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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prologue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의 호텔 로비는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시간이라, 이 시간에 호텔을 찾는 객들은 쫓기듯이 제 갈 길을 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로비 한구석, 소파에 앉은 여자는 마치 밀랍인형을 앉혀 놓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블랙 슈트에 한 올도 남김없이 말아서 묶은 헤어스타일. 단순하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 한 차림은 오히려 그녀의 갸름한 얼굴 윤곽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잘 빚어 놓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와 선명한 윤곽의 붉은 입술. 내리뜬 눈매는 정확한 모양을 알 수 없지만, 긴 속눈썹의 모양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로비를 지나쳐 프런트 데스크로 향하던 우현의 시선이 대리석 석상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아름다움에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현의 시선이 멈춘 것은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호텔의 특성상, 다양한 사람과 제각기 다른 사연이 공존하는 곳이지만, 발 아래를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이 어딘가 부서질 듯이 공허하고 서늘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나칠 만큼 타인에게 무심하다는 평판을 듣는 우현은 평소답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얼핏 쓴웃음이 나왔다. 시선을 거둔 우현이 프런트 데스크로 향했다.
우현을 발견한 데스크의 직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장 비서님께 연락받고, 늘 쓰시던 객실로 비워 놓았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데스크 직원이 카드키를 건넸다. 가벼운 미소를 건넨 우현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텔 별관 집무실에는 따로 사용하는 프라이빗 룸이 있지만,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고층 객실이 좋아서 기분 내킬 때마다 본관에서 쉬어 가고는 했다.
최근 리모델링한 호텔은 기존의 중후하고 클래식한 분위기 대신에, 갤러리 형태의 심플하고 모던한 내부 장식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트렌드에 맞는 조각이나 회화, 갖가지 예술 작품을 곳곳에 장식하여 감각적인 느낌을 살리고 단순한 형태의 철골 계단 등을 설치하여 독특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가미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스타일과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고객들이 유입되면서 매출 역시 나날이 상승했다. 언론에서는 패기에 찬 젊은 후계자가 호텔 경영에 나서면서 호텔 역시 젊고 감각적으로 변했다고 호의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동시에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일부 이사진들의 태도 역시 최근 눈에 띄게 달라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 모든 것이 무료하고 따분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자극이 필요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숨 막히는 공기의 압력, 까마득한 공중에서 지상을 뛰어내릴 때처럼 압도적이고 짜릿한 감각들.
적막한 호텔 로비를 걷고 있자니, 문득 라스베이거스의 짙푸른 하늘이 그리웠다. 최근에는 일 때문에 가끔 즐기던 스카이다이빙조차 즐기지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우현이 버튼을 누르는 것도 잊고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서 있을 때, 하얗고 마디 고운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의 주인에게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따라갔다.
검은색 프라다 정장의 여자는 조금 전까지 로비에 앉아 있던 여자였다. 시선 따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있는 여자는 마치 오래된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이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마에서 코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선이 보기 좋았다. 닿을 듯이 가까이 있었지만, 짙은 속눈썹에 가려진 눈동자는 여전히 형태만 짐작할 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취 때문일까. 낯선 대상과 밀폐된 공간이 주는 은밀함이 우현의 신경을 예민하게 자극했다.
늦은 밤, 그녀는 어떤 이유로 호텔 객실을 향해 가는 것일까. 빈틈없이 차려입은 비즈니스 정장을 보니 어쩌면 업무에 지쳐 쉴 곳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위트룸이 있는 20층의 객실은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아마도 여자는 누군가와 함께 밤을 보내기 위해 호텔을 찾았을 것이다.
객실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은 과연 어떤 남자일까. 사랑을 나눌 때도 그녀는 지금처럼 무표정하고 싸늘한 표정을 지을까. 붉은색 램프가 켜지는 것과 동시에 우현의 상상도 멈추었다. 순간 우현은 스스로의 상상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여자가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은 자세로 반듯하게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현 역시 걸음을 내디뎠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걷던 여자가 둔중하게 닫힌 객실 문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유난히 시티뷰가 좋은 스위트룸이었다.
