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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지나 세로지나 꽃은 핀다 2화
一章 : 연과 모란, 모란과 연 (2)
그날은 춥다 못해 바람이 칼날처럼 아렸다. 그래도 방 안에서만 있자니 답답하여 문을 열고 나왔더니 밖에 부르지도 않은 백모란이 있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연은 성질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
날도 춥고 짜증이 나니 화풀이를 하려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백모란이 아주 뚜렷한 음성으로 연의 이름을 불렀다. 남궁연, 하고.
감히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연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금방 불같은 분노가 찾아왔다. 그동안 착한 척 얌전한 척하며 본모습을 속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다.
간신히 검을 빼어 들지 않은 건 백모란이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죽여도 진즉에 죽였을 것이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정말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노려보아도 백모란은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이 병신아.”
……하고 말할 적에는, 연의 이성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얼마나 죽이고 싶던지 백모란이 피를 토하고 발끝에 딱딱한 게 채여도, 문지기며 사람들이 말려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멈춘 건 모란이 마지막으로 피를 토하고는 까무룩 정신을 잃을 때였다. 주위 사람들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으며 연이 비틀 뒤로 물러났다. 추운 날씨에 숨이 찰 정도로 두들겨 패서인지 아니면 심적인 소모가 있어서인지 그는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연의 눈에 보이는 건 낯선 방의 풍경이었다.
머리 위로는 흙과 나무, 그리고 지푸라기를 성기게 엮어 인 천장이 있었다. 찬 기운이 올라오는 나무 바닥은 연이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렸다. 화정당이 아니다. 화정당에 이렇게 허름한 곳은 없다.
이내 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의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어리고 낯설었다. 가장 낯선 것은 곁을 지키고 있다가 저를 모란이라고 부르며 걱정 어린 얼굴로 대하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랬다. 연은 여덟 살의 어린 백모란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넋을 놓았다. 자신이 백모란이 되었다니, 그것도 여덟 살의 어린 백모란이 되었다니 이럴 수가 있나.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당사자인 연조차 이건 꿈이 아닐까 몇 번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정신적인 충격은 고스란히 어린 몸으로 전해졌다. 연은 몇 날 며칠을 고열을 내며 앓았다. 열 살 때 그랬던 것처럼 죽을 듯이 온 몸이 들끓는 고통에 시달렸다.
하나뿐인 아들이 그렇게 앓으니 모란의 모친은 몹시 걱정하여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정성껏 간호했다. 낯설기만 한 여인을 보는 연의 눈에는 눈물이 성글게 맺혔다가 굴러떨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모란을 괴롭힌 죗값을 받는 것인가?
열로 혼몽해진 가운데 밭일과 바느질로 거칠어진 손이 이마의 땀을 훔쳐 낼 때면 제 어미의 곱고 보드라운 손과 겹쳐 보이곤 했다. 정작 연의 모친이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는데도.
연이 진은록을 만나게 된 건 그가 앓아누운 지 사흘째의 일이었다. 이러다가 제 자식에게 큰일이라도 날까 염려스러웠던 모란의 어미가 데려온 것이었다. 열기에 흐릿해진 눈으로 연은 작고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은록을 보았다. 곱고 알록달록한 비단옷도 아닌데, 그저 깨끗한 흰옷일 뿐인데 움직임 하나, 내뱉는 말 하나가 고아했다.
원인 불명의 열이 모두 가라앉고 난 뒤에도 연은 한참을 적응 못하고 단기간 실어증을 앓았다. 모란의 모친이 무얼 해도 고개만 젓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불은 불편했고 식사도 거칠고 맛이 없어 입에 맞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몸이 바뀐 충격이 가장 컸다. 잠깐 괜찮아졌다가도 다시 열이 나기 일쑤라 진은록은 한동안 연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경기까지 하여 모란의 모친은 일을 하러 나가는 동안 그를 진은록의 의원(醫院)에 데려다 놓았다. 그게 사제지간의 시작이었다.
아마도 뛰어난 의원인 진은록의 입장에서는 이유 없는 열이나 실어증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의원에 데려다 놓은 건 증상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어도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라고, 연은 추측했다.
