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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 그대 안에 1권
1화
#Prologue
서울과 수도권 지역 전체를 연결해 주는 외곽 순환 도로 동부 구간. 폭주족이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나들목 주변에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오늘은 또 안 오는 거 아냐?”
“불금을 그냥 넘겼으니 오늘은 나타날 거야.”
커피를 나눠 마시던 두 경찰관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굉음에 시선을 교환했다.
“맞지?”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재차 강조하는 동료에게 피식 웃어 준 첫 번째 경찰관은 곧장 운전석에 올랐다. 두 번째 경찰관 역시 조수석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하지만 차 문을 열기도 전에 멈춰 서야만 했다. 바로 곁을 지나간 빨간색 포르쉐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탓이다.
“빨리 타.”
“저 차 맞나? 처음 보는 차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대며 차에 오르는 동료에게 첫 번째 경찰관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어디서 또라이 하나 더 스카우트했나 보지.”
얌전히 서 있던 경찰차에 시동이 걸리고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한 찰나, 또 다른 폭주 차량 한 대가 그 곁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 기세에 눌려 잠시 숨을 고르던 경찰관은 심호흡을 한차례 하고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무서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던 포르쉐가, 눈도 한 번 깜박하기 힘든 찰나의 순간에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으며 뒤집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포르쉐는 자신을 사랑해 준 주인을 배신이라도 하려는지,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회전하고 있는 바퀴를 하늘로 치켜든 채 날렵하게 내리뻗은 차 지붕으로 도로를 가로질렀다.
포르쉐를 추격하는 것처럼 보였던 SUV 차량이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멈춰 섰다. 곧이어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길게 늘이며 달리던 경찰차도 멈췄다.
각자의 차에서 뛰어내린 세 남자는 경주하는 사람들처럼 중앙 분리대를 넘어 달려갔다.
“해은아!”
절규하듯 내지르는 윤성의 목소리는 공허한 도로 위에서 충돌하는 곳 하나 없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공중에서 발을 젓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새빨간 포르쉐 옆에 도착한 그는 미친 듯이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앞 유리를 뚫고 튀어나온 아내의 모습이 그로 하여금 발광하도록 만든 것이다. 무전기를 들고 지원을 요청하는 경찰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윤성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내지르고 있는 울음소리만이 고막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세 도착한 구급차에서 쏟아져 나온 주황색 유니폼들이 아내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윤성은 망연자실한 채 바라보았다.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사고 현장을 살펴보던 경찰 하나가 물었다. 윤성은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했다. 경찰은 곁에 선 남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제야 눈에 들어온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아서다.
‘어?’ 경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금 상대의 얼굴을 쳐다봤다. 인제 보니 이 사람, 연예인이다. 바로 얼마 전 떠들썩한 결혼식을 치른 가수 겸 배우.
‘그렇다면 저 여자는…….’
궁금증을 꾸역꾸역 내리누르며 경찰관은 남자를 주시했다.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꽉 쥔 주먹과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떨고 있는 어깨, 후들대는 다리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 서성이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경찰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인 후에야 제대로 된 소리 한마디를 뱉어 냈다.
“제 아내…….”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 적고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음주하신 건가요?”
집을 나서기 직전에 그녀가 들고 있던, 반 이상 마셔 버린 위스키병이 떠올랐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고개를 갸우뚱하던 경찰은 남은 질문을 하려다가 차체에서 끌려 나오고 있는 운전자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일단 병원으로 가 봐야 정확한 사인(死因)을 알 수 있겠지만, 중앙 분리대에 충돌할 때 벌써 경추와 두개골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구조대원 중 한 명이 이쪽을 보며 말하고 있지만, 윤성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사고 현장 주변을 밝힌 헤드라이트 속에 누워 있는 해은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시선을 돌리려 해도 돌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바로 뒤를 따라 달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에 있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왔던 거라면 아마 그는 자신의 아내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피와 알 수 없는 액체로 범벅이 된 아내는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 수도 없을 만큼 처참했다. 뱃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흐느낌을 ‘끄억끄억’ 내뱉으며 그는 그녀의 곁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경찰과 구급대원들은 ‘사랑하는 아내를 불의의 사고로 잃은 불쌍한 남자’ 윤성의 울음에, 안타까운 한숨으로 깊은 공감을 표했다.
