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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도시락
3화


“은하야, 좀 늦었지?”
버쩍 마른 여자는 피망 앞치마를 걸치고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었다. 현준은 주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넋 나간 표정으로 뇌까린다.
“진짜 이쁘네.”
“흥! 그새 취향이 변했냐?”
현준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데도 진지하게 사귀는 사람은 없었다. 따지는 게 많은 현준에겐 당연한 결과이리라. 특히 그는 마른 유형의 여자를 기피했다. 현준이 주방에 붙박았던 시선을 서서히 돌렸다.
“제 거룩한 취미가 변하긴 왜 변합니까?”
“가만…… 예쁘다는 여자가 바가지 머리?”
“당연하죠.”
“으음.”
“얼굴도 예쁘지만 동작이 예술이죠?”
“신비롭고 청순하진 않고?”
시훈이 살짝 비꼬았다.
“맞아요! 실장님도 뭔가 아시네요. 완전 숨은 보석이죠?”
“숨은 보석까지야.”
“가공하지 않은 원석이죠. 참! 이름이 은하인가 봅니다?”
마른 여자가 들어오면서 한 번 불렀던 이름을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다.
“실장님 여자 친구분하고 이름이 같네요.”
다른 회사의 영양사로 근무하는 신은하는 여자 친구는 아니고 여자 동창 정도다. 정보 교환 문제로 통화를 자주 하는 편인데 별맘도시락 매장에서 두어 번 만나기도 했다.
현준이 다시금 주방을, 아니 은하를 쳐다본다.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기에 현준은 찌푸린 그녀의 이맛살과 매운 눈매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저 여잔 네가 감당 못 한다.”
시훈이 빈정거렸다. 현준이 애써 소리를 죽여 항변했다.
“제가 감당 못 할 건 또 뭡니까. 뭐, 비록 실장님 앞에 서면 오징어가 되긴 해도, 이래 봬도 냠냠식품 연수원 지원 갔을 때 신입 여직원 인기투표에서 짱 먹었습니다. 게다가…….”
시훈의 위아래를 짓궂게 훑어본 후 덧붙인다.
“전 지는 해가 아니라 막 떠오르고 있는 젊음도 가졌고요.”
그러고 보니 현준은 은하와 또래였다. 언뜻 스며드는 미묘한 감정을 털어 낸 뒤 시훈은 피식 웃었다. 예쁘고 신비롭고 청순한 숨은 보석과 이야기를 섞은 후에 현준이 보일 반응이 자못 궁금했다.
“근데 실장님, 피곤해 보이시네요.”
“실속 없는 프레젠테이션을 좀 했더니.”
갸웃하는 현준을 내버려 둔 채 주방으로 시선을 날렸다. 또 찡그린 이맛살과 마주하고 만다. 양쪽 허리에 손을 얹고 시훈을 바라보는 은하의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이내 눈빛으로 항변했다.
‘접대부라니!’
텅 비었던 가게가 5시 정각이 되자 와글와글 붐볐다. 방심하며 앉아 있었던 시훈 일행은 순식간에 길게 늘어선 줄 꽁무니에 서야만 했다.
큼직한 검은색 플라스틱 용기는 일회용이 아니었다. 도시락 모양을 갖춘 식판이나 진배없었다. 음식을 다 먹은 뒤 퇴식구로 용기를 가져다주는 시스템이다.
한참을 줄을 선 뒤에야 현준이 도시락을 받아 왔다.
“비주얼부터 죽여주네요.”
현준의 감탄과는 달리 시훈은 당황했다. 찜닭에 고등어조림만 해도 과한데, 무식할 정도로 커다란 크기의 계란말이 한 조각과 샐러드와 김치까지 담겨 있었다. 시식하기 전부터 한숨이 나온다. 메뉴판엔 다양한 도시락 사진이 담겼는데, 그 메뉴를 바탕으로 날마다 교체된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즉 주인이 정하고, 학생들은 그날의 메뉴를 사 먹는 식이다.
사천오백 원.
외관과는 달리 용기 속은 크지 않아 실제 들어간 음식 분량이 많지 않다고 해도, 또 재료를 저가로 구입하는 수완이 있다고 해도 이건 남기자고 하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날마다 줄을 서야 먹는다는 소문은 맛 때문이 아니라 물량 공세 덕분이란 말인가? 4년 전부터 장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바람에 단골을 죄다 잃었다가 2년 전부터 다시 성업 중이라고 들었다. 그 후유증으로 돈을 모으지 못한 줄 알았는데 딱히 그 이유만은 아닌 듯싶다. 현준이 컵에 물을 잔뜩 담아 왔다. 시식할 때면 연신 입을 헹궈야 했다.
“끝내주네요.”
