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뭘 보고 믿는다는 건지 도무지 파악이 되질 않았지만, 그 목소린 진짜 같았다. 날 믿는다고? 내 어떤 걸? 하지만 질문을 하기 전에 머리가 팽그르르 돌았다. 마지막 한 잔이 이제 도는 모양인지…….
그런 와중에도 나를 믿어준다는 말이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빈말이라도 그 말을 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부모도, 친구도, 내…… 연인은 물론.
한제영의 품 안에선 기분 좋은 섬유 유연제 향기가 났다.
“안녕히 주무세요, 선배님.”
그게 그 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일어났을 때 나의 귀소 본능에 대해 잠깐 놀라워했다. 술집에서 처울던 기억 이후 블랙아웃인데, 어째서 내 집 침대 위에 누워있는가. 나는 파트라슈인 건가.
잠시 후, 거실로 나와서 탁자에 놓인 파란색 포스트잇을 보고 허탈함에 무릎을 꿇었다. 역시나 내 발로 온 게 아니었군.
‘선배님, 허락 없이 집에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주말에 뵙겠습니다. 푹 쉬세요. 한제영’
형이라 부르랬더니 왜 다시 선배님이냐. 하지만 그런 자잘한 사항을 지적할 만큼 멘탈이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여덟 살! 선배가! 술 처먹고! 처울다가! 부축받아서 집에 들어오고!! 참 잘하는 짓이다, 주성빈.
만약 ‘영화계 선배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 Top 100’이란 지침서가 있다면, 나는 책 앞쪽 사전 테스트에서 이미 나가리 됐겠지. ‘30개 이상—선배로서 자질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대로 꺼지세요.’ 이런 문구나 봤을 거다. 하. 하. 미치겠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한동안 거실에 앉아 있었다. 별일 없었겠지? 필름 끊긴 이후로 뭐 쓸데없는 소릴 하거나 그러진 않았겠지? 영화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면 꼭 그 생각이 맞던데. 크윽…….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빨간 알림 열 개. 세 개는 정계수, 나머지는 영화 촬영 스케줄 통보를 위한 단체 대화방이었다.
정계수의 메시지.
[어제 술 좀 먹었냐?]
[자고 있냐?]
[아직 자냐? 완전 제대로 꼴았나 보네]
이 자식…… 역시 악우 아니랄까 봐 날 너무 잘 안다.
별로 답장하고 싶진 않았지만, 하지 않으면 오후 1시인 지금도 자고 있는 줄로 생각할 것 같았기 때문에 짧게 톡을 보냈다.
[안 마셨어 새끼야]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스마트폰 주소록을 보았다. 역시. 주소록에는 한제영의 이름이 있다. 어제 술자리 중간에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서, 그 이름 세 글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한제영, 한제영. 너에게 민폐 선배님으로 남고 싶지는 않구나.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빨아들였다. 아, 맞다. 금연. 내일부터 하지, 뭐.
생각난 김에 전화를 걸기로 했다. 바로 통화 버튼 누르고 뚜르르, 하는 소리를 감상하며 담배 연기에 몸을 맡겼다.
-선배님, 무슨 일 있으세요?
받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였다. 전화 목소리는 다르게 들렸고, 평소보다 급하게 느껴졌다.
“어…… 어제 미안했다, 내가 너무 맛이 가서.”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아니, 그게 아니라. ……선배님은 괜찮으신가요?
한제영이 뭐가 미안한 건지는 몰랐지만, 나는 대답해 주기로 했다.
“머리 아픈 거랑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거 외엔 괜찮은데. 다음번엔 이럴 일 없도록 할게. 기분 좋아서 과하게 달렸네.”
-……괜찮습니다. 전 굉장히 즐거웠어요.
“뭐…… 나도 재밌긴 했다. 그래서 말인데.”
-네.
“금요일에 시간 괜찮아?”
-……네?
빚지고 싶지도 않고, 주정뱅이 민폐 선배로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은, 다시 만나서 제대로 밥 먹기였다.