망설이는 표정의 여자가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듯이 가만히 문을 두드렸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여자가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흥미를 끌던 모든 것이 마치 따분한 무성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지루하게 느껴졌다. 스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이 있을까. 여자는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 정도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널려 있었다.
손을 뻗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흔해 빠진 것들. 그저 내킬 때, 즐기면 그만이었다. 뻔하고 따분한 스토리는 질색이다. 여자가 들어간 객실을 지나치는 우현의 표정이 평소처럼 무심하게 변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명쾌하고 분명했다. 그러나 삶이 불확실한 만큼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습기를 머금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우현은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헤어 나올 수 있다면 더 이상 늪이 아니다. 늪은 어딘가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 깊이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객실 문을 열자,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서경과 시선이 마주친 여자가 삐딱하게 웃었다.
“그 사람은 욕실에 있어요. 보다시피 꽤 진하게 놀았거든요.”
광택이 나는 크림색 실크 가운을 걸쳤음에도 여자의 농염한 몸은 여기저기에 진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서경의 표정을 살피던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을 부른 건 그가 아니에요. 내가 잠시 그의 휴대폰을 빌렸어요.”
로비에서 메시지를 보고 망설이다가 객실까지 올라왔다. 언제나 먼발치에서 보았던 화사한 외모의 여자는 오늘따라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할 말 있으면 어서 하세요.”
서경이 말했다. 재촉하고 싶지 않지만, 비릿한 향취가 떠도는 밀폐된 공간이 답답하기만 했다. 무심한 반응에 화가 났는지, 여자가 무언가를 집어서 서경의 발밑에 던졌다.
“오늘은 평소보다 두둑하더군요.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서경이 발밑에 놓인 하얀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삐죽이 나온 수표 뭉치가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와 섞여 들어 불편한 기분을 끌어냈다. 차마 시선을 마주 볼 수가 없어서 창으로 보이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시 돌려줘도 그 사람은 받지 않을 테죠. 그래서 당신을 불렀어요. 쌍둥이처럼 가까운 사이니까 그 대신 받아 줘요.”
명령조에 가까운 오만한 말투였지만, 방향을 잃은 눈동자는 금방이라고 물기가 배어 나올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안타까운 마음에 서경이 봉투를 챙겨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와 이야기를 해 봐요. 그래도 일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잖아요.”
“껍데기뿐인 관계. 이제는 나도 지쳤어요.”
탄식처럼 여자가 중얼거렸다.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었다. 시혁이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어서 객실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서경이 돌아 나가려는 순간, 여자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가 다른 여자를 안는 동안 로비에 혼자 앉아 있는 기분이 어때요?”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이 아니었다. 서경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와 몸을 섞는 나도 우습지만, 당신 역시 우습기는 마찬가지잖아요.”
“…….”
“아니, 정말 우스운 것은 욕실에 있는 저 남자인가? 끔찍하게 아끼는 여자 앞에서 보란 듯이 다른 여자를 안는 심리. 난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사람을 많이 가리는 시혁은 잠자리 상대를 고르는 데도 몹시 까다로운 남자였다. 철저하게 선택하고 가차 없이 군림했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는 것은 그녀의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저토록 사랑스러운 여자를 어찌 마음 없이 안을 수 있을까.
연민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이어졌다. 마음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난 여자의 얼굴이 마치 일그러진 자신의 자화상 같아서, 서경은 쫓기듯이 객실 밖으로 나왔다.
폐 안쪽까지 진득하게 따라붙는 탁한 공기에 서경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회색빛 인조석 위에 드리운 긴 그림자를 응시하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스미는 서늘한 공기가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듯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찬 공기 속으로 익숙한 향취가 섞여 들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
피곤한 안색의 시혁이었다. 서경이 힘없이 웃었다.
