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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도시락
2화


은하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저 사람은 또 뭐야! 재수 없게시리.’
눈앞의 김 사장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아까부터 저쪽에서 허여멀쑥하게 생겨 먹은 키 큰 남자가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고생이라곤 한 번도 안 해 본, 그래서 그녀가 싫어하는 귀공자 부류 같았다.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인 걸로 보아 교직원이나 회사원인 성싶다. 은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고자 냉수를 단숨에 비웠다.
“갈증 나면 나가서 맥주 한잔할까?”
김 사장이 느물거렸다. 땅 부자인 부친에게 빌붙어 만년 실업자 주제에 대학가 상가 주인들로부터 사장 소리를 듣는 서른세 살의 노총각이었다. 유리컵에 붉게 찍힌 루주 자국을 바라보자니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기왕이면 여성스럽게 차려입고 나오면 고맙겠다고 김 사장이 주문했다. 그렇다고 안 입던 치마를 입긴 싫어서 고심하다가 기초화장에 더해 입술에 새빨간 루주를 처발랐다. 아빠가 시작한 가게를 지키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쓰레기.’
부아를 삼키고 웃음을 쥐어짰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나름의 논리를 내세웠다.
“길 건너는 원래 상권이 좋았어도 제 가게가 있는 곳은 우리가 개척했습니다. 새로 건물을 지어도 우리 가게가 없으면 전처럼 학생들이 몰려든다는 보장이 없다고요. 그리고 요즘엔 입학하는 학생은 줄어들고 식당만 늘어서 새 건물 지어도 세가 안 나간답니다. 사장님을 위해서도 재건축은 안 하는 게 나을 겁니다.”
재수 없는 김 사장에게 이리 긴말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더욱이 애교까지 섞자니 토악질이 나오려고 했다.
“맞아. 그런 이유로 나도 아버지를 설득해 볼 참이다. 실은 아버지가 원하는 게 있거든. 자, 일단 시원한 맥주 한잔 나누면서 건설적인 이야기로 넘어가자. 아, 노래방은 어때? 맥주도 맛있게 마실 수 있는 노래방 있는데.”
“전 술을…….”
“내숭은! 영업 끝나고 네 삼촌이랑 술 마시는 거 몇 번 봤다.”
갈등이 생겼다. 여차하면 남자 특유의 급소에 한 방 날려 버리면 되니 딱히 늑대 소굴로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김 사장이 먼저 일어났다. 은하는 악문 입으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따라 일어났다. 희망을 버리기엔 일렀다. 가망성이 희박해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아빠에게 항변할 수 있어야 했다.
설령 가게를 헐어 버린다고 해도 새로 지은 건물에서 세를 얻으려면 김 사장의 비위를 맞춰 줘야 했다. 물론 아빠가 차린 그대로를 유지하고 싶은 게 그녀의 으뜸 소망이었지만.
그때 엉뚱한 훼방꾼이 나타났다.
“장은하 씨?”
아까부터 기분 나쁘게 쳐다보던 허여멀쑥한 남자가 불쑥 은하와 김 사장 사이로 끼어들었다.
“나나도시락 주인 장은하 씨, 맞죠?”
은하가 삐딱하게 고개를 끄떡이자 그가 휙 손을 낚아챘다.
“감정 낭비 그만하고 나갑시다!”
그러자 김 사장이 그를 잡아챘다.
“뭐야, 당신.”
“뭐긴요. 이 여자 남친.”
그는 파리 쫓듯 김 사장을 한 손으로 제압해 밀어내고는 은하를 잡은 다른 손에 힘을 주었다. 은하의 이맛살이 한껏 구겨졌다.
“남친? 미친!”
은하는 휙 그의 손을 뿌리친 뒤에 김 사장을 바라보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녜요. 첨 보는 사람입니다!”
“장은하 씨, 그만해!”
허여멀쑥한 남자가 소리쳤다. 초면에 왜 이리 당당하게 화를 내는지, 은하는 어리둥절했다.
