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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지나 세로지나 꽃은 핀다 6화
二章 : 형제 (2)
그는 어김없이 화정당 정원의 뒤쪽에 자리 잡은 연못으로 향했다. 다리를 지나던 그는 멈칫했다. 시야에 걸리는 노오란 작은 꽃이 있었다. 지나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다리 입구에 난 작은 꽃을 빤히 바라봤다.
“……내 착각인가?”
어제 분명 이 근처 꽃은 밟아 없앤 것 같았는데……. 미간에 주름을 잡은 연이 다시 꽃을 짓뭉갰다. 노란 꽃잎들을 툭툭 차서 연못에 빠트리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야 만족한 얼굴로 마저 산책을 마쳤다.
그러나 그다음 날, 다시 산책을 나온 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그 자리 그대로 똑같이 자그마한 노란 꽃이 산들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재생력이 강한 꽃이 있을 수가 있나? 한참을 꽃을 노려보다가 땅을 파낼 만한 것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예 뿌리까지 제거해 버릴 생각이었다.
다시 부스럭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연이 멈칫했다. 잠시 생각한 끝에 그가 못 들은 척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연못의 정자로 향하는 작은 다리를 건너가면서 흘깃 보자 수풀 아래 무언가 보일락 말락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얼핏 보면 지나가 버릴 그런 무언가였다. 연이 안력을 돋웠다.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그러나 어른이라기에는 작고……. 어린아이인가?
‘세가에서 일하는 어린 시비나 하인이겠군.’
“이리 나오렴.”
“…….”
아마 자신이 지나가자 숨어 버린 게 아닐까 추측하며 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환자 중에는 몸이 약한 자들이 많다. 대부분 노인과 어린아이들이었고, 덕분에 연은 구슬리는 목소리를 내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혼내지 않을 테니까, 어서.”
과연 그의 추측은 맞아서 잠시 후에 작은 인형(人形)이 엉금엉금 수풀에서 기어 나왔다. 열세 살쯤 된 어린아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연은 제대로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옷차림이 퍽 꼬질꼬질했다. 산이며 들을 쏘다니다 돌아온 작은 짐승 같은 모양새였다.
“내가 지나간다고 하여 그렇게 숨어 있지 않아도 된단다.”
연의 말에 아이가 얼굴을 들었다. 까맣고 퍽 똘망똘망해 보이는 눈이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연은 어째서인지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디서 이 아이를 봤지? 대체 어디서? 어렴풋이 떠오르려고 할 때쯤이었다. 갑자기 아이가 후다닥 도망쳤다.
“잠시만……!”
연이 붙잡기도 전 아이는 다람쥐처럼 날래게 수풀 안으로 다시 기어 들어갔다. 그 후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황망하여 연이 잠시 그 자리에 섰다. 주변은 높은 담장과 잘 꾸며 놓은 수풀, 그리고 나무가 전부였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도련님.”
갑자기 주강의 목소리가 들려서 놀랐지만 연은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주강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수상쩍은 기척을 느끼고 온 모양이었다.
“누가 있었습니까?”
연은 잠시 아이가 사라진 수풀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 아이가 누구인지 기억해 낸 찰나였다. 그가 시치미를 뗐다.
“아니, 작은 동물이었어.”
주강은 의심스러운 얼굴이었으나 연이 그렇다는데 할 말은 없는 듯했다. 연이 손짓했다.
“돌아가 봐. 혼자 있고 싶으니.”
“……알겠습니다.”
마지못한 기색으로 주강이 돌아간 뒤 연이 팔짱을 끼고 수풀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아무리 아이라도 그렇지 주강이 제대로 확신을 하지 못하고 돌아갈 정도로 기척이 조용하다니 놀라웠다. 무엇보다 주강이 다가오는 걸 먼저 감지하고 도망친 것이다. 그 외에도 의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주강이 가고 난 뒤 연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기다렸으나 다시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일은 없었다.
아이가 다시 나타난 건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 놀라서 도망갔으니 다시는 안 오려나, 하고 있던 연이 흠칫했다. 수풀 아래 꾀죄죄한 얼굴이 불쑥 나타나 있었다. 아이치고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기척이 조용했다.
“……한위, 맞지?”
이름을 불러 주니 아이, 한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이 내심 혀를 쯧 찼다. 사실 얼굴을 알아본 것만으로도 용했다. 한위는 일 년에 한두 번, 남궁영명이나 남궁연오의 생일 연회 때나 구석진 자리에 잠깐 앉아 있다가 사라지곤 했던 것이다. 출신이 그다지 좋지 않아 세가에서 완전히 무시받는 위치였다.
남궁세가 직계 간의 사이는 다소 복잡했다. 일단 남궁영명의 삼남 이녀 중 연오와 첫째 누이는 정실부인인 황보세희의 자식이었다. 둘째 누이는 예전에 영명과 연인 관계에 있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연은 어떠하냐 하면 굳이 따지자면 첩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첩실이라 하여도 연의 모친인 모용단리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가(慕容家)의 여식이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게다가 연이 남궁영명을 증오하는 것과 별개로, 영명은 연을 나름 신경 썼다. 물론 연오와 비할 바는 안 되었지만.
반면 한위 모친의 출신은 한미하기 짝이 없었다. 세가 내에서 들리는 소문에 따르자면 그녀는 기루에서 일하던 하녀였다고 했다. 한위는 영명이 술에 취해 ‘실수로’ 가진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한위를 낳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산욕열(産褥熱)로 사망했고 한위만이 세가로 보내졌다.
그 후 한위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자라났다. 영명이 한위가 자신의 눈에 띄는 걸 몹시 싫어한 탓이다. 세가의 가주가 그러하니 다른 사람들의 취급이 어떻겠는가?
