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가로지나 세로지나 꽃은 핀다 5화
一章 : 연과 모란, 모란과 연 (5)


연은 백모란의 몸에서 지내게 된 이후로는 내내 원래 몸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왔다.
소심한 성격일까? 아니면 그의 사부 같은 사람일까? 다혈질일지도 몰라. 연은 심지어는 몸의 주인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까지 했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사람들은 절대 믿을 리 없는 각별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연이 코웃음을 쳤다. 친구? 저런 막 나가는 자와, 친구? 전에 정신 나간 것처럼 백모란을 두들겨 패거나 이유 없는 적개심에 휘둘려 괴롭히고 나서도 연은 저렇게 태연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색은 안 해도 방에 돌아와서는 제게 인격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심란해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모란은 마치……. 사람의 팔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죽이는 것을, 벌레를 해하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 이해할 수 없던 두려움을 맛보았던 연은 꾹 입을 다물었다.
십 년 전 그 순간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건지 이유가 몹시 궁금했으나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었다. 연이 마른 입술을 핥아 축였다.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을 테지?”
“그래.”
연은 잠시 땅바닥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리를 부러트린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태세를 보니 그럴 것 같지는 않았고, 연도 고통을 자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됐어.”
그렇다면 더는 상관이 없었다. 이제는 전처럼 백모란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쁘고 세상에서 아예 사라져 버렸으면 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백모란에게 굳이 관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연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남자와는 관여되어서 좋을 게 없다. 인생이 아주 피곤해질 것이다. 친구? 짧게 나눈 대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남자와는 절대 친구 같은 건 될 수가 없다. 그는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성향의 사람이었다.
연은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지금 보니 그가 있는 곳은 남궁세가 외곽의 인적 드문 대나무 숲이었다. 남궁영명과 함께 식사를 한 것도 그렇고 부쩍 피곤하였기에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아까 내던져지면서 발목을 접질렸는지 연이 발을 조금 절었다. 팔 역시 아프다 못해 식은땀이 줄줄 날 정도였다. 화정당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기에 걸어갈 생각을 하니 다소 막막했다. 뜻밖에도 모란이 말을 걸어왔다.
“데려다줄까?”
내심 움찔하기는 했어도 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속이 메슥거리네. 며칠 동안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서 지내야겠다.
“데려다준다니까?”
됐으니까 알아서 갈 길 가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뒤를 돌아보니 백모란이 그 자리에 없었다. 억세게 잡아챘던 처음과는 다르게 다소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를 틀어쥐더니 몸이 붕 허공으로 떴다.
“……!”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모란은 힘도 들이지 않고 아이 들 듯이 달랑 연을 들어 올려 옆구리에 꼈다. 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까야 정신이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은 말이 다르지 않나!
“이거 놔!”
심지어 모란과 연은 키가 비슷하여 발이 땅에 질질 끌렸다.
“거 가만히 좀 있어. 가다가 쓰러지지나 말고. 내가 이리 호의를 베풀어 주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인데.”
쓰러지다 못해 다 죽어 가는 경우라도 이런 호의는 필요 없었다. 연은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허리를 죄고 있는 팔 힘이 너무 억세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검술로는 남궁가에서 무시당하는 신세라고는 해도 연도 엄연한 무인이었다. 제 몸이 약해진 건지 아니면 백모란의 힘이 세진 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백모란이 힘이 이렇게 셀 리가 없다는 건 연이 제일 잘 알았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그가 자꾸 버둥거리고 팔꿈치를 휘두르자 옆구리를 쥐어박힌 모란의 눈가에 씰룩 성질이 솟았다.
“얌전히 있어야…… 착한 아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빛은 어땠냐면, 골치 아프게 이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딱 그런 눈빛이었다. 게다가 모란의 인내심은 짧기까지 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연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손의 그림자가 눈가를 덮자마자 의식이 흐려지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연은 자신의 방에 고이 눕혀진 상태였다. 벌떡 일어나다가 신음하면서 아픈 팔을 감싸 쥐었다. 누가 조치했는지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부러진 팔만 아니었다면 연은 백모란을 만난 게 꿈을 꾼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연은 자신의 몸부터 살펴보았다. 점혈을 당하거나 하면 사람의 몸에는 항상 흔적이 남는다. 그러나 몸 어디에도 점혈을 당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심지어 연을 기절시킬 때 모란은 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기술이었다.