“장은하 씨 가게 자린 이미 대왕도시락 체인점 계약 마쳤다고!”
“뭐라고요!”
대왕도시락은 국내에서 가장 큰 도시락 전문 체인점이다. 나나도시락의 낡은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대왕도식락 체인점이 들어선다는 소문은 안 믿었다. 김 사장도 시종 부인한 일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낯선 남자가 자신 있게 밝힌다.
“계약은 저 양반 아버지가 했을 거예요. 암튼 나나도시락 자리론 대왕도시락 체인점이 들어오기로 확정됐어요!”
“그, 그럴 리가.”
은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김 사장을 바라보았다.
“아니죠?”
안타깝게도 김 사장은 단박에 부정해 주지 않는다.
“그, 그게 말이다. 기왕 이리된 거 사실대로 말할게. 아버지가 계약한 건 맞는데, 너한테 점수를 따서, 너와 결혼하면 그 가게도 주고 땅까지 다 우리한테 준대. 그래서 너하고 잘해 보려던 중이었어.”
“진짜 대왕, 대왕도시락하고…….”
“아버지가 계약한 건 맞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은하를 며느리로 탐내서…….”
김 사장의 횡설수설은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계약한 건 맞는데.’라는 말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허여멀쑥한 남자가 다시금 손을 잡고 이끌었다.
“나가서 나랑 차선책을 논의합시다!”
의외로 완력이 센 남자였다. 휘청 딸려 가던 은하는 한순간 양손에 힘을 모아 남자의 팔을 잡아챘다.
“윽!”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토했다. 하지만 은하가 등 뒤로 비틀어 버린 팔을 재빨리 풀어냈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민첩한 동작은 사람들의 시선을 몰리게 만들었다.
은하는 느릿느릿 김 사장에게 다가갔다. 열 살이나 더 먹은 남자에게 주먹을 날릴 수는 없었지만 이대로 나가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고, 울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은하는 채 마시지 않은 커피가 담긴 잔을 집어 들었다.
“에이 씨!”
“악! 뭐야!”
식은 커피를 뒤집어쓴 김 사장이 펄쩍 뛰었다.
“쓰레기!”
“뭐, 뭐!”
놀라 까무러칠 것 같은 김 사장을 뒤로하고 은하는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얄밉게도 맑고 따뜻했다. 그 하늘을 향해 은하는 불퉁거렸다.
“아, 씨! 안 울어. 눈에 먼지 들어갔다고!”

시훈은 헛웃음을 흘리며 은하를 뒤따르다가 흠칫 놀랐다. 하늘을 치어다보는 그녀의 눈이 젖어 있었다. 어쭙잖은 위로는 취향이 아니었기에 건들거리며 걷는 그녀의 뒤를 묵묵히 뒤따랐다.
느닷없는 부아가 치밀면서 더는 그녀가 희롱당하는 것이 싫어서 대뜸 나섰다. 남자 친구라고 나타나 손을 잡아 이끌면 단박에 느끼한 남자가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즉흥적 판단은 명백한 오류였다. 아직도 팔이 얼얼하다. 하마터면 여자에게 팔이 꺾여 스타일을 구길 뻔했다.
어쨌거나 첫눈에 가슴을 달뜨게 했던 중성적이면서도 청순한 여성은 허무하게 요절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업무를 떠나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이윽고 대학교 어귀 후미진 곳에 자리한 나나도시락 가게 앞에 이르렀다. 간판은 세월의 이끼를 가득 얹고 있었고, 그나마 수북한 이팝나무 꽃에 태반이 가려져 있었다. 시훈은 은하에게 바짝 다가갔다.
“장은하 씨.”
그녀가 홱 돌아보았다. 이맛살 아래로 까맣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시훈의 얼굴이 담겼다. 시훈은 여기 온 목적을 급히 점검했다. 어차피 답은 정해졌다. 설득하는 과정은 시훈의 재량이다. 그녀가 가능하면 일찍 충격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소한 욕심을 품으며 은하를 도발했다.