원래도 한위가 이 정원을 들락거렸었나? 연은 알 수가 없었다. 전의 그는 방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즐기지를 않았다. 밖으로 나갈 때는 유일하게 모란을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모란의 몸에 들어가기 전이라면 한위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일도 없었겠지.’
딱히 한위가 소위 천한 출신이기 때문이 아니다. 백모란일 때나 지금이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얼마 전까지의 ‘남궁연’은 그다지…… 사교적인 편이 아니었기에…….
“내가 누군지 아느냐?”
연못 옆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으며 묻자 한위가 눈만 데굴데굴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알기로 한위는 분명 열다섯이다. 그런데도 몸이 놀라울 정도로 작았다. 단순히 체격이 작은 게 아니었다. 연의 눈으로 보기에는 영양 섭취 부족으로 인한 발육 부진이었다. 게다가 하고 다니는 행색도 열다섯이라기보다는 열 살에 가까워 보였다. 빼빼 마른 이 녀석이 그의 동생이며 혈육이라는 사실이 새삼 연의 가슴에 와 닿았다.
연이 유심히 관찰하는 동안 한위는 경계하면서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앉으라는 의미로 톡톡 의자 옆을 두드리자 눈만 깜박거렸다. 못 알아들었나 해서 연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여기 앉으렴.”
한위가 슬그머니 다가와 앉으려고 할 때였다. 엉덩이를 간신히 붙이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갑자기 또 지난번처럼 후다닥 달아나더니 바스락거리며 수풀로 숨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주강이었다. 그가 주위를 살펴보는 가운데 연이 한숨을 쉬었다.
“새였어.”
“새……입니까?”
“그래. 누가 애완용으로 키운 것 같던데.”
그렇게 말하고는 연은 다음번에도 주강이 한위를 달아나게 하는 일이 있을까 봐 덧붙였다.
“앞으로 사소한 일로 쓸데없이 오지 좀 마.”
좀 재수 없게 말했나? 하지만 이 정도로는 해야 안 올 것 같고……. 주강은 잠시간 연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다음 날 연은 산책을 나가기 전 이것저것 챙겨 들었다. 물건을 품에 밀어 넣고 연못으로 향한 연이 우뚝 서서 정자로 건너가는 다리를 노려보았다. 저 빌어먹을 노란 꽃은 대체 왜 자꾸 피어나는 거지?
그가 꽃을 짓밟지 못한 건 한위가 수풀에서 불쑥 튀어나온 탓이었다. 하는 수 없이 꽃에서 신경을 끈 연은 의자에 앉았다. 다시 톡톡 두드리자 이번에는 한위가 한결 고분고분하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눈치를 보며 의자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조심스럽게 붙이고 앉았다.
“흠…….”
잠시 한위를 관찰하며 살펴보다가 일어난 연이 연못으로 향했다. 가지고 온 천을 연못 물에 적신 그가 한위의 턱을 잡았다. 한위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더니 바짝 얼어붙었다. 제 손위 형제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바짝 긴장한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은 적신 천으로 꼬질꼬질한 얼굴을 박박 닦아 냈다. 얼굴빛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안색은 괜찮군. 딱히 병이 있거나 하지 않아. 건강한 체질이야.’
그는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흙이 묻다 못해 거뭇한 소매를 걷어 마른 팔의 맥도 짚어 보았다. 어린아이답게 몸이 뜨끈뜨끈했다. 하지만 날씨가 여간 추운 게 아니었기에 뺨은 추위로 발그레했다.
“네가 몇 살이지?”
연의 질문에 한위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접었다. 그러고는 수를 헤아려 보는 듯하더니 아무렇게나 손가락을 펼쳤다. 연이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정신 연령이 심하게 낮다. 하지만 몸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말을 못 하는 것이냐?”
눈을 깜박거리더니 한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말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니 다행이기는 한데 말투가 어눌하고 느렸다. 연이 다시 맥을 짚어 보았다. 기혈이나 기맥에는 막힌 곳이 없고 통천혈(通天穴)이나 백회혈(百會穴) 부근의 흐름도 이상이 없었다. 오지(五遲) 혹은 오연(五軟, 자폐증)과는 거리가 멀었다. 백치(白癡)도 아니다. 눈빛이 맑고 또렷했다.
속으로 드는, 설마 하는 가정을 지우며 연이 품에서 작은 보따리를 꺼냈다. 보따리를 풀어 헤치자 주먹밥 두 개와 당과 몇 개가 나왔다. 입을 조금 벌린 한위가 꼴깍하고 침 삼키는 소리를 냈다. 배에서는 희미하게 꼬르륵 소리도 났다. 연이 오늘 아침 식사로 만든 식사였다.
“먹으렴.”
밀어 주자마자 한위는 사양도 않고 덥석 손으로 주먹밥을 쥐어 와구와구 먹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연의 마음속에서는 안쓰러운 감정이 번졌다. 아무리 남궁영명이 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고는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시비나 하인들이 네게 밥을 안 주니?”
주먹밥을 모두 먹은 한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의 낯빛이 흐려졌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고 사람과의 교류도 적은 게 분명했다. 그것도 모자라 굶기기까지 하다니? 아무리 출신이 천하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미가 줬는데……. 할미이가 아안, 일어나요.”
“할미?”
“으응. 잠만 자.”
그러더니 한위가 돌연 구슬 같은 눈물을 서럽게 뚝뚝 흘렸다. 연이 당황했다. 그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 일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보통 치료를 받는 아이들은 죄다 울음을 터트리곤 했으니 굳이 달랠 필요성도 못 느꼈던 탓이다.
