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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하얀 얼굴엔 걱정이 떠올라 있다. 이젠 하다못해 신인한테까지 걱정받는 건가, 나도 갈 데까지 갔네. 피식 웃으며 한제영을 바라보았다.
“네 걱정이나 해, 인마. 어디서 신인이 남 걱정이야?”
“……죄송합니다.”
“합이나 맞춰 보자. 대사 치다가 내가 먼저 멱살 쥘 거고…….”
그다음엔 윤성해가 주먹질, 내가 주먹질. 장롱문에 밀치면서 장식장에 물건 와장창 다 쏟아지고, 잡히는 물건 내팽개치고 소리 지르고, 뒤엉겨 붙고 싸우다가 그대로 키스. 우리가 싸우게 될 절차다. 이 조용한 녀석이 그런 감정 연기를 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 봐야 아는 거지.
“키스는, 깊게 하는 거겠죠……?”
어두운 방 안,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한제영이 중얼거렸다.
“그래, 시나리오상으론 이미 한 번 가볍게 했으니까.”
“…….”
“키스 한 번도 안 해 본 건 아닐 거 아냐?”
한제영은 대답이 없었다. ……설마, 안 해 봤나? 한 번도? 스물다섯 해 동안?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굉장히 당황하고 말았다. 저 정도로 잘생긴 놈이면 여자고 남자고 가만 놔 두진 않았을 텐데?
“아니…… 설마 그때도 안 했어?”
가까이 다가서며 다급히 속삭이자 한제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에 떡이 되어서도 키스 한 번을 안 했다니, 내 입술은 대체 어딜 더듬었던 건가.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잠시 고민했고, 정계수에게 다가갔다. ‘촬영 언제 시작해?’ 그 질문에 정계수는 ‘15분 뒤쯤?’ 하고 건성으로 답했다. 뭔가 신경 쓸 게 많은 모양인지 바빠 보였다.
다시 한제영 앞. 나는 녀석을 끌고 촬영장을 나왔다. 후배님은 어디로 가냔 말도 없이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주위를 살펴보다 사람 없이 비어 있는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통보했다.
“리허설, 해 보자.”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입술 부르틀 때까지 리테이크 들어가고 싶진 않잖아, 너도. 자, 대 봐.”
괜히 이러는 건가 싶어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어차피 수십 번쯤 해야 하는 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한제영의 얼굴을 붙잡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슬로우 모션처럼 나와 녀석만의 리허설이 이어졌다.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바뀌어 가는 게 느껴졌다. 따뜻한 감각이 입술에 녹아들고, 이내 벌어진 사이로 천천히 혀를 더 뜨거운 점막에 뒤섞기 시작했다.
한제영이 내 팔을 잡았다. 작은 신음이 이따금 숨결과 겹쳐 흘렀다. 어느새 나는 녀석을 벽에 밀쳐 놓고 입술을 삼키다시피 하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빨아올리길 거듭하며 하체를 가깝게 붙였다. 상상하던 장면대로 거칠게, 욕망에 몸을 맡긴 것처럼 탐했다.
내가 나 자신 같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 지금 여기서 키스하고 있는 것은 나와 한제영이 아니다. 이케다와 윤성해지. 이건 일이다. 연기를 위해서 하고 있는 거라고.
“……하…….”
입술을 떼고서 눈앞의 하얀 얼굴을 보았다.
정갈한 눈빛 대신, 그곳엔 흐릿해진 눈동자가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타액으로 젖은 붉은 입술, 그냥 붉은색이라 표현해도 무리 아닐 듯한 후배가 거기 있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가슴까지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으로.
“……이제, 감이 와?”
나 역시도 숨이 아직 거칠었다. 현실감이 옅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앞의 상대가 말끔하게 올린 머리에 1920년대를 연상시키는 복장이라서인지 몰라도, 과거의 환상에 젖어 들어가는 것만 같다.
이 친구와는 연애고 섹파고 할 생각이 없음에도 더 나가면 어떻게 될까 싶은 감정이 순간 나를 집어삼켰다. 물론 순간뿐이었다. 이성을 되찾는 건 금방이었다.
“……네, 알 것 같습니다. 아마도요…….”
한제영은 어지러운 듯 고개를 흔들더니 천천히 답해 왔다. 그러더니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다리를 세우고 앉아 머리를 수그렸다. 숨소리가 겨우 고르게 되었을 무렵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먼저 나가 주실 수 있나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어…… 그래, 알았어.”
당황스러움에 버벅거리며 대답한 후 컨테이너를 나와 문을 닫았다. 차가운 공기가 덮쳐왔다. 주차된 자동차들, 전통 가옥을 감싸고 있는 철제 가림막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난 후에야 현실감이 들었다.
너무 몰입했다. 과잉된 감정 탓에, 싸우는 장면이나 제대로 찍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연습한 게 무리수였던 걸까. 하지만 가뜩이나 내 컨디션도 안 좋은 판에 서투른 스킨십으로 수십 번의 리테이크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을 뿐이다. 내가 잘못한 건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해 봤자 소용없지. 날 좋아한다던 녀석에게 가혹한 짓을 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거다. 모르겠다. 아,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
흙바닥에 굴러다니던 돌을 걷어차 버리고선, 다시 촬영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어디 갔다 왔어?”