앞서 달리며 구급차를 에스코트하던 경찰차는 고속 도로를 벗어나서야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멍한 눈으로 차창 밖을 보고 있던 윤성은 조수석에 앉은 경찰이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부인, 이해은 씨 핸드백과 소지품입니다. 아까 그 차에 있던…….”
윤성은 경찰이 건넨 것을 받아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격렬하게 다투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귓가를 때렸다.
*
“이해은. 말은 똑바로 하자.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단지 남자가 필요한 거겠지.”
술에 취한 채 끈적하게 들러붙는 아내의 팔을 떼어 낸 그는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남은 말을 읊조렸다.
“나가서 다른 남자 찾아봐.”
“오빠 어쩜 그렇게 말을 해? 난 오빠 아내야! 우린 부부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저급한 말을 할 수가 있어?”
뻔뻔스럽게 받아치는 그녀의 악다구니에 그는 기가 막힌 듯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결혼 생활 7개월 동안 숱한 루머를 만들어 내며 밖으로 나돌던 아내가 갑자기 각방 대신 그의 침대에 함께 들기를 원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그는 허리에 짚고 있던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어릴 때부터 그를 동경했다던 그의 아내가 정작 흠모했던 것은 ‘서정호텔그룹의 둘째 며느리’라는 타이틀이었다.
‘오빠가 호텔 일에 관심을 보이면, 그땐 나도 남편에게 관심이 생길 것 같아.’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본심을 드러낸 그녀는 호기롭게 ‘각방’을 선언했다. 애초에 아내의 협박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결혼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 갔다. 밤을 꼴딱 새우며 음악 작업을 하기도 하고, 두 달씩 소요되는 지방 촬영을 흔쾌히 수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비난을 가만히 당하고 있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녀가 원했던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고, ‘돈’을 제공해 주고, 궁전처럼 넓은 집을 양보해 준 대가로 ‘저급하다’는 비난이라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각방을 요구했던 것도 그녀였고,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사람 역시 그녀였지만, 처가 식구들에겐 어느새 윤성이 그런 ‘천하에 없을 나쁜 놈’이 되어 있었다.
“난 오빠만 있으면 되는데, 그저 기댈 수 있는 남편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거 하나도 못 해 주겠단 거야? 정말, 사람이 어쩜 그러니.”
정확하지도 않은 발음으로 주절주절 읊어 대는 대사를 보니 내일 아침 일찍 장모의 전화를 받게 될 것 같다.
‘강 서방, 자네 갈수록 실망이야. 어쩜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르나!’
딸의 새빨간 거짓말에 가슴을 치며 밤잠을 설치게 될 장모에게 위로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오늘 이 상황이 어떻게 둔갑할지는 충분히 예상된다.
한창 작업 중인 그를 다급하게 불러들인 이유가 고작 이런 거짓 부부 놀음이었다면, 더는 머무를 필요가 없다. 그는 심호흡한 다음 차분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자라.”
“어디 가?”
해은이 놀라 물었지만, 윤성은 입을 꾹 다문 채 현관으로 향했다.
“아직 얘기 안 끝났어, 한 발짝만 더 움직여! 그땐 정말 끝이야!”
윽박지름에도 윤성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결혼 7개월 만에 ‘초야’를 요구하고 있는 그녀의 꿍꿍이가 궁금했지만, 윤성은 꿋꿋이 신발에 발을 꿰고 현관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마당 안을 한 바퀴 휘돌아 나간 뒤에야 윤성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다. 가면 놀이 같은 지긋지긋한 쳇바퀴질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는 것이, 그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 테니까.
대문 앞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탄 그는 망설임 없이 시동 버튼을 눌렀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발에 서서히 힘을 빼고 차를 출발시키려던 찰나, 눈에 익은 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새빨간 스포츠카는 마치 총구를 벗어난 총알처럼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
어느새 어스름하게 밝아 오는 새벽.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끊이지 않던 종합병원 주차장에도 잠깐의 평화가 찾아왔다.
주차장 입구 근처에 세워진 SUV 한 대도, 이제 잠잠해졌다. 쿵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있는 힘껏 질러 대는 고함도 이따금 흘러나왔지만, 지금은 조용하다.
죄책감을 자학으로 덜어 보려 발악하던 윤성은 운전석 시트에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고개를 들 수도 없을 만큼 진이 빠져 버린 터라 눈동자를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눈동자가 멈춘 곳은 조수석이다.