아무튼 그렇게 가게 된 진은록의 작은 의원은 매일같이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로 바빴다. 연은 첫날은 아무런 의욕도 없이 하루 종일 한자리에 앉아 있다가 다음 날부터는 차츰 진은록의 의술 활동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진은록의 의술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침 한두 번 놓고 나면 기어서 온 사람이 걸어서 나갔으며, 얼굴이 희거나 파랗게 질린 사람에게 약을 지어 주면 얼마 후 건강한 혈색으로 돌아와 감자나 쌀, 야채 따위의 식량을 보답으로 들고 돌아왔다.
종종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찾아와 간청하는 때도 있었다. 진은록은 그 어떤 사람이든 치료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에게 받는 값이 달랐다.
진은록은 연이 의서나 자신이 침을 놓는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가 중풍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 연이 의서를 뒤적이자 눈여겨보고는 늦은 밤 환자들이 다 돌아가고 난 뒤에 물었다.
“배우고 싶으냐?”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그는 다음날 연에게 낡고 깨끗한 책을 한 권 가져다주었다. 무언가 하여 열어 보니 천자문이었다. 아무리 몸이 여덟 살이어도 정신 연령은 스무 살인 연은 대충 훑어보는 시늉을 하고는 진은록에게 도로 내밀었다. 모란의 몸으로 들어온 후로 처음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모두 읽을 줄 압니다.”
크게 앓고 난 뒤 아이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어 한 말에 의심하거나 부정할 법도 했지만 진은록은 눈썹만 한번 찌푸리고는 말았다. 대신 가타부타 말없이 기초적인 경맥학서(經脈學書)를 가져다주었다. 무인으로서 혈도 자리 정도는 당연히 기본적으로 알고 있던 연이 막히는 곳 없이 이해하자 그때부터 진은록의 본격적인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연은 정식으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진은록의 치료와 모란 모친의 정성 어린 보살핌 덕에 연의 몸은, 아니 어린 모란의 몸은 곧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일상은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연은 모란이 처한 처지를 깨닫고 말았다. 바로 어린 백모란이 어린 연의 하인이자 몸종이었다는 점이다.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그는 다시 도련님의 수발을 위해 남궁가로 불려 가야만 했다.
열 살의 남궁연은 병마에 지쳐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혐오와 경멸 어린 표정을 떠올리는 자기 자신을 보며 연은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그랬다. 지금의 자신은 스무 살이나 혹은 열 살의 연이 아닌 여덟 살의 어린 모란이었다.
십 년 전 과거의 자신이 모란에게 했던 괴롭힘을 고스란히 그대로 받으면서 연은 처음에는 반항도 해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자 깨달음이 찾아왔다. 자신은 지금 과거에 살고 있으니, 언젠가는 바로 ‘그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미래이자 현재인, 스무 살의 연이 열여덟 살의 모란을 두들겨 패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바로 그때가.
연은 자신이 정교하게 잘 짜여진 운명을 따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니 그다음은 쉬웠다. 그저 십 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며 인내하면 됐다.
뜻밖에도 이 시간은 연에게 있어 마냥 힘들거나 괴롭지만은 않았다. 연과는 다르게 백모란의 어린 몸은 매우 건강하고 또…… 건강했다. 고뿔 한번 걸리는 일이 없었고 힘도 좋았다.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지치는 법이 없었다.
모란의 몸에 들어온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모란의 모친은 폐렴으로 작고하였으나 연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받은 모정은 가랑비처럼 연을 적시고 무르게 만들었다.
남궁연일 때는 없던 친구, 이웃, 스승……. 그 모든 게 낯설면서도 행복하고 좋았다. 딱 하나, ‘남궁연’ 도련님이―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괴롭히는 것만 뺀다면, 다소 빈궁하고 이따금 굶는 일이 있긴 해도 거의 완벽한 삶이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 정해진 그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연은 심한 갈등에 시달렸다. 그의 사부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실력이지만 이제 의술 실력이 많이 숙달되어 그는 제대로 된 의원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웃과 환자들이 제게 보내는 신망이 그토록 좋을 수가 없었다.
왜 남궁연으로 돌아가야 하나? 이렇게 좋은데 남궁연으로 살아야 하나? 저를 좋아하는 사람 한 명 없는 그 외롭고 가련한 삶으로?
몇 날 며칠을 고민했으나 결국 내린 결론은 남궁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백모란이 아닌 남궁연이었으니까. 그게 이치인 것이다.
연은 바로 ‘그날’, 새벽이 밝자마자 진은록에게 인사를 올리고 남궁가로 향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지 어떨지 미래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해야 옳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날에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제 인생을 제대로 고쳐 놓을 무언가가.
