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십이월 기담 1권

1화


Prologue


“잠깐만, 정 감독. 뭐라고?”
방금 들은 말이 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더니 내 복귀 영화의 감독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별수 있냐, 장소 섭외가 그렇게밖에 안 되는걸.”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섹스신이 첫 촬영이라고?”
나는 대본을 꽉 움켜쥐며 소리쳤다.
그랬다, 2년 만의 복귀작, 첫 촬영은 다름 아닌 베드신 촬영이다. 아무리 내가 연기력이 출중하다지만 첫 장면이 이래서야 감정이 잡히겠냐? 친구이자 감독인 저놈의 머릿속 구조는 대체 어떻게 돼먹은 것일까.
더 항의하려고 배에 힘을 꽉 주고 목소릴 끌어 올리려는 찰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선배님, 많이 미숙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나의 상대역, 한제영은 새카만 눈동자로 나를 곧게 쳐다보며, 아주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열심히 뭘. 열심히 아랫도리라도 함께 비벼 보자는 거냐? 초면이나 다름없는 우리 사이에? 게다가 신인 연기자인 니가?
하지만 그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열정 어린 눈동자를 향해 ‘응, 안 돼.’를 차마 외칠 수는 없었고, 그렇게 베드신 촬영이 정해지고 말았다.
이 뭐 같은 상황의 시초는, 한 달 전이었다—