“조금 전에.”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늦은 시간까지 왜 이러고 있어?”
“……장소를 남기는 건, 기다려 달라는 뜻이잖아.”
시혁의 시선이 비켜 갔다.
“추운데, 차 안에서 기다려.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갈게.”
서경은 차로 가는 대신 그에게서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시혁의 손에 들린 담배가 푸른 불꽃으로 일렁였다. 필터를 빨아 당길 때마다, 습관처럼 찡그려지는 미간이 퇴폐적으로 보이지만, 뿜어내는 연기와 함께 해방을 맞이하는 듯한 표정이 마치 어린 소년처럼 무방비하게 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런 모습의 그를 지켜본 것이. 그에게 담배가 습관이고 해방이듯이 서경에게 시혁라는 존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경을 따라 차에 오른 시혁이 이내 눈을 감았다. 그가 편히 쉬도록 좌석을 조정해 주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피곤하면 호텔에서 자고 가지, 뭐 하러 무리해서 나와.”
“알잖아. 누가 옆에 있으면 잠들지 못하는 거. 집이 편해.”
운전대를 잡은 서경이 곤히 잠든 시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느슨하게 흘러내린 앞머리와 길게 드리운 속눈썹의 그림자가 부서질 듯이 연약해 보였다. 순간, 서경은 저도 모르게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1
시혁을 처음 만난 것은 17년 전의 여름이었다. 유난히 덥고 건조했던 그해의 여름은, 지금도 그 날씨만큼이나 지독하게 서경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시절 어른들은 IMF다, 뭐다 하며 삼삼오오 모여 앉아 푸념을 늘어놓았다. 평범하고 화목했던 서경의 가족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해 봄, 아버지는 다니던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했고 생활고를 못 이긴 엄마는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말없이 집을 나갔다. 남동생 서준마저 급성뇌종양이 발병하여 몸져눕자, 아버지는 막일을 마다치 않다가 결국 공사판에서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한꺼번에 찾아온 불행에 어린 서경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다가온 불행을 한탄만 할 수는 없었다. 동생 서준은 힘든 가운데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았고, 몸도 성치 않은 아버지는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그렇게 푹푹 찌던 여름이 시작되었다.
“헉…… 헉…….”
이사 온 지 몇 달이 지났건만, 어린 서경에게 집으로 난 비탈길은 늘 숨 가쁘고 고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동생 서준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들렀다가, 집으로 난 가파른 언덕길을 급히 올랐다.
며칠째 아버지는 연락이 없었다. 사흘 전인가,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집 안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누워 있는 서준을 둘러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발병 후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서준의 입원 절차를 마치고, 옆 동네 사는 고모에게 잘 부탁한다며 두둑한 돈 봉투를 건네는 것이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아픈 동생 곁에 꼭 붙어 있으라고 신신당부하던 아버지의 슬픈 눈을 떠올리자, 서경의 걸음은 저절로 빨라졌다.
비탈길 끝, 허름하고 낡은 집에 도착한 서경이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서 방문 앞 댓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낡은 구두는 어디에도 없었다. 실망한 것도 잠시, 서경이 무언가 떠오른 듯이 걸음을 돌려 언덕길을 급히 달려갔다.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둠이 내린 시내 중심가의 나이트클럽은 요란한 네온사인 불빛으로 제 모습을 치장했다. 아버지는 옆집 지영이 삼촌의 소개로 최근까지 이곳 나이트클럽에서 심부름도 하고 잡일도 하며 일을 거들었다. 아마도 은행을 다닌 아버지의 경력이 도움되었던 모양이다.
