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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혹시 아가씨도 꽃이에요?”
여자가 그렇게 물었다.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여자는 이서의 표정을 어떻게 읽었는지 급히 덧붙였다.
“저, 그렇다는 말을 들어서요……. 가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꽃도 있다고…….”
꽃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건 조금 이상한 말이었지만, 이서는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이서는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기 위해 잠깐 심호흡을 해야 했다. 가까운 친구인 청현에게는 그토록 매몰차게 대하고, 낯선 여자에겐 안내까지 해 주며 불편한 질문에 답해 주는 자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도 꽃이에요.”
“와. 무슨 꽃이에요?”
이번 질문은 정말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응당 이 질문이 뒤따를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서는 악의라곤 한 톨도 없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힘겹게 이서를 뒤따르면서도 어딘지 희망에 차 있었다.
남편의 병 때문에 왔다고 했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그저 관용구로 사용하지만, 그건 하늘의 법이고 진리이기도 했다. 모든 정성이 하늘에 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늘은 간절한 자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법이었다. 이 여자는 하늘의 길을 연 사람인 것이다.
말하고 싶다.
어차피 스쳐 갈 사람이다. 이 사람을 다시 볼 일은 없을 터다. 그러면 말해도 되겠지. 어차피 나에 대해선 잊어버릴 거니까. 이 여자는 꽃이나 몇 송이 꺾어서 남편에게로 갈 테고 거기서 남편과 행복하게 살겠지. 그러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 여자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서는 불안정했다. 본래 불안정할 때는 스쳐 지나가는 타인에게도 자기 자신을 털어놓고 싶은 법이었다. 그럴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서는 무슨 꽃이냐는 여자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 멈춰서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에 보이는 작은 집에 꽃감관님이 계세요.”
“저, 아가씨는…….”
“안녕히 가세요.”
이서는 여자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돌아서 버렸다.
분명 저 여자는 선녀다. 적강한 걸 잊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 속 영웅 같은 여자겠지. 혼자 온갖 고생을 견디고 마침내 부모와 남편과 아이를 구하는. 인내와 헌신으로 영광을 얻는 사람이겠지.
언젠가는 이서도 저런 사람과 함께 세상을 바꿀 날을 꿈꾸었다. 그건 꽃들의 희망과도 같았다. 잠시 고향을 떠나 훌륭한 소유자와 여행길에 오르는 것. 그래서 그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고 작은 행복을 선사하는 것.
꽃들은 다른 길은 몰랐다. 게다가 그들은 첫 이룰싹이었다. 이룰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아를 가진 꽃, 걷고 뛰고 말할 수 있는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무도 그런 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들은 피고 지는 꽃이었고 동시에 인간이었다. 기이한 존재였다. 이룰싹은 개화를 원했고 세상에서 자기의 향기를 발하고 싶어 했다. 꽃과 인간 모두의 욕망이었다.
그러나 이서는 이제 그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다.
후에 이서는 그 낯선 여자가 치유꽃으로 핀 태주와 함께 서천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평범한 꽃을 받은 사람은 있어도 개화한 이룰싹을 데려간 사람은 없었다. 그 여자가 처음이었다. 태주는 서천꽃밭 밖으로 나가는 첫 번째 이룰싹이었고, 잔뜩 들떠서 많은 꽃의 전송을 받으며 떠났다.
이서는 그 전송 무리에 없었다.
그녀는 여자도 태주도 보지 않았다. 보면 못 견딜 것 같았다. 모든 꽃이 모인 그 자리에서, 진성과 바람동자들 앞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게 될 것 같았다.
그 후에도 많은 이룰싹이 서천을 떠나고 또 돌아왔다.
이서는 자기의 이로운 향기를 증명해 보인 이룰싹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침묵했다.
수레멸망악심꽃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이서가 알기로는 그랬다. 누가 멸망꽃을 찾을까. 찾는다 해도 결코 좋은 목적으로 찾는 건 아닐 것이다. 진성이 세상의 멸망을 꿈꾸는 자들에게 이룰싹을 내어 줄 리 없었다.
