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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서경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정상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남자는 냉혹하고 오만했다. 그의 눈이 즐거워하고 있다. 내숭 떨지 말고 맘껏 유혹해 보라고.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조소하는 그의 얼굴에 차디찬 물을 끼얹고 싶었다.
내리뜬 서경의 눈동자가 우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합자 건 성사시켜 주세요. 오늘 밤 당신을 즐겁게 해 드리죠.”
“좋아요! 합자 건은 성사된 거로 합시다. 그만 일어나죠.”
우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뒤를 서경이 따랐다.
3
쏴아― 쏴아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서경은 문득 17년 전 여름, 성북동 저택의 문지방을 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한 치의 빛조차 허용하지 않는 어둠 속을 걷는 것처럼 모든 것이 두렵고 막막했다.
그 후, 최 회장은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경은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들 최시혁의 그림자로 사는 것. 그 목적을 위해서 최 회장은 물질적인 원조와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자신 역시 시혁을 놓칠세라 악착같이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반복되는 생각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뿌리를 내려서 삶의 목적을 부여한다. 시혁은 습관이고 목적이 되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던 그것을 주고 싶었다. 강박증에 가까운 비틀린 감정이라도 좋았다.
제 마음을 배신한 행위에선 어떤 정당성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왔다. 오직 한 남자뿐이었다.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그만을 바라보고 그의 소리에만 귀 기울였으며 그의 생각으로 자신을 가득 채웠다.
낯선 공간. 낯선 남자. 이곳은 과연 어디일까. 마치 17년 전, 뜨거운 여름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가늘게 몸이 떨려 왔다.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객실 밖까지 새어 나왔다. 창밖을 응시하는 우현의 입술에는 차가운 냉소가 떠나지 않았다. 호텔을 향해 오는 내내 서경은 말이 없었다. 의도적인 접근이었고 원하는 것을 숨기려는 기색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딘가 상처 입은 표정이었다.
우현 역시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일이든 사람이든 산뜻하고 분명한 것이 좋았다. 로비를 통해 여자를 안을 만큼 여자가 아쉬웠던 적도 없었다. 상대는 목적을 위해선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던지는 여자였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요구하는 것을 기꺼이 주고 여자를 갖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 번째 와인 잔을 들이켜고 있을 때, 욕실 문이 열리며 서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현의 시선이 샤워 가운을 입은 서경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가운 깃을 여미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비켜 가는 시선 역시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남자를 처음 경험하는 순진한 처녀 같은 태도에 우현은 돌연 쓴웃음이 나왔다.
“이리 와서 한잔해요.”
홈 바에 기대선 우현이 서경에게 앉기를 청하자, 마지못해 몸을 돌린 서경이 긴 의자에 걸터앉았다. 홍조 띤 뺨과 가운 사이로 드러난 매끄러운 다리가 시선에 들어오자, 남자로서의 욕망이 들끓었다. 그러나 서두를 필요가 없다. 약속한 밤은 길고 그녀를 안을 시간은 충분하니까.
“영화 좋아해요? 이곳에 괜찮은 DVD가 몇 개 있는데.”
둥근 유리잔에 와인을 따르며 우현이 물었다.
“아니요.”
단답형의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음악은 어때요. 나는 재즈를 즐겨 듣는 편인데. 서경 씨는…….”
“저기, 정 대표님.”
따라 준 와인을 벌컥 들이켠 서경이 우현의 말을 불쑥 끊었다.
“빨리 끝내는 건 어떨까요? 이미 시간도 늦었는데.”
순간, 우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설사 하룻밤 상대라도,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다. 긴장을 풀려는 자신의 배려조차,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모양이었다.
“빨리 끝내다니, 무얼 말입니까?”
놀리는 말투에 서경이 고개를 돌렸다.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단단히 말아 쥔 손가락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저절로 시선이 따라갔다. 만약 처음의 기억이 없었다면, 애잔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욕망에 이끌려서 그녀의 제의를 수락했듯이 그녀 역시 몸을 수단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닳고 닳은 여자에 불과했다. 불현듯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수줍은 제스처가 역겹게 느껴졌다.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경에게 다가갔다. 흠칫 놀라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실소가 나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한바탕 즐기고 깨끗이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그럴 생각은 없는데, 어쩌지?”