정계수가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 시선을 피했다.
“알아서 뭐 하게, 인마. 이제 촬영 들어가지?”
“어. 우리 신인은?”
“오겠지, 뭐.”
그리고 곧 한제영이 왔다. 다시 하얀 얼굴이 돼서, 차가운 공기를 몰고 달려와 내 옆에 섰다.어쩐지 녀석을 쳐다볼 엄두가 나질 않아서, 딴 곳에 시선을 뒀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이제 시작할 건데, 뭐. 자, 자리 위치하시고. 다들 들어갑시다!”
박수를 치며 정계수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 소리에 카메라 팀, 음향팀, 미술팀, 조명팀 등 각종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준비에 들어갔다. 이제 그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 저 낡은 조선식 이불과 장롱, 자개장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서야 한다.
영화 속 이 장면의 시간은 밤이다. 가림막으로 빛이 들어올 만한 구멍은 전부 가렸고, 조명은 그 어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불 머리맡에 있는 작은 석유등도.
리허설 차원에서 먼저 한 신 정도 찍어 보자, 하고 정계수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고 어지러운 감정을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나, 이케다 신스케는 조금 전 친우에게 배신당하고 아버지에게 맹비난당했다. 몰래 해 오던 조선 독립운동의 원조들은 전부 의미 없이 공중으로 분해되어 버렸다. 자신은 내국인이고, 지금까지 해 오던 일엔 전부 같잖은 동정심이 바닥에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선인조차도 자신의 내적 갈등을 비웃는다. 대체 왜 그러고 있냐고, 조선인도 아니면서 왜 일본 제국에 도움되지 않을 짓을 하느냐고. 내가 가는 이 길이 잘못된 것인가 괴로워할 때, 마침표를 찍다시피 하는, 마음속의 마지막 보루였던 사랑하는 남자.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입니다.
냉랭한 어조로 통보하는 윤성해에게 그 작전에 참여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가 쇠고집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생각해 물러나겠다 했던 며칠 전 그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 마음을 살려 내기만 하면 된다. 대본은 어렵지 않다. 김무원 작가는 지시사항을 세심하게 적어 두는 편이라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그대로만 하면 된다.
세트팀과 미술팀이 따로 만들어 놓은 출입구 밖으로 나갔다. 윤성해는 이 집 안에 있고, 나는 그를 찾아 여기로 오게 된다.
“자, 해 봅시다. 신 넘버 90. 레디, 액션.”
평소와 다르게 차분해진 정계수의 목소리가 들리고 20초, 나는 문을 급히 열어젖혔다. 내 속의 이케다 신스케를 맞아들이는 것처럼.
“……윤성해 군!”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가옥 내부, 그 안의 낡은 나무 의자에 윤성해는 앉아 있었다. 차갑게 식은 눈을 하고. 나는 문을 쾅 닫고 내부로 발을 옮겼다.
“컷. 좋아, 바로 가자. 다음, 액션.”
정계수가 빙긋 웃으며 카메라를 내부 쪽으로 돌리게 지시했다.
「왜 이리 소란입니까.」
윤성해는 이쪽을 보지도 않고, 석유등 불빛으로 서적을 읽으며 말한다. 그 무심한 모습이 꾸며 낸 것이든 아니든 화가 난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한 구절씩 토해 냈다.
「왜 이리 소란이냐고? 정말 그 이유를 몰라서 그러는 거요?」
「…….」
「대체 왜! 그 작전은 자살 행위요, 분명 내가 언질을 주었을 터―」
「때로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게 왜 당신이어야 하냐고!」
그 말에 윤성해가 눈을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그럼 다른 동지들이 목숨을 잃는 것은 괜찮단 말입니까? 역시 왜인이라 그런지, 한도 없이 이기적이군요.」
「뭐라 말했소!」
울컥 화를 내며 윤성해의 어깨를 붙잡자, 그가 차갑게 손을 뿌리쳤다. 그 뿌리침에 더 화가 솟아 다시 두 손으로 어깨를 쥐자, 얼음조각 같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당신도 별수 없는 왜인입니다. 조선의 독립을 돕겠다 성화지만, 정작 중요한 거사에 자신의 사람은 제외하고 싶다는 것 아닙니까.」
「그건 내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 누구나 마찬가지인 걸 왜 모르오, 왜!」
「당신은 위선잡니다. 결국, 자신의 정의감을 과시하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 것뿐이겠지요.」
「……!」
나는 그대로 윤성해의 멱살을 잡았다. 와이셔츠 자락의 까끌거림이 손 안 가득히 잡히는 순간, 하얀 얼굴에 단정히 놓인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순간.
「…….」
멱살을 잡아 올려 본 남자의 눈빛은 절대 밀리지 않을 것처럼 강렬했다. 어떤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의 생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듯한 푸른 불길 같은 눈빛.