해은의 차에서 찾아낸 물건들이 담긴 봉투와 핸드백.
‘부인의 핸드백과 소지품입니다.’
경찰관이 했던 말이다.
부인, 남보다 더 멀게 느껴지던 여자, 그의 부인. 선뜻 손을 뻗을 수 없게 만드는 두려운 존재. 그런 그녀의 핸드백조차도 그에겐 두렵기만 하다. 바닥까지 다 드러냈던 해은의 또 다른 비밀을 알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윤성은 한동안 그 물건들에 시선을 빼앗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힘겹게 시선을 들어 넓은 주차장을 뜨문뜨문 오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고 싶어서다. 가능하다면 열어 보지 않고 그대로 처가 식구들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한참을 더 망설이던 그는 마침내 핸드백으로 손을 뻗었다.
자잘한 소지품들을 뒤적이던 그의 손끝에 단단한 촉감의 물건이 잡혔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스틱을 꺼내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스쳤다. 핸드백을 잠시 더 뒤지던 그는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하자 핸드백과 함께 받았던 반투명한 비닐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가 예상한 물건을 비닐봉지에서 발견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고 있는 코팅된 표지에는 감흥 없는 고딕체의 글씨가 박혀 있었다.
제일 산부인과
해도 뜨지 않은 조용한 주차장에, 마치 짐승의 것과도 같은 포효 소리가 두세 번 울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주차장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은 잠시 그 소리에 놀란 듯 멈춰 서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언제나 맑음
11개월 후, 서울
“서다인! 자료실에 꿀단지 묻어 놨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다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선배, 그게…….”
입은 자동으로 변명을 주절댔다. 하지만 그녀를 부른 사람은 선배가 아니라 동기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동기에게 다인은 오만상을 찌푸려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야, 박시준! 너 요즘 덜 맞아서 몸이 근질근질한가 보다. 어?!”
앙칼진 목소리로 동기에게 쏘아붙인 그녀는 너무 놀라 떨어트릴 뻔했던 A4 용지들을 다시 야무지게 정리했다. 그러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선배에게 필요한 자료 복사본보다 당장 내일 치를 시험공부가 더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추락하겠네. 웬 한숨이 그렇게 길어?”
정신과 레지던트의 일과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 새삼스레 묻고 있는 동기를, 다인은 밉살스럽다는 듯 노려봤다.
“시험 준비 해야 하잖아. 너야 만날 농땡이 부리는 게 일과니까 별로 와닿지도 않지?”
“우린 기습이 없잖아. 우리 병원에 너네처럼 기습 쪽지시험 보는 과는 아마 없을걸.”
시준이 사실을 되짚어 주자 다인의 입에선 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쪽지시험만 있냐? 회진 돌다가 교수님 필 받으시면 퀴즈 대회 해야지, 어느 날 갑자기 의국에 들이닥치셔서 면담 상황극 해 보자 그러시지, 툭하면 세미나에, 툭하면 토론까지 아주 미칠 지경이다.”
기다렸다는 듯 푸념을 늘어놓는 다인에게 시준은 되레 타박했다.
“그러니까 나 바꿀 때 같이 바꾸자고 했잖아. 김영지 교수님 얼마나 깐깐한데, 겁도 없이 덤비더니.”
다인은 한심한 표정으로 동기를 바라봤다. 왜 굳이 ‘깐깐한 김영지 교수’ 밑에서 공부를 해야만 하는지 수도 없이 설명했지만, 그새 또 잊었나 보다. 또다시 설명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그녀가 내려야 할 층이다. 다인은 망설임 없이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서다인!”
의국으로 향하는 복도에 날카롭게 울리는 목소리는, 이번에는 진짜다. 다인은 빠르게 발을 움직여 선배 앞으로 달려가며 대답했다.
“네! 자료실에 꿀단지는 없어요. 단지 복사기가 좀 말썽을…….”
“이리 내! 한나절이야 한나절, 요즘 정신없는 거 알면서. 가서 밥 먹고 와.”
알밤을 놓는 시늉을 하며 나무라던 민영의 말투는 뒤로 갈수록 누그러졌지만 다인은 주눅 든 표정으로 쭝얼댔다.
“그, 내일 시험공부…….”
“밥부터 먹고 나중에 책상에 노트 놔둘 테니까 좀 한가해지면 그거 봐.”
벌써 반쯤 몸을 돌린 민영의 제안에 다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어우, 언니야 고마워.”