화려한 간판과 요란한 불빛으로 번쩍이는 정문 옆의 좁은 통로를 지나자, 직원 출입구로 보이는 허름한 문이 보였다. 서경이 주변을 살피며 문을 열었다. 길고 어두운 복도 끝에는 아버지가 일하는 작은 사무실이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prologue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의 호텔 로비는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시간이라, 이 시간에 호텔을 찾는 객들은 쫓기듯이 제 갈 길을 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로비 한구석, 소파에 앉은 여자는 마치 밀랍인형을 앉혀 놓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블랙 슈트에 한 올도 남김없이 말아서 묶은 헤어스타일. 단순하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 한 차림은 오히려 그녀의 갸름한 얼굴 윤곽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잘 빚어 놓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와 선명한 윤곽의 붉은 입술. 내리뜬 눈매는 정확한 모양을 알 수 없지만, 긴 속눈썹의 모양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로비를 지나쳐 프런트 데스크로 향하던 우현의 시선이 대리석 석상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아름다움에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현의 시선이 멈춘 것은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호텔의 특성상, 다양한 사람과 제각기 다른 사연이 공존하는 곳이지만, 발 아래를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이 어딘가 부서질 듯이 공허하고 서늘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나칠 만큼 타인에게 무심하다는 평판을 듣는 우현은 평소답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얼핏 쓴웃음이 나왔다. 시선을 거둔 우현이 프런트 데스크로 향했다.
우현을 발견한 데스크의 직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장 비서님께 연락받고, 늘 쓰시던 객실로 비워 놓았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데스크 직원이 카드키를 건넸다. 가벼운 미소를 건넨 우현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텔 별관 집무실에는 따로 사용하는 프라이빗 룸이 있지만,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고층 객실이 좋아서 기분 내킬 때마다 본관에서 쉬어 가고는 했다.
최근 리모델링한 호텔은 기존의 중후하고 클래식한 분위기 대신에, 갤러리 형태의 심플하고 모던한 내부 장식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트렌드에 맞는 조각이나 회화, 갖가지 예술 작품을 곳곳에 장식하여 감각적인 느낌을 살리고 단순한 형태의 철골 계단 등을 설치하여 독특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가미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스타일과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고객들이 유입되면서 매출 역시 나날이 상승했다. 언론에서는 패기에 찬 젊은 후계자가 호텔 경영에 나서면서 호텔 역시 젊고 감각적으로 변했다고 호의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동시에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일부 이사진들의 태도 역시 최근 눈에 띄게 달라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 모든 것이 무료하고 따분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자극이 필요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숨 막히는 공기의 압력, 까마득한 공중에서 지상을 뛰어내릴 때처럼 압도적이고 짜릿한 감각들.
적막한 호텔 로비를 걷고 있자니, 문득 라스베이거스의 짙푸른 하늘이 그리웠다. 최근에는 일 때문에 가끔 즐기던 스카이다이빙조차 즐기지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우현이 버튼을 누르는 것도 잊고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서 있을 때, 하얗고 마디 고운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의 주인에게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따라갔다.
검은색 프라다 정장의 여자는 조금 전까지 로비에 앉아 있던 여자였다. 시선 따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있는 여자는 마치 오래된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이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마에서 코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선이 보기 좋았다. 닿을 듯이 가까이 있었지만, 짙은 속눈썹에 가려진 눈동자는 여전히 형태만 짐작할 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취 때문일까. 낯선 대상과 밀폐된 공간이 주는 은밀함이 우현의 신경을 예민하게 자극했다.
늦은 밤, 그녀는 어떤 이유로 호텔 객실을 향해 가는 것일까. 빈틈없이 차려입은 비즈니스 정장을 보니 어쩌면 업무에 지쳐 쉴 곳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위트룸이 있는 20층의 객실은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아마도 여자는 누군가와 함께 밤을 보내기 위해 호텔을 찾았을 것이다.
객실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은 과연 어떤 남자일까. 사랑을 나눌 때도 그녀는 지금처럼 무표정하고 싸늘한 표정을 지을까. 붉은색 램프가 켜지는 것과 동시에 우현의 상상도 멈추었다. 순간 우현은 스스로의 상상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여자가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은 자세로 반듯하게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현 역시 걸음을 내디뎠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걷던 여자가 둔중하게 닫힌 객실 문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유난히 시티뷰가 좋은 스위트룸이었다.