그 눈빛을 정말로 사랑하지만, 사랑하기에 감정은 더욱 격렬해졌다. 나를 상처 주기만 하는 그 말, 가시 돋친 비꼼이 원망스럽다.
나는 이를 악물며 소리 질렀다.
「난 위선자가 아니오!」
「그럼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찮은 소리로 날 설득하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연모하니까!!」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풀며, 흔들리는 눈빛에 대고 부르짖었다.
「사랑하는 이를 어찌 목숨 잃게 내버려 둘 수 있겠소, 미치지 않은 이상!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연모했소, 놓치고 싶지 않다 생각했다고! 그래, 나를 위선자라 말해도 좋소. 하지만 내 연심까지는 폄하하지 마시오. 절대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그게 내 진심이오……!」
머릿속까지 태울 것 같은 열기에 휩싸여 소리쳤다. 열이 오른다.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왜 그걸 모르는 척 회피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야속하고 화가 난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이 기분. 정말로 오랜만에 느끼는 이 떨리는 열정. 숨결 하나하나, 얼굴 근육의 떨림 하나하나를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 그걸 실감한 순간 희열감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그 감정들의 덩어리가 되어 눈앞의 남자를 열렬하게 쳐다보았다.
나, 그리고 눈앞의 윤성해, 둘의 숨소리만이 어두운 방 안을 메운다. 다른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컷 사인 따위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끊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긴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네 눈만을 바라보고 싶다…….
나와 시선을 맞부딪히고 있는, 눈앞의 차가웠던 검은 눈동자가 점점 흔들려 가는 것이 보였다. 앉아 있는 몸에서 어깨가 작게 떨리는 것을 손바닥으로 느꼈다.
이제 그가 입을 열겠지. 희열에 젖어 그 입술만을 내려다보고 있던 때.
“……컷.”
정계수 쪽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한숨을 토하고 있었다.
“미안, 1분만 끊어 가자. 내가 기 빨려서 못 보겠어.”
손으로 잡고 있던 상대의 어깨 근육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다시 윤성해, 아니 한제영을 쳐다보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아래 흰 얼굴엔 아직도 떨리는 듯한 표정이 남아 있었다. 이 녀석도 몰입에서 잘 헤어 나오지 못하는 타입인 걸까.
다시 촬영장이 조금 시끄러워진다. 분장 스태프들이 다가와 한제영의 땀을 적당히 닦아 주고 분칠을 마친다. 나는 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다.
“하, 씨발…… 저 새끼 대체 왜 쉰 거야? 진짜 쌀 뻔했네…….”
정계수가 뭐라 중얼거렸지만, 신경 쓸 새도 없었다.
온통 내 신경은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긴장을 풀지 않는, 나를 이겨 먹기라도 할 것처럼 강렬히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내 머릿속엔 이 남자의 입술에서 흐를 말, 그리고 거기에 대꾸할 말밖에 없었다.
감정을 다시 바로잡으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잡은 채 가까이 서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방 안, 오직 나와 눈앞의 사람이 내는 소리만이 우리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레디, 액션.”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다시 그를 열렬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윤성해 역시도 조금씩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입술을 깨물며 내 시선을 피했다.
「……번지르르한 언사 하나는 출중하군요.」
윤성해가 차갑게 말했다. 여전히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온기 어린 몸엔 떨림이 가득한데도, 하얀 얼굴에선 어떤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내 냉랭한 눈빛이 나를 향하고, 아름다운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비웃음을 띠었다.
「제가 몇 번 놀이에 응해 줬다고 기고만장하는 꼴이라니, 우습습니다.」
「……뭐라 했소.」
「이젠 위선자에 이어, 창부 노릇이라도 하는 겁니까? 어느 경찰서에 신고해야겠군요. 여기 사내를 좋아하는 정신병자가 있다고 말이지요.」
「정말이지, 당신!!」
눈을 새까맣게 태워 버릴 것만 같이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다시 윤성해의 멱살을 움켜쥐어 올렸다. 이 자는 어찌 이리 심장을 바닥까지 다 파내어 버릴 것만 같은 말만 하는가. 어찌 이리 사람을 절망스럽게만 하는가, 내 마음을 그리 잘 알면서도!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얼굴에 주먹이 와 닿았다.
생각보다 세게 얼굴을 쳐 오는 주먹에 고개가 그대로 돌아갔다. 얼얼한 얼굴을 감싸려다 휘청 균형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윤성해가 일어선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차갑고, 쓰린 눈을 하고.
「더러운 손 치우십시오. 이제 정신을 차릴 때입니다, 당신은 돌아갈 곳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기어이 폭력까지 쓰는 윤성해에게 실망하고 분노해 버린 탓에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울컥 치솟은 감정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닿고 싶었던 따뜻한 피부, 하지만 이런 방식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주먹질에 윤성해가 짧게 신음하며 고개를 젖히는 순간.
“컷.”
