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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 주행
1화
#프롤로그 환불이 가능하다


밤 10시.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둘러싸여 가로등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사실 친구의 전화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집으로 돌아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도 발이 뜨끈뜨끈해 죽을 지경이었다. 친구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영부영 끌어오던 관계를 어느 쪽으로든 정리할 필요가 있지 싶어 이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동네는 일반 상점은 다 죽고 나이트클럽이 늘은 듯 했다. 귀청을 찢어놓을 듯 울리는 노랫소리에 연우의 이맛살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나이트클럽 인구에 들어서자 건물을 울리는 음악소리에 사람들의 소음도 함께 묻혀갔다. 다행히 그녀의 옷차림이 괜찮아 보였는지 나이트클럽 앞을 지키던 검은 양복의 남자 둘이 제지하지는 않았다.
“너희는 피곤하지도 않냐? 그래. 실컷 놀아라. 늙으면 일만 하기도 벅차다.”
연우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나이트클럽의 내부에 입을 쩍 벌렸다. 음악소리가 어찌나 큰지 고막이 웅웅거렸고 내부를 샅샅이 훑는 오색찬란한 조명은 눈을 멀게 할 정도였다. 살을 거의 드러낸 여자들과 술에 취해 벌건 남자들이 함께 스테이지에서 몸을 비비는 것이 보였다. 체력이 좋은 그들을 향해 부러움의 소리를 질렀다. 뭐 그래봐야 음악소리가 커 들리지도 않겠지만.
“아, 진짜. 어디 있는 거야.”
그녀에게 부딪혀오는 인파의 물결을 차례차례 헤치며 나이트클럽의 룸부터 하나하나 뒤졌다. 그 인간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홀에 앉아 있을 턱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여느 때보다 차가운 이성으로 무장한 연우는 차분히 그 인간의 얼굴을 찾았다. 룸은 반투명 유리와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뒤꿈치를 최대한 들어야 안이 보였다.
그녀를 이곳으로 오게 만든 인간을 진즉에 정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 인간과 사이가 나빠졌는지 기억했다. 그 인간이 그녀에게 뭘 원하는지 알고는 있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을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확 돌변해서는 사랑의 양을 거론하고 이별이란 말로 협박을 일삼다니, 그런 협박에 기죽고 허락할 거라 생각했을까? 허,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 어쩜 그 인간의 말대로 그녀는 그를 사랑했던 적이 없던 것도 같았다.
“하. 여기 계셨구만.”
연우는 룸의 투명한 유리 너머로 엉켜있는 두 남녀를 보았다. 밖에서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님 사람들의 시선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는지 두 남녀는 소파에 대담한 자세로 섞여 있었다. 서로 마주보고 하체를 딱 붙인 채 허리를 움직이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그들이 무엇을 하겠는가. 여자의 몸 아래에서 야릇한 미소를 짓는 남자는, 여자의 엉덩이를 터뜨릴 듯이 쥐고 있는 남자는, 여자의 몸을 위로 끝도 없이 쳐대는 남자는 분명 그녀가 애인이라 생각했던 박형철이 맞았다.
거세게 밀려오는 형철의 본 모습에 연우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일반적인 분노나 울분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애인이라면 당연히 분노해야 하는데 그녀의 가슴은 슬프지 않았다. 그저 저런 인간에게 그녀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했다는 자체가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또한 새로 맞이한 국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나이 서른에 노처녀 취급 받는 이 사회가 정말이지 싫었다. 말이 좋아 골드미스지 서른만 넘으면 좋은 남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일단 제외가 되었다. 그래서 좋은 조건의 형철을 사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대충 맞추면 되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할까봐 미리 걱정했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 또다시 호구조사에서부터 서로를 알아가야 하는 것이 귀찮아 모른 척했는지 모른다. 마음은 이미 형철이 그녀의 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결정이 잘못된 거였다. 미래는 함께 할 수 없어도 그녀를 기만하면 안 되는 거였다. 차라리 깨끗하게 헤어지자 했더라면 이런 더러운 기분은 없었을 것이다.
쾅.
룸의 유리문을 힘껏 열고 들어갔다. 그녀의 등장에도 음악소리가 큰 탓일까, 아님 두 남녀가 너무 집중을 하고 있는 탓일까 그들은 여전히 쾌락을 향해 치닫는 중이었다. 그러다 소파에 머리를 기대어 신음을 내지르던 형철이 그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이, 왜 그래? 더 힘껏 좀 움직여봐. 응?”
“여자가 원하는데 더 힘껏 움직여주지 그래?”
“네가 어떻게 알고?”
“글쎄. 어쩌다 내 귀에까지 들어왔어. 그렇게 밝히더니 하니 그리 좋냐?”
그녀를 본 그가 싸늘하게 얼어붙자 여유 있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보였다. 후후, 놀라 크게 뜬 눈이라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뭐야, 당신?”
“나? 당신이 깔고 앉아 있는 남자의 애인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애인이었던 인간은 여자를 밀어내려 하지만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여유 있게 그녀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연우는 여자의 당당함에 피식 웃었다. 참, 간도 큰 여자를 물었네. 이런 상황에 연결된 몸도 떼어내지도 않고 누구냐고 묻는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어쩜 저 인간은 고양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다가 호랑이를 만난 건지도 모른다. 나름 참 재미있는 그림이었다.
