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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당신이 왔다고 우리 사장님이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요?”
“그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닐 텐데요?”
“사장님, 민가온 씨가 찾아오셨습니다.”
“…….”
채정의 인터폰 연결에 숨죽이고 기다리던 그녀는 비서실을 울리는 침묵에 간간히 내뱉던 호흡마저 잊었다. 그의 목소리가 곧 들려온다는 생각에 콱 잠기는 목을 애써 돋우며 기다리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침묵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장님?”
“…….”
재촉에도 그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자 채정의 입가에 헤실헤실거리는 웃음이 번졌다. 만나러 왔다는 말에 그래도 대답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만나줄 거라 생각한 그녀의 헛된 망상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사장님, 민가온 씨를 돌려보낼까요?”
채정의 결정적인 질문과 함께 돌아온 침묵에 미간을 좁히고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채정의 만족한 웃음에 사장실로 달려가 소리라도 지르려는데 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좀 빨리 대답해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나?
-바쁘니까 일 마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들었죠?”
“네, 기다리죠.”
“일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잖아요. 안 바쁘세요?”
“기다릴 거니까 나 상관하지 말고 일 하세요.”
사장실 문과 가까운 자리에 가서 앉은 그녀는 초조한 음색의 채정의 발끈거림에 피식 웃었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노려보며 샐쭉거리는 채정을 보는 그녀의 가슴이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3년의 세월에 무뎌진 건지, 아님 그녀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 건지 헛갈렸지만 그를 만나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처음 그에게 후배라고 소개를 받던 날부터 그녀는 채정이 불편하기만 했었다. 그녀를 보던 눈빛이 너무 사무적이다 못해 딱딱하다는 걸 그만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채정에 대한 긴장감을 늦출 수 없을 때, 채정이 그를 보고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보게 되었다. 그건 선배를 보는 눈빛이 아닌 남자를 보는, 암컷이 수컷을 원하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처음엔 학위며 집안이며 외모 또한 잘난 채정이 그를 원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조건이면 유부남이 아닌 남자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지 않은가. 어쨌든 저 여자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그녀가 패배자인 건가?
“커피나 음료를 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아요.”
“그런 건 기대하지 않았어요. 지금 당신 얼굴 보면서 커피나 음료를 마실 기분 아니거든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하세요.”
비꼬는 티가 역력한 채정의 말에 쓰디쓴 감정이 위로 치밀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그녀의 가정을 파괴한 주인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건 엄청난 고역이라 가슴이 모래를 삼킨 듯이 먹먹했다.
가슴을 달래려 소파 옆에 비치된 아쿠아리움의 팜플릿을 펼쳤다.
‘아, 핑순이와 핑돌이다.’
가온은 블루 아쿠아리움의 대표적인 잉꼬 동물인 핑순이와 핑돌이를 보자 예전 생각이 났다. 새끼 때부터 그녀의 손에 키우던 녀석들이고 어른이 되어 결혼하는 것까지 다 봤었는데, 여전히 부부로 남아 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녀석들, 내가 가면 알아볼까? 아, 보고 싶다.
*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지 몰라도 창밖은 이미 밤이었다. 소파 옆에 있던 팜플릿도 벌써 다 봐 볼 것이 없었고, 지겨운 채정의 얼굴도 물릴 만큼 보고 또 봐서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사람이라 이런 상황에서도 배가 고픈지 뱃속은 조금 전부터 심하게 꼬르륵거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인지, 그녀를 보기가 싫어 고생을 시키는 것인지 몰라도 그녀는 한시가 급했다.
-삐.
“네, 사장님.”
-먼저 퇴근하세요.
“아니 괜찮습니다.”
가온은 선우민의 지시에 강한 불만을 내보이는 채정의 불안한 시선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예전의 채정은 어디 가고 훤히 드러내 보이는 감정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게 입장차이라는 건가?
-박채정, 먼저 가라.
“네, 알겠습니다.”
그의 경직된 대답에 채정이 포기하는 걸 보는 게 왜 이리 통쾌한지 가온은 스스로가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선배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마.”
“난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녀는 짜증스러운 심기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 채정을 향해 벙실벙실 웃으며 여유 있게 대꾸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비서실에 쫓아와 채정에게 경고하던 일이 생각났다. 얼마나 불안한지 너도 한 번 겪어봐.