이게 더 민폐일까? 괜히 재미없는 복학생 선배가 신입생 여 후배를 불러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인 걸까? 하……. 머리가 더 지끈거리는 것 같아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데, 한제영이 대답했다.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선배님, 저 생각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어? 뭐라고?”
잠깐의 텀을 두고 다시 제영이가 말했다.
-……정말로 기억 안 나세요?
“기억 안 난다니까. 찔찔 짜다가 그대로 정신 놨어. 내가 뭐 했어? 무슨 일 있었냐?”
-그게 아니고…… 알겠습니다. 금요일에 뵐게요.
‘스케줄 때문에 먼저 끊겠습니다.’란 말과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다 피운 꽁초가 재떨이에 덜렁 남아 있는 걸 보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후배님,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뭔 일이 있었던 거야? 머리를 긁적거려 봐도 답은 안 나왔다. 평소에 주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심한 수준은 아닌데……?
오래 생각해서 답이 안 나오면, 그냥 생각을 안 하는 게 좋다. 이게 내 인생 지론이다. 씻을 준비를 하며 스마트폰을 소파에 던졌다.
그 순간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
제영인가? 액정을 확인하니, 전 매니저 현세 형이었다.
“여보세요?”
-어, 성빈아. 그, 내 아는 매니저 하나 소개해 주겠다 했제? 이제 시간된단다. 연락처 보낼 테니께 니가 연락해 봐라.
“고마워, 형. 내가 진짜 나중에 크게 밥 살게. 미안해.”
-그랴, 연락해라잉.
“어.”
조금 후에 문자 메시지로 전화번호 하나, 그리고 이름 하나가 날아왔다. 강진우.
역시 전화를 직접 거는 게 맞겠지. 나는 샤워와 양치를 마치고서, 경건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딱 세 번 길게 울린 후 바로 누군가가 전화를 받아 말했다.
-누구세요.
“저기, 장현세…… 형한테서 소개받았는데, 주성빈이라고 합니다.”
-아, 예.
“……저, 그래서 매니저, 해 주신다는 거죠?”
-안 그랬음 제가 연락처를 왜 줬겠어요.
……이 사람, 묘하게 나랑 안 맞는다. 내 더러운 성격을 드러나게 만드는 타입의 인간 같다는 예감이 번뜩 든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급한 건 나지, 이 사람이 아니다. 꾸욱꾸욱 짜증을 애써 눌러 참으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
“제 스케줄이 토요일부터거든요, 그러니까 그때 집으로 와주시면 됩니다. 계약서는 그때 쓰고요.”
-그러세요, 그럼. 끊습니다.
그리고 정말 끊었다. 어이가 없어 스마트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 진짜 믿을 만한 사람 맞아, 형? 당장에라도 전화를 걸어서 성질을 내고 싶다. 누가 한 번만 더 화 돋워 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옆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간 분노 촉진제 정계수가 없다.
아니, 왜 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끊는 거지? 지금 나 무시하냐, 한제영? 저기요, 강진우 씨. 나 당신 고용주거든? 이 자식들이 진짜.
결국, 담배 한 대를 더 피웠다. 과연 촬영 종료 전까지 금연이 가능하긴 한 걸까?

* * *


금요일 저녁, 한제영을 한 술집 개별 룸에서 만났다.
“어, 왔냐.”
또 약속 시각보다 20분 일찍 나와 있었던 나는 문을 조심스럽게 여는 한제영에게 반갑게 인사해 보였다. 제영이는 마스크나 선글라스 같은 걸 쓰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난 톱스타(였)다. 그것도 트러블 일으켰던 톱스타. 여기 들어오는 데에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와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우물쭈물하며 들어온 제영이는 앉아서도 긴장한 얼굴이었다. 뭐야, 우리 친해진 거 아니었나? 왜 다시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가 있는 거지? 하얀 얼굴은 어째선지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보이고, 까만 눈동자는 갈 데를 잃은 듯이 바둑돌 굴러가듯 흔들렸다. 나까지 당황하게 될 정도로.
그래서 일단 조용히 소주를 깠다. 그리고 조용히 제영이의 잔에 부었다. 제영이가 조용히 술을 받았다.
……이거 뭔가 되게 불편하네.