그렇게 연은 반항도 없이 남궁연이 자신을 가혹하게 두드려 패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고 난 뒤 연은 무의식중에 지난 과거들을 꿈꾸었다.
열 살의 자신, 스무 살의 자신…….
여덟 살의 백모란, 열여덟 살의 백모란…….
그가 가졌던 두 명의 어머니들과 은록, 형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도, 연은 두려워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참을 주먹만 꽉 쥐고 있다가 그는 익숙한 냄새를 알아차렸다. 약초 냄새였다. 약초 냄새 하니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건 그의 사부인 진은록이었다. 연이 억지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누군가가 있었다.
“사…부님?”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상대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의 의원이었다. 아플 적마다 연을 진료하는 세가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연이 깨어난 걸 알아차리자 의원은 다시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보면서 물었다.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돌아…왔구나……. 연이 멍하니 제 손을 들어 보았다. 햇빛에 잘 익어서 짙은 모란의 피부와는 달리 희고 말랐다. 그리고 차가웠다. 자신의 몸이 한참 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바로 어제 일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모란으로의 삶이 마치 긴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 연이 멍하니 대답 없이 앉아 있어도 의원은 익숙하다는 듯 제 할 일을 다 했다.
“기가 허해지셨습니다. 보신에 좋은 약탕을 올려놓고 갈 테니 식사 후에 드십시오.”
“…….”
“그럼 저는 이만…….”
한참을 제 손끝만 내려다보던 연이 주섬주섬 치료 도구를 챙기던 의원을 붙잡았다.
“내가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일각(一刻, 십오 분)이 채 안 됩니다. 몸이 큰 충격을 받아 잠시 의식을 잃으신 것이니 큰 이상은 없을 겁니다.”
대답하고는 그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여전히 멍한 채로 연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는 꿈을 여러 번 꾼 적 있기에 이번에도 꿈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꿈이 이렇게 생생할 리가 없었다.
연은 면경을 들여다보았다. 볼 때마다 낯선 느낌이 들던 백모란의 몸과 얼굴과는 다르게 익숙했다. 한참 동안이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다 보니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백모란과는 다르게 혈색 없는 흰 얼굴이……. 그러나 백모란의 시선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달랐다.
“이럴 때……가 아니지.”
식은땀을 닦아 내며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강한 몸에 있다가 돌아와서 그런지 이 몸이 더 안 좋게 느껴졌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니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주강이었다. 그의 호위무사며…… 동시에 ‘백모란’이 제법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테지.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 연의 입맛이 썼다.
주강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데 얼핏 연을 스치는 시선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전에는 몰랐으나 연은 이제 알 수 있었다.
“도련님, 어딜 가십니까?”
주강의 질문을 연은 그냥 무시했다. 대답할 기분도 아니었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발을 신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언제 흐렸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다. 뜰에는 핏자국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내상이 제법 심각할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면서도 연은 등골이 서늘했다.
백모란의 집으로 향하면서 연의 마음은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넘실거렸다. 이제 백모란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백모란의 원래 혼이 돌아오나? 아니면, 그저 그대로 텅 빈 몸이 되나? 연은 부디 전자이기를 바랐다. 마음이 급하니 경공을 써서 몸을 날리는데 돌연 주강이 가로막았다.
“도련님!”
“비켜, 주강.”
어떤 상처든지 다친 바로 직후의 처치가 중요하다. 물론 사부가 얼마나 상처 치료를 잘해 놓았겠냐마는 연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게다가 아까 얻어맞으면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 정도면 모란도 정신을 차렸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패 놓았으면 충분하지 않냐는 의미였다. 연은 잠시 주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은록도 과묵한 편이었으나 주강은 그보다도 더 말수가 적은 사내였다. 모란이었을 적 주강과 나름 대화를 트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먼저 말을 건네는 경우도 없고 붙임성도 없었으나 좋은 사람이었다. 실력도 좋았고. 그러나 그런 점이 지금은 방해였다.
‘해임한다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연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호위를 맡고 있기는 하나 주강은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다. 비키지 않으면 해임한다고 윽박질러도 그에게는 아무런 협박도 되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다가 연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해코지하려고 가는 게 아니니까 비켜.”
“…….”
“주강, 비키라고 했어.”
눈도 깜박이지 않고 노려보자 마침내 주강이 물러났다. 연이 발에 힘을 주어 몸을 날렸다. 고작 경공술 좀 펼쳤다고 숨이 차 속으로 빌어먹을, 하고 욕을 지껄였다.
