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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우현의 생각을 비웃듯이 고집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말이 맞다. 본질적인 면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의도적인 접근이었고 순수하지 못한 만남이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사한가. 그녀가 처녀라는 사실이 그 모든 본질을 흐리게 했다. 자신을 품고 고통을 참아 내는 모습은 정신이 나갈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럴 리가요. 조금 더 부드럽게 안아 주었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안아 주세요. 처음 약속한 대로.”
그녀가 말했다. 핏기가 가신 안색과 여전히 떨고 있는 가냘픈 몸. 그러나 또렷한 눈동자는 아무런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었다.
“당신을 안을 겁니다. 부드럽게 할 테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우현의 달라진 태도에 서경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남자를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차라리 빨리 끝내고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온몸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고 다정했다. 그의 혀가 예상치 못한 곳에 다다랐다. 놀란 서경이 몸을 움츠렸다.
“……아 ……제발. ……안 돼요.”
“괜찮아요. 처음이라 많이 아팠을 거예요.”
따스한 감촉에 몸이 제멋대로 떨렸다. 마치 상처를 핥아 내는 것처럼 부드러운 몸짓이 몸의 미세한 감각을 끄집어내고 어루만지고, 흔들었다. 그리고 낯설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곳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긴장으로 움츠렸던 몸이 그가 주는 열락에 흠뻑 젖어들었다. 느린 동작으로 몸을 일으킨 그가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긴장할 필요 없어요. 아프게 하지 않을 테니.”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자신을 묻어 왔다. 처음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하아…….”
억눌린 신음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서경의 아픔을 줄여 주기 위해, 체중을 상체에 실은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뿌옇게 흐려진 눈동자와 미간에 잡힌 주름 때문인지, 그 역시 어딘가 고통스러워 보였다. 서경이 젖은 이마를 쓸어 주자, 우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거 알아요? 쾌락이 지나치면 고통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
“당신 안에서 내가 그래요.”
꿈꾸듯이 속삭이며 그가 몸을 움직였다. 나른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무희처럼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강도를 더해 가던 행위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헉!”
“아흣.”
우현이 가쁘게 숨을 들이켜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무너지듯이 서경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땀에 젖은 우현의 등을 서경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육체를 나누는 행위는 지독히도 비현실적이지만, 몸 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존재감은 무서울 정도로 생생했다. 정우현. 그는 모르는 남자였다. 어째서 모르는 남자가 이토록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까.
시혁 역시 다른 여자와 이런 식으로 사랑을 나누었을까. 쾌락과 고통 사이를 오가며 자신 안에서 격정을 참아 내는 남자처럼 저런 눈으로 다른 여자를 바라보았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질투라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그를 깊이 사랑했으니까.
“왜 울어요? 아파서 그래요?”
우현의 말에 놀란 서경이 자신의 볼을 더듬었다. 축축하게 배어 나오는 물기에 당황스러운 것은 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안해요. 제멋대로 오해하고 당신을 아프게 해서…….”
우현의 입술이 촉촉이 젖은 서경의 뺨을 핥았다. 그의 다정함이 두려웠다. 동시에 따스한 품에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
같은 시각, 잠에서 깨어난 시혁이 달빛에 반사된 회백색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언가 불쾌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좀처럼 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지나치게 몸을 혹사한 날이나 신경이 예민한 날이면, 그는 종종 잠을 설쳤다. 한참을 자리에서 뒤척이던 시혁이 몸을 일으켰다.
본채 뒤뜰로 나온 시혁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필터를 빨아 당기자, 목을 죄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서경이 머무는 별채가 보였다. 오래된 한옥을 개량하여 새롭게 꾸민 본채와는 달리, 별채는 옛 모양 그대로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서경은 별채의 좁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늘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했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어른스러운 표정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약하고 무기력했던 유년의 기억, 그 어딘가에 그녀가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기억. 영원처럼 더디게 가던 시간은 현재라는 시간 속으로 그녀와 자신을 데려다 놓았다.
보이지 않으면 초조하고 보고 있어도 그리운 것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걷는 것처럼 힘겹고 고된 시간을 함께해 온 탓일까.
오늘 별채에는 서경이 없었다. 아버지가 머무는 요양원에 다녀온다고 했다. 별채의 불 꺼진 창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성이던 시혁이 다시 걸음 옮겼다.
*
시트에 감싸인 서경은 좀처럼 인기척이 없었다. 돌아누운 등을 어루만지며 우현이 속삭였다.
