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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정말 약속하는 건가요?”
“그럼.”
거짓말일지도 몰라.
이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보랑에게로 향하는 제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유보랑은 특별히 기쁜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원래 제가 받기로 했던 것을 받는 얼굴이었다.
이제라도 돌이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서는 그러지 않았다. 거짓말이라면? 그러면 이서는 아무 값도 없이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거짓말이 아니라면? 만에 하나 저 말이 진실이라면?
그러면 필생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서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도 좋았다. 뭐든지 할 수 있어. 이서는 이제 꽃밭에서 뛰노는 소녀 이룰싹이 아니었다. 함께 자란 이룰싹은 하나둘씩 세상으로 내려가 자기의 가치를 증명하고 오는데, 이서는 내내 서천에만 갇혀 있었다.
다른 꽃이 될 수 없다면.
서천꽃밭은 감옥일 뿐이야.
유보랑이 이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서가 그 손을 잡았다. 유보랑은 그린 듯한 자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보다 키가 조금 작은 이서를 내려다보며, 확언을 요구했다.
“내 꽃이 되겠다고 말하렴.”
“부인의 꽃이 될게요.”
이서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결심은 끝났다. 이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하늘에는 하늘의 법이 있다. 빚은 갚는다. 약속은 지킨다.
“이름을 말해야지.”
모든 약속은 맹약, 오로지 자기의 이름으로 맹약한다.
유보랑의 손은 따뜻했다. 이서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채. 그렇게 이서는 자기의 미래에 홀렸다. 이서는 몸속에서 한기와 열기가 번갈아 치미는 걸 느꼈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수레멸망악심꽃, 이서가 말합니다. 천년장자의 소실, 유보랑의 꽃이 되겠어요.”
개화한 이룰싹은 서천 밖에서 소유자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 몸과 마음은 여전히 자기의 것이나, 꽃이 어떻게 쓰이느냐는 소유자에게 달렸다.
이서는 모든 걸 알고도, 자기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멸망꽃임을 알고도, 맹세하고 있었다.
“나와 금구(噤口)의 언약을 맺자. 너는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내가 내 남편의 아들을, 백년계곡의 주인을, 백우를 죽이기 위해 네 소유주가 되었다는 걸 말할 수 없어. 태양 앞에 언약하겠니?”
“하겠어요. 정말 저를 다른 꽃으로 만들어 주는 거죠?”
이서처럼, 유보랑도 망설이지 않았다.
“천년장자의 소실, 유보랑이 말하건대 내 남편의 아들이 죽으면 너는 다른 꽃이 되는 비약을 손에 넣을 것이다.”
그 순간, 이서는 유보랑과 마주 잡은 손이 간지러워졌다. 자기도 모르게 유보랑의 손을 놓고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서는 보았다.
짙은 남색 꽃이 손바닥에 피고 있었다.
꽃잎은 남색인데 거의 검은색처럼 보였다. 이서는 금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꽃잎에 검은 반점이 빽빽하게 번져 있었다. 징그러워.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꽃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한 송이 꽃에서 검은 줄기가 빠르게 자라났다. 까만 꽃대는 이서의 팔을 감으며 목까지 올라왔다. 줄기는 점점 더 갈라지고 늘어나 이서의 몸과 유보랑의 몸을 단단히 이었다. 줄기마다 같은 생김의 꽃이 피었다. 하나같이 크고 징그러운 꽃이었다. 암술은 새빨갰다.
이서는 당혹해서 저와 유보랑의 몸을 감는 줄기와 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유보랑은 크게 놀라지 않은 듯했다.
곧 방에 수레멸망악심꽃의 향기가 진동했다. 향기라고 말하기 어려운 냄새였다. 이서는 그게 무슨 냄새인지 몰랐다. 그저 지독하다는 것만 알았다. 구역질이 났다. 목이 턱 막히고 속이 뒤집혔다. 생리적인 역겨움이 치밀어, 이서는 허리를 꺾고 헛구역질을 했다.
유보랑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이서와는 달라서, 그녀는 이게 무슨 냄새인지 알았다.
시취(尸臭)였다.
그것이 이서의 향기였다.
두 사람의 몸을 칭칭 감은 줄기와 족히 백 송이가 넘게 피었던 꽃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서가 눈을 깜빡였을 때, 그 찰나에, 꽃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줄기가 온몸을 감았던 그 감각이 아직 팔다리와 목에 남아 있었다.
“우욱…….”
이서가 다시 구역질을 했다. 유보랑도 자유로워진 팔을 들어 코를 틀어막았다. 이서는 그 끔찍한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작정 문을 밀어젖혔다. 그러고 나서도 이서는 한참 숨을 골라야 했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이서는 보았다.
맑은 빛이 사방으로 번진 하늘.
그 하늘과 맞닿는 곳까지 뻗어 있는 짙푸른 대지.
이서의 고향이 거기에 있었다. 이서의 감옥이 거기에 있었다. 하늘과 땅이 빈틈없이 맞물린 이서의 아름다운 감방이. 멸망꽃으로 핀 날부터 이서는 수인(囚人)이었다.
난 다시 필 거야.
이 하늘은 열다섯 살 개화 이후 한 번도 온전히 열린 적이 없었다. 이서는 바람이 식은땀에 젖은 제 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이 하늘 아래 멸망의 운명을 지닌 건 나뿐이었어. 나는 이제 이 운명을 바꿀 거야.
그때는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서천에 돌아올 것이다. 이서는 되뇌고 또 되뇌었다.
난 다시 필 거야.
다시 피고 말 거야.

