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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지나 세로지나 꽃은 핀다 7화
二章 : 형제 (3)
연은 노파가 손짓으로 한위에게 대화하는 걸 보며 미간을 접었다. 벙어리였구나. 연은 못 알아보는 손짓도 한위는 잘만 이해했다. 이제야 한위의 말투가 어눌한 것도 이해가 갔다. 벙어리 유모와의 교류가 주가 되었으니 말에 능숙할 리가 없었다.
“응, 맞아. 형님이야!”
노파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한위가 해맑게 외쳤다. 노파의 얼굴 가득한 근심 걱정은 보이지도 않는가 보지……. 아무튼 볼일을 모두 마친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슬으슬한 게 영 몸이 좋지 않았다. 그에게는 따뜻한 방이 필요했다.
“내일 또 보자꾸나, 한위야.”
“네에, 형님!”
한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둘이 당과도 나눠 먹을 수 있겠지. 흘끗 두 사람을 보고는 연이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도란도란 한위의 말소리가 울리는 낡은 누각을 바라보았다. 환자가 회복되는 것을 보는 건 언제나 좋았다. 그 광경은 그의 마음을 채워 주곤 했다.
화정당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어두침침한 길을 돌아오면서 그는 한 번 더 넘어졌다. 이번에는 밤눈이 어둡고 급히 걸어서가 아니라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담장을 휙 넘다가, 지난번 백모란에게 패대기쳐져 다쳤던 발목도 다시 삐었다. 나무를 짚고 서서 가만히 욕설을 지껄이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둑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도련님.”
연은 이번에는 놀라서 작게 헉,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그가 아무렇지 않게 시치미를 뗐다.
“무슨 일이야?”
쌀쌀맞게 묻자 주강의 시선이 잠시 연의 다리에 향했다가 이내 거두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답하고는 주강이 다시 조용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를 꽉 문 연은 힘겹게 자신의 따뜻한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서 보니 손바닥이며 무릎이 죄다 까져 있었다. 한숨을 쉬면서 이불 안으로 기어들었다.
다음 날 연은 끙끙 앓느라 늦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작게 기침을 한 뒤 무거운 몸을 일으켰을 땐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몸이 영 좋지를 않았지만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시비가 소세용으로 받아다 놓은 뜨거운 물을 놓고 약재를 잘게 쪼개고 썰었다. 한위에게 줄 육미지황환(六味地黃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부러진 팔 때문에 한쪽 손으로 약을 빚느라 초반에는 애를 좀 먹었다. 그래도 어떻게 요령을 익혀 몇십 개를 동글동글 잘 빚어 놓으니 벌써 점심이었다.
시비들이 점심을 가지고 오기 전 연이 환약을 잘 싸서 치워 두었다. 오늘도 한위 줄 주먹밥을 만들 생각이었다. 한위는 좀 잘 먹을 필요성이 있었다. 연이 점심을 가지고 온 시비에게 일렀다.
“연오 형님에게 시간 괜찮으면 단둘이 저녁을 같이 먹지 않겠냐고 전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연이 먼저 연오에게 식사를 같이하자고 청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이번에는 할 말이 있었기에 꼭 같이 식사를 해야 했다. 잠시 후 돌아온 시비는 연오가 흔쾌히 승낙했노라 전해 왔다.
연이 주먹밥이며 환약을 싸서 나가자 한위가 몸을 쭈그리고 앉아 연못에 작은 조약돌을 던지며 놀고 있었다. 밥인 줄 안 잉어들이 잽싸게 다가왔다가 느릿느릿 다시 돌아가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한위야, 하고 부르니 한위가 반색하며 달려왔다.
“형님.”
보따리를 풀자마자 한위는 주먹밥이며 먹거리를 여지없이 손으로 집어 와구와구 먹었다. 오늘은 기운을 좀 차린 노파가 신경을 썼는지 옷이 바뀌어 있었고 얼굴도 덜 꼬질꼬질했다. 머리카락도 보송해 보였다. 연은 마음 놓고 한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위야. 돌아갈 때 이걸 꼭 가지고 가렴. 뭉그러지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들고 가야 한다.”
한위가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킁 냄새를 맡아 보더니 냄새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미간을 팍 찡그렸다. 약간 불안했던 연이 덧붙였다.
“약이니 가지고 가서 아침저녁으로 꼭 두 번씩 먹으라고 해.”
“할미에게?”
“그래. 그래야 할미가 다시 그렇게 아프진 않을 거야.”
눈을 휘둥그레 뜬 한위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는 연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푼 듯했다. 아마도 자신에게 이렇게 대해 주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형이니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겠지. 그러나 가족이라고 해서 다 이러지는 않는 것을. 연이 쓰게 웃었다. 남보다도 못할뿐더러 원수 같은 가족도 있는 법이다.
연은 가만히 앉아 한위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혼자서도 잘 놀았다. 아니, 혼자 노는 방법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한위는 제법 한참을 연의 곁에서 머물다가 갔다. 수풀 속으로 기어 들어가면서도 헤어지기 싫은지 내내 아쉬운 얼굴을 했다. 딱히 놀아 준 것도 없이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연은 한위가 대체 어디로 드나드는지 알기 위해 수풀이며 담장 근처를 뒤적거리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시비의 목소리에 돌아섰다. 뭐, 언젠가는 알아내는 날이 오겠지……. 지금은 형님을 뵐 때였다.
***
“어서 오거라. 어쩐 일로 네가 먼저 나와 식사를 하자고 하는구나.”