“만약 이 가게 잃게 된다면, 그 옆으로 가게를 차려서 멋지게 복수하고 싶지 않나요?”
은하의 이맛살에 팬 골이 깊어졌다. 찌푸리는 일이 습관인 듯싶다. 그녀는 일반적인 호구 조사를 건너뛰며 묻는다.
“대왕도시락과 계약했다는 거, 어떻게 알았죠?”
“회사에 정보팀이 있습니다. 인사드립니다. 냠냠식품 전략기획실 한시훈 실장입니다.”

* * *


“……장은하 씨가 알고 있듯이, 냠냠식품은 어느 마트에서나 볼 수 있는 가공식품과 냉동제품이 주생산 품목입니다. 그런데 회사의 출발은 별맘도시락 매장이었죠. 도시락 매장의 노하우로 도시락 공장을 차렸고, IMF 때 무너지려는 식품 회사를 인수해 키운 게 바로 지금의 냠냠식품입니다. 그리고 도시락 공장에선 지금도 하루편의점에 도시락을 납품하고 있는데, 별맘도시락 매장은 공장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한시훈은 노트북에 저장된 이미지까지 동원하며 회사를 소개했다. 그러다 반응이 궁금했는지 잠시 말을 끊고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요?”
은하는 두 번째, 그렇게 응수했다.
“으음.”
시훈이 살짝 얼굴을 구기나 싶더니 다른 파일을 열었다.
“자, 여기를 보세요.”
국내 최고의 도시락 백화점인 ‘별맘’의 50여 가지 음식이 줄줄이 떴다. 은하에겐 익숙한 도시락들이었다.
“잘 살펴보면 하루편의점 도시락이 떠오를 겁니다. 하루편의점 신제품은 모두 별맘에서 검증을 거친 후 출시되니까요.”
은하가 별 반응을 안 보이자 시훈이 또 빤히 바라보았다.
“대단하죠?”
“알고 있어요.”
“안다고요?”
“도시락 가게를 하니 몇 번 가 봤어요.”
“진즉 말할 것이지.”
시훈이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본론입니다. 이제까지 직영점 딱 하나만 운영하던 별맘이 업무 편의상 도시락 공장과 가까운 이 지역에 분점을 차릴 계획입니다. 저희는 첫 번째 점장으로 바로 장은하 씨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본점 수습은 거쳐야겠죠?”
“그래서 본점에 취직하라는 거였나요?”
“네, 별맘 매장 메뉴와 시스템을 익히는 과정만 통과하면 무난히 점장이 되는 거죠. 바로 이곳 대왕도시락 근처에서.”
“결국 나나도시락 간판은 아니군요.”
“하지만 장은하 씨가 운영하는 매장이라면, 별맘 브랜드 파워에 더해 단골 학생들이 몰리겠죠? 그럼 대왕도시락은 금방 문 닫을 겁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저도 돕겠습니다.”
은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골몰했다. 가게 보증금은 얼마 되지 않는다. 빚을 갚느라 저축한 돈도 별로 없다. 이 근처에서 다른 가게를 얻으려면 권리금까지 줘야 했다. 권리금은커녕 시설비도 없는 처지라 가게를 이전할 계획은 일찌거니 접었다. 그래서 웃음과 수다를 짜내 김 사장에게 매달렸건만.
철수는 주방에서 저녁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쪽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었으리라. 과연 철수는 은하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며 오케이 사인을 하라고 채근했다. 은하는 모른 척하고는 시훈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여유로운 웃음이 묻어 있었다. 시원한 얼굴선과 허여멀쑥한 피부에 더해 지금 보니 볼우물까지 갖췄다. 문득 그가 마뜩잖았다.
“역시 나나도시락을 되찾아 준다는 건 아니네요.”
“아니, 장은하 씨. 내가 충분히 설명…….”
“됐어요.”
“뭐, 뭐가요?”
