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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도시락
1화
프롤로그
아빠는 단 한 번도 엄마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엄만 고향으로 돌아간 거다.”
말수가 적었던 아빠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가리킬 때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엄만 사정이 생겨서 지구를 급히 떠났어.”
한번은 어린 딸에게 은밀히 덧붙였다.
“은하야, 사실은 엄만 지구인이 아니다. 쉿, 이건 우리만의 비밀.”
아빠는 달나라에 토끼가 산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아주 옛날에는 엄청 큰 토끼가 보였어. 지금은 대기 오염 때문에 가려져 안 보일 뿐이야. 고요한 밤엔 방앗간 떡방아 소리도 들렸어. 소음 공해가 심해져 지금은 잘 안 들리지만 말이야. 엄마네 별 사람들이 잔치를 하면 그 방앗간에 떡을 주문했다고 하니 규모도 꽤 될걸.”
엄마를 처음 만날 때의 아빠는 유능한 조리사였다. 지구에 잠시 놀러 왔던 엄마는 아빠가 만든 음식에 반해 결혼했고 나를 낳았다. 안타깝게도 엄마는 우주 질서를 어지럽힌 죄목으로 강제 소환을 당했는데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했다.
엄마가 지구를 떠난 뒤에도 아빠는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어린 나를 업은 상태로 지속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지구를 떠날 당시 나는 고작 두 살이었다. 외계인 엄마와 고아인 아빠를 둔 탓에 달리 나를 돌봐 줄 사람도 없었다.
아빠는 어린이집에 나를 맡기면서 파트타임 일자리를 여기저기 거쳤고, 그마저 여의치 않아 결국 조리사란 직업을 포기하게 됐다. 나는 일곱 살이 되도록 어린이집을 마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일에 적응을 못 했으며, 저녁이나 휴일에 혼자 집에 있는 일은 더욱 적응을 못 했는데, 그렇다고 혼자 있는 나 때문에 아빠가 일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왠지 억울하다.
요컨대 나는 혼자 적응할 기회 자체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빠는 어린이집을 마칠 시간이면 만사를 제쳐 두고 데리러 왔으며, 휴일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단 한 번도 나 혼자 집에 있게 하지 않았다. 어린이집 원장님은 아빠의 행동을 두고 ‘집착’이란 말을 들먹였다. 아빠는 대번에 반박했다.
“원장 선생님이 제 인생을 아세요? 인간은 자기 경험으로 미루어 판단합니다. 제 인생을 모르니 제가 왜 그런지 절대 모르실 겁니다!”
아빠는 빚을 내서 꼬마 트럭을 샀다. 그때부터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조수석에 앉아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자동차를 지키는 일 말고는 없었다.
아빠가 아침에 들르는 사무실은 ‘퀵서비스’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아빠는 주로 오토바이로 실을 수 없는,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목재나 타일들을 운반했다. 꼬마 트럭은 장거리 일감이 많았으며, 그 점이 오토바이보다 시내 수입이 적은 점을 보상해 주었다.
하루는 머리가 너무 뜨거워서 어린이집에 누워 있었다. 그날따라 비가 왔는데 아빠는 먼 지방으로 운송을 가는 바람에 어린이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아빠와 여러 번 전화를 주고받았던 선생님은 결국에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원에서는 해열제 처방이면 된다며 안심을 시켰지만, 비에 젖은 채 늦은 밤 병원으로 달려온 아빠는 밤새 내 곁을 지켰다. 그날 아빠는 내게 눈물을 들켰다.
“아빠, 울어?”
“울긴! 차가 부서졌거든. 울 딸도 아프고, 차도 아프니 나도 마음 아파서 그래.”
아빠는 젖은 수건으로 여기저기를 눌러 주면서 시종 한쪽 팔만 썼다. 언뜻 본 다른 쪽 팔소매가 찢겨 있었다.
“아빠, 차가 꽝 해서 팔도 다친 거야?”
“다치긴. 아빤 하늘에서 엄마가 지켜 주니 절대 안 다쳐. 울 딸도 엄마 덕에 크게 다친 적 없잖니.”
그 후로도 나는 종종 열이 났고 배가 아팠다. 덕분에 아빠는 빈번히 일을 쉬었다. 월세를 못 내서 집주인에게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말이다. 그때 생애 최초의 목표가 생겼다. 나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강해질 것이다.
아빠는 찌그러진 차를 수리하지 않고 계속 끌고 다녔다. 그리고 내가 열이 났던 날 이후부터는 줄곧 장거리 운송은 사양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타일이며 철근의 시내 배송을 도맡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까지 아빠는 그렇게 생활했다.
끼니를 제때 못 챙긴 채 무거운 짐을 나르던 후유증인지 급기야 아빠는 병을 얻고야 말았다. 늑막염이라는 병의 치료는 순조로웠지만 아빠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 보였다. 축복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나는 그런 아빠의 고충을 일찌거니 헤아려 버렸다.