첫 입부터 현준은 엄지를 척 세웠다.
“찜닭은 부드러우면서도 살이 뭉개진 게 없고, 고등어도 그럽니다. 맛에 더해 조리사 내공이 탄탄하단 증겁니다.”
“김현준 대리, 시식할 때 기본이 뭐지?”
“싱거운 음식순으로…….”
“머리는?”
“사심이 없어야…… 엥? 실장님, 전 음식으론 거짓말 안 합니다. 공사 구분 정돈 할 줄 안다고요. 실장님도 어서 드셔 보세요.”
“좀 식은 다음에.”
점심은 미리 조리해 놓고 판매하지만 저녁은 즉석요리라고 했다. 다른 도시락 매장과 비교해 시식하자면 동등한 조건에서 먹어야 맞다.
현준이 느긋하게 도시락을 비운 뒤에야 시훈은 젓가락을 집었다. 미지근한 닭이 부드럽게 씹힌다. 달달하고 칼칼한 양념이 속까지 잘 스며들어 있었다. 고등어조림을 먹을 때는 저절로 눈이 번쩍 떠진다. 얼추 식었는데도 비리지 않았다.
“온도 변화에 민감한 게 비린내 아닌가?”
뇌까리자 현준이 넙죽 받는다.
“생물은 가격이 안 맞으니 급속 냉동시킨 토막 고등어를 사 왔을 거고, 쌀뜨물에 해동해 향신료와 소주를 첨가해 조린 것 같습니다. 생강, 마늘 말고 은은한 나무 냄새 같은 것도 나죠?”
“응.”
“바질 같아요.”
“파스타에 넣는 그 바질?”
월계수 잎이나 정향은 이미 한식집에서도 흔하게 사용하지만 바질을 넣는 경우는 겪어 보질 못했다.
“가장 순한 향신료 중 하나인데도 어른들은 이상한 냄새 난다고 거부합니다. 근데 젊은 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해져서 거부감이 안 들죠. 게다가 있는 듯 없는 듯 딱 필요한 양만 넣었네요. 대단한 내공이죠.”
짐짓 부하 직원이 상사에게 보고하는 예의를 갖춘 말씨였다. 하지만 어깨에 들어간 힘은 빼지 않았다. 마치 여자 친구의 솜씨를 자랑하는 모양새다. 현준이 계란말이를 가리켰다.
“엄청 크게 말았어도 속하고 바깥 색이 같죠?”
조리법은 시훈도 알고 있다. 커다란 프라이팬에 한 번 말아서 다시 그 위로 계란 물을 씌우는 방식이다. 반복하면 팔뚝만 한 계란말이도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면이 같은 색으로 익도록 완성하기는 어렵다. 이렇듯 대단한 장은하가 갑자기 한심하게 여겨진다. 이 정도 실력이면 굳이 물량 공세를 하지 않아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으련만.
‘멍청한 여자!’
음식 솜씨는 인정하고 들어가겠지만 앞으로 그녀의 머리는 불신해야 할 듯싶다. 빅펌의 회계사로 몸담으며 익혔던 깐깐한 경제관은 조금 무뎌졌지만 주먹구구식 영업 방식은 여전히 경멸의 대상이다.
식사를 마치고 고개를 드니 현준이 씩 웃었다.
“실장님이 싹쓸이 시식하신 건 오랜만에 보네요.”
씹다 보니 겸손하게 숨어 있던 맛이 또 느껴져 자꾸 젓가락이 저절로 가다 보니 얼결에 말끔히 비웠다. 시훈은 이내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 도시락을 별맘 매장에 적용한 김현준 대리의 점수는?”
“85점입니다.”
현준에겐 후한 점수였다.
“사심을 빼면?”
“아, 사심 진짜 없이 85점이요.”
“마이너스 요소는?”
“트렌드 워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도시락 전성시대 이전에 편의점의 주 상품이었던 삼각 김밥은 편의성과 가격에 더해 트렌드로 먹고살았다. 한 달에 두세 가지씩 줄줄이 신상품을 출시해서 일회성 소비 심리를 자극했다. 도시락도 마찬가지다.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나트륨과 조미료를 넉넉히 첨가해 자극적인 맛으로 첫맛을 붙든다. 하지만 싫증이 빠르다는 단점이 따른다. 때문에 유행을 착안해 지속적으로 신상품을 출시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현준이 덧붙여 말했다.
“근데 여기가 대학생만 상대하는 가게라면 90점을 줄 수 있습니다.”
“메뉴가 올드해도 싫증이 안 난다?”
“그렇습니다. 덜 자극적으로 만들어 뒷맛이 좋잖습니까. 게다가 꼼수를 안 씁니다.”
“예를 들면?”