“자요?”
미세한 등의 움직임이 서경이 잠들지 않았음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대답이 없다. 혀로 척추를 핥아 올리자, 그녀가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서경 씨. 연봉이 얼마나 됩니까?”
여전히 대답이 없다. 어쩐지 그는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대단한 연봉인가 보네. 대답도 못 하는 거 보면.”
대답 없이 돌아누운 등을 보자,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날 선 말투가 튀어나왔다.
“도대체 연봉이 얼마이기에 이렇게까지 충성을 하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어요?”
“저희 대표님은 모르는 일이에요. 비밀로 해 주세요.”
좀처럼 기척이 없던 서경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등을 어루만지던 우현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비밀로 하라니? 하지만 어째서…….”
오너도 모르는 로비라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순간, 며칠 전에 언뜻 보았던 광덕회에 대한 자료가 떠올랐다. 최 회장이 어렸을 때 거두었다는 아이가 그의 아들과 함께 자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양녀나 입양의 형태도 아니고, 냉혹하다고 소문난 최 회장이 살가운 정을 주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당신이군요. 최시혁과 함께 자랐다는 아이가…….”
뜻밖의 말이었는지, 서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놀랄 거 없어요.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니까.”
“…….”
“최 회장입니까? 이런 일을 벌인 사람이?”
야심가인 최 회장은 치밀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그가 키운 장학생이 정·재계에 잔뜩 포진해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최 회장의 원조를 받으며 철저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다는 아이가 소문의 그녀라면, 현재 상황이 정확히 파악되었다.
“회장님과는 상관없어요.”
불안하게 흔들리는 서경의 눈동자가 어딘가 정처 없어 보였다. 누군가의 강요와 지시가 아니라면, 그녀가 자발적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는 말인가. 혈육 같은 정이나 일에 대한 남다른 애착일 수도 있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어린 나이에 가족과 헤어져 필요할 때를 위해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은 그녀의 행복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굴종으로 시작된 삶이 행복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거슬러 올라가기 전에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의도된 만남이고, 동기조차 불순했다. 어째서 이토록 그녀가 궁금한 것일까. 처녀였기에 마음이 흔들린 것일까.
잠자리는 그저 욕구를 풀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것에 의미를 두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우현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트를 걷어 낸 서경이 몸을 일으켰다.
“왜 일어나요?”
“그만 가 봐야겠어요.”
우현이 서경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자고 가요. 몸도 안 좋은데.”
“늦었어요.”
“늦었으니까 자고 가라는 겁니다.”
“…….”
“합자 건이 진행되는 동안, 당신을 계속 보고 싶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대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최 대표에게는 비밀로 할게요. 그리고 사업적으로도 도움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
“이리 누워요. 피곤할 텐데 같이 잡시다.”
마지못해 자리에 누운 서경의 목덜미에 우현이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4
“뭐? 성진 쪽에서 우리를 지목했다고?”
시혁이 말했다.
“그래. 투자자 선정 과정을 중단하고, 우리 손을 들어 주겠다고 그쪽 법무팀에서 연락이 왔어.”
시혁은 갑자기 쓴웃음이 나왔다. 두 달 전, 성진그룹이 기획했던 제주도 호텔과 테마파크의 건립 허가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곧바로 물밑 작업을 진행했다. 합자의 형태라니, 적기에 떨어진 최대의 호재였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었다. 필요한 것을 단 하나. 성진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성진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두 달여 동안 다방면으로 접근했지만, 상대 쪽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시혁은 한시름이 놓이면서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쪽 법무팀과 약속 잡았어. 일단 오늘은…….”
“어째서지?”
“뭐가?”
“며칠 전만 해도 효명에 기울었던 성진이 어째서 우리를 지목한 걸까?”
시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진오가 소파에 앉아 있는 서경을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생각에 잠긴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서경은 한 남자밖에 모르는 해바라기 같은 여자였다. 게다가 정우현 역시 하룻밤의 대가로 그만한 선물을 건넬 호락호락한 위인이 아니었다. 진오는 떠오르는 의혹을 혼자만의 상상이라고 치부했다.
그때 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성진 측에서는 나쁠 게 없지. 신생기업이라 말도 잘 들을 테고, 우리가 제시한 금액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
“하긴.”
시혁이 중얼거렸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결론은 마찬가지야. 길이 열렸으니, 정상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서경이 말했다.