치료 후의 아빠는 눈에 띄게 변해 갔다. 때론 바보로 보일 만큼 이를 잔뜩 드러내고 웃어 주었던 아빠가 돌연 누군가를 향해 증오를 퍼부어 댔던 것은 그때부터였다.
“썅! 왜! 왜 데려갔냐고!”
밤하늘을 가리키며 화를 내다가 나를 안은 채 올라오는 증오를 다스리곤 했다. 엄마가 살고 있다는 은하계를 이야기할 적의 아빠는 늘 평온했다.
하지만 세상은 끈질기게 아빠를 돕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일을 나갔던 아빠는 교통사고를 냈다. 가벼운 접촉 사고였지만 상대편 차가 비싼 차라 또 빚을 내야 했다.
아빠는 며칠 동안 일을 나가지 않았다. 어깨는 축 처졌으며 눈동자는 공허하기만 했다. 급기야 엄마의 영정 사진을 안은 채 웅크리고 누워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아빠는 으슥한 밤이 되었어도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막연한 두려움에 떨며 아빠 곁으로 다가가 숨소리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는 또 숨소리를 확인해 보면서 끈기 있게 기다렸다.
밥솥은 낮부터 비어 있었고, 간식거리도 없었다. 나름대로 강한 어린아이로 변모한 나는 주린 배를 어르며 또 기다렸다. 하지만 배가 자꾸 고프다 보니 이젠 배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의지와는 달리 그만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아빠, 배고파서 그런 게 아니라 배가 너무 아파.”
아빠가 슬며시 눈을 떴다. 나는 아빠가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그 초점 없는 눈동자에 애써 눈을 맞추었다.
“아프다고?”
“아니. 배가 조금 아픈데, 밥만 먹으면 나을 것 같아.”
“밥…… 우리 은하 밥…….”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누워 있던 아빠가 벌떡 일어났다. 나는 강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창피하게도 나는 배고픔을 못 참아 아픈 아빠를 일으켰고,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있었다.
“은하야…….”
아빠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또 머리를 한번 흔들더니 떨리는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 주다가 와락 껴안았다.
“미쳤어! 내가 너를 깜빡하다니. 아빠가, 아빠가 잠시 미쳤다.”
“미안해. 나도 지금부터 요리를 배울게.”
“쓸데없는 소리.”
“나 자그마치 여덟 살이야. 가르쳐만 줘. 나 혼자서도 밥 잘해 먹고, 혼자도 잘 놀 테니, 아빤 맘대로 일해.”
아빠가 내 어깨를 잡아 얼굴을 마주했다. 음울하게 옴팍 팬 눈동자가 모처럼 생기를 되찾고 반짝였다.
“정말이야. 내 걱정 안 하고 일해도 된다고!”
애원에 가까운 내 말에 아빠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 그래도 널 강하게 키울 거다. 반드시 그래야 하거든. 근데 너, 절대 불평 안 하고 따를 자신 있니?”
“그럼. 자, 약속.”
나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히죽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며칠 뒤 아빠는 꼬마 트럭을 처분하고 새로운 직장을 잡았다. 냉장 트럭에 음식을 싣고 공장으로 나르는 일이었다. 지금과 달리 방과 후 교실이 없는 시절이었기에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태권도 도장과 미술 학원에서 시간을 보낸 후 집에 들어갔다. 혼자서도 잘 지낼 자신이 있는데도 아빠는 여전히 일찍 귀가했다. 아빠는 종종 말했다.
“강해지겠단 약속을 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아빠와 함께 조깅을 했으며, 주말이면 함께 산으로 갔다. 설마 날 운동선수로 키울 생각이냐는 불평이 종종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쏙쏙 삼키며 아빠 말에 순종했다.
“엄마가 있는 별에 가려면 체력이 강해야 해.”
과학을 익힌 고학년이 되었어도 나는 별나라 엄마를 들먹이는 아빠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태권도 유단자가 되었어도 나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 체력을 키웠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우리는 반지하 단칸방을 벗어나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작은방은 나 혼자 썼고, 아빠는 큰방 겸 거실을 사용했다. 그리고 식구가 늘었다.
“은하, 넌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
김철수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는 산적 두목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순박했으며 가족은 없다고 했다. 철수 삼촌은 아빠를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어쩐지 부모를 대하는 것 같았다.
그해 봄에 아빠와 철수 삼촌은 공단에 작은 식당을 차렸다. 이동 급식을 겸한 탓에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해야 하는 구조였지만, 두 사람이 교대로 시간을 냈기에 나는 여전히 혼자 집을 지킬 기회를 얻지 못했다. 더욱이 아빠는 내 솜씨를 일찌거니 인정해 놓고도 손수 밥을 지어 먹을 기회를 안 주었다.