나는 이대로 평생 여기서 사는 건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이서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은 이서를 위해 멈추지 않았다. 다른 꽃들은 그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오갔다. 이서는 정지한 채였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었다. 한번 개화한 이상 이룰싹에게 세월은 그리 중하지 않았다. 서천꽃밭은 변함없었다.
* * *
그 불변의 꽃밭에, 또 한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날의 바람은 이서가 개화열로 쓰러진 그날처럼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이서야. 꽃감관님이 찾으셔.”
샛바람동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개화한 후 이서는 다소 예민해지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그녀를 전처럼 대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서는 일어났다. 샛바람동자는 터벅터벅 걷는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서는 장성했다. 소녀가 아니다. 전처럼 안아서 진성에게 데려다줄 수는 없다. 바람동자들은 늘 소년의 모습이니까.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샛바람동자는 이서를 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서는 변했다. 완전히.
이서는 샛바람동자가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걸 몰랐다. 그녀는 그저, 꽃감관님이 왜 불렀을까, 그것만 생각하며 걸었다. 개화 이후 진성은 자주 이서를 불러 마음을 달래 주려 했지만 매번 실패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서를 찾지 않게 되었다.
꽃감관님도 내게 질린 거겠지. 난 이렇게 엉망인 데다 멸망꽃인걸. 나쁜 꽃이면 성질이라도 순해야지 이게 뭐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서는 쉽게 태도를 바꾸지 못했다.
“꽃감관님.”
“그래, 이서야.”
이서는 진성의 처소로 들어서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
진성의 맞은편에 낯모르는 여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동백기름을 바른 머리채를 우아하게 틀어 올려 비녀를 꽂았는데, 보라색 보석이 비녀 끝에서 달랑거렸다. 여자는 이서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눈매가 살짝 위로 올라가고, 뺨은 붉었다. 눈과 코, 입이 모두 섬세하게 조립한 듯 오밀조밀했다. 눈썹이 그린 듯 고왔다.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그리 유순한 인상은 아니어서, 이서는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 있기만 했다.
“난 유보랑이란다. 네가 이서구나.”
이서는 도움을 구하듯 진성을 보았다. 마치 천년장자와 만났던 그 어린 날처럼. 그러나 진성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유보랑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멸망꽃이라면서? 수레멸망악심이던가.”
유보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아무도 이서 앞에서 그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이서는 난데없이 등장한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레멸망악심.
“그런 얼굴 할 거 없어. 난 네가 필요해서 왔으니까.”
유보랑은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다정한 어머니처럼 이서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주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손톱이 진분홍색이었다. 꽃물을 들인 모양이었다. 이서는 유보랑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이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가, 분홍 꽃잎을 돌로 짓이기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말씀하신 대로 전 멸망꽃이에요.”
“그래. 난 멸망꽃을 찾아왔어. 서천에 굉장한 꽃이 피었다고 한동안 다들 말이 많았지. 널 찾아온 사람들도 정말 많았을 거야.”
이서는 믿을 수 없었다. 왜? 누가 멸망꽃을 찾는단 말인가? 어디에 쓰려고? 이서는 당혹해서, 유보랑의 어깨 너머로 진성을 보았다. 진성은 이서의 의문을 해결해 주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유보랑의 어깨를 잡고 이서에게서 떼어 냈다.
“아이가 놀랍니다. 그쯤 하십시오.”
“꽃감관이야말로 행동을 삼가세요. 어찌 내 몸에 손을 댑니까.”
마치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라 이서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성은 달랐다. 그는 굳은 얼굴로 유보랑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유보랑도 냉랭한 얼굴로 진성을 보고 있었다. 이서는 두 사람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왜…… 꽃감관님이 왜 저런 표정이지?
“넌 귀한 꽃이야, 이서.”
유보랑이 감미롭게 속삭였다. 정말 곱고 정갈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서는 어쩐지 거부감이 들어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왜 돌연 나타나 멸망꽃을 찾아왔다고 하는 것인가. 꽃감관님은 왜 말려 주지 않을까. 여기 서 있고 싶지 않아. 저 여자는 왠지 무서워.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서야.”