굳이 손도 안 대고 사람을 기절시키거나 점혈할 수 있는 방법은 탄지신통(彈指神通)* 정도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모란이 탄지신통과 같은 고수의 수법을 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연의 미간에 골이 잡혔다.
일단은 그가 자신의 팔을 살폈다. 단순 골절로, 굳이 뼈를 맞출 필요까지는 없었다. 복합 골절이면 골치 아플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부목을 대 놓은 솜씨는 의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연이 혀를 찼다. 가능한 한 들키지 않고 돌아와서 알아서 치료하려고 했는데 성가시게 됐다. 다시 감으려고 습관대로 붕대를 푸는데 밖이 수런거렸다. 세가의 의원이 당도한 모양이었다.
의원을 맞이하려고 몸을 돌린 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는 붕대가 다 풀려 있는 팔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연은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켜 냈다. 의원이 인사를 했다.
“진은록입니다.”
연은 아까 백모란을 만났을 때만큼이나 놀랐다. 진은록이 여기 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환자들은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 치료하는 진은록이지만 그 치료에는 딱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사경을 헤매는 수준이 아니라면 환자는 반드시 의원에 직접 찾아와야 할 것.
그도 그럴 것이 진은록의 의원은 매일 문전성시였다. 매일 아침 문을 열기도 전부터 환자들이 문 앞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그러면 은록이 치료 준비를 하는 동안 연은 밖에 나가 기다리는 환자들을 위중한 순부터 제일 먼저 온 순으로 골라낸 뒤 다른 사람들은 돌려보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수가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진은록은 의원 밖으로는 걸음하지 않았다. 집으로 직접 찾아가는 시간에 환자를 열은 더 진찰하고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런 진은록이 직접 찾아왔다? 그것도 고작 팔이 부러진 정도로? 청하지도 않았는데…….
아니, 청하지는 않았겠지만 주강이 알리기는 했겠지. 주강과 은록은 제법 친분이 있었으니까. 그 모든 걸 고려해 보면 공식적인 요청이 없는데도 은록이 굳이 의원을 잠시 닫고 찾아올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연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분명 백모란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제자가 다른 사람처럼 변했으니 이리 찾아오신 게 아닌가. 모란에게 유일하게 수작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니.
백모란을 떠올리고는 연이 반사적으로 이를 갈았다. 예전과는 달리 이유 있는 짜증이었다. 분명 내 발로 걸어가겠다고 했는데도 기절까지 시켜 가면서 사람을 짐짝처럼 날라? 완전히 제멋대로인 인간이었다. 연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팔이 부러졌군요.”
연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은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제가 사부님의 제자라며 말하고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일 크게 키우지 말고 입 꾹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마음이 상충했다.몇 번이나 다짐하지 않았나. 남궁연으로 돌아가면, 전의 인연에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은록은 그저 환자를 치료하러 나왔다는 태도로 치료 도구를 펼쳤다. 연이 잠시 그리운 눈으로 침구며 뜸, 금창약과 각종 연고를 바라보았다. 어서 세가를 나가야 다시 의술을 펼칠 수 있을 텐데…….
은록은 부러진 팔을 상세히 살폈다. 그도 연처럼 단순 골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가 팔꿈치 위 혈도에 침을 꽂자 놀랍도록 고통이 싹 가셨다. 여전히 깔끔한 솜씨에 연이 내심 감탄했다. 은록은 뼈와 근육이 상한 정도를 살피고는 연고를 발랐다. 마지막으로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으면서 그가 물었다.
“어떻게 했습니까?”
예상했던 질문에 연은 시치미를 뗐다.
“무얼 말입니까?”
“백모란 말입니다.”
“제가 백모란을 두들겨 팬 일 말입니까?”
일부러 거슬리게 말했는데도 은록은 화도 내지 않고 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지지 않고 바라보자 은록이 붕대 끝에 마무리 매듭을 지면서 다른 걸 물었다.
“팔은 왜 부러졌습니까?”
팔이 왜 부러졌냐면…… 원래대로 돌아온 백모란이 찾아와서는 똑같이 갚아 주겠다고 발로 걷어찼기 때문이지……. 물론 사실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평소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겠지. 연은 대충 둘러댔다.
“갑자기 주위가 어지럽더니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깨어나니 팔이 부러져 있더군요.”
거기에 그럴듯한 이유도 떠올라서 연이 덧붙였다.
“원한 살 짓을 많이 했으니까요. 정신을 잃은 사이 팔이 부러져도 이상할 건 없지 않습니까?”