철수 삼촌이 해 준 요리는 맛이 없었다. 과연 식당에서도 철수 삼촌은 주로 허드렛일이나 배달을 맡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철수 삼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단단해 보였는데, 가끔 나는 그가 지구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요컨대 아빠가 ‘사실 철수는 엄마를 보필했던 사이보그야.’ 하고 실토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아빠는 여전히 달 토끼와 엄마의 행성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는 속으로는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첫 생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처음으로 치마를 입었다. 식당 일을 하던 아주머니가 직접 골라 준 것이었다. 교복 말고는 처음 입는 치마였고, 교복보다 딱히 짧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아빠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것이 미쳤나? 당장 갈아입어!”
소녀가 짧은 치마 한 번 입었다고 죄인이 될 순 없었다. 나는 부당한 폭언에 맞섰고, 아빠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날 나는 아빠도 상소리를 할 줄 아는 꼰대 부류에 포함된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나는 중학교에서 처음으로 주먹을 썼다. 예전부터 어눌한 말투의 짝꿍을 괴롭히는 성질 더러운 남학생이 있었는데, 녀석은 내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했다. 담임 선생님의 연락을 받은 아빠는 나를 앞으로 앉혔다.
“그러니까 은하 네가 맞은 게 아니라 남학생을 패 버렸다?”
“걔가 먼저 욕했거든.”
“그래서 패 버렸다?”
혼낼 줄 알았던 아빠는 한참 생각을 더듬다가 돌연 키득거렸다.
“큭큭, 은하야, 잘했다!”
혼쭐을 내기는커녕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진짜 양아치 만나면 만만치 않을 테니, 철수 삼촌한테 급소 가격하는 것도 잘 배워 둬라.”
고등학생이 된 나는 아빠의 권유로 철수 삼촌이 다니는 격투기 도장을 다녔다. 사실 나는 공부에 그리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아빠가 운동선수로의 가능성을 열어 두려는 것이라 여기며 반항하진 않았다. 그리고 나는 가슴속에서 음울하게 덩치를 키우는 막연한 불안감과 서러움을 샌드백과 땀으로 풀어내는 것이 싫지 않았다.
방학이면 아빠의 가게로 가서 주방 일을 거들었다. 아빠는 장시간 칼질을 해도 지치지 않는 요령을 가르쳐 주며 내게 도마질을 시키곤 했다. 내가 운동선수가 못 되면 요리사로 키우고 싶어 하나 보다고 생각하며 선선히 따랐다. 사실 운동선수보단 요리사가 탐이 났다. 나는 아빠의 음식을 배우는 한편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메뉴를 익혔다.
어느 날, 아빠는 내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잘나가는 공단 식당 일을 접어 버렸다. 그러고는 지방의 대학교 근처에 도시락 가게를 열었다. 공단의 식당보단 수입이 적다면서도 아빠는 간판을 건 다음 하늘의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학생들을 상대로 무시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내는 도시락 가게에 나도 곧 정을 붙였다.
고등학교 2학년 성적표를 받아 든 아빠는 새삼스럽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뭐 하자는 거냐. 학교가 놀러 다니는 곳이냐?”
딱히 성적이 뚝 떨어진 것도 아닌데 안 하던 질책을 했다.
“너 이제부터 가게 나오지 말고 공부해라.”
한술 더 떠서 학교 앞에 자취방을 얻어 공부에 집중하란다.
“나 대학 갈 것도 아니잖아.”
나는 항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가게에 나와 부주방장이 되겠다는 뜻을 오래전에 드러냈고, 아빠는 딱히 반대 의견을 내놓은 적도 없었다.
“그래도 이왕 다니는 학교, 중간 이상은 가야 할 거 아냐.”
언제부터 아빠가 공부를 원했던가. 몸만 건강하면 된다며 입버릇처럼 말하던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티격태격하다가 한순간 나는 울화를 토해 냈다.
“그럼 왜 태권도에 유도에 격투기까지 뺑뺑이 시켰어! 그 시간에 학원을 보내지 그랬어!”
“어디서 또박또박 말대꾸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산 줄 아니? 염병, 고생해서 키워 놓았더니.”
나는 아빠의 꼰대 같은 모습에 왈칵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아이, 씨!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네!”
딴에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에게 도움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싫어도 아빠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돌이켜 보면 아빠의 삶에 걸림돌이 되지 않고자 조마조마했던 마음들이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딸이 걸림돌로만 기억되는가 보다.
우여곡절 끝에 고3을 앞둔 나는 학교 근처의 원룸으로 이사했으며, 방학에도 가게 출입을 금지당했다. 나는 꼰대가 되어 버린 아빠를 미워하기 싫어서 종종 밤하늘을 치어다보았다. 별을 보면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가 그리워 외면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어린 시절에 아빠가 들려주던 황당한 이야기를 그리워했다.
