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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런데 문제는, 그 한제영이라는 친구가 안 들어왔다는 것이다.
“자, 여기까지다. 어때, 마음에 드는 애 있었냐? 난 그 최민후인가, 걔 그래도 괜찮던데.”
후보들을 다 내보내고 나서 정계수가 물었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그 이름을 수군거리고 있는 것이 들린다. 근데 최민후가 누구였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안면인식 장애는 여전하구만? 그 키 훤칠하고 눈썹 짙은 친구. C 엔터테인먼트 소속. 여기 서류 있잖아.”
“얘 별로던데?”
“그럼 누가 좋았는데?”
“정말 이게 다야?”
“한번 내 선에서 거른 거긴 한데, 열두 명 정도면 후보군 많은 거지, 인마.”
시큰둥하다. 후보 많으면 뭐 해, 뭐가 없는걸.
또다시 떠오르는 그 신선한 페이스, 한제영. 왜 안 들어왔지? 내 말이 개 짖는 소리로 들렸나? 딱히 내 말 씹을 만큼 싸가지 없는 놈으로는 안 보였는데.
“그럼 조연 지원한 애들까지 다 보자, 일단.”
난감해하던 정계수가 여직원에게 손짓했다.
조연 오디션에 들어온 오합지졸들의 졸리게 만드는 연기력……. 물론 개중에 괜찮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얼굴이든 체격이든 아쉬운 점이 항상 있었다. 나보다 너무 키가 크면 곤란하고, 배역과 어울리지 않는 쌍꺼풀도 그다지.
아쉽다. 내가 너무 까다로운 건가? 2년이나 쉰 이미지 최악 퇴물 배우 주제에 뭘 너무 많이 바라는 거냔 말이다. 아냐, 나는 배우다. 내가 연기할 작품은 사상 최고로 만들고 싶어.
욕심부린다 해도 좋다. 놀부는 약과다 싶을 정도로 욕망을 꾸역꾸역 가득 담아 명작으로 실현시키고 싶다. 그게 잘못인가? 아니, 잘못 아냐. 불륜보단 잘못 아니지.
그렇게 모놀로그를 펼치고 있는 내 앞에 드디어, 그 친구가 나타났다. 반갑게도.
“안녕하십니까, 한제영입니다.”
네 명 중 두 번째에 서 있던 그는 곧 나와 눈이 마주쳤다. 무심결에 웃으며 손을 흔들었더니 그 친구가 급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의도 바른 친구네.
계수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너 쟤 알아?”
“아, 방금 옥상에서 본 사이.”
“피부 관리한다고 금연한다며? 일주일도 못 가나?”
“오늘까지만 피우고 끊는다.”
오디션은 자기 역의 대사 몇 줄을 연기하고, 그중에서 눈에 띄는 사람에게 심사자가 몇 개 더 시켜 보면 끝나는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내 좆대로 하면 된다.
이번에 들어온 네 명의 배우는 모두 조연 중 하나인 ‘백삼열’에 지원한 사람들이랬다. ‘백삼열’은 주인공 이케다의 친구로, 부유층 고관대작의 자제로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친일파 오브 친일파인 인물이다. 마지막까지 관객들 암 걸리게 할 주역 중 하나랄까.
그러니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한제영이란 친구가 왜 이런 역을 맡겠다고 지원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부터가 미스매치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긴 하지만 도저히 방탕하다거나 배신을 저지를 만한 인물로 보이지 않는 페이스였다. 어딜 봐도 윤성해 역에 딱이잖아? 소속사 사장 누구냐? 소속사가 그렇게 감이 없는 곳인가, 아님 얼굴값 못할 정도로 심각하게 연기를 못하는 놈인가?
“자, 그럼 차례대로 첫 등장 장면, 시작하세요.”
정계수가 가볍게 지시했다.
미리 준비해 와야 했던 기본 대사는 백삼열의 첫 등장, 이케다 신스케와 함께 사교 구락부(클럽)에 나타나 부귀향락을 한껏 누리는 장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여유로운 걸음걸이, 거만한 태도로 여성들과 가비(커피)와 포도주뿐만 아니라 스킨십도 나누는 백삼열.
「이 시대 낭만적 사내의 덕목이 무엇일지 맞춰 보게. …… 바로 재물, 그리고 연애일세. 이케다, 자네도 동의하지? …… 바로 (여성의 턱을 들어 올리며) 이 아름다움, 그리고 이걸 가지기 위해선 필수적인 재물이야말로 삶의 목표이자 끝인 셈이지. 그 외에 어떤 게 의미 있겠나?」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뻔뻔한 자기애를 표출해야 하는 대사다. 그렇게 어려운 부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쉽지만도 않은 부분인 것이다.
오디션이 재개되었고 한 배우가 무난한 연기를 보였으며, 이제 한제영의 차례가 왔다.
한제영 후배님은 긴장이 어린 얼굴을 하고서, 나와 정계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류에 적힌 대로라면 녀석의 나이는 스물다섯, 키 182㎝, 체중 76㎏. C 엔터테인먼트 소속이며 단역 몇 개가 경력의 전부다. 나이치곤 경력이 너무 없어서 의아했다. 아무리 군필이라 해도 그렇지.
“시작하겠습니다.”