* * *


이서에게는 짐이랄 게 없었다. 그녀는 정말 단출하게 떠났다. 청현도 여울도, 그리고 오랜 친구들도, 이서에게 축복의 말을 해 주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이서는 멸망꽃이다. 멸망과 악심을 불러들이는 꽃이 밖에 나가서 할 일이라고는 뻔했다. 다른 사람을 해하러 가는 길을 어찌 축복할까. 진성조차도 축복의 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는 떠나겠다는 이서를 말리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해 보았지만 다 부질없었다. 이서의 마음은 확고했다.
“몸조심해라.”
진성이 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였다. 다른 꽃들도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서도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꽃감관님. 건강하세요.”
마지막 인사처럼 말하는구나.
진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서는 마지막으로 청현을, 여울을, 자기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던 이룰싹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걱정 어린 표정.
내가 멸망꽃이니까. 이서는 그렇게 생각한 후 살짝 미소를 지었다. 돌아왔을 때 나는 다른 꽃이 되어 있을 거야. 반드시. 그러면 다들 다른 표정을 짓겠지.
“떠날 준비는 됐니?”
옆에 서 있던 유보랑이 물었다. 이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유보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품에서 아주 작은 호각(號角)을 꺼냈다. 짐승의 뼈를 다듬어 만든 물건이었다. 유보랑이 그 호각을 붉은 입술로 물고 세게 불었다.
삐이이―
곧 하늘 어귀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이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날개 안쪽이 검은, 아주 커다란 학 한 마리가 공중에서 선회했다. 학은 날개를 펄럭이더니 사뿐히 땅으로 내려앉았다.
유보랑이 먼저 학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서를 향해 다정스레 손을 내밀었다.
“자, 어서 타렴.”
이서는 그 손을 잡았다.
이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사람을, 그것도 자기 남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여자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서에게는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다시 필 수만 있다면 아귀와도 손을 잡을 테다. 이서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서야……. 너무나 경솔했구나.’

학이 곧장 하늘로 솟구치는 순간, 이서는 진성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유보랑과 함께 떠나기로 했다고, 금구의 언약을 맺어 무슨 일로 가는지는 얘기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이서를 보며 진성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진성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이서의 손을 잡았다.

‘넌 그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금구의 언약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내게 한 번은 상의하지 그랬니.’

학은 순식간에 구름 위까지 올라갔다.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맹렬한 소리가 귓전을 가득 메웠다. 그 순간, 구름이 밀려 나며 서천꽃밭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어깨를 기대고 군락을 이룬, 이서의 고향이.
진성과 친구들의 모습도 점처럼 작게 보였다. 이서는 한동안 그 땅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곧 억지로 시선을 잡아 뜯었다.
진성에게 의논했어도, 아버지처럼 따랐던 꽃감관이 온 힘으로 말렸어도, 이서는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이서는 자기의 고향에 잠시 작별을 고했다. 돌아올 때 나는 다른 꽃잎과 다른 향기를 지니고 있을 거야. 이서는 그렇게 믿었다.