진성이 나직이 이서를 불렀다. 이서는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꽃감관을 보았다. 귀한 꽃이라고? 그런 빈말을 들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인사해라. 이쪽은 천년장자의 소실(小室, 첩), 유보랑이다. 널 데려가고 싶어서 왔다는구나.”
이서는 굳어졌다. 방금 뭐라고?
진성은 충격에 젖은 그 얼굴을 보았다. 진성은 지금 당장에라도 유보랑을 서천꽃밭 밖으로 쫓아내고 싶은 것을 참으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10년 전의 빚을 받으러 왔다고 하는데, 기억하니?”
이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서천의 꽃을 함부로 사용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
10년 전. 열 살.
용 아자개가 사는 버드나무 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작은 소년.
천년장자.
빚.
“이 꽃과 둘이 얘기하고 싶군요. 자리를 비켜 주겠어요?”
유보랑이 부드럽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러나 이서는 그녀의 눈이 전혀 휘지 않은 것을 보았다. 눈은 그대로인 채 입매만 휘는, 기이하고 무서운 미소였다.
그러나 진성은 바로 물러나진 않았다. 그는 이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서의 손을 잡아 주었다.
“너도 이제껏 다른 이룰싹을 봐서 알겠지만,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 널 보내지 않을 거야.”
“빚이라고 했잖아요.”
이서는 가볍게 떨면서 중얼거렸다.
이서도 하늘의 법에 대해 알았다. 하늘의 법은, 단순한 듯 복잡하고 복잡한 듯 단순했다. 타인에게 진 빚은 갚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서는 진성이 그 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을 알았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널 데려갈 수 없어.”
진성은 다시 힘주어 반복했다.
이서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을 믿었다. 그리고 이서는, 유보랑과 가고 싶지 않았다. 천년장자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딘지 겁이 났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유보랑과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도, 이서의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나랑 가는 게 싫으니?”
유보랑이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이서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방금까지 진성이 앉아 있던 곳이었다. 이서는 앉지 않았다. 유보랑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직 서천꽃밭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면서. 나와 밖으로 가 보자.”
“전 멸망꽃이에요.”
이서는 불쑥 대꾸했다. 아무래도 좀 겁이 났지만, 그래서 목소리가 덜덜 떨렸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절 데려가셔도 소용없어요. 전 누굴 구할 수도 없고, 병을 낫게 하거나 행운을 불러오지도 못해요.”
“넌 착한 꽃이구나.”
고운 다홍치마에 두 손을 포갠 채, 유보랑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치병(治病)이나 기복(祈福)을 위해서였다면 내가 왜 멸망꽃을 찾겠니.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걸 바라진 않아. 나도 그렇고.”
“전…….”
“난 내 남편의 아들을 죽일 거란다.”
그 말이 하도 태연하게 나와서 이서는 오히려 대답을 잃었다. 유보랑은 일 점 살의도 없는 얼굴로, 그저 달빛 아래 흔들리는 꽃 같은 자태로 살인을 입에 담았다.
“전 그런 일은…… 그런 건 안 해요.”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약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 꽃이 되고 싶지 않았다. 생존이 걸린 문제도 아닌데 살아 있는 것을 해치는 건, 무섭고 끔찍한 일이다. 위험한 일이다. 이서는 그런 걸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멸망꽃으로 피었을 때 그토록 절망한 것이다. 생명을 압살하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면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를 따라가, 천년장자의 아들을 죽인다고?
“내가 네게 필요한 걸 갖고 있어.”
유보랑은 여상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이서는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젓고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서천에 있는 꽃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보랑은 이서의 거절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유보랑은 자기의 패가 이 꽃의 마음을 사로잡으리라고 확신했다.
꽃은 결국 소유자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
이룰싹은 일반적인 꽃에 비해 사용법이 까다롭지만, 유보랑은 자신 있었다. 그녀는 느긋한 목소리로 첫 번째 패를 뒤집었다.
“다른 꽃이 되고 싶지 않니?”
누구도 멸망을 원치 않으리라 믿는 순진한 이서야.
“내가 널 좋은 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단다.”
이서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혹시 내가 너무 간절해서 환청을 들은 걸까.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이서는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서는 천천히 돌아섰다.