숨 들이쉬는 소리. 그리고—
「이 시대 낭만적 사내의 덕목이 무엇일지, 맞춰 보게.」
나는 그 또렷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아까와 다르게 좀 더 명확한 발성, 느슨해진 분위기. 눈을 내리깐 채 빙그레 웃으며 대사를 치는 모습. 여성의 턱 끝을 살짝 건드려 끌듯 부드럽게 손가락을 허공에 댄 채로 서늘한 눈빛이 한순간 내리꽂히는데, 이건 정말 진짜 리얼……!
전혀 안 어울려. 완전 컷이다, 컷.
저게 어디가 친일파 조선인인가. 얼굴도 얼굴이지만, 대사 톤부터가 틀렸다. 대가리 텅텅 빈 부유층 자제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다른 의미의 여유로운 어조다. 게다가 저 눈빛 처리는 뭐고. 자기혐오라도 하는 조선 지식인도 아니고 말야. 감정 표현이나 대사 처리는 나쁘지 않지만—
대체 이 역을 왜 지원한 거냐고! 답답하네.
“저기요, 한제영 씨.”
연기를 마친 그에게 말을 걸자, 콘퍼런스 룸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긍정적 시선들인지. 기분 좋다……. 아니, 이게 아니고.
“그거 그만하고, 이거 해 보세요.”
나는 들고 있던 대본에 빨간 펜으로 대충 표시를 하고 페이지를 접은 후, 그때까지 석상처럼 굳어져 있던 한제영에게 휙 던졌다. 그는 재빨리 대본을 집어 들어 펼치더니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참 표정 다양해서 재밌네.
“시간 줄 테니까 그동안 그 부분 연습하세요. 이 친구들 끝나면 다시 시킬 테니까. 자, 다시 갑시다.”
후배님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정계수가 내 옆구리를 푹 찌르고선, 앞 종이에다 ‘뭐 하냐?’라고 적었다. 내 대답은 ‘후진 양성 중이다’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앞일 잊어버린 채 다음 순서의 조연 배우가 또다시 똑같은 대사를 읊기 시작하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 좀 다른 배우가 눈에 들어온다.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좋아, 좋아.
* * *
“제가…… 윤성해 역, 이라고요?”
선명한 흑발에 먹물 찍어 놓은 듯한 눈동자, 흰 티셔츠에 검은 재킷, 청바지 차림. 스물다섯 살의 신인 연기자 한제영이 방 밖에서 정계수 녀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적잖게 당황한 목소리다.
나? 나는 회의실에 들어앉아 매실 사탕 여섯 개째를 빨아먹고 있는 중이다.
“어, 그렇게 됐다. 원랜 심사 좀 하고 나서 며칠 뒤에 통보하는데…… 우리의 주연 배우께서 이미 고집을 발딱 세워서. 이렇게 된 거 빨리빨리 처리하자고.”
“그…… 저를 믿어 주시는 건 정말로 감사하지만, 저는 한 번도 주연을 맡아 본 적이 없습니다. 분명 민폐 끼칠 게 뻔해요.”
군필자답게 굉장히 각 잡힌 태도다. 그는 아까보다 더 긴장한 얼굴이었다. 정작 윤성해 연기는 그렇게 뻔뻔할 정도로 잘해 놓고서 이제 와서야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뭔지.
다른 지원자들을 내보낸 후 혼자 남은 한제영이 편경 소리처럼 또렷한 목소리로 윤성해의 대사를 읊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야말로 쾌감을 느꼈다. 말 그대로 빳빳하게 설 뻔했다. 삐딱하게 놓인 보도블록이 딱 맞춰지는 느낌, 혼자만 삐죽 튀어나온 펜을 꾹 눌러 가지런히 맞추는 기분.
신인답게 어색한 부분은 있었지만 그래서 신선하기도 했다. 어조 높낮이가 좀 평탄한 느낌이지만. 아냐, 이게 오히려 윤성해라는 인물에 어울린다. 뭐시기 저시기 연기 학원에서 배워 온 양산형 연기 같지도 않고, 적어도 주연에 지원했던 열두 명보단 훨씬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계수가 내 말에 동의했다. ‘두 번째로’ 내 안목에 공감해 주겠노라고 심술궂게 웃으면서. 내 악우는 없는 소리 하는 놈은 아니다. 그래, 이번에는 콩깍지 낀 게 아닌 것이다. 첫 번째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뭐, 민폐 끼치면 하차하면 되는 거지. 내 디렉팅 못 믿어? 내가 바로 첫 영화부터 5백만 찍은 천재 감독이야, 알지?”
“예, 그렇지만…….”
“잠재력 200퍼센트 끌어내 준다니까. 김영한 알지? 내가 말야, 걔를—”
정계수 저놈, 또 신인한테 쓸데없이 자기 PR식 약팔이 농담하기 시작하네.
나는 누워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 정계수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고, 한제영은 날렵한 눈을 크게 뜨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스물다섯이라 그런지 피부 상태가 완벽 관리한 듯이 좋다.
그런 신선한 페이스를 앞에 두고서, 정색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우리 후배님, 네가 연기자면 남한테 민폐 끼칠지 말지 걱정할 시간에 가서 연기 연습이나 더 해. 너 고른 건 나고, 네가 쓰레기같이 하면 내가 보는 눈 없는 거고, 네가 잘하면 나도 안목 좋은 명배우 되는 거고. 알겠어? 간단하잖아, 이 친구야. 신인인데 그렇게 패기가 없어서 뭘 하겠단 건데?”
“…….”
