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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빠른 걸음으로 나이트클럽의 입구까지 나온 준오는 택시 승강장 앞에 서있는 그 여자를 단박에 찾았다. 정장 치마 아래로 곧게 뻗은 날씬한 다리 라인가 그의 눈동자 가득 들어왔다. 양옆으로 다른 남자들이 있는지 확인한 그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마치 중병의 선고를 받는 환자처럼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저 처음 본 여자일 뿐인데 그의 이성이, 그의 가슴이 욕심으로 가득 채워지니 말이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고 설명할 수 있다 믿었던 그의 지론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향한 관심이나, 눈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술 한 잔 어때?”
“초면에 왜 반말이에요?”
“불만이면 같이 하든가.”
“그런데 조금 전에 한 말, 내게 한 말이에요?”
성격 같아서는 확 말을 놓고 싶은데 웃음기라곤 전혀 없는 냉혹한 얼굴의 그를 보자 차마 시행하기 힘들었다. 생뚱맞게 나타나 뭐하자는 건지.
“그렇다면?”
여자의 놀라서 동그래진 눈이 귀엽게 다가오는 건 무슨 조화인지 눈썹이 찡그려진다. 아무래도 피로가 누적돼서 그렇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고 싶어도 그의 가슴이 아니라고 울렁거린다. 그의 대답에 기분 나쁘다는 듯이 쫙 째려보는 것조차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의 심장이 미친 것이 분명했다.
“하하하, 버림받은 사람끼리 술 마시고 있다고 생각해봐요.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네.”
“그래서 싫다?”
“싫다면요?”
어느새 그의 말투를 따라가게 된다. 참 말 한 번 짧게 하는 인간이다.
“글쎄, 내 예상에 당신의 거절은 없었거든.”
“오호, 웬 자신감? 설마 내게 작업 거는 건 아니겠죠?”
“맞는다면?”
“내게 장난해요?”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도 낯선 사람을 덥석 따라가기에는 그녀가 너무 멀쩡했다. 그런데 이 남자의 제안을 단박에 밀쳐내지 않는 건 뭐란 말인가. 뭐지? 이 거부할 수 없는 느낌은? 형철이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가 싶어 고개를 흔들어 봐도 그에게 뾰족한 대답은 하지 못했다. 훌쩍 그의 남성다운 체취가 인식되는 건 왜 그럴까? 형철에게선 느끼지 못했던 강한 느낌이 그녀를 조여 오는 듯 했다. 그의 눈빛이 묘하게 그녀의 가슴을 긁어내리다 못해 단단히 옭아맸다.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는 게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으레 보내곤 하던 싸늘한 눈빛이 그에겐 제 기능을 잃고 허덕거렸다.
“나, 장난 싫어해.”
“장난이 아니면 내게 진짜 왜 이러는지 말해요.”
“당신에게 관심 있어.”
“에에?!”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린 채 놀라고 있는데 그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당최 기뻐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결정이 힘들었다. 그녀가 남자에게 차였다고 가볍게 본 건 아닐까 싶어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에이, 그건 아닐 것이다. 잘은 몰라도 그의 얼굴을 보면 비겁한 일은 할 타입이 아니었다. 연우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보며 극도로 혼란스러움에 빠졌다. 뭐지? 이 사람?