一章 : 연과 모란, 모란과 연 (2)
그날은 춥다 못해 바람이 칼날처럼 아렸다. 그래도 방 안에서만 있자니 답답하여 문을 열고 나왔더니 밖에 부르지도 않은 백모란이 있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연은 성질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
날도 춥고 짜증이 나니 화풀이를 하려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백모란이 아주 뚜렷한 음성으로 연의 이름을 불렀다. 남궁연, 하고.
감히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연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금방 불같은 분노가 찾아왔다. 그동안 착한 척 얌전한 척하며 본모습을 속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다.
간신히 검을 빼어 들지 않은 건 백모란이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죽여도 진즉에 죽였을 것이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정말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노려보아도 백모란은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이 병신아.”
……하고 말할 적에는, 연의 이성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얼마나 죽이고 싶던지 백모란이 피를 토하고 발끝에 딱딱한 게 채여도, 문지기며 사람들이 말려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멈춘 건 모란이 마지막으로 피를 토하고는 까무룩 정신을 잃을 때였다. 주위 사람들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으며 연이 비틀 뒤로 물러났다. 추운 날씨에 숨이 찰 정도로 두들겨 패서인지 아니면 심적인 소모가 있어서인지 그는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연의 눈에 보이는 건 낯선 방의 풍경이었다.
머리 위로는 흙과 나무, 그리고 지푸라기를 성기게 엮어 인 천장이 있었다. 찬 기운이 올라오는 나무 바닥은 연이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렸다. 화정당이 아니다. 화정당에 이렇게 허름한 곳은 없다.
이내 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의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어리고 낯설었다. 가장 낯선 것은 곁을 지키고 있다가 저를 모란이라고 부르며 걱정 어린 얼굴로 대하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랬다. 연은 여덟 살의 어린 백모란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넋을 놓았다. 자신이 백모란이 되었다니, 그것도 여덟 살의 어린 백모란이 되었다니 이럴 수가 있나.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당사자인 연조차 이건 꿈이 아닐까 몇 번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정신적인 충격은 고스란히 어린 몸으로 전해졌다. 연은 몇 날 며칠을 고열을 내며 앓았다. 열 살 때 그랬던 것처럼 죽을 듯이 온 몸이 들끓는 고통에 시달렸다.
하나뿐인 아들이 그렇게 앓으니 모란의 모친은 몹시 걱정하여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정성껏 간호했다. 낯설기만 한 여인을 보는 연의 눈에는 눈물이 성글게 맺혔다가 굴러떨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모란을 괴롭힌 죗값을 받는 것인가?
열로 혼몽해진 가운데 밭일과 바느질로 거칠어진 손이 이마의 땀을 훔쳐 낼 때면 제 어미의 곱고 보드라운 손과 겹쳐 보이곤 했다. 정작 연의 모친이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는데도.
연이 진은록을 만나게 된 건 그가 앓아누운 지 사흘째의 일이었다. 이러다가 제 자식에게 큰일이라도 날까 염려스러웠던 모란의 어미가 데려온 것이었다. 열기에 흐릿해진 눈으로 연은 작고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은록을 보았다. 곱고 알록달록한 비단옷도 아닌데, 그저 깨끗한 흰옷일 뿐인데 움직임 하나, 내뱉는 말 하나가 고아했다.
원인 불명의 열이 모두 가라앉고 난 뒤에도 연은 한참을 적응 못하고 단기간 실어증을 앓았다. 모란의 모친이 무얼 해도 고개만 젓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불은 불편했고 식사도 거칠고 맛이 없어 입에 맞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몸이 바뀐 충격이 가장 컸다. 잠깐 괜찮아졌다가도 다시 열이 나기 일쑤라 진은록은 한동안 연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경기까지 하여 모란의 모친은 일을 하러 나가는 동안 그를 진은록의 의원(醫院)에 데려다 놓았다. 그게 사제지간의 시작이었다.
아마도 뛰어난 의원인 진은록의 입장에서는 이유 없는 열이나 실어증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의원에 데려다 놓은 건 증상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어도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라고, 연은 추측했다.
아무튼 그렇게 가게 된 진은록의 작은 의원은 매일같이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로 바빴다. 연은 첫날은 아무런 의욕도 없이 하루 종일 한자리에 앉아 있다가 다음 날부터는 차츰 진은록의 의술 활동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진은록의 의술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침 한두 번 놓고 나면 기어서 온 사람이 걸어서 나갔으며, 얼굴이 희거나 파랗게 질린 사람에게 약을 지어 주면 얼마 후 건강한 혈색으로 돌아와 감자나 쌀, 야채 따위의 식량을 보답으로 들고 돌아왔다.
