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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지나 세로지나 꽃은 핀다 4화
一章 : 연과 모란, 모란과 연 (4)


남궁영명에게는 총 다섯 명의 자식들이 있으나 감히 연오의 위치를 넘볼 자는 없었다. 정실의 자식인 데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에 무공의 성취도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성정 또한 곧고 올바르니 앞으로 남궁세가는 전에 없을 전성기를 누리리라 다들 떠들어 대곤 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는 법이지…….’
아무튼 근신이니 당분간 화정당 밖으로는 나가지 못할 것이었다. 연은 잠깐 자리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다. 전에도 화정당 밖으로는 나가는 일이 드물었지만 백모란으로 살다 왔기에 몸이며 손이 심심했다.
‘전에는 대체 뭘 하면서 지냈지?’
연은 새삼 자신의 빈약한 인맥을 돌아보았다. 모란일 적과는 달리 이렇게 근신 처분을 받아도, 혹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겨도 찾아오는 이 한 명 없었다. 지금 때면 한참 환자를 돌볼 시간이었는데……. 그는 새삼 의원의 약초 냄새가 그리웠다.
첫날은 그럭저럭 방에서 잠이나 자며 보냈지만 둘째 날이 되고 셋째 날이 되자 연은 무료해 죽을 지경이 되었다. 정말로, 예전의 자신은 뭘 하면서 보냈단 말인가?
하릴없이 이불에 놓인 자수의 수나 세던 연은, 문득 문을 열어 보았다.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 인기척을 감지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밖에는 주강이 있을 터였다. 바깥문까지 열고 나가자 바람이 훅 불어닥치는데 마치 주먹에라도 맞은 듯 뺨이 다 얼얼했다.
‘모란일 때는 이런 추위는 별거 아니었는데.’
무공의 성취가 높지는 않아도 몸이라도 건강하다면 좋았을 것을…….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주강에게 다가갔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연을 바라보았다.
“주강.”
“예, 도련님.”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연은 잠시 눈을 굴렸다. 남궁연일 때 주강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게 손에 꼽았다. 사실 모란이 되고 나서야 주강의 이름이 주강이라는 걸 알 정도였으니까.
“백모란은…… 좀 어떻지?”
드물게도 주강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게 죽어라 두들겨 패 놓고는 안부를 묻는다니 어처구니없기도 하겠지. 그래도 연은 답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주강이 입을 열었다. 겨울바람만큼이나 찬 목소리였다.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 어떤지 잘 알지 못합니다.”
쌀쌀맞군……. 아무튼 죽지는 않았다는 건 알겠다. 물론 연이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직 깨어나질 못했나? ……아니 그런데, 자신 정도면 주강에게 있어 꽤 친한 편이 아니었던가? 다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날이 추워서 다시 방으로 돌아온 연은 지필묵(紙筆墨)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놀고만 지내다가 알고 있던 지식을 모두 잊을까 염려가 되었다. 사부에게서 배운 것을 다시 쓰며 정리하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 이 남궁세가를 나가자.’
가족들이며 친척들이 있어도 그는 더는 이 집안에 있기 싫었다. 연오를 제외한다면 다른 이들은 사실 혈육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떻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부모에 대해 생각하던 연이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먼 곳으로 떠나 새로 인연을 만들고 싶었다.
‘의원을 하나 차리자. 사부님이 했던 것처럼 꾸려 나가면서, 인연이 닿는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을 하여 자식도 가져야지. 정말 가족을 만들어야지.’
어차피 자신이 나가도 붙잡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근신 중이니 지금 당장은 안 될 터다. 연오는 사람은 좋아도 융통성은 없어 한번 정한 바는 결코 바꾸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이대로 집을 나간다면 추격대를 보내 잡아들이고도 남았다.
일단 나가자고 계획하니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뒤 울적했던 심기가 많이 좋아졌다. 연이 자신의 방을 뒤졌다. 가지고 있는 패물들을 박박 긁어모아 보니 앞으로 그럭저럭 살아갈 만한 재산이 되었다. 무언가 돈 될 만한 게 더 없나 자개장을 뒤지던 연의 손이 멈칫했다.
“이건…….”
