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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수저통에 든 포크 끝을 노려보고 있는데, 매니저 강진우가 다가와 서명을 마친 계약서를 내밀며 말했다. 짙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 놓겠다고 안 했는데요?”
“나랑 그렇게 거리감을 유지하고 싶어, 진우 형?”
“우리가 친구로 만났습니까?”
“진우 형. 일단 앉아, 비루한 스케줄 설명해줄 테니까.”
생각보다 별 군소리 없이 강진우는 소파에 다시 앉았다. 우거지상을 하긴 했지만.
나는 옆에 앉아서 지금까지 정리해 놓은 스케줄을 말했다. 스케줄은 다음과 같다.
-영화 <십이월 기담> 촬영. 한 달 동안 촬영 날짜를 적어놓은 수첩 첨부.
-모 영화 전문 잡지 인터뷰. 다음 주 화요일에 하자고 해서 영화 촬영장으로 오라고 약속 잡았다.
끝.
“정말 비루하네요.”
“…….”
인상이 구겨지는 사이 매니저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내용을 옮겨 적었다. 갈색 표지의 새 수첩. 그리고 거기에서 눈을 옮겨 매니저의 얼굴을 슬쩍 관찰했다. 쌍꺼풀 없는 날렵한 눈매에 그다지 높지는 않은 코, 꽉 다문 입술. 무표정이라서 그런지 좀 사람 쫄게 만드는 기센 얼굴.
순간 그 얼굴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평범한 얼굴도 아닌데.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원래 생각 잘 안 나는 걸 두고 끙끙대면 더 생각이 안 아는 게 인지상정. 언젠가 뿅 하고 정답이 튀어 오르겠지.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그럼 이제 출발하자. 오늘 고사 지내는 날이거든. 촬영장에서도 우리 호칭은 진우 형, 성빈이로 하는 거로. 오케이?”
“……갑시다.”
“그 존댓말도 내려놓고, 매니저 형님.”
“가, 자.”
매니저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 마디씩 꾹꾹 눌러 대답했다. 차 키를 진우 형 쪽으로 휙 던지자, 형은 척 받더니 주머니에 넣었다.
한창 배우로서 활동할 당시 개인적으로 쓰는 자동차가 몇 대 있었고, 업무용으로 쓰는 차가 한 대 있었다. 건네준 열쇠는 후자의 열쇠였다. 2년간 활동이 전무했던지라 그 차는 최소한의 유지 보수를 한 것 외에는 썩어 가고 있었지만, 이제는 사용할 때다. 참고로 개인적으로 쓰던 자동차는 다 팔아버렸다. 외출도 하지 않는 마당에 의미 없었으니까.
가을 분위기를 내기 위한 회색 머플러까지 완벽하게 착용한 후, 매니저와 함께 집을 나섰다. 이상하게도, 2년 전 찾아왔던 불안증이 다시 마음속에 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 *


돼지머리가 보인다. 제사상 가운데에 떡하니 놓여 있는, 배우 인생 17년간 자주 봐 왔음에도 절대 친숙해지지 않는 그 돼지머리. 솔직히 말하면 보기만 해도 감긴 눈부터가 무섭다. 대체 왜 고사를 지낼 때마다 돼지머리에 대고 절을 올려야 하는 걸까. 소원 들어주는 우리나라 토속신은 절단 도착증이라도 있는 거냐?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대기 의자에 앉아서 뜨거운 커피를 홀짝였다. 늦가을이라 좀 춥다. 추위를 잘 타는지라 머플러에 가죽 재킷 가지고는 좀 으슬으슬 떨린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젠장, 또 일찍 오고야 말았다. 배우들 사이에서도 도착 시간 같은 걸 은근 신경 쓰는 문화랄까 악습이 있는데, 나는 이제 배우가 아닌가 보다. 어차피 톱 배우도 아니고, 상대역도 신인인데 너무 민감한 건가…….
“안녕하십니까.”
촬영 현장에 차가 하나 도착하고, 거기서 나온 것은 한제영이었다. 스태프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맵시 좋은 연청 데미지 스키니에 남색 니트, 회색 두꺼운 머플러 차림. 나만큼은 아니지만 잘난 녀석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것에 더 시선이 꽂혔다.
