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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멸망악심꽃 1
1화
서장
<서천꽃밭 본풀이>
까마득한 옛날, 상제는 서천의 박토로 김진성을 보내 땅을 일구게 하였다. 그때 상제는 김진성에게 메마른 땅을 살릴 꽃씨를 여러 개 내주었다. 피어날 꽃에 대해 적은 도감도 하사했다.
씨앗과 도감을 받아 서천에 내려온 김진성은, 3년은 돌을 고르고 3년은 흙을 엎고 3년은 거름을 뿌렸다. 그 후 상제가 준 꽃씨를 땅에 뿌렸다.
이 씨앗들은 백 일 하고도 아흐레를 땅 밑에서 보낸 후 싹이 되어 스스로 솟아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중 몇몇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소년 소녀도 있고 청춘 남녀도 있고 할미 할아비도 있었다. 갑자기 솟아났기 때문에 김진성은 누가 어떤 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김진성은 그들을 ‘이룰싹’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이룰싹 전부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룰싹들은 서천의 땅을 보살피고, 서천에 놀러 온 하늘 아이들을 돌보며 자기가 피어날 날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서천에는 귀한 꽃들이 피어, 잎을 늘어뜨리고 꽃가루를 뿌리고 새로운 씨앗을 떨어뜨렸다. 서천의 박토는 점차 꽃밭으로 변해 갔다. 그곳에서 김진성은 꽃감관이 되어 이룰싹들과 함께 서천을 가꾸었다.
이것이 하늘 옥황과 땅속 황천 사이 어드메 있는, 서천꽃밭의 시작이다.
<서천의 유년>
새벽이슬이 잠을 깨웠다. 이서는 반짝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시 그대로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고, 검은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올려 비녀를 꽂았다. 이서는 아직 열 살이었지만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기른 상태였다.
화창한 꽃밭, 멀지 않은 곳에 샛바람동자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또 꽃들에게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이서는 작은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열심히 불렀다.
“오빠! 샛바람 오빠!”
샛바람동자가 이서의 목소리를 듣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이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쉭, 잠깐 바람이 부나 싶었는데, 어느새 샛바람동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안녕, 이서.”
“응, 오빠. 와, 좋은 향기 나.”
“그래?”
샛바람동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푸른 옷자락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아, 하고 환하게 웃었다.
“방금 여울이 만나고 왔거든.”
“여울이가 벌써 피었어?”
“응, 복줄꽃이라던데.”
“우와, 복줄꽃!”
이서는 벌떡 일어나 샛바람동자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냄새를 맡았다. 아주 넉넉하고 푸근한 냄새가 났다. 이게 복줄꽃 향기구나. 이서는 마치 자기가 핀 것처럼 들떠서 방방 뛰었다.
“개화열(開花熱)이 올랐다는 말은 들었는데 벌써 필 줄은 몰랐어. 여울이가 복줄꽃이었구나. 오늘 만나러 가야지!”
“데려다줄까?”
“어, 오빠 아직도 나 안을 수 있어?”
샛바람동자는 아주 가소로운 말을 들었다는 듯 픽 웃었다. 그리고 읏차, 하고 이서의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이서는 웃으며 샛바람동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동자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서천꽃밭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천상의 사계와 절기를 따라 꽃들은 피고 지고 또 피었다. 이서는 이룰싹이었지만, 평범한 꽃들도 아주 좋아했다. 특히 이서는 웃음꽃이 좋았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작고 샛노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절로 즐거워졌다.
나도 복줄꽃이면 좋을 거야, 나는 언제쯤 피는 걸까, 이서는 한참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샛바람동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오빠, 오빠, 잠깐만.”
“왜?”
“저기 손님 왔어.”
이서가 손가락으로 저 멀리를 가리켰다. 버드나무 샘이었다. 버드나무 잎사귀 아래, 화려한 적의를 입은 남자와 백의를 입은 소년이 약간 거리를 둔 채 서 있었다.
“아, 천년장자네.”