그랬다. 느닷없이 공부 타령 하며 나를 추방한 아빠보다는 우주인 엄마를 들먹이던 엉뚱한 아빠가 더 좋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리웠다. 가난하고 불안에 떨었던 어린 시절이.
1
중소 도시의 대학교 어귀는 나른한 분위기였다. 나나도시락 가게를 나온 시훈은 슈트 상의를 벗어 들었다. 역시 정장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특히 지금처럼 한껏 더위가 익어 버린 봄에는.
‘예의를 차려 정중하게 청해라.’
오 회장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슈트는커녕 와이셔츠도 안 입었을 것이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오라고?’
외모며 행동이 로마의 검투사를 떠오르게 만들던 남자는 가게에서 기다리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시훈은 오는 길에 봤던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일은 전혀 취미가 아니었지만 이 대학 근처에서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길을 건너 중심 상가에 이르자 지나가는 여대생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갓 스쳐 간 여학생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완전 조각남이네.”
“연예인 같은데?”
“어쩜 남자가 피부까지 넘사벽이야.”
시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인가 허여멀쑥한 피부가 싫어졌다. 남보다 갑절로 운동을 하는데도 공붓벌레 시절의 하얀 피부를 졸업하지 못하고 있다. 햇빛 독소니 뭐니 하는 따위의 정보를 무시하고 올해는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자로 변신하고 싶다.
매장으로 들어서자 여직원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시훈을 맞이했다. 안쪽으로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등을 보인 상고머리 남자와 마주하고 있는 여자 때문이었다. 붉게 칠한 입술이 아니었다면 예쁘장한 남자라고 해도 믿을 만한 외모였다. 짧고 둥글게 쳐 낸 헤어스타일에 야무져 보이는 체구, 그리고 남자가 입어도 어울릴 법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여성 특유의 신비로움이 훅 날아든다. 오래도록 가져 본 적이 없던 뜬금없는 감정에 시훈은 당황했다.
‘내가 왜 이러지?’
시훈은 수상한 울림의 가슴을 어르면서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천진하고도 총명하게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적당히 솟은 콧등, 그리고 건강한 혈색의 뺨에 이어 얼결에 그녀의 봉긋한 가슴 부위까지 훑었다. 시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순간 여자가 초면이 아니라는 직감이 스쳤다.
‘어디서 봤더라?’
시훈은 그녀를 마주 볼 수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이미 시훈에게 시선을 거두고 마주한 상대에게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중이다. 그녀와 마주한 상고머리 남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썩 느끼한 말투였다.
“자기 입술이 오늘은 앵두 같아.”
“사장님 뵙는 자리라서 좀 칠했어요.”
중성적인 모습에 더해 허스키한 목소리가 어째서 지극히 청순한 여자의 것으로 와 닿는지 모르겠다. 여자는 스무 살 남짓이고, 사장이란 남자는 서른 살이 훌쩍 넘어 보였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남녀였다.
“성의를 봐서라도 계약 연장해 주시죠, 네?”
어리광을 부리는 말씨는 외모의 선입견에 관한 반전이었다. 그 반전이 시훈을 기묘하게 달뜨게 했다. 하지만 상고머리에겐 별 효과가 없나 보다.
“누가 계약 안 해 준대? 내 말은 오는 정 가는 정, 상부상조를 먼저 논하자는 거지.”
“그래서 사장님 원하신 대로 같이 차를 마시고 있잖아요.”
“차, 커피…… 후후, 은하는 정말 순진해. 천연기념물이라니까. 남녀 간에 차 한잔하자는 말을 딱 그대로만 해석한 거야?”
남자의 입에서 은하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취미에 없던 엿듣기에 열중하던 시훈은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장은하는 나나도시락의 젊은 대표다. 또한 위기에 처한 세입자다. 사전 정보로 접한 나이보다 조금 어려 보일 뿐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그녀가 마주한 남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때 은하도 시훈을 쳐다보았다. 마주한 남자를 대할 때와는 달리 눈빛이 매서웠다. 시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는 곧 청순한 여자로 돌아가 상고머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재계약을 하면 커피 머신을 구입해서 날마다 사장님한테 원두커피를 대접해 드리죠.”
“자꾸 알면서 시치미를 뗄 테야?”
그녀는 정말로 모를 수도 있지만 시훈은 상고머리의 속셈을 알아챘다.
“근데 사장님, 대왕도시락 소문은 사실이 아니죠?”
“소문을 믿지 말고 나를 믿어. 잘만 하면 은하는 평생 가게를 지킬 수 있어.”