화월당에 당도하니 연오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오랜만에 먼저 만남을 청한 아우가 퍽 반가운 눈치였다. 오늘도 화월당에는 처리해야 할 일거리가 가득이었다. 연오는 두루마리 한 무더기를 밀어 내며 탁자에 앉았다. 소면을 시작으로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잘 구워져 반들거리는 오리구이는 입맛이 없는 연조차도 젓가락을 뻗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형님이 신경 좀 쓰셨구나.’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려니 연은 다소 양심이 찔렸다. 그러나 몰랐으면 모를까 근래 들어 알게 된 사실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을 쯤에 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연오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형님, 실은 궁금한 것이 있어 이렇게 식사를 함께하자고 한 것입니다.”
“궁금한 것? 얼마든지 물어보아라.”
술을 훌쩍 마시고는 연오도 잔을 내려놓았다. 연은 연오를 잠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연을 여러모로 신경 써 주곤 했다. 의원이며 진귀한 약에, 못해도 며칠에 한 번은 얼굴을 보며 어찌 지내는지 물어봐 주었다. 주강을 붙여 신변에 이상이 있거든 바로 알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지금도 연을 향하는 눈빛에는 염려와 걱정이 들어 있었다. 이미 성인이 된 사내에게는 분명한 과보호였으나, 그 과보호 덕에 연은 그나마 남궁세가가 완전히 미워지지 않았다. 영명의 남궁세가와 연오의 남궁세가는 다를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일에는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완벽하고 곧다고만 느껴지는 형님이었기에 더욱이 그랬다.
“얼마 전에 우연히 한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위의 이야기를 꺼내자 아니나 다를까 연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한위가 세가에서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
“먹을 것을 주는 사람도 없어 굶고 다닌 모양입니다. 어찌 저와 이리 처지가 다릅니까? 한위나 저나 같은 아우가 아닙니까?”
그 말을 하면서 연의 마음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한위는 연오에게만 동생이 아니라 그에게도 동생이었다. 모란으로 지내면서 뉘우침과 반성이 있었으니 돌아와서 이렇게 챙기는 것이지, 그런 경험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한위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가식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가식적이어도 한위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진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연의 질문에 연오는 한참 침묵하더니 조용히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도 한위가 어찌 지내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굶고 다니는 줄은 몰랐구나.”
“형님.”
“나름 신경을 써 준다고 써 줬는데 한참 부족하지. 안다.”
연오가 신경을 써 주는 정도가 분명 연에게 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는 꼬박꼬박 연을 식사 자리에 부르면서도 한위는 그렇지 않았다. 세가에 충성스러운 시비나 하인들을 배치해 주지도 않았고, 유일하게 한위를 돌보는 노파가 다 죽어 가도 방치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는 연오의 얼굴은 괴로워 보였다. 연오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연아. 아버지는 한위를 싫어하신다.”
단호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드물게도 연오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야.”
연오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연이 식어 가는 음식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그분의 아들로서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받는 것도 못마땅해하시는 정도지. 심지어 나의 도움까지도 말이다.”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오는 곧은 사람이었다. 그는 의로운 행동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하곤 했다. 그런 연오에게 있어 옳은 일 중의 하나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궁영명이 어디 제대로 된 부친이던가? 연은 연오가 영명의 부당한 지시로 인해 심적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몇 번이나 지켜봤었다. 바로 지금처럼.
“내가 사람을 붙여 돌봐 주려고 할 때마다 한위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감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누가 그랬는지는 자명한 일이지.”
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위가 싫다면 대체 왜 세가 내에 데리고 있는가? 다들 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남궁영명에게는 자식들이 더 있었다.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나 자식이라 하여 반드시 세가 내로 들이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연오도 그 이유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한위를 내보내려고 한다. 세가는 한위에게 절대 좋은 곳이 아니야.”
연은 연오의 속마음을 읽었다. 그가 생략한 말 또한 알아차렸다. ‘남궁영명이 살아 있는 세가는’인 것이겠지. 그건 연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간 많이 답답했던지 연오가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나중에 한위를 일단 남궁세가와 연이 닿은 소박한 상회에 보내 일을 배우게 한 다음, 자신이 정식으로 가주 자리를 물려받으면 한위가 원하는 일을 하게 할 생각이라고 했다.
“영특한 녀석이니 뭘 해도 잘 해낼 수 있겠지.”
연오가 쓰게 웃으며 다시 술잔을 비웠다. 무공으로 술기운을 밀어 내 등 뒤에서 미약한 아지랑이가 일었다. 소가주로서 그는 술을 마실 수는 있어도 취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마침내 오리고기를 한 입 먹은 연이 일단 칭찬했다.
“훌륭하네요.”
“그렇지? 나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요리란다.”
맛있는 오리구이에 대한 칭찬으로 분위기가 밝아지자 연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그럼…… 한위 나갈 때 저도 같이 나갈까요? 한위는 세상 물정도 전혀 모를 테고…….”
연오가 정색하자 연이 속으로 이크, 하고 혀를 찼다. 연을 아끼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엄격한 손위 형제이자 소가주였다. 그가 탁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미간만 찌푸렸는데도 기세가 제법 매서웠다.
“한위와 네가 같으냐? 그런 소릴 하려거든 좀 강건해지고 나서나 말하거라.”
“제 건강이…… 뭐가 어떻습니까?”
내심 발끈하여 대꾸하면서도 말 같잖은 소리라는 건 스스로 잘 알았다. 하룻밤 잠시 한위와 짧은 밤 마실 나갔다고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다다를 때까지 앓는 몸뚱어리가 아니던가? 그래서 겨울 대신 봄에 세가를 나가려고 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건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한위 내보낼 때 사람 딸려 보낼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아라.”
