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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시작해 보실까요?”
정계수의 말에 이청래 역의 송기훈 선배님이 헛기침을 하고서,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자네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네. 이쪽은 윤성해라고, 우리 결사의 훌륭한 재목 중 하나지. 그리고 이쪽은—」
「이케다 신스케라고 합니다.」
조선의 상황을 슬퍼하는 괴짜 일본인답게 이케다는 조선말을 능숙하게 할 줄 안다. 그리고 윤성해를 보는 순간, 악수를 위해 손을 내미는 그때, 그는 눈앞의 남자에게 반해 버렸다. 섹슈얼한 애정이라기보단 동경에 가까운 감정이 처음이었으리라.
그러나 윤성해는 이케다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경계하는 태도로 말한다.
「왜 왜인이 여기 있습니까, 선생님. 밀정 아닙니까?」
더빙을 맡아도 괜찮을 정도로 깨끗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무의식중에 미간을 찡그렸다. 귀가 시릴 만큼 듣기 좋은 대사 처리였다.
「허허, 이 친구가 밀정이라면 난 이미 총살됐을 걸세. 오히려 이케다 군이 내 목숨을 살린 적이 많지.」
“들으셨소? 들었으면 이렇게 허공에서 헤매고 있는 손 좀 구해 주시지 그러오.」
이케다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오른손을 흔들어 보이고, 윤성해는 당연하지만 그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대신 차갑게 ‘저는 왜인과 일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이청래에게 통고하고서 그 자리를 떠난다. 애정 관계가 될 사람들치곤 굉장히 딱딱한 만남인 셈이다.
윤성해가 떠난 후 이케다와 이청래는 경성의 주요 경찰서를 습격하려는 계획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일본인이자 경찰 관계자인 쿠라모토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러나 종로 시내 사교 클럽에서의 작전이 여러 요인으로 꼬인 탓에 도망치던 이케다는 우연히 골목길에서 윤성해를 마주치게 된다.
나는 숨을 몇 번 들이마신 뒤 한제영에게 대사를 건넸다.
「왜 여기 있는 거—」
「쉿, 조용히 하시오.」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쩐지 차갑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은 아니리라. 아마도 후배님은 그 나름대로 감정을 담아 연기 중인 거겠지. 괜찮은 해석이다.
나중에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뒷조사 끝에 윤성해도 이케다가 진심으로 의열단을 돕고 있음을 알았을 때니 말이다. 물론 윤성해는 겉으로 호감을 표현하는 타입의 인물은 아니므로, 추격이 잦아든 후에 차가운 말이나 던졌다.
「작전 실패가 부끄럽지도 않소? 얼굴에 자괴감이 한 터럭도 보이지 않는군, 왜인답게.」
「하하, 말끝마다 왜인, 왜인거리는 게 상당히 불쾌하지만, 동지 얼굴 봐서 참아 주리다.」
「……무슨 소릴…….」
한제영이 순간 당황한 목소리로 대사를 씹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조금 전 내 대사는 애드리브였다.
정계수가 소리 내어 낄낄거리더니 옆에 앉은 작가, 김무원 씨와 수군거렸다. 아까 수많은 인사들 중에 저 김 작가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누가 인사를 하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아 보였는데, 지금의 대본 리딩은 신경 쓰는 모양인지 정계수의 말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고 있다.
“오케이. 그 대사 괜찮네, 그걸로 고쳐 보자고.”
곧 계수 녀석이 내게 씩 웃으며 말했다. 오케이, 하고 대답한 나는 옆에 앉은 한제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런 대본 리딩에서의 애드리브가 처음인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연기할 땐 그렇게 차가워 보이더니. 신인다운 반응이 솔직히 재미있었다.
나는 그의 등을 툭툭 도닥이며 말했다.
“자, 다시 시작하자고.”
“……예,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없고.”
한제영은 호흡을 한 번 가다듬나 싶더니 다시 흠 없는 목소리로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무, 무슨 헛소릴 하는 거요? 지금 시비 거는 거요?」
「시비라니, 신뢰감 가는 인상이기에 칭찬의 말을 건넨 것뿐인데. 그런데, 고뿔이라도 걸렸소? 얼굴이 새빨간 것이—」
「다른 사람 얼굴색이나 관심 둘 시간에, 결사 활동 계획이라도 새로 짜시오!」
나는 그 대사에 대본에서 눈을 떼고 한제영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 후배님— 이번엔 자기 차례다 이건가? 대본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건 한제영의 애드리브다. 원 대사와 그렇게까지 차이는 없지만, 단어 몇 개로 뉘앙스가 좀 더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후배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페이지들이 잔뜩 닳아 있는 대본을 보고 있다.