“찜닭만 해도 흔히 쓰는 캐러멜 색소를 첨가하지 않았습니다.”
“요즘도 캐러멜 색소를 쓰는 집이 있나?”
“족발이나 돈가스 소스, 자장 소스에다, 심지어 홍삼에도 첨가했단 뉴스도 나오잖아요.”
아직 쓰는 집이 있으니 식자재 도매상에 가면 잔뜩 쌓여 있으리라.
“샐러드와 오리엔탈 드레싱도 손님들의 건강을 위한 배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웰빙이라면 오일과 과일로 만든 드레싱이 더 낫지 않을까?”
“다이어트도 중요하죠. 실장님도 아시다시피 대부분 드레싱엔 마요네즈, 즉 식용유와 계란이 들어가 야채엔 없는 지방과 단백질을 보충해 주잖아요. 근데 단품이 아닌 이상 칼로리를 줄여 주는 게 요즘의 미덕입니다. 예쁜 조리사의 미덕이기도 하죠.”
아무래도 ‘예쁜 은하’가 만들었다는 사심을 배제하지 못한 것 같다. 상관없었다. 시훈이 원하는 것은 현준의 후한 점수일 뿐이다. 다시금 궁금하다. 매사에 공정성을 강조하던 오 회장이 견고한 기준을 깨고 시훈에게 일종의 청탁을 했다. 현준은 단지 명분을 위해 등장한 단역일 뿐이다. 오 회장과 시훈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현준에게 음식 평가를 맡긴 게 시훈에겐 다행이었다. 정말이지, 현장 짬밥도 없는 처지에 조리사를 평가하는 만용은 사양하고 싶었다.
가게는 아직 수선스러웠다. 퇴식구로 빈 도시락을 가져간 현준이 주방에 대고 뭐라 수작을 부렸다. 은하는 이마를 찡그리는 대신에 엷은 웃음을 지었다. 시훈에겐 인색하던 웃음을 현준에게 건넨다는 사실에 쓴웃음이 나왔다.
“실장님, 커피 드실 거죠?”
테이블로 돌아온 현준의 말에 시훈은 실내를 휘둘러보았다. 자판기 따윈 보이지 않았다. 현준은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참 뒤 현준은 근처 편의점의 원두커피를 안고 돌아왔다. 세 잔이었다. 한 잔은 은하에게 기어이 안겨 주고 돌아왔다.
“예쁜 여자가 입이 무겁네요.”
“뭐 하는 거니?”
“유능하고 예쁜 조리사에 대한 찬양의 증표로 커피를 대접했죠.”
대접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또 부아가 치민다. 접대가 생각난 탓이다.
“넌 직업이 프로 접대 같단 소릴 들으면 기분이 어떨 거 같니?”
“글쎄요. 냠냠식품 영업부 간부들 별명이 접대부 아닌가요? 뭐, 슬픈 별명이긴 하죠.”
“영업부 간부라…… 그런 의도로 내뱉을 수도 있겠군.”
애써 해석해 보니 조금은 기분이 풀렸다. 내친김에 장은하에게 연방 헛발질한 이유를 분석해 보고 싶었다.
“김현준, 진지하게 하나 묻자.”
“네, 진지하게 대답해 드리죠.”
“요컨대 네가 가게를 하다가 다 까먹고 실업자 신세가 됐어. 그때 별맘도시락 경력 사원 특채 제의가 들어오면 어떡할래?”
“죽어도 고고죠.”
“보너스로 분점 점장 자리 보장이라면?”
“닥치고 감사합니다죠.”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인데, 만약 그런 제의를 껌딱지 취급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이율까?”
“뭐, 별맘 파워를 모르거나…… 제의를 한 사람이 이라또라서 마음에 안 들었겠죠.”
“이라또는 또 뭐냐?”
“어! 실장님 모르세요? 거꾸로 하면…….”
“또라이…….”
시훈은 휙 시선을 돌려 은하를 쳐다보았다. 왜 그녀가 낯익어 보였는지 이제 알겠다. 그녀는 과연 초면이 아니었다.

* * *


예상한 50식을 넘어 추가로 준비한 15식마저 품절되었다. 은하는 친구이며 알바생인 수지의 설거지를 돕고자 세척기로 몸을 돌렸다. 철수가 가로막으며 홀의 시훈을 가리켰다.
“설거지는 나한테 맡기고 빨리 가 봐라.”
“제길, 생각할 시간도 안 주고 죽치고 있네.”
“가서 말조심하고.”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믿어 봐. 삼촌 안목도 믿고.”
“흥, 안목이 뛰어나셔서 사채 알선 전화에 넙죽 넘어가 개고생 하셨나?”
“야, 옛날이야기잖니! 아까 보니 도시락도 깨끗이 비웠더라.”
