 다른 옷을 보여 주었다.
“이 하얀 셔츠는 어떠세요? 요즘 깨끗한 이미지라 꽤 잘나가요. 그리고 후드 티랑 같은 디자인으로 이런 검은색도 있는데, 어떠세요? 도톰해서 지금뿐만 아니라 초봄까지 입기에 딱 좋아요.”
“흠.”
크리스는 직원이 보여 준 옷 중 하얀 셔츠를 가지고 와 오이에게 대어 보았다. 확실히 몸이 가늘어서 검은색보다는 밝은 계열의 색이 잘 어울렸다. 노란 후드 티와 셔츠를 팔에 건 크리스는 오이를 데리고 좀 더 안쪽에 있는 코트 쪽으로 다가갔다.
“노란 코트는 없군.”
“노, 노란 코트는 남자한테 조금 그렇잖아요. 전 회색이나 검은색이 더 좋……. 근데 옷만 사기로 해 놓고서 왜 코트까지 보는 거예요.”
“코트도 낡았으니까. 그리고 코트도 옷이잖아?”
정장이나 코트라면 잘 만드는 친구가 따로 있긴 하지만, 지금은 외국에 있으니 아쉬운 대로 여기서 사 입히기로 결정했다. 크리스는 적당히 한 벌 꺼내어서 오이에게 맞춰 보았다.
검은색은 피하고 밝은 회색의 긴 학생용 코트를 입혀 보니 잘 어울렸다. 긴말 필요 없이 코트도 팔에 건 크리스는 뒤에 있는 바지 쪽으로 또 옮겨 갔다.
그들이 그렇게 옷을 고르는 동안, 여직원은 번쩍이는 눈빛으로 크리스의 옷을 유심히 살피고 깜짝 놀랐다. 검정 옷 일색이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 양복에 코트겠거니 했는데, 자세히 보니 죄다 최상급 메이커로 추정되는 수제품이었다.
심지어 간간이 소매 아래로 보이는 시계는 분명 명품 마니아인 그녀의 남자친구가 남자의 로망이라며 부러워하는 파텍 필립 제품이었다. 만일 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고 입은 옷도 최소 수제품이라고 하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손에 꼽힐 만큼 엄청난 부자라는 사실이 성립된다.
“허리 사이즈는 그…… 이건데요.”
“……가늘어.”
여자가 충격에 뻣뻣하게 굳어 있는 동안, 크리스는 아기새가 집어 든 바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키도 작고, 손도 작고, 허리도 가늘다. 앞으로 요 1년 동안 여기에 머물면서 많이 먹여야겠다고 크리스는 다짐했다. 좀 더 살이 쪄도 좋으니 말이다.
“그럼 입고 나올게요.”
이미 크리스가 옷을 사 주는 것에 대해 반포기 상태인 오이는 청바지를 들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저번의 돈뭉치도 그렇고, 이번의 옷도 그렇고 어떻게든 거절해도 한사코 주려 하니 계속 거절하는 게 더 힘들었다.
아기새가 주춤거리며 탈의실로 들어간 사이, 크리스는 들고 있던 옷을 옆에 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기새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보다 훨씬 좋은 옷들을 사다가 안겨 줄 의향이 있었으나 그럴 확률이 제로에 가까우니 오늘은 여기서 만족을 해야 했다.
몇 분 뒤, 바지를 대충 입은 오이는 밖으로 나와 크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빙빙 돌며 입고 모습을 보여 주고는 착용 감상을 착실하게 말해 주었다.
“조금 큰 것 같은데 편해서 좋아요.”
약간 몸에 비해 크긴 했지만 앞으로 더 자랄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가 딱이었다. 탈의실 안에 있던 옷을 챙긴 오이는 크리스가 카드로 계산을 하는 동안—오이가 고른 옷은 전부 세일 품목이었다— 가게 밖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옷을 산 뒤, 오이는 크리스와 함께 차를 타고 달동네의 입구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이른 귀가이긴 했지만 옷이라는 짐이 생겼으니 더 돌아다니기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두 개의 쇼핑백을 든 크리스는 굳이 짐을 빼앗으려는 오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앞장서서 걸었다.
“저도 하나 들게요! 이리 주세요!”
“괜찮으니 따라와. 작은 아기새가 뭘 들겠다고.”
경사진 언덕을 걸어가며 크리스가 자신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해 버리자 오이는 황급히 그 뒤를 쫓아갔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달리기에는 꽤 자신이 있었던 오이가 쫓아가기 버거울 정도였다.
“하아, 하아, 하아…….”
커다란 쇼핑백 두 개가 기다란 크리스의 코트 옆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찬바람에 오이의 입에서는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헐떡거리며 뒤를 열심히 쫓던 오이는 중간 지점에 우뚝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크리스와 시선이 마주 쳤다.
“업어 줄까?”
“하…… 하아. 돼, 됐어요. 괜찮아요.”
오이는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저 작은 키로 잘도 이만큼 따라왔다. 크리스는 아기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이는어느 정도 호흡이 정리되자 고개를 들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허리와 엉덩이에 크리스의 팔이 감겨 왔다. 오이는 깜짝 놀라서 그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힉!”
한 손으로 솜씨 좋게 아기새를 팔에 안은 크리스는 나머지 남은 손에 두 개의 쇼핑백을 동시에 들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따뜻하고 조그마한 오이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안고 있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 아저씨! 잠깐만요!”
“움직이지 마. 떨어진다.”
바르르 떨리는 가느다란 팔에 얼굴을 기대자 작게 투덜거리는 오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크리스는 낮게 웃으며 천천히 오이의 집으로 걸어갔다.
“아저씨, 고집 세다는 소리 자주 듣죠?”
“글쎄.”
팔에 안긴 아기새를 고쳐 안으며 크리스가 의미심장한 대답을 건네자 머리 위로 작은 한숨이 떨어진다.
“후우우. 저…… 아저씨.”
“응.”
“귀가 차가워요.”
오이의 손이 차가워진 크리스의 귀로 향했다. 따뜻하고 작은 손으로 꾸물거리며 귀를 감싸 주기 위해 끙끙거리자 크리스는 팔을 살짝 들어서 오이를 고쳐 안았다. 덕분에 완벽하게 크리스의 머리를 품에 안게 된 오이는 힉,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