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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지나 세로지나 꽃은 핀다 3화
一章 : 연과 모란, 모란과 연 (3)
도착해 보니 백모란의 집 근처에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연이 도착하자마자 찬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따가운 시선들을 헤치며 연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주강이 따라 들어오기 전에 면전에서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다행히 주강은 연이 닫은 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런…….”
연이 혀를 찼다. 이불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백모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서둘러 정좌하여 맥을 짚었다. 늑골에 금이 갔고 팔과 다리가 부러졌으나 뼈가 부러진 건 그다지 위중하지도 않았다. 위험한 건 내상을 입으면서 뒤틀린 혈도였다.
진찰을 해 보니 기문혈(期門穴), 중완혈(中婉穴)부터 시작해 그 부근 총 일곱 가지의 혈도에 문제가 있었다. 연은 백모란의 옆에 놓인 침구(鍼灸)들을 발견했다. 그의 사부가 들렀다 간 게 분명했다. 아마 진은록도 연과 똑같은 진단을 내렸겠지. 그리고 가지고 있는 침구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뼈는 진은록이 맞춰 두었으니 손대지 않아도 괜찮았다. 연이 깊게 심호흡을 하며 백모란의 몸에 손을 얹었다.
백모란의 몸에 들어간 날부터 연은 매일매일 이날을 떠올리고 곱씹고 외웠다. 그는 혹여라도 실수로 자신의 몸에 돌아가지 못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드는 의문이 있었다. 자신이 그리도 심하게 구타했는데 백모란의 몸은 과연 괜찮을 것인가? 평범한 사람인데?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수준의 폭행이었다. 연은 무언가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느꼈다.
고민한 끝에 연은 백모란의 몸으로 직접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을 익혔다. 남궁세가의 직계만 배울 수 있는 내공심법이었다. 모든 내공심법이 그렇지만 창궁대연신공은 특히나 정갈한 내공을 단련하는 데 특별났다. 백모란의 몸을 마음대로 쓰고 자신의 괴롭힘으로 몸을 혹사시키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보상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연은 원래대로 돌아온 뒤에는 내상을 입은 백모란을 추궁과혈(椎宮過穴)*하여 치료할 생각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공을 주입하는 방식을 이용할 계획이었는데, 이는 어지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시행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래도 이렇듯 자신의 내공을 흘려 넣어 뒤틀린 혈을 바로잡으면 불구가 되는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제 내공을 소모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있으나 마나 한 내공이 아니던가……. 연은 사부로부터 의술을 배우면서 무인으로서의 미래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다만 이 방법을 쓰기 위해서는 서로가 가능한 비슷하거나 같은 성질의 심법을 가져야만 했다. 진은록에게는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그의 내공의 성질은 남궁세가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남궁세가의 내공이 정순한 물과 같다면 진은록의 내공은 번개와도 같았다. 그래서 연은 백모란의 몸으로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을 배운 것이다. 그는 최대한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고 싶었다.
연은 일단 운기조식 하듯 혈도를 한 바퀴 따라 흘려 넣었다. 그 과정에서 미세하게 뒤틀린 혈도 두 개도 잡아냈다. 다른 사람의 몸이었으면 모르고 지나갔겠지만 자신이 한번 썼던 몸이었으니 알아채는 것이 쉬웠다.
평상시 몸과 다른 점을 샅샅이 훑어 낸 뒤 그는 본격적인 치료를 실행했다. 기문혈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다른 혈도를 원래대로 고치고 나자 온몸에 진력이 빠지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하아…….”
손을 떼어 낸 연이 숨을 골랐다. 식은땀 때문인지 아까보다 몸이 더 차게 식은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연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경멸이나 혐오, 혹은 죽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때의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미안해, 백모란.”
그래도 십 년 동안 백모란의 재산도 나름대로 모아 두었고, 지금은 부상을 입었지만 나중에는 남궁세가의 심법 덕에 몸도 다시 건강해질 터. 지켜보다가 그의 상황이 어려워지면 몰래 도와줄 생각도 있었다. 그게 연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물론, 이 몸의 주인이 다시 돌아온다는 전제하에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연이 문을 열자 주강이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강은 연의 어깨너머로 백모란의 몸을 훑고는 말없이 옆으로 비켰다. 연이 신발을 신고 걸어가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수군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잠시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익숙한 얼굴들이다……. 환자로 찾아왔거나, 혹은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눴었지.
마음이 심란하여 도망치듯이 빠른 걸음으로 나오던 연은 진은록과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냉정하고 침착한 그의 사부가 드물게도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는 바람에 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는 연을 휙 지나 백모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은 했으나 가슴이 덜컥 가라앉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진은록이 연을 그냥 지나친 건 그가 남궁세가의 차남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백모란을 치료하는 게 그의 우선 순위였기 때문이다.
연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올 때와는 달리 터덜터덜 다소 힘없는 발걸음이다. 진은록은 진맥을 하자마자 분명 뭔가 달라져도 크게 달라졌음을 바로 깨달을 것이다. 이미 진단을 해 보았으니 백모란의 상태가 위중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겠지. 그리고 잠깐 사이에 그 상태가 기적적으로 호전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한 달 정도 요양하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오리란 것도.