유보랑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반달 모양으로 접힌 그 눈에. 눈웃음이 아름답고 요염한 여자였다. 이서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요?”
유보랑은 웃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정작 이서 본인은 그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유보랑은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어린 꽃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나이는 중요치 않으나 서천의 꽃들은 대부분 성인의 육신을 가진 어린애였다. 내내 서천에서만 자랐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토록 구슬리기 쉬운 아이라니. 유보랑은 흡족했다.
“내 남편은 천년계곡을 다스리지. 서천꽃밭과는 비교도 안 되는 넓은 땅이야. 진귀한 것들이 많지.”
이서는 재촉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유보랑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을 이어 갔지만, 이서는 애가 달아 무척 초조했다.
“거기엔 사내를 계집으로 바꾸는 약도 있지. 서천에도 그런 꽃은 없을 거야. 그리고 천년계곡에는 정말 귀한 것이 하나 있는데……. 네가 그걸 가지면, 다른 꽃이 될 수 있단다.”
“약인가요?”
이서가 성급하게 물었다. 유보랑은 고개를 저었다.
“네 존재를 바꾸는 일인데 그 정도로 되겠니?”
“그럼…….”
“날 돕겠니?”
유보랑이 뚝 말을 자르고 물었다.
이서에게 아주 불리한 거래였다.
저 말이 거짓말이면?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성이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성은 이제껏 침묵했다. 왜? 다른 꽃이 될 방법 따위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서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꽃감관이라고 해서 이 거대한 세계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잖아. 꽃감관님도 모르는 게 있어. 꽃감관님도 계속 서천에만 계시잖아. 그러니 천년계곡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
이서는 유보랑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유보랑의 얼굴에서, 거짓이나 진실의 기미를 찾기 위해. 그러나 유보랑의 얼굴은 단단했다. 이서는 아무것도 읽어 내지 못했다. 유보랑은 이서가 애쓰는 걸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그 표정이 불쾌했다. 오늘 처음 본 여자, 자기 남편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말한 여자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혹시 아가씨도 꽃이에요?”
여자가 그렇게 물었다.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여자는 이서의 표정을 어떻게 읽었는지 급히 덧붙였다.
“저, 그렇다는 말을 들어서요……. 가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꽃도 있다고…….”
꽃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건 조금 이상한 말이었지만, 이서는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이서는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기 위해 잠깐 심호흡을 해야 했다. 가까운 친구인 청현에게는 그토록 매몰차게 대하고, 낯선 여자에겐 안내까지 해 주며 불편한 질문에 답해 주는 자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도 꽃이에요.”
“와. 무슨 꽃이에요?”
이번 질문은 정말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응당 이 질문이 뒤따를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서는 악의라곤 한 톨도 없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힘겹게 이서를 뒤따르면서도 어딘지 희망에 차 있었다.
남편의 병 때문에 왔다고 했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그저 관용구로 사용하지만, 그건 하늘의 법이고 진리이기도 했다. 모든 정성이 하늘에 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늘은 간절한 자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법이었다. 이 여자는 하늘의 길을 연 사람인 것이다.
말하고 싶다.
어차피 스쳐 갈 사람이다. 이 사람을 다시 볼 일은 없을 터다. 그러면 말해도 되겠지. 어차피 나에 대해선 잊어버릴 거니까. 이 여자는 꽃이나 몇 송이 꺾어서 남편에게로 갈 테고 거기서 남편과 행복하게 살겠지. 그러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 여자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서는 불안정했다. 본래 불안정할 때는 스쳐 지나가는 타인에게도 자기 자신을 털어놓고 싶은 법이었다. 그럴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서는 무슨 꽃이냐는 여자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 멈춰서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에 보이는 작은 집에 꽃감관님이 계세요.”
“저, 아가씨는…….”
“안녕히 가세요.”
이서는 여자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돌아서 버렸다.
분명 저 여자는 선녀다. 적강한 걸 잊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 속 영웅 같은 여자겠지. 혼자 온갖 고생을 견디고 마침내 부모와 남편과 아이를 구하는. 인내와 헌신으로 영광을 얻는 사람이겠지.