샛바람동자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서는 고개를 돌려 샛바람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서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아무래도 꽃감관님을 모셔 와야겠어. 여기서 잠깐 기다려. 빨리 다녀와야 할 것 같으니까.”
“나 여기 혼자 있어?”
“응. 꼼짝도 하지 말고.”
그러더니 샛바람동자는 또 확 사라져 버렸다. 바람 언니 오빠들은 마음먹고 움직이면 보이지도 않는다니까. 이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손님들에게 무척 관심이 갔다.
남자와 소년은 조금 서먹해 보였다. 이서는 제 또래의 소년을 흘끗거렸다. 왜 둘이 이야기도 안 하지? 샛바람 오빠가 천년장자라는 사람 이야기를 할 때 목소리가 안 좋았는데. 속으로만 중얼중얼하며 둘을 훔쳐보는데,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날 봤어!
이서는 화들짝 놀라 굳어졌다.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소년이 계속 이서를 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서는 괜히 죄지은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때, 이서의 어깨에 크고 따뜻한 손이 올라왔다.
“이서야.”
“꽃감관님!”
이서가 팔딱 뛰어 꽃감관 진성의 허리를 안았다. 진성은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빨리 오셨네요?”
“샛바람동자가 서두르라고 해서. 천년장자가 왔구나.”
진성은 조금 심산한 얼굴로 손님들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적의의 천년장자도 그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천년장자는 함께 온 소년을 제자리에 남겨 두고, 혼자 훌쩍 이서와 진성의 앞까지 왔다.
“꽃감관, 오래간만이외다.”
“그렇군요.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로 오셨는지.”
“일이랄 것까지야 있겠소. 그저 옛 친우를 보러 온 것이지.”
그렇게 말하고 천년장자가 크게 웃었다. 입을 벌리고 웃는 천년장자 앞에서, 진성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이서는 진성의 허리를 안았던 팔을 풀고 그의 뒤에 숨었다. 천년장자의 웃음은, 아주 호방하고 시원했지만 이상하게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이서는 고개만 쏙 내밀고 천년장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저를 친우로 생각하신다니 영광이군요. 아드님과 함께 오시죠. 얼마 전에 상제께서 귀한 천도(天桃)를 몇 개 내려 주셨습니다.”
“정말 귀한 걸 받았구려. 아들은 되었소. 제 놈도 사내인데, 꽃구경이나 실컷 하라지.”
이서는 약간 움찔했다. 아들 이야기를 할 때, 천년장자가 약간 얼굴을 찡그린 걸 본 탓이었다. 즐거운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년장자를 보자, 그도 이서의 눈길을 느꼈다.
“뒤에 있는 아이는 무슨 꽃인지, 아직 피진 않은 모양이오.”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이서가 화들짝 놀랐다. 진성은 뒤에 숨은 이서의 손을 잡아 옆으로 데려왔다.
“인사하렴. 천년계곡의 천년장자시다.”
“안녕하세요.”
이서는 간신히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러면서도 진성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 아이는 이서입니다. 원래 무척 귀여운 아이인데, 처음 본 손님 앞이라 그런지 부끄럼을 타나 봅니다.”
“그런 모양이오. 이서야, 날 한번 봐라. 아주 어여쁘구나. 올해 몇 살인고?”
이서는 도움을 구하듯 진성을 쳐다보았다. 열 살이에요, 라고 대답하는 게 어려운 건 아니었다. 손님들 앞에서 이 정도로 부끄럼을 타는 성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천년장자 앞에서는 어쩐지 주눅이 들었다. 기세가 너무 강렬했다.
“열 살입니다. 자제분과 같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흠, 그렇군. 아직 피지도 않았는데 미색이 이리……. 무슨 꽃일지 짐작이 가오?”
천년장자가 이서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천년장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며 어깨를 굳혔다.
“저도 피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음기가 짙지 않으니 운우(남녀 간의 육체적인 관계)꽃은 아닐 터이고.”