Chapter 1. 캐스팅


‘톱 배우 주빈, 불륜 스캔들…… 그 부도덕의 끝은?’
‘주빈,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네티즌 분노’
‘[기획기사] 주빈 사태로 보는 방탕한 스타들의 변천사’
2년 전, 스포츠 신문 1면에 시끄럽게도 떠들어 댔던 헤드라인들이다. 사실 저 헤드라인은 공중파 뉴스 뒷부분에도, ‘연예가 중계’니 ‘한밤의 TV연예’니 하는 프로그램에서도 잘 써먹더라. 그 당시 나는 자택 칩거 상태였고, 소파에 벌러덩 누운 채 포카칩이나 먹으며 그 프로그램을 봤다.
내 이름은 주성빈. 예명은 주빈, 나이 서른셋. 2년 전만 해도 최고가를 달리던 배우였다.
완벽한 얼굴, 늘씬한 피지컬. 최신 스마트폰 광고는 기본이고 코스메틱에 자동차 광고까지, 수십 개 광고는 기본이었달까? 사인회만 열었다 하면 강남역에서부터 신논현역까지 두 줄 서기 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마다 시청률과 관객 수는 당연히 보장.
하하,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 그래, 과거형이다.
2년 전, 말 그대로 ‘희대의 불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면서 명성이고 뭐고, 다 나가리 됐다.광고주들은 득달같이 위약금 청구를 해 왔고 콩고물 좀 얻어먹겠다고 붙었던 후배들은 어느새 연락이 뚝 끊겼다. 당연히 기분은 좆같았지.
그 후 2년 동안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냥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두문불출, 은거 생활. 가끔 누가 부도덕적인 일 저지르면 기사에 이름 오르내리는 정도. 난 천상 관심종자라 그런 기사 제목이라도 핥았다.
그리고 오늘, 이 부도덕적인 불륜 배우를 찾아온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랑 영화 한 편 하자.”
“풉컥.”
친구놈이 사온 와인을 마시다 그대로 토하다시피 했다. 암살당할 뻔했다. 친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푸틴 아냐. 독살에는 취미 없다고.”
“……무슨 개소리냐? 퇴물 배우 썼다가 투자자들 다 쫓아내려고 작정했어?”
“퇴물이라니~ 물론 2년 전에 비해 니 면상이 좀 늙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쓸 만해 보여서 왔지.”
내 얼굴이 어디가 늙었냐. 돈 못 벌고 있어도 피부과 클리닉은 꾸준히 다니고 있는데. 발끈했지만 화를 내면 미간에 주름 생길 것 같아 참았다.
이 녀석은 놀랍게도 바깥에선 젊은 나이에 해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아 온 천재 감독으로 불린다. 이름은 정계수. 영화 좋아라 하는 사람들이면 당연히 알게 될 이름이다. 그 영화, 내가 보기엔 그냥 적당히 개소리와 여배우와 야근을 갈아 넣은 평범한 연극영화과 과제물 같은데. 쯧.
어쨌건 그런 놈이 성북구의 내 자택에 침입하다시피 와서는 와인을 바치고,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하다가 갑자기 꺼낸다는 말이 영화 한 편 하자는 거라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너하고 일하고 싶어서 발정 난 놈들이 한둘이냐? 왜 하필 나야?”
정계수는 씨익 웃었다.
“뭐, 내 명성을 너도 잘 알아주니 본론에 들어가자고. 이번에 할 영화, 찐~한 게이 영화다.”
“……뭐 한 뭔 영화?”
“찐~한 께이 영화라고. 섹스신 있고, 애정신 다수. 시작부터 끝까지 게이 만발 멜로 영화, 한 번 만들어 볼까 해.”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혹시 영화제 상 받으러 갔다가 마약 파티 참가한 거 아닐까? 안 그러면 흥행은커녕 손익분기점도 못 넘길 소재의 동성애자 영화를 찍겠다고 저리 당당히 선언할 리가 없다. 반짝반짝 초롱초롱 눈빛을 보니 확실히 이 새낀 미쳤다.
“게다가 시나리오 쓸 작가를 구했는데, 대—박—이—다. <증오의 언덕> 알지? , 청률 30퍼 찍은 그 드라마! 그거 쓴 작간데 이번에 같이 하자고 하더라고. 씨바, 이거다! 하고 영감이 마구 솟구쳐서 이미 그 작가랑 밤새워서 시놉 완성하고, 대본 초안도 나왔다.”
“어, 참 잘됐네.”
“어때, 좀 구미가 당기냐?”
나는 소파에 누운 채 놈을 쳐다보다,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좆 까.”
“야, 시놉도 안 보고 그러기 있나? 이거 게이 영화라도 확실히 5백만 찍는다, 마! 내 본능이 외친다고, 지금!”
“5백만이 누구 집 멍멍이 이름이냐? 담배나 줘 봐.”
“야 이, 내가 니 담배 셔틀인 줄 아나?”
흥분하면 어느새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녀석에게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 역시 셔틀이 맞는지 곧 계수 놈은 담배를 내 손가락에 상납했다. 급한 놈이 아쉽지.
담배를 맛있게 빨고 있는데, 정계수 감독이 누런 종이봉투 하나를 던졌다. 안에는 A4 용지가 한가득이었다.
“한 번 읽어 봐. 시놉이랑 대본 초안이다. 내 니 관종 기질 모를 거 같냐? 2년 쉬었음 많이 쉬었지., 같이 해 보자. 내가 너 화려하게 복귀시켜 줄게, 스캔들이고 뭐고 싹 다 까먹게 해 줄 테니까 믿어 봐라. 캐릭터가 그냥 너한테 딱이야. 내가 없는 말 한 적 있나?”
새끼, 영업 한 번 오지게 하네.