언젠가는 이서도 저런 사람과 함께 세상을 바꿀 날을 꿈꾸었다. 그건 꽃들의 희망과도 같았다. 잠시 고향을 떠나 훌륭한 소유자와 여행길에 오르는 것. 그래서 그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고 작은 행복을 선사하는 것.
꽃들은 다른 길은 몰랐다. 게다가 그들은 첫 이룰싹이었다. 이룰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아를 가진 꽃, 걷고 뛰고 말할 수 있는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무도 그런 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들은 피고 지는 꽃이었고 동시에 인간이었다. 기이한 존재였다. 이룰싹은 개화를 원했고 세상에서 자기의 향기를 발하고 싶어 했다. 꽃과 인간 모두의 욕망이었다.
그러나 이서는 이제 그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다.
후에 이서는 그 낯선 여자가 치유꽃으로 핀 태주와 함께 서천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평범한 꽃을 받은 사람은 있어도 개화한 이룰싹을 데려간 사람은 없었다. 그 여자가 처음이었다. 태주는 서천꽃밭 밖으로 나가는 첫 번째 이룰싹이었고, 잔뜩 들떠서 많은 꽃의 전송을 받으며 떠났다.
이서는 그 전송 무리에 없었다.
그녀는 여자도 태주도 보지 않았다. 보면 못 견딜 것 같았다. 모든 꽃이 모인 그 자리에서, 진성과 바람동자들 앞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게 될 것 같았다.
그 후에도 많은 이룰싹이 서천을 떠나고 또 돌아왔다.
이서는 자기의 이로운 향기를 증명해 보인 이룰싹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침묵했다.
수레멸망악심꽃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이서가 알기로는 그랬다. 누가 멸망꽃을 찾을까. 찾는다 해도 결코 좋은 목적으로 찾는 건 아닐 것이다. 진성이 세상의 멸망을 꿈꾸는 자들에게 이룰싹을 내어 줄 리 없었다.
나는 이대로 평생 여기서 사는 건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이서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은 이서를 위해 멈추지 않았다. 다른 꽃들은 그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오갔다. 이서는 정지한 채였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었다. 한번 개화한 이상 이룰싹에게 세월은 그리 중하지 않았다. 서천꽃밭은 변함없었다.
그 불변의 꽃밭에, 또 한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날의 바람은 이서가 개화열로 쓰러진 그날처럼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이서야. 꽃감관님이 찾으셔.”
샛바람동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개화한 후 이서는 다소 예민해지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그녀를 전처럼 대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서는 일어났다. 샛바람동자는 터벅터벅 걷는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서는 장성했다. 소녀가 아니다. 전처럼 안아서 진성에게 데려다줄 수는 없다. 바람동자들은 늘 소년의 모습이니까.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샛바람동자는 이서를 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서는 변했다. 완전히.
이서는 샛바람동자가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걸 몰랐다. 그녀는 그저, 꽃감관님이 왜 불렀을까, 그것만 생각하며 걸었다. 개화 이후 진성은 자주 이서를 불러 마음을 달래 주려 했지만 매번 실패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서를 찾지 않게 되었다.
꽃감관님도 내게 질린 거겠지. 난 이렇게 엉망인 데다 멸망꽃인걸. 나쁜 꽃이면 성질이라도 순해야지 이게 뭐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서는 쉽게 태도를 바꾸지 못했다.
“꽃감관님.”
“그래, 이서야.”
이서는 진성의 처소로 들어서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
진성의 맞은편에 낯모르는 여자가 하나 앉아 있었다. 동백기름을 바른 머리채를 우아하게 틀어 올려 비녀를 꽂았는데, 보라색 보석이 비녀 끝에서 달랑거렸다. 여자는 이서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눈매가 살짝 위로 올라가고, 뺨은 붉었다. 눈과 코, 입이 모두 섬세하게 조립한 듯 오밀조밀했다. 눈썹이 그린 듯 고왔다.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그리 유순한 인상은 아니어서, 이서는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 있기만 했다.
“난 유보랑이란다. 네가 이서구나.”