천년장자는 농담처럼 말하고 웃었다. 진성은 그쯤에서 이서의 등을 밀어 저쪽으로 보냈다.
“이서야, 가서 저 소년과 놀고 있어라. 보고 싶다는 데가 있으면 잘 안내해 주고.”
“네, 꽃감관님.”
이서는 약간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갔다. 천년장자는 고개를 돌려 눈으로 그 뒷모습을 좇았다. 진성은 혀를 차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진성에게 있어, 천년장자는 그리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그래도 천년계곡을 다스리는 자니 함부로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도 진성은 천년장자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아이들은 놀게 두고, 일단 들어가시지요.”
진성은 웃으며 권했다. 천년장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만 걸음을 옮겼다.
이서는 소년 쪽으로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진성과 천년장자가 멀어지는 게 보였다. 이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새하얀 옷을 입은 소년은 버드나무 아래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물장난을 치거나 나무를 살펴보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 소년은 이서가 다가오는 걸 보고 그쪽에 눈을 고정했다.
“안녕.”
이서가 우물쭈물 인사했다. 이 소년은 천년장자의 아들이라고 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버지와 그리 많이 닮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유도 모르고 안심이 되어, 이서는 좀 더 바짝 다가갔다.
“너 이름이 뭐야?”
소년은 물끄러미 이서를 보았다. 그러다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백우. 넌?”
“난 이서야. 너랑 나랑 동갑이래. 난 여기 사는데, 이룰싹이라 아직 무슨 꽃인지는 몰라.”
“예쁜 꽃일 거야.”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귀에 쏙 들어왔다. 늘 저가 무슨 꽃으로 필까 기대하는 이서에게는 무척 듣기 좋은 말이었다.
이서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백우는 덧붙였다.
“서천의 꽃들은 모두 예쁘다고 들었어.”
“너 서천꽃밭엔 처음이지?”
“응.”
“구경시켜 줄까?”
“여기서 아버지를 기다려야 돼.”
“그래도 꽃감관님이 너 가고 싶다는 데 있으면 데려다주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했는데도 백우는 반응이 없었다. 원래 말수가 적은가? 이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이서는, 이 말간 얼굴의 단정한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지 말고 가자. 오늘 내 친구가 새로 피었단 말이야. 복줄꽃이래. 향기 정말 좋던데.”
“난 괜찮아.”
백우는 고개를 젓고, 조금 웃었다. 즐거워서 웃는다기보다는 이서의 마음을 생각해 웃는 듯했다. 백우는 아버지가 사라진 방향을 한번 바라보았다. 이서는 그런 백우를 보다가 털썩 제자리에 앉았다.
“그래, 그럼 여기서 놀자.”
“나 혼자 있어도 돼.”
“같이 놀면 좋잖아.”
그렇게 말하고 이서는 백우의 손을 잡아 옆에 앉혔다. 버드나무 샘에 두 사람의 모습이 거꾸로 비쳤다.
백우가 샘에 눈길을 주자, 이서는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샛바람 오빠가 그러는데, 이 샘 바닥에 용이 산대. 별로 안 깊어 보이는데 되게 깊은가 봐.”
“용?”
“응. 가끔 꽃감관님이 밖에 나가실 때 타고 다니라고 상제님이 주셨대. 근데 꽃감관님은 거의 밖에 안 나가시거든. 나가도 용을 타진 않으시고.”
그런 이야기를 나눈 뒤 둘은 한참을 앉아서 놀았다. 이서는 샘가의 자갈을 주워, 백우에게 공기놀이를 알려 주었다. 백우는 작은 손으로 한참을 쩔쩔맸다. 백의를 차려입은 남자아이가 앉은 채 자갈을 줍느라 조물조물하는 걸 보고 있으니 이서는 기분이 좋아졌다.
공기놀이가 지겨워진 후에는 샘 가까이 핀 꽃들을 알려 주었다. 이서는 신이 났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걸 알려 주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백우는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무얼 설명해도 관심 있는 얼굴로 열심히 들어 주었다.