현실로 불러오는 목소리가 고요하던 방 안에 울렸다.
“자, 이제 피 분장 좀 들어갈게. 박 감독님, 잠깐만 얘기 좀.”
분장 스태프들이 다가와, 맞았던 입가에 뻘건 물감을 묻히고 상처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젊은 여자 스태프 한 명이 와서 사무적인 태도로 일을 시작했다. 다른 남자 스태프는 맞은편에 앉은 한제영에게 피 액체가 담긴 주머니를 건네며 촬영 중 적절할 때 흘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뺨에 슬쩍 맞은 흔적을 주기 위해 칠을 하기도 했고.
그동안 한제영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약간 흔들림이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내 연기에 바짝 따라오고 있다는 게 좀 놀랍다. 눈을 내리깐 채 냉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연기가 더해지자 윤성해, 아니 그 이상이 되었다.
왜 지금까지 이런 녀석이 제대로 된 역을 맡지 못했던 거지? 뭔가 소속사 사장한테 밉보였나? 끝나고 나면 바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짜 제대로 키워 보면, 나보다도 괜찮은 배우로 올라서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제영이 눈을 올려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 눈빛에 심적으로 조금 움찔했다. 그리고 머쓱해졌다. 정작 녀석이 한 말은 반대였지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뭐가? 나 때린 건 걱정 안 해 줘도 되는데.”
“그것도 있지만, 제가…… 선배님 눈빛 때문에 계속 흔들리게 돼서요. 감정 표현이 너무 완벽하셔서, 어쩐지 그대로 집어삼켜 질 것 같아서.”
이 녀석은 어쩐지 오글거리는 말도 정말 진심인 것처럼, 전혀 오글거리지 않게 전달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스태프에게 ‘머리 헝클지 마세요’ 하고 혼났다.
“제일 중요한 건 이제 다다음 장면이잖아. 솔직히 좀 불안하다.”
“……불안하세요?”
문득 진심을 말해 버렸단 생각에 민망해져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그냥 잘 될지 모르겠어서. 뭐, 난 원래 잘하니까 너만 잘하면 되겠지.”
일부러 그렇게 재수 없게 말했지만, 정작 한제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스태프들만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째 도발 타깃이 잘못 걸린 것 같은데……? 또다시 머리를 긁적이다 혼났다.
“자, 다시 들어가자. 분장 끝이지? 오케이. 감정 잡자, 윤성해 씨.”
정계수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어쩐지 계수 녀석은 평소보다 한껏 흥분한 것처럼 보인다. 정계수의 말에 한제영은 다시 윤성해로 돌아가 눈을 내리깔고 밑바닥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도 그에 맞춰 심호흡을 하고서, 앞에 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한쪽 뺨이 붉어져 있는 그를.
격노에 사로잡힌다. 눈앞의 남자에게 강렬한 애정을 느끼면서도, 그에 비례한 증오에 괴롭다. 원망스럽다. 방금 나는 주먹에 맞았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 지금 난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다. 이게 바로 지금의 ‘내’ 감정이었다.
정계수가 손짓했다.
“레디, 액션.”
눈을 부릅뜨고 윤성해를 노려보았다.
「망할 놈의 고집 같으니라고! 이기적인 건 당신이야, 당신의 신념만 중요할 뿐 내 마음 따위는 중요치 않았던 게지! 당신이야말로 이기적이라고!!」
끓어오르는 분노로 악을 쓰며 장롱 쪽으로 윤성해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눈을 꽉 감은 윤성해가 작게 신음했다. 그것도 잠시. 다시 이를 악물며 눈을 부릅뜨고, 멱살을 잡아 올린 내 두 팔을 움켜잡으며 힘을 주었다.
「이거 놓으시오!」
강한 악력에 흔들려 장식장으로 함께 쓰러져 버렸다. 장식장에 놓여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시끄럽게 굴러다닌다. 그럼에도 그를 놓지 않았다. 우리의 호흡만이 아직 식지 않은 열기 속에 떠다니고 있었다.
윤성해는 잠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보았을 때 넘어지며 어딘가에 부딪힌 탓인지 그의 이마에서는 피가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괴로운 듯한 한숨이 여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나는 숨을 멈추고서 벌건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를 다치게 했다.
수그러드는 분노와 원망 대신에 자리 잡는 것은 눈물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윤성해의 흰 뺨을 감싸 안았다. 손가락으로 그 순수한 피를 닦아내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작게 탄식하고 말았다.
원망해야 할 자는 정작 나 자신이 아니던가.
「……윤 군…….」
「…….」
몸을 수그려, 피맺힌 입술에 조용히 입 맞추었다.
마른 입술은 침입을 막지 않았다. 천천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가 뜨겁게 혀를 섞었다. 서투른 입맞춤임에도 달콤하다.
예전, 작전 중에 어쩌다 실수로 그에게 입 맞춘 적이야 있었지만, 이번은 정말 제대로 된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기쁜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다. 갑자기 도망갈까 무서워 상대의 손목을 쥐어 잡고 몇 번이고 입술을 거듭했다.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하얀 얼굴엔 걱정이 떠올라 있다. 이젠 하다못해 신인한테까지 걱정받는 건가, 나도 갈 데까지 갔네. 피식 웃으며 한제영을 바라보았다.