어색하게 팔을 뻗어 등을 어루만져 주었더니 한위가 흐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나 울음이라기엔 너무 조용했다. 숨을 죽여 우는 게 익숙하다는 건 그다지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울어도 달래는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니.
위로가 어설퍼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간 쌓인 서러움이 많아서 그랬는지 한위는 한참 만에야 울음을 멈췄다. 눈이며 코가 안쓰럽게 붉었다.
“이…거 가져가도 돼요?”
“그래.”
고개를 끄덕인 연이 당과를 천으로 싸 주었다. 한위가 소중하게 당과를 품고 일어났다. 훌쩍거리면서도 한위는 머뭇거리다가 연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연이 생각에 잠겼다. 할미라는 건 아마도 한위를 돌보는 사람인 거겠지. 병으로 앓아누웠나? 최악의 가정을 하자면 죽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둘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날 밤 연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잠을 설쳤다. 지척에 중한 환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한위를 돌보고 있는 사람은 그가 능히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일 수도 있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백모란의 몸에 들어간 뒤 그는 한참을 환자를 치료하지 못했다. 이따금 감각이 둔해지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치료 도구가 없어.’
현실적인 고민을 하던 연은 얼마 안 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없으면 사 오면 될 것을, 무얼 고민하고 있나?
다음 날 연은 일찌감치 일어나 옷을 차려입었다. 오늘은 좀 오래 거닐 예정이니 옷은 특별히 따듯한 것으로 골랐다. 괜히 춥게 다니다가 작년…… 그러니까 체감상으로는 십일 년 전이지만, 아무튼 그때처럼 가벼운 기침에서 폐렴으로 번지게 되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연이 화정당을 나서자 주강이 조용히 따라붙었다. 사실 혼자서 외출하고 싶었지만 그는 연의 말은 듣지 않았다. 연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없는 사람 취급했다.
‘사실 모란일 적이나 지금이나 주강의 태도가 크게 다르진 않단 말이지.’
시비나 하인 같은 경우에는, 남궁연일 때는 몰랐던 면모를 많이 보여 주곤 했다. 그들은 모란에게는 시비나 하인이 아닌 이웃이며 형이었고 누나였다. 귀엽다고 음식을 나눠 주기도 했고 이가 드러나도록 크게 웃었으며 술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주강은 어떠했냐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견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모란일 때도 그가 길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사람이 그런 것이다.
남궁세가를 나선 연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아마 자신이 저 풍경 중에 하나가 될 일은 없겠지.
가면서 낯익은 사람을 몇 만났으나 반은 연의 얼굴도 못 알아보았고, 반은 알아보고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걸었다. 모란일 적에도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연은 새삼 제 평이 안 좋다는 걸 체감했다.
연은 바지런히 걸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시장을 지나 외곽으로 들어가자 주루가 하나 보였다. 만물상(萬物相) 금향루(錦香樓). 진은록과 종종 오곤 하던 곳이었다. 주루에 들어가기 전 연이 주강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건 남궁세가에 알려져도 좋지만 무엇을 사는지는 딱히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차남이 치료 도구를 구입했다는 게 알려져도 큰일까지는 나지 않겠지. 그러나 굳이 알려 성가신 일이 생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도록 해.”
연의 말에 주강은 마치 보이기라도 하는 듯 이 층을 잠시 쳐다보더니 묵묵히 입구에 섰다. 제게 시선 한번 주지 않는 주강을 잠시 바라보다가 연은 걸음을 옮겼다.
금향루는 만물상이라는 명칭답게 모든 것을 파는 곳이다. 손쉽게 물건을 구입하고 싶은 사람들이 비용을 지불하면 대신 발품을 팔아다 대리 구매해 줬다. 또한 구매한 물품은 그 누구에게도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연은 이 층의 한 객실로 안내받았다. 일각 후 비용을 치르고 난 뒤 침구(針灸)며 약재에, 어린아이 옷가지 등 물건을 들고 아래로 내려오니 주강이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연은 자신의 호위가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사람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가벼운 외출만으로도 연은 다소 피로해졌다. 평소 일어나던 시간보다 일찍 일어난 탓도 있었다. 세가로 돌아온 연이 보따리를 풀었다. 일단 침구 같은 도구들은 자개장 안 깊숙한 곳에 넣었다. 옷가지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먹거리만 챙겨 연못으로 향하니 오늘도 마찬가지로 한위가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어제와 같은 옷차림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더 꼬질꼬질해졌다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말하지 않아도 한위가 냉큼 연이 앉은 의자 옆에 앉았다. 연이 가져온 보따리를 보며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에 풀어 헤쳐 안에 든 것을 보여 주었다. 장난감이며 당과, 떡 따위의 간식이었다. 한위는 특히나 장난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만지작거리더니 감사 인사를 했다. 열다섯 살이면 장난감에는 흥미를 잃을 나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좋아한다는 건 변변찮은 놀잇감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겠지.
떡을 손에 쥐고 야무지게 베어 먹는 한위를 보며 연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한위야.”
“네에.”
“내일은 해가 지고 나서 올 수 있니?”
한위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이 관심을 보여 주니 정에 굶주린 아이는 해가 지면 춥다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연이 굳이 저녁에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었다. 며칠에 한 번 주강이 자리를 비울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내일 저녁이었다. 연은 보따리 안에 겨울옷을 넣고는 한위의 몸에 잘 매어 주었다.
“추우니까 내일은 이걸 입고 오렴.”
“네에.”