#1. 신상은 설렘을 갖게 한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백화점은 몇몇 사람들이 내는 작은 소음을 제외하곤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준오는 불이 환히 켜진 그의 사무실을 둘러보며 기지개를 켰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어깨 근육이 단단히 뭉쳐져 뻐근했다. 오늘도 하루해가 다 지나간 모양이었다. 매일 아침을 맞이해도 그에겐 왜 이렇게 하루가 짧은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가 문제를 만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수많은 백화점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연우, 어떻게 됐을까? 아프진 않았나?
준오는 문득문득 빈틈의 시간을 노려 찾아드는 연우 생각에 짜증을 꾹꾹 누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나마 일을 하고 있을 땐 생각나지 않은 것만은 고마운 일이었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태풍에 휩쓸려 내려가 폐허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가 자초한 일이니 할 말은 없다. 다만 이 답답한 가슴이 터지기 전에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연히 연우를 찾아야 했다. 여자와 함께 밤을 보냈어도 궁금하거나 찾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그녀는 아니었다. 그의 관심을 끌어서만은 아니었다. 그의 가슴을 움찔거리게 만든 여자였다.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의 이성이 이런 떨림의 감정을 쉬이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날 그는 이성을 잃었고, 비겁하단 걸 알면서도 저질러버렸고,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그의 욕심을 다 채웠다. 제대로 된 사고가 힘든 그녀를 이용했다.
소용돌이치는 가슴의 답답함에 못 이긴 준오는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퇴근할 테니 정문으로 차 가지고 와.”
“네, 알겠습니다.”
준오는 비서 성호에게 지시를 내리고 엘리베이터로 가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지금 이 시간엔 영업이 끝난 상태라 에스컬레이터가 작동을 안 해 걸어 가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가 백화점에 입사 후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는 혼자만의 퇴근 방식이었다. 백화점을 둘러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의 하루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퇴근이 빠른 날은 활기찬 매장을 눈여겨보고, 시간이 늦으면 늦는 대로 닫힌 매장을 살펴본다. 가끔 늦게까지 일하는 직원들을 발견하면 찾아가 슬쩍 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말을 시키거나 일을 방해하는 건 아니었다.
“불빛이잖아?”
준오는 4층의 남성복 퍼스널 쇼퍼 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에스컬레이터에서 발을 뗐다. 백화점 문을 닫은 지 한 시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이 시간까지 뭘 하는지 궁금했다. 각 매장 앞을 둘러쳐진 하얀 천들을 지나 불빛에 더 가까이 갔다. 그 매장 앞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한 여자 직원이 행거에 옷을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퍼스널 쇼퍼 룸에 있으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짐작이 가능했다. 이 시간까지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그와 똑같은 워커홀릭인 모양이었다.
“어? 이연우?”
그는 여자 직원이 가방을 행거에 걸다가 바닥에 떨어져 다시 줍는 것을 보다가 머리털이 쭈뼛하고 섰다. 여자 직원은 그의 가슴을 흔들어 놓은 이연우가 분명했다. 이렇게 가까이 두고서 가슴 저리게 애태웠다니 팽팽히 당겨졌던 긴장이 풀리며 허무함과 함께 허탈감이 그를 차지했다. 당장에 달려가 그날은 왜 말도 없이 사라졌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눈을 떠 그녀가 없는 걸 알았을 때 꼭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가지는 것에 익숙한 그가 누군가에게 내침을 당하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를 두고 도망간 그녀를 향해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얼마나 으르렁거렸는지 몇 날 며칠 동안 가슴이 저렸었다. 것보다 더 충격적인 건 그에게 천국을 선사한 그녀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두려움이 무엇인지 그녀의 부재로 철저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부족함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던 그의 인생에 크나큰 반전이 생겨버린 것이다.
눈앞에 있는 그녀를 보자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기억의 편린들이 가슴을 마구잡이로 난폭하게 만들었다. 그의 단단한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날 맛본 극치의 쾌감이 그의 온몸을 흔들었지만 이내 긴 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성이 페이스를 잃고 날 뛰려하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가 놀란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작은 선물은 주어야겠지? 준오는 어금니를 사려 물고 연우가 있는 곳에서 과감히 발길을 돌렸다.
‘이연우, 내일부턴 내게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 자유의 시간을 실컷 즐겨.’
그의 앞에 나타난 이연우로 인해 그의 가슴이나 인생에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그녀를 가지면서 깨달았다. 그의 개인을 보기 전에 집안부터 따져 달려드는 여자들에 신물이 나 있었다. 그런데 연우에 대해 기본 정보도 모른 채, 그녀가 어떤 의도를 가진 것도 모른 채, 그가 하는 행위에 대한 결과를 따지지도 않은 채 그저 그의 가슴이 느끼는 대로 행동한 건 처음이었다. 이것저것 따져 손해날 일은 전혀 하지 않던 그가 정상속도에서 벗어난 걸 알면서도 브레이크를 밟을 수가 없었다. 숫제 속도위반을 한 것도 모자라 고속으로 주행했다. 그날, 그녀가 던진 자극적인 말에 그의 욕심은 시작되었다.

*


그녀가 술에 취한 걸 알면서도 그는 말리지 않았다. 처음엔 그녀가 그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 하기 위해서였고 나중엔 말이 많아지는 것 같아 내버려두었다. 그랬더니 얼마 되지 않아 술에 취해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집에 데려다주려고 손을 뻗었는데 잠들었다 믿었던 그녀가 깨어났다. 그러곤 손바닥에 턱을 괴고 야릇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의 온몸의 온도가 그녀의 눈빛만으로 급상승해 땀이 솟아날 지경이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거라니?”
“섹……스.”
“누구에게 중요하단 건데?”
“당신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에게요.”
“뭐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렇겠지? 요즘은 여자들도 그렇지 않나?”
준오는 그녀의 눈을 보지 않았다면 술에 취했다는 걸 믿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말을 더듬긴 하지만.
“그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도대체 어떤 느낌이길래 다들 그렇게 이성들을 잃어요?”
“경험이 없단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