연은 세상 물정 모른다는 말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모란의 몸으로 살면서 그는 세상의 쓴맛을 제법 보았다. 남궁세가의 공자로 살 때는 실로 상상도 한 적 없던, 그런 쓴맛이었다. 어미를 잃은 농사꾼의 아들이란 그런 위치였다. 사부인 진은록이 곁에 있었기에 그나마 그 삶이 좋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봄부터는 배움을 받거라. 내가 보기에 너는 나중에 세가의 장로가 되는 것이 좋겠구나.”
세가의 장로라……. 그다지 놀라운 제안은 아니었다. 세가에서 장로란 무슨 위치에 있던가? 가주의 측근이며 방계이든 직계이든 남궁세가와 핏줄로 얽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솔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동시에 그에 걸맞은 영화를 누렸다. 보통은 연처럼 장남 외의 형제자매들이 장로가 되곤 한다.
그러나 연은 절대 세가의 장로가 될 생각은 없었다. 연오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그는 세가가 지긋지긋했다.
“연아, 대답이 없구나.”
“알겠습니다, 형님.”
형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장로가 되는 건 안 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서운해하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연은 의원이 되고 싶었다. 의원이 되어서 사람들이 완쾌하는 모습, 또 그 완쾌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살고 싶었다. 물론 이렇게 말해 봤자 ‘네가 의술의 의 자나 아느냐’ 하는 반박이 돌아올 게 뻔했기에 연은 그런 속마음은 내놓지도 않았다.
“한위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네게 부탁이 있구나.”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난 못 하지만, 대신 너라도 한위를 좀 봐주렴. 아버지도 네가 한위를 챙겨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실 것이다. 나 역시 네가 한위 이야기를 꺼냈을 때 놀라웠으니까.”
연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연오가 놀라워할 만도 했다. 그동안 연이 행동해 오던 게 있었으니까. 그는 어렴풋한 기억 속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몇 년 전 연회에서 한위가 애타는 시선을 보낼 적에 자신이 야멸차게 고개를 돌렸던 걸 기억해 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니 연오의 시선은 대략…… 네가 이제야 사람이 되는구나, 그 정도에 가까웠다.
“주강에게도 언질을 줘 놓을 테니 필요하거나 급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을 전하거라.”
연이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형님 말씀은 남궁영명이 의심하지 않도록 나름 한위를 챙겨 주라는 건데……. 순간 그의 머릿속에 반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영명이 의심하지 않게 한위를 챙겨 주는 일이 생각보다 쉬울 것 같았다.
저녁을 마치고 연은 다시 찬 바람에 몸을 떨며 화월당을 나왔다. 자박자박 화정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이 멈칫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돌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한위가 어디서 지내더라? 미리 말을 해 주긴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어디 가십니까?”
“잠깐 들를 곳이 있어.”
연은 하오문의 노파가 지내는 낡은 누각으로 향했다. 가서 한위를 보게 되면 좋고, 아니면 환자 상태를 보고 오면 되는 것이다. 아까 연오가 주강에게 언질을 했으니 이제는 편히 보러 가도 된다.
‘그렇다면 주강은 형님의 말은 따라도 아버지에게 충성하지는 않는다는 의미군.’
흘깃 주강을 바라보니 그는 묵묵히 연을 따라가고 있었다. 연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연오는 원래도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이들 따르곤 했다. 그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예민하고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연조차도 그의 형은 좋아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낡은 누각이 코앞이었다. 아무리 봐도 누각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건물이다. 빛이 안에서 어른어른하고 한위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연이 조용히 한위야, 하고 불렀다. 용케도 들었는지 문이 벌컥 열리며 한위가 뛰쳐나왔다. 강아지처럼 기운 넘치는 녀석이었다.
“형님!”
잠시 화정당에 들러 먹을거리라도 들고 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위는 그저 연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은 모양이었다.
팔짝거리던 한위는 뒤늦게 주강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뻣뻣하게 굳었다. 주강은 조용하게 한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가에 꽤 많다는 건 알았지만 그중에 주강도 속하는 줄은 몰랐다.
“한위야, 들어가자.”
한위가 끄덕끄덕하면서도 끝까지 주강의 눈치를 봤다. 연은 뒷걸음질 쳐 슬그머니 누각 안으로 들어가는 한위의 뒤를 따랐다. 둘은 막 저녁을 먹고 있던 중인 듯했다. 식은 밥에 마른 나물 반찬 두 가지가 고작이라 연이 속으로 혀를 찼다. 겨우 병석을 털고 일어난 병자와 한참 자라는 중인 한위에게는 적절치 못한 식단이었다.
연이 들어서자 노파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돌연 큰절을 올렸다. 말은 없어도 치료해 준 것에 대해 크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연은 잠자코 노파의 팔을 잡아 앉혔다.
“살릴 수 있으니 살렸을 뿐입니다.”
그래도 노파는 몇 번이나 꾸벅거리다가 주섬주섬 이불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무언가 하여 받아 보았더니 대(帶, 허리띠)에 매달고 다니면 될 법한 장신구였다. 명주실과 무언지 모를 천을 엮어 만든 장신구를 보자 연이 눈을 깜박였다. 그는 이 비슷한 걸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스승님이 이런 걸 차고 다니셨지.’