대답은 꼬박꼬박 잘하는군. 연이 아무 생각 없이 한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멈칫했다. 언제 감았는지 머리가 기름지다 못해……. 언제 씻기기도 해야 할 텐데. 겨울이니 연못에서 씻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위가 신나서 뛰어가고 난 뒤 연은 정자 다리 입구에 핀 노란 꽃을 노려보았다. 매일같이 새로 피는 기현상에도 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짓밟아 뭉개 주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정당 안으로 향했다. 연의 발아래에서 꽃잎이 흐트러져,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희미한 꽃향기를 남겼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 산들거리는 미풍이 일더니 노랗고 작은 꽃이 하나하나 다시 영글기 시작했다…….
***
“도련님,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밖에서 무뚝뚝하게 주강이 고했다. 그리고 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용히 사라졌다. 이때만을 기다렸던 연이 덮고 있던 이불을 밀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구를 챙겨 든 그가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겨울 밤바람이 매우 사나워서 잠시 몸을 떨며 제자리에 섰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연못으로 향하니 한위가 연과 함께 앉았던 그 의자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추웠을 텐데……. 이복형제라고는 해도 엄연히 자신의 동생인데 이렇게 숨어서 만날 필요가 있나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남궁연이 사람을 치료해 준다는 건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연은 성가신 일은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한위의 처지를 보았을 때, 세가의 의사를 불러 봤자 마지못해 와서 봐주거나 약 같지도 않은 약을 지어 주고 갈 게 뻔했다.
“네 할미에게로 가자.”
“정말요?”
한위가 눈에 띄게 좋아하더니 다시 수풀로 달려갔다. 연이 잠시 수풀을 노려보았다. 대체 어디로 드나드는 거지? 한위처럼 수풀 속을 기어 지나갈 수는 없으니 연이 가볍게 담장을 넘었다. 한위는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위는 걸음이 무척 빨라서 연은 따라가는 데 곤욕을 치렀다. 경공도 어두운 와중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아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도 몇 번이었다. 부끄러움에 한위가 보기 전에 얼른 일어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연신 욕지거리를 삼켰다. 빌어먹을 몸뚱이 같으니라고. 백모란의 몸을 체험해 봤기에 제 몸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지나치게 잘 느껴졌다.
한위는 세가의 외곽 중에서도 인적 드문 곳을 따라 걸었다. 평소에도 자주 쏘다니는 길인 게 분명했다. 둘은 하인들의 처소를 지나 더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그 할미란 사람이 지내는 곳임이 분명했다. 세가에서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데다가 한기 어린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엄습하는 추위에 연이 말없이 몸을 떨었다.
“여기이, 여기요.”
연은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그 남궁세가에 어떻게 이런 초가집 같은 곳이 있을 수가 있지? 아무리 그래도 세가의 공자를 돌보는 사람인데 취급이 너무 박했다. 지금 당장 해결은 못 하기에 일단 잠자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병자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쳤다. 그가 가져온 호롱에 불을 붙였다. 방 안이 환해지며 그제야 병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할미.”
한위는 노파의 곁으로 달려가 손을 쥐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연은 병자의 머리맡에 놓인 당과를 볼 수 있었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일단 문을 닫은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방바닥이 냉골 같았다.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날 병도 나겠다.
침구를 꺼내 든 연이 노파를 살폈다. 의식은 없으나 숨은 쉬고 있고 몸이 차가웠다. 손발에 붓기가 있었으며 명치를 눌러 보자 간이 부은 것이 느껴졌다. 연이 맥을 짚는 동안 한위는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만성신염(慢性腎炎)이로군.’
간이 허약해져 온몸에 기운이 없고 무기력하니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덥지도 않은데 도한(盜汗, 식은땀)이 있으며 정신도 혼몽할 테고. 그나마 다행인 건, 치료 못 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가 많으니 이렇게 앓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었다. 연에게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내공심법이었다.
연이 침구를 펼쳤다. 한쪽 팔이 부러졌어도 침은 잘 놓을 수 있었다. 침을 놓기 전 조심스럽게 병자의 옷을 풀어 헤쳤다. 침을 놓기 좋을 만큼만 벗기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날개를 펼친 작은 새 문신이 어깨에 있었다. 이를 확인하니 연은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노파는 하오문(下午門)에 속한 사람이었다.
하오문(下午門)이란 무엇인가. 무림강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점소이, 시비, 기녀 등 낮은 곳의 이들로 이루어진 문파가 있으니 그 문파가 바로 하오문이다. 세상 어디에나 있었고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문파. 사람을 대하는 게 일이기에 정보 습득에 능하기도 하였다. 정보를 얻어야 살아남으니 그들이 익히는 무공은 공격이나 방어보다는 은신에 집중되어 있었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며 정보를 얻는 것이다.
아마 주강도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한위의 기척은 이 노파에게 배운 것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 나이에 놀라운 성취였다. 재능이 있다는 소리겠지. 시선을 돌리자 한위는 연이 노파에게 침을 놓는 걸 움찔하면서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보통 이 나이 또래 아이들이 침놓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하는 걸 생각해 볼 때,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침을 모두 놓고 난 뒤 기다리면서 연은 고민에 빠졌다. 만성신염에는 육미탕(六味湯)이 제일 효과적이다. 하지만 바닥을 따뜻하게 땔 나무도 없는데 이 노파나 한위가 탕을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효과는 좀 떨어져도 환으로 만들어 주는 수밖에 없겠군. 만약에 나무가 있다 해도 약탕 만드는 데 쓰느니 방을 지피는 데 쓰는 게 건강에는 백번 나았다. 연이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동안 노파가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할미!”
한위가 반색을 하며 반겼다. 노파는 한참을 눈을 깜박거린 후에야 연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파가 당황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연은 모르는 척 침구를 정리했다. 연이 침을 모두 제거하자 한위가 울먹이며 노파에게 안겨 들었다.
