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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펭귄도 이혼은 한다


병원에서 나와 곧장 향한 곳은 오랜 시간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너무 큰 슬픔을 주기도 해서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했었다. 그녀의 발이 닿는 블록 하나하나에 깨끗이 잊었다 믿었던 기억의 창고가 들썩거렸다. 오래된 필름을 꺼내듯 그녀의 뇌리에 한 장씩 한 장씩 너무 선명하게 펼쳐져 가슴이 떨려왔다.
블루 아쿠아리움의 웅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휴…….”
한숨을 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간 가온은 심란함에 몸서리를 쳤다. 밖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에 휩싸여지자 도망가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버텼다.
처음 입사했을 때의 그 설레임, 첫 월급을 받고 너무 벅차 엄마에게 전화했던 일, 수조 청소하고 있을 때 아크릴 사이로 그와 처음 눈이 마주쳤던 일, 그와 처음으로 펭귄관에서 키스했던 일, 그와 직원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눴던 일까지 떠오르자 가온은 부르르 떨었다. 주책없이 코끝이 아려오자 그녀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억지로 웃으려 애썼다.
가슴을 칼로 후비듯 헤집은 기억이 그녀를 잠식하기 전에 어서 추억이 많은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더 이상 과거가 그녀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할 방법은 그것 밖에 없었다.
“어? 이게 누구야? 제수씨?”
“아, 안녕하세요?”
가온은 불쑥 앞에 나타난 그의 친구 석하를 보고 속으론 엄청 놀랐지만 침착함을 되찾아 차분히 인사했다. 3년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일까? 석하는 3년 전과 비교해 그리 변하지 않았다. 그도 변하지 않았을까? 그래, 그랬을 거야.
“여긴 어쩐 일이세요? 혹시 민이 만나러 왔어요?”
“네.”
“아, 그래요? 잘 됐네요. 대화로 잘 풀어 봐요.”
“저, 그게 아니라…….”
“난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연경이랑 식사 한 번 해요.”
“잠깐만요……석하 씨?”
가온은 오해하는 석하를 잡지 못하고 보내고 말았다. 뭘 잘 풀어보라는지 짐작하기에 더 난처했다. 예전에 석하의 부인 연경과 참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는데. 그때는 참 좋았었는데. 행복했기에 자신에게는 불행한 일은 전혀 안 생길 줄 알았다. 후, 다 오만이었던 것이다.
“어? 가온 씨?”
“선배님?”
‘끙, 미치겠다. 퇴근 시간을 지나서 오면 아는 얼굴들 좀 안 볼 줄 알았더니……휴.’
여기서 일할 때 함께 일했던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정수였다. 아, 3년이 지났으니 승진을 했겠지? 그녀의 눈이 정수의 왼쪽 가슴에 있는 명찰을 찾았다. 큐레이터였다. 3년의 공백이 크긴 큰 모양이었다.
아쿠아리스트가 되려면 전공이나 자격증을 가지고 입사해 밟아야 하는 단계가 있었다. 주니어아쿠아리스트를 시작으로 아쿠아리스트, 시니어아쿠아리스트,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큐레이터로 승진한다. 아쿠아리스트는 동물들이나 어류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먹이와 환경도 철저히 살펴줘야 하기 때문에 강인한 체력이 많은 필요한 직업이었다.
“잘 지냈어?”
“네, 죄송해요. 진즉에 찾아뵈려고 했는데 일이 그렇게 됐어요. 많이 섭섭하셨죠?”
처음 아쿠아리스트가 되겠다고 입사했을 때 그녀는 주니어아쿠아리스트였고 정수는 시니어아쿠아리스트였었다. 혼도 많이 나고 격려도 많이 받은 정수는 그녀에겐 좋은 선배이자 선생님이었다. 그런 선배를 그를 바닥 깊숙이 묻는 날 함께 버렸었다. 그녀가 아쿠아리스트가 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신 분인데 인사드리지도 못하고 헤어지게 되어 늘 미안했었다.
“가온 씨 사정 뻔히 다 아는데 섭섭하긴. 월드 아쿠아리움에서 일한다며?”
“네, 그렇게 됐어요.”
“세호 씨하고 함께 일하지?”
“네.”
정수의 질문에 찔끔했다. 사실 월드 아쿠아리움은 블루 아쿠아리움 보다 규모는 작아도 꾸준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곳이었다. 대학동창인 세호의 소개로 바로 직장을 잡아 쉴 틈이 전혀 없었다. 그땐 그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생각할 시간이 그녀에게 주어졌었다면 아마 한참 동안 스스로의 자괴감에 빠져 땅구덩이를 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힘들진 않아?”
“네, 그럭저럭 견딜 만 해요.”
“혹시 힘들면 언제든지 얘기해. 다른 곳 알아봐줄게.”
“네, 감사해요.”
사실 이혼녀라는 타이틀과 그녀의 전남편이 누구라는 걸 알고 있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란 매일 산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이혼녀라고 해서 일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일단 시선 자체가 달라져 버렸다. 가끔 음란한 농담을 던져오는 남자들의 행동에 울분이 터져나갈 때도 있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정답이었다.
다른 직업을 구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만, 어릴 때부터 아쿠아리스트가 되는 게 소원이라 그녀의 사생활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그녀에 관한 소문을 정수도 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좁은 세계니까.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누구 만나러 온 거야?”
“네.”
“그럼 우리 다음에 세호 씨랑 블루 식구들이랑 다 같이 한 번 만나자.”
“네, 제가 언제 한 번 연락드릴게요.”
가온은 다행히 정수가 꼬치꼬치 묻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대답하기에도 참으로 난처하기에 머리를 굴리며 적당한 대답을 찾고 있었는데, 그녀의 고민을 덜어준 것이다.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물범이 있는 곳으로 가는 정수에게 무한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선배님하고 다시 일하고 싶은 걸 모르시죠?’
사람 일은 모른다고 하더니, 여기서 일할 때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해 일을 하지 못할 때까지 다니겠다고 늘 입에 달고 다니곤 했었다. 그를 떠날 때와는 또 다른 상실감이 그녀를 덮쳐 한동안 밥을 입에 대지도 못했었다. 특히나 그녀가 보살피던 펭귄들을 두고 가는 일은 엄마가 자식을 떼어 놓고 가는 것만큼이나 힘들었었다. 거의 6개월 정도는 펭귄들 얼굴이 생각나 미칠 뻔 했었는데, 사람이 살아가려니 자동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되었었다.