머리가, 달랐다. 너무 길다 싶게 이마를 덮었던 검은 머리칼이 단정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게다가 별 세팅도 안 했던 머리였는데, 지금은 왁스를 발라 올려 잘생긴 이마가 훤히 드러난 상태였다.
……솔직히 잘 어울린다.
배역에 맞춰서 헤어스타일을 바꾼 건가? 완전히 윤성해의 환생이 아닌가 싶은 생각밖에 안 든다. 눈을 내리깔면서 스태프와 잠깐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Scene 31에서 나온 음식을 주문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정말 영화만 아니었어도…… 아니,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고개를 돌려 다시 돼지머리를 보았다. 돼지머리가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보지 마, 이 돼지머리야. 이건 욕이 아니라 팩트다.
“주성빈 씨.”
매니저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옆에 서 있던 그를 올려다보았다.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이 보인다. 그래도 지적할 건 지적해야겠다.
“성빈아, 인데.”
“……내, 가, 스케줄 표를 다시 봤는데, 내일부터 촬영 시작이던데.”
“어, 맞아.”
“그런데 일요일에 유독, 빨간색으로 베, 드, 신이라고 쓰여 있던데.”
“말 그대로 베, 드, 신이야. 장소 섭외 문제 때문에 첫날부터 비벼야 한다고.”
“……비벼……?”
“알잖아, 이거.”
내 튼실한 그게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매니저 형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말만 안 했지 그 얼굴에다 ‘극혐’이라고 써도 별로 위화감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이쪽에 그렇게 호의적이진 않으신 분이군. 현세 형이 이런 것도 좀 신경 써 줄 줄 알았더니 아쉽네.
“이 영화에 다 벗고 섹스하는 장면도 있다고……?”
눈을 깜박였다. 불쾌해하는 핀트가 다르네?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매니저는 부들부들하며 스마트폰을 꺼내 독수리 타법처럼 화면을 두들기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뭐지. 내가 영화를 설명 안 해주긴 했지만, 섹스신의 존재에 저렇게 화낼 것까지 있나?
그렇게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새 한제영이 옆에 와서 앉았다. 표정 없이 묵례를 꾸벅.
“……안녕하십니까.”
“어, 안녕.”
인사를 마치고 나니 굉장히 뻘쭘한 분위기만 남았다. 슬쩍 곁눈질을 해 봐도 더 이상 한제영이 나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휴. 나는 머리만 긁적이며 딴 곳을 보았다. 너무 심했나. 좋게 거절할 걸 그랬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해야 했어. 이 녀석을 위한 거잖아. 괜히 이쪽에서 연애해 봤자 좋은 결과 안 나오는 거 내가 제일 잘 아는데.
그래도 선밴데 아무 얘기라도 먼저 꺼내 볼까. 정계수 뒷담화라도 해 볼까 싶어 나와 정계수의 수많은 병신 짓 중 하나를 소개할까 생각하던 때였다.
“한제영!!”
갑자기 한제영의 이름을 버럭 부르는 목소리가 왼쪽 귀를 두들겼다. 식겁해서 바라봤더니 거기엔 매니저가 있었다.
아니, 내 매니저가 왜 한제영을?
“……형?”
오른쪽에선 한제영이 놀란 얼굴로 매니저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이 새끼!! 베드신 있단 말은 안 했잖아!!!”
매니저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또 버럭 소리 질렀다. 그리고 이젠 스태프들까지 죄다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다. 아니, 나는 이 트러블에 관계없는 사람인데 왜 여기…….
“별거 없다고 해놓고 베드신? 그것도 게이 베드신?! 인마, 너 미쳤어?”
“형, 그게 그때는 정말로 베드신이 없었—”
“그렇게 포스터니 디비디 같은 거 모으고 난리를 치더니, 이젠 베드신 찍어서 좋겠—웁! 우웁!”
한제영은 굉장히 날랜 움직임으로 매니저의 입을 막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포스터? 디비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싶었던 나는 그 두 사람 사이에 여전히 껴 있긴 했지만, 최대한 의자를 뒤로 당기고 몸을 눕혔다. 괜히 둘이서 주먹질이라도 했다가 내 얼굴 다치면 큰일이니까.