민영은 등에 착 달라붙어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다인의 팔을 풀어내며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친자매보다 더 돈독한 사촌 동생을 챙기는 일은, 민영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민영은 짐짓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럴 때만?”
“항상! 늘! 평생!”
다인의 과장된 표정과 목소리에 민영은 실소를 터뜨리며 의국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의 뒤통수에 대고 경례하는 시늉까지 끝낸 뒤에야 다인은 돌아섰다. 아무래도 구내식당은 미처 끝내지 못했던 면담 한 건을 해결해 놓고 가야겠다. 좋아하는 일은 늘 마지막에 해야 성취감이 더 크니까 말이다.
뭔가를 먹는다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다인은 습관처럼 스텝을 밟았다.
“아, 다인아.”
의국으로 들어갔던 민영이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를 지르자 다인은 흠칫 놀라 발을 멈췄다.
“어? 아니, 네?”
투스텝을 추고 있던 발이 엉키며 휘청했지만 다행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다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언니에게 되돌아갔다.
“좀 전에 교수님 전화하셨어. 4시쯤부터는 방에 계신다고 너 찾으면 보내라고 하시던데, 너 또 나 모르게 사고 친 거 아니지?”
“아니!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뭐지? 왜? 왜 찾으시는 거지? 나도 모르는 새에 나 뭔 짓 했나?”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다인 때문에 민영의 눈꼬리도 걱정스럽게 늘어졌다.
“일단 교수님께 먼저 가 봐.”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바꿔 준 민영은 다인이 발을 떼자마자 황급히 붙잡으며 도리질을 쳤다.
“아니다, 그럴 게 아니라 밥부터 먹고 가. 나랑 같이 가자. 너 혼자 두면 또 안 먹을 거 아냐. 고모한테 또 혼나긴 싫어.”
손목을 잡고 이끄는 사촌 언니의 뒤를 따르며 히죽거리던 다인은 느닷없는 교수의 호출이 떠오르자 금세 또 기가 죽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대체 왜 찾으시는 거지.”
“글세. 근데 너 요즘 며칠은 제법 잘했으니까 뭐, 혼날 일은 아닐 거야. 너무 걱정은 하지 마.”
1화
#Prologue
서울과 수도권 지역 전체를 연결해 주는 외곽 순환 도로 동부 구간. 폭주족이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나들목 주변에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오늘은 또 안 오는 거 아냐?”
“불금을 그냥 넘겼으니 오늘은 나타날 거야.”
커피를 나눠 마시던 두 경찰관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굉음에 시선을 교환했다.
“맞지?”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재차 강조하는 동료에게 피식 웃어 준 첫 번째 경찰관은 곧장 운전석에 올랐다. 두 번째 경찰관 역시 조수석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하지만 차 문을 열기도 전에 멈춰 서야만 했다. 바로 곁을 지나간 빨간색 포르쉐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탓이다.
“빨리 타.”
“저 차 맞나? 처음 보는 차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대며 차에 오르는 동료에게 첫 번째 경찰관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어디서 또라이 하나 더 스카우트했나 보지.”
얌전히 서 있던 경찰차에 시동이 걸리고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한 찰나, 또 다른 폭주 차량 한 대가 그 곁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 기세에 눌려 잠시 숨을 고르던 경찰관은 심호흡을 한차례 하고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무서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던 포르쉐가, 눈도 한 번 깜박하기 힘든 찰나의 순간에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으며 뒤집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포르쉐는 자신을 사랑해 준 주인을 배신이라도 하려는지,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회전하고 있는 바퀴를 하늘로 치켜든 채 날렵하게 내리뻗은 차 지붕으로 도로를 가로질렀다.
포르쉐를 추격하는 것처럼 보였던 SUV 차량이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멈춰 섰다. 곧이어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길게 늘이며 달리던 경찰차도 멈췄다.
각자의 차에서 뛰어내린 세 남자는 경주하는 사람들처럼 중앙 분리대를 넘어 달려갔다.
“해은아!”