허나 안다 한들 무엇을 어쩔 것인가? 어떻게 추측을 할 것인가? 항상 백모란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남궁연이 몸소 찾아와 치료해 주었다고? 그것도 의술의 의도 모를 도련님이? 의심을 가지겠지. 가지고도 남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차마 백모란의 몸이 불구가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의원이면서 본인만큼 몸을 잘 아는 데다가 같은 심법을 가진 사람만이 완치할 수 있을 그런 내상이었다.
어차피 이제 더는 그의 사부가 아니었다. 그의 친구이자 아버지였던 이는 순식간에 남보다도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연이 코웃음을 쳤다. 제자를 그 꼴로 만들었으니 원수가 되면 되었겠지. 진은록이 목숨을 중히 여기는 의원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모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찾아와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연은 남궁세가로 들어가면서 천천히 속으로 이별을 고했다. 퍽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과 생이별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상황이다. 각오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각오를 한다고 모든 일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연은 오늘 아침 백모란의 몸으로 걸어온 길을 다시 따라 걸었다. 영성문을 지나 화정당으로 들어서니 뜰의 핏자국은 그사이 사라져 있었다. 그의 예민한 성정 때문에 화정당의 시비들은 꽤 바지런한 편이었다.
묵묵히 제 뒤를 쫓아온 주강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연은 성큼 방에 들어섰다. 겉옷 하나 안 걸치고 나갔다 왔더니 몸이 한기로 떨렸다. 그의 형인 남궁연오나 주강이 겨울에 외투는커녕 얇은 겉옷 하나 걸치고 다니는 것과는 달랐다. 연은 그래서 겨울이 유독 싫었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어떠한 이유’로 좋기도 했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우면서 연은 생각에 잠겼다. 백모란이 다시 깨어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영혼이 없으니 백치가 되나? 혹은 아예 깨어날 수가 없게 될까? 아니면 자신처럼 잠시 어디론가 갔던 영혼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까? 돌아온 그의 몸에는 이전의 기억들이 남아 있을까?
어려운 문제였고, 백모란이 깨기 전까지는 답을 찾기 어려운 의문들이기도 했다. 차게 식었던 몸이 체온을 되찾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동안 연은 백모란으로 살아왔던 인생을 곱씹으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
‘이런, 깜박 졸았군.’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진은록이 피곤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눈을 뜨자마자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의 제자가 누워 있는 침상이었다. 사흘째 모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맥부터 짚어 보던 은록의 얼굴이 근심과 의문으로 찌푸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은록이 이곳 안휘성(安徽省)에 자리 잡은 지도 어언 이십 년째다. 한때 그는 황성에서 일하던 솜씨 좋은 의원이었다. 그러나 황성이 어떤 곳이던가? 온갖 부조리함과 부정부패가 판치는 곳이었다. 실력보다는 가문과 권력, 그리고 지위에 의한 처방이 내려지는 게 일상다반사라. 곧은 성정의 은록은 일한 지 얼마 안 되어 넌더리를 내며 황성에서 나왔다. 일가친척이 없었으니 딱히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몇 년을 떠돌아다니며 명의라는 명성을 쌓다가 마침내 안휘성에 당도하여 작은 의원(醫院)을 하나 차렸다. 그는 가난한 자건, 부유한 자건, 혹은 인성이 악하거나 선하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환자들은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았다. 고통 앞에 귀천이 있던가?
대신 그는 반드시 치료에 대한 비용을 받아 내되 상대의 형편에 따라 값을 다르게 책정했다. 재산이 많은 자에게는 많이 받아 내어 그 비용을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형식이었다.
진은록이 제자를 들인 건 안휘성에 정착한 지 십 년 째 되는 해였다. 어느 가난한 과부의 어린 아들이 며칠 내내 고열을 내며 앓고 있어 치료하게 되었는데, 전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열뿐이라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은 원래 종종 이유 없이 고열을 앓곤 했으니. 그러나 앓고 난 아이는 실어증을 앓았다. 목과 성대에는 이상이 없었으니 머리에 이상이 생겼거나 정신적인 문제였다.
아이의 모친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일이 없다고 했으나 은록이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정신적인 문제였다. 아이는 식사도 거부하는 일이 잦았고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기만 했다. 전형적인 울병(鬱病, 우울증)의 증상이었다. 거기에 다시 열을 내고 발작하는 일이 있어 은록은 일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원에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의원에 있는 동안 아이는 은록의 의술에 관심을 보였다. 회복이 되려는 긍정적인 징후로 본 은록이 넌지시 물었다.
“배우고 싶으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음 날 천자문을 가져다주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의서(醫書)를 읽으려면 먼저 글자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이미 글자를 알고 있었다. 기초적인 경맥학서를 가져다주자 막히는 부분 없이 이해하기까지 하였다. 은록은 그때서야 아이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가 대답했다.
“백…모란입니다.”
그때부터 모란은 진은록의 제자가 되었다.
자식이 없는 그에게 있어서 아들 같은 존재였고,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어도 될 만한 아이였다. 모란은 총명했고 의원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측은지심(惻隱之心)과 냉정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끼던 제자였다. 그런 아이가 남궁연에게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며, 마을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알릴 적에 은록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오래도록 모란을 알았기에, 은록은 남궁연이 얼마나 모란을 못살게 구는지도 알고 있었다. 남궁연이 모란에게 손찌검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으며 가끔은 도를 넘을 때도 있었다.