“제영아, 저기. 혹시 뭐…… 내가 잘못했어?”
“예…… 예?”
예라고? 나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뭔가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고, 그게 아마 술 먹고 퓨즈 나갔을 때 일어난 일인 것 같긴 한데. 아까보다 얼굴이 더 빨개진 제영이를 봐도 답이 나오진 않았다. 나는 진지하게 각을 잡고 물었다.
“뭔 일 있었던 거야?”
“……사실은.”
“어.”
“그날 선배님 집에서, 예행연습…… 을 해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
예행연습.
……예행연습? 무슨 연습? ……설마 그거?
동공에 지진이 나다 못해 대륙판 이동이 되는 기분이었다. 거의 공황 상태에 빠진 나는 생각나는 대로 뱉었다.
“잠깐만. 잠깐만, 제영아.”
“네.”
“그래서 어디까지 연습한 거야?”
“……네?”
“그…… 단계에 따라서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고. 심각성을 좀 깨달으려고 그래.”
“……생각하시는 최고 단계는 아니었어요.”
“그럼 그 밑 단계였어?”
“그게 어떤 거죠, 정확히…….”
제영이의 눈동자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로를 흔들리는 눈으로 뜨겁게 응시하던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너나 나나 난감한 상황인 거 안다. 뭐라 말하는 대신 소주로 가득 찬 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일단 마셔야 한다. 마시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다.
“……선배님, 오늘도 그러실 건 아니시죠.”
목소리가 어둡다. 그래, 이미 주빈이라는 선배는 병신이 된 것 같다. 정말 신나는걸.
“미안, 오늘은 제정신일 거다. 취하러 온 것도 아니고.”
“……네.”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쨍, 하고 났다. 원샷. 술이 들어가고 나니 현실 파악이 더 잘 됐다.
대체 내가 얼마나 그 베드신에 대해서 걱정을 했던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이 예행연습을 하자고 제영이를 꼬신 모양이었다. 아니, 이번 건은 걱정이 되어서라는 핑계로는 도저히 커버가 안 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뭔가 기억날 듯도 하다. 이렇게 하면 될까, 저렇게 하면 좋을까. 뭐 이런 멘트나 치면서 비비적거렸던 것 같은데…… 어딜 봐도 예행연습을 넘어서서 좆이 반응한 것 같다.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슬슬 탈모를 걱정해야 하는 나이인데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멘탈이 바스러졌다. 이게 어디가 제대로 된 톱스타 선배의 모습이란 말이냐. 주성빈 병신! 주성빈 미친놈! 주성빈 같은 새끼! 그렇게 세 번 외치고 고개를 다시 들었다.
“술 좀 따라 주라.”
그리고 다시 잔을 내밀었다. 제영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선배님, 지금 취하려고 그러시는 것 같은데요.”
“지금 너무 자괴감이 들어서 그래. 안 마시면 돌 거 같다.”
“전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잔 너머로 제영이를 봤지만 빈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다만 얼굴이 다시 좀 붉어지는 게 보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하다, 아무리 취해도 그런 짓까지 한 적은 없었는데…… 절대 뭔가 안 좋은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거든. 하, 씨발……. 어쨌건 미안해.”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한데요…….”
“……왜 네가 죄송하냐?”
의아해져서 그렇게 묻자, 제영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뭔가 굉장히 망설이는 듯한 분위기. 그리고 슬쩍 나를 올려다보며 그 애가 말했다. 얼굴을 붉히면서도, 단호하게.
“저도 딱히 저항하진 않았거든요. 그럴 생각도 없었고.”
“…….”
잠깐 뇌를 정지시킨 채 스스로 잔에 소주를 따랐다. 콸콸콸, 투명하고 맑은 액체가 넘칠 듯이 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내 멘탈에도 파도가 쳤다. 깨달음은 파도에 실려 온 해초처럼 아주 천천히 다가와 정신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잔을 기울여 위장에 알코올을 털어 넣은 순간, 내벽을 건드리는 그 차가운 감각으로 완전히 정신을 차렸고 곧 제영이의 발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파악했다.
“……너 게이냐?”