절규하듯 내지르는 윤성의 목소리는 공허한 도로 위에서 충돌하는 곳 하나 없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공중에서 발을 젓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새빨간 포르쉐 옆에 도착한 그는 미친 듯이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앞 유리를 뚫고 튀어나온 아내의 모습이 그로 하여금 발광하도록 만든 것이다. 무전기를 들고 지원을 요청하는 경찰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윤성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내지르고 있는 울음소리만이 고막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세 도착한 구급차에서 쏟아져 나온 주황색 유니폼들이 아내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윤성은 망연자실한 채 바라보았다.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사고 현장을 살펴보던 경찰 하나가 물었다. 윤성은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했다. 경찰은 곁에 선 남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제야 눈에 들어온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아서다.
‘어?’ 경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금 상대의 얼굴을 쳐다봤다. 인제 보니 이 사람, 연예인이다. 바로 얼마 전 떠들썩한 결혼식을 치른 가수 겸 배우.
‘그렇다면 저 여자는…….’
궁금증을 꾸역꾸역 내리누르며 경찰관은 남자를 주시했다.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꽉 쥔 주먹과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떨고 있는 어깨, 후들대는 다리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 서성이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경찰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인 후에야 제대로 된 소리 한마디를 뱉어 냈다.
“제 아내…….”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 적고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음주하신 건가요?”
집을 나서기 직전에 그녀가 들고 있던, 반 이상 마셔 버린 위스키병이 떠올랐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고개를 갸우뚱하던 경찰은 남은 질문을 하려다가 차체에서 끌려 나오고 있는 운전자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일단 병원으로 가 봐야 정확한 사인(死因)을 알 수 있겠지만, 중앙 분리대에 충돌할 때 벌써 경추와 두개골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구조대원 중 한 명이 이쪽을 보며 말하고 있지만, 윤성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사고 현장 주변을 밝힌 헤드라이트 속에 누워 있는 해은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시선을 돌리려 해도 돌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바로 뒤를 따라 달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에 있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왔던 거라면 아마 그는 자신의 아내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피와 알 수 없는 액체로 범벅이 된 아내는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 수도 없을 만큼 처참했다. 뱃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흐느낌을 ‘끄억끄억’ 내뱉으며 그는 그녀의 곁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경찰과 구급대원들은 ‘사랑하는 아내를 불의의 사고로 잃은 불쌍한 남자’ 윤성의 울음에, 안타까운 한숨으로 깊은 공감을 표했다.
앞서 달리며 구급차를 에스코트하던 경찰차는 고속 도로를 벗어나서야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멍한 눈으로 차창 밖을 보고 있던 윤성은 조수석에 앉은 경찰이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부인, 이해은 씨 핸드백과 소지품입니다. 아까 그 차에 있던…….”
윤성은 경찰이 건넨 것을 받아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격렬하게 다투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귓가를 때렸다.
“이해은. 말은 똑바로 하자.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단지 남자가 필요한 거겠지.”
술에 취한 채 끈적하게 들러붙는 아내의 팔을 떼어 낸 그는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남은 말을 읊조렸다.
“나가서 다른 남자 찾아봐.”
“오빠 어쩜 그렇게 말을 해? 난 오빠 아내야! 우린 부부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저급한 말을 할 수가 있어?”
뻔뻔스럽게 받아치는 그녀의 악다구니에 그는 기가 막힌 듯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결혼 생활 7개월 동안 숱한 루머를 만들어 내며 밖으로 나돌던 아내가 갑자기 각방 대신 그의 침대에 함께 들기를 원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그는 허리에 짚고 있던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어릴 때부터 그를 동경했다던 그의 아내가 정작 흠모했던 것은 ‘서정호텔그룹의 둘째 며느리’라는 타이틀이었다.
‘오빠가 호텔 일에 관심을 보이면, 그땐 나도 남편에게 관심이 생길 것 같아.’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본심을 드러낸 그녀는 호기롭게 ‘각방’을 선언했다. 애초에 아내의 협박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결혼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 갔다. 밤을 꼴딱 새우며 음악 작업을 하기도 하고, 두 달씩 소요되는 지방 촬영을 흔쾌히 수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비난을 가만히 당하고 있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녀가 원했던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고, ‘돈’을 제공해 주고, 궁전처럼 넓은 집을 양보해 준 대가로 ‘저급하다’는 비난이라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각방을 요구했던 것도 그녀였고,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사람 역시 그녀였지만, 처가 식구들에겐 어느새 윤성이 그런 ‘천하에 없을 나쁜 놈’이 되어 있었다.
“난 오빠만 있으면 되는데, 그저 기댈 수 있는 남편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거 하나도 못 해 주겠단 거야? 정말, 사람이 어쩜 그러니.”