가느다란 목덜미에 입술을 묻자, 그녀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그녀를 안고 있으니, 마치 처녀를 농락하는 양아치가 된 기분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커다란 대가를 지급했어. 그러니 제대로 된 서비스가 필요하겠지. 안 그래요. 한서경 씨?”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우현이 서경의 새하얀 가운 자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가운이 벗겨지자, 서경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드러난 몸을 샅샅이 훑어 내리는 시선이 두려웠다. 살갗을 파고드는 눈동자는 불꽃보다 뜨겁고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서경이 눈을 질끈 감자, 우현이 앉아 있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그대로 일으켜 세웠다.
“내숭 떠는 여자는 질색인데, 어때요. 지금이라도 그만둘까요?”
귓가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우현이 속삭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서경이 우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자, 피식하면서 김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이렇게 돌변할 필요는 없는데.”
섬세하면서도 남자다운 손이 서경의 목덜미를 거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주었다. 이어지는 손길이 볼을 쓰다듬고 턱을 단단히 고정하며 시선을 부딪쳐 왔다.
단정한 이목구비가 부드러우면서도 유연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위로 살짝 올라간 아몬드 모양의 눈매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이 날카로웠다.
알몸이 되어서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스스로를 의식하자, 서경은 곤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시선을 내리자, 마치 경고라도 하는 듯이 그의 손이 서경의 턱을 단단하게 고정했다.
“처음부터 궁금했었지. 이토록 아름다운 눈동자라니.”
혼잣말처럼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이 턱 끝을 간질이며 입술을 더듬었다. 강도를 더해 가는 진한 키스에 서경이 숨도 못 쉬고 헐떡거렸다.
“처녀 행세라니. 재미있긴 하군.”
입술에서 나온 혀가 귀 안쪽을 핥으며 속삭였다. 당황한 서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덜미 안쪽으로 파고들던 입술이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며 키스를 퍼부어 댔다. 서경의 어설픈 키스가 재미있는지, 그녀를 어루만지는 내내 그가 키득대며 웃었다.
우현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스스로도 낯선 남자에게 안겨 있는 제 모습이 낯설고 어색했다. 농염한 행위는 점차 강도를 더해 갔다. 우현이 서경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그리고 그녀에게 더 깊이 자신을 묻으며 속삭였다.
“느껴져요? 당신을 미칠 듯이 원하는 내가?”
단단한 무엇이 그녀에게 닿아 왔다. 당황하여 물러나려는 서경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괜한 짓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원하는 것을 주기로 했으니 약속은 반드시 지키죠.”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서경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존댓말과 반말이 섞인 말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경을 안아 올린 우현이 그녀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
우현이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있는 서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걸치고 있던 자신의 가운을 거침없이 벗어 던졌다.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눈을 질끈 감고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지만, 경고가 담긴 눈동자는 용서가 없었다. 남자의 몸은 아름다웠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날렵하고 매끈한 몸이 야생의 동물처럼 거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르내리는 탄탄한 가슴을 지나서 아래도 내려가던 서경의 눈이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제멋대로 흔들렸다. 침대로 다가온 우현이 비켜 간 그녀의 시선을 바로잡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그가 서경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잡고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밀착된 몸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맥박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우현이 날카로운 이를 세워서 서경의 가슴에 입을 맞췄다.
“아…….”
척추를 관통하는 낯선 쾌감에 소스라치게 놀란 서경이 억눌린 신음을 쏟아 냈다. 우현이 움직임을 멈추지 않은 채, 서경을 올려다보았다. 치켜뜬 눈동자가 짓궂은 아이처럼 장난기로 가득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온몸 구석구석이 불에 덴 듯이 뜨겁고 화끈거렸다.
처음이었다. 오감을 깨우는 낯설고 생생한 감각에 서경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치 몸과 영혼이 분리된 것처럼, 생각은 허공 위를 빙빙 돌고 몸은 그가 주는 쾌락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허우적댔다.
꿈이었다. 이것이 현실일 턱이 없었다. 서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무심한 듯 사려 깊은 눈동자.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입술,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또…….
시혁을 성적인 대상으로 떠올린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떠올려야 한다. 시혁은 삶 자체이자, 자신이 소유한 전부였다. 모든 것이 무너진다. 산산이 부서진다. 지금까지 쌓아 온 세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 한다.