김현준이 빈 용기를 가져왔을 때 은하도 곁눈질로 확인했다. 두 사람 모두 말끔히 비웠다. 그 점이 없던 호감을 살짝 생겨나게 했다. 무엇보다 은하도 인정하고 있는 별맘도시락의 김현준 대리에게 소감을 듣고 싶었다. 맛있게 먹었다는 칭찬에 이어 커피를 공수해 온 현준은 명함까지 건네주었다.
그는 모르겠지만, 은하는 그를 알고 있다. 매장에 갔을 때 시원시원하게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사복 차림으로 나타났어도 기억할 수 있었다. 결국 주방을 나와 주춤주춤 다가갔다. 현준이 반색하며 벌떡 일어나 너스레를 떨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러고 보니 현준은 같이 커피 타임을 갖자고 제의했었다. 잔은 이미 각각 비웠지만. 현준이 일어나 시훈 곁으로 앉았다. 그런 현준을 시훈이 툭 쳤다.
“김현준 대리는 나가서 기다려.”
“아니, 실장님!”
“어서!”
“네.”
맥없이 대답하며 일어난 현준이 은하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잠깐 나갔다 다시 올게요. 그래도 되죠?”
은하는 시훈을 한 번 노려본 뒤 현준을 향해 살짝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준이 반색하고는 돌아섰다. 지켜보던 시훈이 벌레 씹은 얼굴을 하다가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은하가 앉자마자 그가 자못 진지하게 말한다.
“음식 맛이 좋더군요. 하지만 연달아 신제품을 풀어 대는 대왕도시락을 압도하려면 별맘도시락에서의 경험이 요긴할 겁니다.”
“어차피 나나도시락 간판은 아니잖아요.”
“또 그 이야기군요. 달리 대책이 있습니까?”
“당장은…… 없지만 돈을 모아서 되찾으면 되죠.”
“그 돈, 별맘에서 벌고, 별맘 점장이 돼서 버세요. 현실을 좀 직시하고 이 기회에 원가 계산이며 마진율도 처음부터 배우고 말입니다.”
어쩐지 꾸짖는 말 같다. 은하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기에 넘어갔다.
“나중에 돈 모아서 나나도시락 간판으로 독립하면 놓아주나요?”
“평양 감사도 자기가 싫다면 할 수 없죠.”
역시 처음 대화할 때처럼 허황돼 보인다.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에 뛰어드는 회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훈이 소속된 회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이 안 된다. 눈이 마주친 그가 호소했다.
“절 믿으십시오.”
“못 믿겠는데요.”
즉각적인 대답에 시훈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제 신분이 의심스럽다면 회사로 직접 찾아와 확인해 보세요.”
“제가 한시훈 씰 못 믿는 이유를 알고 싶어요?”
“말해 봐요.”
“경솔해 보였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가 발끈했다. 역시 칭찬에만 익숙한 삶을 살았나 보다.
“내가 만든 음식도 안 먹어 보고 한시훈 씬 조리사니 점장 스카우트를 들먹였어요.”
“그, 그래서…… 나 원!”
그가 이마를 쳤다. 이어서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군요.”
“늙으신 그쪽보단 당연히.”
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써 화를 삭이는 모양새로 부드럽게 말한다.
“장은하 씨, 난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잡아 가는 관리직일 뿐입니다. 요리는 이론을 공부했어도 현장 경험은 미진해요. 조리사가 아닌 제가 어떻게 조리사를 냉정하게 평가합니까? 그래서 장은하 씨에게 어느 정도의 경력 프리미엄을 주고 모셔야 하는지 알고자 전문 조리사를 불렀습니다.”
“그럼 김현준 조리사가 온 건…….”
“제가 불러서 서울에서 여기까지 달려왔죠.”
문득 시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적어도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 후 도시락을 먹어 보았다. 그가 적이 볼멘소리로 호소한다.
“나, 경솔한 사람 아닙니다.”
예민한 사람이겠지. 미안하다는 말이 안 나와 계면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이젠 믿을 수 있나요?”
은하는 주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철수는 오케이 사인을 열심히 날리고 있었다. 철수가 아닌 주방 자체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조리사가 아닌 입장이라 조리사를 냉정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시훈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찬찬히 시훈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양팔을 늘어뜨리며 무언가를 마쳤다는 한숨을 토했다.
“그럼 구체적으로 서로가 원하는 것을 교환해 봅시다.”
“잠깐 삼촌하고 상의 좀 할게요.”
은하가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장은하 씨.”
그가 불러 돌아보았다.
“나도 이십 댑니다.”
은하가 갸웃하자, 그가 덧붙인다.
“늙진 않았죠.”
키 큰 사람은 싱겁다는 낭설을 갑자기 믿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