*


떨리는 가슴을 겨우 다잡아 쥐고 발걸음을 옮기던 가온이 그 자리에서 딱 멈춰 섰다. 사장실이라는 푯말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저 푯말만 보면 그를 만날 수 있다는 행복감에 웃음부터 났었는데, 지금은 슬픔에 말라비틀어진 가슴 안에 스산한 바람만 분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문손잡이를 잡은 채 식은땀을 흘리던 가온은 들려오는 낯익은 음성에 망설임을 내다 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귀가 망가지지 않았다면 분명 그 여자 채정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자동으로 일어서며 방문객을 반기는 행동을 취해보이며 인사를 하던 채정이 상체를 들었다. 그러곤 눈이 딱 마주쳤다. 잔잔한 부드러움이 감돌던 채정의 눈에 살얼음이라도 낀 것처럼 차가움이 확 서렸다.
가끔 이 여자를 다시 보면 어떤 감정이 들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니 세월이 흘렀으니 조금은 수그러들 줄 알았었다. 그런데 아직은 아니었다. 묵직해진 가슴이 당겨오며 위가 경련을 일으키듯 쓰려왔다. 아니 저 여자가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저 여자 앞에선 절대 무너지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볼 일이 있으니 왔겠죠?”
“여기 올 일이 없을 텐데요?”
“그건 내가 정할 일 같은데요?”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나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비서이자 그의 후배인 박채정을 아무렇지 않은 척 쳐다보았다. 좋은 대학을 나왔음에도 그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한국으로 돌아온 여자였다. 후후, 비서실이라. 아직까지 비서실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면 그를 아직도 어떻게 하지 못했다는 소린데?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일까? 채정의 눈매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니까요?”
“민 씨 만나러 왔는데요?”
“사장님을 왜요?”
“내 용건을 비서인 당신에게 일일이 보고해야 민 씨를 만날 수 있는 건가요? 개인적인 볼 일이니 물어봐 주기나 하세요.”
짖어질 것 같은 목소리의 채정을 향해 담담히 어깨를 으쓱해 보인 가온은 최대한 부드럽게 웃기까지 했다. 3년 전부터 습관처럼 만들어온 미소를 내보이며 채정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겠다 다짐했다.
“…….”
“제가 직접 들어갈까요?”
“왜 이래요?”
“그러니까 어서 말하라니까요.”
묵묵부답인 채정을 보고 있던 가온은 사장실 문을 향해 몸을 살짝 틀었다. 그녀의 동작에 채정이 왼팔을 앞으로 촥 펼쳐지더니 진로를 막으며 눈을 부라렸다. 이젠 공격수와 수비수의 위치가 바뀐 건가? 후후, 아니다. 가끔 그를 너무 빨리 포기한 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는 걸 보면 그녀는 제대로 된 수비수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