솔직히 까놓고 말해, 끌렸다. 관종 기질 충족은 둘째 치고, 연기 좀 하고 싶어서 좀이 쑤셨으니까. 그 사건 이후로 아예 활동을 접은 탓에 시나리오 들어오던 게 뚝 끊겼고, 나도 영화를 하기에는 이것저것 사건 터진 게 너무 많아서 멘탈이 위험한 상태였다. 이제 좀 회복될까 싶으니 슬슬 불끈불끈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날 후끈거리게 달궜던, 연기에 대한 충동과 본능이 말이다.
정계수가 돌아가고 나서 새벽 동안 시놉과 대본을 읽었다. 내 캐릭터…… 아니, 내가 맡을지 말지 절대 확정 지은 게 아닌 캐릭터에 관한 소개도 읽었다.
거짓말하지 않겠다. 읽자마자 꼴렸다. 자존심 상할 정도로 꽂혔다.
초안일 뿐인데도 초반부부터 아주 필력이 끝장났다. 엔딩 이후 후일담까지 써 달라고 무릎 꿇고 빌고 싶을 정도였다. 이 작가의 드라마를 쉬는 동안 상당히 재미있게 봤었는데 그때보다 더, 더 많이 좋았다.
무엇보다 내 캐릭터…… 아니, 내가 맡을지도 모르는 캐릭터가 겁나게 쌈박하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일본인이면서 조선 독립운동이라는 이중생활을 하는 치명적 매력의 소유자. 그리고 능글맞지만 알고 보면 사연 깊은 남자다. 이건 그냥 나보고 다 해 먹으라는 거 아냐? 그냥 나밖에 할 사람이 없는데?
연예계 은퇴하고 음식점이나 할까 생각하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이걸 놔두고 은퇴할 수는 없다. ‘이거 하고 은퇴하는 건 어때?’ 머릿속 주성빈 1이 꿀처럼 속삭였고, 한쪽에선 주성빈 2가 ‘섹스신은 어떡할 건데?’하고 힐난했다.
노출을 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게이 섹스신은 처음이다. 잘 될까? 거시기가 불끈불끈 섰다 내렸다 하지는 않을까? 설마 성기 노출까지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정계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 새낀 미쳤으니까. 게다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가 이걸 하는 게 맞는 건가? 대본은 좋은데, 내가 끼면 완벽할 텐데. 으으으으. 씨발.
결국, 밤을 새운 끝에 전화를 걸었다. 아침 일곱 시, 정계수가 ‘뭐냐, 씨발러마. 일요일 아침에 꼭 깨워야겠냐?’하고 정겹게 인사를 건넸고, 나는 말했다.
“이거 꼭 한다, 말 바꾸지 마.”

* * *


나는 소속사가 없다. 사건 있고 나서 소속사와 계약 해지했고, 그 후 다른 소속사와 접촉해 본 적도 없으니까. 물론 매니저였던 형도 그 소속사에 남아서 다른 일을 하게 됐고, 코디마저도 다른 길 찾아 떠난 지 오래다.
그래서 계약 체결하러 왔을 때, 내 옆에는 고문 변호사밖에 없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건 매드하트 스튜디오라는 제작사의 박영숙 대표와 나의 악우 정계수였다. 대체 이 제작사 대표는 무슨 생각으로 본격 게이 역사 멜로 영화의 제작에 뛰어들게 된 것일까. 아마 이 사람도 그 시놉과 대본을 본 거겠지.
“대표 박영숙이에요. 반갑습니다, 호호호.”
애교 있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박 대표가 악수를 청했다.
“주 배우 오랜만이에요. 예전에 영화제 파티에서 뵌 적 있는데 기억하시죠?”
“예…….”
사실은 아니요. 제가 기억력이 좀 약해서.
갖은 인사치레와 칭찬 끝에 계약서 작성이 시작되었는데, 내용 중에는 노출 정도, 상대 배우 결정, 문제가 생길 경우 위약금 약정 같은 항목들이 포함되었다. 노출 정도야 성기 노출은 피하되 엉덩이까진 허용하기로 정했고, 위약금은 이제 웬만하면 물고 싶지 않고…….
“상대 배우가 아직 미정인데 말이지.”
정계수 녀석이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오디션 통해서 뽑으려고 공고도 마쳤어. 그래서 말인데, 너도 오디션 심사해 줘라.”
“내가?”
“그래, 너랑 에로신 찍을 사람 직접 고르는 게 너도 편하잖아?”
누가 되든 거기서 거기다. 어차피 거시기 달린 놈하고 비벼대면서 헉헉거려야 하는 건 매한가지다.
게다가 요새 배우들 연기력은 다 평준화된 느낌이라, 솔직히 누가 잘하고 못 하고를 논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또…… 내가 심사할 자격이 있긴 할까? 2년 전 한 기자의 평으론 ‘피상적 연기밖에 할 줄 모르는 트러블메이커’인데 말이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멋진 조건을 덧붙이기로 했다.
“대신, 상대 배우로 마음에 드는 놈 없으면 이 프로젝트에서 난 빠질게.”
“오, 까다롭게 나오네.”
“너도 나만 믿고 밀어붙이기 힘들잖아? 홍보 효과 좋을 놈 하나 더 있어야지.”
정계수 녀석 좀 괴롭혀 보려고 한 소리였는데, 정작 녀석은 싱글벙글 헤벌쭉한 얼굴을 유지한 채였다. 거의 집안 경사 난 것 같은 얼굴이다. 이 녀석이 영화감독을 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할까?
“니가 빠질 일 없을 거다, 걱정 마라!”
호언장담까지 해 가며 녀석은 계약서에 도장을 힘차게도 찍었다. 쾅, 쾅.

