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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황급히 팬티를 올려 입고 가슴께까지 말려 올라간 원피스를 내리는 하윤을 멍하니 바라보던 예준은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 자신이 심각하게 굴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 같았기에.
“뭘 그런 거 가지고 놀라? 우리 더한 짓도 많이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했잖아요. 내 말 못 알아들어요?”
“어. 지금은 못 알아듣겠어. 그러니까 오늘은 일단 자고, 내일…… 그래 내일 다시 얘기하자. 자, 들어가서 자자. 피곤할 텐데…….”
예준은 하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침실로 같이 들어가기 위해.
그런데 하윤은 그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전 여기서 잘게요. 들어가서 주무세요.”
“무슨 소리야? 난 너 없으면 잠 못 자는 거 알잖아.”
“몰라요. 전 기억 안 나요.”
“아, 그래……. 기억. 기억이 안 난다고 했지……. 근데 나 출장 가 있는 한 달 동안 제대로 못 잤는데…….”
하윤은 예준의 얼굴을 흘끔 훔쳐봤다. 그는 정말 피곤한 모양인지 눈이 약간 충혈되어 있었다.
기억을 잃었어도 고운 심성은 그대로인지, 하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 예준은 그 기세로 몰아붙였다.
“아무튼 각방은 절대 안 돼. 네가 기억을 잃었어도 우리가 부부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자, 빨리 들어가서 자자.”
예준은 막무가내로 하윤의 손목을 잡아끌고 침실로 향했다.
얼떨결에 예준에게 끌려 침실로 들어간 하윤은 안 되겠는지 다시 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그냥 옆에만 있어 줘. 제발, 부탁이야.”
예준은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곤 그녀가 뭔가를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 위에 눕혔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던 하윤의 몸 위로 이불이 덮어졌다.
예준은 다정한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까는 미안했어. 사과할게.”
그녀의 몸 상태는 생각도 안 하고 불안한 마음에 무작정 몰아붙인 것이 미안해서 예준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러자 예준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던 하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랑했어요?”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날…… 사랑했냐구요.”
“왜 과거형이야?”
“그건…….”
“사랑해.”
“…….”
“네가 날 평생 기억 못 한다고 해도 사랑해. 그러니까…….”
예준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움찔거리며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는 그녀의 저항이 차츰 수그러들자 그는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 김 박사님 말로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래.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저…… 그렇게 좋은 아내는 아니었죠?”
“…….”
“결혼, 후회한 적 없어요?”
“…….”
갑자기 그녀의 부정적인 질문 공세가 쏟아지자 예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혼날래?”
멈칫. 제 실수를 인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하면 앞으론 나 없을 때 네 맘대로 다치고, 아프지 좀 마.”
예준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한 뒤 셔츠를 훌러덩 벗어 던졌다.
“아무 짓도 안 한다면서 또 왜…….”
하윤은 두 눈을 꽉 감아 버렸다.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예준은 피식 웃더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나 씻고 나오기 전에 먼저 자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내 몸이 내 말을 안 듣거든.”
욕실 문이 닫히고, 하윤은 감았던 눈을 떴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하윤은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이나 한곳만 바라보던 하윤은 침대에서 내려와 그가 벗어 놓은 셔츠를 손에 들었다.
그가 입맞춤했던 이마를 매만지며 하윤은 죄책감이 깃든 얼굴로 예준의 셔츠를 가슴에 안았다.