이서는 도움을 구하듯 진성을 보았다. 마치 천년장자와 만났던 그 어린 날처럼. 그러나 진성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유보랑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멸망꽃이라면서? 수레멸망악심이던가.”
유보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아무도 이서 앞에서 그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이서는 난데없이 등장한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레멸망악심.
“그런 얼굴 할 거 없어. 난 네가 필요해서 왔으니까.”
유보랑은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다정한 어머니처럼 이서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주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손톱이 진분홍색이었다. 꽃물을 들인 모양이었다. 이서는 유보랑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이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가, 분홍 꽃잎을 돌로 짓이기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말씀하신 대로 전 멸망꽃이에요.”
“그래. 난 멸망꽃을 찾아왔어. 서천에 굉장한 꽃이 피었다고 한동안 다들 말이 많았지. 널 찾아온 사람들도 정말 많았을 거야.”
이서는 믿을 수 없었다. 왜? 누가 멸망꽃을 찾는단 말인가? 어디에 쓰려고? 이서는 당혹해서, 유보랑의 어깨 너머로 진성을 보았다. 진성은 이서의 의문을 해결해 주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유보랑의 어깨를 잡고 이서에게서 떼어 냈다.
“아이가 놀랍니다. 그쯤 하십시오.”
“꽃감관이야말로 행동을 삼가세요. 어찌 내 몸에 손을 댑니까.”
마치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라 이서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성은 달랐다. 그는 굳은 얼굴로 유보랑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유보랑도 냉랭한 얼굴로 진성을 보고 있었다. 이서는 두 사람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왜…… 꽃감관님이 왜 저런 표정이지?
“넌 귀한 꽃이야, 이서.”
유보랑이 감미롭게 속삭였다. 정말 곱고 정갈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서는 어쩐지 거부감이 들어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왜 돌연 나타나 멸망꽃을 찾아왔다고 하는 것인가. 꽃감관님은 왜 말려 주지 않을까. 여기 서 있고 싶지 않아. 저 여자는 왠지 무서워.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서야.”
진성이 나직이 이서를 불렀다. 이서는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꽃감관을 보았다. 귀한 꽃이라고? 그런 빈말을 들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인사해라. 이쪽은 천년장자의 소실(小室, 첩), 유보랑이다. 널 데려가고 싶어서 왔다는구나.”
이서는 굳어졌다. 방금 뭐라고?
진성은 충격에 젖은 그 얼굴을 보았다. 진성은 지금 당장에라도 유보랑을 서천꽃밭 밖으로 쫓아내고 싶은 것을 참으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10년 전의 빚을 받으러 왔다고 하는데, 기억하니?”
이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서천의 꽃을 함부로 사용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
10년 전. 열 살.
용 아자개가 사는 버드나무 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작은 소년.
천년장자.
빚.
“이 꽃과 둘이 얘기하고 싶군요. 자리를 비켜 주겠어요?”
유보랑이 부드럽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러나 이서는 그녀의 눈이 전혀 휘지 않은 것을 보았다. 눈은 그대로인 채 입매만 휘는, 기이하고 무서운 미소였다.
그러나 진성은 바로 물러나진 않았다. 그는 이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서의 손을 잡아 주었다.
“너도 이제껏 다른 이룰싹을 봐서 알겠지만,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 널 보내지 않을 거야.”
“빚이라고 했잖아요.”
이서는 가볍게 떨면서 중얼거렸다.
이서도 하늘의 법에 대해 알았다. 하늘의 법은, 단순한 듯 복잡하고 복잡한 듯 단순했다. 타인에게 진 빚은 갚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서는 진성이 그 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을 알았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널 데려갈 수 없어.”
진성은 다시 힘주어 반복했다.
이서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을 믿었다. 그리고 이서는, 유보랑과 가고 싶지 않았다. 천년장자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딘지 겁이 났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유보랑과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도, 이서의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나랑 가는 게 싫으니?”
유보랑이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이서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방금까지 진성이 앉아 있던 곳이었다. 이서는 앉지 않았다. 유보랑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직 서천꽃밭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면서. 나와 밖으로 가 보자.”