* * *


그리하여 약 2주 뒤 오디션 날.
오디션은 제작사 건물 2층 콘퍼런스 룸에서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네 명씩 들어와서 대본을 읽고 연기를 하고 재롱을 피우면, 갑들끼리 수군수군하다 한 명을 집어내든 아니면 전부 탈락시키든 하는 방식. 그리고 나는 그 갑들 중 하나다. 솔직히 말하면 신인 배우들 놀려 먹으려고 들어가는 의도가 9할이다.
내가 신인 때 어땠더라? 솔직히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난다. 연기하고 싶다고 발발거리며 돌아다녔던 것 같긴 한데.
그건 그렇고 소식이 어디서 샜는지, 언론에선 ‘주빈, 정계수 감독 신작 영화로 컴백 임박?’, ‘네티즌, 주빈 컴백설에 비난…… 뻔뻔함의 극치’ 같은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써 댔다. 나 뻔뻔한 거 이제 알았나? 새삼스럽게.
난 이 영화가 엎어지든 말든 상관없다. 어차피 동성애 영화 찍을 정도로 주빈도 많이 퇴물 됐네 하는 소리나 들을 텐데. 정말 진심인데, 이 영화 안 찍어도 괜찮다. 진짜로.
……그리고 오디션 시작 30분 전에 제작사에 이미 도착했다. 제기랄. 어제 잠이 안 와서 죽는 줄 알았다.
흡연실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건물이라 유일하게 담배 피울 수 있는 곳은 옥상뿐이었다. 유난히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 옥상에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기분 좋게 빨았다.
춥다. 펜스가 어쩐지 부실하게 느껴지는 옥상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 댔다. 회색 담배 연기도 금방 형체를 잃고 펜스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2년 전이었으면 이런 데서 자살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죽고 싶다아아아!!!”
과거의 내가 외치는 듯 크게 고함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뭐야, 옥상에 또 누가 있었던 건가? 고독을 씹으며 외로운 도시 남자 컨셉으로 담배 좀 피워 보려니까 방해 요소가 있네.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옥상 끝에 어떤 남자가 펜스를 붙잡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디션 15분 전. 아마도 저 남자는 아까 복도까지 꽉 들어선 오디션 보러 온 수많은 지망생 중 하나겠지. 인생 좀 꼬인, 적당한 외모에 평범한 연기력의 소유자일 거고.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웠는데도 그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흥미가 생겼다. 오디션 10분 전에는 대기 타고 있어야 할 텐데? 왜 안 가고 있는 거지?
결국, 다 피운 꽁초를 특별 제작한 케이스 안에 넣고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저기요, 오디션 보러 왔어요?”
내 부름에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남자가 이쪽을 돌아봤다. 그러더니 눈을 아주 크게 떴다. 나 알아봤나? 새삼스럽지만 땡큐.
생각보다 꽤 괜찮게 생긴 놈이었다. 염색이라도 했는지 유난히도 까만 머리칼이 앞머리를 덮었고, 그와 대조되게 피부는 기생오라비처럼 하얗다. 무엇보다 눈빛이 참, 오랜만에 마음에 들었다. 선명하게 차가웠지만 울어서 붉어진 눈 탓인지 슬퍼 보이는 것이 묘하다. 평범하지 않게 각진 턱선도 좀 특이하고.
“이름이 뭐……세요?”
무심결에 이상한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그는 더 얼어붙어선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흠, 내가 그렇게 놀랄 정도로 실물이 잘생기긴 했지. 세간의 험한 소문도 조각 미모를 깎아 내릴 순 없으니까 이해한다.
“……정말, 주빈……선배님이십니까?”
그 친구가 한참 뒤에야 뱉은 말이 겨우 그거였다. 얼굴 보면 딱 모르겠어, 후배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렸다. 후배는 얼굴이 뻘게진 채 머리를 흔들더니 곧 호흡을 고르고서 대답했다.
“저는 한제영이라고 합니다. 선배님이 여기 계신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거 죄송할 건 없고, 오디션 보러 온 거 맞죠? 왜 안 가요? 10분 전인데.”
한제영이라는 친구는 순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이 없길래 담배 한 개비쯤 더 피울까 싶어 담뱃갑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후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사실은…… 오디션을 보러 왔지만, 예정이 바뀌어서 안 보게 되었습니다.”
“왜?”
“……그게, 소속사 사정상—”
“오디션 봐요. 갑시다.”
“예. ……예?”
한제영의 등을 팍팍 밀어서 옥상 출입구까지 데려갔다. 이 친구, 나랑 키도 비슷하네. 어디 소속이지? 요새 VOD로 드라마 쫙 챙겨 보고 있지만 이런 페이스 못 봤다. 군필인가, 아직 안 갔다 왔나? 역시 주인공 역 오디션 보러 온 거겠지? 패기 좋네.
손가락으로 쿡쿡 등을 찌를 때마다 나무 인형처럼 삐걱대며 걷는 게 꽤 웃겼다. 그 상태로 한제영이란 친구를 오디션이 진행되는 콘퍼런스 룸까지 데려왔다.
“선배님…… 저, 제가 오디션 보길 원하십니까?”
한제영이 문 앞에서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목소리도 발성 연습이 더 필요하겠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아까 ‘죽고 싶다아아!’도 좋았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 질문에 대답해 주기로 했다.
“그래. 왜 안 봐요? 이런 거 하나하나가 엄청 큰 기회잖아? 이따 봅시다.”
후배님을 뒤로하고 오디션 장소에 입장. 정계수는 ‘야 이 시바, 네가 갑이다 이거냐? 왜 이리 늦어?’ 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내가 이 자식 잔소리에 신경을 썼으면 2년 전에 그렇고 그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대충 살자’하고 대답하며 자리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았다.
그 친구나 한번 기다려 볼까?