평소 자신의 평판을 생각해 보면 제법 그럴싸한 데다가 설득력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진은록의 표정이 영 묘했다. 평소 연의 사부는 남궁연이란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치로 보았을 때 매우 싫어하는 게 분명했는데 왜 저런 얼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은록이 눈썹을 찌푸렸다.
“정신을 잃었을 때 증상이 정확히 어떠했습니까?”
아, 이상하게 여긴 게 아니라 쓰러진 이유를 알고 싶으셨던 거군. 연이 납득했다. 언제나 진은록에게 일 순위는 환자, 또 환자였다. 비록 그 환자가 자신의 제자를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두들겨 팬 놈일지라도…….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연은 은록에게 진짜 몸으로는 진찰받아 본 적이 없었다. 세가의 의원이나 자신이나 제대로 된 원인은 찾지 못했으나 사부라면 다르지 않을까 연이 은근히 기대했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많이 어지러웠습니다. 가슴도 시리고 답답했고요.”
“쓰러진 건 이번이 처음입니까?”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딱히 세지는 않았지만 두세 달에 한 번씩, 상태가 안 좋을 때는 꼭 그랬었다. 특히 겨울이나 아니면 더운 여름에. 무공의 성취가 높으면 추위나 더위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데 연에게는 그런 성취는 영영 올 것 같지 않았다.
“맥을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잠깐. 맥은……. 그러나 미처 거부하기도 전에 은록이 팔꿈치의 침을 빼내며 연의 팔목을 잡았다. 진맥을 하던 은록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속으로 쯧 혀를 차던 연이 눈을 깜박였다. 어지간하면 저런 표정은 보기가 힘든데…….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연이 잡히지 않은 손을 꾹 쥐었다. 내 몸이 많이 안 좋나? 아니면 사부님도 원인을 모르시는 건가? 그는 한참을 맥을 짚어 본 뒤에야 손을 떼어 냈다.
“제 제자와 같은 내공심법을 배웠군요.”
이럴 줄 알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당신은 세가 의원이 아니니 진찰받지 않겠다고 뿌리쳐야 했는데, 정과 미련이 무어라고. 어찌 대답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연이 일단 부정하고 보았다.
“어떻게 백모란이 남궁가의 직계에게만 허용되는 내공심법을 배운단 말입니까? 큰일 날 소리를 하시는군요.”
“…….”
“세가의 무사들에게서 변변찮은 것이나 배웠겠지요.”
겉으로는 정색하면서도 연이 내심 다행이라고 여겼다. 지금만큼은 은록이 진맥하고 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심경의 동요를 들켰을 테니까. 연의 부정에도 은록은 별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연은 오히려 그게 불안했다.
“근래 한기를 많이 느낍니까?”
“추위를 좀…… 타기는 합니다.”
다시 진찰로 돌아온 은록은 연의 손을 잡아 보았다. 손발이 차군, 그가 중얼거렸다. 열 살 때 크게 앓은 후로 연의 몸은 내도록 이랬다.
더위나 추위를 많이 탔다. 체온이 쉽게 올랐다가 쉽게 떨어지곤 했고, 겨울이면 손발이 찬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은록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히는 걸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부도 정확한 원인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일단 몸을 보신하는 탕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일단? 일단이라니?
은록은 펼쳐 두었던 침구와 각종 도구들을 둘둘 말아 정리했다. 그리고 전혀 사적인 이유 없이 찾아온 의원처럼 단조로운 목소리로 처방을 내렸다.
“아침 식사를 한 후,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기 전 탕약을 복용하도록 하십시오. 발목은 며칠 동안 무리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곧 나을 겁니다.”
은록은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은 부상까지 알아차렸다. 그만큼 그의 의술은 뛰어났다.
“하루 이틀 치료로 개선될 만한 몸 상태가 아닙니다. 시간이 나시거든 제 의원에 들러 진찰을 받도록 하십시오. 만약 탕약을 먹고도 또 쓰러지는 일이 생긴다면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는 의미니, 짧게 살다 가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들러야 합니다.”
짧게 살다 가고 싶지 않다면이라……. 독설에 가까운 진찰 결과였다.
전부터도 자신이 오래 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사부에게 직접 확인받는 건 또 기분이 묘했다. 연이 아무 말도 없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은록이 다시 못을 박았다.