“넌 선배의 전처에 불과할 뿐이라고.”
“내가 전처면 넌 뭔데? 후배? 아님 비서?”
“말 함부로 하지 마.”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반말을 일삼은 채정에게 예의를 갖출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 여자에겐 예전부터 이래야 했었다. 남편의 후배라고 챙긴 그녀가 바보고 멍청이였다. 엄마만 아니었다면 저런 양심 없는 여자와 바람둥이 차가운 인간을 다시는 만나지 않았을 테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참아야 했다.
“넌 선배에게 남이라는 걸 잊지 마.”
“그래 난 남이 되었고 넌 여전히 남이지. 안 그래?”
“너, 뭘 믿고 이리 까부는데?”
“모르나?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거든. 물론 넌 그렇지 않겠지만.”
“야!”
“왜?”
또박또박 맞받아치자 채정의 얼굴에 그녀를 향한 놀람이 가득했다. 으레 싸늘한 얼굴이면 그녀는 감정 한 올 묻어나지 않는 얼굴로 차갑게 응수했다. 우거지상을 쓰고 전투적으로 서있는 박채정 정도면 거뜬히 참고 넘겨줄 정도로 그녀는 강해졌다.
한 남자를 사랑해 약자가 되던 민가온은 세상 사람들이 다 죽이고 오직 살아남으려는 의지만 남은 여자만 남았다. 그녀를 낳아주고 키워 주고 같이 아파해준 엄마가 곁을 떠나게 생겼는데 무슨 짓인들 못할까. 하라면 선우민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민가온, 들어와.
“자, 난 안으로 들어가 볼 테니까 먼저 퇴근 하셔.”
채정과 실랑이를 하느라 안으로 못 들어가고 있던 가온은 그의 재촉에 소파에서 일어나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실 문손잡이를 잡고 채정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고 해줬다. 채정의이 눈만 뻐끔뻐끔거리며 이를 박박 가는 것을 싱긋이 웃으며 확인한 가온은 사장실 문을 열었다. 저 여자로 인해 받은 상처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이런 걸까?
‘아……!’
누가 그랬더라? 남자의 일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3년 만에 본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선우민을 본 가온은 목구멍이 아리고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일하는 공간에 들어왔을 뿐인데 민의 담배냄새와 뒤엉킨 체취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셔츠 단추를 끄르고 와이셔츠 소매를 둘둘 말아 올린 채 사인을 하고 있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에게 냉정하게 대할 수 있겠다는 다짐이 무참히 깨어질 위험에 처했는데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선우민에게 가 있었다.
“앉아.”
“아니요. 서있을게요.”
“……!”
서류에 사인을 하던 선우민이 고개를 들었다. 소파 옆에 엉거주춤 서서 그를 보고 있는 전 부인 민가온을 쳐다보았다. 연애 때부터 톡톡 튀던 그녀는 그가 사장인 줄 모르고 도발적으로 반말을 해댔었다. 사장이라는 걸 알면 거리를 두고 존댓말을 할 줄 알았는데 절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그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에겐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존댓말을 하지 않겠다는 그녀가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뭐지? 이 느낌은? 남이 되었으니 당연히 그리 되어야 하는데 그의 가슴에 낯선 파동이 느껴졌다.
“용건이 뭐야?”
“휴…….”
그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할 만큼 그녀는 진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엄마를 잃어야 한다는 것이 더 괴로워 심장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3년 만에 이혼한 남편 얼굴 보러온 건 아닐 테고. 나 바쁘니까 어서 말하고 돌아가. 우리 사이가 편하게 대화할 사이는 아니잖아?”
정확히 3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월드 아쿠아리움을 갈 일이 있어도 그녀가 일하는 곳은 일부러 무시했었다.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준 여자가 그를 배신한 일은 자존심에 금가는 일이었고 난생처음 경험한 좌절이었다.
마음 같아선 다신 이 계통에서 일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손에서 큰 그에게 처음으로 모정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 분까지 아프게 해드릴 순 없었다.
“놀라지 말아요.”
“무슨 일이야?”
“잠깐만요.”
“무슨 일이냐니까?”
