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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우선은 물부터 마시고.”
진성은 부드럽게 잔을 잡아 이서의 입가에 대 주었다. 이서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려 물을 마셨다.
“몸이 나아지기를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렴.”
진성은 이서의 손에서 잔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너한테는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너 자신을 받아들일 시간이.”
진성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리고 이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조금 더 기다렸다. 그러나 진성은 더 말하지 않았다. 이서는 진성의 얼굴을 보며 망연히 물었다.
“그게 끝인가요?”
“그래.”
“전 수레멸망악심꽃 같은 게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그냥 이렇게 시간만 보내면 되는 건가요? 서천에선 괜찮겠죠. 하지만 인세로 가면요? 하다못해 서천꽃밭 밖으로 나가기라도 하면요?”
서천에서, 꽃은 스스로 엄청난 의지를 발하지 않는 한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서천 밖의 선계나 인세(人世), 저승으로 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꽃은 소유주의 의지와 자기의 의지에 따라 힘을 발휘한다. 어떤 꽃은 존재만으로도 선계와 인세, 저승의 재앙이 될 것이다.
“전 평생 여기 있어야 하나요?”
이 서천에.
똑같은 꽃이 사철 피어 있는 이곳에.
“전 바깥으로 나가 볼 수도 없나요?”
이미 꽃 몇 송이가 선계로, 인세로 나갔다. 사람의 형상을 한 꽃들은 아직 서천에 머물고 있었지만, 기회가 닿고 시기가 맞는다면 그들도 밖으로 나가 소유주와 함께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할 것이다. 서천을 찾아오는 자에게 꽃을 주는 것은 순전히 진성의 권리였다. 진성은 악한 자에게 꽃을 주지는 않을 터였다.
이서는 물론 고향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지의 바깥 세계를 갈망했다.
“누가 절 원하겠어요? 전 결국 소유자도 죽게 만들 거라고요!”
이서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너무 울어서 머리가 무겁고 눈알이 쑤실 지경이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하실 수 있잖아요…….”
그러나 진성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서도 그걸 알았다. 아는데도 그녀는 계속 말했다. 이럴 수는 없어. 내가 멸망꽃일 리가 없잖아.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이 땅에서 제일 오래 기다린 게 나인데, 보상은커녕 형벌이라니. 이건 너무 불공평해. 방향 없는 원망이 이서의 머리와 가슴을 쑤셨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었다. 여전히, 그녀는 서천의 유일한 멸망꽃이었다.
이서가 개화하고 나서 한 달쯤 지났을 때, 진성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끌며 버드나무 샘으로 갔었다. 그는 샘가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고 부드럽게 입수했다. 온몸이 차가운 물에 잠기며 정신이 확 깨어났다.
진성은 계속 아래로 헤엄쳤다. 샘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이 샘은 깊었다.
곧 아자개가 나타났다. 샘 바닥에 있던 용은 천천히 입김을 불어 큰 물방울을 만들었다. 진성은 놀라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방울은 진성의 몸을 끌어당겨 안으로 품었다.
진성은 흠뻑 젖은 채로 일어섰다. 아자개가 주위를 빙빙 돌다가 사라지는 걸 보며, 진성은 심호흡을 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나 하늘에는 하늘의 법이 있었다. 진성은 아자개에게 빚이 있었다. 아자개가 제때 나서지 않았다면 이서는 익사했을 것이다. 이룰싹은 불사의 존재가 아니었다. 아자개는 이룰싹을 살렸고 진성은 꽃감관으로서 빚을 갚아야 했다.
“늦었잖아.”
쑥 물방울 안으로 들어온 아자개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성은 작은 아이의 모습을 한 아자개를 내려다보다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꿇어앉았다. 신을 신지 않은 아자개가 저벅저벅 다가와 두 손을 진성의 뺨에 갖다 댔다.
“오랜만이네.”
“격조했습니다.”