대왕도시락 매장 이야기까지 나왔다. 정황은 불을 보듯 뻔했다. 수상한 부아가 치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1화
프롤로그
아빠는 단 한 번도 엄마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엄만 고향으로 돌아간 거다.”
말수가 적었던 아빠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가리킬 때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엄만 사정이 생겨서 지구를 급히 떠났어.”
한번은 어린 딸에게 은밀히 덧붙였다.
“은하야, 사실은 엄만 지구인이 아니다. 쉿, 이건 우리만의 비밀.”
아빠는 달나라에 토끼가 산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아주 옛날에는 엄청 큰 토끼가 보였어. 지금은 대기 오염 때문에 가려져 안 보일 뿐이야. 고요한 밤엔 방앗간 떡방아 소리도 들렸어. 소음 공해가 심해져 지금은 잘 안 들리지만 말이야. 엄마네 별 사람들이 잔치를 하면 그 방앗간에 떡을 주문했다고 하니 규모도 꽤 될걸.”
엄마를 처음 만날 때의 아빠는 유능한 조리사였다. 지구에 잠시 놀러 왔던 엄마는 아빠가 만든 음식에 반해 결혼했고 나를 낳았다. 안타깝게도 엄마는 우주 질서를 어지럽힌 죄목으로 강제 소환을 당했는데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했다.
엄마가 지구를 떠난 뒤에도 아빠는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어린 나를 업은 상태로 지속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지구를 떠날 당시 나는 고작 두 살이었다. 외계인 엄마와 고아인 아빠를 둔 탓에 달리 나를 돌봐 줄 사람도 없었다.
아빠는 어린이집에 나를 맡기면서 파트타임 일자리를 여기저기 거쳤고, 그마저 여의치 않아 결국 조리사란 직업을 포기하게 됐다. 나는 일곱 살이 되도록 어린이집을 마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일에 적응을 못 했으며, 저녁이나 휴일에 혼자 집에 있는 일은 더욱 적응을 못 했는데, 그렇다고 혼자 있는 나 때문에 아빠가 일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왠지 억울하다.
요컨대 나는 혼자 적응할 기회 자체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빠는 어린이집을 마칠 시간이면 만사를 제쳐 두고 데리러 왔으며, 휴일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단 한 번도 나 혼자 집에 있게 하지 않았다. 어린이집 원장님은 아빠의 행동을 두고 ‘집착’이란 말을 들먹였다. 아빠는 대번에 반박했다.
“원장 선생님이 제 인생을 아세요? 인간은 자기 경험으로 미루어 판단합니다. 제 인생을 모르니 제가 왜 그런지 절대 모르실 겁니다!”
아빠는 빚을 내서 꼬마 트럭을 샀다. 그때부터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조수석에 앉아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자동차를 지키는 일 말고는 없었다.
아빠가 아침에 들르는 사무실은 ‘퀵서비스’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아빠는 주로 오토바이로 실을 수 없는,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목재나 타일들을 운반했다. 꼬마 트럭은 장거리 일감이 많았으며, 그 점이 오토바이보다 시내 수입이 적은 점을 보상해 주었다.
하루는 머리가 너무 뜨거워서 어린이집에 누워 있었다. 그날따라 비가 왔는데 아빠는 먼 지방으로 운송을 가는 바람에 어린이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아빠와 여러 번 전화를 주고받았던 선생님은 결국에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원에서는 해열제 처방이면 된다며 안심을 시켰지만, 비에 젖은 채 늦은 밤 병원으로 달려온 아빠는 밤새 내 곁을 지켰다. 그날 아빠는 내게 눈물을 들켰다.
“아빠, 울어?”
“울긴! 차가 부서졌거든. 울 딸도 아프고, 차도 아프니 나도 마음 아파서 그래.”
아빠는 젖은 수건으로 여기저기를 눌러 주면서 시종 한쪽 팔만 썼다. 언뜻 본 다른 쪽 팔소매가 찢겨 있었다.
“아빠, 차가 꽝 해서 팔도 다친 거야?”
“다치긴. 아빤 하늘에서 엄마가 지켜 주니 절대 안 다쳐. 울 딸도 엄마 덕에 크게 다친 적 없잖니.”
그 후로도 나는 종종 열이 났고 배가 아팠다. 덕분에 아빠는 빈번히 일을 쉬었다. 월세를 못 내서 집주인에게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말이다. 그때 생애 최초의 목표가 생겼다. 나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강해질 것이다.
아빠는 찌그러진 차를 수리하지 않고 계속 끌고 다녔다. 그리고 내가 열이 났던 날 이후부터는 줄곧 장거리 운송은 사양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타일이며 철근의 시내 배송을 도맡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까지 아빠는 그렇게 생활했다.
끼니를 제때 못 챙긴 채 무거운 짐을 나르던 후유증인지 급기야 아빠는 병을 얻고야 말았다. 늑막염이라는 병의 치료는 순조로웠지만 아빠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 보였다. 축복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나는 그런 아빠의 고충을 일찌거니 헤아려 버렸다.