“이건 꿈꿀꽃이야. 여기 잘 보면, 꽃잎에 줄무늬가 있잖아. 이 줄무늬가 이렇게 똑바르면 길몽꽃이고, 비뚤비뚤하면 흉몽꽃. 근데 길몽꽃도 너무 많이 사용하면 안 좋대.”
“써 본 적 있어?”
“아니, 아직. 꽃감관님이 꽃을 막 쓰지 말랬어.”
그렇구나, 하고 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이걸 어떻게 다 알아?”
“꽃감관님이 알려 주셨어. 아직 모르는 꽃도 많지만.”
그렇게 이서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잠들꽃과 망각꽃, 복줄꽃과 하늘날꽃, 말못할꽃과 귀먹을꽃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백우는 지겨운 기색도 없이 그 설명을 들었다. 꽃에 꽤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백우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핀 꽃을 가리켰다.
“저건 뭐야?”
이서는 백우의 손을 잡고 그 꽃 가까이 다가갔다.
꽃잎은 주황색이었다. 꽃은 앉은뱅이처럼 바닥에 바짝 붙어 있었는데, 꽃잎이 삐죽삐죽했다. 처음 보는 꽃이었다. 이서라고 서천꽃밭의 모든 꽃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 이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 꽃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코를 가까이 대고 향기를 맡아 봤지만 그래도 무슨 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안 알려 줘도 돼.”
백우 딴에는 배려한다고 한 소리였지만 그게 열 살 소녀 이서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뭔지 알려 줄게!”
“안 그래도 되는데…….”
“나도 무슨 꽃인지 궁금해서 그래.”
이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뚝, 꽃을 꺾었다. 서천의 꽃답게 꽃은 꺾이자마자 더 환하게 빛났다. 이서는 꽃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바짝 붙어 선 백우에게 꽃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막 꺾어도 돼?”
“당연히 안 되지.”
백우는 말문이 막힌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서는 개의치 않고 헤헤 웃었다.
1화
서장
<서천꽃밭 본풀이>
까마득한 옛날, 상제는 서천의 박토로 김진성을 보내 땅을 일구게 하였다. 그때 상제는 김진성에게 메마른 땅을 살릴 꽃씨를 여러 개 내주었다. 피어날 꽃에 대해 적은 도감도 하사했다.
씨앗과 도감을 받아 서천에 내려온 김진성은, 3년은 돌을 고르고 3년은 흙을 엎고 3년은 거름을 뿌렸다. 그 후 상제가 준 꽃씨를 땅에 뿌렸다.
이 씨앗들은 백 일 하고도 아흐레를 땅 밑에서 보낸 후 싹이 되어 스스로 솟아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중 몇몇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소년 소녀도 있고 청춘 남녀도 있고 할미 할아비도 있었다. 갑자기 솟아났기 때문에 김진성은 누가 어떤 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김진성은 그들을 ‘이룰싹’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이룰싹 전부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룰싹들은 서천의 땅을 보살피고, 서천에 놀러 온 하늘 아이들을 돌보며 자기가 피어날 날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서천에는 귀한 꽃들이 피어, 잎을 늘어뜨리고 꽃가루를 뿌리고 새로운 씨앗을 떨어뜨렸다. 서천의 박토는 점차 꽃밭으로 변해 갔다. 그곳에서 김진성은 꽃감관이 되어 이룰싹들과 함께 서천을 가꾸었다.
이것이 하늘 옥황과 땅속 황천 사이 어드메 있는, 서천꽃밭의 시작이다.
<서천의 유년>
새벽이슬이 잠을 깨웠다. 이서는 반짝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시 그대로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고, 검은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올려 비녀를 꽂았다. 이서는 아직 열 살이었지만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기른 상태였다.
화창한 꽃밭, 멀지 않은 곳에 샛바람동자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또 꽃들에게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이서는 작은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열심히 불렀다.
“오빠! 샛바람 오빠!”