“전 멸망꽃이에요.”
이서는 불쑥 대꾸했다. 아무래도 좀 겁이 났지만, 그래서 목소리가 덜덜 떨렸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절 데려가셔도 소용없어요. 전 누굴 구할 수도 없고, 병을 낫게 하거나 행운을 불러오지도 못해요.”
“넌 착한 꽃이구나.”
고운 다홍치마에 두 손을 포갠 채, 유보랑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치병(治病)이나 기복(祈福)을 위해서였다면 내가 왜 멸망꽃을 찾겠니.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걸 바라진 않아. 나도 그렇고.”
“전…….”
“난 내 남편의 아들을 죽일 거란다.”
그 말이 하도 태연하게 나와서 이서는 오히려 대답을 잃었다. 유보랑은 일 점 살의도 없는 얼굴로, 그저 달빛 아래 흔들리는 꽃 같은 자태로 살인을 입에 담았다.
“전 그런 일은…… 그런 건 안 해요.”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약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 꽃이 되고 싶지 않았다. 생존이 걸린 문제도 아닌데 살아 있는 것을 해치는 건, 무섭고 끔찍한 일이다. 위험한 일이다. 이서는 그런 걸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멸망꽃으로 피었을 때 그토록 절망한 것이다. 생명을 압살하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면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를 따라가, 천년장자의 아들을 죽인다고?
“내가 네게 필요한 걸 갖고 있어.”
유보랑은 여상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이서는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젓고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서천에 있는 꽃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보랑은 이서의 거절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유보랑은 자기의 패가 이 꽃의 마음을 사로잡으리라고 확신했다.
꽃은 결국 소유자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
이룰싹은 일반적인 꽃에 비해 사용법이 까다롭지만, 유보랑은 자신 있었다. 그녀는 느긋한 목소리로 첫 번째 패를 뒤집었다.
“다른 꽃이 되고 싶지 않니?”
누구도 멸망을 원치 않으리라 믿는 순진한 이서야.
“내가 널 좋은 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단다.”
이서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혹시 내가 너무 간절해서 환청을 들은 걸까.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이서는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서는 천천히 돌아섰다.
유보랑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반달 모양으로 접힌 그 눈에. 눈웃음이 아름답고 요염한 여자였다. 이서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요?”
유보랑은 웃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정작 이서 본인은 그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유보랑은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어린 꽃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나이는 중요치 않으나 서천의 꽃들은 대부분 성인의 육신을 가진 어린애였다. 내내 서천에서만 자랐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토록 구슬리기 쉬운 아이라니. 유보랑은 흡족했다.
“내 남편은 천년계곡을 다스리지. 서천꽃밭과는 비교도 안 되는 넓은 땅이야. 진귀한 것들이 많지.”
이서는 재촉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유보랑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을 이어 갔지만, 이서는 애가 달아 무척 초조했다.
“거기엔 사내를 계집으로 바꾸는 약도 있지. 서천에도 그런 꽃은 없을 거야. 그리고 천년계곡에는 정말 귀한 것이 하나 있는데……. 네가 그걸 가지면, 다른 꽃이 될 수 있단다.”
“약인가요?”
이서가 성급하게 물었다. 유보랑은 고개를 저었다.
“네 존재를 바꾸는 일인데 그 정도로 되겠니?”
“그럼…….”
“날 돕겠니?”
유보랑이 뚝 말을 자르고 물었다.
이서에게 아주 불리한 거래였다.
저 말이 거짓말이면?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성이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성은 이제껏 침묵했다. 왜? 다른 꽃이 될 방법 따위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서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꽃감관이라고 해서 이 거대한 세계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잖아. 꽃감관님도 모르는 게 있어. 꽃감관님도 계속 서천에만 계시잖아. 그러니 천년계곡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
이서는 유보랑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유보랑의 얼굴에서, 거짓이나 진실의 기미를 찾기 위해. 그러나 유보랑의 얼굴은 단단했다. 이서는 아무것도 읽어 내지 못했다. 유보랑은 이서가 애쓰는 걸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그 표정이 불쾌했다. 오늘 처음 본 여자, 자기 남편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말한 여자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