아자개는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누가 보면 네가 저승 여행이라도 다녀온 줄 알겠네. 날 이 샘 바닥에 7년이나 처박아 놓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자개는 단단히 마음이 뒤틀린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진성은 그게 그리 미안하지 않았다. 진성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이서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아자개를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난 교룡이야. 물에 산다고. 뭍으로 못 나갈 건 없지만 힘든 일이지. 그러니 네가 자주 만나러 와야 한다고 말했잖아.”
“…….”
“이젠 대답도 안 하네.”
아자개는 혼자 웃었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세계의 탄생 무렵부터 존재해 온 용이었다. 진성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이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아자개는 진성을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이 뭘까 생각해 봤어. 넌 7년 전부터 날 모르는 척했지. 아마 유보랑 얘기를 하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아. 넌 그때 꽤 힘들어했지. 천인치곤 드물게 성실하니까.”
“알고 계시면서 모르는 척하셨군요.”
“아니야. 지난번에 네가 말했을 땐 진짜 몰랐다고. 아무튼 네 말을 듣고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게 됐어.”
“그럼 이대로 절 보내 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날 보는 게 네겐 고통인가? 넌 내 유일한 친우인데.”
진성은 더 말하지 않았다. 다른 친인도 많지 않느냐는 식으로 유치하게 따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자개는 농담이 통하지 않자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그는 진성의 얼굴을 잡은 채 그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왜, 내가 천제에게 그 일을 일러바치기라도 할까 겁이 났어?”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걸 겁낸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일을 조금 바라기도 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아니면 내가 그때 널 비난했던가?”
아자개는 새삼 옛일을 되돌아보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억겁을 살아온 용이지만, 아자개는 영원한 시간에 굴복하지 않는 생물이었다. 그는 미쳐 버리지도 않았고 권태에 말라 가지도 않았다. 본디 영원을 살도록 태어난 것이다.
“당신은 절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진성은 속삭이듯 대답했다. 제발 아자개가 자기를 보내 주었으면 싶었다.
아자개는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천인도 결국 인간이다. 희로애락, 오욕을 고루 느끼는 섬약한 존재.
“제 마음이 편치 못했을 뿐입니다. 당신은 실수하지 않는 분이니 모르실 겁니다.”
“정말 모르겠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튼, 앞으론 자주 와. 걔도 데려와도 돼. 지난번에 개화열 때문에 물 달라고 왔던.”
“이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걔 예전에도 샘에 들어왔었지? 웬 사내놈이랑.”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진성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천년장자가 그 아들을 데려왔던 게 벌써 5년 전이다. 아자개의 생은, 잘은 몰라도 너무나 거대한 것이라 그런 사소한 일이 그의 기억에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진성의 물음에 아자개는 웃었다. 어린애의 모습인데도, 이가 드러날 듯한 사나운 웃음이었다. 진성은 아자개의 심기가 여전히 아주 불편하다는 걸 알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데, 당연히 기억할밖에. 천년장자의 아들이었다는 것도 기억해. 나랑 잠깐 눈이 마주쳤었지. 꽤 마음에 들었는데, 요즘은 안 오나 봐?”
“그 이후에 천년장자가 서천에 온 적은 없습니다. 그 아들도 마찬가지고요.”
아자개는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진성의 얼굴을 놓고 자기 생각에 잠겼다. 진성은 이만 가 보겠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아자개가 한발 더 빨랐다.
“언젠가는 올 것 같은데. 머지않아.”
“그는 그때 빚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어쨌든 너랑 그 집안도 꽤 인연이 있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끌어당기게 되거든.”
진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인연. 그것을 인연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게 이렇게 무서운 말이었던가.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내게 오라고. 얘기 정도는 들어 주지.”
“해결해 주신다는 얘기는 안 하시는군요.”
진성은 쓰게 웃었다. 그는 7년 전의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진성이 처음으로 아자개에게 매달린 날이었다. 천제가 내린 이 지고한 존재에게 매달려 도와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아자개는 그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러면 누가 해결할 수 있느냐고, 진성은 다시 물었다.