연의 시선이 진주가 알알이 박힌 고급스러운 비녀와 낡아서 색이 바랜 서신에 향했다.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이 또한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입술을 깨문 채 한참을 응시하다 비녀와 서신에는 손도 대지 않고 탁 서랍장을 닫았다. 속이 갑갑하여 잠시 한숨을 쉬고 있는데 밖에서 도련님, 하고 시비가 불러 왔다.
“소가주께서 부르십니다.”
“형님께서 어쩐 일로?”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래, 알겠다.”
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근신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쨌든 의복을 단정히 하고 방을 나서자 주강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연오가 지내는 곳은 세가에서도 안쪽 조용한 곳에 위치한 화월당(華月堂)이었다. 도착하니 화월당의 정원에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정원을 지났다. 문 앞에 서자 시비가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형님, 부르셨습니까.”
“음, 그래.”
연이 오자 연오가 보고 있던 서적을 덮었다. 이 자리에는 연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가의 열두 장로인 남궁자영과 남궁인이 미리 자리하고 있었다. 장로님, 하고 인사하자 둘도 가볍게 받아 주었다. 연은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연오가 손짓을 하자 시비가 금세 음식을 날라 왔다.
“다들 앉으십시오. 너도 앉거라. 주강에게 들으니 식사를 자주 거른다고 하던데.”
“그리 자주 거르는 것은 아닙니다.”
연이 자리에 앉으며 변호하자 연오가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저보다 다섯 살 어린 아우가 항상 신경 쓰였다. 원체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가 계절이 변할 때마다 크게 앓아눕기에 염려되어 의원에게 여러 번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별다른 원인은 없다는 불만족스러운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하루에 겨우 두 끼 혹은 한 끼를 먹는다는데 그게 어떻게 자주 거르는 것이 아니냐. 지난번에 보니 안색이 좋지 않아서 내도록 마음에 걸리더구나.”
연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원래대로 돌아온 뒤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건강이 퍽 좋지 않긴 했다. 하지만 건강이야 원래도 그러지 않았나? 그래도 이 집안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건 연오뿐이니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제대로 식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딱히 만족하지 않은 얼굴로, 연오는 잠시 빈자리 하나에 시선을 주었다. 그의 바로 옆자리였다. 눈치 빠른 시비가 주인이 원하는 답을 바로 내놓았다.
“한위 도련님은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기는 하였으나 연오는 다른 동생의 부재에 가타부타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연은 잠시 자신의 동생인 남궁한위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남궁한위는 연오가 이처럼 가족끼리의 식사 자리를 만들어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연오와는 달리 큰 연회가 있을 때나 한두 번 얼굴을 본 정도라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다. 하기야 언제는 친한 사람이 있었냐마는.
세가의 소가주와 함께하니만큼 식사는 고급스럽고 맛이 좋았다. 연오와 장로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연은 말없이 얌전히 식사만 했다. 전에는 이렇게나 말이 없는 편이 아니었기에 연오가 이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마침내 그가 연아, 하고 불렀다.
“몸이 안 좋은데 내가 억지로 불러낸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아닙니다.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사실이기도 했다. 이 집을 나간 후에 대해 상상해 보니, 그래도 연오만큼은 그립고 아쉽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연오가 주의 깊게 연의 얼굴을 살피다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생각만 많으니 몸이 그 모양인 게 아니겠느냐.”
익숙한 목소리에 연은 등골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연오와 장로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주를 향해 포권지례(抱拳之禮)를 올렸다. 이 자리에서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남궁영명에 동요한 사람은 연뿐인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증오했다.
연오가 한위가 앉을 예정이었던 빈자리로 물러나자 남궁영명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왔다. 연은 이상하게 남궁영명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래도록 머무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식사하는데 내가 방해를 했구나. 앉거라.”
고개를 든 연은 그 느낌이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저 묵묵히 기다리고 있자 뚫어져라 바라보던 남궁영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하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연오가 대답했다.
“근신 처분을 내렸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지, 아니야.”
영명의 손이 시비가 새로 내온 식기를 들어 올렸다. 무인 특유의 단단하고 굳은살이 많은 손이었다. 그가 소면을 잠시 뒤적이다가 도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랫것이 말을 듣지 않으면 상벌을 분명히 할 필요도 있는 법이다. 어쩐 일로 연이가 연오보다 잘할 때도 있구나.”