의혹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초췌한 안색의 서경을 보니, 시혁은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이번 일에 누구보다 공들인 사람이 서경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좋은 날인데, 괜한 소리를 했구나. 근데 요즘 무슨 일 있어? 많이 피곤해 보여.”
“피곤하긴, 잠을 좀 설쳤을 뿐이야.”
서경의 시선이 비켜 갔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
“먼저 들어갈게.”
요 며칠 기운도 없고, 딴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가 마음에 걸렸다. 시혁이 돌아 나가는 서경의 뒷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진오가 불쑥 물었다.
“정우현 말이야. 네가 보기에는 어때?”
시혁은 투자 설명회에서 만난 우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고 있지만, 그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굳이 지난 2년간의 행적과 성과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단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시혁은 그의 비범함을 단번에 간파했다.
사람들은 그의 가벼움을 지적하지만, 시혁이 보기에 그것은 단순한 가벼움이 아니었다. 세상을 손아귀에 틀어 쥔 남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세상을 굽어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그 모든 것을 즐기고 있었다.
“건성인 듯 보이지만,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어.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궁금한 게 당연하지.”
얼버무리는 진오의 태도에 시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그래?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말은 무슨. 쫓아다니던 여자가 갑자기 품에 안기니, 황당해서 그런다.”
시혁이 피식 웃었다.
“애를 먹였으니, 제대로 한 방 먹여야지?”
뼈 있는 시혁의 말에 진오가 따라 웃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 괜찮겠어?”
“그러니까 더 재미있겠지.”
정우현의 속셈은 뻔했다. 합자라고는 하지만, 누가 되었든 성진의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혁은 그가 주는 떡밥 따위는 조금도 관심 없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시작에 불과하다. 남자의 발아래 세상이 놓여 있다면 자신은 그 세상 자체를 바꿀 생각이다.
*
검은색 벤츠가 호텔 별관 앞에 미끄러지듯이 다가오자, 도어맨이 기다렸다는 듯이 차 문을 열었다. 블랙 슈트를 입은 시혁이 차에서 내렸다.
뒤를 이어, 그에 대조되는 화이트 바지 정장을 입은 서경의 모습이 보였다. 이어 진오가 따라 내리자, 무심히 지나던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머물렀다.
그때, 벨 맨 뒤로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와서 가벼운 목례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모두가 별관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현의 생각을 비웃듯이 고집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말이 맞다. 본질적인 면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의도적인 접근이었고 순수하지 못한 만남이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사한가. 그녀가 처녀라는 사실이 그 모든 본질을 흐리게 했다. 자신을 품고 고통을 참아 내는 모습은 정신이 나갈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럴 리가요. 조금 더 부드럽게 안아 주었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안아 주세요. 처음 약속한 대로.”
그녀가 말했다. 핏기가 가신 안색과 여전히 떨고 있는 가냘픈 몸. 그러나 또렷한 눈동자는 아무런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었다.
“당신을 안을 겁니다. 부드럽게 할 테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우현의 달라진 태도에 서경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남자를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차라리 빨리 끝내고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온몸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고 다정했다. 그의 혀가 예상치 못한 곳에 다다랐다. 놀란 서경이 몸을 움츠렸다.
“……아 ……제발. ……안 돼요.”
“괜찮아요. 처음이라 많이 아팠을 거예요.”
따스한 감촉에 몸이 제멋대로 떨렸다. 마치 상처를 핥아 내는 것처럼 부드러운 몸짓이 몸의 미세한 감각을 끄집어내고 어루만지고, 흔들었다. 그리고 낯설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곳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긴장으로 움츠렸던 몸이 그가 주는 열락에 흠뻑 젖어들었다. 느린 동작으로 몸을 일으킨 그가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긴장할 필요 없어요. 아프게 하지 않을 테니.”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자신을 묻어 왔다. 처음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하아…….”
억눌린 신음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서경의 아픔을 줄여 주기 위해, 체중을 상체에 실은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뿌옇게 흐려진 눈동자와 미간에 잡힌 주름 때문인지, 그 역시 어딘가 고통스러워 보였다. 서경이 젖은 이마를 쓸어 주자, 우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거 알아요? 쾌락이 지나치면 고통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
“당신 안에서 내가 그래요.”
꿈꾸듯이 속삭이며 그가 몸을 움직였다. 나른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무희처럼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강도를 더해 가던 행위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헉!”
“아흣.”