그의 여유로운 웃음은 단박에 증발했고, 그 자리로 낭패감이 들어찼다.
“됐으니 그만 가 보세요. 생각 좀 해 볼게요.”
“장은하 씨…….”
“남자가 말이 많습니다?”
상처받을 말이었나? 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은하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장사 준비해야 해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은하의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탐나는 조건이긴 하다. 하지만 수상한 제의다. 무엇보다 시훈을 신뢰할 수 없었다. 결정적인 단서도 있다. 그는 은하가 만든 음식을 먹어 보지도 않고 별맘 매장의 직원이며 점장을 들먹였던 것이다. 은하는 사뭇 차갑게 내뱉었다.
“장시훈 씨, 오늘은 그냥 가세요.”
“여기서 저녁 약속 있는데.”
은하는 멈칫하다가 곧 주방으로 걸어갔다.
“장은하 씨.”
은하가 뒤돌아보자 그가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나 말이죠. 한시훈입니다. 장시훈이 아니라.”
주방으로 들어가 앞치마를 걸치는데, 용기에 밑반찬을 담던 철수가 어색한 웃음을 남발했다. 벌써 10년이란 세월을 함께해서 잘 안다. 뭔가를 부탁하기에 앞서 은하의 비위를 맞출 때면 짓는 표정이다.
은하는 무시하고 냉장고를 열었다. 점심에 비해 저녁은 1/4 수준의 매출이다. 그래도 50식은 준비해야 했다. 도시락 메뉴는 다섯 가지 찬을 담지만 메인 요리에 따라 이름이 정해진다. 찜닭과 고등어김치조림 중 어느 것을 메인으로 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모처럼 두 가지 모두 준비하기로 했다.
조만간 문을 닫아야 할 처지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고 먹어 준 단골 학생들에게, 그동안의 고마움을 음식에 담고 싶었다. 루주는 진즉에 지워 냈는데도 비리고 짭조름한 맛이 입술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손으로 닦았다. 피였다.
“에이 씨!”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니, 씹고 있었다. 그렇게 피가 나도록 악물었는데도 서러움이 진정되지 않는다. 썰렁한 벌판이었던 곳에서 7년 동안 버텨 상권을 살려 놓았는데도 일방적으로 내쫓다니! 도중에 가게 영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월세는 빚을 내서라도 꼬박꼬박 냈는데도 말이다. 두 달 전만 해도 당연히 재계약을 해 줄 것 같던 건물 주인이었다. 가질 만큼 가져 놓고도 더 욕심을 부리는 그들이 밉다. 정말이지, 복수하고 싶다.
‘멋지게 복수하고 싶지 않나요?’
그 말의 주인을 휙 쳐다보았다. 한시훈은 메뉴판을 골똘히 살피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은하와 시선이 마주치자 갸웃하며 벽시계를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남자다. 시간이 남아돌면 도시락이나 먹어 보고 이야길 꺼낼 것이지.
“삼촌, 계란 좀 깨.”
“몇 개?”
“백 개.”
“뭐야, 계란말이까지 하려고?”
스크램블 에그와 함께 계란이 가장 많이 소모되는 메뉴다.
“깨라고!”
철수는, 망하려고 작정했냐는 타박 대신에 한시훈을 힐끔 쳐다본 뒤 수상한 웃음을 내 흘렸다.
“그, 그래. 손해 보더라도 멋지게 실력 발휘해 봐라.”
그러고 보니 철수는 시훈을 먼저 만났다. 가게를 찾아온 시훈에게 한 시간 있다 오라고 돌려보냈다 했다. 무슨 이야기라도 나눈 것일까? 태생이 무뚝뚝한 사람이 시훈에게 시종 애정이 담긴 시선을 날리는 중이다. 물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애정이지만.
은하는 닭과 고등어를 각각 솥에 얹은 뒤 울분을 지우고자 거칠게 도마질을 시작했다.

다다다!