연이 조용히 목울대를 울렸다. 그는 정말 이자가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웠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기분 좋은 사람인 영명이 음식 대신 술잔을 기울여 마시고는 연오에게 손짓을 했다. 연오가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연이의 근신은 이만하면 됐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연오의 대답을 끝으로 한동안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간간이 연오와 장로 사이에 말이 오가던 것과는 다르게 완전한 침묵 속에서 식사가 이루어졌다. 영명은 세가의 일에 대해 연오와 몇 가지 말을 나누었다. 대체로 영명이 일방적으로 무엇을 어찌하라 지시하는 것이었다.
연은 점차 불편해지는 속을 억누르느라 곤욕이었다.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식사가 끝날 무렵 영명이 연에게 칭찬이랍시고 말했다.
“네게도 내 피가 흐르기는 하는구나.”
칭찬이라니, 칭찬일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모욕이었다. 연이 이를 꽉 악물었다. 다행이라면 식사가 끝나기 전 영명이 먼저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연오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어쩐지 연에게 미안해하는 것도 같았다.
사실 연은 어떻게 남궁영명의 아래에서 연오 같은 아들이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오의 모친인 황보세희를 닮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럼 자신은, 제 어머니를 닮아서 이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연이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주강은 잠시 남거라.”
연과 함께 막 나가려던 주강이 연오의 부름에 발걸음을 돌렸다. 화월당을 나가기 전 연은 잠시 말끄러미 주강을 바라보았다. 그는 연오에게 다가가 작게 무언가 보고하는 중이었다. 주강은 연오가 붙여 준 호위무사다. 단순히 호위뿐만이 아니라 연오에게 꼬박꼬박 연의 동향을 알려 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물론 감시라기보다는 연의 몸 상태를 살피는 것에 가까웠으나, 어쨌든 연의 사람이 아닌 건 분명했다.
얼마 전까지는 연도 자신의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처음부터 제 몫은 아니었다. 십 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그런 인연들이었지.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궁연으로 돌아오면 아무 의미도 없을 관계인데도 정이 그리워서…….
남궁영명 때문에 얹혔는지 오늘따라 속이 유달리 메슥거렸다. 소화도 시킬 겸 좀 먼 길을 돌아가는 걸 선택했다. 날이 매우 추워 온몸이 아렸다. 입김을 뱉으며 자박자박 걸음을 옮길 때였다.
“……?”
갑자기 제 앞의 그림자가 길어져 연이 멈칫했다. 이 그림자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은 늦었다. 돌연 뒤에서 우악스러운 손이 뻗어 와 입을 틀어막았다.
연이 반사적으로 팔꿈치를 휘둘렀으나 가볍게 막히고 말았다. 다음으로는 이상한 느낌이 번지더니 온몸이 굳었다. 딱히 점혈을 당한 것도 아닌데 놀라울 정도로 몸이 둔해졌다.
정체불명의 누군가는 축 늘어진 연을 가볍게 옆구리에 끼고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연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 아래에서 땅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보법도 아니고, 경공도 아니야. 어떻게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가 있지?’
얼마 안 가 그들은 으슥한 곳에 다다랐다. 연은 갑자기 자신을 이리 납치하듯 데려가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 아니, 아니다. 시비나 하인들에게 좋은 주인은 아니었지만 원한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남궁세가 안에서 감히 이런 짓을? 게다가 시비나 하인들은 무공을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면 돈을 노린 납치일까? 연오는 납치하기에는 무공이 고강하여 버거우니 차라리 연을 납치하자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천하의 남궁세가가 돈 때문에 직계 자식을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오명이 퍼지게 둘 수는 없으니, 영명은 마지못해 돈을 주긴 줄 것이었다…….
그러나 차가운 바닥에 내팽개쳐졌을 때 연은 그 모든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자는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백모란!
연이 숨을 헐떡거렸다. 어떻게 백모란이 여기에?
그는 도무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추운 겨울에 맨가슴이 드러나도록, 망나니처럼 겉옷만 대충 걸친 백모란이 삐딱하게 서서 무표정하게 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러진 오른쪽 팔과 다리 한 짝에 부목을 대고 있었고 얼굴에는 맞아서 터지고 멍이 든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어디로 보나 백모란이었다.