“네 걱정이나 해, 인마. 어디서 신인이 남 걱정이야?”
“……죄송합니다.”
“합이나 맞춰 보자. 대사 치다가 내가 먼저 멱살 쥘 거고…….”
그다음엔 윤성해가 주먹질, 내가 주먹질. 장롱문에 밀치면서 장식장에 물건 와장창 다 쏟아지고, 잡히는 물건 내팽개치고 소리 지르고, 뒤엉겨 붙고 싸우다가 그대로 키스. 우리가 싸우게 될 절차다. 이 조용한 녀석이 그런 감정 연기를 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 봐야 아는 거지.
“키스는, 깊게 하는 거겠죠……?”
어두운 방 안,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한제영이 중얼거렸다.
“그래, 시나리오상으론 이미 한 번 가볍게 했으니까.”
“…….”
“키스 한 번도 안 해 본 건 아닐 거 아냐?”
한제영은 대답이 없었다. ……설마, 안 해 봤나? 한 번도? 스물다섯 해 동안?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굉장히 당황하고 말았다. 저 정도로 잘생긴 놈이면 여자고 남자고 가만 놔 두진 않았을 텐데?
“아니…… 설마 그때도 안 했어?”
가까이 다가서며 다급히 속삭이자 한제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에 떡이 되어서도 키스 한 번을 안 했다니, 내 입술은 대체 어딜 더듬었던 건가.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잠시 고민했고, 정계수에게 다가갔다. ‘촬영 언제 시작해?’ 그 질문에 정계수는 ‘15분 뒤쯤?’ 하고 건성으로 답했다. 뭔가 신경 쓸 게 많은 모양인지 바빠 보였다.
다시 한제영 앞. 나는 녀석을 끌고 촬영장을 나왔다. 후배님은 어디로 가냔 말도 없이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주위를 살펴보다 사람 없이 비어 있는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통보했다.
“리허설, 해 보자.”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입술 부르틀 때까지 리테이크 들어가고 싶진 않잖아, 너도. 자, 대 봐.”
괜히 이러는 건가 싶어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어차피 수십 번쯤 해야 하는 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한제영의 얼굴을 붙잡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슬로우 모션처럼 나와 녀석만의 리허설이 이어졌다.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바뀌어 가는 게 느껴졌다. 따뜻한 감각이 입술에 녹아들고, 이내 벌어진 사이로 천천히 혀를 더 뜨거운 점막에 뒤섞기 시작했다.
한제영이 내 팔을 잡았다. 작은 신음이 이따금 숨결과 겹쳐 흘렀다. 어느새 나는 녀석을 벽에 밀쳐 놓고 입술을 삼키다시피 하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빨아올리길 거듭하며 하체를 가깝게 붙였다. 상상하던 장면대로 거칠게, 욕망에 몸을 맡긴 것처럼 탐했다.
내가 나 자신 같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 지금 여기서 키스하고 있는 것은 나와 한제영이 아니다. 이케다와 윤성해지. 이건 일이다. 연기를 위해서 하고 있는 거라고.
“……하…….”
입술을 떼고서 눈앞의 하얀 얼굴을 보았다.
정갈한 눈빛 대신, 그곳엔 흐릿해진 눈동자가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타액으로 젖은 붉은 입술, 그냥 붉은색이라 표현해도 무리 아닐 듯한 후배가 거기 있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가슴까지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으로.
“……이제, 감이 와?”
나 역시도 숨이 아직 거칠었다. 현실감이 옅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앞의 상대가 말끔하게 올린 머리에 1920년대를 연상시키는 복장이라서인지 몰라도, 과거의 환상에 젖어 들어가는 것만 같다.
이 친구와는 연애고 섹파고 할 생각이 없음에도 더 나가면 어떻게 될까 싶은 감정이 순간 나를 집어삼켰다. 물론 순간뿐이었다. 이성을 되찾는 건 금방이었다.
“……네, 알 것 같습니다. 아마도요…….”
한제영은 어지러운 듯 고개를 흔들더니 천천히 답해 왔다. 그러더니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다리를 세우고 앉아 머리를 수그렸다. 숨소리가 겨우 고르게 되었을 무렵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먼저 나가 주실 수 있나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어…… 그래, 알았어.”
당황스러움에 버벅거리며 대답한 후 컨테이너를 나와 문을 닫았다. 차가운 공기가 덮쳐왔다. 주차된 자동차들, 전통 가옥을 감싸고 있는 철제 가림막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난 후에야 현실감이 들었다.
너무 몰입했다. 과잉된 감정 탓에, 싸우는 장면이나 제대로 찍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연습한 게 무리수였던 걸까. 하지만 가뜩이나 내 컨디션도 안 좋은 판에 서투른 스킨십으로 수십 번의 리테이크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을 뿐이다. 내가 잘못한 건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해 봤자 소용없지. 날 좋아한다던 녀석에게 가혹한 짓을 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거다. 모르겠다. 아,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
흙바닥에 굴러다니던 돌을 걷어차 버리고선, 다시 촬영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갔다 왔어?”