“너희 소속사 사장 누군진 모르겠는데 가서 전해. 이 얼굴에 이런 연기력 갖춘 놈한테 매니저 하나 안 붙이고 백삼열 같은 역에 지원하게 놔두는 거부터가 글러 먹었다고. 됐어, 가 봐.”
순순히 말을 들은 어린 친구는, 1,300도 불가마에서 구운 청자마냥 딱딱하게 굳어진 것 같다. 겨우 ‘알겠습니다.’라고만 답할 뿐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리 무서운 선배도 아닌데 왜 이리 긴장하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내 옥안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는 걸까. 나는 그 어깨를 두 번 탁탁 치고서 정계수에게 ‘난 간다’하고 인사를 던졌다. 정계수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쪼개고 있었다.
자, 이제 상대역도 구했고, 남은 건 내 스케줄을 위한 매니저를 구하는 일이다. 스마트폰을 들어 전 매니저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욕 없던 지난 2년이 거짓말인 것처럼 열기가 솟구친다.
일이 갈수록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 * *
-이제 와 갖고 연락하면 어뜩허냐, 성빈아.
전 매니저—장현세 형은 전 소속사, J.A. 엔터테인먼트에서 팀장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즉 내 매니저는 못하게 됐다는 뜻이다. 자식까지 있는 형이니 그 자리 다 포기하고 바로 이쪽으로 오라고 할 수는 없겠지.
형과는 신인 시절부터 쭉 함께 해 왔다. 전라도 사투리가 아주 살짝 섞인 정겨운 말투의 소유자로, 일 철저히 하는 건 물론이고 인성도 좋았던 사람이었다. 모든 스케줄마다 항상 함께했고, 가끔 같이 술도 마시며 위안이 되어 주었던 현세 형.
……그 사건 이후로, 형은 나를 안타깝게 보면서도 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질책했다. 그리고 멘탈이 가루가 되어 술에 꼴아 버린 나에게 결국 작별을 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연락이 두절된 것은 아니었다. 매니저를 그만뒀을 뿐이지 형은 꾸준히 연락을 해 왔다.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리라고, 언제든 찾아갈 테니 다시 일 좀 하라고. 그러나 난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미안해. 사정 알잖아.”
-그랴, 알기야 알지만은……. 그럼 이제 누구한테 연락할라고?
“몰라. 신입이나 구해서 경험 쌓게 하다가 홧병 걸려 돌아가셔야지, 뭐.”
형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안 삐진 건 아니었으므로 전화에 대고 투덜거렸다. 담배를 피우며 궁리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감이 안 서는 걸 어떡하겠는가. 어차피 영화 촬영 외엔 스케줄 관리할 것도 없으니 그냥 단독으로 행동해도 될까? 그냥 직접 차 몰고 내가 관리 다 해? 절약 정신 발휘 좀 해 봐?
-성빈아, 그럼 내 아는 동상 하나 소개해 주랴?
“어.”
현세 형이 던진 제안에 나는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고 긍정했다. 그래, 급한 건 나다.
-갸도 하던 일 정리하는 시간 필요해 갖고 바로는 안 되고잉. 빠르면 한 2주 걸릴 거라. 연락처 카톡으로 보낼 테니께, 기다려 봐라.
“고마워. 진짜 고맙다, 형.”
-그랴,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성빈아, 지발 좀 제대로 살자.
“……그래, 고마워.”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이 집의 넓은 거실과 커다란 소파, 커다란 벽걸이 TV. 그 화면에 비치는 건 나 혼자다.
2년 동안 언제나 그랬다. 집에 찾아오려는 사람은 꽤 됐다. 위로가 목적이든, 돈 받아 내는 게 목적이든. 그렇지만 절대로 아무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들어왔다간 상처받고 기분 좆같아질 것 같아서.
한동안 문 걸어 잠그고 TV며 라디오며 외부와 전부 단절한 상태로 방구석 폐인처럼 살았다. 1년이 지나서야 겨우 밖에 나와 정계수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며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혼자는 혼자다. 새로운 누군가를 집에 들여놓을 자신이 없다. 누군가와 성적으로 접촉할 자신은 더더욱 없다.
애초에 불륜남에게 누가 접근하겠어? 그런 멍청한 인간이 있기는 한가? 유부녀와 바람난 남자에게 매력을 느낄만한 사람 따위, 여자든 남자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현세 형, 나 제대로 살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혀.
……하, 씨발. 오늘 저녁 메뉴도 맥주로 정했다.
* * *
그 후 영화 촬영 스태프들을 모두 모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조연 배우들도. 이름값 높으신 선배 배우 몇 분의 캐스팅에는 실패했다는데, 아마 그 원인은 나일 것이다.
소속사 사장 부인과 바람난 배우의 악명은 이미 널리 널리 퍼졌고, 선배님들 입장에서 그런 놈이 주연인 영화는 달갑지 않았으리라. 2년이나 쉰 배우가 얼마나 흥행에 성공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을 테고.
그렇더라도 스캔들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분들도 계신 모양인지, 어떻게든 캐스팅도 다 처리됐다. 정계수 감독의 이름값이 한몫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건 대본 리딩 날짜도 잡혔고, 장소 섭외며 장비 대여며 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며 계수 녀석은 껄껄 웃었다.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닐 텐데도 저렇게 여유로운 건 그놈의 장점이다.
한제영, 그 신인 연기자는 결국 윤성해 역을 하겠다고 했단다. 과연 내 말을 소속사 사장에게 전했을까? 아마도 아니겠지, 눈치가 있으면. 그 친구 특유의 눈빛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대본 리딩 당일. 2년 전과는 다르게, 나는 또 30분 일찍 도착했다.