치료 후의 아빠는 눈에 띄게 변해 갔다. 때론 바보로 보일 만큼 이를 잔뜩 드러내고 웃어 주었던 아빠가 돌연 누군가를 향해 증오를 퍼부어 댔던 것은 그때부터였다.
“썅! 왜! 왜 데려갔냐고!”
밤하늘을 가리키며 화를 내다가 나를 안은 채 올라오는 증오를 다스리곤 했다. 엄마가 살고 있다는 은하계를 이야기할 적의 아빠는 늘 평온했다.
하지만 세상은 끈질기게 아빠를 돕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일을 나갔던 아빠는 교통사고를 냈다. 가벼운 접촉 사고였지만 상대편 차가 비싼 차라 또 빚을 내야 했다.
아빠는 며칠 동안 일을 나가지 않았다. 어깨는 축 처졌으며 눈동자는 공허하기만 했다. 급기야 엄마의 영정 사진을 안은 채 웅크리고 누워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아빠는 으슥한 밤이 되었어도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막연한 두려움에 떨며 아빠 곁으로 다가가 숨소리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는 또 숨소리를 확인해 보면서 끈기 있게 기다렸다.
밥솥은 낮부터 비어 있었고, 간식거리도 없었다. 나름대로 강한 어린아이로 변모한 나는 주린 배를 어르며 또 기다렸다. 하지만 배가 자꾸 고프다 보니 이젠 배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의지와는 달리 그만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아빠, 배고파서 그런 게 아니라 배가 너무 아파.”
아빠가 슬며시 눈을 떴다. 나는 아빠가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그 초점 없는 눈동자에 애써 눈을 맞추었다.
“아프다고?”
“아니. 배가 조금 아픈데, 밥만 먹으면 나을 것 같아.”
“밥…… 우리 은하 밥…….”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누워 있던 아빠가 벌떡 일어났다. 나는 강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창피하게도 나는 배고픔을 못 참아 아픈 아빠를 일으켰고,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있었다.
“은하야…….”
아빠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또 머리를 한번 흔들더니 떨리는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 주다가 와락 껴안았다.
“미쳤어! 내가 너를 깜빡하다니. 아빠가, 아빠가 잠시 미쳤다.”
“미안해. 나도 지금부터 요리를 배울게.”
“쓸데없는 소리.”
“나 자그마치 여덟 살이야. 가르쳐만 줘. 나 혼자서도 밥 잘해 먹고, 혼자도 잘 놀 테니, 아빤 맘대로 일해.”
아빠가 내 어깨를 잡아 얼굴을 마주했다. 음울하게 옴팍 팬 눈동자가 모처럼 생기를 되찾고 반짝였다.
“정말이야. 내 걱정 안 하고 일해도 된다고!”
애원에 가까운 내 말에 아빠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 그래도 널 강하게 키울 거다. 반드시 그래야 하거든. 근데 너, 절대 불평 안 하고 따를 자신 있니?”
“그럼. 자, 약속.”
나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히죽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며칠 뒤 아빠는 꼬마 트럭을 처분하고 새로운 직장을 잡았다. 냉장 트럭에 음식을 싣고 공장으로 나르는 일이었다. 지금과 달리 방과 후 교실이 없는 시절이었기에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태권도 도장과 미술 학원에서 시간을 보낸 후 집에 들어갔다. 혼자서도 잘 지낼 자신이 있는데도 아빠는 여전히 일찍 귀가했다. 아빠는 종종 말했다.
“강해지겠단 약속을 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아빠와 함께 조깅을 했으며, 주말이면 함께 산으로 갔다. 설마 날 운동선수로 키울 생각이냐는 불평이 종종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쏙쏙 삼키며 아빠 말에 순종했다.
“엄마가 있는 별에 가려면 체력이 강해야 해.”
과학을 익힌 고학년이 되었어도 나는 별나라 엄마를 들먹이는 아빠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태권도 유단자가 되었어도 나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 체력을 키웠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우리는 반지하 단칸방을 벗어나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작은방은 나 혼자 썼고, 아빠는 큰방 겸 거실을 사용했다. 그리고 식구가 늘었다.
“은하, 넌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
김철수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는 산적 두목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순박했으며 가족은 없다고 했다. 철수 삼촌은 아빠를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어쩐지 부모를 대하는 것 같았다.
그해 봄에 아빠와 철수 삼촌은 공단에 작은 식당을 차렸다. 이동 급식을 겸한 탓에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해야 하는 구조였지만, 두 사람이 교대로 시간을 냈기에 나는 여전히 혼자 집을 지킬 기회를 얻지 못했다. 더욱이 아빠는 내 솜씨를 일찌거니 인정해 놓고도 손수 밥을 지어 먹을 기회를 안 주었다.