“당신이 왔다고 우리 사장님이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요?”
“그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닐 텐데요?”
“사장님, 민가온 씨가 찾아오셨습니다.”
“…….”
채정의 인터폰 연결에 숨죽이고 기다리던 그녀는 비서실을 울리는 침묵에 간간히 내뱉던 호흡마저 잊었다. 그의 목소리가 곧 들려온다는 생각에 콱 잠기는 목을 애써 돋우며 기다리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침묵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장님?”
“…….”
재촉에도 그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자 채정의 입가에 헤실헤실거리는 웃음이 번졌다. 만나러 왔다는 말에 그래도 대답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만나줄 거라 생각한 그녀의 헛된 망상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사장님, 민가온 씨를 돌려보낼까요?”
채정의 결정적인 질문과 함께 돌아온 침묵에 미간을 좁히고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채정의 만족한 웃음에 사장실로 달려가 소리라도 지르려는데 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좀 빨리 대답해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나?
-바쁘니까 일 마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들었죠?”
“네, 기다리죠.”
“일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잖아요. 안 바쁘세요?”
“기다릴 거니까 나 상관하지 말고 일 하세요.”
사장실 문과 가까운 자리에 가서 앉은 그녀는 초조한 음색의 채정의 발끈거림에 피식 웃었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노려보며 샐쭉거리는 채정을 보는 그녀의 가슴이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3년의 세월에 무뎌진 건지, 아님 그녀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 건지 헛갈렸지만 그를 만나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처음 그에게 후배라고 소개를 받던 날부터 그녀는 채정이 불편하기만 했었다. 그녀를 보던 눈빛이 너무 사무적이다 못해 딱딱하다는 걸 그만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채정에 대한 긴장감을 늦출 수 없을 때, 채정이 그를 보고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보게 되었다. 그건 선배를 보는 눈빛이 아닌 남자를 보는, 암컷이 수컷을 원하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처음엔 학위며 집안이며 외모 또한 잘난 채정이 그를 원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조건이면 유부남이 아닌 남자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지 않은가. 어쨌든 저 여자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그녀가 패배자인 건가?
“커피나 음료를 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아요.”
“그런 건 기대하지 않았어요. 지금 당신 얼굴 보면서 커피나 음료를 마실 기분 아니거든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하세요.”
비꼬는 티가 역력한 채정의 말에 쓰디쓴 감정이 위로 치밀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그녀의 가정을 파괴한 주인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건 엄청난 고역이라 가슴이 모래를 삼킨 듯이 먹먹했다.
가슴을 달래려 소파 옆에 비치된 아쿠아리움의 팜플릿을 펼쳤다.
‘아, 핑순이와 핑돌이다.’
가온은 블루 아쿠아리움의 대표적인 잉꼬 동물인 핑순이와 핑돌이를 보자 예전 생각이 났다. 새끼 때부터 그녀의 손에 키우던 녀석들이고 어른이 되어 결혼하는 것까지 다 봤었는데, 여전히 부부로 남아 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녀석들, 내가 가면 알아볼까? 아, 보고 싶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지 몰라도 창밖은 이미 밤이었다. 소파 옆에 있던 팜플릿도 벌써 다 봐 볼 것이 없었고, 지겨운 채정의 얼굴도 물릴 만큼 보고 또 봐서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사람이라 이런 상황에서도 배가 고픈지 뱃속은 조금 전부터 심하게 꼬르륵거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인지, 그녀를 보기가 싫어 고생을 시키는 것인지 몰라도 그녀는 한시가 급했다.
-삐.
“네, 사장님.”
-먼저 퇴근하세요.
“아니 괜찮습니다.”
가온은 선우민의 지시에 강한 불만을 내보이는 채정의 불안한 시선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예전의 채정은 어디 가고 훤히 드러내 보이는 감정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게 입장차이라는 건가?
-박채정, 먼저 가라.
“네, 알겠습니다.”
그의 경직된 대답에 채정이 포기하는 걸 보는 게 왜 이리 통쾌한지 가온은 스스로가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선배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마.”
“난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녀는 짜증스러운 심기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 채정을 향해 벙실벙실 웃으며 여유 있게 대꾸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비서실에 쫓아와 채정에게 경고하던 일이 생각났다. 얼마나 불안한지 너도 한 번 겪어봐.