그때 아자개가 ‘해결할 수 있는 건 너지.’라고 대답했다면, 진성은 천제 앞에 가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자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다른 대답을 했다. 그 대답을 듣고도 진성은, 당신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정말 없느냐고 물었다. 엄청난 무례였지만 그때는 예의를 따질 정신이 아니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난 너희가 말하는 신성한 존재라서.”
아자개는 웃었다. 서서히, 그의 몸이 변하고 있었다.
“원래 신성한 것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거야.”
다음 순간 거대해진 아자개의 몸이 물방울을 찢었다. 안으로 차가운 물이 밀려 들어왔다. 진성은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 아자개의 길고 미끈한 꼬리가 제 허리를 감는 게 느껴졌다. 곧 아자개가 빠르게 수면을 향해 나아갔다. 아주 잠시의 시간이 지나, 진성은 아자개가 꼬리만 물 밖으로 내밀어 자기를 뭍에 내려놓았음을 알았다.
진성은 완전히 젖은 채 물가에 앉아 있었다. 이래서 아자개를 만나지 않으려 한 것인데.
그 만남 이후, 진성은 아자개의 말을 잊으려 애썼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진성은 이서를 살피고 서천을 돌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서는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성이 이서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 본래의 천진한 이룰싹 소녀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이서는 점차 나아질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이서는 보름이 지난 후에야 진성의 처소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걸 회복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서는 자기가 머물던 땅에 혼자 웅크리고 앉았다. 알록달록한 꽃들이 발치에 가득 피어 있었다.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꽃을 뚝뚝 꺾어 버렸다.
서천에서는 아무도 꽃을 함부로 꺾지 않는다. 그건 경솔하고 잔인한 짓이었다. 이서도 그걸 알았다. 그러나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꽃을 꺾고, 꽃잎을 찢고, 뿌리까지 뽑아 내던졌다. 꽃을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았다. 정면의 먼 어딘가를 응시하며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이서야!”
이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청현이었다. 그가 잔뜩 걱정 어린 얼굴로 이서를 향해 달려왔다.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홱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청현이 다가와 곁에 앉자, 이서는 곧장 내뱉었다.
“저리 가.”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청현은 깜짝 놀랐다. 이서는 대체로 활달하고 명랑했다. 다른 꽃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 새 아이들이 왔다고 해서, 같이 가 볼까 하고…….”
청현은 엉거주춤 선 채 말했다. 그러나 이서의 뒷모습은 야멸차기만 했다.
“싫어.”
이서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청현은 더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는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오라고 말하고 그만 이서의 곁을 떠나야 했다.
청현을 그렇게 보내고, 이서는 홀로 앉아 서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서천꽃밭에는 계절이 없다. 서천의 꽃들은 계절을 맞아 피는 것이 아니다. 서천은 늘 따뜻하고, 가끔 비가 오고, 바람도 거세지 않다. 사방이 야트막한 언덕, 파릇파릇 솟아 시들지 않는 들풀,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피는 꽃들. 덩굴로 땅을 기며 피는 꽃도 있고, 커다란 나무에서 피는 꽃, 물에서 피는 꽃도 있었다. 사방이 향기롭고 다채로웠다.
멀리에는 눈부신 하늘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일월이 자리를 바꾸며 오가서, 아침이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햇빛에 구름이 연분홍빛으로 물들고 밤이면 달빛을 받아 구름 그림자가 언덕을 덮었다.
천인의 아이들과 어려서 죽은 인간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뛰놀았다. 크고 작은 다툼이나 문제는 종종 있었지만, 어린아이들은 금세 화해하고 잊고 다시 어울렸다. 어려서 죽은 아이들은 이곳에서 저승 시왕(十王)의 부름을 기다렸다. 아이들은 짧으면 이틀, 길면 한 달까지도 서천에 머물렀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서천의 꽃들은 매번 새로운 아이를 만나고 함께 놀고 또 헤어졌다.
서천에서는 그렇게 삶과 죽음, 하늘과 땅, 인간과 꽃이 한데 엉겨 평화로웠다.
그런 곳인데.