나는 슬쩍 그 대본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한제영이 들고 있는 대본의 그 대사 부분이 형광펜으로 칠해져 있고, 바꾼 대사가 옆에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준비했다 이건가?
패기 봐라, 이 자식.
“좋게 고쳤네요. 이렇게 가죠.”
김무원 작가가 직접 입을 열었다. 무심해 보이는 눈이 한제영을 향해 있었다. 딱히 빈말을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으니 진심일 테지. 곧 한제영이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옆모습에서 귀가 조금 붉었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이어진 대본 리딩 끝에 잠시 휴식 시간이 왔다.
앞에 놓인 헛개수 병을 열어 콸콸콸 마시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어? 뭐가?”
고개를 돌린 곳엔 새카만 눈동자가 당혹스러움을 띤 채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웬일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다. 한제영이 눈을 내리깔면서 또다시 사죄의 말을 건네 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임기응변을 잘 못 해서…… 이런 합을 맞춰 본 적이 없었습니다.”
“죄송할 거 없다니까. 너한테 말 안 하고 애드리브 한 내 실수지. 지금 촬영 중인 것도 아니니까 여기서 실수한다고 필름값 나갈 일 없어. 걱정 말고 대본이나 계속 봐라.”
그렇게 말해 주고 나서, 다시 장난기가 발동하고 말았다. 아직도 자책하고 있는지 대본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 한제영에게 한 마디 던졌다.
“그렇게 많이 죄송하면, 벌주나 한잔 할래?”
“……예?”
“벌주, 술.”
“벌주…… 술이요.”
아연한 표정으로 내 말을 반복하는 후배가 재밌어서 웃음이 터지는 걸 겨우 손으로 틀어막았다. 냉한 인상이긴 해도 리액션이 풍부한 게 놀리는 맛이 있다. 앞으로의 촬영이 참 재밌겠네.
이렇게 더러운 내 성격 드러낼 필요 없이 순순한 사람이 좋다. 내 인간 취향은 한결같거든. 언제든, 이렇게 부드럽고 흥미로운 사람에게 관심 가지고, 가까워지고 싶어 했지…….
……순간 누군가가 생각나 버렸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게 생각나서 기분이 나쁘다. 순간 조울증에라도 걸린 마냥 기분이 가라앉고 말았다.
입을 가린 채 가슴 깊은 곳부터 나오는 한숨을 내쉬자, 한제영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언제나 잘했던 웃는 연기를 선보이면서, 좋은 선배라도 되는 것처럼 ‘화이팅하자.’ 하고 뻘소리나 했다. 그러자 한제영은 여전히 눈치를 살피며 ‘화이팅입니다.’ 하고 대답해 왔다.
우울한 휴식 시간이 지나고 다시 시작된 대사 읊기 시간. 몰입한 덕분에 다시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내게 연기란 정말, 마약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장장 4시간의 대본 리딩 작업이 모두 끝났다.
다들 박수를 치며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쳤다. 맞아, 수고했지, 나 자신. 제일 대사가 많았던 게 나였으니까 내가 제일 고생 많이 한 거지. 수십 개의 ‘수고하셨습니다’가 나에 대한 찬사라고 생각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참고로 베드신 차례가 왔을 땐, 정계수가 진지한 얼굴로 ‘이건 따로 합시다’하고 말하며 그냥 넘어갔다. 하긴 대사가 ‘헉헉’ 아니면 ‘아읏’이나 ‘잠깐’이 대부분인데 여기서 하기도 좀 그렇겠지. 특히 신인이 하기엔.
다시 선배님들께 인사 올리고, 다른 조연 배우들과 악수하는 의례적인 절차가 시작됐다. 조연 배우들 중에는 주연에 지원했던 사람도 있었다.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고, 그 친구가 나한테 인사하면서 말해 줘서 알았다. 안면인식 장애가 있는 거나 다름없는 내가 그를 알아본다면 그게 기적이다.
“최민후라고 합니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어, 그래요. 부탁까진 할 거 없긴 하지만.”
윤성해를 방해하는 의열단 단원, 송상옥 역을 맡은 최민후라는 친구는, 인사를 마치고선 걸음걸이가 안 좋은지 유난히 한제영의 어깨를 퍽 치며 걸어갔다. 척추가 안 좋은가? 추나 요법 좀 받는 게 좋겠는데, 저 친구. 그리고 우리의 주연 배우 한제영은 별일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툭툭 털었다.