하루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오기에 어지간해서는 간섭하지 않는 은록이 진지하게 남궁세가의 하인 일은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기도 했다. 마을에서 모란은 이미 의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남궁연의 하인으로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가 아닌가.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모란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본인이 괜찮다니 은록으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 일은 그만두라고 진즉 말려야 했던 것을.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제자를 보며 은록이 탄식했다. 맥을 짚어 보니 내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모란이 워낙 건강한 체질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 이후로 맥을 짚어 보는 건 처음이었던 은록이 잠시 멈칫했다.
‘모란이 언제 무공을 배웠던가?’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일단 부러진 팔다리의 뼈를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기간의 치료로 해결될 만한 수준의 내상이 아니었다. 의원으로 바로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워낙 심하게 다친 데다가 경황이 없어 사람들이 바로 모란의 집으로 데려간 모양이었다.
모란의 집에서 의원까지는 얼마간 거리가 있었다. 초조하고 다급한 마음으로 치료 도구를 가지고 돌아오던 중 은록은 남궁연과 마주쳤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걷던 남궁연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흠칫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은록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남궁연이 모란의 집에 들렀다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남궁연을 공격하지 않은 건 바로 뒤에 선 주강이 고개를 흔들어 보인 탓이었다.
자신의 분노보다는 위중한 제자가 더 급했기에 은록은 이를 악물고 그를 지나쳤다. 그가 당도하자마자 마을 사람이 희게 질린 얼굴로 남궁가의 공자가 들렀다 갔노라 고하였다. 은록은 불안한 마음에 단숨에 문을 열고 들어와 다시 맥부터 잡았다. 한참 뒤 은록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을 다시 살펴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 들끓던 내기(內氣)나 뒤틀렸던 혈도가 제대로 치료가 되어 있었다. 부러진 뼈와 상한 근육이 회복되도록 한 달 정도 충분히 쉰다면 원래대로 건강해질 수 있었다.
은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성거리다가 다시 앉아 차근히 맥을 짚어 보았다. 역시 혈도며 기맥이며 모두가 정상이다. 그가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은록은 이십여 년이나 환자를 치료해 왔다. 그렇기에 내상이란 절대 우습게 볼 상처가 아님을 잘 안다. 정양 생활과 함께, 침과 뜸으로 천천히 뒤틀린 혈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장기적인 치료를 요했다. 놀라운 건 갑자기 치료된 내상뿐만이 아니었다. 아까는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쳤으나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모란의 몸은 분명 내공을 배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몇 번 남궁세가의 무사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남궁세가에도 상주하는 의원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은 오로지 직계만 상대했던 탓이다. 진찰할 때마다 무사들의 몸에서 그는 남궁가 특유의 정순한 내공심법을 느낄 수가 있었다. 모란이 배운 내공심법이 바로 그런 성질이었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차이가 났다.
남궁세가의 직계를 한 번도 치료해 본 적은 없지만, 이 정도라면 직계만 배우는 내공심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에 모란이 남궁세가의 내공심법을 배웠다는 걸 전제로 하면 단시간에 이 정도 수준으로 치료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추궁과혈이란 방법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추궁과혈이라니! 조건이 까다로웠다. 시전하는 사람의 내공 손실이 크니 함부로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은록이 이를 악물었다. 대체 누구일까. 모란과 동일한 남궁세가의 심법을 배웠고 의술을 아는 자, 그리고 본인의 내공을 내주어도 될 정도로 친밀한…….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궁금함에 기웃거리고 있던 마을 사람을 한 명 붙잡아 물었다.
“남궁연 외에 이 집에 들른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까?”
“그 공자 말고는 아무도 없소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마을 사람이 이상하게 보거나 말거나 은록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방금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한 참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남궁연이 모란을 위해 몸소 와서, 무인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공을 넘겨주면서까지 치료를 했다는 가정 말이다. 하지만 남궁연이 왜 그런 짓을 하겠는가? 모란을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자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 은록은 몇 번이고 모란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혹시나 모르고 지나친 어떠한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그런 건 없었다.
모란이 깨어나지 못하는 며칠 내내 은록은 시간이 날 때마다 곁을 지키며 무슨 수로 회복된 것인지 알아내려 애를 썼다. 수면 시간까지 줄여 가며 서적을 뒤지고 맥을 짚어도 소득은 없었다. 그렇게 지낸 것이 벌써 오늘이었다.
‘오늘쯤에는 깨어나야 할 텐데.’
정신이 들었을 때와 들지 않았을 때의 진단에는 또 차이가 있었다. 은록이 침음하며 맥을 짚던 손을 놓았을 때였다. 미동 없이 가만히 누워 있던 모란의 손이 돌연 은록의 손목을 놀라울 정도의 힘으로 세게 낚아챘다. 정신이 드느냐고 묻던 은록이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백모란의 눈이…….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연은 면경부터 확인했다.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이 원래대로 돌아온 게 좀 믿기지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그마치 십 년 만인 것이다.