“허투루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탕약이 떨어지면 다시 의원에 들러 받아 가십시오. 진찰은 받지 않겠다면 사람을 보내 탕약만 받아 가도 될 것입니다.”
“……탕약이 떨어지면 들르겠습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은 덜컥 대답을 해 버리고 말았다. 은록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 나가기 전 다시 물었다.
“태어나서부터 그랬습니까?”
“아니오, 어렸을 때 크게 앓고 난 후부터 이렇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은록이 조용히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 연의 마음은 복잡했다. 제자를 그 지경으로 만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치료해 주는 마음가짐이 대단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에게 제자가 그리 큰 의미는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물론 전자의 경우가 맞겠지만.
은록이 떠나고 난 뒤 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도 의원이기는 하였으나 의학에 있어서는 아직 사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가 제 몸 상태를 살폈다.
‘이상한데…….’
전에도 이랬던가? 원래도 좋지 않던 몸이지만, 연은 백모란의 몸에 들어갔다 돌아온 후부터는 더욱 악화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어딘가가 문제라서 기의 흐름이 불규칙하고 날뛰는 듯하는데 몇 번이고 살펴보아도 혈도나 기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연이 이런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그도 나름대로 장래가 유망하였다. 벌모세수(伐毛洗髓)*도 했고 연오보다는 못하지만 나름 영약도 먹으며 꾸준히 몸을 가꿨다. 그 모든 유망함과 재능이 열 살 이후로 한순간에 바뀌어 버렸다. 약하고 느린 맥을 짚어 보다가 연이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는 건강하다가도 갑자기 병을 얻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자신도 그 안에 속한다고 하여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이제는 욕심이 생겼다. 백모란이 되기 전에는 그저 건강하지 못한 제 몸과 세상이 원망스러웠을 뿐,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세가를 나가고 싶었고, 가족이나 지인을 만들고 싶었다. 더 많은 환자들을 완치하고 싶기도 했다.
‘딱히 사부님을 뵙고 싶어서만 찾아가려는 건 아니야. 제대로 의원 일을 하고 싶어.’
찬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문을 제대로 닫으며 연이 벽에 기댔다. 오늘 여러 가지 일이 있어 피곤했다. 특히나, 백모란 그자…….
그런 무례한 자와 다시는 관여되고 싶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원래 그자의 몸이라고 해도, 나름 그 몸으로 꾸렸던 인생이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복잡했다.
연은 그렇게 한참을 앉아 생각에 잠겼다.



二章 : 형제 (1)


‘미약하지만 확실히 몸이 나아졌다.’
쓴 탕약을 삼키면서 연이 진단을 내렸다. 몸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손이 전보다 덜 시린 정도의 호전이었다. 그가 입 안에서 탕약을 굴려 맛과 향을 분석하려고 애를 썼다.
“칡, 황기……. 석창포(石菖蒲), 그리고 백두구(白豆寇)를 넣으셨군.”
백두구라니, 소화가 잘되지 않는 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하긴 몸이 찬 사람은 대체로 소화가 잘 안 되는 편이니 바른 추측이긴 하지.
탕약을 여러 번에 나누어 마셔 보았으나 연은 두 가지의 약초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사부에게 바로 가르침을 청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음속에 아쉬움이 남았다.
연이 탕약을 비우자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도로 내갔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아직도 백모란의 몸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면경을 확인했다. 여전히 자신의 몸이었다. 다시 백모란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물론 굳이 면경으로 확인할 것까지도 없었다. 백모란과 자신의 몸 상태는 천지 차이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 모란과 다시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의원에 가면 마주칠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마주친다고 해서 딱히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데면데면 지나가겠지. 그래야 할 테고, 그러기를 바랐다.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신이 풀리긴 했으나 그는 딱히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아직도 날이 쌀쌀하다 못해 매서웠다. 화정당 안이나 천천히 거닐며 산책이나 하고 올 생각이다.
문을 열고 나간 연이 자신의 정원을 새삼스럽게 다시 둘러보았다. 계절마다 심는 식물이 달라서 나무들은 겨울에도 잎이 파랬다. 주강은 자리에 없었다. 그는 종종 세가의 일로 자리를 비울 때가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연은 화정당에서 일하는 시비와 하인 몇과 마주쳤다. 모두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같이 식사를 했거나, 이야기를 나누었거나 혹은 연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거나……. 그러나 지금 그들은 예민한 성정의 도련님 심기라도 거스를까 말없이 정중하게 고개만 숙여 보였다.