*


예준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악몽을 꾼 예준은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제일먼저 옆자리를 확인했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곤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윤아…….”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어제 일어난 일들이 꿈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갓 지은 밥 냄새가 솔솔 나는 주방으로 향한 예준은 제 눈을 의심했다.
“뭐 해?”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하윤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뭐 하냐니까?”
“아침 식사…….”
예준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하윤의 얼굴엔 미소가 없었다.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고 낯설어했다. 예준은 절망스러웠다.
어제의 악몽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아침? 너 요리 못하잖아.”
아내에게 아무렇지 않게 넌 요리를 못한다고 말하는 예준을 하윤은 뚱한 얼굴로 쳐다봤다. 예준은 아차 싶었는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정정했다.
“못하는 게 아니라, 넌 요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이 집에서 요리 담당은 나. 그러니까 비켜. 내가 할게.”
“저도 잘할 수 있어요.”
“그래? 그럼 어디 한번 해 봐.”
무시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전투력이 상승한 하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햄을 썰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예준의 시선이 신경 쓰여 곁눈질로 그를 훔쳐보다가 그만 칼을 놓치고 말았다.
“아얏!”
칼에 베인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예준은 화들짝 놀라 하윤의 손가락을 입안에 넣었다. 응급 처치라고 하기엔 너무 노골적인 스킨십이었다. 하윤의 손가락을 물고 쪽쪽 빨던 예준은 두 뺨이 발그레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곤 피식 웃었다.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표정과 눈빛은 그대로인데…….
하윤은 야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예준과 두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손을 빼내 등 뒤에 숨겼다.
“먹고 싶어.”
예준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네?”
하윤이 당황스러워하자, 예준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하윤이 썰다 만 햄을 입속에 넣었다.
“아침 메뉴가 뭐야?”
“소고기 뭇국이랑 소시지야채볶음이요.”
“알았어.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앉아 있어. 밥 먹고 같이 병원 가자.”
“병원이요?”
“어. 치료받아야지. 정밀 검사도 하고.”
“오늘 약속 있어요.”
“기억도 없는 애가 무슨 약속? 누구랑?”
“지해랑 학교 가기로 했어요.”
“방학인데 학교는 왜?”
“제가 하던 스터디가 있대요.”
지금 이 와중에 스터디가 중요하느냐고 따져 물으려던 예준은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말간 얼굴로 열심히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하윤의 말을 우선 들어 보기로 했다.
“원래 제 생활 패턴대로 움직이다 보면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병원이 먼저야.”
“싫어요. 병원은…… 싫다고요.”
그녀의 큰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코끝까지 빨개진 그녀 때문에 예준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정적을 깨트린 건 보글보글 국 끓는 소리였다. 금방이라도 냄비에서 넘쳐흐를 듯 조마조마하게 국이 끓고 있었다.
결국 촤르르륵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국이 넘쳐흘렀다. 하윤과 예준은 반사적으로 노브로 손을 뻗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얼떨결에 하윤의 손을 잡은 형태가 되어 버린 예준은 일부러 더 태연하게 굴었다. 손에 더욱 힘을 준 채 그녀와 함께 노브를 돌려 불을 완전히 껐다.
불이 꺼지고도 예준은 하윤의 손을 놓지 않았다.
“병원은 안 가요. 그러니까 아침 알아서 챙겨 드시고 출근하세요.”
하윤은 예준의 손을 세게 뿌리치곤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아…….”
예준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원래 병원을 싫어했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병원 응급실에서 한날한시에 죽었다고 한다.
그 이후 이혼해서 혼자 살던 고모가 그녀를 데려다 키웠지만, 고모는 그녀에게 상속된 재산이 탐이 나 고열을 앓는 조카를 병원 응급실에 버려두고 도망갔고, 혼자가 된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저와 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이 모인 쉼터로 가는 수밖에.

‘오빠가 지해네 가족이라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지해를 보면 항상 부러웠거든요. 듬직한 아버지, 귀여운 어머니, 개성 뚜렷한 세 명의 오빠들까지. 가족이 모이면 웃음이 끊이질 않고, 서로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게 눈에 보였거든요.’

그녀가 예준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해 오며 했던 말이다.
그래서 예준은 그녀와 결혼하며 다짐한 것이 있다. 외롭게 자란 그녀를 엄마 대신 안아 주고, 아빠 대신 자신이 평생 지켜 주겠다고.
그래, 이번에도 그녀를 지켜 줄 사람은 나 하나뿐이야. 그러니까 그녀를 위해서라도 정신 차리자.
각오를 단단히 하고 그는 능숙한 손길로 아침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 수저를 놓던 예준은 마침 방문이 열리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병원 안 가도 되니까 앉아. 밥 먹고 학교까지 데려다줄…….”
짧은 치마를 입고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예준은 말끝을 흐렸다.
“아니요. 저 혼자 갈래요.”
잽싸게 거실로 뛰어나온 예준은 하윤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 나가려고?”
“왜요? 이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