망설이는 표정의 여자가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듯이 가만히 문을 두드렸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여자가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흥미를 끌던 모든 것이 마치 따분한 무성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지루하게 느껴졌다. 스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이 있을까. 여자는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 정도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널려 있었다.
손을 뻗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흔해 빠진 것들. 그저 내킬 때, 즐기면 그만이었다. 뻔하고 따분한 스토리는 질색이다. 여자가 들어간 객실을 지나치는 우현의 표정이 평소처럼 무심하게 변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명쾌하고 분명했다. 그러나 삶이 불확실한 만큼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습기를 머금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우현은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헤어 나올 수 있다면 더 이상 늪이 아니다. 늪은 어딘가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 깊이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객실 문을 열자,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서경과 시선이 마주친 여자가 삐딱하게 웃었다.
“그 사람은 욕실에 있어요. 보다시피 꽤 진하게 놀았거든요.”
광택이 나는 크림색 실크 가운을 걸쳤음에도 여자의 농염한 몸은 여기저기에 진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서경의 표정을 살피던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을 부른 건 그가 아니에요. 내가 잠시 그의 휴대폰을 빌렸어요.”
로비에서 메시지를 보고 망설이다가 객실까지 올라왔다. 언제나 먼발치에서 보았던 화사한 외모의 여자는 오늘따라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할 말 있으면 어서 하세요.”
서경이 말했다. 재촉하고 싶지 않지만, 비릿한 향취가 떠도는 밀폐된 공간이 답답하기만 했다. 무심한 반응에 화가 났는지, 여자가 무언가를 집어서 서경의 발밑에 던졌다.
“오늘은 평소보다 두둑하더군요.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서경이 발밑에 놓인 하얀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삐죽이 나온 수표 뭉치가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와 섞여 들어 불편한 기분을 끌어냈다. 차마 시선을 마주 볼 수가 없어서 창으로 보이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시 돌려줘도 그 사람은 받지 않을 테죠. 그래서 당신을 불렀어요. 쌍둥이처럼 가까운 사이니까 그 대신 받아 줘요.”
명령조에 가까운 오만한 말투였지만, 방향을 잃은 눈동자는 금방이라고 물기가 배어 나올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안타까운 마음에 서경이 봉투를 챙겨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와 이야기를 해 봐요. 그래도 일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잖아요.”
“껍데기뿐인 관계. 이제는 나도 지쳤어요.”
탄식처럼 여자가 중얼거렸다.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었다. 시혁이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어서 객실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서경이 돌아 나가려는 순간, 여자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가 다른 여자를 안는 동안 로비에 혼자 앉아 있는 기분이 어때요?”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이 아니었다. 서경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와 몸을 섞는 나도 우습지만, 당신 역시 우습기는 마찬가지잖아요.”
“…….”
“아니, 정말 우스운 것은 욕실에 있는 저 남자인가? 끔찍하게 아끼는 여자 앞에서 보란 듯이 다른 여자를 안는 심리. 난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사람을 많이 가리는 시혁은 잠자리 상대를 고르는 데도 몹시 까다로운 남자였다. 철저하게 선택하고 가차 없이 군림했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는 것은 그녀의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저토록 사랑스러운 여자를 어찌 마음 없이 안을 수 있을까.
연민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이어졌다. 마음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난 여자의 얼굴이 마치 일그러진 자신의 자화상 같아서, 서경은 쫓기듯이 객실 밖으로 나왔다.
폐 안쪽까지 진득하게 따라붙는 탁한 공기에 서경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회색빛 인조석 위에 드리운 긴 그림자를 응시하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스미는 서늘한 공기가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듯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찬 공기 속으로 익숙한 향취가 섞여 들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
피곤한 안색의 시혁이었다. 서경이 힘없이 웃었다.