번잡스러워 장신구는 하고 다니지 않는 분인데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물건을 보니 정감이 가, 연은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앞에서 대에 차 보이니 노파의 안색이 환해졌다.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를 표하고는 연이 손을 내밀었다. 노파가 한위를 한번 쳐다보았다가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맥을 짚어 보니 아직도 만성신염의 증상이 있기는 하나 훨씬 안정된 상태였다. 약을 꾸준히 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달포하고도 반은 약을 먹어야 몸이 낫을 것입니다. 약을 다 먹고 난 후에도 증상이 지속되면 한위를 통해 전달하도록 하십시오. 나이가 있으니 앞으로도 조심해야 하고요.”
말을 하면서도 연은 다시 허름한 상차림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걸 먹고 지내면서 제대로 회복되기란 힘든 일이었다. 방도 아직도 냉골이었고 이불도 홑이불이었다. 호롱불조차 그나마 연이 지난번에 주고 갔기에 방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방 안을 둘러보며 연은 대충 한위를 통해 챙겨 줄 것들을 유념해 두었다.
“한위야. 내일은 화정당 연못에 오지 말고 여기에 있어야 한다.”
진맥을 마친 연이 말하자 한위가 동그란 눈을 깜박거렸다. 얼굴에는 조금 불안한 빛이 떠올랐다.
“왜요……?”
“내일 사람이 찾아와 너를 내게 데려올 것인데…….”
말을 하면서도 연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가 세워 둔 계획은 전적으로 한위의 협조가 있어야 순조롭게 진행된다. 다행스럽게도 이런저런 설명을 하자 한위는 어떤 상황인지 알아서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이 물끄러미 총명한 아우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면 지금쯤 어떠했을까 하고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위도 벌떡 일어나 따라오려는 것을 연이 마저 저녁을 먹으라고 앉혀 두고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오니 주강은 아까 그대로 서 있었다. 어떻게 저리 미동도 없이 서 있을 수 있는지 연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수가 되면 다들 저런 걸 할 수 있게 되나 보지?
연은 다시 칼날 같은 바람을 가르며 화정당으로 향했다. 그가 겨울이란 존재에 대해 한 다섯 번쯤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였다.
“도련님.”
주강이 돌연 자신을 불렀다. 연은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지간해서는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 사람이 아니던가? 뒤를 돌아보자 주강이 한참 바라보더니 아닙니다, 하고 말을 마쳤다.
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 말도 안 할 거면 대체 뭐 하러 불렀어? 부른 이유가 아주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아마 한위와 어느 사이 저렇게 친해졌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둘은 침묵 속에 묵묵히 걸어 화정당에 도착했다. 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뜰에 우뚝 버티고 선 주강을 한번 보고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달리 추운 밤이었다.
***
“예?”
열심히 화정당 뜰을 비질하고 있던 하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되물었다. 연은 마루를 열심히 닦고 있던 하인과 물동이를 지고 나르고 있던 시비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연이 다시 지시했다.
“한을 데려오라고 했어.”
하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비질을 멈추고 공손히 말했다.
“도련님, 죄송하지만 한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아우 말이다.”
그제야 하인은 연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예민한 주인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게 분명한 태도로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한위 도련님을 말씀하시는지요.”
“이름이 한위던가? 그래, 아무튼 그 녀석.”
하던 가락이 있었기에 쌀쌀맞은 말투 내기는 쉬웠다. 하인은 허리를 공손히 숙여 보인 뒤 비질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화정당을 나섰다.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자 잠시 뒤에 하인이 한위를 데리고 왔다. 한위는 다소 어색하게 형님, 하고 인사했다. 연이 팔짱을 끼고 한위를 내려다보았다.
“네게 참 실망이 크다. 형님이 계시면 응당 매일 인사를 하러 와야 마땅한 법인데.”
이런 연은 처음 보는 한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뒤늦게 그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님…….”
“안녕 못 하면 어쩔 것이지?”
안 그래도 동그란 한위의 눈이 더 커졌다. 하인과 시비들의 얼굴에는 공통적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딱히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아마 그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일 터였다. 정도가 더 심한 수준으로 매일 모란에게 하던 짓이었으니까.
“형으로서 어리석은 아우에게 가르침을 줘야지 안 되겠다. 따라 들어오거라.”
한위는 고분고분하게 쪼르르 연의 뒤를 쫓아 들어왔다. 문을 닫고 이제는 둘을 보는 시선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연이 한위에게 방석 위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한위가 신기한 얼굴로 연의 방을 두리번거렸다.
연은 아침은 먹었냐고 물어보려다가 보나 마나 부실했을 게 빤하여 꿍쳐 놓았던 주먹밥을 내놓았다. 오늘 아침 식사로 만든 것이었다. 한위가 주먹밥을 와구와구 먹는 동안 그가 아이의 행색을 위아래로 살폈다. 오늘도 꼬질꼬질하다.
“한위야, 하루 종일 뭘 하고 지내지?”
“으음. 할미랑 밥 먹고……. 나가서 놀다가 연못 왔다가……. 저녁 먹으러 돌아가요.”
연은 게 눈 감추듯 주먹밥을 먹어 없애고 귤을 까고 있는 한위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놀기만 한다는 소리였다.
어젯밤 연은 한위를 찾아가 이제는 매일같이 화정당에 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 앞에서는 차게 대하지만 그게 진심은 아니며, 단둘이 있을 때의 태도가 진짜라는 것도 일러 주었다. 한위는 놀랍게도 연이 자신을 그렇게 대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가주님 때문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데 한위의 표정에는 한 치 원망도 없었다. 그게 그저 한위에게는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한위는 남궁영명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였다. 물론 연은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편이 좋겠다 여겼다. 아버지라고 부를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 와 있는 동안은 글을 좀 배워 보지 않겠니?”