그 태연하고도 차가운 얼굴을 보니 또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슬금슬금 걸어가서 놀라게 할까 하고 설레고 있는데, 그런 나를 누군가 붙잡았다. 정계수였다.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다.
“너 왜 쪼개고 있어?”
“네 영화가 천만 찍을 것 같아서 설레고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말고, 잠깐 할 얘기 있으니까 딴 방 좀 가자.”
“나한테 뭔 할 얘기? 여기서 해.”
“너한테만 있는 거 아니고, 저 친구한테도 할 소리다.”
정계수가 한제영을 가리켰다. 어느새 이쪽을 멍하니 보고 있던 한제영이 자신을 가리킨 손가락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 차갑게 예쁘장한 얼굴도 이럴 땐 순해 보인다니까.
우리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정계수는 아주 쉬운 일이라는 듯 첫 촬영 내용을 통보했다. 그 말에 잠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잠깐만, 정 감독. 뭐라고?”
방금 들은 말이 좀, 어이가 없었다. 정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별수 있냐. 장소 섭외가 그렇게밖에 안 되는걸.”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섹스신이 첫 촬영이라고?”
나는 대본을 꽉 움켜쥐며 소리쳤다.
그랬다, 2년 만의 복귀작의 첫 촬영은 다름 아닌 베드신 촬영이 되어 버렸다. 베드신 배경이 되는 전통 가옥을 섭외했는데, 딱 첫날 촬영 때밖에 빌릴 수 없게 됐다는 것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내가 연기력이 출중하다지만 첫 장면이 이래서야 감정이 쉽게 잡히긴 어렵지. 한제영은 더 큰 문제고.
정계수 저놈의 머릿속 구조는 대체 어떻게 돼 먹은 건지, 친구 먹은 8년 동안 아직도 다 파악이 안 된다.
더 항의하려고 배에 힘을 꽉 주고 목소릴 끌어 올리려는 찰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선배님, 많이 미숙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름칠 덜한 나무인형 고개 돌아가듯 나는 천천히 내 옆의 신인 배우를 쳐다보았다. 한제영은 흑단 같은 새카만 눈동자로 나를 곧게 쳐다보고 있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와우, 아주 믿음직스러운 목소리인걸? 생각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열심히 뭘 하자고, 열심히 아랫도리라도 함께 비벼 보자는 거냐? 초면이나 다름없는 우리 사이에? 게다가 신인 연기자인 네가?
“오, 그래~ 우리 신인, 역시 젊어서 그런지 패기가 좋아. 우리 톱 배우도 이런 패길 좀 배워야 하는데 말이지.”
정계수가 능글맞게 웃으며 동그란 안경을 밀어 올렸다. 너 그럴 때마다 상급 변태 같아, 이 자식아.
나는 한숨을 성대하게 토했다. 내가 아무리 연기력 출중한 톱 배우(였)긴 하지만, 사실 게이 베드신 연기에선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다.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는 역이며 신이고, 베드신은 남녀 사이에서도 힘든 판이니 당연하다고.
그런데 하물며 첫 촬영이 살 부딪히며 섹스하는 장면이고, 상대는 베드신은커녕 주연 한 번 못 맡아본 신인 배우라니. 앞날이 캄캄해진다.
다시 눈을 들어 한제영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떻게든 잘 해낼 거라는 듯, 의욕에 가득 찬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마,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열정 어린 눈동자를 향해 ‘응, 안 돼’를 외칠 수가 없다.
그를 대체 어떻게 리드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는다. 내가, 이 친구가 할 수 있을까……?
“자,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고. 고사는 이번 주 토요일에 지내기로 했으니 필히 참석할 것. 알았지?”
정계수가 수첩에 뭔갈 적고서 씩 웃으며 말했다. 고사, 그 돼지머리 놓고 하는 고사. 돼지머리에 빌어야겠다. 제발 저의 색기가 풀 발동해서 어색한 연기도 커버 가능한 섹스머신이 되게 해 주십쇼, 하고.
“그리고 두 사람, 술이나 한잔하면서 친해져 봐. 그래야 분위기가 좀 사니까. 어차피 너 이 일 외엔 백수잖냐? 크크. 난 간다, 친구여.”
끝까지 밉상인 새끼가 사라지고, 방 안에 나와 한제영만 남았다. 방 안이 난방이 잘 돼서 그런지, 한제영의 하얀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완전 그냥 애기네, 애기. 하이고, 이 애기가 나랑 혀를 섞어야 한단 말이지…….