종종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찾아와 간청하는 때도 있었다. 진은록은 그 어떤 사람이든 치료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에게 받는 값이 달랐다.
진은록은 연이 의서나 자신이 침을 놓는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가 중풍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 연이 의서를 뒤적이자 눈여겨보고는 늦은 밤 환자들이 다 돌아가고 난 뒤에 물었다.
“배우고 싶으냐?”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그는 다음날 연에게 낡고 깨끗한 책을 한 권 가져다주었다. 무언가 하여 열어 보니 천자문이었다. 아무리 몸이 여덟 살이어도 정신 연령은 스무 살인 연은 대충 훑어보는 시늉을 하고는 진은록에게 도로 내밀었다. 모란의 몸으로 들어온 후로 처음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모두 읽을 줄 압니다.”
크게 앓고 난 뒤 아이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어 한 말에 의심하거나 부정할 법도 했지만 진은록은 눈썹만 한번 찌푸리고는 말았다. 대신 가타부타 말없이 기초적인 경맥학서(經脈學書)를 가져다주었다. 무인으로서 혈도 자리 정도는 당연히 기본적으로 알고 있던 연이 막히는 곳 없이 이해하자 그때부터 진은록의 본격적인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연은 정식으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진은록의 치료와 모란 모친의 정성 어린 보살핌 덕에 연의 몸은, 아니 어린 모란의 몸은 곧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일상은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연은 모란이 처한 처지를 깨닫고 말았다. 바로 어린 백모란이 어린 연의 하인이자 몸종이었다는 점이다.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그는 다시 도련님의 수발을 위해 남궁가로 불려 가야만 했다.
열 살의 남궁연은 병마에 지쳐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혐오와 경멸 어린 표정을 떠올리는 자기 자신을 보며 연은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그랬다. 지금의 자신은 스무 살이나 혹은 열 살의 연이 아닌 여덟 살의 어린 모란이었다.
십 년 전 과거의 자신이 모란에게 했던 괴롭힘을 고스란히 그대로 받으면서 연은 처음에는 반항도 해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자 깨달음이 찾아왔다. 자신은 지금 과거에 살고 있으니, 언젠가는 바로 ‘그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미래이자 현재인, 스무 살의 연이 열여덟 살의 모란을 두들겨 패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바로 그때가.
연은 자신이 정교하게 잘 짜여진 운명을 따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니 그다음은 쉬웠다. 그저 십 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며 인내하면 됐다.
뜻밖에도 이 시간은 연에게 있어 마냥 힘들거나 괴롭지만은 않았다. 연과는 다르게 백모란의 어린 몸은 매우 건강하고 또…… 건강했다. 고뿔 한번 걸리는 일이 없었고 힘도 좋았다.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지치는 법이 없었다.
모란의 몸에 들어온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모란의 모친은 폐렴으로 작고하였으나 연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받은 모정은 가랑비처럼 연을 적시고 무르게 만들었다.
남궁연일 때는 없던 친구, 이웃, 스승……. 그 모든 게 낯설면서도 행복하고 좋았다. 딱 하나, ‘남궁연’ 도련님이―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괴롭히는 것만 뺀다면, 다소 빈궁하고 이따금 굶는 일이 있긴 해도 거의 완벽한 삶이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 정해진 그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연은 심한 갈등에 시달렸다. 그의 사부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실력이지만 이제 의술 실력이 많이 숙달되어 그는 제대로 된 의원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웃과 환자들이 제게 보내는 신망이 그토록 좋을 수가 없었다.
왜 남궁연으로 돌아가야 하나? 이렇게 좋은데 남궁연으로 살아야 하나? 저를 좋아하는 사람 한 명 없는 그 외롭고 가련한 삶으로?
몇 날 며칠을 고민했으나 결국 내린 결론은 남궁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백모란이 아닌 남궁연이었으니까. 그게 이치인 것이다.
연은 바로 ‘그날’, 새벽이 밝자마자 진은록에게 인사를 올리고 남궁가로 향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지 어떨지 미래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해야 옳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날에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제 인생을 제대로 고쳐 놓을 무언가가.
