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6화



길게 이어진 대리석 복도를 지나자, 그로테스크한 문양으로 꾸민 커다란 출입문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자, 두 개의 층을 합해 놓은 듯한 높은 천장의 접견실이 보였다. 데스크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접견실에 막 들어섰을 때, 투 버튼 슈트를 세련되게 차려입은 우현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우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시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시혁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내민 손을 맞잡았다. 마주 보던 두 사람이 탐색이라도 하듯이 서로를 응시했다.
비슷한 키를 가진 두 사람은, 도회적이고 세련된 차림새로 인해 언뜻 보면 비슷한 인상을 풍기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기질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거친 세월을 살아온 최 회장의 피를 물려받은 시혁은 타고난 싸움꾼이며 사냥꾼이었다.
비록 정해진 엘리트 코스를 밟고 값비싼 슈트가 그의 몸을 감싸고 있지만, 허를 찌르기 위해 숨겨 놓은 발톱은 언제라도 상대의 심장을 파고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는 아름다운 모양을 배반이라도 하듯이 날카로운 냉기로 번뜩였다.
그에 비해 정우현, 그는 처음부터 왕좌에 앉기 위해 태어난 남자였다. 이미 가진 남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삶은 신나는 모험이며 재미있는 놀이였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분위기는 모든 것을 가진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여유이며 관용이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법무팀 소속의 이진오 실장과 이번 프로젝트의 실무자인, 한서경 실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시혁이 우현에게 두 사람을 소개하자, 진오와 악수를 마친 우현의 시선이 서경에게 향했다. 매력적으로 접히는 눈에 특유의 미소가 떠올랐지만, 서경은 알 수 있었다. 눈동자가 전하는 비밀스러운 속삭임을. 부드러운 눈짓과 나지막한 목소리.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뻐근하고 짜릿한 몸의 감각을.
“한서경 씨. 저희 호텔은 처음이십니까?”
우현의 돌발적인 질문에 서경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저희 호텔이 맘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시간이 되신다면 천천히 호텔 객실을 둘러보세요. 특히 20층 스위트룸에서 보는 도시의 야경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눈동자가 서경의 몸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은밀한 밤을 떠올리게 하는 노골적인 말에 서경은 더욱 당혹스러웠다. 더구나 시혁과 함께 있는 자리였다.
서경이 뒤로 주춤 물러나자, 곁에 선 시혁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조용히 내려다보는 사려 깊은 눈동자, 마치 가슴에 A 자라는 주홍 글씨를 새겨 놓은 것처럼 아득한 슬픔이 몰려왔다.
그때 우현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지요. 늦은 점심이 되겠군요.”

진오는 앉은 자리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보통의 비즈니스 만찬은 수행 비서나 변호사가 빠진 오너 당사자들만의 은밀한 자리가 되기 마련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현은 시혁과의 독대가 아닌 자신과 서경의 자리까지 마련해 놓고 있었다.
게다가 본인의 수행 비서와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은 걸 보면 그다지 공적인 자리도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사업 파트너가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까닭 모를 날 선 무거운 분위기가 그곳에 있었다.
“정 대표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시혁이 손에 들린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얼마든지요.”
“어째서 저희를 선택했습니까? 혹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우현의 입매가 천천히 올라갔다.
“계기라면 얼마든지 있지요. 최 대표는 젊고 능력 있는 분이시죠. 게다가…….”
잠시 말을 멈춘 우현이 진오를 거쳐서 서경을 조용히 응시했다.
“이렇게 옆에서 묵묵히 돕는 든든한 분들도 계시고요.”
서경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그녀 특유의 버릇이었다. 이윽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우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닙니까. 저는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유가 또 필요합니까?”
진오가 살피는 눈길로 우현과 서경을 주시했다. 두 사람이 따로 만난 것은 알지만, 지금의 상황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좌불안석하는 서경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았다.
우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유 만만한 미소 속에 원인 모를 초조함을 감추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는 서경과 시선을 쫓는 남자, 두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경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눈치챌 정도는 아닐 것이다. 쫓기듯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서경이 대리석 벽에 몸을 기대었다. 숨을 깊숙이 들이켜자, 숨통을 죄던 긴장이 몸에서 서서히 빠져나갔다.