일어나 종을 흔들자 잠시 뒤 시비가 따뜻한 세숫물을 내왔다. 의복을 정갈히 하고 세수를 하고 나니 다음으로는 하인 하나가 아침을 들고 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백모란일 적 나름 안면을 트고 산 사람이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있지만 연은 그가 자신을 퍽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또한 예상한 일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언제는 평판 따위를 신경 썼는가?
그러나 백모란으로 지낼 적 이 사람과 얼마나 친했는가를 떠올리면 입맛이 썼다. 이곳 남궁세가는 중원에서 제일가는 가문이었으나 그랬기에 연은 결코 이곳에서는 행복해질 수가 없었다.
젓가락을 든 채 연은 물끄러미 자신의 식사를 내려다보았다. 따끈하니 갓 지은 흰쌀밥과 종류가 여섯 가지나 되는 반찬은 한참 동안 먹지 못했던, 맛 좋고 고급스러운 음식들이었다. 백모란일 적에는 가난하였기에 고기반찬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도 남궁세가에서 일하였기에 겨우 몇 번 얻어먹을 기회가 있었다.
몇 숟가락 뜨다가 연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 건 좋기는 하였으나 백모란이 가지고 있던 건강함이 그리웠다. 입맛도 몸 상태가 좋아야 제대로 돈다. 연은 얼마 먹지도 못하고 상을 물렸다.
상을 물린 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이 툭툭 떠올랐다. 백모란은 아직도 의식을 잃은 상태인가? 사부님은 어찌 지내실까. 만약에 백모란의 원래 몸 주인이 돌아온다 해도 그게 나는 아닐 테니, 하루아침에 제자를 잃은 셈이 되실 텐데.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이내 환자들에 대한 생각으로 옮아갔다. 전날까지 가능한 환자들의 치료를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제대로 치료해 주고 싶었는데 그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밖이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놀랍게도 그의 형제인 남궁연오였다. 그는 차갑게 장포 자락을 펄럭이며 자리에 앉았다.
“형님.”
연이 엉거주춤 일어나기도 전에 연오가 차게 명령했다.
“앉아라.”
그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연은 놀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남궁연일 적에야 가족 식사니 무엇이니 하여 못해도 며칠에 한 번씩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백모란에게 남궁연오란 일 년에 한 번이나 멀찌감치에서 보면 다행일 정도로 까마득한, 그 남궁세가의 소가주였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형님의 얼굴을 살폈다. 준수하면서도 강건한, 연과 달리 참으로 사내다운 얼굴이 그를 엄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형님에게 혼났던 것도 한참이나 예전이지, 아마. 십 년 전의 일이 마치 어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아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구나.”
차갑게 꾸짖는 소리를 듣고서야 연은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지만은 않았다. 사고를 하나 쳐 놓지 않았나. 그다지 후회하지는 않았으나 속마음이야 어쨌든 반성하는 모양으로 연이 고개를 숙였다.
“무인이란 자가 어찌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사람을, 그것도 네 아랫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든단 말이냐?”
할 말이 없었기에 연은 그저 묵묵부답으로 응했다. 연오가 보내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무인이란 자라…….’
아무리 좋게 봐 주어도 연의 무공 성취는 길거리 삼류 무사보다 약간 더 나은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거칠고 힘든 수련이라도 할라치면 앓아눕는 탓이다. 남궁세가의 수치라며 사람들이 공공연히 수군거리는 일에 익숙한 연은 연오의 이런 반응이 오히려 새로웠다.
‘그나마 나를 무인 취급하기는 하는구나.’
꽤 오랜 시간을 보고 지냈는데도 연오는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형제는 아니라 언제나 대하기 어려웠다. 성정이 대나무처럼 곧고 꼿꼿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는 관대하기도 했다. 동생으로 있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백모란으로, 남궁세가의 사람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점이었다. 남궁연오는 퍽 아랫사람을 아끼는 편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분노가 이해도 갔다.
“이유가 있다면 말해 보거라.”
이유라면 있었다. 남궁연일 때는 병신이라는 모욕을 들어서이고, 백모란일 때에는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어느 쪽도 연오에게 해명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연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인이 건방지게 굴어 손찌검을 하고 말았습니다.”
“남궁연!”
연오가 언성을 높여도 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더 숙여 보였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이것 하나만은 진심이었다. 백모란의 몸으로 지냈기 때문인지 이제 더는 백모란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이 남지 않았다. 그저 사람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하지만 그 형편없는 변명이 연오의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자신의 아우가 못마땅했던 연오가 들어왔을 때처럼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은 그저 묵묵하게 시선을 바닥에만 두었다. 연오가 보기에는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얼굴이라 심기가 더욱 험악해져만 갔다.
“충분히 반성할 때까지 내 눈에 띄는 일 없도록 해라. 알겠느냐?”
한마디로 무기한 근신이란 이야기였다.
“예, 형님.”
연이 고분고분 대답하자 연오는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제야 고개를 든 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대하기 어려운 형제였다. 보통 도련님이 하인을 두들겨 팼다 하여 근신처럼 무거운 처분을 받는 일은 드물었으나, 연오는 바로 그런 드문 사람이었다. 불의는 결코 눈감아 주지 않았다. 그럴 만한 힘도 있었다. 그는 장차 남궁세가의 가주가 될 몸이었으니까.