매니저가 입을 막고 있는 손을 팡팡 치는 동안 한제영은 얼굴이 빨개져선 빠르게 말했다.
“정말로 주연 맡을 줄 몰랐다고. 난 조연 지원했는데 선배님이 지목하시는 바람에—”
“우웁, 이어 프르바!”
“내가 주연이니까 이젠 어쩔 수 없단 말이야!”
그렇지, 한제영이 주연이지. 내가 뽑았고, 나의 선택은 굉장히 적합했고 완벽했다고 본다. 지금도 당황해하는 모습까지 잘생긴 걸 보면 정말 최적의 선택이었다는 걸 증명해 주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뭐라 하지 마, 형.”
한제영이 매니저의 입에서 손을 떼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단호한 어조로, 헛기침까지 하면서, 아직 얼굴은 빨개 가지고. 그러자 매니저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매니저 형을 봤을 때 어디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형제여서 그랬던 건가? 하지만 두 사람은 각각 한 씨와 강 씨로 성씨가 다르다. 이 사람들 사정을 알 수가 없으니 그저 심심해서 돼지머리에 절이나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스태프들도 이미 흥미를 잃었는지 다 자기 일들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매니저 형이 빤히 내려다보았다. 거의 누워있다시피 앉아있던 나는 왜 쳐다보쇼 하는 표정을 지었다.
“헛생각하지 마라.”
지금 들은 소리가 대체 무슨 소리지? 험악한 표정으로 통고하는 말이란 게 ‘헛생각하지 마라.’라니. 정작 헛생각하고 계셨던 분은 오른쪽에 계신 분인데. 그런 의미에서 한제영을 올려다봤더니, 그는 아직 빨간 얼굴로 ‘죄송합니다’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까만 해도 무표정하더니 지금은 거의 쪽팔려 죽을 것 같단 표정이다.
난 그냥 푸흡, 하고 웃어 버렸다. 그리고 웃겨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직 우거지상인 매니저 형에게 말했다.
“그래서, 형은 이 친구하고 무슨 관계인데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고사를 지내기 직전, 구석에 가서 매니저 형과 담배를 피우며 잠깐 대화했다. 반갑게도 흡연자였다.
두 사람은 사촌 형제로, 같은 집에서 살았던 사이랬다. 이제는 한제영이 독립해서 자취 중인지라 연락을 자주 하지는 못하지만 친한 사이라고. 매니저 형님 왈, 내 매니저를 딱히 맡고 싶지는 않았지만 동생과 같은 작품 하는 사람인만큼 그냥 수락하게 되었다나.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매니저 형은 뭔가 더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우리를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한제영을 흘낏 살폈다.
“너는 쟤 어떤 애 같아?”
형의 물음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떤 애라는 게 뭔 소리야?”
“잘 나갈 것 같아? 재능 있어 보여?”
나는 5초 정도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일단 얼굴이 겁나게 잘생겼지.”
“……헛생각하지 말라니까.”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거야. 연기도 곧잘 괜찮게 하고, 성장 가능성이 큰 것 같아. 아니, 그나저나 왜 아까부터 헛생각 타령이야? 나 게이 아닌데.”
거짓말을 매우 자연스럽게 하면서 나는 한 대 더 피우기로 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빨았다. 경기도 소재의 마을인 이곳은 바람이 거세고 차다. 하얀 연기가 용처럼 슬렁슬렁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내 경력 12년 차라고 말했지?”
매니저 형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예전에 어디서 일했는지 아냐?”
“어딘데?”
“서진솔 씨 로드 매니저였어. 잠깐이지만, 네가 전 소속사 나오기 바로 전에. 기억 못 하나.”
나는 그대로 담배를 떨어뜨렸다. 장초였다.
“딴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난 알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굳이 거짓말 안 해도 돼. 그쪽에 그렇게까지 혐오감 갖고 있진 않기도 하고.”
“…….”
“설마 아직도 멘탈 회복 안 됐냐?”
“…….”
“휴…….”
아무렇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서,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런 순간에 갑자기 그 이름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씨발, 토할 것 같다.