정계수가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 시선을 피했다.
“알아서 뭐 하게, 인마. 이제 촬영 들어가지?”
“어. 우리 신인은?”
“오겠지, 뭐.”
그리고 곧 한제영이 왔다. 다시 하얀 얼굴이 돼서, 차가운 공기를 몰고 달려와 내 옆에 섰다.어쩐지 녀석을 쳐다볼 엄두가 나질 않아서, 딴 곳에 시선을 뒀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이제 시작할 건데, 뭐. 자, 자리 위치하시고. 다들 들어갑시다!”
박수를 치며 정계수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 소리에 카메라 팀, 음향팀, 미술팀, 조명팀 등 각종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준비에 들어갔다. 이제 그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 저 낡은 조선식 이불과 장롱, 자개장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서야 한다.
영화 속 이 장면의 시간은 밤이다. 가림막으로 빛이 들어올 만한 구멍은 전부 가렸고, 조명은 그 어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불 머리맡에 있는 작은 석유등도.
리허설 차원에서 먼저 한 신 정도 찍어 보자, 하고 정계수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고 어지러운 감정을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나, 이케다 신스케는 조금 전 친우에게 배신당하고 아버지에게 맹비난당했다. 몰래 해 오던 조선 독립운동의 원조들은 전부 의미 없이 공중으로 분해되어 버렸다. 자신은 내국인이고, 지금까지 해 오던 일엔 전부 같잖은 동정심이 바닥에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선인조차도 자신의 내적 갈등을 비웃는다. 대체 왜 그러고 있냐고, 조선인도 아니면서 왜 일본 제국에 도움되지 않을 짓을 하느냐고. 내가 가는 이 길이 잘못된 것인가 괴로워할 때, 마침표를 찍다시피 하는, 마음속의 마지막 보루였던 사랑하는 남자.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입니다.
냉랭한 어조로 통보하는 윤성해에게 그 작전에 참여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가 쇠고집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생각해 물러나겠다 했던 며칠 전 그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 마음을 살려 내기만 하면 된다. 대본은 어렵지 않다. 김무원 작가는 지시사항을 세심하게 적어 두는 편이라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그대로만 하면 된다.
세트팀과 미술팀이 따로 만들어 놓은 출입구 밖으로 나갔다. 윤성해는 이 집 안에 있고, 나는 그를 찾아 여기로 오게 된다.
“자, 해 봅시다. 신 넘버 90. 레디, 액션.”
평소와 다르게 차분해진 정계수의 목소리가 들리고 20초, 나는 문을 급히 열어젖혔다. 내 속의 이케다 신스케를 맞아들이는 것처럼.
“……윤성해 군!”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가옥 내부, 그 안의 낡은 나무 의자에 윤성해는 앉아 있었다. 차갑게 식은 눈을 하고. 나는 문을 쾅 닫고 내부로 발을 옮겼다.
“컷. 좋아, 바로 가자. 다음, 액션.”
정계수가 빙긋 웃으며 카메라를 내부 쪽으로 돌리게 지시했다.
「왜 이리 소란입니까.」
윤성해는 이쪽을 보지도 않고, 석유등 불빛으로 서적을 읽으며 말한다. 그 무심한 모습이 꾸며 낸 것이든 아니든 화가 난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한 구절씩 토해 냈다.
「왜 이리 소란이냐고? 정말 그 이유를 몰라서 그러는 거요?」
「…….」
「대체 왜! 그 작전은 자살 행위요, 분명 내가 언질을 주었을 터―」
「때로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게 왜 당신이어야 하냐고!」
그 말에 윤성해가 눈을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그럼 다른 동지들이 목숨을 잃는 것은 괜찮단 말입니까? 역시 왜인이라 그런지, 한도 없이 이기적이군요.」
「뭐라 말했소!」
울컥 화를 내며 윤성해의 어깨를 붙잡자, 그가 차갑게 손을 뿌리쳤다. 그 뿌리침에 더 화가 솟아 다시 두 손으로 어깨를 쥐자, 얼음조각 같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당신도 별수 없는 왜인입니다. 조선의 독립을 돕겠다 성화지만, 정작 중요한 거사에 자신의 사람은 제외하고 싶다는 것 아닙니까.」
「그건 내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 누구나 마찬가지인 걸 왜 모르오, 왜!」
「당신은 위선잡니다. 결국, 자신의 정의감을 과시하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 것뿐이겠지요.」
「……!」
나는 그대로 윤성해의 멱살을 잡았다. 와이셔츠 자락의 까끌거림이 손 안 가득히 잡히는 순간, 하얀 얼굴에 단정히 놓인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순간.
「…….」
멱살을 잡아 올려 본 남자의 눈빛은 절대 밀리지 않을 것처럼 강렬했다. 어떤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의 생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듯한 푸른 불길 같은 눈빛.