우현이 가쁘게 숨을 들이켜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무너지듯이 서경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땀에 젖은 우현의 등을 서경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육체를 나누는 행위는 지독히도 비현실적이지만, 몸 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존재감은 무서울 정도로 생생했다. 정우현. 그는 모르는 남자였다. 어째서 모르는 남자가 이토록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까.
시혁 역시 다른 여자와 이런 식으로 사랑을 나누었을까. 쾌락과 고통 사이를 오가며 자신 안에서 격정을 참아 내는 남자처럼 저런 눈으로 다른 여자를 바라보았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질투라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그를 깊이 사랑했으니까.
“왜 울어요? 아파서 그래요?”
우현의 말에 놀란 서경이 자신의 볼을 더듬었다. 축축하게 배어 나오는 물기에 당황스러운 것은 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안해요. 제멋대로 오해하고 당신을 아프게 해서…….”
우현의 입술이 촉촉이 젖은 서경의 뺨을 핥았다. 그의 다정함이 두려웠다. 동시에 따스한 품에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같은 시각, 잠에서 깨어난 시혁이 달빛에 반사된 회백색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언가 불쾌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좀처럼 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지나치게 몸을 혹사한 날이나 신경이 예민한 날이면, 그는 종종 잠을 설쳤다. 한참을 자리에서 뒤척이던 시혁이 몸을 일으켰다.
본채 뒤뜰로 나온 시혁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필터를 빨아 당기자, 목을 죄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서경이 머무는 별채가 보였다. 오래된 한옥을 개량하여 새롭게 꾸민 본채와는 달리, 별채는 옛 모양 그대로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서경은 별채의 좁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늘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했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어른스러운 표정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약하고 무기력했던 유년의 기억, 그 어딘가에 그녀가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기억. 영원처럼 더디게 가던 시간은 현재라는 시간 속으로 그녀와 자신을 데려다 놓았다.
보이지 않으면 초조하고 보고 있어도 그리운 것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걷는 것처럼 힘겹고 고된 시간을 함께해 온 탓일까.
오늘 별채에는 서경이 없었다. 아버지가 머무는 요양원에 다녀온다고 했다. 별채의 불 꺼진 창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성이던 시혁이 다시 걸음 옮겼다.
시트에 감싸인 서경은 좀처럼 인기척이 없었다. 돌아누운 등을 어루만지며 우현이 속삭였다.
“자요?”
미세한 등의 움직임이 서경이 잠들지 않았음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대답이 없다. 혀로 척추를 핥아 올리자, 그녀가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서경 씨. 연봉이 얼마나 됩니까?”
여전히 대답이 없다. 어쩐지 그는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대단한 연봉인가 보네. 대답도 못 하는 거 보면.”
대답 없이 돌아누운 등을 보자,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날 선 말투가 튀어나왔다.
“도대체 연봉이 얼마이기에 이렇게까지 충성을 하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어요?”
“저희 대표님은 모르는 일이에요. 비밀로 해 주세요.”
좀처럼 기척이 없던 서경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등을 어루만지던 우현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비밀로 하라니? 하지만 어째서…….”
오너도 모르는 로비라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순간, 며칠 전에 언뜻 보았던 광덕회에 대한 자료가 떠올랐다. 최 회장이 어렸을 때 거두었다는 아이가 그의 아들과 함께 자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양녀나 입양의 형태도 아니고, 냉혹하다고 소문난 최 회장이 살가운 정을 주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당신이군요. 최시혁과 함께 자랐다는 아이가…….”
뜻밖의 말이었는지, 서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놀랄 거 없어요.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니까.”
“…….”
“최 회장입니까? 이런 일을 벌인 사람이?”
야심가인 최 회장은 치밀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그가 키운 장학생이 정·재계에 잔뜩 포진해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최 회장의 원조를 받으며 철저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다는 아이가 소문의 그녀라면, 현재 상황이 정확히 파악되었다.
“회장님과는 상관없어요.”
불안하게 흔들리는 서경의 눈동자가 어딘가 정처 없어 보였다. 누군가의 강요와 지시가 아니라면, 그녀가 자발적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는 말인가. 혈육 같은 정이나 일에 대한 남다른 애착일 수도 있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어린 나이에 가족과 헤어져 필요할 때를 위해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은 그녀의 행복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굴종으로 시작된 삶이 행복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거슬러 올라가기 전에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의도된 만남이고, 동기조차 불순했다. 어째서 이토록 그녀가 궁금한 것일까. 처녀였기에 마음이 흔들린 것일까.
잠자리는 그저 욕구를 풀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것에 의미를 두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우현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트를 걷어 낸 서경이 몸을 일으켰다.