매니저 형이 보고 있는 것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지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혔던 이름이고, 계속 생각해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이름, 서진솔. 지긋지긋하다. 어차피 더 볼 일 없는데 왜 괜히 이름 꺼내서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건지. 매니저가 원망스럽다.
그리고 매니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도 계속 말했다.
“어쨌건 내 사촌 동생, 적당히 잘 대해 줘. 내 동생은 그 꼴 또 나게 하고 싶지 않다고.”
“—내 탓 아니었어!!”
순간 닫혀 있던 감정이 확 터져 버렸다. 매니저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이를 악물며 목소리를 억눌러 말했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걱정하는 게 역시나 병신 같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지 멋대로 병신 짓하고, 나한테 핑계 대고, 난 씨발 좆망하고! 그게 왜 내 탓이야, 어? 씨발, 내가 호구야?”
“……그래, 그 건 자체는 네 잘못 없어.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냐.”
진우 형이 담배꽁초를 운동화 신은 발로 비볐다.
“너랑 사귀면서 모든 게 시작됐다는 게 문제지.”
“……!”
“그러니까 잘 밀어 내 달라는 거고.”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순식간에 또 냉정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다시 죽고 싶다는 생각뿐.
이 영화를 시작하는 게 맞는 일일까. 아직 마음속에서 2년 전의 일은 전혀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공개 석상에 나서서 당당하게 웃을 수는 있을까. 혹시라도 그 사람하고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름만 들어도 돌아버릴 지경인데.
매니저 형은 어깨를 툭툭 치며 ‘가자, 이제’ 하고 말했다. 세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큰형님처럼 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냥 그 말을 듣기로 했다. 한제영이 나를 보고 있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고사가 진행되는 동안, 돼지머리를 보면서 기원했다. 방해하는 거 하나도 없이, 물 흐르듯이 잘 진행되게 도와주십쇼. 아무도 좋아지지 않게 해 주시고, 성욕 감퇴도 시켜 주시고, 평생 서진솔 마주치는 일 없게 부탁 드립니다.
제발요.

* * *


일요일, 첫 촬영이 있는 날.
새벽 6시. 눈을 뜨자마자 생각했다. 오늘 뭔가, 느낌이 안 좋다고. 일이 안 풀릴 것 같고 몸이 찌뿌둥하고, 하여튼 뭔가 오늘은 날이 아니라고. 하지만 매니저 형이 아침 일찍 나를 데리러 왔기 때문에, 겨우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차를 타고 전통 가옥이 있는 경상도로 내려가는 동안 계속해서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마치 아역 시절 처음으로 드라마를 찍을 때 느끼던 감정 같았다. 2년이면 너무 오래 쉰 건가? 지금이라도 연기 선생 다시 불러와야 할까? 왜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해지는지, 나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다.
“어이, 오느라 고생했다.”
현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더니, 정계수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우리의 다른 주연 배우님은 이미 기다리고 있으니까, 컨테이너 들어가서 얘기 좀 하자고.”
“컨테이너도 있냐?”
“원래 여기 있었던 건데 며칠 빌렸다. 새우잠 자더라도 조금이라도 덜 추운 곳에서 자든가 해야지.”
한제영이 먼저 와 있다는 것에 왠지 패배감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매니저 형을 두고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컨테이너 안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네 개, 간이침대 하나만 있었다. 그리고 의자 중 하나엔 한제영이. 꾸벅 인사하는 그에게 ‘안녕’ 하고 적당히 대꾸했다.
“자, 오늘 찍을 장면은 알겠지만 신 넘버 80부터, 베드신이야.”
정계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본을 가리켰다.
“신인 배우가 있으니까 브리핑 좀 해 보자면, 일단 분장 측에서 코디해 줄 거고, 촬영하다가 ‘공사’할 거거든? 미리 말해 두겠는데 너무 아프다 싶으면 바로 말해, 잠깐 풀러 놓을 시간 줄 테니까.”
“네.”
‘공사’란 섹스신 촬영 중 예상치 못한 신체적 반응을 막기 위해 페니스에 취하는 조치를 말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발기를 막는다는 거다. 또 성기 노출을 방지하는 측면도 있고. 소중한 그곳에 양말이나 천을 감고 고무줄로 감으면 끝.