一章 : 연과 모란, 모란과 연 (3)
도착해 보니 백모란의 집 근처에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연이 도착하자마자 찬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따가운 시선들을 헤치며 연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주강이 따라 들어오기 전에 면전에서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다행히 주강은 연이 닫은 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런…….”
연이 혀를 찼다. 이불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백모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서둘러 정좌하여 맥을 짚었다. 늑골에 금이 갔고 팔과 다리가 부러졌으나 뼈가 부러진 건 그다지 위중하지도 않았다. 위험한 건 내상을 입으면서 뒤틀린 혈도였다.
진찰을 해 보니 기문혈(期門穴), 중완혈(中婉穴)부터 시작해 그 부근 총 일곱 가지의 혈도에 문제가 있었다. 연은 백모란의 옆에 놓인 침구(鍼灸)들을 발견했다. 그의 사부가 들렀다 간 게 분명했다. 아마 진은록도 연과 똑같은 진단을 내렸겠지. 그리고 가지고 있는 침구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뼈는 진은록이 맞춰 두었으니 손대지 않아도 괜찮았다. 연이 깊게 심호흡을 하며 백모란의 몸에 손을 얹었다.
백모란의 몸에 들어간 날부터 연은 매일매일 이날을 떠올리고 곱씹고 외웠다. 그는 혹여라도 실수로 자신의 몸에 돌아가지 못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드는 의문이 있었다. 자신이 그리도 심하게 구타했는데 백모란의 몸은 과연 괜찮을 것인가? 평범한 사람인데?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수준의 폭행이었다. 연은 무언가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느꼈다.
고민한 끝에 연은 백모란의 몸으로 직접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을 익혔다. 남궁세가의 직계만 배울 수 있는 내공심법이었다. 모든 내공심법이 그렇지만 창궁대연신공은 특히나 정갈한 내공을 단련하는 데 특별났다. 백모란의 몸을 마음대로 쓰고 자신의 괴롭힘으로 몸을 혹사시키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보상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연은 원래대로 돌아온 뒤에는 내상을 입은 백모란을 추궁과혈(椎宮過穴)*하여 치료할 생각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공을 주입하는 방식을 이용할 계획이었는데, 이는 어지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시행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래도 이렇듯 자신의 내공을 흘려 넣어 뒤틀린 혈을 바로잡으면 불구가 되는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제 내공을 소모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있으나 마나 한 내공이 아니던가……. 연은 사부로부터 의술을 배우면서 무인으로서의 미래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다만 이 방법을 쓰기 위해서는 서로가 가능한 비슷하거나 같은 성질의 심법을 가져야만 했다. 진은록에게는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그의 내공의 성질은 남궁세가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남궁세가의 내공이 정순한 물과 같다면 진은록의 내공은 번개와도 같았다. 그래서 연은 백모란의 몸으로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을 배운 것이다. 그는 최대한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고 싶었다.
연은 일단 운기조식 하듯 혈도를 한 바퀴 따라 흘려 넣었다. 그 과정에서 미세하게 뒤틀린 혈도 두 개도 잡아냈다. 다른 사람의 몸이었으면 모르고 지나갔겠지만 자신이 한번 썼던 몸이었으니 알아채는 것이 쉬웠다.
평상시 몸과 다른 점을 샅샅이 훑어 낸 뒤 그는 본격적인 치료를 실행했다. 기문혈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다른 혈도를 원래대로 고치고 나자 온몸에 진력이 빠지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하아…….”
손을 떼어 낸 연이 숨을 골랐다. 식은땀 때문인지 아까보다 몸이 더 차게 식은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연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경멸이나 혐오, 혹은 죽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때의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미안해, 백모란.”
그래도 십 년 동안 백모란의 재산도 나름대로 모아 두었고, 지금은 부상을 입었지만 나중에는 남궁세가의 심법 덕에 몸도 다시 건강해질 터. 지켜보다가 그의 상황이 어려워지면 몰래 도와줄 생각도 있었다. 그게 연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물론, 이 몸의 주인이 다시 돌아온다는 전제하에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연이 문을 열자 주강이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강은 연의 어깨너머로 백모란의 몸을 훑고는 말없이 옆으로 비켰다. 연이 신발을 신고 걸어가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수군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잠시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익숙한 얼굴들이다……. 환자로 찾아왔거나, 혹은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눴었지.
마음이 심란하여 도망치듯이 빠른 걸음으로 나오던 연은 진은록과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냉정하고 침착한 그의 사부가 드물게도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는 바람에 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는 연을 휙 지나 백모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은 했으나 가슴이 덜컥 가라앉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진은록이 연을 그냥 지나친 건 그가 남궁세가의 차남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백모란을 치료하는 게 그의 우선 순위였기 때문이다.
연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올 때와는 달리 터덜터덜 다소 힘없는 발걸음이다. 진은록은 진맥을 하자마자 분명 뭔가 달라져도 크게 달라졌음을 바로 깨달을 것이다. 이미 진단을 해 보았으니 백모란의 상태가 위중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겠지. 그리고 잠깐 사이에 그 상태가 기적적으로 호전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한 달 정도 요양하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오리란 것도.