연은 딱히 정원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중에 그나마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다면 커다란 연못이었다. 제법 거대한 연못과 그 중앙에 위치한 정자는 척 보기에도 운치가 좋았다.
한참 정자를 바라보던 연의 시선이 어느 곳에 가서 멎었다. 정자로 건너가는 다리 입구 근처에 작고 노란 꽃이 산들산들 피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봄이 올 시기이긴 하지.
빤히 꽃을 바라보던 연은 다가가…… 발로 짓밟았다. 다시는 꽃을 피우지 못하게 꽉꽉 짓이기고 나서야 그는 만족했다.
사실 백모란의 몸으로 사는 게 다 좋지만은 않았다. 딱 한 가지, 그의 이름만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란의 어미는 백모란을 품을 적에 아이가 딸인 줄로만 알아서 이름을 그리 지었다. 하지만 태어난 건 사내아이였고, 다시 짓기 귀찮았는지 아니면 모란꽃을 유독 좋아했던 건지 백모란의 이름은 그대로 백모란이 되었다.
하필 사람 이름을 꽃 이름으로 지을 것은 뭐란 말인가.
연은 세상에서 꽃이 제일 싫었다. 그는 봄보다는 겨울이 훨씬 좋았다. 꽃이 들어간 것 중에 좋아하는 것은 딱 하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었다. 그가 퍽 마음에 들어 하는 어구다. 어떤 꽃이든 반드시 지기 마련이니.
할 일도 없겠다, 그는 정자 근처를 돌며 다른 꽃들도 지르밟아 없앴다. 핀 꽃도 얼마 없었기에 곧 할 일이 사라진 연은 오도카니 연못 근처, 적당히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좀 쓸쓸했다. 왜 전에는 혼자 있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까? 아마…… 혼자 있는 방법만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거겠지.
시장처럼 사람이 바글바글한 건 좋아하지 않지만 완전히 홀로 지내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식사 때가 지나도 챙기는 사람 한 명이 없었다. 자신이 찬 바람 맞으며 하루 종일 여기에 앉아 있어도 그 누구 하나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다시 바스락하고 풀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누구냐!”
연오나 주강 정도나 되면 바로 기척을 알았겠지만 연은 그런 정도는 되지 못했다. 얼굴을 굳힌 그가 천천히 다가갔다. 근처의 풀숲을 발로 걷어찼으나 딱히 걸리는 것은 없었다. 검집으로 헤집어 봐도 그저 풀잎과 줄기뿐이었다. 이제 슬슬 몸이 차갑게 식기도 하여 연은 찜찜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세가 내이니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과연 동물이었을까?
산책을 마치고 오니 주강도 돌아와 있었다. 연은 주강에게 방금 전의 일을 말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닐 것이다. 또 말해 봤자 무엇 하겠는가? 주강의 반응은 시원찮을 것이었다. 그가 충성하고 있는 사람이 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은 주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백모란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나이도, 가족도, 출신 고향도 알지 못한다. 듣기로는 연이 태어나기도 전, 남궁세가 주최의 무술 대회에서 제일(第一)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최연소의 나이라 당시 화제였다고들 했지…….
확실히 주강의 무공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의 호위도 완벽했다. 그가, 이따금 연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러나 무예가 고강한 고수들이 이따금 허약한 자신을 업신여기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연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주강이 제게 신경을 제대로 쓰질 않으니 수풀에서 뭔가 바스락거렸다고 말한들 소용이 없는 것이다.
‘형님은 쓸데없는 걱정이 많으시지.’
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강이 연오의 감시역이라고는 해도, 진짜 감시는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감시라기보다는 나름 연오의 보살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였던가, 더위를 먹고 인적 드문 곳에 쓰러진 후부터 주강이 붙어 다녔던 것 같은데……. 자신이 그때 아마 주강에게 짜증도 좀 냈었을 테고……. 그래, 싫어할 만하군.
“좀 더 건강해지면 되겠지.”
중얼거리며 연이 푹신한 침상 위에 몸을 뉘였다. 어쨌든 그의 목표는 다가오는 봄까지 건강해져서 세가를 나가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뛰쳐나가고 싶지만, 겨울에 나갔다가는 십중팔구 된통 앓아누울 것이 분명했다.
그날 연은 산책을 해서인지 드물게 푹 자고 일어났다. 약한 불면증도 앓고 있었기에, 다음 날도 일어나 산책을 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