그 눈빛을 정말로 사랑하지만, 사랑하기에 감정은 더욱 격렬해졌다. 나를 상처 주기만 하는 그 말, 가시 돋친 비꼼이 원망스럽다.
나는 이를 악물며 소리 질렀다.
「난 위선자가 아니오!」
「그럼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찮은 소리로 날 설득하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연모하니까!!」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풀며, 흔들리는 눈빛에 대고 부르짖었다.
「사랑하는 이를 어찌 목숨 잃게 내버려 둘 수 있겠소, 미치지 않은 이상!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연모했소, 놓치고 싶지 않다 생각했다고! 그래, 나를 위선자라 말해도 좋소. 하지만 내 연심까지는 폄하하지 마시오. 절대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그게 내 진심이오……!」
머릿속까지 태울 것 같은 열기에 휩싸여 소리쳤다. 열이 오른다.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왜 그걸 모르는 척 회피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야속하고 화가 난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이 기분. 정말로 오랜만에 느끼는 이 떨리는 열정. 숨결 하나하나, 얼굴 근육의 떨림 하나하나를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 그걸 실감한 순간 희열감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그 감정들의 덩어리가 되어 눈앞의 남자를 열렬하게 쳐다보았다.
나, 그리고 눈앞의 윤성해, 둘의 숨소리만이 어두운 방 안을 메운다. 다른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컷 사인 따위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끊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긴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네 눈만을 바라보고 싶다…….
나와 시선을 맞부딪히고 있는, 눈앞의 차가웠던 검은 눈동자가 점점 흔들려 가는 것이 보였다. 앉아 있는 몸에서 어깨가 작게 떨리는 것을 손바닥으로 느꼈다.
이제 그가 입을 열겠지. 희열에 젖어 그 입술만을 내려다보고 있던 때.
“……컷.”
정계수 쪽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한숨을 토하고 있었다.
“미안, 1분만 끊어 가자. 내가 기 빨려서 못 보겠어.”
손으로 잡고 있던 상대의 어깨 근육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다시 윤성해, 아니 한제영을 쳐다보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아래 흰 얼굴엔 아직도 떨리는 듯한 표정이 남아 있었다. 이 녀석도 몰입에서 잘 헤어 나오지 못하는 타입인 걸까.
다시 촬영장이 조금 시끄러워진다. 분장 스태프들이 다가와 한제영의 땀을 적당히 닦아 주고 분칠을 마친다. 나는 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다.
“하, 씨발…… 저 새끼 대체 왜 쉰 거야? 진짜 쌀 뻔했네…….”
정계수가 뭐라 중얼거렸지만, 신경 쓸 새도 없었다.
온통 내 신경은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긴장을 풀지 않는, 나를 이겨 먹기라도 할 것처럼 강렬히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내 머릿속엔 이 남자의 입술에서 흐를 말, 그리고 거기에 대꾸할 말밖에 없었다.
감정을 다시 바로잡으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잡은 채 가까이 서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방 안, 오직 나와 눈앞의 사람이 내는 소리만이 우리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레디, 액션.”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다시 그를 열렬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윤성해 역시도 조금씩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입술을 깨물며 내 시선을 피했다.
「……번지르르한 언사 하나는 출중하군요.」
윤성해가 차갑게 말했다. 여전히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온기 어린 몸엔 떨림이 가득한데도, 하얀 얼굴에선 어떤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내 냉랭한 눈빛이 나를 향하고, 아름다운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비웃음을 띠었다.
「제가 몇 번 놀이에 응해 줬다고 기고만장하는 꼴이라니, 우습습니다.」
「……뭐라 했소.」
「이젠 위선자에 이어, 창부 노릇이라도 하는 겁니까? 어느 경찰서에 신고해야겠군요. 여기 사내를 좋아하는 정신병자가 있다고 말이지요.」
「정말이지, 당신!!」
눈을 새까맣게 태워 버릴 것만 같이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다시 윤성해의 멱살을 움켜쥐어 올렸다. 이 자는 어찌 이리 심장을 바닥까지 다 파내어 버릴 것만 같은 말만 하는가. 어찌 이리 사람을 절망스럽게만 하는가, 내 마음을 그리 잘 알면서도!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얼굴에 주먹이 와 닿았다.
생각보다 세게 얼굴을 쳐 오는 주먹에 고개가 그대로 돌아갔다. 얼얼한 얼굴을 감싸려다 휘청 균형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윤성해가 일어선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차갑고, 쓰린 눈을 하고.
「더러운 손 치우십시오. 이제 정신을 차릴 때입니다, 당신은 돌아갈 곳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기어이 폭력까지 쓰는 윤성해에게 실망하고 분노해 버린 탓에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울컥 치솟은 감정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닿고 싶었던 따뜻한 피부, 하지만 이런 방식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주먹질에 윤성해가 짧게 신음하며 고개를 젖히는 순간.
“컷.”