허나 안다 한들 무엇을 어쩔 것인가? 어떻게 추측을 할 것인가? 항상 백모란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남궁연이 몸소 찾아와 치료해 주었다고? 그것도 의술의 의도 모를 도련님이? 의심을 가지겠지. 가지고도 남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차마 백모란의 몸이 불구가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의원이면서 본인만큼 몸을 잘 아는 데다가 같은 심법을 가진 사람만이 완치할 수 있을 그런 내상이었다.
어차피 이제 더는 그의 사부가 아니었다. 그의 친구이자 아버지였던 이는 순식간에 남보다도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연이 코웃음을 쳤다. 제자를 그 꼴로 만들었으니 원수가 되면 되었겠지. 진은록이 목숨을 중히 여기는 의원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모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찾아와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연은 남궁세가로 들어가면서 천천히 속으로 이별을 고했다. 퍽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과 생이별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상황이다. 각오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각오를 한다고 모든 일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연은 오늘 아침 백모란의 몸으로 걸어온 길을 다시 따라 걸었다. 영성문을 지나 화정당으로 들어서니 뜰의 핏자국은 그사이 사라져 있었다. 그의 예민한 성정 때문에 화정당의 시비들은 꽤 바지런한 편이었다.
묵묵히 제 뒤를 쫓아온 주강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연은 성큼 방에 들어섰다. 겉옷 하나 안 걸치고 나갔다 왔더니 몸이 한기로 떨렸다. 그의 형인 남궁연오나 주강이 겨울에 외투는커녕 얇은 겉옷 하나 걸치고 다니는 것과는 달랐다. 연은 그래서 겨울이 유독 싫었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어떠한 이유’로 좋기도 했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우면서 연은 생각에 잠겼다. 백모란이 다시 깨어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영혼이 없으니 백치가 되나? 혹은 아예 깨어날 수가 없게 될까? 아니면 자신처럼 잠시 어디론가 갔던 영혼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까? 돌아온 그의 몸에는 이전의 기억들이 남아 있을까?
어려운 문제였고, 백모란이 깨기 전까지는 답을 찾기 어려운 의문들이기도 했다. 차게 식었던 몸이 체온을 되찾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동안 연은 백모란으로 살아왔던 인생을 곱씹으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이런, 깜박 졸았군.’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진은록이 피곤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눈을 뜨자마자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의 제자가 누워 있는 침상이었다. 사흘째 모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맥부터 짚어 보던 은록의 얼굴이 근심과 의문으로 찌푸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은록이 이곳 안휘성(安徽省)에 자리 잡은 지도 어언 이십 년째다. 한때 그는 황성에서 일하던 솜씨 좋은 의원이었다. 그러나 황성이 어떤 곳이던가? 온갖 부조리함과 부정부패가 판치는 곳이었다. 실력보다는 가문과 권력, 그리고 지위에 의한 처방이 내려지는 게 일상다반사라. 곧은 성정의 은록은 일한 지 얼마 안 되어 넌더리를 내며 황성에서 나왔다. 일가친척이 없었으니 딱히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몇 년을 떠돌아다니며 명의라는 명성을 쌓다가 마침내 안휘성에 당도하여 작은 의원(醫院)을 하나 차렸다. 그는 가난한 자건, 부유한 자건, 혹은 인성이 악하거나 선하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환자들은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았다. 고통 앞에 귀천이 있던가?
대신 그는 반드시 치료에 대한 비용을 받아 내되 상대의 형편에 따라 값을 다르게 책정했다. 재산이 많은 자에게는 많이 받아 내어 그 비용을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형식이었다.
진은록이 제자를 들인 건 안휘성에 정착한 지 십 년 째 되는 해였다. 어느 가난한 과부의 어린 아들이 며칠 내내 고열을 내며 앓고 있어 치료하게 되었는데, 전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열뿐이라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은 원래 종종 이유 없이 고열을 앓곤 했으니. 그러나 앓고 난 아이는 실어증을 앓았다. 목과 성대에는 이상이 없었으니 머리에 이상이 생겼거나 정신적인 문제였다.
아이의 모친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일이 없다고 했으나 은록이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정신적인 문제였다. 아이는 식사도 거부하는 일이 잦았고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기만 했다. 전형적인 울병(鬱病, 우울증)의 증상이었다. 거기에 다시 열을 내고 발작하는 일이 있어 은록은 일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원에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의원에 있는 동안 아이는 은록의 의술에 관심을 보였다. 회복이 되려는 긍정적인 징후로 본 은록이 넌지시 물었다.
“배우고 싶으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음 날 천자문을 가져다주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의서(醫書)를 읽으려면 먼저 글자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이미 글자를 알고 있었다. 기초적인 경맥학서를 가져다주자 막히는 부분 없이 이해하기까지 하였다. 은록은 그때서야 아이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가 대답했다.
“백…모란입니다.”
그때부터 모란은 진은록의 제자가 되었다.
자식이 없는 그에게 있어서 아들 같은 존재였고,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어도 될 만한 아이였다. 모란은 총명했고 의원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측은지심(惻隱之心)과 냉정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끼던 제자였다. 그런 아이가 남궁연에게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며, 마을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알릴 적에 은록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오래도록 모란을 알았기에, 은록은 남궁연이 얼마나 모란을 못살게 구는지도 알고 있었다. 남궁연이 모란에게 손찌검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으며 가끔은 도를 넘을 때도 있었다.