“이제 아프지 마!”
二章 : 형제 (2)
그는 어김없이 화정당 정원의 뒤쪽에 자리 잡은 연못으로 향했다. 다리를 지나던 그는 멈칫했다. 시야에 걸리는 노오란 작은 꽃이 있었다. 지나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다리 입구에 난 작은 꽃을 빤히 바라봤다.
“……내 착각인가?”
어제 분명 이 근처 꽃은 밟아 없앤 것 같았는데……. 미간에 주름을 잡은 연이 다시 꽃을 짓뭉갰다. 노란 꽃잎들을 툭툭 차서 연못에 빠트리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야 만족한 얼굴로 마저 산책을 마쳤다.
그러나 그다음 날, 다시 산책을 나온 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그 자리 그대로 똑같이 자그마한 노란 꽃이 산들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재생력이 강한 꽃이 있을 수가 있나? 한참을 꽃을 노려보다가 땅을 파낼 만한 것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예 뿌리까지 제거해 버릴 생각이었다.
다시 부스럭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연이 멈칫했다. 잠시 생각한 끝에 그가 못 들은 척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연못의 정자로 향하는 작은 다리를 건너가면서 흘깃 보자 수풀 아래 무언가 보일락 말락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얼핏 보면 지나가 버릴 그런 무언가였다. 연이 안력을 돋웠다.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그러나 어른이라기에는 작고……. 어린아이인가?
‘세가에서 일하는 어린 시비나 하인이겠군.’
“이리 나오렴.”
“…….”
아마 자신이 지나가자 숨어 버린 게 아닐까 추측하며 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환자 중에는 몸이 약한 자들이 많다. 대부분 노인과 어린아이들이었고, 덕분에 연은 구슬리는 목소리를 내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혼내지 않을 테니까, 어서.”
과연 그의 추측은 맞아서 잠시 후에 작은 인형(人形)이 엉금엉금 수풀에서 기어 나왔다. 열세 살쯤 된 어린아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연은 제대로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옷차림이 퍽 꼬질꼬질했다. 산이며 들을 쏘다니다 돌아온 작은 짐승 같은 모양새였다.
“내가 지나간다고 하여 그렇게 숨어 있지 않아도 된단다.”
연의 말에 아이가 얼굴을 들었다. 까맣고 퍽 똘망똘망해 보이는 눈이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연은 어째서인지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디서 이 아이를 봤지? 대체 어디서? 어렴풋이 떠오르려고 할 때쯤이었다. 갑자기 아이가 후다닥 도망쳤다.
“잠시만……!”
연이 붙잡기도 전 아이는 다람쥐처럼 날래게 수풀 안으로 다시 기어 들어갔다. 그 후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황망하여 연이 잠시 그 자리에 섰다. 주변은 높은 담장과 잘 꾸며 놓은 수풀, 그리고 나무가 전부였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도련님.”
갑자기 주강의 목소리가 들려서 놀랐지만 연은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주강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수상쩍은 기척을 느끼고 온 모양이었다.
“누가 있었습니까?”
연은 잠시 아이가 사라진 수풀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 아이가 누구인지 기억해 낸 찰나였다. 그가 시치미를 뗐다.
“아니, 작은 동물이었어.”
주강은 의심스러운 얼굴이었으나 연이 그렇다는데 할 말은 없는 듯했다. 연이 손짓했다.
“돌아가 봐. 혼자 있고 싶으니.”
“……알겠습니다.”
마지못한 기색으로 주강이 돌아간 뒤 연이 팔짱을 끼고 수풀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아무리 아이라도 그렇지 주강이 제대로 확신을 하지 못하고 돌아갈 정도로 기척이 조용하다니 놀라웠다. 무엇보다 주강이 다가오는 걸 먼저 감지하고 도망친 것이다. 그 외에도 의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주강이 가고 난 뒤 연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기다렸으나 다시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일은 없었다.
아이가 다시 나타난 건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 놀라서 도망갔으니 다시는 안 오려나, 하고 있던 연이 흠칫했다. 수풀 아래 꾀죄죄한 얼굴이 불쑥 나타나 있었다. 아이치고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기척이 조용했다.
“……한위, 맞지?”
이름을 불러 주니 아이, 한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이 내심 혀를 쯧 찼다. 사실 얼굴을 알아본 것만으로도 용했다. 한위는 일 년에 한두 번, 남궁영명이나 남궁연오의 생일 연회 때나 구석진 자리에 잠깐 앉아 있다가 사라지곤 했던 것이다. 출신이 그다지 좋지 않아 세가에서 완전히 무시받는 위치였다.
남궁세가 직계 간의 사이는 다소 복잡했다. 일단 남궁영명의 삼남 이녀 중 연오와 첫째 누이는 정실부인인 황보세희의 자식이었다. 둘째 누이는 예전에 영명과 연인 관계에 있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연은 어떠하냐 하면 굳이 따지자면 첩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첩실이라 하여도 연의 모친인 모용단리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가(慕容家)의 여식이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게다가 연이 남궁영명을 증오하는 것과 별개로, 영명은 연을 나름 신경 썼다. 물론 연오와 비할 바는 안 되었지만.
반면 한위 모친의 출신은 한미하기 짝이 없었다. 세가 내에서 들리는 소문에 따르자면 그녀는 기루에서 일하던 하녀였다고 했다. 한위는 영명이 술에 취해 ‘실수로’ 가진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한위를 낳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산욕열(産褥熱)로 사망했고 한위만이 세가로 보내졌다.
그 후 한위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자라났다. 영명이 한위가 자신의 눈에 띄는 걸 몹시 싫어한 탓이다. 세가의 가주가 그러하니 다른 사람들의 취급이 어떻겠는가?