샛바람동자가 이서의 목소리를 듣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이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쉭, 잠깐 바람이 부나 싶었는데, 어느새 샛바람동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안녕, 이서.”
“응, 오빠. 와, 좋은 향기 나.”
“그래?”
샛바람동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푸른 옷자락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아, 하고 환하게 웃었다.
“방금 여울이 만나고 왔거든.”
“여울이가 벌써 피었어?”
“응, 복줄꽃이라던데.”
“우와, 복줄꽃!”
이서는 벌떡 일어나 샛바람동자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냄새를 맡았다. 아주 넉넉하고 푸근한 냄새가 났다. 이게 복줄꽃 향기구나. 이서는 마치 자기가 핀 것처럼 들떠서 방방 뛰었다.
“개화열(開花熱)이 올랐다는 말은 들었는데 벌써 필 줄은 몰랐어. 여울이가 복줄꽃이었구나. 오늘 만나러 가야지!”
“데려다줄까?”
“어, 오빠 아직도 나 안을 수 있어?”
샛바람동자는 아주 가소로운 말을 들었다는 듯 픽 웃었다. 그리고 읏차, 하고 이서의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이서는 웃으며 샛바람동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동자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서천꽃밭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천상의 사계와 절기를 따라 꽃들은 피고 지고 또 피었다. 이서는 이룰싹이었지만, 평범한 꽃들도 아주 좋아했다. 특히 이서는 웃음꽃이 좋았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작고 샛노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절로 즐거워졌다.
나도 복줄꽃이면 좋을 거야, 나는 언제쯤 피는 걸까, 이서는 한참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샛바람동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오빠, 오빠, 잠깐만.”
“왜?”
“저기 손님 왔어.”
이서가 손가락으로 저 멀리를 가리켰다. 버드나무 샘이었다. 버드나무 잎사귀 아래, 화려한 적의를 입은 남자와 백의를 입은 소년이 약간 거리를 둔 채 서 있었다.
“아, 천년장자네.”
샛바람동자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서는 고개를 돌려 샛바람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서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아무래도 꽃감관님을 모셔 와야겠어. 여기서 잠깐 기다려. 빨리 다녀와야 할 것 같으니까.”
“나 여기 혼자 있어?”
“응. 꼼짝도 하지 말고.”
그러더니 샛바람동자는 또 확 사라져 버렸다. 바람 언니 오빠들은 마음먹고 움직이면 보이지도 않는다니까. 이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손님들에게 무척 관심이 갔다.
남자와 소년은 조금 서먹해 보였다. 이서는 제 또래의 소년을 흘끗거렸다. 왜 둘이 이야기도 안 하지? 샛바람 오빠가 천년장자라는 사람 이야기를 할 때 목소리가 안 좋았는데. 속으로만 중얼중얼하며 둘을 훔쳐보는데,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날 봤어!
이서는 화들짝 놀라 굳어졌다.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소년이 계속 이서를 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서는 괜히 죄지은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때, 이서의 어깨에 크고 따뜻한 손이 올라왔다.
“이서야.”
“꽃감관님!”
이서가 팔딱 뛰어 꽃감관 진성의 허리를 안았다. 진성은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빨리 오셨네요?”
“샛바람동자가 서두르라고 해서. 천년장자가 왔구나.”
진성은 조금 심산한 얼굴로 손님들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적의의 천년장자도 그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천년장자는 함께 온 소년을 제자리에 남겨 두고, 혼자 훌쩍 이서와 진성의 앞까지 왔다.
“꽃감관, 오래간만이외다.”
“그렇군요.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로 오셨는지.”
“일이랄 것까지야 있겠소. 그저 옛 친우를 보러 온 것이지.”
그렇게 말하고 천년장자가 크게 웃었다. 입을 벌리고 웃는 천년장자 앞에서, 진성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이서는 진성의 허리를 안았던 팔을 풀고 그의 뒤에 숨었다. 천년장자의 웃음은, 아주 호방하고 시원했지만 이상하게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이서는 고개만 쏙 내밀고 천년장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저를 친우로 생각하신다니 영광이군요. 아드님과 함께 오시죠. 얼마 전에 상제께서 귀한 천도(天桃)를 몇 개 내려 주셨습니다.”