“넌 선배의 전처에 불과할 뿐이라고.”
“내가 전처면 넌 뭔데? 후배? 아님 비서?”
“말 함부로 하지 마.”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반말을 일삼은 채정에게 예의를 갖출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 여자에겐 예전부터 이래야 했었다. 남편의 후배라고 챙긴 그녀가 바보고 멍청이였다. 엄마만 아니었다면 저런 양심 없는 여자와 바람둥이 차가운 인간을 다시는 만나지 않았을 테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참아야 했다.
“넌 선배에게 남이라는 걸 잊지 마.”
“그래 난 남이 되었고 넌 여전히 남이지. 안 그래?”
“너, 뭘 믿고 이리 까부는데?”
“모르나?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거든. 물론 넌 그렇지 않겠지만.”
“야!”
“왜?”
또박또박 맞받아치자 채정의 얼굴에 그녀를 향한 놀람이 가득했다. 으레 싸늘한 얼굴이면 그녀는 감정 한 올 묻어나지 않는 얼굴로 차갑게 응수했다. 우거지상을 쓰고 전투적으로 서있는 박채정 정도면 거뜬히 참고 넘겨줄 정도로 그녀는 강해졌다.
한 남자를 사랑해 약자가 되던 민가온은 세상 사람들이 다 죽이고 오직 살아남으려는 의지만 남은 여자만 남았다. 그녀를 낳아주고 키워 주고 같이 아파해준 엄마가 곁을 떠나게 생겼는데 무슨 짓인들 못할까. 하라면 선우민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민가온, 들어와.
“자, 난 안으로 들어가 볼 테니까 먼저 퇴근 하셔.”
채정과 실랑이를 하느라 안으로 못 들어가고 있던 가온은 그의 재촉에 소파에서 일어나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실 문손잡이를 잡고 채정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고 해줬다. 채정의이 눈만 뻐끔뻐끔거리며 이를 박박 가는 것을 싱긋이 웃으며 확인한 가온은 사장실 문을 열었다. 저 여자로 인해 받은 상처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이런 걸까?
‘아……!’
누가 그랬더라? 남자의 일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3년 만에 본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선우민을 본 가온은 목구멍이 아리고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일하는 공간에 들어왔을 뿐인데 민의 담배냄새와 뒤엉킨 체취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셔츠 단추를 끄르고 와이셔츠 소매를 둘둘 말아 올린 채 사인을 하고 있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에게 냉정하게 대할 수 있겠다는 다짐이 무참히 깨어질 위험에 처했는데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선우민에게 가 있었다.
“앉아.”
“아니요. 서있을게요.”
“……!”
서류에 사인을 하던 선우민이 고개를 들었다. 소파 옆에 엉거주춤 서서 그를 보고 있는 전 부인 민가온을 쳐다보았다. 연애 때부터 톡톡 튀던 그녀는 그가 사장인 줄 모르고 도발적으로 반말을 해댔었다. 사장이라는 걸 알면 거리를 두고 존댓말을 할 줄 알았는데 절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그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에겐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존댓말을 하지 않겠다는 그녀가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뭐지? 이 느낌은? 남이 되었으니 당연히 그리 되어야 하는데 그의 가슴에 낯선 파동이 느껴졌다.
“용건이 뭐야?”
“휴…….”
그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할 만큼 그녀는 진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엄마를 잃어야 한다는 것이 더 괴로워 심장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3년 만에 이혼한 남편 얼굴 보러온 건 아닐 테고. 나 바쁘니까 어서 말하고 돌아가. 우리 사이가 편하게 대화할 사이는 아니잖아?”
정확히 3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월드 아쿠아리움을 갈 일이 있어도 그녀가 일하는 곳은 일부러 무시했었다.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준 여자가 그를 배신한 일은 자존심에 금가는 일이었고 난생처음 경험한 좌절이었다.
마음 같아선 다신 이 계통에서 일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손에서 큰 그에게 처음으로 모정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 분까지 아프게 해드릴 순 없었다.
“놀라지 말아요.”
“무슨 일이야?”
“잠깐만요.”
“무슨 일이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