“글이요?”
二章 : 형제 (3)
연은 노파가 손짓으로 한위에게 대화하는 걸 보며 미간을 접었다. 벙어리였구나. 연은 못 알아보는 손짓도 한위는 잘만 이해했다. 이제야 한위의 말투가 어눌한 것도 이해가 갔다. 벙어리 유모와의 교류가 주가 되었으니 말에 능숙할 리가 없었다.
“응, 맞아. 형님이야!”
노파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한위가 해맑게 외쳤다. 노파의 얼굴 가득한 근심 걱정은 보이지도 않는가 보지……. 아무튼 볼일을 모두 마친 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슬으슬한 게 영 몸이 좋지 않았다. 그에게는 따뜻한 방이 필요했다.
“내일 또 보자꾸나, 한위야.”
“네에, 형님!”
한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둘이 당과도 나눠 먹을 수 있겠지. 흘끗 두 사람을 보고는 연이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도란도란 한위의 말소리가 울리는 낡은 누각을 바라보았다. 환자가 회복되는 것을 보는 건 언제나 좋았다. 그 광경은 그의 마음을 채워 주곤 했다.
화정당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어두침침한 길을 돌아오면서 그는 한 번 더 넘어졌다. 이번에는 밤눈이 어둡고 급히 걸어서가 아니라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담장을 휙 넘다가, 지난번 백모란에게 패대기쳐져 다쳤던 발목도 다시 삐었다. 나무를 짚고 서서 가만히 욕설을 지껄이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둑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도련님.”
연은 이번에는 놀라서 작게 헉,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그가 아무렇지 않게 시치미를 뗐다.
“무슨 일이야?”
쌀쌀맞게 묻자 주강의 시선이 잠시 연의 다리에 향했다가 이내 거두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답하고는 주강이 다시 조용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를 꽉 문 연은 힘겹게 자신의 따뜻한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서 보니 손바닥이며 무릎이 죄다 까져 있었다. 한숨을 쉬면서 이불 안으로 기어들었다.
다음 날 연은 끙끙 앓느라 늦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작게 기침을 한 뒤 무거운 몸을 일으켰을 땐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몸이 영 좋지를 않았지만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시비가 소세용으로 받아다 놓은 뜨거운 물을 놓고 약재를 잘게 쪼개고 썰었다. 한위에게 줄 육미지황환(六味地黃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부러진 팔 때문에 한쪽 손으로 약을 빚느라 초반에는 애를 좀 먹었다. 그래도 어떻게 요령을 익혀 몇십 개를 동글동글 잘 빚어 놓으니 벌써 점심이었다.
시비들이 점심을 가지고 오기 전 연이 환약을 잘 싸서 치워 두었다. 오늘도 한위 줄 주먹밥을 만들 생각이었다. 한위는 좀 잘 먹을 필요성이 있었다. 연이 점심을 가지고 온 시비에게 일렀다.
“연오 형님에게 시간 괜찮으면 단둘이 저녁을 같이 먹지 않겠냐고 전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연이 먼저 연오에게 식사를 같이하자고 청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이번에는 할 말이 있었기에 꼭 같이 식사를 해야 했다. 잠시 후 돌아온 시비는 연오가 흔쾌히 승낙했노라 전해 왔다.
연이 주먹밥이며 환약을 싸서 나가자 한위가 몸을 쭈그리고 앉아 연못에 작은 조약돌을 던지며 놀고 있었다. 밥인 줄 안 잉어들이 잽싸게 다가왔다가 느릿느릿 다시 돌아가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한위야, 하고 부르니 한위가 반색하며 달려왔다.
“형님.”
보따리를 풀자마자 한위는 주먹밥이며 먹거리를 여지없이 손으로 집어 와구와구 먹었다. 오늘은 기운을 좀 차린 노파가 신경을 썼는지 옷이 바뀌어 있었고 얼굴도 덜 꼬질꼬질했다. 머리카락도 보송해 보였다. 연은 마음 놓고 한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위야. 돌아갈 때 이걸 꼭 가지고 가렴. 뭉그러지거나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들고 가야 한다.”
한위가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킁 냄새를 맡아 보더니 냄새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미간을 팍 찡그렸다. 약간 불안했던 연이 덧붙였다.
“약이니 가지고 가서 아침저녁으로 꼭 두 번씩 먹으라고 해.”
“할미에게?”
“그래. 그래야 할미가 다시 그렇게 아프진 않을 거야.”
눈을 휘둥그레 뜬 한위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는 연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푼 듯했다. 아마도 자신에게 이렇게 대해 주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형이니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겠지. 그러나 가족이라고 해서 다 이러지는 않는 것을. 연이 쓰게 웃었다. 남보다도 못할뿐더러 원수 같은 가족도 있는 법이다.
연은 가만히 앉아 한위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혼자서도 잘 놀았다. 아니, 혼자 노는 방법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한위는 제법 한참을 연의 곁에서 머물다가 갔다. 수풀 속으로 기어 들어가면서도 헤어지기 싫은지 내내 아쉬운 얼굴을 했다. 딱히 놀아 준 것도 없이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연은 한위가 대체 어디로 드나드는지 알기 위해 수풀이며 담장 근처를 뒤적거리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시비의 목소리에 돌아섰다. 뭐, 언젠가는 알아내는 날이 오겠지……. 지금은 형님을 뵐 때였다.
“어서 오거라. 어쩐 일로 네가 먼저 나와 식사를 하자고 하는구나.”