원래도 한위가 이 정원을 들락거렸었나? 연은 알 수가 없었다. 전의 그는 방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즐기지를 않았다. 밖으로 나갈 때는 유일하게 모란을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모란의 몸에 들어가기 전이라면 한위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일도 없었겠지.’
딱히 한위가 소위 천한 출신이기 때문이 아니다. 백모란일 때나 지금이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얼마 전까지의 ‘남궁연’은 그다지…… 사교적인 편이 아니었기에…….
“내가 누군지 아느냐?”
연못 옆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으며 묻자 한위가 눈만 데굴데굴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알기로 한위는 분명 열다섯이다. 그런데도 몸이 놀라울 정도로 작았다. 단순히 체격이 작은 게 아니었다. 연의 눈으로 보기에는 영양 섭취 부족으로 인한 발육 부진이었다. 게다가 하고 다니는 행색도 열다섯이라기보다는 열 살에 가까워 보였다. 빼빼 마른 이 녀석이 그의 동생이며 혈육이라는 사실이 새삼 연의 가슴에 와 닿았다.
연이 유심히 관찰하는 동안 한위는 경계하면서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앉으라는 의미로 톡톡 의자 옆을 두드리자 눈만 깜박거렸다. 못 알아들었나 해서 연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여기 앉으렴.”
한위가 슬그머니 다가와 앉으려고 할 때였다. 엉덩이를 간신히 붙이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갑자기 또 지난번처럼 후다닥 달아나더니 바스락거리며 수풀로 숨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주강이었다. 그가 주위를 살펴보는 가운데 연이 한숨을 쉬었다.
“새였어.”
“새……입니까?”
“그래. 누가 애완용으로 키운 것 같던데.”
그렇게 말하고는 연은 다음번에도 주강이 한위를 달아나게 하는 일이 있을까 봐 덧붙였다.
“앞으로 사소한 일로 쓸데없이 오지 좀 마.”
좀 재수 없게 말했나? 하지만 이 정도로는 해야 안 올 것 같고……. 주강은 잠시간 연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다음 날 연은 산책을 나가기 전 이것저것 챙겨 들었다. 물건을 품에 밀어 넣고 연못으로 향한 연이 우뚝 서서 정자로 건너가는 다리를 노려보았다. 저 빌어먹을 노란 꽃은 대체 왜 자꾸 피어나는 거지?
그가 꽃을 짓밟지 못한 건 한위가 수풀에서 불쑥 튀어나온 탓이었다. 하는 수 없이 꽃에서 신경을 끈 연은 의자에 앉았다. 다시 톡톡 두드리자 이번에는 한위가 한결 고분고분하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눈치를 보며 의자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조심스럽게 붙이고 앉았다.
“흠…….”
잠시 한위를 관찰하며 살펴보다가 일어난 연이 연못으로 향했다. 가지고 온 천을 연못 물에 적신 그가 한위의 턱을 잡았다. 한위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더니 바짝 얼어붙었다. 제 손위 형제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바짝 긴장한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은 적신 천으로 꼬질꼬질한 얼굴을 박박 닦아 냈다. 얼굴빛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안색은 괜찮군. 딱히 병이 있거나 하지 않아. 건강한 체질이야.’
그는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흙이 묻다 못해 거뭇한 소매를 걷어 마른 팔의 맥도 짚어 보았다. 어린아이답게 몸이 뜨끈뜨끈했다. 하지만 날씨가 여간 추운 게 아니었기에 뺨은 추위로 발그레했다.
“네가 몇 살이지?”
연의 질문에 한위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접었다. 그러고는 수를 헤아려 보는 듯하더니 아무렇게나 손가락을 펼쳤다. 연이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정신 연령이 심하게 낮다. 하지만 몸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말을 못 하는 것이냐?”
눈을 깜박거리더니 한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말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니 다행이기는 한데 말투가 어눌하고 느렸다. 연이 다시 맥을 짚어 보았다. 기혈이나 기맥에는 막힌 곳이 없고 통천혈(通天穴)이나 백회혈(百會穴) 부근의 흐름도 이상이 없었다. 오지(五遲) 혹은 오연(五軟, 자폐증)과는 거리가 멀었다. 백치(白癡)도 아니다. 눈빛이 맑고 또렷했다.
속으로 드는, 설마 하는 가정을 지우며 연이 품에서 작은 보따리를 꺼냈다. 보따리를 풀어 헤치자 주먹밥 두 개와 당과 몇 개가 나왔다. 입을 조금 벌린 한위가 꼴깍하고 침 삼키는 소리를 냈다. 배에서는 희미하게 꼬르륵 소리도 났다. 연이 오늘 아침 식사로 만든 식사였다.
“먹으렴.”
밀어 주자마자 한위는 사양도 않고 덥석 손으로 주먹밥을 쥐어 와구와구 먹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연의 마음속에서는 안쓰러운 감정이 번졌다. 아무리 남궁영명이 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고는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시비나 하인들이 네게 밥을 안 주니?”
주먹밥을 모두 먹은 한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의 낯빛이 흐려졌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고 사람과의 교류도 적은 게 분명했다. 그것도 모자라 굶기기까지 하다니? 아무리 출신이 천하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미가 줬는데……. 할미이가 아안, 일어나요.”
“할미?”
“으응. 잠만 자.”
그러더니 한위가 돌연 구슬 같은 눈물을 서럽게 뚝뚝 흘렸다. 연이 당황했다. 그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 일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보통 치료를 받는 아이들은 죄다 울음을 터트리곤 했으니 굳이 달랠 필요성도 못 느꼈던 탓이다.