“왜 일어나요?”
“그만 가 봐야겠어요.”
우현이 서경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자고 가요. 몸도 안 좋은데.”
“늦었어요.”
“늦었으니까 자고 가라는 겁니다.”
“…….”
“합자 건이 진행되는 동안, 당신을 계속 보고 싶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대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최 대표에게는 비밀로 할게요. 그리고 사업적으로도 도움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
“이리 누워요. 피곤할 텐데 같이 잡시다.”
마지못해 자리에 누운 서경의 목덜미에 우현이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4
“뭐? 성진 쪽에서 우리를 지목했다고?”
시혁이 말했다.
“그래. 투자자 선정 과정을 중단하고, 우리 손을 들어 주겠다고 그쪽 법무팀에서 연락이 왔어.”
시혁은 갑자기 쓴웃음이 나왔다. 두 달 전, 성진그룹이 기획했던 제주도 호텔과 테마파크의 건립 허가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곧바로 물밑 작업을 진행했다. 합자의 형태라니, 적기에 떨어진 최대의 호재였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었다. 필요한 것을 단 하나. 성진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성진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두 달여 동안 다방면으로 접근했지만, 상대 쪽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시혁은 한시름이 놓이면서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쪽 법무팀과 약속 잡았어. 일단 오늘은…….”
“어째서지?”
“뭐가?”
“며칠 전만 해도 효명에 기울었던 성진이 어째서 우리를 지목한 걸까?”
시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진오가 소파에 앉아 있는 서경을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생각에 잠긴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서경은 한 남자밖에 모르는 해바라기 같은 여자였다. 게다가 정우현 역시 하룻밤의 대가로 그만한 선물을 건넬 호락호락한 위인이 아니었다. 진오는 떠오르는 의혹을 혼자만의 상상이라고 치부했다.
그때 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성진 측에서는 나쁠 게 없지. 신생기업이라 말도 잘 들을 테고, 우리가 제시한 금액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
“하긴.”
시혁이 중얼거렸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결론은 마찬가지야. 길이 열렸으니, 정상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서경이 말했다.
의혹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초췌한 안색의 서경을 보니, 시혁은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이번 일에 누구보다 공들인 사람이 서경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좋은 날인데, 괜한 소리를 했구나. 근데 요즘 무슨 일 있어? 많이 피곤해 보여.”
“피곤하긴, 잠을 좀 설쳤을 뿐이야.”
서경의 시선이 비켜 갔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
“먼저 들어갈게.”
요 며칠 기운도 없고, 딴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가 마음에 걸렸다. 시혁이 돌아 나가는 서경의 뒷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진오가 불쑥 물었다.
“정우현 말이야. 네가 보기에는 어때?”
시혁은 투자 설명회에서 만난 우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고 있지만, 그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굳이 지난 2년간의 행적과 성과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단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시혁은 그의 비범함을 단번에 간파했다.
사람들은 그의 가벼움을 지적하지만, 시혁이 보기에 그것은 단순한 가벼움이 아니었다. 세상을 손아귀에 틀어 쥔 남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세상을 굽어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그 모든 것을 즐기고 있었다.
“건성인 듯 보이지만,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어.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궁금한 게 당연하지.”
얼버무리는 진오의 태도에 시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그래?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말은 무슨. 쫓아다니던 여자가 갑자기 품에 안기니, 황당해서 그런다.”
시혁이 피식 웃었다.
“애를 먹였으니, 제대로 한 방 먹여야지?”
뼈 있는 시혁의 말에 진오가 따라 웃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 괜찮겠어?”
“그러니까 더 재미있겠지.”
정우현의 속셈은 뻔했다. 합자라고는 하지만, 누가 되었든 성진의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혁은 그가 주는 떡밥 따위는 조금도 관심 없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시작에 불과하다. 남자의 발아래 세상이 놓여 있다면 자신은 그 세상 자체를 바꿀 생각이다.
검은색 벤츠가 호텔 별관 앞에 미끄러지듯이 다가오자, 도어맨이 기다렸다는 듯이 차 문을 열었다. 블랙 슈트를 입은 시혁이 차에서 내렸다.
뒤를 이어, 그에 대조되는 화이트 바지 정장을 입은 서경의 모습이 보였다. 이어 진오가 따라 내리자, 무심히 지나던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머물렀다.
그때, 벨 맨 뒤로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와서 가벼운 목례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모두가 별관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