“아하, 그렇게 몸 사린다는 여자가 당신?”
“애인 있는 남자에게 몸을 주는 당신보단 나을 것 같은데?”
“뭐 그리 비싼 몸 같지도 않구만.”
“당신 몸보단 훨씬 비쌀 것 같지 않아? 난 최소한 내 몸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서 당신처럼 아무 곳에서 아무하고나 몸을 굴리진 않을 거거든. 그리고 얼마나 잘한 선택이야. 저런 놈에게 내 몸을 줬으면 어쩔 뻔 했어. 상상만 해도 짜증이 확 나네.”
그녀의 빈정거림에 형철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고 여자는 눈을 부라렸다.
“야, 너 말 다했어?”
“야? 넌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높임말도 할 줄 모르냐? 하긴 그런 기본적인 예의가 있었으면 이런 곳에서 남자하고 관계를 갖겠어? 하여튼 난 피곤해서 먼저 갈 테니까 하던 거나 마저 열심히 해. 아, 그리고 박형철 고맙다. 다른 여자와 뒹굴고 있는 널 보면서 너에 대한 내 감정이 전혀 없다는 깨달았거든. 그래도 내가 축하주는 한 잔 주고 가야겠지?”
연우는 테이블 위에 있는 양주병을 들어 형철과 그 여자의 머리 위에 콸콸 다 부어버렸다. 연결되어진 몸으로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피우는 두 남녀의 모습에 연우는 신나게 웃었다. 어영부영하던 형철과의 관계에 드디어 끝을 낸 것이다. 저런 인간의 뭘 보고 버티려 했을까? 그건 절대 미친 짓이었다.
“자, 그럼 수고.”
연우는 룸을 나가려다 문에 기대어 서있는 남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다크 그레이 컬러의 스트라이프 슈트와 블루 컬러 스트라이프 셔츠가 너무 잘 어울려 저절로 눈이 갔다. 어두워서 그런 걸까, 아님 번쩍이는 색색의 조명의 흔들림 때문일까, 남자의 눈동자가 독수리의 눈처럼 매섭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요상했다. 어찌 보면 그의 눈가에 웃음이 스친 것도 같았다.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남자의 깎아놓은 듯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게 벌어진 완벽한 골격은 그녀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너무 완벽했다. 직업병이 도져 남자에게 어울리는 옷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장악할 지경에 이르자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럴 상황도 그럴 상대도 아니었다.
“최소영.”
“오빠가 여긴 어쩐 일로?”
연우는 여자의 당황하는 모습에 놀랐다. 그녀에게 들켰을 땐 창피함도 없이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하게 굴더니 이 남자에겐 뭔가. 혹시 이 남자가 여자의 애인? 하긴 이 남자가 여자의 애인이라도 그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연우는 남자를 스쳐지나 룸을 등지고 밖으로 향했다. 이런 더러운 곳에선 단 1분도 더 있기 싫었다.
“설마 이런 꼴을 보이고도 내 앞에 나타나 사랑한다고 말하진 않겠지? 그럼 나도 이만 가 볼 테니까 조금 전 여자 분의 말씀처럼 수고해라.”
“오빠.”
준오는 룸의 문을 닫고 나오면서 소영의 비명소리를 들었지만 깨끗이 무시했다. 최소영은 여동생의 친구였다. 어릴 때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성인이 되더니 뻑하면 사무실에 나타나 사랑타령을 하는 게 아닌가. 거기다 집안 모임에 꼭꼭 나타나 마치 그의 애인이라도 되는 양 행동했다. 동생의 친구로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소영을 떼어내려고 비서에게 적당한 이유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대어가 낚인 것이다.
‘뭐지, 그 여자?’
준오는 조금 전 여자의 행동이 생각났다. 일 이외에는 그 어떤 일에도 관심 없던 그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여자의 평범하지 않은 행보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보통의 여자였다면 사귀던 남자가 여자와 엉켜있으면 울던가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데 그 여자는 전혀 그러질 않았다. 오히려 민망한 자세로 있는 그들 앞에 꼿꼿이 서서 자기 할 말을 다 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그런 당당함이 그의 호기심을 유혹했다. 낯선 여자인데도 경계심이 생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 여자가 그를 봤음에도 무시했기 때문에 더 눈길이 가는지도 모른다. 단연코 그라는 존재를 그냥 지나쳐 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가진 조건을 제외하고라도 돌아볼 만한 외모라고 자부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여자가 그의 눈을 사로잡은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녀의 눈을 보자마자 기능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던 그의 심장이 속도를 달리했던 것이다. 그의 눈을 보고서도 흐트러짐 없는 눈동자로 응시할 때부터 이미 그의 가슴은 파동을 달리했다. 늘 녹지 않아 뻑뻑하던 심장이 스르르 녹아 무장해제를 할 지경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되묻고 싶은 걸 참느라 손을 지그시 쥐고 있어야만 했다. 그의 심장이, 그의 직감이 그녀를 쫒아가라는 외침에 그의 발은 그녀를 향해 저저절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