정확하지도 않은 발음으로 주절주절 읊어 대는 대사를 보니 내일 아침 일찍 장모의 전화를 받게 될 것 같다.
‘강 서방, 자네 갈수록 실망이야. 어쩜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르나!’
딸의 새빨간 거짓말에 가슴을 치며 밤잠을 설치게 될 장모에게 위로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오늘 이 상황이 어떻게 둔갑할지는 충분히 예상된다.
한창 작업 중인 그를 다급하게 불러들인 이유가 고작 이런 거짓 부부 놀음이었다면, 더는 머무를 필요가 없다. 그는 심호흡한 다음 차분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자라.”
“어디 가?”
해은이 놀라 물었지만, 윤성은 입을 꾹 다문 채 현관으로 향했다.
“아직 얘기 안 끝났어, 한 발짝만 더 움직여! 그땐 정말 끝이야!”
윽박지름에도 윤성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결혼 7개월 만에 ‘초야’를 요구하고 있는 그녀의 꿍꿍이가 궁금했지만, 윤성은 꿋꿋이 신발에 발을 꿰고 현관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마당 안을 한 바퀴 휘돌아 나간 뒤에야 윤성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다. 가면 놀이 같은 지긋지긋한 쳇바퀴질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는 것이, 그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 테니까.
대문 앞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탄 그는 망설임 없이 시동 버튼을 눌렀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발에 서서히 힘을 빼고 차를 출발시키려던 찰나, 눈에 익은 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새빨간 스포츠카는 마치 총구를 벗어난 총알처럼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어스름하게 밝아 오는 새벽.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끊이지 않던 종합병원 주차장에도 잠깐의 평화가 찾아왔다.
주차장 입구 근처에 세워진 SUV 한 대도, 이제 잠잠해졌다. 쿵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있는 힘껏 질러 대는 고함도 이따금 흘러나왔지만, 지금은 조용하다.
죄책감을 자학으로 덜어 보려 발악하던 윤성은 운전석 시트에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고개를 들 수도 없을 만큼 진이 빠져 버린 터라 눈동자를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눈동자가 멈춘 곳은 조수석이다.
해은의 차에서 찾아낸 물건들이 담긴 봉투와 핸드백.
‘부인의 핸드백과 소지품입니다.’
경찰관이 했던 말이다.
부인, 남보다 더 멀게 느껴지던 여자, 그의 부인. 선뜻 손을 뻗을 수 없게 만드는 두려운 존재. 그런 그녀의 핸드백조차도 그에겐 두렵기만 하다. 바닥까지 다 드러냈던 해은의 또 다른 비밀을 알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윤성은 한동안 그 물건들에 시선을 빼앗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힘겹게 시선을 들어 넓은 주차장을 뜨문뜨문 오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고 싶어서다. 가능하다면 열어 보지 않고 그대로 처가 식구들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한참을 더 망설이던 그는 마침내 핸드백으로 손을 뻗었다.
자잘한 소지품들을 뒤적이던 그의 손끝에 단단한 촉감의 물건이 잡혔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스틱을 꺼내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스쳤다. 핸드백을 잠시 더 뒤지던 그는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하자 핸드백과 함께 받았던 반투명한 비닐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가 예상한 물건을 비닐봉지에서 발견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고 있는 코팅된 표지에는 감흥 없는 고딕체의 글씨가 박혀 있었다.
제일 산부인과
해도 뜨지 않은 조용한 주차장에, 마치 짐승의 것과도 같은 포효 소리가 두세 번 울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주차장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은 잠시 그 소리에 놀란 듯 멈춰 서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언제나 맑음
11개월 후, 서울
“서다인! 자료실에 꿀단지 묻어 놨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다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선배, 그게…….”
입은 자동으로 변명을 주절댔다. 하지만 그녀를 부른 사람은 선배가 아니라 동기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동기에게 다인은 오만상을 찌푸려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야, 박시준! 너 요즘 덜 맞아서 몸이 근질근질한가 보다. 어?!”
앙칼진 목소리로 동기에게 쏘아붙인 그녀는 너무 놀라 떨어트릴 뻔했던 A4 용지들을 다시 야무지게 정리했다. 그러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선배에게 필요한 자료 복사본보다 당장 내일 치를 시험공부가 더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추락하겠네. 웬 한숨이 그렇게 길어?”