하루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오기에 어지간해서는 간섭하지 않는 은록이 진지하게 남궁세가의 하인 일은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기도 했다. 마을에서 모란은 이미 의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남궁연의 하인으로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가 아닌가.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모란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본인이 괜찮다니 은록으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 일은 그만두라고 진즉 말려야 했던 것을.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제자를 보며 은록이 탄식했다. 맥을 짚어 보니 내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모란이 워낙 건강한 체질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 이후로 맥을 짚어 보는 건 처음이었던 은록이 잠시 멈칫했다.
‘모란이 언제 무공을 배웠던가?’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일단 부러진 팔다리의 뼈를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기간의 치료로 해결될 만한 수준의 내상이 아니었다. 의원으로 바로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워낙 심하게 다친 데다가 경황이 없어 사람들이 바로 모란의 집으로 데려간 모양이었다.
모란의 집에서 의원까지는 얼마간 거리가 있었다. 초조하고 다급한 마음으로 치료 도구를 가지고 돌아오던 중 은록은 남궁연과 마주쳤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걷던 남궁연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흠칫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은록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남궁연이 모란의 집에 들렀다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남궁연을 공격하지 않은 건 바로 뒤에 선 주강이 고개를 흔들어 보인 탓이었다.
자신의 분노보다는 위중한 제자가 더 급했기에 은록은 이를 악물고 그를 지나쳤다. 그가 당도하자마자 마을 사람이 희게 질린 얼굴로 남궁가의 공자가 들렀다 갔노라 고하였다. 은록은 불안한 마음에 단숨에 문을 열고 들어와 다시 맥부터 잡았다. 한참 뒤 은록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을 다시 살펴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 들끓던 내기(內氣)나 뒤틀렸던 혈도가 제대로 치료가 되어 있었다. 부러진 뼈와 상한 근육이 회복되도록 한 달 정도 충분히 쉰다면 원래대로 건강해질 수 있었다.
은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성거리다가 다시 앉아 차근히 맥을 짚어 보았다. 역시 혈도며 기맥이며 모두가 정상이다. 그가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은록은 이십여 년이나 환자를 치료해 왔다. 그렇기에 내상이란 절대 우습게 볼 상처가 아님을 잘 안다. 정양 생활과 함께, 침과 뜸으로 천천히 뒤틀린 혈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장기적인 치료를 요했다. 놀라운 건 갑자기 치료된 내상뿐만이 아니었다. 아까는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쳤으나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모란의 몸은 분명 내공을 배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몇 번 남궁세가의 무사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남궁세가에도 상주하는 의원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은 오로지 직계만 상대했던 탓이다. 진찰할 때마다 무사들의 몸에서 그는 남궁가 특유의 정순한 내공심법을 느낄 수가 있었다. 모란이 배운 내공심법이 바로 그런 성질이었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차이가 났다.
남궁세가의 직계를 한 번도 치료해 본 적은 없지만, 이 정도라면 직계만 배우는 내공심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에 모란이 남궁세가의 내공심법을 배웠다는 걸 전제로 하면 단시간에 이 정도 수준으로 치료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추궁과혈이란 방법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추궁과혈이라니! 조건이 까다로웠다. 시전하는 사람의 내공 손실이 크니 함부로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은록이 이를 악물었다. 대체 누구일까. 모란과 동일한 남궁세가의 심법을 배웠고 의술을 아는 자, 그리고 본인의 내공을 내주어도 될 정도로 친밀한…….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궁금함에 기웃거리고 있던 마을 사람을 한 명 붙잡아 물었다.
“남궁연 외에 이 집에 들른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까?”
“그 공자 말고는 아무도 없소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마을 사람이 이상하게 보거나 말거나 은록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방금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한 참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남궁연이 모란을 위해 몸소 와서, 무인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공을 넘겨주면서까지 치료를 했다는 가정 말이다. 하지만 남궁연이 왜 그런 짓을 하겠는가? 모란을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자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 은록은 몇 번이고 모란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혹시나 모르고 지나친 어떠한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그런 건 없었다.
모란이 깨어나지 못하는 며칠 내내 은록은 시간이 날 때마다 곁을 지키며 무슨 수로 회복된 것인지 알아내려 애를 썼다. 수면 시간까지 줄여 가며 서적을 뒤지고 맥을 짚어도 소득은 없었다. 그렇게 지낸 것이 벌써 오늘이었다.
‘오늘쯤에는 깨어나야 할 텐데.’
정신이 들었을 때와 들지 않았을 때의 진단에는 또 차이가 있었다. 은록이 침음하며 맥을 짚던 손을 놓았을 때였다. 미동 없이 가만히 누워 있던 모란의 손이 돌연 은록의 손목을 놀라울 정도의 힘으로 세게 낚아챘다. 정신이 드느냐고 묻던 은록이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백모란의 눈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연은 면경부터 확인했다.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이 원래대로 돌아온 게 좀 믿기지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그마치 십 년 만인 것이다.