서경은 우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너무도 선명한 기억, 그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게 하며 끊임없이 도발했다.
이른 새벽, 서경은 잠든 우현을 뒤로하고 쫓기듯이 호텔을 빠져나왔다. 제 결정에 후회는 없지만, 그의 품에 안겨 신음을 참아 내던 자신의 모습에 지독한 혐오와 함께 좌절감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며 괴로워했지만, 염려와는 반대로 그에게서는 어떤 개인적인 연락도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깔끔하게 약속을 지켰고 그날은 하룻밤의 기억으로 잊히길 바랐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다만 도발하고 반응을 끌어내서 즐길 목적일 것이다. 그래, 그뿐이었다. 우현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상관없다. 여기까지 와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서경이 세면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백한 피부와 텅 빈 유리알 같은 눈동자. 만약 육체 안에 또 다른 무언가가 깃들어 있다면, 자신은 그 모습조차 이토록 허무한 형태를 지니고 있을 것만 같았다. 숨 가쁘게 살아왔지만, 늘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막막했다. 그러나 가혹한 삶에 후회는 없었다.
남자와 나누었던 잠자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령 세상 모두가 자신에게 손가락질한다 해도, 절망에 몸부림치는 밤이 이어진다 해도, 자신의 결정에 후회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서경이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길게 이어진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우현은 눈앞의 상황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점점 기묘한 기분까지 들었다. 시혁이 물 잔을 비우자, 서경이 비어 있는 그의 잔에 물을 따랐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선, 그리고 남자를 향한 몸짓.
지극히 단순한 행위였지만, 우현이 보기에는 마치 달콤한 입술을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더없이 미묘하고 은밀한 행위로 보였다. 살짝 비틀어진 커브스 소매 단추에, 주름 잡힌 양복 깃에, 탁자에 놓인 손가락에, 그녀의 눈이 따라갔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의 눈이 제 어미를 따라가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감각 기관이 최시혁이라는 남자만을 향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도발해 보지만, 잠시 스치기만 할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것은 자신의 반응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가 혈관을 타고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생소하고도 낯선 감정이었다.
우현이 손에 들린 와인 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투명한 유리잔 너머로 서경이 보였다. 테이블에 놓인 와인 잔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잔을 들어 그것을 입술에 머금었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와인이 가녀린 몸을 감싼 새하얀 정장을 금방이라도 붉게 물들일 것만 같았다.
그렇다. 저 몸을 알고 있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누구도 아닌 자신이 가지지 않았는가. 그날 밤, 가냘픈 몸을 무참히 가르고 그녀 안에 자신을 깊숙이 새겨 넣었다. 자신의 품에 안겨 파르르 경련하던 그녀가 떠오르자, 또다시 몸 안에서 뜨거운 욕정이 일었다.
지금 당장 거추장스러운 테이블을 걷어차고, 보란 듯이 최시혁이라는 남자 앞에서 그녀를 범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끓어오를 듯한 감정의 이면에서, 차가운 냉소를 머금은 이성이 속삭였다. 감정이 주는 유희에 속지 말라고. 그저 사내다운 호기가 불러온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하다고.
“뉴욕에서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은 지내기가 어떠세요?”
시혁의 묻는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우현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 사는 곳이야 다 거기서 거기죠. 보스턴에서 공부를 했다고 들었는데, 뉴욕에도 가끔 오셨겠군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갔었죠.”
“그렇다면 우연히 만났을 수도 있었겠어요.”
우현이 곁눈으로 서경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에 어쩐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이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죠? 오누이처럼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는데, 함께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자, 비켜 가던 서경의 시선이 돌아왔다. 우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서로 다투는 일은 없습니까? 제게도 여동생이 있는데, 마냥 귀엽다가도 한 번씩 속을 뒤집어 놓거든요.”
우현의 말에 시혁이 가만히 웃었다.
“오누이처럼 자랐지만, 오누이는 아니니까요.”
말 속의 함축된 의미가 허를 찔러 왔다. 우현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렇군요. 하지만 함께 자랐다면, 피를 나누지 않아도 오누이가 맞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한서경 씨?”