* * *


개화한 이룰싹은 보통의 꽃과는 달랐다. 일단 꽃을 소유하게 되는 과정이 달랐고, 그 힘을 사용하는 방법도 달랐다.
꽃의 동의가 없으면 그 누구도 꽃을 소유할 수 없다. 상호 동의하에 한 사람이 꽃을 소유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서천꽃밭 경계 밖에서부터 꽃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소원’을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복줄꽃 여울을 데려다가 ‘내게 금은보화를 가져다줘.’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사람의 형상을 한 꽃의 힘은 서서히, 단계적으로 발휘되었고 구체적인 내용을 주문할 수는 없었다. 설령 주문한다 해도 꽃은 그 소망을 이루어 주지 못했다.
이에 더해, 소유자와 꽃의 유대감도 힘의 발현에 영향을 미쳤다. 기이한 일이었다. 꽃들은 대체적으로 자기 힘을 통제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소유자와 마음으로부터 연대하면 더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네가 앞으로 어디로 갈지 궁금하지 않니?”
유보랑은 학 위에서 이서의 앞섶을 여며 주며 물었다. 이서는 그 친절한 손길에 그저 몸을 맡기고만 있었다. 사실 이렇게 밖으로 나오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천년계곡으로 가는 게 아닌가요?”
“아니. 내 남편의 아들은 천제님으로부터 자기가 다스릴 땅을 받았단다. 백년계곡을 다스리지. 이젠 백년장자라고 불린다던가.”
“그럼 부인과 전 함께 사는 게 아니네요.”
“왜, 아쉽니?”
유보랑이 웃었다. 꽤 선량해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이서는 속지 않았다. 이 여자는 지금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는 것이다.
“아시겠지만 제 마음대로 누구를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제 힘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도 잘 모르고요.”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단다. 참, 그 전에 이걸 줘야겠네.”
유보랑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주머니 안에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갈색 씨가 나왔다. 유보랑은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이서의 입에 직접 넣어 주었다. 씨앗이 입술을 꾹 누르자, 이서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씹어서 삼키렴.”
“이게 뭐죠?”
이서는 씹는 대신 씨앗을 혀 밑에 머금고 물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유보랑은 이서의 의심 어린 얼굴을 보고 살짝 웃었다.
“겁이 많은 애구나. 그저 천년계곡의 감나무 씨앗이란다.”
“이걸 왜…….”
“네 냄새 말이야. 모두가 알지 않겠니. 그걸 먹으면 아무 냄새도 나지 않을 거야.”
이서는 아까 방에 가득 찼던 그 역겨운 냄새를 떠올렸다. 유보랑은 나중에, 그게 시취라고 말해 주었다. 시취가 뭔가요? 시체 썩는 냄새 말이다. 그 말을 기억하는 이서는 군말 없이 감나무 씨앗을 씹었다.
씨앗은 아주 떫고 썼다. 혀가 얼얼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서는 말없이 꼭꼭 씹었다.
“백년장자의 이름은 백우야. 나도 얘기하겠지만, 백우에게는 천년장자가 널 보냈다고 하렴.”
“왜요?”
“백우는 날 믿지 않는다만, 자기 부친에게는 약하거든. 무척.”
아버지가 선물한 꽃이라고 하면 널 아주 살뜰하게 돌봐 줄 거야, 하고 유보랑이 덧붙였다. 이서는 학 위에 앉아 빠르게 변하는 지상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전 그런 건 상관없어요.”
거기서 무슨 대접을 받든 개의치 않을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았다. 하지만 유보랑은 웃었다.
“백우는 아주 착하고 건실한 청년으로 소문이 났지. 자기를 10년 넘게 돌아보지 않는 아버지에게 효심도 깊고. 그렇게 모질게 외면당하면서도 탄일에 제일 진귀한 선물만 골라 보내고, 자리를 지키는 걸 보면 정말 굉장하다 싶어.”
“그런가요.”
이서는 난데없이 백우를 칭찬하는 유보랑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우. 기억 속의 이름은 희미했다. 솔직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백우를 너무 믿으면 안 돼. 난 늘 그 애의 속을 알 수가 없었거든.”
유보랑이 덧붙인 순간, 학이 갑자기 아래로 방향을 틀었다.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아 이서는 얼결에 유보랑의 팔을 붙잡았다. 떨쳐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유보랑은 그러지 않았다.
학이 지상으로 내려갈수록 풍경이 환하게 보였다.
백년계곡은 가파르고 험준했다. 폭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폭포의 길이가 족히 1리(里, 1리는 약 3백 미터)는 될 것 같았다. 그 물이 물길을 타고 천지 사방으로 굽이굽이 흘러가 소담한 마을을 길렀다. 지도처럼 펼쳐진 그 땅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학은 길을 아는 듯 곧장 날아갔다. 곧 이서와 유보랑은 쏟아지는 폭포 위 커다란 궁궐 앞마당에 서게 되었다.
어떻게 안 것인지, 한 사람이 이미 나와 있었다. 남자였다. 이서는 혹시 그가 백우인가 살피려 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한쪽 귀에만 청색 귀걸이를 단 모습이었다. 물색 도포가 잘 어울렸다. 그가 유보랑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유보랑 님.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왜 오고 난리냐. 이서는 순간 그렇게 들었다.
“천년장자가 아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서천의 꽃이지.”
유보랑은 태연하게 말했다. 남자는 이서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알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귀한 선물이군요.”
폭탄이군요. 이서는 또 그렇게 들었다. 상대의 말투가 좀 이상했다. 유보랑과도 다른 느낌이었다. 껄렁거리는 듯도 하고, 건성인 듯도 하고, 경계하는 듯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