철수 삼촌이 해 준 요리는 맛이 없었다. 과연 식당에서도 철수 삼촌은 주로 허드렛일이나 배달을 맡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철수 삼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단단해 보였는데, 가끔 나는 그가 지구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요컨대 아빠가 ‘사실 철수는 엄마를 보필했던 사이보그야.’ 하고 실토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아빠는 여전히 달 토끼와 엄마의 행성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는 속으로는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첫 생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처음으로 치마를 입었다. 식당 일을 하던 아주머니가 직접 골라 준 것이었다. 교복 말고는 처음 입는 치마였고, 교복보다 딱히 짧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아빠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것이 미쳤나? 당장 갈아입어!”
소녀가 짧은 치마 한 번 입었다고 죄인이 될 순 없었다. 나는 부당한 폭언에 맞섰고, 아빠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날 나는 아빠도 상소리를 할 줄 아는 꼰대 부류에 포함된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나는 중학교에서 처음으로 주먹을 썼다. 예전부터 어눌한 말투의 짝꿍을 괴롭히는 성질 더러운 남학생이 있었는데, 녀석은 내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했다. 담임 선생님의 연락을 받은 아빠는 나를 앞으로 앉혔다.
“그러니까 은하 네가 맞은 게 아니라 남학생을 패 버렸다?”
“걔가 먼저 욕했거든.”
“그래서 패 버렸다?”
혼낼 줄 알았던 아빠는 한참 생각을 더듬다가 돌연 키득거렸다.
“큭큭, 은하야, 잘했다!”
혼쭐을 내기는커녕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진짜 양아치 만나면 만만치 않을 테니, 철수 삼촌한테 급소 가격하는 것도 잘 배워 둬라.”
고등학생이 된 나는 아빠의 권유로 철수 삼촌이 다니는 격투기 도장을 다녔다. 사실 나는 공부에 그리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아빠가 운동선수로의 가능성을 열어 두려는 것이라 여기며 반항하진 않았다. 그리고 나는 가슴속에서 음울하게 덩치를 키우는 막연한 불안감과 서러움을 샌드백과 땀으로 풀어내는 것이 싫지 않았다.
방학이면 아빠의 가게로 가서 주방 일을 거들었다. 아빠는 장시간 칼질을 해도 지치지 않는 요령을 가르쳐 주며 내게 도마질을 시키곤 했다. 내가 운동선수가 못 되면 요리사로 키우고 싶어 하나 보다고 생각하며 선선히 따랐다. 사실 운동선수보단 요리사가 탐이 났다. 나는 아빠의 음식을 배우는 한편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메뉴를 익혔다.
어느 날, 아빠는 내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잘나가는 공단 식당 일을 접어 버렸다. 그러고는 지방의 대학교 근처에 도시락 가게를 열었다. 공단의 식당보단 수입이 적다면서도 아빠는 간판을 건 다음 하늘의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학생들을 상대로 무시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내는 도시락 가게에 나도 곧 정을 붙였다.
고등학교 2학년 성적표를 받아 든 아빠는 새삼스럽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뭐 하자는 거냐. 학교가 놀러 다니는 곳이냐?”
딱히 성적이 뚝 떨어진 것도 아닌데 안 하던 질책을 했다.
“너 이제부터 가게 나오지 말고 공부해라.”
한술 더 떠서 학교 앞에 자취방을 얻어 공부에 집중하란다.
“나 대학 갈 것도 아니잖아.”
나는 항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가게에 나와 부주방장이 되겠다는 뜻을 오래전에 드러냈고, 아빠는 딱히 반대 의견을 내놓은 적도 없었다.
“그래도 이왕 다니는 학교, 중간 이상은 가야 할 거 아냐.”
언제부터 아빠가 공부를 원했던가. 몸만 건강하면 된다며 입버릇처럼 말하던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티격태격하다가 한순간 나는 울화를 토해 냈다.
“그럼 왜 태권도에 유도에 격투기까지 뺑뺑이 시켰어! 그 시간에 학원을 보내지 그랬어!”
“어디서 또박또박 말대꾸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산 줄 아니? 염병, 고생해서 키워 놓았더니.”
나는 아빠의 꼰대 같은 모습에 왈칵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아이, 씨!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네!”
딴에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에게 도움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싫어도 아빠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돌이켜 보면 아빠의 삶에 걸림돌이 되지 않고자 조마조마했던 마음들이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딸이 걸림돌로만 기억되는가 보다.
우여곡절 끝에 고3을 앞둔 나는 학교 근처의 원룸으로 이사했으며, 방학에도 가게 출입을 금지당했다. 나는 꼰대가 되어 버린 아빠를 미워하기 싫어서 종종 밤하늘을 치어다보았다. 별을 보면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가 그리워 외면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어린 시절에 아빠가 들려주던 황당한 이야기를 그리워했다.