도착해서 대본 리딩할 장소에 들어가기 전 기자에게 붙잡혀서 갖은 질문을 들어야 했다. ‘2년 만의 복귀인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2년 전 사건에 관해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국민들에게 하실 말씀은?’, ‘너무 이른 복귀라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왜 나한테 붙은 기자가 둘뿐인 걸까. 내 명성은 그렇게 많이 죽은 걸까? 그렇게 기자를 투자할 생각이 없단 말인가, 이놈의 연예 언론은? 기자의 ㄱ자만 들어도 아직 온몸이 떨렸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의 관종 기질은 언론의 무관심에 분노하고 있었다.
대답은 예전 소속사에서 배운 대로 언제나 그렇듯 간단하게. ‘연기하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송구합니다, 드릴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죄송하진 않다. 대중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죄송해야 하는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납득 못하고 있는 걸.
대본 리딩이 진행될 큰 회의실에 들어와서 탁자에 엎드렸다. 내 뒤로, 앞으로 스태프들이며 단역들이며 휙휙 지나다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마주할 자신은, 아직 없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가 옆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저음의 목소리. 엎드린 상태로 눈을 뜨니, 야구 모자를 벗어 들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요주의 신인 배우가 보였다. 한제영. 내가 뽑은 섹스신 상대. 긴장했는지 얼굴이 상기되어선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독특하게 잘생겼네.
“어, 왔냐.”
“예, 선배님.”
그나마 아는 얼굴이 있으니 좀 낫다.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살폈다. 조연 배우 몇몇이 긴 테이블에 드문드문 앉아 있고, 자리마다 음료수와 다과를 놓고 있는 스태프들이 보인다. 얼굴이 낯익은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다시 한제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계속 나를 보고 있었는지 곧은 자세 그대로 정지 상태다. 두꺼운 뉴트럴 톤 니트 카디건에 티셔츠, 청바지. 소속사에서 딱히 코디를 신경 써 주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자기 취향의 옷차림이겠지.
“대본은 많이 읽어 봤어?”
“할 수 있는 한 많이 연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많이 부족하겠지만…….”
“연습했음 됐지. 자신감 좀 가져라, 자식아. 너 잘한다고.”
한제영의 반응을 볼 시간은 없었다. 그 후 이름값 높은 중견 배우 선배님들께서 하나둘씩 입장하셨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열심히 굽혔고, 선배님들께서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아니었는지 살피기도 힘들 만큼 정신이 없었다.
정계수도 어느샌가 나타나 영업용 미소를 싱글싱글 띠며 한 분씩 악수를 했다. 영화 촬영에 있어서 이런 의례적인 절차만큼 쓸모없고도 중요한 과정이 따로 없다. 내 정신적 고통이야 어찌 됐든…….
그렇게 모두가 착석한 끝에,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 * *
백삼열 역의 조연 배우는 내 고등학교 한참 후배인 허윤서로, 그야말로 비열한 인상의 소유자다. 다만 실제로는 인상과 다르게 굉장히 착하고 순박한 시골 청년이다. 나와 눈인사를 나눠 준다는 것부터가 호구나 다름없는지도.
내 내레이션을 제외하면 그 친구와 함께 나오는 장면이 첫 신이다. 사교 클럽에서 방탕하게 놀며 시대를 외면하는 청년들, 그리고 조선인도 아닌 주인공 이케다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잔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장면.
허윤서가 영화 첫 대사로 오디션에 나왔던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이 시대 낭만적 사내의 덕목이 무엇일지 맞춰 보게.」
「난 수수께끼엔 자신 없으니 말해 주게. 뭔가?」
「바로 재물, 그리고 연앨세. 이케다, 자네도 동의하지? 바로 이 아름다움, 그리고 이걸 가지기 위해선 필수적인 재물이야말로 삶의 목표이자 끝인 셈이지. 그 외에 어떤 게 의미 있겠나?”
「자네다운 발언이야. 난 자네 꽁무니 따라가려면 아직 먼 것 같군, 하하하.」
대사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고양된다. 출연이 확정되고 난 이후로 내내 대본을 잡고 살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합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렇게나 좋아 죽으면서 연기를 놓고 있었다는 게 참, 나 자신이 병신 같게 느껴진다. 2년 전의 내가 얼마나 한심한 선택을 했는지—
그 이후로 이케다 백작 역의 고용돌 선배님과 독립 사업 주동자인 이청래 역의 송기훈 선배님과도 대사 핑퐁을 진행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 만큼, 발끝이 저릿해질 정도로 나는 감정 표현에 열을 올렸다.
일본인으로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질책, 일본인이라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속에서 이케다 신스케라는 인물이 느끼는 자괴감과 죄책감을 대사에 조금이라도 더 담아내려고 애썼다.
들숨 한 번조차도 안타까울 정도로 나는 예민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차례가 왔다.
“자, 그럼 이번 장면은 우리 두 주인공 첫 만남이네요.”
정계수가 씩 웃으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그러고는 짧게 박수까지 친다. 그러자 대본 리딩에 참여한 연기자들이 다들 박수를 짤막하게 쳐 주었다. 마치 연극을 기다리는 관객인 것처럼.
나는 아직 가시지 않는 흥분 덕에 뜨거운 눈으로 한제영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쪽을 보는 대신 눈을 내리깔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한겨울 얼어 버린 흙바닥 같은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한제영이라는 친구가 안 들어왔다는 것이다.