* * *


이번 영화의 가제는 <십이월 기담>.
일제 강점기, 1920년대 12월, 조선부터 만주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남자들의 치열한 삶과 연애 이야기다. 엔딩이 해피인지 새드인지는 둘째 치고, 어쨌건 전체적인 흐름은 파국을 향해 격렬하게 치달아가는 내용이다. 신분제의 잔재와 동성애 자체가 범죄로 취급받았던 시대상까지 다룬다.
중요한 건 일단 내 캐릭터, 그리고 상대 캐릭터. 그 둘만 잘 살린다면 이 영화는 끝난 거나 다름없다.
내 캐릭터의 이름은 이케다 신스케. 일본 귀족의 아들로, 모던 보이답게 연애 사업에 신경 쓰며 멋 부리는 전형적인 허세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뒤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과 만주 사업에 도움을 주는 이중적 인물이다. 치명적이게 매력적인 외모를 이용해 여럿 꼬시고 다니지만 결국 마음 두게 되는 건 바로, 다른 남자 주인공인 윤성해.
윤성해는 아주 그냥 독립운동에 뼈를 묻기로 결심한, 그야말로 강성 종자다. 가난한 소작농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에 이어 의열단 활동까지 참여하고, 목숨을 바쳐야 하는 폭탄 투척 작전까지 뛰어드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 목표 외에는 다 나사가 빠져 있다. 이케다를 만난 게 이 인물에게 행운일지 불행일지 감이 안 온다. 개인적으론 불행에 가까워 보인다만.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윤성해라는 배역에 오디션 보러 온 친구들은 전부 그 역에 어울리질 않았다. 대본도 제대로 소화 못 하는 놈들이야 그렇다 치고, 페이스부터가 결단력 없어 보이게 예쁘장한 남자들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날 쳐다보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다. 속으로 ‘어, 저 불륜 배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절대 피해의식이 아닐 거다, 베드신 찍으면서도 내 불륜 상대와 내가 어떻게 떡을 쳤는지나 상상하겠지. 으음, 절대 피해 의식 아닐 거야, 분명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