이서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고향은 이렇게 아름답고 여전히 눈부신데, 자기 혼자 다른 세상으로 내팽개쳐진 느낌이었다. 다시는 예전의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불행하고 불운한 일들만 남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서는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저, 길 좀 여쭤도 될까요?”
이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가 앞에 서 있었다. 아주 초라한 행색이었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흘러내리고, 얼굴이며 손이 다 하얗게 트고, 눈은 움푹 들어가 퀭했다. 오른손에 손질도 제대로 안 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아주 침착했다. 고요한 분위기였다. 이서가 놀라서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깜빡이자, 여자는 다감한 말투로 조심조심 청해 왔다.
“서천에는 처음이라……. 꽃감관님을 뵈려고 해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네.”
이서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천꽃밭에는 특별히 입구랄 게 없었다. 지상에서 죽은 아이들의 혼도 여기저기서 갑자기 나타나곤 했다. 그러면 꽃이나 바람동자들은 그 혼을 인도해 진성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저, 누구세요?”
이서가 앞장서기 전에 물었다. 여자가 너무 피로해 보여서 반사적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아이 같지는 않았다.
“전 그냥 땅에서 왔어요. 남편 때문에……. 여기 병을 고칠 수 있는 꽃이 있다고 해서요.”
이서는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평범한 지상의 인간이, 심지어 영혼도 아닌 존재가 멀쩡히 육신을 입고 서천까지 온 것이다. 자기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적강(謫降)한 선녀거나……. 이서는 더 묻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이서는 그녀가 한쪽 다리를 전다는 걸 알았다. 여자는 한 다리를 부자연스럽게 질질 끌면서, 몸을 이상스레 흔들며 걸었다. 한쪽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몸을 흔들어 반동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이서는 그녀를 위해 걷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여자는 그걸 알고 고맙다고 말해 왔다. 이서는 아니에요, 라고 웅얼거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몰골이 지저분한데, 여자에게는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쩐지 말을 붙이기도 어려워 이서는 계속 침묵했다.
“우선은 물부터 마시고.”
진성은 부드럽게 잔을 잡아 이서의 입가에 대 주었다. 이서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려 물을 마셨다.
“몸이 나아지기를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렴.”
진성은 이서의 손에서 잔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너한테는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너 자신을 받아들일 시간이.”
진성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리고 이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조금 더 기다렸다. 그러나 진성은 더 말하지 않았다. 이서는 진성의 얼굴을 보며 망연히 물었다.
“그게 끝인가요?”
“그래.”
“전 수레멸망악심꽃 같은 게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그냥 이렇게 시간만 보내면 되는 건가요? 서천에선 괜찮겠죠. 하지만 인세로 가면요? 하다못해 서천꽃밭 밖으로 나가기라도 하면요?”
서천에서, 꽃은 스스로 엄청난 의지를 발하지 않는 한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서천 밖의 선계나 인세(人世), 저승으로 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꽃은 소유주의 의지와 자기의 의지에 따라 힘을 발휘한다. 어떤 꽃은 존재만으로도 선계와 인세, 저승의 재앙이 될 것이다.
“전 평생 여기 있어야 하나요?”
이 서천에.
똑같은 꽃이 사철 피어 있는 이곳에.
“전 바깥으로 나가 볼 수도 없나요?”
이미 꽃 몇 송이가 선계로, 인세로 나갔다. 사람의 형상을 한 꽃들은 아직 서천에 머물고 있었지만, 기회가 닿고 시기가 맞는다면 그들도 밖으로 나가 소유주와 함께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할 것이다. 서천을 찾아오는 자에게 꽃을 주는 것은 순전히 진성의 권리였다. 진성은 악한 자에게 꽃을 주지는 않을 터였다.
이서는 물론 고향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지의 바깥 세계를 갈망했다.
“누가 절 원하겠어요? 전 결국 소유자도 죽게 만들 거라고요!”
이서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너무 울어서 머리가 무겁고 눈알이 쑤실 지경이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하실 수 있잖아요…….”