화월당에 당도하니 연오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오랜만에 먼저 만남을 청한 아우가 퍽 반가운 눈치였다. 오늘도 화월당에는 처리해야 할 일거리가 가득이었다. 연오는 두루마리 한 무더기를 밀어 내며 탁자에 앉았다. 소면을 시작으로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잘 구워져 반들거리는 오리구이는 입맛이 없는 연조차도 젓가락을 뻗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형님이 신경 좀 쓰셨구나.’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려니 연은 다소 양심이 찔렸다. 그러나 몰랐으면 모를까 근래 들어 알게 된 사실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을 쯤에 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연오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형님, 실은 궁금한 것이 있어 이렇게 식사를 함께하자고 한 것입니다.”
“궁금한 것? 얼마든지 물어보아라.”
술을 훌쩍 마시고는 연오도 잔을 내려놓았다. 연은 연오를 잠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연을 여러모로 신경 써 주곤 했다. 의원이며 진귀한 약에, 못해도 며칠에 한 번은 얼굴을 보며 어찌 지내는지 물어봐 주었다. 주강을 붙여 신변에 이상이 있거든 바로 알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지금도 연을 향하는 눈빛에는 염려와 걱정이 들어 있었다. 이미 성인이 된 사내에게는 분명한 과보호였으나, 그 과보호 덕에 연은 그나마 남궁세가가 완전히 미워지지 않았다. 영명의 남궁세가와 연오의 남궁세가는 다를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일에는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완벽하고 곧다고만 느껴지는 형님이었기에 더욱이 그랬다.
“얼마 전에 우연히 한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위의 이야기를 꺼내자 아니나 다를까 연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한위가 세가에서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
“먹을 것을 주는 사람도 없어 굶고 다닌 모양입니다. 어찌 저와 이리 처지가 다릅니까? 한위나 저나 같은 아우가 아닙니까?”
그 말을 하면서 연의 마음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한위는 연오에게만 동생이 아니라 그에게도 동생이었다. 모란으로 지내면서 뉘우침과 반성이 있었으니 돌아와서 이렇게 챙기는 것이지, 그런 경험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한위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가식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가식적이어도 한위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진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연의 질문에 연오는 한참 침묵하더니 조용히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도 한위가 어찌 지내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굶고 다니는 줄은 몰랐구나.”
“형님.”
“나름 신경을 써 준다고 써 줬는데 한참 부족하지. 안다.”
연오가 신경을 써 주는 정도가 분명 연에게 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는 꼬박꼬박 연을 식사 자리에 부르면서도 한위는 그렇지 않았다. 세가에 충성스러운 시비나 하인들을 배치해 주지도 않았고, 유일하게 한위를 돌보는 노파가 다 죽어 가도 방치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는 연오의 얼굴은 괴로워 보였다. 연오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연아. 아버지는 한위를 싫어하신다.”
단호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드물게도 연오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야.”
연오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연이 식어 가는 음식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그분의 아들로서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받는 것도 못마땅해하시는 정도지. 심지어 나의 도움까지도 말이다.”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오는 곧은 사람이었다. 그는 의로운 행동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하곤 했다. 그런 연오에게 있어 옳은 일 중의 하나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궁영명이 어디 제대로 된 부친이던가? 연은 연오가 영명의 부당한 지시로 인해 심적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몇 번이나 지켜봤었다. 바로 지금처럼.
“내가 사람을 붙여 돌봐 주려고 할 때마다 한위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감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누가 그랬는지는 자명한 일이지.”
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위가 싫다면 대체 왜 세가 내에 데리고 있는가? 다들 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남궁영명에게는 자식들이 더 있었다.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나 자식이라 하여 반드시 세가 내로 들이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연오도 그 이유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한위를 내보내려고 한다. 세가는 한위에게 절대 좋은 곳이 아니야.”
연은 연오의 속마음을 읽었다. 그가 생략한 말 또한 알아차렸다. ‘남궁영명이 살아 있는 세가는’인 것이겠지. 그건 연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간 많이 답답했던지 연오가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나중에 한위를 일단 남궁세가와 연이 닿은 소박한 상회에 보내 일을 배우게 한 다음, 자신이 정식으로 가주 자리를 물려받으면 한위가 원하는 일을 하게 할 생각이라고 했다.
“영특한 녀석이니 뭘 해도 잘 해낼 수 있겠지.”
연오가 쓰게 웃으며 다시 술잔을 비웠다. 무공으로 술기운을 밀어 내 등 뒤에서 미약한 아지랑이가 일었다. 소가주로서 그는 술을 마실 수는 있어도 취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마침내 오리고기를 한 입 먹은 연이 일단 칭찬했다.
“훌륭하네요.”
“그렇지? 나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요리란다.”
맛있는 오리구이에 대한 칭찬으로 분위기가 밝아지자 연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그럼…… 한위 나갈 때 저도 같이 나갈까요? 한위는 세상 물정도 전혀 모를 테고…….”
연오가 정색하자 연이 속으로 이크, 하고 혀를 찼다. 연을 아끼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엄격한 손위 형제이자 소가주였다. 그가 탁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미간만 찌푸렸는데도 기세가 제법 매서웠다.
“한위와 네가 같으냐? 그런 소릴 하려거든 좀 강건해지고 나서나 말하거라.”
“제 건강이…… 뭐가 어떻습니까?”
내심 발끈하여 대꾸하면서도 말 같잖은 소리라는 건 스스로 잘 알았다. 하룻밤 잠시 한위와 짧은 밤 마실 나갔다고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다다를 때까지 앓는 몸뚱어리가 아니던가? 그래서 겨울 대신 봄에 세가를 나가려고 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건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한위 내보낼 때 사람 딸려 보낼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아라.”