정신과 레지던트의 일과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 새삼스레 묻고 있는 동기를, 다인은 밉살스럽다는 듯 노려봤다.
“시험 준비 해야 하잖아. 너야 만날 농땡이 부리는 게 일과니까 별로 와닿지도 않지?”
“우린 기습이 없잖아. 우리 병원에 너네처럼 기습 쪽지시험 보는 과는 아마 없을걸.”
시준이 사실을 되짚어 주자 다인의 입에선 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쪽지시험만 있냐? 회진 돌다가 교수님 필 받으시면 퀴즈 대회 해야지, 어느 날 갑자기 의국에 들이닥치셔서 면담 상황극 해 보자 그러시지, 툭하면 세미나에, 툭하면 토론까지 아주 미칠 지경이다.”
기다렸다는 듯 푸념을 늘어놓는 다인에게 시준은 되레 타박했다.
“그러니까 나 바꿀 때 같이 바꾸자고 했잖아. 김영지 교수님 얼마나 깐깐한데, 겁도 없이 덤비더니.”
다인은 한심한 표정으로 동기를 바라봤다. 왜 굳이 ‘깐깐한 김영지 교수’ 밑에서 공부를 해야만 하는지 수도 없이 설명했지만, 그새 또 잊었나 보다. 또다시 설명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그녀가 내려야 할 층이다. 다인은 망설임 없이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서다인!”
의국으로 향하는 복도에 날카롭게 울리는 목소리는, 이번에는 진짜다. 다인은 빠르게 발을 움직여 선배 앞으로 달려가며 대답했다.
“네! 자료실에 꿀단지는 없어요. 단지 복사기가 좀 말썽을…….”
“이리 내! 한나절이야 한나절, 요즘 정신없는 거 알면서. 가서 밥 먹고 와.”
알밤을 놓는 시늉을 하며 나무라던 민영의 말투는 뒤로 갈수록 누그러졌지만 다인은 주눅 든 표정으로 쭝얼댔다.
“그, 내일 시험공부…….”
“밥부터 먹고 나중에 책상에 노트 놔둘 테니까 좀 한가해지면 그거 봐.”
벌써 반쯤 몸을 돌린 민영의 제안에 다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어우, 언니야 고마워.”
민영은 등에 착 달라붙어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다인의 팔을 풀어내며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친자매보다 더 돈독한 사촌 동생을 챙기는 일은, 민영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민영은 짐짓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럴 때만?”
“항상! 늘! 평생!”
다인의 과장된 표정과 목소리에 민영은 실소를 터뜨리며 의국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의 뒤통수에 대고 경례하는 시늉까지 끝낸 뒤에야 다인은 돌아섰다. 아무래도 구내식당은 미처 끝내지 못했던 면담 한 건을 해결해 놓고 가야겠다. 좋아하는 일은 늘 마지막에 해야 성취감이 더 크니까 말이다.
뭔가를 먹는다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다인은 습관처럼 스텝을 밟았다.
“아, 다인아.”
의국으로 들어갔던 민영이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를 지르자 다인은 흠칫 놀라 발을 멈췄다.
“어? 아니, 네?”
투스텝을 추고 있던 발이 엉키며 휘청했지만 다행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다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언니에게 되돌아갔다.
“좀 전에 교수님 전화하셨어. 4시쯤부터는 방에 계신다고 너 찾으면 보내라고 하시던데, 너 또 나 모르게 사고 친 거 아니지?”
“아니!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뭐지? 왜? 왜 찾으시는 거지? 나도 모르는 새에 나 뭔 짓 했나?”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다인 때문에 민영의 눈꼬리도 걱정스럽게 늘어졌다.
“일단 교수님께 먼저 가 봐.”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바꿔 준 민영은 다인이 발을 떼자마자 황급히 붙잡으며 도리질을 쳤다.
“아니다, 그럴 게 아니라 밥부터 먹고 가. 나랑 같이 가자. 너 혼자 두면 또 안 먹을 거 아냐. 고모한테 또 혼나긴 싫어.”
손목을 잡고 이끄는 사촌 언니의 뒤를 따르며 히죽거리던 다인은 느닷없는 교수의 호출이 떠오르자 금세 또 기가 죽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대체 왜 찾으시는 거지.”
“글세. 근데 너 요즘 며칠은 제법 잘했으니까 뭐, 혼날 일은 아닐 거야. 너무 걱정은 하지 마.”