“눈을 떠요! 서경 씨.”
차분하지만 단호한 부름에 서경이 번쩍 눈을 떴다.
“나를 봐요. 사랑을 나누면서 눈 감는 거 싫습니다.”
모르는 목소리, 모르는 눈동자. 꿈이 아니었다. 분명한 현실이었다. 서경은 북받치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그녀의 감정을 눈치라도 챈 듯이 다정한 손길이 땀으로 젖은 서경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억지로 여자를 안는 취미는 없어요. 싫다면 분명히 말해요.”
남자의 눈매가 길게 접혔다. 접히는 눈매가 누군가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돌아갈 곳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오지 않았다. 후회할 선택이라면 처음부터 결심하지 않았다.
부표도 없이 떠돌던 삶에 처음부터 희망 따윈 없었다. 마침내 결심한 듯이 서경이 우현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를 당겨 안았다.
“싫지 않아요.”
서경의 반응이 흡족한지, 우현이 서경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얽힌 몸 사이로 남자의 욕망이 느껴졌지만, 더는 두렵지 않았다.
“이제야 좀 솔직해지는군요.”
뜨거운 입김이 귓가를 스쳤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우현이 갑자기 자세를 바꾸었다. 욕망으로 흐려진 눈동자가 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달빛과 어우러져 기묘한 빛을 뿜어냈다. 본능적으로 움츠리려는 서경의 몸을 고정하고 우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윽고 그녀를 안았다.
“아…….”
서경은 시트를 움켜잡고 참으려 했지만 속까지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이런 젠장!”
갑작스러운 외침에 서경이 질끈 감은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충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한 것도 잠시, 우현이 순식간에 서경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현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그러나 몸은 달랐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에 온 신경이 미친 듯이 아우성쳤다.
“하…… 미치겠군.”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녀는 처음이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처음이라고…….”
시선을 피하는 서경의 뺨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금방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았다. 애잔하고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녀가 처음이기 때문일까.
“처음이라고 말하면 이야기가 달라지나요? 저는 괜찮아요.”
서경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정상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남자는 냉혹하고 오만했다. 그의 눈이 즐거워하고 있다. 내숭 떨지 말고 맘껏 유혹해 보라고.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조소하는 그의 얼굴에 차디찬 물을 끼얹고 싶었다.
내리뜬 서경의 눈동자가 우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합자 건 성사시켜 주세요. 오늘 밤 당신을 즐겁게 해 드리죠.”
“좋아요! 합자 건은 성사된 거로 합시다. 그만 일어나죠.”
우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뒤를 서경이 따랐다.
3
쏴아― 쏴아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서경은 문득 17년 전 여름, 성북동 저택의 문지방을 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한 치의 빛조차 허용하지 않는 어둠 속을 걷는 것처럼 모든 것이 두렵고 막막했다.
그 후, 최 회장은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경은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들 최시혁의 그림자로 사는 것. 그 목적을 위해서 최 회장은 물질적인 원조와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자신 역시 시혁을 놓칠세라 악착같이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반복되는 생각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뿌리를 내려서 삶의 목적을 부여한다. 시혁은 습관이고 목적이 되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던 그것을 주고 싶었다. 강박증에 가까운 비틀린 감정이라도 좋았다.
제 마음을 배신한 행위에선 어떤 정당성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왔다. 오직 한 남자뿐이었다.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그만을 바라보고 그의 소리에만 귀 기울였으며 그의 생각으로 자신을 가득 채웠다.
낯선 공간. 낯선 남자. 이곳은 과연 어디일까. 마치 17년 전, 뜨거운 여름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가늘게 몸이 떨려 왔다.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객실 밖까지 새어 나왔다. 창밖을 응시하는 우현의 입술에는 차가운 냉소가 떠나지 않았다. 호텔을 향해 오는 내내 서경은 말이 없었다. 의도적인 접근이었고 원하는 것을 숨기려는 기색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딘가 상처 입은 표정이었다.