그래, 백모란이 깨어날 거라고 생각은 했다. 어떤 식으로 깨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여러 상상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 상상들 중 백모란이 세가에 찾아와 납치하듯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간다는 건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어떻게 자신을, 세가의 막강한 무공을 지닌 사람들에게 전혀 들키지 않고…… 도통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그가 아는 백모란의 몸은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고작 내공심법 하나 배워 매일 운기조식을 하던 수준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어느새 마비는 풀려 있었다. 다음 순간 연은 비명을 질렀다. 백모란이 자신에게 발길질을 하기에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자 극심한 고통이 터졌다. 부러졌거나, 못해도 최소한 금이 갔을 것이 분명했다. 연이 식은땀을 흘리며 꼼짝도 못하고 웅크리자 백모란이 걷어차듯이 그의 가슴을 발로 밟아 눕혔다. 빠득 이를 악물 정도로 고통스러운 중에서도 연은 도무지 백모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백모란인 것은 분명했다. 오래도록 봐 온 얼굴은 익숙한데도 완전히 낯선 사람 같았다. 자신이 들어가 있을 때의 얼굴과 저자의 얼굴이 완전히 달랐다……. 같은 얼굴인데 분명……. 머리카락이며 옷이며 풀어 헤친 망나니 같은 옷차림도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데 크게 일조하는 중이었다.
“네가 그 남궁연이냐?”
조롱하는 어투로 묻고는 백모란이 가슴을 짓밟은 발에 더 힘을 주었다. 호흡이 답답해진 연은 쿨럭 기침을 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모란은…….
아니, 남자는 더없이 야성적으로 보였다. 한편으로는 폭력에 거리낌이 없었다. 동시에 무감정하기도 했다. 연은 몸이 떨리는 게 추위나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정신이 멍했다. 자신이 이 남자를 두려워하고 있나? 그런가? 분명 팔이 부러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십 년간 연은 폭행에는 이골이 나 있었으니…….
“듣자 하니 내 몸을 이렇게 만들어 둔 게 너라면서?”
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막 정답을 얻어 낸 느낌이었다. 이자는 정말 백모란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안도감마저 들었다. 이제는 절대 저 몸으로 들어가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 그런 확신도 들었다.
이자가 백모란이구나.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몸의 원래 주인. 연은 저도 모르게 물어보고 말았다.
“백모란……?”
그리고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는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이내 씩 웃었다.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 전에…… 변명 정도는 들어 주도록 할까.”
발끝이 부러진 팔을 툭툭 건드렸다. 다시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연은 그저 입만 다물고 버텼다. 없어? 다시 물어보면서 백모란이 뺨을 긁적였다. 연은 저 사내가 몹시도 낯설었다. 그제야 자신이 진짜 백모란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게 가까스로 떠올랐다. 근 십 년간 연이 알게 된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뭐어, 변명할 게 없단 말인가.”
“…….”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당하고는 못 살아서 말이야. 이 팔과 다리 부러진 거 네가 한 거지?”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팔은 부러졌으니 다리만 남았군. 우리 공평하게 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훅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연은 등골이 오싹해 어깨를 움츠렸다. 무얼까?
인간인가, 이 사내는?
분명 어딜 보나 인간인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언제 웃었냐는 듯 백모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연은 한 번도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연이나 똑같이 보는 눈이었다. 무서워 떨면서도 연은 저항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이어질 폭력을 기다렸다. 백모란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간 고통을 받은 건 자신이라고는 해도 그는 백모란의 몸을 해치고 상하게 만들었다. 십 년 동안이나 자신은 셀 수 없이 백모란을 두들겨 패고 괴롭혔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게 굴 때도 있었다. 지금에서는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백모란은 자신에게 똑같이 되갚아 줄 권리가 있었다. 그런 게 바로 중원에서 은원(恩怨)을 갚는 방식이었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백모란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백모란?”
자신의 이름을 되묻는 것처럼 중얼거리더니 백모란이 발을 치웠다. 허리를 숙인 그가 연의 멱살을 잡아 반쯤 일으켰다. 그가 뭘 하려는 건지 몰라 조금 바르작거리는 연의 턱을 억세게 잡았다. 그러고는 연을 ‘들여다보았다’.
연이 헉, 숨을 쉬었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서 본 백모란의 눈동자는 검다기보다는 밝은 갈색에 가까워 보였다. 그저 평범한 사람의 눈인데 그 안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동공에 금색의 공이, 아니 고리가 있었다. 그 고리가 느리게 흘러갔다…….