“정말 귀한 걸 받았구려. 아들은 되었소. 제 놈도 사내인데, 꽃구경이나 실컷 하라지.”
이서는 약간 움찔했다. 아들 이야기를 할 때, 천년장자가 약간 얼굴을 찡그린 걸 본 탓이었다. 즐거운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년장자를 보자, 그도 이서의 눈길을 느꼈다.
“뒤에 있는 아이는 무슨 꽃인지, 아직 피진 않은 모양이오.”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이서가 화들짝 놀랐다. 진성은 뒤에 숨은 이서의 손을 잡아 옆으로 데려왔다.
“인사하렴. 천년계곡의 천년장자시다.”
“안녕하세요.”
이서는 간신히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러면서도 진성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 아이는 이서입니다. 원래 무척 귀여운 아이인데, 처음 본 손님 앞이라 그런지 부끄럼을 타나 봅니다.”
“그런 모양이오. 이서야, 날 한번 봐라. 아주 어여쁘구나. 올해 몇 살인고?”
이서는 도움을 구하듯 진성을 쳐다보았다. 열 살이에요, 라고 대답하는 게 어려운 건 아니었다. 손님들 앞에서 이 정도로 부끄럼을 타는 성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천년장자 앞에서는 어쩐지 주눅이 들었다. 기세가 너무 강렬했다.
“열 살입니다. 자제분과 같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흠, 그렇군. 아직 피지도 않았는데 미색이 이리……. 무슨 꽃일지 짐작이 가오?”
천년장자가 이서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천년장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며 어깨를 굳혔다.
“저도 피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음기가 짙지 않으니 운우(남녀 간의 육체적인 관계)꽃은 아닐 터이고.”
천년장자는 농담처럼 말하고 웃었다. 진성은 그쯤에서 이서의 등을 밀어 저쪽으로 보냈다.
“이서야, 가서 저 소년과 놀고 있어라. 보고 싶다는 데가 있으면 잘 안내해 주고.”
“네, 꽃감관님.”
이서는 약간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갔다. 천년장자는 고개를 돌려 눈으로 그 뒷모습을 좇았다. 진성은 혀를 차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진성에게 있어, 천년장자는 그리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그래도 천년계곡을 다스리는 자니 함부로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도 진성은 천년장자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아이들은 놀게 두고, 일단 들어가시지요.”
진성은 웃으며 권했다. 천년장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만 걸음을 옮겼다.
이서는 소년 쪽으로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진성과 천년장자가 멀어지는 게 보였다. 이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새하얀 옷을 입은 소년은 버드나무 아래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물장난을 치거나 나무를 살펴보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 소년은 이서가 다가오는 걸 보고 그쪽에 눈을 고정했다.
“안녕.”
이서가 우물쭈물 인사했다. 이 소년은 천년장자의 아들이라고 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버지와 그리 많이 닮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유도 모르고 안심이 되어, 이서는 좀 더 바짝 다가갔다.
“너 이름이 뭐야?”
소년은 물끄러미 이서를 보았다. 그러다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백우. 넌?”
“난 이서야. 너랑 나랑 동갑이래. 난 여기 사는데, 이룰싹이라 아직 무슨 꽃인지는 몰라.”
“예쁜 꽃일 거야.”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귀에 쏙 들어왔다. 늘 저가 무슨 꽃으로 필까 기대하는 이서에게는 무척 듣기 좋은 말이었다.
이서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백우는 덧붙였다.
“서천의 꽃들은 모두 예쁘다고 들었어.”
“너 서천꽃밭엔 처음이지?”
“응.”
“구경시켜 줄까?”
“여기서 아버지를 기다려야 돼.”