“자, 여기까지다. 어때, 마음에 드는 애 있었냐? 난 그 최민후인가, 걔 그래도 괜찮던데.”
후보들을 다 내보내고 나서 정계수가 물었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그 이름을 수군거리고 있는 것이 들린다. 근데 최민후가 누구였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안면인식 장애는 여전하구만? 그 키 훤칠하고 눈썹 짙은 친구. C 엔터테인먼트 소속. 여기 서류 있잖아.”
“얘 별로던데?”
“그럼 누가 좋았는데?”
“정말 이게 다야?”
“한번 내 선에서 거른 거긴 한데, 열두 명 정도면 후보군 많은 거지, 인마.”
시큰둥하다. 후보 많으면 뭐 해, 뭐가 없는걸.
또다시 떠오르는 그 신선한 페이스, 한제영. 왜 안 들어왔지? 내 말이 개 짖는 소리로 들렸나? 딱히 내 말 씹을 만큼 싸가지 없는 놈으로는 안 보였는데.
“그럼 조연 지원한 애들까지 다 보자, 일단.”
난감해하던 정계수가 여직원에게 손짓했다.
조연 오디션에 들어온 오합지졸들의 졸리게 만드는 연기력……. 물론 개중에 괜찮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얼굴이든 체격이든 아쉬운 점이 항상 있었다. 나보다 너무 키가 크면 곤란하고, 배역과 어울리지 않는 쌍꺼풀도 그다지.
아쉽다. 내가 너무 까다로운 건가? 2년이나 쉰 이미지 최악 퇴물 배우 주제에 뭘 너무 많이 바라는 거냔 말이다. 아냐, 나는 배우다. 내가 연기할 작품은 사상 최고로 만들고 싶어.
욕심부린다 해도 좋다. 놀부는 약과다 싶을 정도로 욕망을 꾸역꾸역 가득 담아 명작으로 실현시키고 싶다. 그게 잘못인가? 아니, 잘못 아냐. 불륜보단 잘못 아니지.
그렇게 모놀로그를 펼치고 있는 내 앞에 드디어, 그 친구가 나타났다. 반갑게도.
“안녕하십니까, 한제영입니다.”
네 명 중 두 번째에 서 있던 그는 곧 나와 눈이 마주쳤다. 무심결에 웃으며 손을 흔들었더니 그 친구가 급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의도 바른 친구네.
계수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너 쟤 알아?”
“아, 방금 옥상에서 본 사이.”
“피부 관리한다고 금연한다며? 일주일도 못 가나?”
“오늘까지만 피우고 끊는다.”
오디션은 자기 역의 대사 몇 줄을 연기하고, 그중에서 눈에 띄는 사람에게 심사자가 몇 개 더 시켜 보면 끝나는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내 좆대로 하면 된다.
이번에 들어온 네 명의 배우는 모두 조연 중 하나인 ‘백삼열’에 지원한 사람들이랬다. ‘백삼열’은 주인공 이케다의 친구로, 부유층 고관대작의 자제로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친일파 오브 친일파인 인물이다. 마지막까지 관객들 암 걸리게 할 주역 중 하나랄까.
그러니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한제영이란 친구가 왜 이런 역을 맡겠다고 지원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부터가 미스매치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긴 하지만 도저히 방탕하다거나 배신을 저지를 만한 인물로 보이지 않는 페이스였다. 어딜 봐도 윤성해 역에 딱이잖아? 소속사 사장 누구냐? 소속사가 그렇게 감이 없는 곳인가, 아님 얼굴값 못할 정도로 심각하게 연기를 못하는 놈인가?
“자, 그럼 차례대로 첫 등장 장면, 시작하세요.”
정계수가 가볍게 지시했다.
미리 준비해 와야 했던 기본 대사는 백삼열의 첫 등장, 이케다 신스케와 함께 사교 구락부(클럽)에 나타나 부귀향락을 한껏 누리는 장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여유로운 걸음걸이, 거만한 태도로 여성들과 가비(커피)와 포도주뿐만 아니라 스킨십도 나누는 백삼열.
「이 시대 낭만적 사내의 덕목이 무엇일지 맞춰 보게. …… 바로 재물, 그리고 연애일세. 이케다, 자네도 동의하지? …… 바로 (여성의 턱을 들어 올리며) 이 아름다움, 그리고 이걸 가지기 위해선 필수적인 재물이야말로 삶의 목표이자 끝인 셈이지. 그 외에 어떤 게 의미 있겠나?」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뻔뻔한 자기애를 표출해야 하는 대사다. 그렇게 어려운 부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쉽지만도 않은 부분인 것이다.
오디션이 재개되었고 한 배우가 무난한 연기를 보였으며, 이제 한제영의 차례가 왔다.
한제영 후배님은 긴장이 어린 얼굴을 하고서, 나와 정계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류에 적힌 대로라면 녀석의 나이는 스물다섯, 키 182㎝, 체중 76㎏. C 엔터테인먼트 소속이며 단역 몇 개가 경력의 전부다. 나이치곤 경력이 너무 없어서 의아했다. 아무리 군필이라 해도 그렇지.
“시작하겠습니다.”