어색하게 팔을 뻗어 등을 어루만져 주었더니 한위가 흐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나 울음이라기엔 너무 조용했다. 숨을 죽여 우는 게 익숙하다는 건 그다지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울어도 달래는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니.
위로가 어설퍼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간 쌓인 서러움이 많아서 그랬는지 한위는 한참 만에야 울음을 멈췄다. 눈이며 코가 안쓰럽게 붉었다.
“이…거 가져가도 돼요?”
“그래.”
고개를 끄덕인 연이 당과를 천으로 싸 주었다. 한위가 소중하게 당과를 품고 일어났다. 훌쩍거리면서도 한위는 머뭇거리다가 연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연이 생각에 잠겼다. 할미라는 건 아마도 한위를 돌보는 사람인 거겠지. 병으로 앓아누웠나? 최악의 가정을 하자면 죽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둘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날 밤 연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잠을 설쳤다. 지척에 중한 환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한위를 돌보고 있는 사람은 그가 능히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일 수도 있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백모란의 몸에 들어간 뒤 그는 한참을 환자를 치료하지 못했다. 이따금 감각이 둔해지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치료 도구가 없어.’
현실적인 고민을 하던 연은 얼마 안 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없으면 사 오면 될 것을, 무얼 고민하고 있나?
다음 날 연은 일찌감치 일어나 옷을 차려입었다. 오늘은 좀 오래 거닐 예정이니 옷은 특별히 따듯한 것으로 골랐다. 괜히 춥게 다니다가 작년…… 그러니까 체감상으로는 십일 년 전이지만, 아무튼 그때처럼 가벼운 기침에서 폐렴으로 번지게 되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연이 화정당을 나서자 주강이 조용히 따라붙었다. 사실 혼자서 외출하고 싶었지만 그는 연의 말은 듣지 않았다. 연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없는 사람 취급했다.
‘사실 모란일 적이나 지금이나 주강의 태도가 크게 다르진 않단 말이지.’
시비나 하인 같은 경우에는, 남궁연일 때는 몰랐던 면모를 많이 보여 주곤 했다. 그들은 모란에게는 시비나 하인이 아닌 이웃이며 형이었고 누나였다. 귀엽다고 음식을 나눠 주기도 했고 이가 드러나도록 크게 웃었으며 술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주강은 어떠했냐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견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모란일 때도 그가 길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사람이 그런 것이다.
남궁세가를 나선 연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아마 자신이 저 풍경 중에 하나가 될 일은 없겠지.
가면서 낯익은 사람을 몇 만났으나 반은 연의 얼굴도 못 알아보았고, 반은 알아보고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걸었다. 모란일 적에도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연은 새삼 제 평이 안 좋다는 걸 체감했다.
연은 바지런히 걸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시장을 지나 외곽으로 들어가자 주루가 하나 보였다. 만물상(萬物相) 금향루(錦香樓). 진은록과 종종 오곤 하던 곳이었다. 주루에 들어가기 전 연이 주강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건 남궁세가에 알려져도 좋지만 무엇을 사는지는 딱히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차남이 치료 도구를 구입했다는 게 알려져도 큰일까지는 나지 않겠지. 그러나 굳이 알려 성가신 일이 생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도록 해.”
연의 말에 주강은 마치 보이기라도 하는 듯 이 층을 잠시 쳐다보더니 묵묵히 입구에 섰다. 제게 시선 한번 주지 않는 주강을 잠시 바라보다가 연은 걸음을 옮겼다.
금향루는 만물상이라는 명칭답게 모든 것을 파는 곳이다. 손쉽게 물건을 구입하고 싶은 사람들이 비용을 지불하면 대신 발품을 팔아다 대리 구매해 줬다. 또한 구매한 물품은 그 누구에게도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연은 이 층의 한 객실로 안내받았다. 일각 후 비용을 치르고 난 뒤 침구(針灸)며 약재에, 어린아이 옷가지 등 물건을 들고 아래로 내려오니 주강이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연은 자신의 호위가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사람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가벼운 외출만으로도 연은 다소 피로해졌다. 평소 일어나던 시간보다 일찍 일어난 탓도 있었다. 세가로 돌아온 연이 보따리를 풀었다. 일단 침구 같은 도구들은 자개장 안 깊숙한 곳에 넣었다. 옷가지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먹거리만 챙겨 연못으로 향하니 오늘도 마찬가지로 한위가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어제와 같은 옷차림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더 꼬질꼬질해졌다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말하지 않아도 한위가 냉큼 연이 앉은 의자 옆에 앉았다. 연이 가져온 보따리를 보며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에 풀어 헤쳐 안에 든 것을 보여 주었다. 장난감이며 당과, 떡 따위의 간식이었다. 한위는 특히나 장난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만지작거리더니 감사 인사를 했다. 열다섯 살이면 장난감에는 흥미를 잃을 나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좋아한다는 건 변변찮은 놀잇감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겠지.
떡을 손에 쥐고 야무지게 베어 먹는 한위를 보며 연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한위야.”
“네에.”
“내일은 해가 지고 나서 올 수 있니?”
한위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이 관심을 보여 주니 정에 굶주린 아이는 해가 지면 춥다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연이 굳이 저녁에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었다. 며칠에 한 번 주강이 자리를 비울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내일 저녁이었다. 연은 보따리 안에 겨울옷을 넣고는 한위의 몸에 잘 매어 주었다.
“추우니까 내일은 이걸 입고 오렴.”
“네에.”