“정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오누이가 맞겠지요.”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던 지금까지의 모습이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한 눈동자로 그녀가 대꾸했다. 자신의 도발에 고집스럽게 맞서려는 태도가 허탈한 기분을 끌어냈다.
불현듯 왜곡된 감정으로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기가 어찌 되었든 그래도 살을 섞고 몸을 나누어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을 품고 울음을 참아 내던 여자였다. 애틋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다.
“농담이 지나쳤습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그만 일어날까요?”
정중하게 사과하고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경의 창백한 안색이 내내 마음에 쓰였다는 것을 우현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우현과 헤어져 호텔을 나온 세 사람이 가끔 가던 이태원의 라운지 바를 찾았다. 요즘의 트렌드와 어울리지 않는 매니아틱한 취향으로 꾸며진 곳이지만,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아서 술 생각이 나면 간혹 들르는 곳이었다. 두 달여간의 노력과 성과를 자축하는 자리지만, 술잔을 기울이는 세 사람은 어쩐지 말이 없었다.
서경이 손에 들린 칵테일 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텔에서 마신 와인과 조금 전 들이켠 칵테일이 섞여서 취기가 올라왔다. 감성을 자극하는 스테판 폼푸냑의 Hotel costes 10이 그들이 앉은 룸의 문틈으로 새어 들었다.
몽환적인 음악과 혈관에 흐르는 알코올 때문인지, 오후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은 여전했다.
“모처럼 좋은 날인데, 분위기가 왜 이래?”
진오가 시혁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의도였지만, 진오 역시 어딘가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정우현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시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서경이 손에 들린 칵테일을 들이켰다. ‘정우현’이라는 이름이 주는 초조함이 취기와 섞여 불편한 기분을 끌어냈다. 차가운 반면 따스하고, 날카로운 듯이 부드러운 남자. 호텔을 벗어날 때까지 끊임없이 따라붙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서경은 그의 존재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따지고 분석하고 결론 내고. 그냥 우리의 어딘가에 꼴렸나 보지.”
진오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사업 파트너로서 그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어. 무언가 건성인 태도도 그렇고.”
“원래 성격이 그런 거 아닐까? 소문으로는 이사진들을 제대로 갖고 논다고 하던데.”
“의도를 파악해야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할 텐데, 아직은 그자를 잘 모르겠어.”
“서두르지 말고, 조금 더 지켜보자. 어차피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잖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서경이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일에 관한 한 허물없이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지만, 지금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의 의도는 달랐다. 그저 한 기업의 CEO인 우현을 만나서 다인컴퍼니라는 새로운 기업에 대해서 차분히 설명하고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그를 마주 대하니 제 생각이 얼마나 어리숙하고 순진한지 단번에 깨달았다. 신생 기업의 일개 직원이 대기업의 오너와 마주했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이고 모순이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게다가 하룻밤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도발하는 남자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가 조롱한다면 조롱하는 대가를 받아 내고 싶었다. 원하는 것을 주고 자신 역시 원하는 것을 얻어 내고 싶었다. 삶은 처음부터 관대하지 않았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콤함을 허락하지 않는 사랑이었지만, 그래도 그 사랑을 위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만 마셔.”
시혁이 서경의 술잔을 빼앗듯이 내려놓으며 말했다. 벽면 오브제를 비추는 간접 조명을 등진 검은 눈동자가 뚫어질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은 날이잖아.”
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그를 보면 늘 웃음이 나왔다.
“지나치게 마셨어. 무리하지 마.”
술기운 때문인지 몸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단단해 보이는 어깨가 눈앞에 닿을 듯이 가까이 있었다. 가깝고도 먼 거리.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꿈. 서경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무언가가 울컥하며 올라왔지만, 이미 말라 버린 눈물샘은 눈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휴대폰 벨 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요란하게 울렸다. 시혁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의 눈이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은 서경에게 향했다.
“진영 씨”
―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했죠?
“아닙니다. 무슨 볼일이라도.”
― 아빠가 약혼식 때문에 상의할 게 있다고, 다음 주쯤 집에 한번 들르라네요.
“나중에 찾아뵐게요.”
― 그럼 바쁘실 텐데 이만 끊을게요.
“네. 그럼.”
― 아, 잠깐. 시혁 씨!
“…….”
― 아…… 아니에요. 이만 끊을게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