“그래도 꽃감관님이 너 가고 싶다는 데 있으면 데려다주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했는데도 백우는 반응이 없었다. 원래 말수가 적은가? 이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이서는, 이 말간 얼굴의 단정한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지 말고 가자. 오늘 내 친구가 새로 피었단 말이야. 복줄꽃이래. 향기 정말 좋던데.”
“난 괜찮아.”
백우는 고개를 젓고, 조금 웃었다. 즐거워서 웃는다기보다는 이서의 마음을 생각해 웃는 듯했다. 백우는 아버지가 사라진 방향을 한번 바라보았다. 이서는 그런 백우를 보다가 털썩 제자리에 앉았다.
“그래, 그럼 여기서 놀자.”
“나 혼자 있어도 돼.”
“같이 놀면 좋잖아.”
그렇게 말하고 이서는 백우의 손을 잡아 옆에 앉혔다. 버드나무 샘에 두 사람의 모습이 거꾸로 비쳤다.
백우가 샘에 눈길을 주자, 이서는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샛바람 오빠가 그러는데, 이 샘 바닥에 용이 산대. 별로 안 깊어 보이는데 되게 깊은가 봐.”
“용?”
“응. 가끔 꽃감관님이 밖에 나가실 때 타고 다니라고 상제님이 주셨대. 근데 꽃감관님은 거의 밖에 안 나가시거든. 나가도 용을 타진 않으시고.”
그런 이야기를 나눈 뒤 둘은 한참을 앉아서 놀았다. 이서는 샘가의 자갈을 주워, 백우에게 공기놀이를 알려 주었다. 백우는 작은 손으로 한참을 쩔쩔맸다. 백의를 차려입은 남자아이가 앉은 채 자갈을 줍느라 조물조물하는 걸 보고 있으니 이서는 기분이 좋아졌다.
공기놀이가 지겨워진 후에는 샘 가까이 핀 꽃들을 알려 주었다. 이서는 신이 났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걸 알려 주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백우는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무얼 설명해도 관심 있는 얼굴로 열심히 들어 주었다.
“이건 꿈꿀꽃이야. 여기 잘 보면, 꽃잎에 줄무늬가 있잖아. 이 줄무늬가 이렇게 똑바르면 길몽꽃이고, 비뚤비뚤하면 흉몽꽃. 근데 길몽꽃도 너무 많이 사용하면 안 좋대.”
“써 본 적 있어?”
“아니, 아직. 꽃감관님이 꽃을 막 쓰지 말랬어.”
그렇구나, 하고 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이걸 어떻게 다 알아?”
“꽃감관님이 알려 주셨어. 아직 모르는 꽃도 많지만.”
그렇게 이서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잠들꽃과 망각꽃, 복줄꽃과 하늘날꽃, 말못할꽃과 귀먹을꽃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백우는 지겨운 기색도 없이 그 설명을 들었다. 꽃에 꽤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백우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핀 꽃을 가리켰다.
“저건 뭐야?”
이서는 백우의 손을 잡고 그 꽃 가까이 다가갔다.
꽃잎은 주황색이었다. 꽃은 앉은뱅이처럼 바닥에 바짝 붙어 있었는데, 꽃잎이 삐죽삐죽했다. 처음 보는 꽃이었다. 이서라고 서천꽃밭의 모든 꽃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 이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 꽃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코를 가까이 대고 향기를 맡아 봤지만 그래도 무슨 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안 알려 줘도 돼.”
백우 딴에는 배려한다고 한 소리였지만 그게 열 살 소녀 이서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뭔지 알려 줄게!”
“안 그래도 되는데…….”
“나도 무슨 꽃인지 궁금해서 그래.”
이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뚝, 꽃을 꺾었다. 서천의 꽃답게 꽃은 꺾이자마자 더 환하게 빛났다. 이서는 꽃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바짝 붙어 선 백우에게 꽃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막 꺾어도 돼?”
“당연히 안 되지.”
백우는 말문이 막힌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서는 개의치 않고 헤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