나는 담배를 꺼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자제했다. 하…… 어떻게 해야 할까. 예행연습이라도 해 봐야 하나? 입술이라도 부벼 봐야 하는 거야? 혀 놀림 스킬 연마라도 해야 하냐? 오, 하느님, 제발. 제 손발이 보전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 순간 한제영이 나에게 다가섰다. 비슷한 키지만 나보단 좀 더 마른 체형의 그를 쳐다봤더니, 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해 왔다.
“선배님. 말씀하셨던 벌주, 오늘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엉? 하고 멍청한 소리나 냈다.

* * *


단골 술집, 그 이름하여 <술 익는 마을>.
이곳의 장점 두 가지. 첫째, 사람도 별로 없는 골목에 있는 데다 개별 룸을 구비하고 있어서 일반인들 눈치를 안 봐도 되고, 둘째, 계란말이가 천상의 맛이라는 것.
계란말이와 얼큰 김치찌개의 환상 콜라보레이션 앞에서,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한제영의 잔에 소주를 콸콸 부었다. 개인적으로 이 두 음식을 제물로 삼아 기도를 드리는 마음이었다. 제발 연기 콜라보레이션도 환상이게 해 달라는 의미에서.
‘제발, 섹스 연기 잘하게 해 주십쇼.’
퇴주잔 대신 입에 소주를 털어 넣으며 소원을 빌었다. 시야에 신인 친구가 고개를 돌려 술을 마시는 것이 보였다. 예의 바르기도 하지.
“주량 얼마나 돼?”
나는 계란말이를 입으로 밀어 넣으며 물었다.
“한 병 반입니다.”
“어, 뭐.적당하네. 그러니까 한 잔 더 받자, 후배님.”
한제영이 잔을 내밀어 소주를 받았다. 조금 마음을 놓은 듯 빙그레 웃고 있는 모습이 마치 붓꽃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선배님, 이름 편히 부르셔도 됩니다.”
“그래? 그러지 뭐. 제영아, 근데 넌 편하게 하지 마라.”
눈만 깜박이며 당황스럽게 예, 하고 대답하는 한제영에게 낄낄거리며 농담이야, 하고 소주잔을 내밀었다. 다시 또 잔을 부딪치고 원샷. 알코올이 넘어가는 기분이 오늘따라 꽤 좋다. 역시 혼자 마시는 술보단 둘이 마시는 게 좋군.
“형이라 불러라. 우리 나이 차이 얼마 안 나잖아? 몇 살이랬지?”
“스물다섯입니다.”
“……여덟 살 차이...... 뭐, 그 정도면 친구 먹어도 되는 나이지…….”
급격히 자신감이 떨어져서 말끝을 흐렸다. 내 스물다섯 살 때를 생각하면, 여덟 살 위의 선배는 거의 신이나 다름없었다. 스물다섯과 서른셋은 엄연히 다르지……. 난 이제 나이 들었고, 신인 딱지는 애초에 뗐으니까.
그런 나에게 한제영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선배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감히 친구 하기엔 선배님께서 너무 대단하신 분이시지만요.”
“……이 짜식, 아부 한번 잘하네. 립서비스가 장난 아닌데?”
“아부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선배님 작품 때문에 연기자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스토커의 밤>에서 선배님을 보고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 생생한 연기 때문에 밤을 새울 정도였어요.”
그는 부끄러울 정도로 엄청난 찬사를 아무렇지 않게 조곤조곤 말하고 있다. 잔잔한 눈빛이다가도 연기 얘기만 나오면 흥분해 반짝거리는 그가, 나로선 참 신기하고도 반갑다. 솔직히 오랜만의 칭찬에 입꼬리가 통제 안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스토커의 밤>이라……. 그다지 대박 흥행은 하지 못했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기긴 했지만 좀 아쉬운 작품이다. 스물일곱의 내가 담긴 영화.
의욕 충만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기에 연기는 좋았지만, 예산이 부족한 탓에 감독이 날림 촬영을 많이 해 버렸거든. 그래서 좋은 평은 못 들었다. 다른 흥행 작품들을 제쳐 놓고 그 작품을 얘기했다는 게 왠지 좀 기분 좋다. 완전히 나한테 초점을 두는 칭찬 같은 느낌이잖아?