엄청난 속도의 도맛소리에 시훈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홀에서는 은하의 상체만 보였지만 박력 넘치는 동작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4시 20분. 저녁 장사 준비를 하기엔 빠듯한 시간이다. 4시까진 시훈과 함께 앉아 있었기에 음식은 미리 준비해 놓은 걸 파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도마질한 야채를 이 솥, 저 솥에 휙휙 뿌리고 무언가를 프라이팬에 볶는 모습 하나하나가 곡예에 가까웠다. 그리고 요절한 청순미를 떠나서 진정 멋지게 느껴졌다. 무수히 보아 온 여느 조리사와 달리 장은하는 독특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요리에 몰입한 그녀는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덕분에 시훈은 편하게 그녀를 지켜볼 수 있었다.
“시원할 때 드시죠.”
언제 다가왔는지 검투사 같은 남자, 철수가 캔 음료를 내밀었다. 마개를 따서 손에 쥐여 주었다.
“참, 성함이…….”
“김철숩니다. 올해 서른일곱 살이고.”
정중해서 도리어 어색한 모양새를 하고 철수는 여덟 살 어린 시훈에게 머리까지 조아렸다. 청순하던 여자가 그러했듯이, 검투사도 그 순간 요절했다.
“5시부터 영업인 거죠?”
“네, 기왕에 오셨으니 꼭 우리 은하 음식을 잡숴 보십쇼.”
“음식을 모두 지금 만듭니까?”
“저녁은 그리합니다. 고등어조림 같은 건 식으면 비려서 맛없대요.”
철수는 양 손바닥을 쓱쓱 비비댔다.
“모쪼록 잘 부탁합니다.”
“부탁은 제가 해야죠. 장은하 씰 잘 좀 설득해 주세요.”
“실장님이 때를 잘못 맞춰 오셔서 그렇지, 실은 우리 은하, 부드럽고 참한 여잡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철수는 처음과는 달리 어눌한 말씨였다.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애써 말을 이어 간다는 느낌이다. 무슨 말인가를 더 하고 싶지만 딱히 생각이 안 나는지 음료수를 가리켰다.
“드십쇼.”
마침 갈증이 났기에 시훈은 죽 들이켰다. 주방으로 돌아간 철수는 은하에게도 캔 음료를 따서 주었다.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그것을 마셨다. 철수의 말소리가 시훈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은하야, 저 양반 맘 변하기 전에 한다고 해라.”
“흥, 저 사람 말 다 믿어?”
환풍기며 냉장고 소리 등으로 주방은 시끄럽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조용한 홀로 주방 사람들의 대화가 자칫 노출된다는 이치를 은하는 모르는 것일까.
“회사에서 높은 사람이잖냐. 인상도 좋고.”
“인상은 개뿔. 프로 접대 같더만.”
“야, 쉿!”
아슬아슬한 높이였다, 하지만 시훈의 귀에까지 이르기엔 충분한 소리였다.
‘프로 접대라면…… 설마 접대부?’
단언컨대 생애 가장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오 회장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당장 화를 내고 서울로 돌아갈 터였다.
꽈직!
시훈은 빈 캔을 거칠게 우그러뜨렸다. 그 소리에 응답하듯 주방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은하 역시 손안의 빈 캔을 한 손으로 우그러뜨린 채 시훈을 비리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성을 건드리는 호감은 진즉에 깨져 있었다. 더해서 그녀가 싫어지기 시작한다.
그때 출입문이 열리면서 스물네 살의 자칭 ‘미래의 요리왕’이 들어왔다.
“시식왕 김현준 대령했습니다.”
너스레를 떨며 김현준 대리가 앞으로 앉았다. 대부분의 회사 직원이 시훈을 어렵게 대하는 가운데 별맘도시락의 현준은 유일하게 형제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시식 목적으로 식당을 순회할 때면 늘 붙어 다니다 보니 정이 들었다.
이어서 버쩍 마른 체구의 긴 생머리의 여자가 가쁜 숨을 쉬며 들어왔다. 그녀는 시훈과 현준을 힐끔 보고는 주방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