연은 세상 물정 모른다는 말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모란의 몸으로 살면서 그는 세상의 쓴맛을 제법 보았다. 남궁세가의 공자로 살 때는 실로 상상도 한 적 없던, 그런 쓴맛이었다. 어미를 잃은 농사꾼의 아들이란 그런 위치였다. 사부인 진은록이 곁에 있었기에 그나마 그 삶이 좋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봄부터는 배움을 받거라. 내가 보기에 너는 나중에 세가의 장로가 되는 것이 좋겠구나.”
세가의 장로라……. 그다지 놀라운 제안은 아니었다. 세가에서 장로란 무슨 위치에 있던가? 가주의 측근이며 방계이든 직계이든 남궁세가와 핏줄로 얽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솔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동시에 그에 걸맞은 영화를 누렸다. 보통은 연처럼 장남 외의 형제자매들이 장로가 되곤 한다.
그러나 연은 절대 세가의 장로가 될 생각은 없었다. 연오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그는 세가가 지긋지긋했다.
“연아, 대답이 없구나.”
“알겠습니다, 형님.”
형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장로가 되는 건 안 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서운해하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연은 의원이 되고 싶었다. 의원이 되어서 사람들이 완쾌하는 모습, 또 그 완쾌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살고 싶었다. 물론 이렇게 말해 봤자 ‘네가 의술의 의 자나 아느냐’ 하는 반박이 돌아올 게 뻔했기에 연은 그런 속마음은 내놓지도 않았다.
“한위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네게 부탁이 있구나.”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난 못 하지만, 대신 너라도 한위를 좀 봐주렴. 아버지도 네가 한위를 챙겨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실 것이다. 나 역시 네가 한위 이야기를 꺼냈을 때 놀라웠으니까.”
연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연오가 놀라워할 만도 했다. 그동안 연이 행동해 오던 게 있었으니까. 그는 어렴풋한 기억 속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몇 년 전 연회에서 한위가 애타는 시선을 보낼 적에 자신이 야멸차게 고개를 돌렸던 걸 기억해 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니 연오의 시선은 대략…… 네가 이제야 사람이 되는구나, 그 정도에 가까웠다.
“주강에게도 언질을 줘 놓을 테니 필요하거나 급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을 전하거라.”
연이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형님 말씀은 남궁영명이 의심하지 않도록 나름 한위를 챙겨 주라는 건데……. 순간 그의 머릿속에 반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영명이 의심하지 않게 한위를 챙겨 주는 일이 생각보다 쉬울 것 같았다.
저녁을 마치고 연은 다시 찬 바람에 몸을 떨며 화월당을 나왔다. 자박자박 화정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이 멈칫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돌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한위가 어디서 지내더라? 미리 말을 해 주긴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어디 가십니까?”
“잠깐 들를 곳이 있어.”
연은 하오문의 노파가 지내는 낡은 누각으로 향했다. 가서 한위를 보게 되면 좋고, 아니면 환자 상태를 보고 오면 되는 것이다. 아까 연오가 주강에게 언질을 했으니 이제는 편히 보러 가도 된다.
‘그렇다면 주강은 형님의 말은 따라도 아버지에게 충성하지는 않는다는 의미군.’
흘깃 주강을 바라보니 그는 묵묵히 연을 따라가고 있었다. 연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연오는 원래도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이들 따르곤 했다. 그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예민하고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연조차도 그의 형은 좋아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낡은 누각이 코앞이었다. 아무리 봐도 누각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건물이다. 빛이 안에서 어른어른하고 한위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연이 조용히 한위야, 하고 불렀다. 용케도 들었는지 문이 벌컥 열리며 한위가 뛰쳐나왔다. 강아지처럼 기운 넘치는 녀석이었다.
“형님!”
잠시 화정당에 들러 먹을거리라도 들고 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위는 그저 연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은 모양이었다.
팔짝거리던 한위는 뒤늦게 주강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뻣뻣하게 굳었다. 주강은 조용하게 한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가에 꽤 많다는 건 알았지만 그중에 주강도 속하는 줄은 몰랐다.
“한위야, 들어가자.”
한위가 끄덕끄덕하면서도 끝까지 주강의 눈치를 봤다. 연은 뒷걸음질 쳐 슬그머니 누각 안으로 들어가는 한위의 뒤를 따랐다. 둘은 막 저녁을 먹고 있던 중인 듯했다. 식은 밥에 마른 나물 반찬 두 가지가 고작이라 연이 속으로 혀를 찼다. 겨우 병석을 털고 일어난 병자와 한참 자라는 중인 한위에게는 적절치 못한 식단이었다.
연이 들어서자 노파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돌연 큰절을 올렸다. 말은 없어도 치료해 준 것에 대해 크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연은 잠자코 노파의 팔을 잡아 앉혔다.
“살릴 수 있으니 살렸을 뿐입니다.”
그래도 노파는 몇 번이나 꾸벅거리다가 주섬주섬 이불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무언가 하여 받아 보았더니 대(帶, 허리띠)에 매달고 다니면 될 법한 장신구였다. 명주실과 무언지 모를 천을 엮어 만든 장신구를 보자 연이 눈을 깜박였다. 그는 이 비슷한 걸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스승님이 이런 걸 차고 다니셨지.’