대답은 꼬박꼬박 잘하는군. 연이 아무 생각 없이 한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멈칫했다. 언제 감았는지 머리가 기름지다 못해……. 언제 씻기기도 해야 할 텐데. 겨울이니 연못에서 씻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위가 신나서 뛰어가고 난 뒤 연은 정자 다리 입구에 핀 노란 꽃을 노려보았다. 매일같이 새로 피는 기현상에도 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짓밟아 뭉개 주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정당 안으로 향했다. 연의 발아래에서 꽃잎이 흐트러져,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희미한 꽃향기를 남겼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 산들거리는 미풍이 일더니 노랗고 작은 꽃이 하나하나 다시 영글기 시작했다…….
“도련님,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밖에서 무뚝뚝하게 주강이 고했다. 그리고 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용히 사라졌다. 이때만을 기다렸던 연이 덮고 있던 이불을 밀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구를 챙겨 든 그가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겨울 밤바람이 매우 사나워서 잠시 몸을 떨며 제자리에 섰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연못으로 향하니 한위가 연과 함께 앉았던 그 의자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추웠을 텐데……. 이복형제라고는 해도 엄연히 자신의 동생인데 이렇게 숨어서 만날 필요가 있나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남궁연이 사람을 치료해 준다는 건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연은 성가신 일은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한위의 처지를 보았을 때, 세가의 의사를 불러 봤자 마지못해 와서 봐주거나 약 같지도 않은 약을 지어 주고 갈 게 뻔했다.
“네 할미에게로 가자.”
“정말요?”
한위가 눈에 띄게 좋아하더니 다시 수풀로 달려갔다. 연이 잠시 수풀을 노려보았다. 대체 어디로 드나드는 거지? 한위처럼 수풀 속을 기어 지나갈 수는 없으니 연이 가볍게 담장을 넘었다. 한위는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위는 걸음이 무척 빨라서 연은 따라가는 데 곤욕을 치렀다. 경공도 어두운 와중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아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도 몇 번이었다. 부끄러움에 한위가 보기 전에 얼른 일어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연신 욕지거리를 삼켰다. 빌어먹을 몸뚱이 같으니라고. 백모란의 몸을 체험해 봤기에 제 몸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지나치게 잘 느껴졌다.
한위는 세가의 외곽 중에서도 인적 드문 곳을 따라 걸었다. 평소에도 자주 쏘다니는 길인 게 분명했다. 둘은 하인들의 처소를 지나 더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그 할미란 사람이 지내는 곳임이 분명했다. 세가에서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데다가 한기 어린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엄습하는 추위에 연이 말없이 몸을 떨었다.
“여기이, 여기요.”
연은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그 남궁세가에 어떻게 이런 초가집 같은 곳이 있을 수가 있지? 아무리 그래도 세가의 공자를 돌보는 사람인데 취급이 너무 박했다. 지금 당장 해결은 못 하기에 일단 잠자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병자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쳤다. 그가 가져온 호롱에 불을 붙였다. 방 안이 환해지며 그제야 병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할미.”
한위는 노파의 곁으로 달려가 손을 쥐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연은 병자의 머리맡에 놓인 당과를 볼 수 있었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일단 문을 닫은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방바닥이 냉골 같았다.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날 병도 나겠다.
침구를 꺼내 든 연이 노파를 살폈다. 의식은 없으나 숨은 쉬고 있고 몸이 차가웠다. 손발에 붓기가 있었으며 명치를 눌러 보자 간이 부은 것이 느껴졌다. 연이 맥을 짚는 동안 한위는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만성신염(慢性腎炎)이로군.’
간이 허약해져 온몸에 기운이 없고 무기력하니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덥지도 않은데 도한(盜汗, 식은땀)이 있으며 정신도 혼몽할 테고. 그나마 다행인 건, 치료 못 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가 많으니 이렇게 앓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었다. 연에게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내공심법이었다.
연이 침구를 펼쳤다. 한쪽 팔이 부러졌어도 침은 잘 놓을 수 있었다. 침을 놓기 전 조심스럽게 병자의 옷을 풀어 헤쳤다. 침을 놓기 좋을 만큼만 벗기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날개를 펼친 작은 새 문신이 어깨에 있었다. 이를 확인하니 연은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노파는 하오문(下午門)에 속한 사람이었다.
하오문(下午門)이란 무엇인가. 무림강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점소이, 시비, 기녀 등 낮은 곳의 이들로 이루어진 문파가 있으니 그 문파가 바로 하오문이다. 세상 어디에나 있었고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문파. 사람을 대하는 게 일이기에 정보 습득에 능하기도 하였다. 정보를 얻어야 살아남으니 그들이 익히는 무공은 공격이나 방어보다는 은신에 집중되어 있었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며 정보를 얻는 것이다.
아마 주강도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한위의 기척은 이 노파에게 배운 것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 나이에 놀라운 성취였다. 재능이 있다는 소리겠지. 시선을 돌리자 한위는 연이 노파에게 침을 놓는 걸 움찔하면서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보통 이 나이 또래 아이들이 침놓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하는 걸 생각해 볼 때,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침을 모두 놓고 난 뒤 기다리면서 연은 고민에 빠졌다. 만성신염에는 육미탕(六味湯)이 제일 효과적이다. 하지만 바닥을 따뜻하게 땔 나무도 없는데 이 노파나 한위가 탕을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효과는 좀 떨어져도 환으로 만들어 주는 수밖에 없겠군. 만약에 나무가 있다 해도 약탕 만드는 데 쓰느니 방을 지피는 데 쓰는 게 건강에는 백번 나았다. 연이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동안 노파가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할미!”
한위가 반색을 하며 반겼다. 노파는 한참을 눈을 깜박거린 후에야 연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파가 당황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연은 모르는 척 침구를 정리했다. 연이 침을 모두 제거하자 한위가 울먹이며 노파에게 안겨 들었다.
“이제 아프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