우현 역시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일이든 사람이든 산뜻하고 분명한 것이 좋았다. 로비를 통해 여자를 안을 만큼 여자가 아쉬웠던 적도 없었다. 상대는 목적을 위해선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던지는 여자였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요구하는 것을 기꺼이 주고 여자를 갖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 번째 와인 잔을 들이켜고 있을 때, 욕실 문이 열리며 서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현의 시선이 샤워 가운을 입은 서경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가운 깃을 여미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비켜 가는 시선 역시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남자를 처음 경험하는 순진한 처녀 같은 태도에 우현은 돌연 쓴웃음이 나왔다.
“이리 와서 한잔해요.”
홈 바에 기대선 우현이 서경에게 앉기를 청하자, 마지못해 몸을 돌린 서경이 긴 의자에 걸터앉았다. 홍조 띤 뺨과 가운 사이로 드러난 매끄러운 다리가 시선에 들어오자, 남자로서의 욕망이 들끓었다. 그러나 서두를 필요가 없다. 약속한 밤은 길고 그녀를 안을 시간은 충분하니까.
“영화 좋아해요? 이곳에 괜찮은 DVD가 몇 개 있는데.”
둥근 유리잔에 와인을 따르며 우현이 물었다.
“아니요.”
단답형의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음악은 어때요. 나는 재즈를 즐겨 듣는 편인데. 서경 씨는…….”
“저기, 정 대표님.”
따라 준 와인을 벌컥 들이켠 서경이 우현의 말을 불쑥 끊었다.
“빨리 끝내는 건 어떨까요? 이미 시간도 늦었는데.”
순간, 우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설사 하룻밤 상대라도,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다. 긴장을 풀려는 자신의 배려조차,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모양이었다.
“빨리 끝내다니, 무얼 말입니까?”
놀리는 말투에 서경이 고개를 돌렸다.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단단히 말아 쥔 손가락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저절로 시선이 따라갔다. 만약 처음의 기억이 없었다면, 애잔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욕망에 이끌려서 그녀의 제의를 수락했듯이 그녀 역시 몸을 수단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닳고 닳은 여자에 불과했다. 불현듯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수줍은 제스처가 역겹게 느껴졌다.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경에게 다가갔다. 흠칫 놀라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실소가 나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한바탕 즐기고 깨끗이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그럴 생각은 없는데, 어쩌지?”
가느다란 목덜미에 입술을 묻자, 그녀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그녀를 안고 있으니, 마치 처녀를 농락하는 양아치가 된 기분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커다란 대가를 지급했어. 그러니 제대로 된 서비스가 필요하겠지. 안 그래요. 한서경 씨?”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우현이 서경의 새하얀 가운 자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가운이 벗겨지자, 서경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드러난 몸을 샅샅이 훑어 내리는 시선이 두려웠다. 살갗을 파고드는 눈동자는 불꽃보다 뜨겁고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서경이 눈을 질끈 감자, 우현이 앉아 있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그대로 일으켜 세웠다.
“내숭 떠는 여자는 질색인데, 어때요. 지금이라도 그만둘까요?”
귓가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우현이 속삭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서경이 우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자, 피식하면서 김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이렇게 돌변할 필요는 없는데.”
섬세하면서도 남자다운 손이 서경의 목덜미를 거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주었다. 이어지는 손길이 볼을 쓰다듬고 턱을 단단히 고정하며 시선을 부딪쳐 왔다.
단정한 이목구비가 부드러우면서도 유연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위로 살짝 올라간 아몬드 모양의 눈매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이 날카로웠다.
알몸이 되어서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스스로를 의식하자, 서경은 곤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시선을 내리자, 마치 경고라도 하는 듯이 그의 손이 서경의 턱을 단단하게 고정했다.
“처음부터 궁금했었지. 이토록 아름다운 눈동자라니.”
혼잣말처럼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이 턱 끝을 간질이며 입술을 더듬었다. 강도를 더해 가는 진한 키스에 서경이 숨도 못 쉬고 헐떡거렸다.
“처녀 행세라니. 재미있긴 하군.”
입술에서 나온 혀가 귀 안쪽을 핥으며 속삭였다. 당황한 서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덜미 안쪽으로 파고들던 입술이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며 키스를 퍼부어 댔다. 서경의 어설픈 키스가 재미있는지, 그녀를 어루만지는 내내 그가 키득대며 웃었다.