“조금 전에.”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늦은 시간까지 왜 이러고 있어?”
“……장소를 남기는 건, 기다려 달라는 뜻이잖아.”
시혁의 시선이 비켜 갔다.
“추운데, 차 안에서 기다려.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갈게.”
서경은 차로 가는 대신 그에게서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시혁의 손에 들린 담배가 푸른 불꽃으로 일렁였다. 필터를 빨아 당길 때마다, 습관처럼 찡그려지는 미간이 퇴폐적으로 보이지만, 뿜어내는 연기와 함께 해방을 맞이하는 듯한 표정이 마치 어린 소년처럼 무방비하게 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런 모습의 그를 지켜본 것이. 그에게 담배가 습관이고 해방이듯이 서경에게 시혁라는 존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경을 따라 차에 오른 시혁이 이내 눈을 감았다. 그가 편히 쉬도록 좌석을 조정해 주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피곤하면 호텔에서 자고 가지, 뭐 하러 무리해서 나와.”
“알잖아. 누가 옆에 있으면 잠들지 못하는 거. 집이 편해.”
운전대를 잡은 서경이 곤히 잠든 시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느슨하게 흘러내린 앞머리와 길게 드리운 속눈썹의 그림자가 부서질 듯이 연약해 보였다. 순간, 서경은 저도 모르게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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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혁을 처음 만난 것은 17년 전의 여름이었다. 유난히 덥고 건조했던 그해의 여름은, 지금도 그 날씨만큼이나 지독하게 서경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시절 어른들은 IMF다, 뭐다 하며 삼삼오오 모여 앉아 푸념을 늘어놓았다. 평범하고 화목했던 서경의 가족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해 봄, 아버지는 다니던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했고 생활고를 못 이긴 엄마는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말없이 집을 나갔다. 남동생 서준마저 급성뇌종양이 발병하여 몸져눕자, 아버지는 막일을 마다치 않다가 결국 공사판에서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한꺼번에 찾아온 불행에 어린 서경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다가온 불행을 한탄만 할 수는 없었다. 동생 서준은 힘든 가운데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았고, 몸도 성치 않은 아버지는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그렇게 푹푹 찌던 여름이 시작되었다.
“헉…… 헉…….”
이사 온 지 몇 달이 지났건만, 어린 서경에게 집으로 난 비탈길은 늘 숨 가쁘고 고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동생 서준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들렀다가, 집으로 난 가파른 언덕길을 급히 올랐다.
며칠째 아버지는 연락이 없었다. 사흘 전인가,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집 안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누워 있는 서준을 둘러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발병 후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서준의 입원 절차를 마치고, 옆 동네 사는 고모에게 잘 부탁한다며 두둑한 돈 봉투를 건네는 것이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아픈 동생 곁에 꼭 붙어 있으라고 신신당부하던 아버지의 슬픈 눈을 떠올리자, 서경의 걸음은 저절로 빨라졌다.
비탈길 끝, 허름하고 낡은 집에 도착한 서경이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서 방문 앞 댓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낡은 구두는 어디에도 없었다. 실망한 것도 잠시, 서경이 무언가 떠오른 듯이 걸음을 돌려 언덕길을 급히 달려갔다.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둠이 내린 시내 중심가의 나이트클럽은 요란한 네온사인 불빛으로 제 모습을 치장했다. 아버지는 옆집 지영이 삼촌의 소개로 최근까지 이곳 나이트클럽에서 심부름도 하고 잡일도 하며 일을 거들었다. 아마도 은행을 다닌 아버지의 경력이 도움되었던 모양이다.
화려한 간판과 요란한 불빛으로 번쩍이는 정문 옆의 좁은 통로를 지나자, 직원 출입구로 보이는 허름한 문이 보였다. 서경이 주변을 살피며 문을 열었다. 길고 어두운 복도 끝에는 아버지가 일하는 작은 사무실이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그곳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