그러나 진성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서도 그걸 알았다. 아는데도 그녀는 계속 말했다. 이럴 수는 없어. 내가 멸망꽃일 리가 없잖아.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이 땅에서 제일 오래 기다린 게 나인데, 보상은커녕 형벌이라니. 이건 너무 불공평해. 방향 없는 원망이 이서의 머리와 가슴을 쑤셨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었다. 여전히, 그녀는 서천의 유일한 멸망꽃이었다.
이서가 개화하고 나서 한 달쯤 지났을 때, 진성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끌며 버드나무 샘으로 갔었다. 그는 샘가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고 부드럽게 입수했다. 온몸이 차가운 물에 잠기며 정신이 확 깨어났다.
진성은 계속 아래로 헤엄쳤다. 샘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이 샘은 깊었다.
곧 아자개가 나타났다. 샘 바닥에 있던 용은 천천히 입김을 불어 큰 물방울을 만들었다. 진성은 놀라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방울은 진성의 몸을 끌어당겨 안으로 품었다.
진성은 흠뻑 젖은 채로 일어섰다. 아자개가 주위를 빙빙 돌다가 사라지는 걸 보며, 진성은 심호흡을 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나 하늘에는 하늘의 법이 있었다. 진성은 아자개에게 빚이 있었다. 아자개가 제때 나서지 않았다면 이서는 익사했을 것이다. 이룰싹은 불사의 존재가 아니었다. 아자개는 이룰싹을 살렸고 진성은 꽃감관으로서 빚을 갚아야 했다.
“늦었잖아.”
쑥 물방울 안으로 들어온 아자개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성은 작은 아이의 모습을 한 아자개를 내려다보다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꿇어앉았다. 신을 신지 않은 아자개가 저벅저벅 다가와 두 손을 진성의 뺨에 갖다 댔다.
“오랜만이네.”
“격조했습니다.”
아자개는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누가 보면 네가 저승 여행이라도 다녀온 줄 알겠네. 날 이 샘 바닥에 7년이나 처박아 놓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자개는 단단히 마음이 뒤틀린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진성은 그게 그리 미안하지 않았다. 진성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이서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아자개를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난 교룡이야. 물에 산다고. 뭍으로 못 나갈 건 없지만 힘든 일이지. 그러니 네가 자주 만나러 와야 한다고 말했잖아.”
“…….”
“이젠 대답도 안 하네.”
아자개는 혼자 웃었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세계의 탄생 무렵부터 존재해 온 용이었다. 진성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이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아자개는 진성을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이 뭘까 생각해 봤어. 넌 7년 전부터 날 모르는 척했지. 아마 유보랑 얘기를 하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아. 넌 그때 꽤 힘들어했지. 천인치곤 드물게 성실하니까.”
“알고 계시면서 모르는 척하셨군요.”
“아니야. 지난번에 네가 말했을 땐 진짜 몰랐다고. 아무튼 네 말을 듣고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게 됐어.”
“그럼 이대로 절 보내 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날 보는 게 네겐 고통인가? 넌 내 유일한 친우인데.”
진성은 더 말하지 않았다. 다른 친인도 많지 않느냐는 식으로 유치하게 따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자개는 농담이 통하지 않자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그는 진성의 얼굴을 잡은 채 그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왜, 내가 천제에게 그 일을 일러바치기라도 할까 겁이 났어?”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걸 겁낸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일을 조금 바라기도 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아니면 내가 그때 널 비난했던가?”
아자개는 새삼 옛일을 되돌아보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억겁을 살아온 용이지만, 아자개는 영원한 시간에 굴복하지 않는 생물이었다. 그는 미쳐 버리지도 않았고 권태에 말라 가지도 않았다. 본디 영원을 살도록 태어난 것이다.
“당신은 절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진성은 속삭이듯 대답했다. 제발 아자개가 자기를 보내 주었으면 싶었다.
아자개는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천인도 결국 인간이다. 희로애락, 오욕을 고루 느끼는 섬약한 존재.