숨 들이쉬는 소리. 그리고—
「이 시대 낭만적 사내의 덕목이 무엇일지, 맞춰 보게.」
나는 그 또렷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아까와 다르게 좀 더 명확한 발성, 느슨해진 분위기. 눈을 내리깐 채 빙그레 웃으며 대사를 치는 모습. 여성의 턱 끝을 살짝 건드려 끌듯 부드럽게 손가락을 허공에 댄 채로 서늘한 눈빛이 한순간 내리꽂히는데, 이건 정말 진짜 리얼……!
전혀 안 어울려. 완전 컷이다, 컷.
저게 어디가 친일파 조선인인가. 얼굴도 얼굴이지만, 대사 톤부터가 틀렸다. 대가리 텅텅 빈 부유층 자제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다른 의미의 여유로운 어조다. 게다가 저 눈빛 처리는 뭐고. 자기혐오라도 하는 조선 지식인도 아니고 말야. 감정 표현이나 대사 처리는 나쁘지 않지만—
대체 이 역을 왜 지원한 거냐고! 답답하네.
“저기요, 한제영 씨.”
연기를 마친 그에게 말을 걸자, 콘퍼런스 룸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긍정적 시선들인지. 기분 좋다……. 아니, 이게 아니고.
“그거 그만하고, 이거 해 보세요.”
나는 들고 있던 대본에 빨간 펜으로 대충 표시를 하고 페이지를 접은 후, 그때까지 석상처럼 굳어져 있던 한제영에게 휙 던졌다. 그는 재빨리 대본을 집어 들어 펼치더니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참 표정 다양해서 재밌네.
“시간 줄 테니까 그동안 그 부분 연습하세요. 이 친구들 끝나면 다시 시킬 테니까. 자, 다시 갑시다.”
후배님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정계수가 내 옆구리를 푹 찌르고선, 앞 종이에다 ‘뭐 하냐?’라고 적었다. 내 대답은 ‘후진 양성 중이다’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앞일 잊어버린 채 다음 순서의 조연 배우가 또다시 똑같은 대사를 읊기 시작하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 좀 다른 배우가 눈에 들어온다.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좋아, 좋아.
“제가…… 윤성해 역, 이라고요?”
선명한 흑발에 먹물 찍어 놓은 듯한 눈동자, 흰 티셔츠에 검은 재킷, 청바지 차림. 스물다섯 살의 신인 연기자 한제영이 방 밖에서 정계수 녀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적잖게 당황한 목소리다.
나? 나는 회의실에 들어앉아 매실 사탕 여섯 개째를 빨아먹고 있는 중이다.
“어, 그렇게 됐다. 원랜 심사 좀 하고 나서 며칠 뒤에 통보하는데…… 우리의 주연 배우께서 이미 고집을 발딱 세워서. 이렇게 된 거 빨리빨리 처리하자고.”
“그…… 저를 믿어 주시는 건 정말로 감사하지만, 저는 한 번도 주연을 맡아 본 적이 없습니다. 분명 민폐 끼칠 게 뻔해요.”
군필자답게 굉장히 각 잡힌 태도다. 그는 아까보다 더 긴장한 얼굴이었다. 정작 윤성해 연기는 그렇게 뻔뻔할 정도로 잘해 놓고서 이제 와서야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뭔지.
다른 지원자들을 내보낸 후 혼자 남은 한제영이 편경 소리처럼 또렷한 목소리로 윤성해의 대사를 읊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야말로 쾌감을 느꼈다. 말 그대로 빳빳하게 설 뻔했다. 삐딱하게 놓인 보도블록이 딱 맞춰지는 느낌, 혼자만 삐죽 튀어나온 펜을 꾹 눌러 가지런히 맞추는 기분.
신인답게 어색한 부분은 있었지만 그래서 신선하기도 했다. 어조 높낮이가 좀 평탄한 느낌이지만. 아냐, 이게 오히려 윤성해라는 인물에 어울린다. 뭐시기 저시기 연기 학원에서 배워 온 양산형 연기 같지도 않고, 적어도 주연에 지원했던 열두 명보단 훨씬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계수가 내 말에 동의했다. ‘두 번째로’ 내 안목에 공감해 주겠노라고 심술궂게 웃으면서. 내 악우는 없는 소리 하는 놈은 아니다. 그래, 이번에는 콩깍지 낀 게 아닌 것이다. 첫 번째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뭐, 민폐 끼치면 하차하면 되는 거지. 내 디렉팅 못 믿어? 내가 바로 첫 영화부터 5백만 찍은 천재 감독이야, 알지?”
“예, 그렇지만…….”
“잠재력 200퍼센트 끌어내 준다니까. 김영한 알지? 내가 말야, 걔를—”
정계수 저놈, 또 신인한테 쓸데없이 자기 PR식 약팔이 농담하기 시작하네.
나는 누워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 정계수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고, 한제영은 날렵한 눈을 크게 뜨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스물다섯이라 그런지 피부 상태가 완벽 관리한 듯이 좋다.
그런 신선한 페이스를 앞에 두고서, 정색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우리 후배님, 네가 연기자면 남한테 민폐 끼칠지 말지 걱정할 시간에 가서 연기 연습이나 더 해. 너 고른 건 나고, 네가 쓰레기같이 하면 내가 보는 눈 없는 거고, 네가 잘하면 나도 안목 좋은 명배우 되는 거고. 알겠어? 간단하잖아, 이 친구야. 신인인데 그렇게 패기가 없어서 뭘 하겠단 건데?”
“…….”