나는 얼굴 근육을 간신히 통제했다. 안 그랬다간 그대로 좋다고 흐물흐물 녹아선 후배를 와락 껴안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 내가 영화 잘 찍었네, 이런 후배 하나 둘 수 있게 됐으니까 말야.”
“전 아직 한참 모자랍니다. 혹시라도 제가 촬영 때 폐를 끼치게 된다면…… 엄격하게 혼내 주세요, 달게 배우겠습니다.”
또 술을 따르고 한제영과 원샷했다.
이런 빠릿빠릿하고 싹싹한 후배면 만족이다, 만족. 연기 좀 못해도 괜찮아, 가르쳐 주면 되지. 하하, 그러니까 칭찬 좀 더 해 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진짜 지금 칭찬이 고프거든.
우리는 계속해서 술을 주고받으며 작품 얘길 나눴다. 주로 내 작품 얘기. 아역 시절 드라마부터 2년 전 그 사건 바로 전에 찍었던 영화까지. 한제영은 꽤나 영화적인 지식이 많았다. 나보다도 많이 아는 부분도 있는 걸 보면 훌륭한 영화 마니아인 듯했다. 더군다나 내 영화를 나보다 더 잘 알다니. 그래, 배우는 그렇게 많이 아는 게 좋지.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꽤…… 많이…… 취했다.

계란말이도 동나고, 김치찌개는 하도 끓인 탓에 졸아 들고, 초록색 소주병은 어느덧 여섯 병째다.
이상하다…. 제영이 주량이 분명, 한 병 반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럼 내가 네 병 반을 먹은 건가. 내 주량은 두 병 반인데……?
“형, 괜찮아요……?”
얘기하다 보니 호칭은 형이 됐다. 사실 거의 강권하다시피 해서 그렇게 부르라 했다. 형이고 싶다. 그래, 나 나이 들었다. 쳇.
제영이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는 얼굴이 좀 빨개지긴 했어도, 나보다 멀쩡해 보인다. 그리고 잘생겼다. 진짜 내 안목은 최상급이라니까. 어떻게 이렇게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 지식인처럼 생겼냐고, 하얘 가지고…….
나는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나른하다. 이대로 집에 가서 자고 싶다. 그래서 그냥 되는 대로 뱉었다.
“……내 집…… 주소, 성북구…… 은정로 32길 6.”
“예?”
“외웠지? 가자…….”
가서 잘 거니까, 데려다주라, 형.
순간 그렇게 말할 뻔했다. 그리고 내 실수를 깨달았다.
……한때 형이라 부르며 따랐던, 예쁘게 생글거리던 남자가 기억을 스치고 지나간다.
얘는, 한제영은 그 새끼가 아니잖아, 병신아. 지금 대체 입을 어떻게 쓰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곧 취기에 자괴감까지 겹쳐졌고, 가끔 그렇듯 또 죽고 싶어졌다. 그래서 울었다. 그 와중에도 못생겨 보이긴 싫어서 눈을 감고 줄줄 눈물을 떨궜다.
나의 후배님은 더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형, 왜, 왜 갑자기…….”
“제영아. 넌 절대…… 사람 함부로 믿으면, 안 된다. 알았지? 이 바닥에서 그러면 안 돼……. 막 좋다고 다 주고, 다 내주고 그럼 좆 되는 거야. 남는 거 아무것도 없고……. 그냥 씨바알…… 좆도 없어지는 거야…….”
“…….”
“으음. 오해는 하지 말고…… 내 좆이 없어진 건 아니고…… 꽤 튼실하게 붙어 있거든. 하하, 하…… 흐윽…….”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또 왈칵 쏟아 냈다. 그냥 상병신처럼 짜 대는 수준이었다. 눈물샘이 통제 불능 수준이라서 닦는 걸 포기하고 질질 짰다.
김치찌개 냄새에 알코올에, 어쩐지 구질구질한 냄새. 구질구질 병신 같은 나. 형 보고 싶다. 아니 그 새낄 왜 봐, 미친놈아. 호구 짓도 적당히 해야 사람이지, 이젠 간 쓸개까지 다 빼 줄 셈이냐? 남은 소주가 보였다. 질질 술을 흘리면서 잔에 부어선 그대로 또 원샷했다.
“……선배님.”
맑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옆에 한제영이 조용히 앉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붙잡더니 잔을 빼앗아 내려놓고, 그대로 나를 끌어당겨 어깨를 반쯤 끌어안았다. 그리곤 토닥토닥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전, 그래도 선배님을 믿어요. 선배님이 좋은 분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날 믿는다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