“그 날도 말씀드렸지만…… 기억을 정말 못하시는 것 같아서 다시 말씀 드릴게요.”
한제영이란 이름의 후배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 선배님을 좋아합니다.”
“…….”
“완전히, 정말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좋아한다. ……나를? 좋아한다고?
예상치 못한 단어에 그대로 격침당했다. 고백 자체야 지금까지 많이 들었지만, 내가 상대역으로 뽑은 남자인 후배에게서 들은 경험은 없었다.
과일 안주를 입에 넣었고, 또 술을 들이켰다. 취하고 싶어졌다. 취하고 싶을 땐 역시 소주가 최고지. 소주의 반대말은 대주인가? 하하. 차라리 이딴 아재 개그를 백 번 듣는 게 낫겠어, 지금 순간보단 말이지.
“그래서 선배님께서 그렇게 행동하셨을 때, 행복했어요. 고백했는데 거절하시긴 했지만.”
그 정신 상태에 거절했다니 스스로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게 더 쓰레기 같은데. 예행연습 운운하면서 만지작만지작 주물거리고선 고백은 거절이라. 거의 탑 급 쓰레기다. 내가 아무리 좀 가벼운 놈이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어이, 주성빈 주니어. 줄여서 주주. 초성으로 ㅈㅈ. 네겐 절제와 매너라는 게 없는 거냐? 왜 입하고 따로 노는 거야? 굶은 거 티 내냐?
“그랬기 때문에 선배님께서 절 배려해서 전화해 주신 줄 알았는데, 기억을 못 하시더라고요. 그냥 숨길까 했지만…….”
“…….”
“그러니까 선배님, 너무 죄책감 느끼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입니다. 혐오스럽다거나, 최악의 기억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요. 좋아하니까…….”
어째 제영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갔다. 고개를 푹 숙인 탓에 보이는 건 빨개진 귀뿐이었다. 이 친구, 정말로, 정말로 날 좋아하고 있다. 이 녀석, 굉장한 얼빠인 걸까. 나같이 외양만 화려하고 속은 쓰레기 같은 톱 오브 불륜 배우에게 반하다니. 인생을 꼬고 싶어 환장한 걸까? 그래, 내 얼굴이 죄다.
나는 소주병을 들고 내밀었다. 제영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 잔을 들어 올렸다. 아직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소주를 꽐꽐꽐 따라 주며 그 잘생긴 얼굴을 흘낏 보았다.
솔직히 이 친구는 취향인 얼굴이긴 하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아마 내 주주도 저 서늘한 인상의 얼굴에 반응한 거 아닐까. 끝까진 안 갔다지만 끝까지 갔다 해도 식겁하며 놀라진 않을 거다. 나도 게이니까.
—하지만.
그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은 없다.
“그래, 그럼 없던 일로 하자.”
표정을 정리하면서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일부러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여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얼굴에 와 닿는 희뿌연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말 때문인지 한제영의 까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소주잔을 들고 있는 하얀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우리 주연이야, 인마. 좆 묶고 베드신 찍을 사이라고. 내가 할 소린 아닌 것 같긴 하지만, 한제영 너 너무 책임감 없는 거 알아? 아무리 신인이라지만 정도가 있지. 지금 영화 망칠 일 있어? 나는 술 처먹고 병신짓 한 거고, 네가 하는 소린 고의적인 똥칠이야. 지금 나보고 너한테 맞춰서 한 번 더 실수해 달라, 이거야?”
붉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는 것이 조금, 아니 많이 안쓰러웠지만 그래도 이럴 수밖에 없었다. 멜로드라마의 악역이라도 된 기분으로 계속 씹어뱉었다.
“촬영장이 연애질하는 곳이냐? 촬영 시작도, 아니 고사도 채 안 지낸 작품이야. 나한테 고백해서 뭐, 어쩌자고. 사귀자고? 그래, 사귄다 치자. 들키면 어떡할 건데? 그 많은 스태프들 투입돼서 열심히 만든 작품, 게이 둘이서 좆 비비다 완성한 영화로 치부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
“술 취해서 그 지랄한 거, 정말 미안하다. 나도 그 짓거리 한 거, 진짜 상병신 같았다는 거 인정해. 미안. 앞으로 그럴 일 없을 거야. 다시 한번 미안해.”