“너희 소속사 사장 누군진 모르겠는데 가서 전해. 이 얼굴에 이런 연기력 갖춘 놈한테 매니저 하나 안 붙이고 백삼열 같은 역에 지원하게 놔두는 거부터가 글러 먹었다고. 됐어, 가 봐.”
순순히 말을 들은 어린 친구는, 1,300도 불가마에서 구운 청자마냥 딱딱하게 굳어진 것 같다. 겨우 ‘알겠습니다.’라고만 답할 뿐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리 무서운 선배도 아닌데 왜 이리 긴장하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내 옥안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는 걸까. 나는 그 어깨를 두 번 탁탁 치고서 정계수에게 ‘난 간다’하고 인사를 던졌다. 정계수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쪼개고 있었다.
자, 이제 상대역도 구했고, 남은 건 내 스케줄을 위한 매니저를 구하는 일이다. 스마트폰을 들어 전 매니저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욕 없던 지난 2년이 거짓말인 것처럼 열기가 솟구친다.
일이 갈수록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이제 와 갖고 연락하면 어뜩허냐, 성빈아.
전 매니저—장현세 형은 전 소속사, J.A. 엔터테인먼트에서 팀장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즉 내 매니저는 못하게 됐다는 뜻이다. 자식까지 있는 형이니 그 자리 다 포기하고 바로 이쪽으로 오라고 할 수는 없겠지.
형과는 신인 시절부터 쭉 함께 해 왔다. 전라도 사투리가 아주 살짝 섞인 정겨운 말투의 소유자로, 일 철저히 하는 건 물론이고 인성도 좋았던 사람이었다. 모든 스케줄마다 항상 함께했고, 가끔 같이 술도 마시며 위안이 되어 주었던 현세 형.
……그 사건 이후로, 형은 나를 안타깝게 보면서도 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질책했다. 그리고 멘탈이 가루가 되어 술에 꼴아 버린 나에게 결국 작별을 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연락이 두절된 것은 아니었다. 매니저를 그만뒀을 뿐이지 형은 꾸준히 연락을 해 왔다.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리라고, 언제든 찾아갈 테니 다시 일 좀 하라고. 그러나 난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미안해. 사정 알잖아.”
-그랴, 알기야 알지만은……. 그럼 이제 누구한테 연락할라고?
“몰라. 신입이나 구해서 경험 쌓게 하다가 홧병 걸려 돌아가셔야지, 뭐.”
형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안 삐진 건 아니었으므로 전화에 대고 투덜거렸다. 담배를 피우며 궁리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감이 안 서는 걸 어떡하겠는가. 어차피 영화 촬영 외엔 스케줄 관리할 것도 없으니 그냥 단독으로 행동해도 될까? 그냥 직접 차 몰고 내가 관리 다 해? 절약 정신 발휘 좀 해 봐?
-성빈아, 그럼 내 아는 동상 하나 소개해 주랴?
“어.”
현세 형이 던진 제안에 나는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고 긍정했다. 그래, 급한 건 나다.
-갸도 하던 일 정리하는 시간 필요해 갖고 바로는 안 되고잉. 빠르면 한 2주 걸릴 거라. 연락처 카톡으로 보낼 테니께, 기다려 봐라.
“고마워. 진짜 고맙다, 형.”
-그랴,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성빈아, 지발 좀 제대로 살자.
“……그래, 고마워.”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이 집의 넓은 거실과 커다란 소파, 커다란 벽걸이 TV. 그 화면에 비치는 건 나 혼자다.
2년 동안 언제나 그랬다. 집에 찾아오려는 사람은 꽤 됐다. 위로가 목적이든, 돈 받아 내는 게 목적이든. 그렇지만 절대로 아무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들어왔다간 상처받고 기분 좆같아질 것 같아서.
한동안 문 걸어 잠그고 TV며 라디오며 외부와 전부 단절한 상태로 방구석 폐인처럼 살았다. 1년이 지나서야 겨우 밖에 나와 정계수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며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혼자는 혼자다. 새로운 누군가를 집에 들여놓을 자신이 없다. 누군가와 성적으로 접촉할 자신은 더더욱 없다.
애초에 불륜남에게 누가 접근하겠어? 그런 멍청한 인간이 있기는 한가? 유부녀와 바람난 남자에게 매력을 느낄만한 사람 따위, 여자든 남자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현세 형, 나 제대로 살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혀.
……하, 씨발. 오늘 저녁 메뉴도 맥주로 정했다.
그 후 영화 촬영 스태프들을 모두 모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조연 배우들도. 이름값 높으신 선배 배우 몇 분의 캐스팅에는 실패했다는데, 아마 그 원인은 나일 것이다.
소속사 사장 부인과 바람난 배우의 악명은 이미 널리 널리 퍼졌고, 선배님들 입장에서 그런 놈이 주연인 영화는 달갑지 않았으리라. 2년이나 쉰 배우가 얼마나 흥행에 성공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을 테고.
그렇더라도 스캔들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분들도 계신 모양인지, 어떻게든 캐스팅도 다 처리됐다. 정계수 감독의 이름값이 한몫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건 대본 리딩 날짜도 잡혔고, 장소 섭외며 장비 대여며 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며 계수 녀석은 껄껄 웃었다.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닐 텐데도 저렇게 여유로운 건 그놈의 장점이다.
한제영, 그 신인 연기자는 결국 윤성해 역을 하겠다고 했단다. 과연 내 말을 소속사 사장에게 전했을까? 아마도 아니겠지, 눈치가 있으면. 그 친구 특유의 눈빛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대본 리딩 당일. 2년 전과는 다르게, 나는 또 30분 일찍 도착했다.