마치 강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리고 강은 흘러가 바다가 되고……. 이윽고 모란의 동공 안에서 거대한 것이 크게 일렁였다.
보고 있으려니 연의 정신이 멍해졌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이 상대에게 보여지는 것 같았다. 마음속? 아니, 마음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이, 연의 근원이.
“어쩐지 익숙한데. 예전에 본 적이 있어.”
익숙할 만도 하지. 멍한 와중에도 연이 생각했다. 네가 정말 백모란이라면, 모란이라면 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아. 왜냐면 우리 어릴 적에…….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연이 퍼득 몸을 떨었다. 언제 정신이 흐릿했냐는 듯 도로 맑아졌다. 그가 숨을 헐떡였다. 마치 심해에 빠졌다 나온 것만 같았다. 방금 그게 대체 뭐였지?
“나한테…… 무슨 짓을 했어?”
연이 파르르 떨며 물었으나 백모란은 그대로 무시했다.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이제 떠올랐다. 너 그 꼬맹이구나.”
그렇게 말하더니 백모란이 눈썹을 찡그리며 연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까처럼 기이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그냥 사람의 눈이었다. 너무 자라서 못 알아봤네. 중얼거리더니 백모란이 뒷덜미를 긁었다. 이제 그는 적대감은 어디로 갔는지 다소 난처해하는 얼굴이었다. 연은 뚫어져라 그를 노려보다가 깨달았다.
백모란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 백모란의 몸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서.
“어디…….”
입을 여는데 나오는 목소리가 떨려 연은 좀 자존심이 상했다.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에 있다가 왔어?”
그렇게 묻자 백모란은 물끄러미 연을 바라보다가 멱살을 잡은 걸 놓아 주었다.
그러더니 언제 폭력을 휘둘렀냐는 얼굴로 어린애 일으키듯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주기까지 했다. 연이 정색하며 밀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갑자기 연의 기분이 급속도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이로 따지면 그는 백모란보다 두 살은 더 많았다. 스무 살과 열여덟 살이 아닌가. 그런데 도무지 백모란은 그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중얼거리더니 백모란이 돌연 덥석 연의 몸을 슥 쓰다듬듯이 만져 보았다.
손이 불쑥 소맷자락 안으로 기어 들어와 손목을 쥐자 기겁한 연이 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십 년이면 이보다는 더 말라야 하는데.”
“……?”
“지나치게 건강하네. 아니면 다른 루트로 돌았나?”
“뭐?”
루트라는 게 대체 뭔지 모르겠다. 난생처음 듣는 단어다. 아니, 루트인지 루드인지 따위는 알 바 아니었으나 지나치게 건강하다는 말이 연의 귀에는 매우 거슬렸다. 지나치게 건강해? 그는 열 살 이후로는 한 번도 건강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연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더듬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 검이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니, 물론 지금 네 몰골이 건강하다는 말은 아니고…….”
물론 이 말 역시 마음에 안 들었다. 백모란이 지껄이는 말 하나하나가 죄다 거슬렸다. 한껏 예민해진 연이 그를 쏘아보았다. 궁금한 게 있으니 일단은 참았다. 백모란을 향한 이유 없는 혐오나 증오는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아닌 모양인지…….
“십 년 전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는 알지?”
“알지.”
그러고는 백모란이 턱을 긁적였다.
“그런데 굳이 설명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는데.”
정말로 귀찮다는 어투였다. 하지만 딱히 약을 올리려는 건 아닌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가 다시 연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그렇게 하면 무언가 보이기라도 하듯이. 그가 피곤했는지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확신이 없는데……. 지금은 말고, 다음에 만나면 설명해 주도록 하지.”
“그게 무슨…….”
돌연 백모란이 다가오기에 연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
“내가 아직 이 몸에 적응을 못 해서 지금은 제대로 못 보거든.”
연은 그 제대로 본다는 게 아까 이상한 눈을 하던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아, 뭐. 팔 부러트린 건 미안하게 되었어. 실은 기분이 좀 안 좋아서…… 여차하면 죽일까도 생각했거든. 나도 나름 봐준 것이니 너도 그걸로 나름 봐주렴.”
아무렇지 않게 사과하고는 백모란이 웃었다. 연은 조금 질렸다. 무슨 이런 놈이 다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