“…….”
“그렇더라도, 너한테 감정 가질 예정 없어. 그러니까 너도 제대로 정리해. 날 연정 품은 상대라고 대하지 말고 상대역으로 대하라고. 그럴 생각 없으면.”
담배 연기를 정면으로 후, 뱉었다. 한제영이 당황해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하차해라. 촬영 망치는 놈하고 작품 할 생각 없으니까.”
그 정도 연기쯤이야, 간단한 일이었다. 내 나름의 방어였다.
안개 같은 연기 너머로도 보였다. 화공이 그림에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찍어낸 것 같은 까맣게 맑은 눈동자가, 흔들리다 눈꺼풀에 가려지는 게. 눈을 감은 한제영은 말이 없었다. 소주잔을 잡은 손이 테이블 위에 얹혔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앙다물듯 직선을 그리는 것까지 나는 눈에 고스란히 담았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리고 다음 순간 한제영은 사과했다. 놀랍도록 침착한 어조로.
“제가 사적인 감정에 휘둘렸습니다. 신인 배우라 어설퍼 저지른 실수라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눈꺼풀을 열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은, 충혈되어 있긴 했지만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겨우 표정은 유지했지만, 그의 빠른 대응 때문에 유연한 대꾸를 할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선배님. 내일 고사 때 뵙겠습니다.”
“……그래.”
검은 백팩을 서둘러 챙긴 한제영은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문이 닫혔다. 남은 건 나, 가득 찬 소주잔, 그리고 무심한 담배 연기뿐.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타들어 가던 담배에 손을 데었다.
“하, 씨발. 담배 처음 피우는 것도 아니고.”
기분 잡쳐서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거칠게 지졌다. 취한 것도 아닌데 벌써 머리가 아팠다.

* * *


토요일 아침. 나는 자택에서 매니저 될 사람을 만났다. 매우 좆같은 기분으로.
그리고 매니저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듬직한 체격, 꽤 괜찮은 근육, 그리고 짜증 난 표정. 그게 그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강진우입니다.”
“매니저 경력 얼마 정돕니까?”
“제 나이 서른여섯이고, 스물넷부터 시작했습니다. 알아서 계산하시죠.”
“…….”
덧셈 뺄셈도 못 할 정도로 머리가 돌인 건 아니지만, 매니저 후보가 저런 식으로 말하니 가뜩이나 좋지 않던 기분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12년. 12년이다 이거군. 과연 당신이 12년 동안 몇 명의 고용주들을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 최악을 달성해 주고 싶다는 열망이 스멀스멀 생겨나는걸.
고용 계약서를 작성하는 중에도 사소한 신경전은 계속됐다. 마침 강진우 씨가 펜을 좀 달라기에 휙 던져 줬더니 펜은 정확히 그의 다리 사이로 골인했다. 덕분에 불쌍한 펜은 바닥으로 추락했고, 강진우 씨는 몸을 숙여 펜을 주워야만 했다. 매니저 되실 분은 나를 재수 없다는 듯이 꼬나보았다.
“뭐 하시는?”
“펜 패스죠. 근데 패스가 아니라 골인이 돼 버렸네.”
“…….”
“얼른 서명하고 출근합시다. 오늘부터 스케줄 시작이거든요. 제 예명이야 아시겠지만 주빈, 본명은 주성빈이고. 나이는 서른셋. 세 살 차이 별거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말 놓는 거로 하자, 진우 형.”
되는 대로 주절거려 놓고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내 마셨다. 해장 방법 중 하나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었지만, 속이 어쩐지 좀 불편하다. 기분 좋게 마시지 않아서일까…….
한제영. 오늘도 고사 지내는 곳에서 봐야 할 텐데…… 게다가 당장 내일부터 촬영이다, 그것도 베드신. 키스에 유두 애무에, 별짓을 다 해야 하는 판인데 이런 마인드로 하루 안에 끝낼 수 있나. 집중이 잘되지 않을 것 같아 불안초조하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