“제 마음이 편치 못했을 뿐입니다. 당신은 실수하지 않는 분이니 모르실 겁니다.”
“정말 모르겠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튼, 앞으론 자주 와. 걔도 데려와도 돼. 지난번에 개화열 때문에 물 달라고 왔던.”
“이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걔 예전에도 샘에 들어왔었지? 웬 사내놈이랑.”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진성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천년장자가 그 아들을 데려왔던 게 벌써 5년 전이다. 아자개의 생은, 잘은 몰라도 너무나 거대한 것이라 그런 사소한 일이 그의 기억에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진성의 물음에 아자개는 웃었다. 어린애의 모습인데도, 이가 드러날 듯한 사나운 웃음이었다. 진성은 아자개의 심기가 여전히 아주 불편하다는 걸 알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데, 당연히 기억할밖에. 천년장자의 아들이었다는 것도 기억해. 나랑 잠깐 눈이 마주쳤었지. 꽤 마음에 들었는데, 요즘은 안 오나 봐?”
“그 이후에 천년장자가 서천에 온 적은 없습니다. 그 아들도 마찬가지고요.”
아자개는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진성의 얼굴을 놓고 자기 생각에 잠겼다. 진성은 이만 가 보겠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아자개가 한발 더 빨랐다.
“언젠가는 올 것 같은데. 머지않아.”
“그는 그때 빚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어쨌든 너랑 그 집안도 꽤 인연이 있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끌어당기게 되거든.”
진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인연. 그것을 인연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게 이렇게 무서운 말이었던가.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내게 오라고. 얘기 정도는 들어 주지.”
“해결해 주신다는 얘기는 안 하시는군요.”
진성은 쓰게 웃었다. 그는 7년 전의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진성이 처음으로 아자개에게 매달린 날이었다. 천제가 내린 이 지고한 존재에게 매달려 도와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아자개는 그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러면 누가 해결할 수 있느냐고, 진성은 다시 물었다.
그때 아자개가 ‘해결할 수 있는 건 너지.’라고 대답했다면, 진성은 천제 앞에 가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자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다른 대답을 했다. 그 대답을 듣고도 진성은, 당신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정말 없느냐고 물었다. 엄청난 무례였지만 그때는 예의를 따질 정신이 아니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난 너희가 말하는 신성한 존재라서.”
아자개는 웃었다. 서서히, 그의 몸이 변하고 있었다.
“원래 신성한 것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거야.”
다음 순간 거대해진 아자개의 몸이 물방울을 찢었다. 안으로 차가운 물이 밀려 들어왔다. 진성은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 아자개의 길고 미끈한 꼬리가 제 허리를 감는 게 느껴졌다. 곧 아자개가 빠르게 수면을 향해 나아갔다. 아주 잠시의 시간이 지나, 진성은 아자개가 꼬리만 물 밖으로 내밀어 자기를 뭍에 내려놓았음을 알았다.
진성은 완전히 젖은 채 물가에 앉아 있었다. 이래서 아자개를 만나지 않으려 한 것인데.
그 만남 이후, 진성은 아자개의 말을 잊으려 애썼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진성은 이서를 살피고 서천을 돌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서는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성이 이서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 본래의 천진한 이룰싹 소녀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이서는 점차 나아질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서는 보름이 지난 후에야 진성의 처소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걸 회복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서는 자기가 머물던 땅에 혼자 웅크리고 앉았다. 알록달록한 꽃들이 발치에 가득 피어 있었다.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꽃을 뚝뚝 꺾어 버렸다.
서천에서는 아무도 꽃을 함부로 꺾지 않는다. 그건 경솔하고 잔인한 짓이었다. 이서도 그걸 알았다. 그러나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꽃을 꺾고, 꽃잎을 찢고, 뿌리까지 뽑아 내던졌다. 꽃을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았다. 정면의 먼 어딘가를 응시하며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이서야!”
이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청현이었다. 그가 잔뜩 걱정 어린 얼굴로 이서를 향해 달려왔다.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홱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청현이 다가와 곁에 앉자, 이서는 곧장 내뱉었다.