일어나 종을 흔들자 잠시 뒤 시비가 따뜻한 세숫물을 내왔다. 의복을 정갈히 하고 세수를 하고 나니 다음으로는 하인 하나가 아침을 들고 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백모란일 적 나름 안면을 트고 산 사람이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있지만 연은 그가 자신을 퍽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또한 예상한 일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언제는 평판 따위를 신경 썼는가?
그러나 백모란으로 지낼 적 이 사람과 얼마나 친했는가를 떠올리면 입맛이 썼다. 이곳 남궁세가는 중원에서 제일가는 가문이었으나 그랬기에 연은 결코 이곳에서는 행복해질 수가 없었다.
젓가락을 든 채 연은 물끄러미 자신의 식사를 내려다보았다. 따끈하니 갓 지은 흰쌀밥과 종류가 여섯 가지나 되는 반찬은 한참 동안 먹지 못했던, 맛 좋고 고급스러운 음식들이었다. 백모란일 적에는 가난하였기에 고기반찬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도 남궁세가에서 일하였기에 겨우 몇 번 얻어먹을 기회가 있었다.
몇 숟가락 뜨다가 연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 건 좋기는 하였으나 백모란이 가지고 있던 건강함이 그리웠다. 입맛도 몸 상태가 좋아야 제대로 돈다. 연은 얼마 먹지도 못하고 상을 물렸다.
상을 물린 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이 툭툭 떠올랐다. 백모란은 아직도 의식을 잃은 상태인가? 사부님은 어찌 지내실까. 만약에 백모란의 원래 몸 주인이 돌아온다 해도 그게 나는 아닐 테니, 하루아침에 제자를 잃은 셈이 되실 텐데.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이내 환자들에 대한 생각으로 옮아갔다. 전날까지 가능한 환자들의 치료를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제대로 치료해 주고 싶었는데 그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밖이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놀랍게도 그의 형제인 남궁연오였다. 그는 차갑게 장포 자락을 펄럭이며 자리에 앉았다.
“형님.”
연이 엉거주춤 일어나기도 전에 연오가 차게 명령했다.
“앉아라.”
그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연은 놀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남궁연일 적에야 가족 식사니 무엇이니 하여 못해도 며칠에 한 번씩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백모란에게 남궁연오란 일 년에 한 번이나 멀찌감치에서 보면 다행일 정도로 까마득한, 그 남궁세가의 소가주였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형님의 얼굴을 살폈다. 준수하면서도 강건한, 연과 달리 참으로 사내다운 얼굴이 그를 엄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형님에게 혼났던 것도 한참이나 예전이지, 아마. 십 년 전의 일이 마치 어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아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구나.”
차갑게 꾸짖는 소리를 듣고서야 연은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지만은 않았다. 사고를 하나 쳐 놓지 않았나. 그다지 후회하지는 않았으나 속마음이야 어쨌든 반성하는 모양으로 연이 고개를 숙였다.
“무인이란 자가 어찌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사람을, 그것도 네 아랫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든단 말이냐?”
할 말이 없었기에 연은 그저 묵묵부답으로 응했다. 연오가 보내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무인이란 자라…….’
아무리 좋게 봐 주어도 연의 무공 성취는 길거리 삼류 무사보다 약간 더 나은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거칠고 힘든 수련이라도 할라치면 앓아눕는 탓이다. 남궁세가의 수치라며 사람들이 공공연히 수군거리는 일에 익숙한 연은 연오의 이런 반응이 오히려 새로웠다.
‘그나마 나를 무인 취급하기는 하는구나.’
꽤 오랜 시간을 보고 지냈는데도 연오는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형제는 아니라 언제나 대하기 어려웠다. 성정이 대나무처럼 곧고 꼿꼿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는 관대하기도 했다. 동생으로 있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백모란으로, 남궁세가의 사람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점이었다. 남궁연오는 퍽 아랫사람을 아끼는 편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분노가 이해도 갔다.
“이유가 있다면 말해 보거라.”
이유라면 있었다. 남궁연일 때는 병신이라는 모욕을 들어서이고, 백모란일 때에는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어느 쪽도 연오에게 해명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연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인이 건방지게 굴어 손찌검을 하고 말았습니다.”
“남궁연!”
연오가 언성을 높여도 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더 숙여 보였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이것 하나만은 진심이었다. 백모란의 몸으로 지냈기 때문인지 이제 더는 백모란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이 남지 않았다. 그저 사람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하지만 그 형편없는 변명이 연오의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자신의 아우가 못마땅했던 연오가 들어왔을 때처럼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은 그저 묵묵하게 시선을 바닥에만 두었다. 연오가 보기에는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얼굴이라 심기가 더욱 험악해져만 갔다.
“충분히 반성할 때까지 내 눈에 띄는 일 없도록 해라. 알겠느냐?”
한마디로 무기한 근신이란 이야기였다.
“예, 형님.”
연이 고분고분 대답하자 연오는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제야 고개를 든 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대하기 어려운 형제였다. 보통 도련님이 하인을 두들겨 팼다 하여 근신처럼 무거운 처분을 받는 일은 드물었으나, 연오는 바로 그런 드문 사람이었다. 불의는 결코 눈감아 주지 않았다. 그럴 만한 힘도 있었다. 그는 장차 남궁세가의 가주가 될 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