도착해서 대본 리딩할 장소에 들어가기 전 기자에게 붙잡혀서 갖은 질문을 들어야 했다. ‘2년 만의 복귀인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2년 전 사건에 관해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국민들에게 하실 말씀은?’, ‘너무 이른 복귀라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왜 나한테 붙은 기자가 둘뿐인 걸까. 내 명성은 그렇게 많이 죽은 걸까? 그렇게 기자를 투자할 생각이 없단 말인가, 이놈의 연예 언론은? 기자의 ㄱ자만 들어도 아직 온몸이 떨렸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의 관종 기질은 언론의 무관심에 분노하고 있었다.
대답은 예전 소속사에서 배운 대로 언제나 그렇듯 간단하게. ‘연기하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송구합니다, 드릴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죄송하진 않다. 대중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죄송해야 하는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납득 못하고 있는 걸.
대본 리딩이 진행될 큰 회의실에 들어와서 탁자에 엎드렸다. 내 뒤로, 앞으로 스태프들이며 단역들이며 휙휙 지나다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마주할 자신은, 아직 없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가 옆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저음의 목소리. 엎드린 상태로 눈을 뜨니, 야구 모자를 벗어 들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요주의 신인 배우가 보였다. 한제영. 내가 뽑은 섹스신 상대. 긴장했는지 얼굴이 상기되어선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독특하게 잘생겼네.
“어, 왔냐.”
“예, 선배님.”
그나마 아는 얼굴이 있으니 좀 낫다.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살폈다. 조연 배우 몇몇이 긴 테이블에 드문드문 앉아 있고, 자리마다 음료수와 다과를 놓고 있는 스태프들이 보인다. 얼굴이 낯익은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다시 한제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계속 나를 보고 있었는지 곧은 자세 그대로 정지 상태다. 두꺼운 뉴트럴 톤 니트 카디건에 티셔츠, 청바지. 소속사에서 딱히 코디를 신경 써 주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자기 취향의 옷차림이겠지.
“대본은 많이 읽어 봤어?”
“할 수 있는 한 많이 연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많이 부족하겠지만…….”
“연습했음 됐지. 자신감 좀 가져라, 자식아. 너 잘한다고.”
한제영의 반응을 볼 시간은 없었다. 그 후 이름값 높은 중견 배우 선배님들께서 하나둘씩 입장하셨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열심히 굽혔고, 선배님들께서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아니었는지 살피기도 힘들 만큼 정신이 없었다.
정계수도 어느샌가 나타나 영업용 미소를 싱글싱글 띠며 한 분씩 악수를 했다. 영화 촬영에 있어서 이런 의례적인 절차만큼 쓸모없고도 중요한 과정이 따로 없다. 내 정신적 고통이야 어찌 됐든…….
그렇게 모두가 착석한 끝에,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백삼열 역의 조연 배우는 내 고등학교 한참 후배인 허윤서로, 그야말로 비열한 인상의 소유자다. 다만 실제로는 인상과 다르게 굉장히 착하고 순박한 시골 청년이다. 나와 눈인사를 나눠 준다는 것부터가 호구나 다름없는지도.
내 내레이션을 제외하면 그 친구와 함께 나오는 장면이 첫 신이다. 사교 클럽에서 방탕하게 놀며 시대를 외면하는 청년들, 그리고 조선인도 아닌 주인공 이케다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잔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장면.
허윤서가 영화 첫 대사로 오디션에 나왔던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이 시대 낭만적 사내의 덕목이 무엇일지 맞춰 보게.」
「난 수수께끼엔 자신 없으니 말해 주게. 뭔가?」
「바로 재물, 그리고 연앨세. 이케다, 자네도 동의하지? 바로 이 아름다움, 그리고 이걸 가지기 위해선 필수적인 재물이야말로 삶의 목표이자 끝인 셈이지. 그 외에 어떤 게 의미 있겠나?”
「자네다운 발언이야. 난 자네 꽁무니 따라가려면 아직 먼 것 같군, 하하하.」
대사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고양된다. 출연이 확정되고 난 이후로 내내 대본을 잡고 살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합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렇게나 좋아 죽으면서 연기를 놓고 있었다는 게 참, 나 자신이 병신 같게 느껴진다. 2년 전의 내가 얼마나 한심한 선택을 했는지—
그 이후로 이케다 백작 역의 고용돌 선배님과 독립 사업 주동자인 이청래 역의 송기훈 선배님과도 대사 핑퐁을 진행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 만큼, 발끝이 저릿해질 정도로 나는 감정 표현에 열을 올렸다.
일본인으로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질책, 일본인이라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속에서 이케다 신스케라는 인물이 느끼는 자괴감과 죄책감을 대사에 조금이라도 더 담아내려고 애썼다.
들숨 한 번조차도 안타까울 정도로 나는 예민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차례가 왔다.
“자, 그럼 이번 장면은 우리 두 주인공 첫 만남이네요.”
정계수가 씩 웃으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그러고는 짧게 박수까지 친다. 그러자 대본 리딩에 참여한 연기자들이 다들 박수를 짤막하게 쳐 주었다. 마치 연극을 기다리는 관객인 것처럼.
나는 아직 가시지 않는 흥분 덕에 뜨거운 눈으로 한제영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쪽을 보는 대신 눈을 내리깔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한겨울 얼어 버린 흙바닥 같은 차가운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