“저리 가.”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청현은 깜짝 놀랐다. 이서는 대체로 활달하고 명랑했다. 다른 꽃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 새 아이들이 왔다고 해서, 같이 가 볼까 하고…….”
청현은 엉거주춤 선 채 말했다. 그러나 이서의 뒷모습은 야멸차기만 했다.
“싫어.”
이서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청현은 더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는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오라고 말하고 그만 이서의 곁을 떠나야 했다.
청현을 그렇게 보내고, 이서는 홀로 앉아 서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서천꽃밭에는 계절이 없다. 서천의 꽃들은 계절을 맞아 피는 것이 아니다. 서천은 늘 따뜻하고, 가끔 비가 오고, 바람도 거세지 않다. 사방이 야트막한 언덕, 파릇파릇 솟아 시들지 않는 들풀,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피는 꽃들. 덩굴로 땅을 기며 피는 꽃도 있고, 커다란 나무에서 피는 꽃, 물에서 피는 꽃도 있었다. 사방이 향기롭고 다채로웠다.
멀리에는 눈부신 하늘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일월이 자리를 바꾸며 오가서, 아침이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햇빛에 구름이 연분홍빛으로 물들고 밤이면 달빛을 받아 구름 그림자가 언덕을 덮었다.
천인의 아이들과 어려서 죽은 인간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뛰놀았다. 크고 작은 다툼이나 문제는 종종 있었지만, 어린아이들은 금세 화해하고 잊고 다시 어울렸다. 어려서 죽은 아이들은 이곳에서 저승 시왕(十王)의 부름을 기다렸다. 아이들은 짧으면 이틀, 길면 한 달까지도 서천에 머물렀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서천의 꽃들은 매번 새로운 아이를 만나고 함께 놀고 또 헤어졌다.
서천에서는 그렇게 삶과 죽음, 하늘과 땅, 인간과 꽃이 한데 엉겨 평화로웠다.
그런 곳인데.
이서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고향은 이렇게 아름답고 여전히 눈부신데, 자기 혼자 다른 세상으로 내팽개쳐진 느낌이었다. 다시는 예전의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불행하고 불운한 일들만 남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서는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저, 길 좀 여쭤도 될까요?”
이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가 앞에 서 있었다. 아주 초라한 행색이었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흘러내리고, 얼굴이며 손이 다 하얗게 트고, 눈은 움푹 들어가 퀭했다. 오른손에 손질도 제대로 안 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아주 침착했다. 고요한 분위기였다. 이서가 놀라서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깜빡이자, 여자는 다감한 말투로 조심조심 청해 왔다.
“서천에는 처음이라……. 꽃감관님을 뵈려고 해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네.”
이서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천꽃밭에는 특별히 입구랄 게 없었다. 지상에서 죽은 아이들의 혼도 여기저기서 갑자기 나타나곤 했다. 그러면 꽃이나 바람동자들은 그 혼을 인도해 진성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저, 누구세요?”
이서가 앞장서기 전에 물었다. 여자가 너무 피로해 보여서 반사적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아이 같지는 않았다.
“전 그냥 땅에서 왔어요. 남편 때문에……. 여기 병을 고칠 수 있는 꽃이 있다고 해서요.”
이서는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평범한 지상의 인간이, 심지어 영혼도 아닌 존재가 멀쩡히 육신을 입고 서천까지 온 것이다. 자기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적강(謫降)한 선녀거나……. 이서는 더 묻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이서는 그녀가 한쪽 다리를 전다는 걸 알았다. 여자는 한 다리를 부자연스럽게 질질 끌면서, 몸을 이상스레 흔들며 걸었다. 한쪽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몸을 흔들어 반동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이서는 그녀를 위해 걷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여자는 그걸 알고 고맙다고 말해 왔다. 이서는 아니에요, 라고 웅얼거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몰골이 지저분한데, 여자에게는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쩐지 말을 붙이기도 어려워 이서는 계속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