번잡스러워 장신구는 하고 다니지 않는 분인데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물건을 보니 정감이 가, 연은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앞에서 대에 차 보이니 노파의 안색이 환해졌다.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를 표하고는 연이 손을 내밀었다. 노파가 한위를 한번 쳐다보았다가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맥을 짚어 보니 아직도 만성신염의 증상이 있기는 하나 훨씬 안정된 상태였다. 약을 꾸준히 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달포하고도 반은 약을 먹어야 몸이 낫을 것입니다. 약을 다 먹고 난 후에도 증상이 지속되면 한위를 통해 전달하도록 하십시오. 나이가 있으니 앞으로도 조심해야 하고요.”
말을 하면서도 연은 다시 허름한 상차림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걸 먹고 지내면서 제대로 회복되기란 힘든 일이었다. 방도 아직도 냉골이었고 이불도 홑이불이었다. 호롱불조차 그나마 연이 지난번에 주고 갔기에 방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방 안을 둘러보며 연은 대충 한위를 통해 챙겨 줄 것들을 유념해 두었다.
“한위야. 내일은 화정당 연못에 오지 말고 여기에 있어야 한다.”
진맥을 마친 연이 말하자 한위가 동그란 눈을 깜박거렸다. 얼굴에는 조금 불안한 빛이 떠올랐다.
“왜요……?”
“내일 사람이 찾아와 너를 내게 데려올 것인데…….”
말을 하면서도 연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가 세워 둔 계획은 전적으로 한위의 협조가 있어야 순조롭게 진행된다. 다행스럽게도 이런저런 설명을 하자 한위는 어떤 상황인지 알아서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이 물끄러미 총명한 아우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면 지금쯤 어떠했을까 하고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위도 벌떡 일어나 따라오려는 것을 연이 마저 저녁을 먹으라고 앉혀 두고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오니 주강은 아까 그대로 서 있었다. 어떻게 저리 미동도 없이 서 있을 수 있는지 연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수가 되면 다들 저런 걸 할 수 있게 되나 보지?
연은 다시 칼날 같은 바람을 가르며 화정당으로 향했다. 그가 겨울이란 존재에 대해 한 다섯 번쯤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였다.
“도련님.”
주강이 돌연 자신을 불렀다. 연은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지간해서는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 사람이 아니던가? 뒤를 돌아보자 주강이 한참 바라보더니 아닙니다, 하고 말을 마쳤다.
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 말도 안 할 거면 대체 뭐 하러 불렀어? 부른 이유가 아주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아마 한위와 어느 사이 저렇게 친해졌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둘은 침묵 속에 묵묵히 걸어 화정당에 도착했다. 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뜰에 우뚝 버티고 선 주강을 한번 보고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달리 추운 밤이었다.
“예?”
열심히 화정당 뜰을 비질하고 있던 하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되물었다. 연은 마루를 열심히 닦고 있던 하인과 물동이를 지고 나르고 있던 시비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연이 다시 지시했다.
“한을 데려오라고 했어.”
하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비질을 멈추고 공손히 말했다.
“도련님, 죄송하지만 한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아우 말이다.”
그제야 하인은 연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예민한 주인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게 분명한 태도로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한위 도련님을 말씀하시는지요.”
“이름이 한위던가? 그래, 아무튼 그 녀석.”
하던 가락이 있었기에 쌀쌀맞은 말투 내기는 쉬웠다. 하인은 허리를 공손히 숙여 보인 뒤 비질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화정당을 나섰다.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자 잠시 뒤에 하인이 한위를 데리고 왔다. 한위는 다소 어색하게 형님, 하고 인사했다. 연이 팔짱을 끼고 한위를 내려다보았다.
“네게 참 실망이 크다. 형님이 계시면 응당 매일 인사를 하러 와야 마땅한 법인데.”
이런 연은 처음 보는 한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뒤늦게 그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님…….”
“안녕 못 하면 어쩔 것이지?”
안 그래도 동그란 한위의 눈이 더 커졌다. 하인과 시비들의 얼굴에는 공통적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딱히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아마 그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일 터였다. 정도가 더 심한 수준으로 매일 모란에게 하던 짓이었으니까.
“형으로서 어리석은 아우에게 가르침을 줘야지 안 되겠다. 따라 들어오거라.”
한위는 고분고분하게 쪼르르 연의 뒤를 쫓아 들어왔다. 문을 닫고 이제는 둘을 보는 시선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연이 한위에게 방석 위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한위가 신기한 얼굴로 연의 방을 두리번거렸다.
연은 아침은 먹었냐고 물어보려다가 보나 마나 부실했을 게 빤하여 꿍쳐 놓았던 주먹밥을 내놓았다. 오늘 아침 식사로 만든 것이었다. 한위가 주먹밥을 와구와구 먹는 동안 그가 아이의 행색을 위아래로 살폈다. 오늘도 꼬질꼬질하다.
“한위야, 하루 종일 뭘 하고 지내지?”
“으음. 할미랑 밥 먹고……. 나가서 놀다가 연못 왔다가……. 저녁 먹으러 돌아가요.”
연은 게 눈 감추듯 주먹밥을 먹어 없애고 귤을 까고 있는 한위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놀기만 한다는 소리였다.
어젯밤 연은 한위를 찾아가 이제는 매일같이 화정당에 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 앞에서는 차게 대하지만 그게 진심은 아니며, 단둘이 있을 때의 태도가 진짜라는 것도 일러 주었다. 한위는 놀랍게도 연이 자신을 그렇게 대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가주님 때문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데 한위의 표정에는 한 치 원망도 없었다. 그게 그저 한위에게는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한위는 남궁영명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였다. 물론 연은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편이 좋겠다 여겼다. 아버지라고 부를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 와 있는 동안은 글을 좀 배워 보지 않겠니?”
“글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