현실로 불러오는 목소리가 고요하던 방 안에 울렸다.
“자, 이제 피 분장 좀 들어갈게. 박 감독님, 잠깐만 얘기 좀.”
분장 스태프들이 다가와, 맞았던 입가에 뻘건 물감을 묻히고 상처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젊은 여자 스태프 한 명이 와서 사무적인 태도로 일을 시작했다. 다른 남자 스태프는 맞은편에 앉은 한제영에게 피 액체가 담긴 주머니를 건네며 촬영 중 적절할 때 흘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뺨에 슬쩍 맞은 흔적을 주기 위해 칠을 하기도 했고.
그동안 한제영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약간 흔들림이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내 연기에 바짝 따라오고 있다는 게 좀 놀랍다. 눈을 내리깐 채 냉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연기가 더해지자 윤성해, 아니 그 이상이 되었다.
왜 지금까지 이런 녀석이 제대로 된 역을 맡지 못했던 거지? 뭔가 소속사 사장한테 밉보였나? 끝나고 나면 바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짜 제대로 키워 보면, 나보다도 괜찮은 배우로 올라서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제영이 눈을 올려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 눈빛에 심적으로 조금 움찔했다. 그리고 머쓱해졌다. 정작 녀석이 한 말은 반대였지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뭐가? 나 때린 건 걱정 안 해 줘도 되는데.”
“그것도 있지만, 제가…… 선배님 눈빛 때문에 계속 흔들리게 돼서요. 감정 표현이 너무 완벽하셔서, 어쩐지 그대로 집어삼켜 질 것 같아서.”
이 녀석은 어쩐지 오글거리는 말도 정말 진심인 것처럼, 전혀 오글거리지 않게 전달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스태프에게 ‘머리 헝클지 마세요’ 하고 혼났다.
“제일 중요한 건 이제 다다음 장면이잖아. 솔직히 좀 불안하다.”
“……불안하세요?”
문득 진심을 말해 버렸단 생각에 민망해져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그냥 잘 될지 모르겠어서. 뭐, 난 원래 잘하니까 너만 잘하면 되겠지.”
일부러 그렇게 재수 없게 말했지만, 정작 한제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스태프들만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째 도발 타깃이 잘못 걸린 것 같은데……? 또다시 머리를 긁적이다 혼났다.
“자, 다시 들어가자. 분장 끝이지? 오케이. 감정 잡자, 윤성해 씨.”
정계수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어쩐지 계수 녀석은 평소보다 한껏 흥분한 것처럼 보인다. 정계수의 말에 한제영은 다시 윤성해로 돌아가 눈을 내리깔고 밑바닥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도 그에 맞춰 심호흡을 하고서, 앞에 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한쪽 뺨이 붉어져 있는 그를.
격노에 사로잡힌다. 눈앞의 남자에게 강렬한 애정을 느끼면서도, 그에 비례한 증오에 괴롭다. 원망스럽다. 방금 나는 주먹에 맞았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 지금 난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다. 이게 바로 지금의 ‘내’ 감정이었다.
정계수가 손짓했다.
“레디, 액션.”
눈을 부릅뜨고 윤성해를 노려보았다.
「망할 놈의 고집 같으니라고! 이기적인 건 당신이야, 당신의 신념만 중요할 뿐 내 마음 따위는 중요치 않았던 게지! 당신이야말로 이기적이라고!!」
끓어오르는 분노로 악을 쓰며 장롱 쪽으로 윤성해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눈을 꽉 감은 윤성해가 작게 신음했다. 그것도 잠시. 다시 이를 악물며 눈을 부릅뜨고, 멱살을 잡아 올린 내 두 팔을 움켜잡으며 힘을 주었다.
「이거 놓으시오!」
강한 악력에 흔들려 장식장으로 함께 쓰러져 버렸다. 장식장에 놓여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시끄럽게 굴러다닌다. 그럼에도 그를 놓지 않았다. 우리의 호흡만이 아직 식지 않은 열기 속에 떠다니고 있었다.
윤성해는 잠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보았을 때 넘어지며 어딘가에 부딪힌 탓인지 그의 이마에서는 피가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괴로운 듯한 한숨이 여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나는 숨을 멈추고서 벌건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를 다치게 했다.
수그러드는 분노와 원망 대신에 자리 잡는 것은 눈물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윤성해의 흰 뺨을 감싸 안았다. 손가락으로 그 순수한 피를 닦아내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작게 탄식하고 말았다.
원망해야 할 자는 정작 나 자신이 아니던가.
「……윤 군…….」
「…….」
몸을 수그려, 피맺힌 입술에 조용히 입 맞추었다.
마른 입술은 침입을 막지 않았다. 천천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가 뜨겁게 혀를 섞었다. 서투른 입맞춤임에도 달콤하다.
예전, 작전 중에 어쩌다 실수로 그에게 입 맞춘 적이야 있었지만, 이번은 정말 제대로 된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기쁜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다. 갑자기 도망갈까 무서워 상대의 손목을 쥐어 잡고 몇 번이고 입술을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