그랬다. 느닷없이 공부 타령 하며 나를 추방한 아빠보다는 우주인 엄마를 들먹이던 엉뚱한 아빠가 더 좋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리웠다. 가난하고 불안에 떨었던 어린 시절이.
1
중소 도시의 대학교 어귀는 나른한 분위기였다. 나나도시락 가게를 나온 시훈은 슈트 상의를 벗어 들었다. 역시 정장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특히 지금처럼 한껏 더위가 익어 버린 봄에는.
‘예의를 차려 정중하게 청해라.’
오 회장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슈트는커녕 와이셔츠도 안 입었을 것이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오라고?’
외모며 행동이 로마의 검투사를 떠오르게 만들던 남자는 가게에서 기다리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시훈은 오는 길에 봤던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일은 전혀 취미가 아니었지만 이 대학 근처에서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길을 건너 중심 상가에 이르자 지나가는 여대생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갓 스쳐 간 여학생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완전 조각남이네.”
“연예인 같은데?”
“어쩜 남자가 피부까지 넘사벽이야.”
시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인가 허여멀쑥한 피부가 싫어졌다. 남보다 갑절로 운동을 하는데도 공붓벌레 시절의 하얀 피부를 졸업하지 못하고 있다. 햇빛 독소니 뭐니 하는 따위의 정보를 무시하고 올해는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자로 변신하고 싶다.
매장으로 들어서자 여직원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시훈을 맞이했다. 안쪽으로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등을 보인 상고머리 남자와 마주하고 있는 여자 때문이었다. 붉게 칠한 입술이 아니었다면 예쁘장한 남자라고 해도 믿을 만한 외모였다. 짧고 둥글게 쳐 낸 헤어스타일에 야무져 보이는 체구, 그리고 남자가 입어도 어울릴 법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여성 특유의 신비로움이 훅 날아든다. 오래도록 가져 본 적이 없던 뜬금없는 감정에 시훈은 당황했다.
‘내가 왜 이러지?’
시훈은 수상한 울림의 가슴을 어르면서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천진하고도 총명하게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적당히 솟은 콧등, 그리고 건강한 혈색의 뺨에 이어 얼결에 그녀의 봉긋한 가슴 부위까지 훑었다. 시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순간 여자가 초면이 아니라는 직감이 스쳤다.
‘어디서 봤더라?’
시훈은 그녀를 마주 볼 수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이미 시훈에게 시선을 거두고 마주한 상대에게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중이다. 그녀와 마주한 상고머리 남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썩 느끼한 말투였다.
“자기 입술이 오늘은 앵두 같아.”
“사장님 뵙는 자리라서 좀 칠했어요.”
중성적인 모습에 더해 허스키한 목소리가 어째서 지극히 청순한 여자의 것으로 와 닿는지 모르겠다. 여자는 스무 살 남짓이고, 사장이란 남자는 서른 살이 훌쩍 넘어 보였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남녀였다.
“성의를 봐서라도 계약 연장해 주시죠, 네?”
어리광을 부리는 말씨는 외모의 선입견에 관한 반전이었다. 그 반전이 시훈을 기묘하게 달뜨게 했다. 하지만 상고머리에겐 별 효과가 없나 보다.
“누가 계약 안 해 준대? 내 말은 오는 정 가는 정, 상부상조를 먼저 논하자는 거지.”
“그래서 사장님 원하신 대로 같이 차를 마시고 있잖아요.”
“차, 커피…… 후후, 은하는 정말 순진해. 천연기념물이라니까. 남녀 간에 차 한잔하자는 말을 딱 그대로만 해석한 거야?”
남자의 입에서 은하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취미에 없던 엿듣기에 열중하던 시훈은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장은하는 나나도시락의 젊은 대표다. 또한 위기에 처한 세입자다. 사전 정보로 접한 나이보다 조금 어려 보일 뿐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그녀가 마주한 남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때 은하도 시훈을 쳐다보았다. 마주한 남자를 대할 때와는 달리 눈빛이 매서웠다. 시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는 곧 청순한 여자로 돌아가 상고머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재계약을 하면 커피 머신을 구입해서 날마다 사장님한테 원두커피를 대접해 드리죠.”
“자꾸 알면서 시치미를 뗄 테야?”
그녀는 정말로 모를 수도 있지만 시훈은 상고머리의 속셈을 알아챘다.
“근데 사장님, 대왕도시락 소문은 사실이 아니죠?”
“소문을 믿지 말고 나를 믿어. 잘만 하면 은하는 평생 가게를 지킬 수 있어.”
대왕도시락 매장 이야기까지 나왔다. 정황은 불을 보듯 뻔했다. 수상한 부아가 치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