우현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스스로도 낯선 남자에게 안겨 있는 제 모습이 낯설고 어색했다. 농염한 행위는 점차 강도를 더해 갔다. 우현이 서경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그리고 그녀에게 더 깊이 자신을 묻으며 속삭였다.
“느껴져요? 당신을 미칠 듯이 원하는 내가?”
단단한 무엇이 그녀에게 닿아 왔다. 당황하여 물러나려는 서경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괜한 짓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원하는 것을 주기로 했으니 약속은 반드시 지키죠.”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서경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존댓말과 반말이 섞인 말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경을 안아 올린 우현이 그녀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
우현이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있는 서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걸치고 있던 자신의 가운을 거침없이 벗어 던졌다.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눈을 질끈 감고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지만, 경고가 담긴 눈동자는 용서가 없었다. 남자의 몸은 아름다웠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날렵하고 매끈한 몸이 야생의 동물처럼 거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르내리는 탄탄한 가슴을 지나서 아래도 내려가던 서경의 눈이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제멋대로 흔들렸다. 침대로 다가온 우현이 비켜 간 그녀의 시선을 바로잡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그가 서경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잡고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밀착된 몸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맥박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우현이 날카로운 이를 세워서 서경의 가슴에 입을 맞췄다.
“아…….”
척추를 관통하는 낯선 쾌감에 소스라치게 놀란 서경이 억눌린 신음을 쏟아 냈다. 우현이 움직임을 멈추지 않은 채, 서경을 올려다보았다. 치켜뜬 눈동자가 짓궂은 아이처럼 장난기로 가득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온몸 구석구석이 불에 덴 듯이 뜨겁고 화끈거렸다.
처음이었다. 오감을 깨우는 낯설고 생생한 감각에 서경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치 몸과 영혼이 분리된 것처럼, 생각은 허공 위를 빙빙 돌고 몸은 그가 주는 쾌락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허우적댔다.
꿈이었다. 이것이 현실일 턱이 없었다. 서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무심한 듯 사려 깊은 눈동자.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입술,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또…….
시혁을 성적인 대상으로 떠올린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떠올려야 한다. 시혁은 삶 자체이자, 자신이 소유한 전부였다. 모든 것이 무너진다. 산산이 부서진다. 지금까지 쌓아 온 세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 한다.
“눈을 떠요! 서경 씨.”
차분하지만 단호한 부름에 서경이 번쩍 눈을 떴다.
“나를 봐요. 사랑을 나누면서 눈 감는 거 싫습니다.”
모르는 목소리, 모르는 눈동자. 꿈이 아니었다. 분명한 현실이었다. 서경은 북받치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그녀의 감정을 눈치라도 챈 듯이 다정한 손길이 땀으로 젖은 서경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억지로 여자를 안는 취미는 없어요. 싫다면 분명히 말해요.”
남자의 눈매가 길게 접혔다. 접히는 눈매가 누군가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돌아갈 곳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오지 않았다. 후회할 선택이라면 처음부터 결심하지 않았다.
부표도 없이 떠돌던 삶에 처음부터 희망 따윈 없었다. 마침내 결심한 듯이 서경이 우현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를 당겨 안았다.
“싫지 않아요.”
서경의 반응이 흡족한지, 우현이 서경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얽힌 몸 사이로 남자의 욕망이 느껴졌지만, 더는 두렵지 않았다.
“이제야 좀 솔직해지는군요.”
뜨거운 입김이 귓가를 스쳤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우현이 갑자기 자세를 바꾸었다. 욕망으로 흐려진 눈동자가 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달빛과 어우러져 기묘한 빛을 뿜어냈다. 본능적으로 움츠리려는 서경의 몸을 고정하고 우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윽고 그녀를 안았다.
“아…….”
서경은 시트를 움켜잡고 참으려 했지만 속까지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이런 젠장!”
갑작스러운 외침에 서경이 질끈 감은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충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한 것도 잠시, 우현이 순식간에 서경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현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그러나 몸은 달랐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에 온 신경이 미친 듯이 아우성쳤다.
“하…… 미치겠군.”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녀는 처음이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처음이라고…….”
시선을 피하는 서경의 뺨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금방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았다. 애잔하고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녀가 처음이기 때문일까.
“처음이라고 말하면 이야기가 달라지나요? 저는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