촬영 한 시간이 경과할 무렵부터는 그냥 거기에 아무런 감각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거시기가 아파서 죽을 것 같다는 거지. 딱 한 번 해 봤지만, ‘내 이 짓거리 다시 하나 봐라!’ 하면서 좆 잡고 신음했던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난 또 이 친구와 사이좋게 거기에 줄을 칭칭 감아야겠지.
“촬영은 이렇게 진행될 거야. 일단 싸우는 장면부터 시작. 괜히 끌지 말고 빠르게 찍자. 그리고 베드신은…… 장면 숙지했겠지만, 순서대로 갈 거야. 싸우다가 바로 키스하고, 옷 벗기고. 뭐 알지? 삽입 이후에는 클로즈업 들어가니까 표정 확실히 해. 그다음엔 정사 후 장면인데…….”
앞의 한제영은 열심히 정계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은 이제 윤성해다. 윤성해, 이케다의 고백을 듣고도 폭탄 들고 거사를 치르겠다고 나선 냉정한 남자.
일련의 사건들 끝에 이케다 신스케는 일제 경찰로부터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기 시작하고, 위태로운 줄타기를 이어 나간다. 그 사건들 중에는 친우 백삼열의 밀고도 있고, 아버지 이케다 타다노부의 호된 질책도 있었다. ‘황국민이면 그 피에 책임을 져라, 어중간하게 위선 부리지 말란 말이다’, 이케다는 그 말에 갈등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윤성해는 그 사실을 어떤 이유로 알게 된다. 그 때문에 이케다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냉정하게 거절하며 목숨을 건 거사 계획을 밝힌다. 그 역시 좋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뭐, 그러다 보니 당연히 두 남자가 치고받고 싸우는 건 예정된 일이지. 격한 말싸움 끝에 윤성해는 모욕적인 말까지 일부러 내뱉고, 괴로울 정도로 상처받은 이케다는 멱살을 잡는다. 서로 주먹질도 하고, 피도 터지고. 아마 자기네들도 자기들이 병신 같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을 거다.
그러다 그들은 이어진다. 거칠게 싸우다가 아무 말 없이 눈빛으로 상대의 감정을 느끼고서, 입술을 부비며 격렬히 서로를 탐하기 시작한다.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은 눈앞의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해야 할 때다. 나는 이케다 신스케니까.
“……래서, 주성빈. 네가 잘해야 돼. 우리의 신인, 리드 좀 잘해 달라고. 오늘 하루 안에 끝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때? 할 수 있어?”
정계수가 동그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씩 웃었다. 안 듣고 있었던 나는 턱을 괴고 있다가 눈을 깜박였다.
“아, 뭐. 그래. 해 봐야지.”
“오늘따라 상태 안 좋아 보인다? 괜찮아?”
“……상태가 안 좋긴 무슨.”
예리한 놈. 역시 괜히 오래 알고 지낸 게 아니다 이건가. 정계수는 흐음, 하고 중얼거리며 나를 빤히 들여다봤지만,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일단 분장부터 시작하자.”

포마드로 깔끔히 올려붙인 머리, 1920년대 최신 유행 스타일 양복과 구두, 여유로운 표정. 이 세 가지면 이케다의 겉모습은 표현해 내기 어렵지 않다. 거기에 상처 분장까지.
나는 분장을 마치고 벽에 기댄 채, 세트를 마저 마무리 중인 현장을 지켜보았다. 진우 형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안 보려고.”
“잘 선택했어. 벗고 헉헉대는 거 봐서 어디다 쓰게.”
“차마 내 동생이 너랑 입술 문대고 있는 걸 볼 수가 있어야지.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차 안에서 대기할 테니까.”
“오, 믿음직스러운 매니전데?”
매니저 형이 가 버린 후에는 한제영이 왔다. 와이셔츠에 조끼, 허름한 외투와 바지. 부유하지 않은 독립투사처럼 보이는 차림이었다. 역시나 잘 어울리는군.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왼뺨엔 상처 분장을 했다. 이케다나 윤성해나, 나름대로 시련을 겪은 상황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