그렇게 연은 반항도 없이 남궁연이 자신을 가혹하게 두드려 패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고 난 뒤 연은 무의식중에 지난 과거들을 꿈꾸었다.
열 살의 자신, 스무 살의 자신…….
여덟 살의 백모란, 열여덟 살의 백모란…….
그가 가졌던 두 명의 어머니들과 은록, 형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도, 연은 두려워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참을 주먹만 꽉 쥐고 있다가 그는 익숙한 냄새를 알아차렸다. 약초 냄새였다. 약초 냄새 하니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건 그의 사부인 진은록이었다. 연이 억지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누군가가 있었다.
“사…부님?”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상대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의 의원이었다. 아플 적마다 연을 진료하는 세가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연이 깨어난 걸 알아차리자 의원은 다시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보면서 물었다.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돌아…왔구나……. 연이 멍하니 제 손을 들어 보았다. 햇빛에 잘 익어서 짙은 모란의 피부와는 달리 희고 말랐다. 그리고 차가웠다. 자신의 몸이 한참 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바로 어제 일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모란으로의 삶이 마치 긴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 연이 멍하니 대답 없이 앉아 있어도 의원은 익숙하다는 듯 제 할 일을 다 했다.
“기가 허해지셨습니다. 보신에 좋은 약탕을 올려놓고 갈 테니 식사 후에 드십시오.”
“…….”
“그럼 저는 이만…….”
한참을 제 손끝만 내려다보던 연이 주섬주섬 치료 도구를 챙기던 의원을 붙잡았다.
“내가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일각(一刻, 십오 분)이 채 안 됩니다. 몸이 큰 충격을 받아 잠시 의식을 잃으신 것이니 큰 이상은 없을 겁니다.”
대답하고는 그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여전히 멍한 채로 연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는 꿈을 여러 번 꾼 적 있기에 이번에도 꿈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꿈이 이렇게 생생할 리가 없었다.
연은 면경을 들여다보았다. 볼 때마다 낯선 느낌이 들던 백모란의 몸과 얼굴과는 다르게 익숙했다. 한참 동안이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다 보니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백모란과는 다르게 혈색 없는 흰 얼굴이……. 그러나 백모란의 시선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달랐다.
“이럴 때……가 아니지.”
식은땀을 닦아 내며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강한 몸에 있다가 돌아와서 그런지 이 몸이 더 안 좋게 느껴졌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니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주강이었다. 그의 호위무사며…… 동시에 ‘백모란’이 제법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테지.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 연의 입맛이 썼다.
주강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데 얼핏 연을 스치는 시선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전에는 몰랐으나 연은 이제 알 수 있었다.
“도련님, 어딜 가십니까?”
주강의 질문을 연은 그냥 무시했다. 대답할 기분도 아니었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발을 신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언제 흐렸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다. 뜰에는 핏자국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내상이 제법 심각할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면서도 연은 등골이 서늘했다.
백모란의 집으로 향하면서 연의 마음은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넘실거렸다. 이제 백모란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백모란의 원래 혼이 돌아오나? 아니면, 그저 그대로 텅 빈 몸이 되나? 연은 부디 전자이기를 바랐다. 마음이 급하니 경공을 써서 몸을 날리는데 돌연 주강이 가로막았다.
“도련님!”
“비켜, 주강.”
어떤 상처든지 다친 바로 직후의 처치가 중요하다. 물론 사부가 얼마나 상처 치료를 잘해 놓았겠냐마는 연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게다가 아까 얻어맞으면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 정도면 모란도 정신을 차렸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패 놓았으면 충분하지 않냐는 의미였다. 연은 잠시 주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은록도 과묵한 편이었으나 주강은 그보다도 더 말수가 적은 사내였다. 모란이었을 적 주강과 나름 대화를 트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먼저 말을 건네는 경우도 없고 붙임성도 없었으나 좋은 사람이었다. 실력도 좋았고. 그러나 그런 점이 지금은 방해였다.
‘해임한다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연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호위를 맡고 있기는 하나 주강은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다. 비키지 않으면 해임한다고 윽박질러도 그에게는 아무런 협박도 되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다가 연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해코지하려고 가는 게 아니니까 비켜.”
“…….”
“주강, 비키라고 했어.”
눈도 깜박이지 않고 노려보자 마침내 주강이 물러났다. 연이 발에 힘을 주어 몸을 날렸다. 고작 경공술 좀 펼쳤다고 숨이 차 속으로 빌어먹을, 하고 욕을 지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